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일 : 2014. 6. 20저자 : 아마토 사토시출판사 : 한울아카데미최근 사드배치문제로 한국과 중국의 외교관계가 나빠지고 있다는 뉴스를 많이 접하게 된다. 한국과 일본은 독도문제 위안부 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고 있는데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 이 강대국 사이에는 어떠한 갈등과 대립이 있는지 궁금했다. 이와 관련된 도서가 있는지 찾던 중 ‘중국과 일본의 대립’이라는 책을 찾을 수 있었고 나의 궁금한 점을 잘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읽기로 하였다. 이 책은 일본의 현대 중국연구자인 아마코 사토시교수가 쓴 책이다. 작가는 책을 통해 현대 중국 연구가로서 어떻게 현재의 시진핑정권의 외교 및 내정을 분석 할 것인가, 어떻게 중일 간의 대립을 생각할 것인가 ‘센카쿠 문제’, ‘역사 문제’를 이해하는 시점은 무엇인가 등의 문제에 대해 계속 고민해왔고 이러한 대립에 있어 일본 정부를 대변하는 것이 아닌 중일 및 한일 간에 존재 했던 과거의 문제를 직시하고 이를 정면에서 진지하게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전통적으로 중일관계는 경제적 협력 요인과 정치적 갈등 요인 사이에서 경쟁과 협력의 이중주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최근의 중일관계는 1972년 국교정상화 이후 최악의 상태로 빠져들고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2010년 9월 센카쿠(중국명 : 댜오위다오) 열도 인근 해상에서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과 중국 어선 간의 충돌사고가 발생했을 때도 중일관계가 이처럼 악화 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2012년 9월 일본 정부가 센카쿠 열도의 국유화 조치를 발표하고 중국이 강력히 반발하면서 양국관계는 그동안 걷잡을 수 없는 대결구도로 흘러 왔다. 2012년 12월 재등장한 일본의 아베 총리는 집단 자위권 보유와 평화헌법 개정을 추진하고,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강행하는 등 보수 우경화 정책을 펼침으로써 중일관계 악화에 기름을 붓고 있다. 중국의 시진핑 체제 역시 일본의 우경화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중국 국내에서 반일사조가 그 어느 때보다 폭넓게 확산되 보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중일관계에서 대화와 협력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고 마찰과 대립만이 부각되는 양상이다. 이처럼 끊임없이 격화되는 중국과 일본의 대결양상은 미래를 향한 새로운 동아시아의 역사를 열어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100년’에 발목이 잡힌 중,일간 반목과 갈등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중국인민공화국 건립 이후 1972년 중일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지기까지 중일관계는 기본적으로 ‘적대적 공존’의 시기였다. 일본은 1952년 중국과 민간무역협정을 체결하기도 했지만 당시 일본의 대외정책은 이른바 ‘요시다 독트린’에 기초하여 “안보는 미국에 의존하고 일본은 경제발전에 매진하는 것”이었다. 특히 1950년대 이후 동서 냉전의 심화는 일본으로 하여금 미국을 더욱 추종하게 만들어 대만과의 관계를 수립하는 대신에 중국대륙과의 관계는 소원할 수 밖에 없었다. 중국 역시 전후 초기에는 일본을 적으로 간주하고 일본군국주의의 부활을 방지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또한 중국은 미국을 추종하여 대만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일본이 ‘두 개의 중국’을 조장한다고 보았으며 이를 반대하는 데 대일 관계의 중점을 두었다. 또한 중일수교 이전까지 양국관계는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등 국내정치의 혼란에 휩싸였던 중국의 국내 정세에 의해 정체될 수밖에 없었다. 중국과 일본이 1972년 9월 국교를 수립할 수 있던 것은 미국의 대중국 전략의 변화를 배경으로 한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대리방어막으로 중국과의 관계정상화를 추진하고자 했고 1972년 닉슨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했다. 일본으로서는 중국과의 관계정상화를 통해 안보를 공고히 하는 한편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창출하고자 했다. 중일국교수립 이후 양국 관계는 전면적 우호협력관계로 발전을 추구했으며 당시 중국의 대외관계에서 일본은 미국 다음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개혁개방으로 전환했던 1980년대에는 중국의 현대화를 지원하는 것이 일본의 기본 정책이었고 중국도 이에 커다란 기대를 도 중국과 일본은 가능한 상대방에 대한 자극을 자제하면서 긴장완화와 협력기조를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1997년 9월 일본 하시모토 총리가 중일국교정상화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중국을 방문하였고, 같은해 11월 중국 리펑총리가 일본을 방문하여 양국 간 상호지도자 방문을 정례화하고 군 지도부 간 교류도 확대하기로 합의했다. 특히 1998년 11월 중국의 장쩌민은 중국 국가주석 최초로 일본을 방문했다. 그러나 1998년 장쩌민의 방일은 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인식과 갈등의 차이를 극복하기 보다는 오히려 중국과 일본 사이에 움트고 있던 불신을 더 키웠다. 장쩌민은 일본 방문기간동안 일본 지도부와 역사 문제에 대한 인식의 괴리를 좁히는 데 실패했으며, 공식석상에서의 일본 정부를 향해 강도 높은 어조로 일본에 대한 자성을 촉구하였다. 이러한 장쩌민의 일본 방문은 중일 정상외교의 실패 사례로 꼽히고 있다. 21세기 중국과 일본은 국제질서의 변화가 가속화되는 가운데 양국관계 역시 점점 불투명한 구조적 변화와 경쟁의 방향으로 빠져들고 있다. 특히 21세기 일본의 외교 전략에서 중국이 갖는 의미는 군사적으로는 위협적 존재, 경제적으로는 협력대상임과 동시에 잠재적 적수, 정치적으로는 일본의 지역패권 추구의 최대 장애물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일본은 1990년대를 넘어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국제질서 변환과 중국의 부상에 대응하기 위한 방향을 모색해 나갔다. 한편 21세기 초엽부터 중일관계는 일본 고이즈미 총리의 등장과 야스쿠니 신사참배 강행으로 인해 매우 소원하고 대결적인 양상으로 출발하였다. 중국인들은 일본이 과거에 대한 반성도 청산도 불충분하며 성의도 부족하다고 보는데 이러한 일본인들의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야스쿠니 신사참배라고 인식한다. 2006년 9월 등장한 아베 정권은 고이즈미 시대의 외교정책을 이어받아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고 일본, 호주, 인도와의 연합을 추진하는 등 아시아외교의 회복을 추구하였다. 그럼에도 아베는 일본 총리 취임 이후 첫 해외 순시선에 고의로 충돌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일본은 이를 범법행위로 간주해 선장을 구금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강력한 항의와 더불어 희토류 수출금지라는 경제적 압박으로 일본 정부의 항복을 이끌어냈다. 중국 정부의 희토류 수출 수출 중단 선언은 중국이 일본과의 갈등을 힘으로 해결하고자 시도한 하나의 중요한 사례로 작용하였다. 특히 2012년 일본 정부의 센카쿠 열도 국유화 조치는 중일관계의 갈등과 구조변화를 결정적으로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중국은 일본 측에 원상회복을 요구하는 것과 함께 센카쿠 인근에서의 기장 국면을 지속함으로써 센카쿠 열도를 국제분쟁지역화 하였다. 또한 센카쿠 분쟁으로 격화 된 중일갈등은 양국의 경제교류와 협력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는데 일본무역진흥회에 따르면 2012년 일본의 대중국 수출 총액은 1,447억 달러를 기록했는데 이는 2011년에 비해 무려 10.4% 줄어든 것이며 대중국 무역적자는 처음으로 400억달러를 넘어섰다고 한다. 시진핑 시기 중일 갈등의 가장 큰 특징은 국제무대에서 상호비판과 성토 등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설전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즉 총성 없는 말의 전쟁이 갈수록 격화 되는 추세이며 이는 때때로 전면전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양국은 여론전에서 질 수 없다는 자세로 최고지도부 까지 나서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예로 아베 총리가 2014년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서 중국을 제 1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에 비유하면서 전쟁발발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라 하겠다.이미 2013년 12월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통해 중국을 한껏 자극했던 아베는 중일 관계를 영국과 독일에 비유하면서 전쟁 발발 가능성을 시사했던 것이다. 또한 2014년 6월 샹그릴라 대화에 직접 참석하여 중국이 국제법을 무시하고 해양 분쟁을 격화시키고 있다고 했다. 이 연설의 요점은 ‘중국위협론’에 힘을 실은 것으로서 아세안 국가들이 연합하여 이를 견제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중국은 이러한 발언과 야스쿠니 신사참배등에 대해서 ‘강도의 논리’이며 “일본이 역사 것으로 평가된다. 반면 일본은 최근들어 동아시아에서의 갈등적이고 경쟁적인 대중국관계를 구조적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군사, 정치, 외교적 측면에서 중국에 대한 ‘공세적 세력균형’정책을 본격화 하고 있다. 아베의 외교 전략은 중국 주변국들과의 연계를 강화해 중국에 압박을 가하고 중일관계에서 주도권을 쥐겠다는 의도를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아베의 주요 방문대상국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는 ‘중국포위외교’노선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아베에게 중국과 영토분쟁이 잦은 동남아시아는 중국포위의 남쪽기지이며 뭉골은 북쪽기지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대놓고 “중국을 포위하겠다”고 밝힐 수 없기 때문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인권의 가치관을 공유하는 국가들간의 관계를 강화하겠다.”는 주장 이른바 ‘가치관 외교’로 이를 포장하고 있다. 또한 일본은 미국과의 동맹 강화를 통한 대중국 견제를 추구하면서 냉전기 소련의 일본침공을 상정했던 1978년 가이드라인 개정과 한반도유사사태를 상정했던 1997년 가이드라인 개정에 이어, 2014년에는 중국의 위협을 상정하는 신 가이드라인 개정을 추진 중이다. 나아가 ‘평화헌법’개정을 본격화 하는 것과 더불어 ‘집단적 자위권’도입을 위한 법률 정비도 추진하고 있다. 이는 사실상 평화헌법 체제에서 벗어나 ‘전쟁할 수 있는 일본’을 만들겠다는 것이며, 아베 정권의 국수주의적 행보는 동아시아 패권을 놓고 중국과의 결전을 피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이 책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중일 관계의 현재상황을 잘 알 수 있게 되어 좋았다. 책을 다 읽은 후에 이 책이 한국에서도 출판이 되는 만큼 중일 양국 대립에 따른 우리 대한민국은 앞으로 어떻게 대응해 나가야 하나 하는 점이 없어서 궁금했고 아쉬웠다. 읽으며 느낀 점은 중일관계는 중국과 일본간의 문제뿐만 아니라 한국의 정치나 외교, 경제와 상당히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는 문제인 것 같다. 한국은 중일 외교 갈등 속에서 어느 한쪽 편을 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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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제1학기파워엘리트 중국정치의 힘 서평저 자: 김 승 범출 판 사: 마로니에북스출판연도: 2014년 4월파워엘리트 중국정치의 힘제출자:1264012 남 호 진이 책은 서울대학교 출신으로 중어중문학 전공에 1년 동안 중국 칭화대에서 연수를 했던 조선일보 기자가 쓴 책으로 현재 중국의 권력지도를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2012년에 출범한 시진핑을 주축으로 하는 중국 지도부 5세대에 대한 프로필을 담고 있다. 이 책은 그들의 특색과 그들의 합종연횡으로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하기도 하고 없어지는 모습도 함께 설명하고 있다. 그 밖에도 중국 공산당의 국가기관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 되어있다. 중국 공산당 중앙 정치국 위원 25명에 대한 프로필과 아울러 그들이 정치적으로 성장해온 과정도 소개되고 있다. 저자는 현재 한,중 관계를 생각할 때 중국의 정국이 한국에 미치는 영향은 과거보다 훨씬 크고 경제뿐 아니라 대북문제, 사회 문화 등 각 영역에서 중국이 한국에 미치는 영향력이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중국의 정치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이 책에 정리를 해놓았다고 한다.먼저 1부에서는 중국공산당, 그리고 국가기관과 공산당의 정치 계파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정치국 상무위원은 5년에 한번 열리는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회 위원 가운데 결정된다. 당 대회 개최 시점은 정해져 있지 않은데 1980년대부터는 9월 이후에 열려 왔다고 한다. 2012년은 18차 당 대회가 열려 상무위원을 중심으로 한 신임 지도부를 구성하는 해였는데 중국은 공산당이 국가 기관을 지배하는 체제다. 당 대회를 거쳐 선출된 지도부의 구성원이 전국인민대표대회, 국무원,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지방 행정조직, 군 등 각 영역을 맡아 중국을 움직인다. 중국 정치 전문가들은 마오쩌둥을 핵심으로 한 지도부를 1세대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한 지도부를 2세대 장쩌민이 이끈 지도부를 3세대 후진타오가 주축이 된 지도부를 4세대라고 구분하며 18차 당 대회를 통해 구성 된 지도부를 5세대로 분류한다고 한다. 형식상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가 존재하고 명목상의 복수정당이 있을 뿐 사실상 공산당 일당 체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중국을 흔히 ‘당국’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중국의 집단지도체제는 안정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 내에서도 출신지, 경력, 출신성분에 따라 나뉘어진 태자당, 상하이방, 공청단파간의 치열한 권력투쟁과 함께 그 구도가 늘 변해왔고, 3개의 정파가 ‘당내당’으로 활동하고 있다. 먼저 시진핑 총서기가 속한 태자당은 “우리 자식이라면 안심할 수 있다. 아버지가 이룬 것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혁명원로의 말로 그 정체성을 설명 할 수 있다. 현재는 태자당과 상하이방이 연합해 공청단파에 대항하는 구도이다. 태자당이 지금처럼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문화대혁명 때문이었다는 분석이 있다. 문혁 이후 숙청되었던 원로 간부들이 복권되었는데, 덩샤오핑은 원로 간부들의 퇴진을 종용했다. 이에 반발하는 당 원로를 설득하기 위해 그 자제들을 주요 보직에 기용하였고, 태자당 세력이 핵심 요직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이 이 무렵이라고 한다. 상하이방은 상하이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 세력을 일컫는다. 여기에서 ‘방’은 모임, 패거리 라는 뜻인데, 단순한 친목단체가 아니라 흔히 결사성격의 조직을 말한다. 상하이방은 강한 결속력을 바탕으로 거미줄 네트워크를 구축해 권력을 거머쥐면서 중국 정치무대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해 왔고 장쩌민이 집권했을 때 상하이 출신 인사를 대거 중앙무대로 진출시키며 권력 기반을 다졌다고 한다. 이들은 동부 연안 지역 위주의 성장 지향적 경제정책을 주도하고 있다. 그리고 공산주의 청년단에서 근무한 경력을 바탕으로 형성된 공청단파는 후진타오 전 주석이 집권한 10년 동안 꾸준히 영향력을 확대했다. 태자당과 상하이방과는 다르게 대부분 이렇다 할 집안 배경 없이 자수성가한 인사가 많다. 공청단파는 태자당, 상하이방 만큼 네트워크의 덕을 보지 못하고 대부분 자시의 능력을 인정받아 치열한 경쟁을 뚫고 지금의 자리에 오른 경우가 많다. 분배와 형평을 강조하며 중서부 균형개발을 추진하고 있다.2부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핵심부인 중앙 정치국 대표인물 25인의 정치적 위상을 다루고 있다. 현재 중국 공산당의 총서기인 시진핑은 파란만장한 인생스토리를 지녔다. 중국 공산당 혁명원로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부친의 정치적 몰락으로 ‘반동의 자식’으로 전락하여 문화대혁명 기간에 농촌으로 보내져 재교육을 받기도 하였다. 시진핑은 이러한 이유로 공산당 입당을 10번이나 거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신청해 끝내 입당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끈질긴 집념의 소유자 이기도 하다. 여러 차례 위기가 닥쳤지만 그는 꿋꿋이 이를 이겨내고 현재 중국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올랐다. 시진핑 총서기 외에 서열 7위 안의 상무위원 중 태자당, 상하이방 연합 위원은 장더장, 위정성, 왕치산, 장가오리가 있다. 또한 공청단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리틀 후진타오로 불렸으나 총리에 머물게 된 리커창은 일찌감치 중앙 정치 무대에서 활약하며 후진타오 주석의 후계자로 거론됐음에도 경쟁 정파인 상하이방, 태자당 연합세력의 견제 속에 최고 지도자 자리를 시진핑주석에게 내주자 리커창 총리를 ‘비운의 황태자’라고 부르는 사람이 생겨났다. 또한 정책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시진핑과 반대의 면모를 보인다는 점이 흥미롭다. 리커창 외에는 류윈산이라는 인물이 상무위원 서열 7위 안에 들어가 있다. 여기서 보이듯 계파별 권력 분점을 보면 태자당, 상하이방 연합 세력이 2012년 11월 중국 공산당 18차 전국대표회의를 통해 구성된 신임 공산당 지도부 개편에서 당 주요 조직을 장악했다면, 2013년 국무원 각료 인사에서는 공청단파가 다수를 차지했다. 중국 공산당은 주요 국가 중앙기관을 장악한 태자당, 상하이방의 연합과 행정조직과 지방정부를 장악한 공청단파가 대립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3부에서는 이러한 공산당 내부의 권력 투쟁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러한 권력 투쟁의 대표적인 사건이 ‘보시라이 사건’인데 보시라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12년 2월 6일이었다. 보시라이의 측근인 왕리쥔 충칭시 공안국장이 이웃한 쓰촨성 청두 소재 미국 총영사관으로 망명을 신청하면서 부터였다. 왕리쥔은 망명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다음 날 나왔고 베이징에 있는 국가안전부로 연행되 조사를 받았다. 그런데 왕리쥔이 망명을 시도한 배경을 거슬러 올라가보니 2011년 11월 충칭의 한 호텔에서 발생한 영국의 사업가 닐 헤이우드 사망 사건이 나온다. 당시 헤이우드의 사인은 과음으로 알려져 서둘러 화장되었는데, 왕리쥔은 이 죽음이 타살이며 보시라이의 부인 구카이라이가 관련돼 있다는 점을 알고 보시라이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지만 오히려 미움을 사 신변의 위험을 느끼게 됐고 미국 망명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중국 검찰의 공소장에 따르면 구카이라이는 경제적 이익 문제로 헤이우드와 갈등을 빚고 있었고, 헤이우드가 아들 보과과의 신변까지 위협하자 그를 살해하기로 결심하고 집사의 도움을 받아 독살했다. 구카이라이는 사형 집행 유예를 받았다. 이 사건으로 보시라이의 정치 생명은 끝이 났고 이후 보시라이일가의 재산 축재와 아들의 방탕한 유학생활등 치부까지 드러났고 보시라이가 왕리쥔을 시켜 당시 시진핑 국가부주석 등 충칭을 방문하는 최고 지도자들을 도청케 하는 등 기율을 위반한 혐의가 하나둘씩 드러나면서 그는 더 이상 자리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보시라이는 뇌물, 횡령,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되 징역과 정치 권리 종신 박탈 등을 선고받게 된다. 이러한 보시라이 사건의 본질은 중국 내 각 정파 간 권력 투쟁이라는 분석이 많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