신비한 탄생 예수 탄생 대축일보티첼리(1445-1510)는 ‘비너스의 탄생’(1468)과 ‘봄’(1477-1478)을 그린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화가이다.지그재그로 된 길이 끝나는 곳에 ‘신비한 탄생’의 장소가 있다.예수님은 어디에서 태어나셨는가?동굴인가? 마구간인가?마태오 복음사가는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동굴에서 탄생하시길 원했을 것이다.또 루카 복음사가는 가난한 이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오신 예수님을마구간에서 태어나게 했을 것이다.그래서 보티첼리는 신비한 탄생의 장소를동굴에 마구간을 덧대어 표현한 것 아닌가?그림의 중심에는 마구간이 있고,마구간에는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 예수님이 있다.무릎을 꿇은 마리아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있고,요셉은 잠을 자고 있다. 그는 늘 꿈속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으니까.마리아를 바라보는 아기 예수님의 움직임이 큰 것도 시선을예수님께 모으기 위한 작가의 배려 아닌가?마구간의 주인인 소와 나귀는 신비한 탄생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목격한다.또한 오른쪽에는 가난한 이들을 대표하는 두 목동이천사의 인도로 신비한 탄생을 목격한다.재미있는 것은 천사가 목동의 머리를 돌려그분의 탄생을 억지로라도 보게 하려는 것이다.그리고 왼쪽에는 이방인을 대표하는 동방박사 세 사람도천사의 인도로 신비한 탄생을 목격한다.재미있는 것은 천사가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적힌 깃발을들고 있는 것이다.하늘에서는 열두 천사가 완벽함을 상징하는 원을 이루고 춤을 추며 돌고 있다.그들의 손엔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 가지가 있고왕관 열두 개가 하늘로부터 내려오고 있다.이로써 예수님은 평화의 임금으로 오셨으리라.지붕위의 세 천사도 삼각 구도로 무릎을 꿇어 구세주의 탄생을 노래한다.그들은 믿음의 색인 백색과사랑의 색인 홍색과희망의 색인 녹색을 입고 있다.이 세 가지 색깔이 성탄의 색인 것도 예사롭지 않다.또한 보티첼리는 그림의 밑 부분에 사람과 천사의 만남 장면을 첨가함으로써예수 탄생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표현했다.예수 성탄이기 위해 당신 자신을 죽이는 밥이 되셨습니다.동학의 교주인 해월 최시형 선생은, “누가 한울님이십니까?”하는 제자들의 질문에, “밥이 한울님이시다.” “밥이 하늘이다.”는 외마디를 남겼습니다.사실, 밥의 뿌리를 찾으면 하느님까지 연결됩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우리의 밥은 무엇입니까? 엄마의 젖입니다. 우리는 엄마를 먹고 살았습니다. 모든 어머니는 모든 자식한테 ‘밥’이 되는 것입니다.싹을 우리의 젖줄이라고 하는데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럼 우리 어머니는 누굴 먹었습니까? 할머니.할머니는? 할머니의 어머니. 할머니의 어머니는?할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 이렇게 위로 올라가면 맨 위에 있는 어머니는 누구입니까? 그분은 바로 하와 할머니입니다. 그런데 그 하와는 아담과 함께 하느님께서 코에 생명을 불어 넣으셨기에 생명을 가졌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모든 밥 중에 가장 높은 밥, 맨 처음 밥이신 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그런데 하늘이요, 생명이며, 주님이신 밥을 마구 구박하고 짓밟고 있는 것이 요즘 세상입니다. 밥을 천대하는 사회란 달리 말하면, 쌀을 생산하는 농민들이 천대받는 사회를 말합니다. 농사꾼이 하는 일과 국회의원이 하는 일 중에서 어느 일이 중요합니까? 농사꾼이 하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국회의원쯤 없어도 농사꾼이 살 수 있지만 농사꾼이 없으면 국회의원뿐 아니라 대통령, 의사, 선생, 신부, 예술가, 상인, 사장, 노동자 등 모든 사람이 자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농자 천하지 대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농민은 어떠합니까? 가장 존경받고 대우 받아야 할 그들이 오히려 가장 업신여김을 당하고 천대를 받으며 이 잘난 선진국을 살리기 위해 일방적으로 희생만을 요구당하는 밥이 되었습니다.「어떤 일이 있어도 쌀만은 개방하지 않겠다.」고 자신 있게 말하던 정부가 농민들을 밥으로 알고 「쌀 개방 불가피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문민정부라 하며 큰 기대감을 가졌던 우리 농민들을 더욱 가슴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일찍이 땅만 가지고 있는 우리 농 했습니다. 전례준비다, 성탄의 밤 준비다, 기도, 말씀 준비다, 트리 장식이다 하며 왔다 갔다 하다 보니 크리스마스가 정신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눈이 내리면 길바닥이 얼어 걱정을 하면서도 낭만의 화이트 X-mas를 노래했고, 시끄럽고 정신없는 밤에 예년과 같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불렀습니다. X-mas는 정말이지 너무 형식적입니다. 즐겁고 신나야하는 X-mas가 그저 그럴 뿐입니다.저는 X-mas를 즐기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었고, 단념하기엔 너무 젊고, 빠져들기엔 너무 냉소적이고, 초연해 있기에는 너무 가난합니다. 그래서 소리쳤습니다. “주님, 왜 이다지도 X-mas가 엉망이 되었습니까?”그랬더니 “바로 너 때문이다.”라는 메아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렇습니다. X-mas가 형식적이고 별 의미 없이 느껴졌다면 문제는 저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은 변함없이 우리 마음속에 새로 태어나시려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열정을 주시기 위해 오늘 새로이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밥으로 오신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보면 “우리를 위하여 태어날 한 아기, 우리에게 주시는 아드님은 포대기에 쌓여 구유에 누워 있습니다.”그렇다면, 구유는 무엇입니까? 여물통입니다.여물통이 뭡니까? 여물통은 가축이 먹는 음식을 담는 통입니다.주님께서 구유에 누우셨다는 말은 그분이 밥통에 누우셨다는 말씀이고 밥통에 들어 있으니 그분이 밥이 되셨다는 말씀입니다.밥이란 무엇입니까? 남은 살리고 저는 죽는 존재. 아니, 남을 살리기 위해 저는 죽어가는 존재가 밥입니다.예수님은 당신을 가리켜 ‘생명의 빵’이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빵을 우리네 식으로 말하면 밥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 “내가 밥이다.”고 하셨으며, 이 밥을 먹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우리가 밥을 먹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죽습니다. 그러니까 밥은 우리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떨어지고, 농민들은 수지가 안 맞아 농사를 때려치우고 도시로 대량 나갈 것입니다 그러면 600만 농민은 도시 빈민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뿐만 아니라, 122만 명이 종사하는 농업관련 산업역시 무너지고 맙니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가 식량 자급을 못하면 우리는 영구적인 식민지로 전락해 버린다는 것입니다.걸프전에서도 식량을 무기화 한 적이 있습니다. 또한 지금은 쌀이 남아돌아가지만 기상이변이 생겨 곡물 작황이 극히 안 좋아지면, 곡물가격이 제멋대로 폭등할 우려가 있기에, 식량 안보차원에서도 쌀과 기초 농산물은 당연히 지켜내야 합니다.그런데 정부는 “쌀 수입 개방의 불가피함만을 국민들에게 인식시키려고 애를 쓰며, 농민들을 살리는 근본적인 대책은 마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X-mas가 되도 기쁘지 않고 그저 냉랭할 뿐입니다. 희망을 잃은 채 그냥 형식적으로 X-mas를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밥이 천대받는 세상“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어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은 ”밥“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6,41의 말씀처럼 주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밥입니다.주님은 이렇게 거꾸로 된 세상을 바로 잡으려고 밥으로 오셔서 그때 당시의 “밥”이었던 사람들과 동무가 되어,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과 함께 지내고, 그들의 아픈 상처를 치유해 주시고, 그들을 살려 주셨습니다.형제 여러분!우리는 우리를 살려주시는 주님이 우리의 밥으로, 우리의 생명으로, 우리의 희망으로 우셨기에 결코 좌절할 수 없습니다. 결코 한숨만 쉴 수 없습니다. 결코 슬퍼할 수 없습니다.이 밤은 밥이 천대받는 이 사회에, 우리가 천대받는 이 세상에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밥으로 오신 그분이 새로이 태어나신 밤이기에 기쁨으로 충만 된 밤이며,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소리 높여 노래 할 수 있는 밤입니다.이런 밤을 두고 제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우리의 기쁨, 그리고 우리들의 부푼 가슴이 모인 오늘, 오늘은 여러분께 이 말은 하고 싶습니다. 오늘은 여러분께 이 말는 고급 옷, 메이커 옷만을 원했습니다.그러나 마구간에 태어나신 당신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거친 짚으로 여린 살을 맡겼습니다.저는 고급 차, 큰 차를 타고 다닙니다.그러나 마구간에 태어나신 당신은 굴러다닐 수도 없는 좁디좁은 구유에 누워 계십니다.저는 편안한 집, 넓은 집을 희망합니다.그러나 마구간에 태어나신 당신은 바람이 숭숭 들어가는 초라한 마구간에 몸을 뉘였습니다.물론 저의 집은 아니지만 새 성전을 지을 때 최고의 재질로, 최고급의 화려한 성전을 지었다는 것이 마구간에 태어나신 당신을 보면서 부끄럽게 생각됩니다. 그리고 당신이 원하시는 성전이 과연 이런 모습일까도 생각해봅니다.하지만, 이 성전만은 당신께 드리는 우리의 믿음임을 잊지 말아주소서.오늘,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신 이여!부끄럽습니다.제가 하는 일 조금 잘 된다고,제가 원하는 대로 일이 된다고,제가 하는 일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 좀 받는다고으시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난 당신을 보면서 느낍니다.그리고 제 자신이 얼마나 높은 사람에 길들여져 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저는 높은 분, 있는 분들과 어울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진정 높디높은 당신은 작디작은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저는 젊은 사람, 예쁜 사람과 이야기 하는 것을 더욱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아기의 모습으로 험한 목동들에게 먼저 찾아 오셨습니다.저는 인정받는 일, 소득이 있는 일만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아기의 모습으로 마구간에 태어나신 당신은 아무에게도 인정받지도 못하고 소득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물론 전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내가 형제들에게 먹을 것을 베풀 때 마치 자기의 것을 주는 양 뻐기고 폼 잡던 것이 부끄럽게 생각됩니다.내가 거저 받은 것을 다시 돌려주는 것임을 모른 채 교만하게 행동했던 제 자신이 아기로 오신 당신 앞에서 초라하게 느껴집니다.오늘 구유에 누워계신 이여!부끄럽습니다.구유가 뭡니까? 소 여물통입니다. 짐승 밥통입니다.밥통에 뉘인 당신은 밥입니다.저는 밥이 되지 못여러분,
예수님의 수난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나해)한스 멤링(1430~1494)은 예수님의 수난을 독창적으로 한 화폭에 묘사했다.그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부터 부활에 이르는 장면을한 눈으로 볼 수 있게 했다.그런데 그림의 배경은 예루살렘이 아니라그가 살았던 중세 유럽 도시의 풍경이다.그의 그림을 보노라면 마치 숨은 그림을 찾는 것처럼 재미있다.그림의 시작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다.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고,사람들은 자기의 겉옷을 길에 깔기도 하고,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깔기도 한다.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그곳에서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쫓아내시며 말씀하신다.“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다.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군중이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자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그분을 없앨 방법을 찾는다.그때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려고그들을 찾아간다.유다가 그들 한 가운데 서 있는 게 인상적이다.무교절 첫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하신다.다른 제자들은 예수님 편에 앉아있지만 유다만은 그분 맞은편에 앉아 있다.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신다.“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또 잔을 들어 이르신다.“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그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 산으로 간다.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에서 공포와 번민에 싸여 맨발로 기도하신다.“아버지!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그러나 제자들은 자고 있다.괴로워 죽을 지경인 예수님을 위해 단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한다.그러자 유다가 칼과 몽둥이를 든 무리들과 함께 다가온다.예수님은 유다의 입맞춤으로 붙잡힌다.그때 베드로가 칼로 대사제의 종을 내리쳐 그의 귀를 잘라 버린다.그들은 예수님을 대사제에게 끌고 간다.대사제가 “당신이 메시아 메아리가 체 가시기도 전에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죽여 버리시오” 라고 미친 듯이 외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군중들이 하는 책임 없는 행동들입니다.하여,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십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때리는 자에게 등을 맡기며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턱을 내밉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보며 업신여기고 머리를 끄덕이며 삐쭉거립니다. “아버지께 의탁했으니, 구해 주시겠지. 그를 사랑했으니, 빼내 주시겠지.” 하며 조롱합니다. 개떼처럼 악한 무리들이 예수를 에워쌉니다. 그들은 예수의 손과 발에 못을 박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겉옷을 나눠가지고 속옷을 놓고서 제비를 뽑았습니다.그 순간 예수님은 도살당하는 자기, 죄악의 제물이 된 자기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깜짝 놀라면서 사람이 된 자기 모습을 거기서 보았습니다. 온 인류가 세상이 시작된 때부터 하느님을 등지고 계속 범죄한 모든 죄과를…….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하느님께 퍼붓는 온갖 모독을……. 지금부터 세상 끝날 때까지 사람의 아들들이 나를 더럽힐 온갖 더러움과 저주를……. 온 인류를 대신하여 그 모든 것을 한 몸에 짊어져 더러워진 자기, 세상에서 가장 보기 싫은 극악무도한 죄인이 되어버린 자기를 보았습니다.그러나 그 순간에도 그분은 자비를 잃지 않고 죄인들의 친구가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에서 여인들을 만나 그들을 위로해 줍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버림받고 멸시 당하던 사람들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이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통 중에서도 버림받고 멸시당하는 여인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십니다. 그리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군인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십자가 위에서까지 회개하는 죄인을 용서해 주십니다.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에서까지 죄인과 버림받은 사람들을 돌보시고 용서하시는아니요.” 그들은 실망하여 돌아가서 “저 사람을 십자가에다 못 박읍시다.”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술 먹은 사람 몇이 있다가 “좋아, 좋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모였던 사람들은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고 함께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들에게 잡혔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겁쟁이라서 모두 도망을 쳤습니다. 예수님이 잡힌 것에 비해서 제일 고소해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그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 대제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싫어한 이유는 주님의 인기가 대단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말씀도 잘 하시고 거짓말을 안 하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말만 번드르르하게 할 뿐 실제로는 속이 텅 빈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주님은 군인들에 의해서 손이 묶이고 등을 몇 차례 얻어 맞으셔서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습니다. 나쁜 군사 하나가 주님의 머리를 때려서 피가 조금 비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묶어 가지고 대제관의 집으로 갔습니다. 주님은 거기서 침 뱉음을 받으시고 매도 맞으시고 가시관도 쓰셔서 이마에는 피가 주르르 흘러 내렸습니다.그들은 다음날 주님을 빌라도 총독에게 끌고 가서 엉터리 재판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십자가형이 부여되었습니다. 주님은 무겁고도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 산을 향하여 가셨습니다. 어찌나 십자가가 무겁던지 세 번씩이나 넘어지셨습니다. 결국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쏟으시고는 그것도 부족하셔서 가슴을 창으로 찔리시어 나머지 피를 몽땅 쏟으시고는 숨을 거두셨습니다.“오, 불쌍한 예수님, 아무 죄도 없으신 분이우리들의 죄 대신 지셨으니예수님, 우리들의 은총이신 주님,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92‘04.12)창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다해)예수님의 죽음을 그린 루벤스(1577~1640)의 “창”은 뼛속까지 사무치는 슬픔을 느끼게 한다.그림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윗부분은 십자가에 처형된 세 사람이 보이고아랫부분에는 처형된 죄수들의 러자 예수님은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 하십니다. 이 말의 뜻은 "자 이제 어서 빨리 그 일을 하여라."입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단지 그가 돈을 관리하였기 때문에 명절을 준비하기 위해 심부름을 보내시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유다가 빵 한 조각을 받아먹자마자, 마귀가 곧 유다 안으로 들어갔다고 하는 표현은 유다에게 한 예수님의 마지막 사랑의 호소가 오히려 스승을 팔고자 하는 마음, 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을 굳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유다는 빵을 받은 뒤에 곧바로 밖으로 나갑니다. 그때는 밤이었습니다. 이 문장은 매우 짧은 문장이지만 심오한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 표현은 해가 저물어 어두운 밤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을 떠난 유다에게는 또 다른 어두운 밤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사람이 예수님을 떠나서 자신의 길을 향할 때 거기에는 언제나 밤이 있습니다. 사람이 선한 소명에 응하기보다 악이 부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거기에는 언제나 밤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예수님에게서 계속해서 둥을 돌릴 때 거기에는 언제나 죽음의 밤이 휘돌게 됩니다.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지 않고 변함없이 예수님을 따를 때에는 찬란한 광명을 만나고 예수님의 뜻이 내 안에 어떻게 하면 항상 머무를 수 있을까를 묵상하며 매일같이 그 가르침을 실천하며 살아갈 때에는 영원한 생명의 빛을 얻을 것입니다.형제 여러분!예수님을 배반한 사람, 예수님을 팔아넘긴 사람, 예수님을 죽인 사람은 예수님과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도 우리의 탐욕과 욕심을 채우려 할 때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예수님을 죽일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캄캄한 밤을 만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캄캄한 밤에서 언제든지 벗어날 수 있는 묘책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유다는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베드로도자기를 살리려는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래서 그들 아주 제한되어 있어서 집마다 개인 소유의 뜰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개인의 정원을 예루살렘 성 밖인 키드론 골짜기에 갖고 있었습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어떤 친구가 주님에게 그의 정원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지낼 때에는 저녁에 그의 정원으로 가서 조용히 기도하는 것이 습관이었습니다. 유다는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는 유대인들의 밀사들을 그 곳으로 안내할 것을 제의했습니다.이렇게 함으로써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주님을 잡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유다가 제공해 준 정보의 대가로 그에게 은화 30개, 즉 노예 한 명의 몸값에 해당되는 돈을 주었습니다. 시간이 되었을 때 이들은 주님을 잡기 위해 한 떼의 남자들과 성전 경비병을 유다에게 보냈습니다.이들은 혼잡으로 말미암아 이들의 계획이 실패하지 않도록 암호를 짜 두었습니다. 유다는 입 맞추는 것으로써 주님을 알리도록 했습니다.(마태오 26,47-50, 마르고 14,43-45, 루가 22,47f). 이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입맞춤은 제자가 그의 선생님에게 늘 행하는 인사법이었기 때문입니다.이와 같이 유다의 배신에 의하여 주님은 체포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처음에 주님을 체포할 때에 유다는 명백히 주님을 잡는 일에 있어서 지도자였는데 그 사건이 끝날 무렵에는 그는 이미 그 현장에 없었습니다. 유다에게는 어떤 일이 곧 발생했음이 틀림없습니다.신약성서는 유다의 말로에 대하여 두 가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한 가지는 그가 대사제들에게 사서 그들에게 그 돈을 되돌려 주려고 했다는 것과 그들이 그 돈을 받을 것을 거절했을 때에 그 돈을 그들의 발 앞에 던지고 밖으로 나와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는 것과(마태오 27,3-5), 그가 그 돈으로 밭을 샀는데 어떤 무서운 사건으로 그가 죽었다는 것입니다.(사도 1,18) 하여간 유다에게 있어서 그의 종말은 실패한 인생과 상한 마음 뿐이었다는 것
예수 성심 대축일(C해)루가복음 15,3-7말씀1“누구의 마음은 좋다” 또 “누구는 마음이 고약하다” 할 때, 그 “마음”이란 살아서 움직이는 우리 모두의 제각기 다른 살아있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마음”이란, 한 인간의 성품의 샘이고, 행동의 바탕이며, 그 사람의 됨됨이를 나타냅니다.그러기에 어떤 사람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의 인격과 품위를 안다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의 마음씨는 어떠하며, 어떤 마음을 바랍니까? 아마 내게 실수가 있을 때 상대방이 나를 용서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 아량이 넓은 마음을 바라고, 어려움이 있을 때는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힘들 때는 베풀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입니다.그리고 교만한 마음보다는 겸손한 마음을, 거칠은 마음 보다는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을, 좁은 소견에 이기심 가득한 마음보다는 없는 속에서도 오고갈 수 있는 점이 가득 찬 열린 마음을 더 바랄 것입니다.그렇게 바라는 마음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가 바라는 대로 너희가 먼저 해 주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마태오 11,29절에서 표현하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했습니다.그러기에 주님의 마음은 오늘 복음의 말씀처럼 99마리의 양을 버려두시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매시는 마음이십니다. 또한 잃었던 아들을 찾으시며 조건 없이 기꺼이 맞아들이시며 기다리시는 마음이며, 또한 7번뿐 아니라 7번의 70번까지도 용서하시고자하시는 마음이며, 십자가 위에서는 당신의 손과 발에 대못을 박는 군인을 용서해달라고 울부짖던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인 것입니다.사실상 예수님은 당신을 찾고 회개하는 죄인을 항상 따뜻하게 사랑으로 대해 주셨습니다. 간음녀 막달레나를, 탐관오리 자캐오를 그렇게 대해 주셨고, 나임의 과부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 동정의 눈물을 흘리셨고, 당신의 마음을 외면하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셨으며, 십자가의 수치스러운 죽음을 통해서 당신 목숨까지 우리 죄의 대속물로 내어주신 마음이며, 성체성사 안에서 이제는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밀떡과 포도주 형상으로까지 당신 자신을 낮추사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내려오시고, 그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마음입니다.그래서 그러한 주님과 함께 지냈고, 그 말씀들을 듣고 봄으로써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체험한 사도 요한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힘 있게 우리에게 소개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 자체이시기에 우리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예수님 앞에 안심할 수 있고 다시 힘을 가질 수 있고, 회개하여 새로운 삶을 찾고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형제 여러분!마음이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의 마음은 어떠하며 어떤 마음을 바랍니까? 우리의 마음은 자신에게는 후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박합니다. 그러면서 남이 나에게 후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자기가 바라는 대로 자기가 먼저 해 주는 마음을 가지라고 명령하십니다.또한 예수님의 마음은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더 기뻐하시는 마음이란 걸 명심합시다.우리는 죄투성이 인간 죄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 덩어리이신 주님의 마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노래합니다. 예수 마음 겸손하신 자여, 내 마음을 내 마음을 변화시키사 네 성심과 네 성심과 같게 하소서. 아멘.(92‘06.26)말씀2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고 하면, “사랑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어 당신 자신을 제물로 봉헌하셨으며,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당신의 피와 물을 하나도 남김없이 우리를 위해 흘리셨기 때문입니다.오늘은 주님의 마음, 즉 사랑의 마음을 배울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의 시를 읽어드리겠습니다.주님, 당신의 사랑을 배울 수 있게 제 마음을 주님의 마음처럼 넓혀주십시오.타산과는 먼 거리에서 관대하게 자신을 내어줄 수 있도록 인간의 필요 앞에 제 마음을 열어주십시오.진정 용서할 수 있도록 상처 입은 이 마음을 열어주십시오.모든 대화가 사랑의 나눔이 되고 제가 입을 열 때 타인을 받아들이도록 먼저 마음을 열어주십시오.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일에 기진하여 마음을 닫아버리고 싶어집니다. 이런 때에도 변함없이 제 마음을 열어주십시오.일치를 이루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수 있도록 제 마음이 모든 이에게로 다가가게 해주십시오.어떤 사람과도 따스하게 사귀도록 제 마음을 열어주십시오.사람을 이해하고 나와 다른 생각까지도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이 되게 해주십시오.사람을 소중히 여기려는 열심이 식지 않도록 은혜가 흐르는 계곡을 향해 제 마음을 열어주십시오.제 마음을 열어 회생을 꺼리지 않는 마음이 되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의 사도인 제 행실을 보고 사람들이 주님께로 마음을 열게 될 것입니다.제 마음을 열어 온 인류의 구원을 바라는 교회의 마음처럼 넓어지게 해주십시오. 인간을 위한 봉사가 한정된 굴레 안에 머물지 않게 하렵니다. 아멘.예수 성심 성월1. 예수 성심이란 무엇인가?예수 성심이란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다.우리들 때문에 창에 찔리신 예수님의 심장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고 우리 죄를 아파하시는 예수님의 인격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기관이고 예수님의 영혼에 그리고 천주 성자위에 결합되어 있어 공경의 대상이 된다.그래서 예수 성심은 붉은색의 심장 모양으로 표현하고 심장은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사랑의 표상이다. 심장의 불꽃이 타오르거나 가시가 둘러쳐진 그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예수성심)을 상징한다.2. 예수 성심의 기원6월은 예수 성심 성월이다. 예수 성심의 공경과 봉헌은 교회의 공식 인정을 받기 이전부터 그리고 전례 안에 확고히 자리를 잡기 이전에 이미 교회의 품속에서 발생하여 수많은 신자들이 실천해 온 것이다. 예수 성심 공경의 탁월한 선구자는 프랑스 신심생활의 대혁신자인 요한 에우데스(1601~1680)였다. 1765년에 와서 폴란드 주교들의 추천에 힘입어 교황 끄레멘스 13세가 그곳에만 제한적으로 예수 성심 전례를 허용하였으며, 1856년 약 1백년 후 교황 비오 9세가 전세계 교회로 예수 성심 공경을 확대시켜 나갔다.
형이상학의 문제 출현과 제 철학자들의 문제 해결에 대해 약술하라.단적으로 말해 형이상학의 역사에 대해 충분히 기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선택과 취합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방법론 또한 문제가 된다. 역사적 순서대로 쓸 것이냐, 학자 중심으로 쓸 것이냐, 어떤 학설의 맥을 따라 쓸 것이냐. 또 불가피한 것이 있다. 이 문제에 있어서 객관적인 기술을 기대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철학사를 일별하는 데에 있어서 누구도 완전히 공정한 입장에 서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사다난했던 형이상학사가 보여주듯, 진리는 하나이지만 그 진리에 접근하는 방법은 학자마다 독특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따라서 본론에서 쓰일 주제 중심의 기술이 이 문제를 다루는 충분한 방법이 아님을 미리 밝혀두는 바이다. 그러나 본인이 굳이 이 방법을 선택한 것은 형이상학사를 볼 때, 같은 학설들의 맥 안에 있는 학자들 안에서 발견되는 유사점은 시대의 차이를 뛰어넘어 형이상학의 본질적인 문제사를 보여준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1. 형이상학 문제의 출현초기 그리스 사상가들이 철학적 사유를 시작했을 때 그들이 자문했던 최초의 물음은 ‘실재는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는가?’였다. 이들이 이렇게 물은 까닭은 우리가 어떤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다른 것과 본성상 동일하다고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어떤 이는 물, 흙, 불 등을 이야기하였고 파르메니데스는 존재를 이야기하였다. 여기서 본격적인 형이상학적 문제가 출현하게 된다. 그는 이 문제 제기로 형상학적 사변의 궁극적 한계 가운데 하나로 남을 문제로 형이상학적 사변을 단번에 이끌어 갔다. 파르메니데스는 실존과 존재를 완전히 동일화하여 존재는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하고 변화도 없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변화되는 세상은 하나의 현상, 환영일 뿐이라는 이상하지만 불가피한 결론을 이끌어 내었다. 그리고 이는 많은 철학자들을 곤경으로 몰아넣었다. 왜냐하면 존재란 무엇이동일성의 폐지는 자기의 소멸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기 동일성의 교설 내에서 존재는 필연적으로 단일하고 동질적이며 변화에서 면제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있다는 것은 같은 것이다.’가 성립한다. 그리고 그는 파르메니데스의 신탁인 ‘안다는 것은 알려지는 것과 똑같다.’를 재진술한다.그런데 그에게서 참된 존재라는 것의 징표가 자체성, 자기 동일성인 한, 하나의 이데아를 하나의 이데아이게 해주는 어떤 것이 요구된다. 그리고 플라톤에 따르면 이를 위해서는 이 하나의 이데아가 통일성이나 같음을 분유해야만 한다. 이 문제는 플라톤으로 하여금 이데아들을 이데아이게 하는 그 어떤 것을 사유하게 하였고, 그는 이 어떤 것을 존재 너머에 있는 것 혹은 선이라고 부름으로서 존재 너머의 것을 사유하는 형이상학을 열었다.플로티누스는 존재 너머에 있는 최고의 원리를 설정하고 이을 일자이자 선이라고 말한다. 이 최고의 원리는 개별자들이 지니는 통일성의 근원이자 원인이라는 점에서 일자이고 모든 존재를 유출한다는 점에서 선이라 불린다. 이로부터 형이상학의 제 1원리는 일자가 되고, 존재는 일자로부터 유출된 것인 한에서 제 2원리에 불과하게 된다.파르메니데스, 플라톤, 플로티누스로 이어지는 실존을 배제한 순수 철학적 전통은 존재를 신으로 이해하는 그리스도교 사상과 만나면서 변화를 겪고 플라톤주의자로서 그리스도교적 신을 다루는 사상가들 - 마리우스 빅토리누스, 디오니시우스, 요한 스코투스, 에크하르트 등)을 출현시켰다.2. 아리스토텔레스 - 실체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을 규정짓는 핵심 개념은 ‘실체’ 개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적 대상으로의 구체적 존재에서 출발하지만 그에게는 자연철학적 경향과 플라톤적 경향이라는 두 가지 면이 있다. 그는 실체를 참된 존재 곧 우시아라고 본다. 이런 우시아는 사물의 활동성(제2현실)을 지배하는 원리(제1현실)라는 점에서 본성이라고도 불려진다. 이런 본성이라는 점에서는 본성의 내적인 핵에 해당하는 실존이 주제시 되어야 하나, 그는 이런 문제에 대한 탐한다. 그는 자신의 이런 플라톤적 경향을 개별화의 원리가 질료라고 말함으로써 벗어나려 했으나, 이런 시도 안에는 지극히 실재적인 형상을 가장 비실재적인 질료를 통해 실재적으로 한다는 역설이 숨어있다.실존을 전제한 채 형상 내지 이것과 질료의 결합체인 실체만을 논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에 그 계승자에 해당하는 아베로에스는 실체를 현실적 실재로 이해한다. 실존이 본질에 우연히 발생하는 아비켄나의 교설에 맞서, 그는 현실적 실재로의 실체는 이미 통일성과 실존을 갖추고 있는 것이므로 그 실체 내에서 실존이 별개로서 고려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파악 가능한 존재에 있어서 존재를 하나이게 하는 그 존재의 실체가 그 존재를 존재이게 하는 esse라고 말한다. 따라서 아베로에스에게는 실체=하나=esse=ens의 등식이 성립한다. 아비켄나는 가능적 존재의 현실적 실존을 설명하기 위해서 본질에 실존이 우연히 발생한다고 보고, 현실적 존재는 자체적으로는 가능적이고 다른 것으로부터는 필연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아베로에스는 어떤 것이 필연적이면서 가능적이라는 것은 모순으로 성립될 수 없고, 창조된 것인 한에서 세계와 종은 필연적이며 불변적이라고 주장한다. 개별자들이 변화하기는 하지만 운동이 운동을 낳아 운동이 끝나지 않듯이 개별자가 개별자를 낳아 종을 불변하는 것이다. 이로서 그의 세계는 가지적인 필연자들로 이루어진 불변 세계가 된다.이를 계승한 브라방의 시제루스는 창조된 존재는 그 자신에 의해, 그 자신으로부터, 그 자신을 통해 있는 것이고 이런 자체적 존재의 원리는 형상이라고 본다.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 아베로에스, 브라방의 시제루스로 이어지는 형이상학 계열에서는 존재의 최대 현실성은 형상이며, 세계는 실존 없는 불변의 가지적 형상 세계로 이해된다.3. 아비켄나 - 본질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을 하나의 자존적 존재로 다루게 되면, 그의 실체적 세계는 플라톤의 이데아인 것처럼 다루어지고, 여기서 본질 형이상학이 등장하게 된다. 아비켄나는 사물의 본질은 마음 안에 있거나 전제에 모순된 것이므로 잘못된 것이다. 그는 이런 자체적 본질에 대해 실존이 우연적인 것으므로, 피조물에게 실존은 우연자라고 본다. 반면 필연적 존재는 가능적이기만 해도 필연적으로 존재하므로, 필연적 존재인 신은 그의 본질이 바로 실존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는 본질(essentia)이 esse라는 말에서 나온 사실이 보여주듯, 본질은 있을 가치가 있는 것이며, 자체적으로는 순수 가능자에 불과하지만, 신과의 관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물체화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이는 결정론적 세계관이다.이를 부수기 위해 오캄은 자체적 본질을 부정했고, 스코투스는 개념과 개별자에 대해 중립적인 공통본질이라는 것을 내세웠다. 이 공통 본질은 신의 이데아로서의 존재를 갖다가 창조될 수 있는 것으로 선택될 때에 가능적 본질로서의 존재를 갖게 된다. 그는 이 선택이 신의 자유 의지에 따른 결과라 하여 자유로운 세계관을 옹호한다. 그런데 이런 설명에서는 이데아들의 존재와 가능적 본질의 존재 그리고 피조물의 존재 간의 관계가 문제시 된다. 그는 단지 존재가 일의적이라고만 말하고, 현실적으로 실존하는 본질은 자기 류(類), 종, 자신의 개별적인 ‘이것임’, 더 나아가 자신의 존재를 구성해가는 우연자들에 의해 충실하게 구성되자마자 있게 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실존은 본질의 고유한 양상으로만 이해될 뿐이며, 그의 제자들의 표현에 의해면 본질의 정도일 뿐인 것이다. 한편, 수아레즈는 본질과 실존의 구분이 추상에 의한 한갓 이성적 구분이라고 보아 스코투스의 견해를 강화한다.실존이 본질의 완전한 현실성일 뿐이라는 견해는 근대에 이르러 데카르트, 스피노자, 볼프 등에 의해 계승된다. 볼프는 본질로부터 존재의 속성에 관한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주목한다. 아울러 한 존재에 있어서 그 존재의 본질만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없는 양상들의 현실적 현존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존재에 대해 단지 외적인 존재에 해당한다고 확정한다. 이로부터 그는 본질은 속성들의 현실적 현존 및 양상들 깬다. 흄은 판명한 지각은 곧 판명한 실존이라고 말하고 판명한 실존 내에서는 어떤 실재적 연관도 지각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흄의 영향 아래서 칸트는 볼프에 의해 단순히 명목상 가능성의 보완자로 불려진 실존을 판단의 양상이며 정립에 해당한다고 새로이 규정한다. 그러나 칸트의 실존은 그의 인식론에서 미지수로써 사물 자체로서만 상정되어 있고, 인식을 위해 기여는 하지만 그 자신으로서는 아무 기능도 못하는 무력한 것으로 남아있다.헤겔은 실존을 존재 개념으로부터 선험적으로 연역하려는 시도를 행했다. 그는 절대적 실재가 개념을 통해 알려짐을 인정하는 점에서 관념론자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이전의 관념론이 술어들의 내용이나 가치를 통해 절대자를 규정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절대자의 탓으로 돌리는 점에서 오류라고 비판한다. 그에 의하면 존재는 최고의 추상성을 지니는 절대적 무규정이므로 무이다. 존재와 무, 존재와 비존재의 동일시는 양자의 통일성인 운동을 함축하므로 생성으로 이행한다. 생성은 그것이 동시에 소멸인 한에서 자기 모순적인 것으로 불안정하므로 사유는 생성을 생성으로 파악하고, 이렇게 생성으로 파악된 생성에서 안정을 얻는다. 생성은 규정된 것이자 주어진 소여로써 정재로 된다. 이런 정재는 그것이 규정된 것인 한, 질을 갖게 되고, 질이 주어져 있는 한 무엇이라고 불려질 수 있다. 이렇게 질이 주어져 있고 무엇으로 불려질 수 있는 것은 실재이다. 실재는 그 자신이며 자신인 바의 무엇으로 되는 한에서는 관계이며, 이런 자기 자신과의 관계는 자기 자신이며 자신 안에 있기도 하므로 본질이다. 결국 본질은 자신과의 단적인 관계 속에 있는 존재이다.헤겔의 이런 절대적 관념론에 대한 비판은 키에르케고르에 의한 종교적 반동으로 이루어졌다.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이 객관적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주관적 인식 자체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객관적 인식은 실존이나 시간에 무관하나 인식 주체는 실존과 시간에 모두 관계한다. 따라서 인식 주체의 실존에 관한 인식은 실존과 시간에 무는다.
하느님의 계시의 의미와 하느님의 계시의 전달에 관하여 말하라.1. 하느님 계시의 의미- 자연적 이성을 통해, 인간은 하느님의 업적으로부터 확실하게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힘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또 다른 인식의 질서, 곧 신적 계시의 질서가 존재한다. 하느님께서는 완전히 자유로운 결정으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고 내어주신다. 이는 온 인류를 위해 영원으로부터 그리스도 안에 마련하신 당신의 자비로운 계획과 당신의 신비를 드러내심으로써 이루어진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파견하시어 당신의 계획을 충만히 계시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로운 계획을 알려주신다. :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선성과 지혜로 당신을 계시하시고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시려 했으며, 이로써 사람들이 사람이 되신 말씀 곧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성부께 다가가고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도록 하셨다.- 사람이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자유로운 인간들을 자녀로 삼으시기 위하여 당신의 신적 생명을 인간들에게 주시고자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계시하심으로써 인간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넘어서서 당신께 응답하고, 당신을 깨닫고, 사랑할 수 있게 하신다.- 이 계시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계획은 서로 긴밀히 결합된 행적과 말씀으로 실현된다. 이 계획에는 독특한 하느님의 교육 방법이 담겨있다. 하느님께서는 점진적으로 인간에게 당신을 알려주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명 안에서 절정에 이르게 될 초자연적 계시를 받아들이도록 인간을 단계적으로 준비시키신다.- 모든 계시의 중개자이며 충만이신 예수 그리스도 :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 안에서 모든 것을 말씀하셨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하고 결정적인 유일한 말씀이시다. 성부께서는 모든 것을 그분 안에서 말씀하셨고, 그 말씀 외에 다른 말씀은 없다.- 더 이상 다른 계시는 없다. 그리스도의 구원 경륜은 결코 폐기되지 않을 것이대를 살아가며 계시의 내용 전체를 점진적으로 파악해 가야 할 것이다.- 어떤 사적 계시들은 교회의 권위에 의해 인정받기도 했지만, 이런 것들이 신앙의 유산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결정적 계시를 개선,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한 시대에 계시에 따른 삶을 더욱 충만히 살 수 있도록 돕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계시의 완성이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리스도의 계시를 벗어나거나 수정하려고 시도하는 다른 계시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 ‘계시’(啓示)란 한마디로 사람의 지성(이성, 지혜)으로 알지 못하는 하느님 자신과 하느님의 뜻을 하느님이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인간에게 보여주고 깨우쳐 알게 하는 것이다. 계시를 뜻하는 라틴어 'revelatio'는 희랍어 ‘?ποκαλ?φσι?’를 번역한 것으로써, 이는 ‘휘장을 열어 보이다’, ‘감추인 것을 열어 보이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이러한 말들 안에서 어원적 개념으로부터 얻어 낼 수 있는 계시의 일반적 개념은 “감추어진 것을 노출시키는 것, 덮어져 있는 것을 들춰내는 것”이다. 이 어원적 개념에 따라 흔히 계시는 ‘하느님이 자기 아닌, 즉 자기 밖의 모든 것에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된다.인간은 하느님의 계시를 수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초자연적인 실존이다. 따라서 인간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하나의 적극적 수용력”을 가지고 있다. 이 수용력이 하느님의 은총에 의하여 내적으로 비추임을 받을 때 인간은 자기가 그 전부터 본성적으로 갖고 있던 자연적인 하느님 체험과는 전혀 다른 “자아의식의 창조적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앙을 통한 하느님의 체험이며 신적 계시의 체험인 동시에 이를 통하여 우리는 초월자이신 하느님의 계시를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계시의 의미는 크게 3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1) 계시의 종교학적 의미종교학적으로 볼 때 계시라는 개념은 흔히 “거룩한 것”이 “자기를 드러내다”, “자기 자신을 열어 밝히다”(Hierophania로 경험하고나 체험할 수 없다. 이 거룩한 것은 때때로 그리고 예외적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나 거룩한 것은 이 때 자기 자신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닌 다른 것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자기 자신을 나타낸다. 다른 것 즉 속된 것을 매개로 해서만이 자기 자신을 열어 밝혀준다. 이러한 사실은 또한 이러한 사실에 대한 경험은 역사적으로 일정한 행태의 종교들을 형성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 결과로 세상에는 다만 하나의 종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종교들이 존재하게 되었고 존재하고 있다.2) 계시의 성서적 의미성서는 계시 개념에 대한 분명하고도 정확한 그리고 단일한 낱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성서는 계시에 대한 체계적 논문이나 학술서가 아니다. 성서는 계시를 말하고 있으나 일관된 언어와 체계를 가지고 말하지 않는다. 성서는 단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계시의 사건을 표현한다. 여러 가지의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부르심(말걸음)을 받아 들여 신앙으로 응답하는 일련의 말씀사건 혹은 만남(대화) 사건이 바로 성서가 말하는 계시이다. 이러한 신적 계시 사건을 객관화해서 기록을 남긴 책이 바로 신 ? 구약 성서이다.① 구약 성서 안에서 계시의 핵심 개념은 인간이 먼저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보다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에게 향하여 말씀을 건네신다는 것이다. 구약성서 신학에 있어서 인간이 자기 자신만의 힘으로 하느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하느님이 자신을 알게 할 때만이, 계시하시기를 원할 때만이 하느님을 알 수 있다.구약성서 안에 나타나는 계시의 특성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한 민족의 역사가 하느님의 한 계시의 소재(所在)라는 것과 바로 여기에서 이 민족의 하느님 야훼가 점차로 모든 민족들이 주(主)로서 인식되고 고지되어 간다는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의 역사의 흥망성쇠를 하느님의 뜻의 계시로서 열어 보이는 일, 역사의 사실들로 하여금 말을 하게 하는 일, 신앙의 빛으로 그것을 해석하여 거기서 합당한 실천적 결론들을 이끌어내는 일, 안에서의 계시는 예언자들을 통한 하느님의 말씀의 계시가 특징적이다.② 신약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인격 안에서, 그의 역사 안에서 나타난 하느님의 계시에 관하여 일치된 정신을 간직한 채 아주 다양한 음성으로 전해주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선명하게 하느님의 계시를 인식할 수 있는 구절은 요한 복음의 다음 두 구절을 통해서이다.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 분이 하느님을 알려 주셨다”(요한 1,18).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예수님은 요나(예언자)보다, 솔로몬(신이 선택한 왕)보다, 성전(신의 현존의 특별한 장소)보다 더 큰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분과 함께,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이며 동시에 세계의 창조자요 주님인 그분과 함께 행동하는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의 경우에는 예언자들의 경우와는 달리 전적인 일치 관계로 나타나며 하나의 존재의 동일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며, 이 동일성을 신약성서에서는 예수님이 유일한 의미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함으로써 표현하고 있다.예수님과 더불어 예수님 안에서 주어진 계시에 속하는 것으로서 가장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죽은 이들로부터의 부활이다. 예수의 죽음은 이 죽음이 하느님의 부재(不在)와 소외를 말해주는 시간과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최대의 기회라는 점에서 하나의 하느님의 계시이다. 죽은 이들로부터의 예수의 부활은 여러 가지 면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사명의 확인이며 또한 동시에 기적의 표지를 지니고 주어진 예수님의 주장에 대한 확인이기도 하다.신약 성서 안에서의 계시의 핵심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진리와 인간의 진리 그리고 역사의 참된 의미가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즉 계시의 원천이며 내용이기도한, 계시자이며 계시된 자이기도 한, 계시의 절정과 충만인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집중된다. 예수 그리스도는다 쉽게 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 차원에 계시를 구분해 볼 수 있다.첫째로, 자연적 계시(revelatio naturalis)와 초자연적 계시(revelatio supernaturalis)이다. 자연적 계시는 하느님의 창조 업적인 피조물을 통한 계시이며 초자연적 계시는 피조물의 자연적 인식 가능성을 뛰어 넘는 아브라함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까지 이르는 역사적 사건을 통한 계시이다.둘째로, 이 초자연적 계시는 일반 구세사 전반을 의미하는 일반적 초자연적 계시와 특수한 구세사 즉 신구약 성서에 담겨진 내용을 의미하는 특별한 공적 ? 직무적 계시로 구분되기도 한다. 이 차이는 오직 특별 구세사에는 이것을 “만들어 내며 밝혀 주는” 하느님의 말씀이 있고 일반 구세사에는 그러한 하느님의 말씀이 없다는데 있다.셋째로, 계시의 중계 방법에 따라 하느님의 심부름꾼에게 직접적으로 내려지는 계시를 직접적 계시(revelatio immediata)라 하고 하느님의 심부름꾼을 통하여 인류에게 중계되는 계시를 간접적 계시(revelatio mediata)라 부른다. 구원 신비의 초자연적 공적 계시는 근본적으로 인류를 위한 간접적 계시이다.넷째로, 초자연적 계시는 또한 공적 계시(revelatio publica)와 사적 계시(revelatio privata)로 나눈다. 공적 계시는 아브라함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있어 왔던 인류 전체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의 행위를 일컬으며 사적 계시는 사도 시대 이후에 있었던 모든 환시와 계시를 일컫는다.2. 하느님의 계시의 전달-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신다.(1디모 2,4).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모든 민족,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셔야 하며, 계시는 세상 끝까지 전해져야 한다.2.1 사도전승- 하느님의 모든 계시를 자신 안에서 이루신 그리스도는 복음을 모든 이에게 선포하도록 사도들에게 명하셨다.- 복음은 두 가지 방식으로 전해졌다.I) 구두 -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