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학 레포트(진보주의 비판)진보주의는 항존주의가 인정하는 영원한 진리에 대해서 반대하며, 지식을 현재에 상황에 잘 들어맞는 잠정적 설명으로 간주한다. 진보주의자들은 특히 가변적인 지식을 교육과정에 따라 배우기보다 스스로에게 필요한 문제를 선택해 학습하기를 주장했다. 이들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하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학습의 재량권을 부여되면 결국 자신에게 유익하게 작용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이러한 진보주의자들의 주장은 반박할 수 있다.첫째, 교육과정을 설정하지 않고 그때그때 필요한 과목을 배우는 진보주의식 교육은 체계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학생이 실생활에서도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진보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절대 불변하는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한 사고방식으로 그들은 변화를 실재의 본질로 보아 변화하는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준비를 시키려 한다. 그래서 항존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기초교육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들에게 기초란 사는 데 자주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과정을 설정하고 학년에 따라 그것을 배워나가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학생이 공부하고 싶은 것을 스스로 찾아 공부하게 한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절대적인 원칙같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학생들을 두어 자신이 필요한 것을 찾아서 배우게 하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과는 다르게 예로부터 내려오는 불변하는 진리는 존재한다.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많은 것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실체가 있듯이 말이다. 따라서 삶의 영위를 위해서는 이러한 기초를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간단한 예로 아직까지도 고전인 그리스 로마 신화가 읽혀진다. 이것은 왜일까? 바로 그리스 로마 신화 안에 현재 유럽인들의 사고방식과 문화 예술 거기에 더 나아가 인간들의 보편적 생각들이 담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진보주의자들은 그 때 그 때 상황에 맞게 해결책을 강구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러한 기초를 습득하는 것을 중요시하는 전통주의를 과거 지향적이라고 반박하며 이는 현재나 미래의 문제를 처리하는데 거의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앞에 제시된 예처럼 과거에서부터 현재를 이해하는 토대를 갖출 수 있는 것이다. 또 한가지 예로, 진보주의는 그 분야에 관심이 있는 전문가만 특정 현상을 알면 된다고 했다. 예를들어 핵폭탄에 대해서는 그에 관심이 있는 사람만 알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를 구성하는 일반 시민으로서 핵폭탄을 원자력을 위해 쓸 것인가는 일반 시민 모두가 책임을 지는 문제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이를 현명하게 결정 내리기 위해서는 사회구성원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수학과 과학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또한 페디만이 제시한 ‘식산적 과목’과 마찬가지로 모든 과목은 각각의 쓰임새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의 구성원으서, 현대사회를 살아가기 위해서 지성을 길러 나가야 한다.둘째, 진보주의에서 주장하는 흥미를 통한 교육은 제대로 이루어지기 힘들며 이는 기초학력의 부족을 야기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진보주의자들은 전체 학교의 프로그램이 학생들의 흥미 위주로 이루어 져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의 흥미란 재밌다가 아니라 의심, 놀람 그리고 당혹을 의미한다. 그들은 이렇게 학생들의 흥미를 통해서 개별학생들에게 의미있는 교육이 이루어 져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학생들은 경험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이 흥미에 의한 교육은 학생들의 자유시간이 최대한 보장되고 자신의 흥미를 가장 잘 발견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공간인 써머힐에서 조차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시청각 자료로 써머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과 학생들의 생활에 대해서 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한 학생이 인터뷰에서 자신은 바보가 되기 싫기 때문에 몇 년만 더 놀고는 공부를 시작할 것이라 말했다. 이를 진보주의자들은 자신이 공부를 하고 싶은 때에 시작하기에 효율적이며 성과도 일반 학교보다 높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것은 역시 진정한 흥미에서 우러나온 교육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바보가 되고 싶지 않다라는 이유에서 스스로 공부하는 것이지, 써머힐에서 생활하면서 의심, 놀람혹은 당혹을 느껴 그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듯 흥미라고 명명하기 힘든 경우가 있는데, 기본적으로 흥미가 유발되기 위해서는 기초적인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기초적 지식은 항존주의에서와 같이 교육과정에따른 차근차근한 교육으로 쌓을 수 있다. 이에 대해서 듀이가 반박할 것이다. 그는 아이에게는 의존성과 가소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러한 아이에게 자유를 준다면 그는 상호작용을 통해 흥미 즉 의심, 놀람, 당혹의 인지부조화를 겪는다. 따라서 기존경험과의 상호작용으로 성장을한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자유를 주어야만이 그들이 제대로된 경험을 할 수 있고 그 속에서 성장이 일어 난다고 했다.하지만, 흥미는 전 분야에 걸쳐서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분명 학생들은 커 가면서 삶을 사는데 꼭 필요한 지식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흥미 위주의 교육을 한다면 학생이 흥미를 가지지 않은 분야에 대해서는 아예 접해보지 못할 수 있다. 따라서 특정 분야에 대해서는 교육의 기회를 가지기 힘들게 되고, 그 분야에 대해서는 아예 문외한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이런 흥미위주의 수업은 고급 지식을 습득하는 데에 무리가 있다. 흥미는 처음 지식을 접하는 학습자에게는 촉매제가 될 수 있겠지만, 좀 더 심도있는 학습을 위해서는 흥미만을 따라가서는 안된다. 이에 대해 진보주의자들은 아예 전분야에 걸친 학습에 대해서 반대한다. 그들에 따르면 학생들은 자신의 흥미를 찾아 스스로 인생을 설계해야 한다고 한다. 그들은 직업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결국 중요한것은 직업이다. 이런식으로 결론을 내릴 지도 모른다. 하지만 흥미 자체의 위험성에 대해서 알아보자. 아이들은 많은것에 흥미를 보이는 동시에 그 흥미가 빨리 식어버리기도 한다. 이것은 주변의 아이들을 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세상이 모르는 것 투성이이다. 그래서 쉽게 흥미를 보인다. 하지만 곧 빠르게 그것을 지겨워한다. 따라서 진보주의가 주장한 것 처럼 개개인의 흥미를 찾아 자신의 삶을 일구어 나가는 것이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버거운 작업일 것이다. 따라서 아이들은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진보주의자들은 이에 대해서 교육을 위해서는 간섭이 배제되고 여유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학생들이 흥미만 있다면 그것을 끝까지 파고들고 모든 역경과 장애를 극복 해 낼 것이라 주장한다. 또한 학교에서 필요한 것은 직업교육이라고 정의 내려도 무방하다고 보며, 다양한 분야에 대해 배울 필요가 없고, 단지 흥미 있는 분야에 대한 학습 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또한 일반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수업을 강요된 학습이라 이르며 이는 잠정적으로 학생의 학습의욕을 떨어뜨린다고 했다. 하지만, 지식을 감탄고토해서는 안된다. 자신에게 좋은 것이라고 많이하고 싫어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학교를 졸업에 사회에 나섰을때, 생활이 힘든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극단적인 예로 한 학생이 수학에 흥미가 없어 숫자와 간단한 사칙연산도 배우지 못했다면 그는 삶을 살면서 큰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또한, 진보주의가 주장하듯 끊임없이 변화하는 삶에 적응하려고 해도 여러분야의 전문가들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2주차 ? 교육의 개념적 기준(대한민국의 교육은 교육이 되는가? - peters의 관점에서)우리나라의 교육은 1차에서부터 7차, 2007, 2009년 교육개정을 통하여 변화되는 교육철학을 도입해 아이들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교육하기 위해 노력을 쏟아왔다. 우리의 상식선상에서 교육은 가르침을 통해 학습자의 내부적 능력을 개발시키고 미숙한 상태를 성숙한 상태로 바꿔놓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 하에서 교육이 성립되는 범위는 광범위하지만, Peters의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대한민국의 교육은 Peters의 세 가지 준거를 통해서보면 교육이 아니다. 이를 보다 자세히 설명하겠다.먼저, 규범적 준거의 측면에서 대한민국의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규범적 준거에서 Peters는 교육은 학생들에게 가치 있는 것을 전달함으로써 그것에 헌신하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통주의자인 Peters가 말하는 가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인격의 실현이나 자아실현과 같은 도덕적 가치라기보다는 지식에 관련된 이야기이다. Peters는 교육은 수단적 가치를 지니기보다 그 자체에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즉 외재적 가치가 아닌 내재적 가치를 지닌 것이 교육이여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과학을 배워서 산성비를 안다면 그 아는 것을 이용하여 산과 염기반응을 한다거나 하는 목적으로서의 외재적 가치가 아니라 그것을 알아서 산성비를 보면 아! 산성비구나 하고 아는 것, 즉 내재적 가치를 목적으로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에서 대한민국교육을 보자. 대한민국의 교육은 이러한 관점에서 교육기관이라기보다 훈련기관이다. 일반적으로 왜 교육이 이루어 져야 하느냐 하고 질문했을 때, 국가의 경제발전을 위하여,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라고 하는 등의 목적은 모두 외재적 가치이다. 하지만 내재적 가치는 배운 후에 학습자에게 자연스레 쓰여야 하며 이는 두 번째 관점인 안목을 길러주는 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 따라서 배우는 것에 안목을 기르는 것 외의 목적이 있다면 Peters의 기준에서는 모두 이 첫 번째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이 된다. 대한민국에서 학교 교육은 이러한 내재적 가치의 실현보다 출세를 위한 수단으로서 이루어지고 있다. 한 예로, 대부분의 일반계고등학교에서의 목적은 교육자체보다 대학을 잘 가기위한 수단으로서의 비중이 더 크며 이는 명문대학 진학률등의 통계를 내고 고등학교를 서열화하는 현상을 통해 잘 보여 진다. 이러한 대한민국의 교육기관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모두 Peters의 관점에서는 교육 내적 가치 이외의 목적을 뚜렷하게 지니므로 교육이 아니다.두 번째로, 교육의 인지적 측면에서도 역시 대한민국의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Peters는 인지적 측면에서 교육은 지식의 이해, 그리고 폭넓은 지적 안목을 길러 주는 일이며, 이런것들이 무기력한 것이 돼서는 안된다고 했다. 이 지적 안목이라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전 분야에 걸치는 넓은 안목을 뜻한다. Peters에 주장에 따른 진정 교육받은 사람은 마치 안경을 쓴 것과 같이 의식하지 않아도 생활함에 있어서 배움이 자연스레 녹아나오는 것과 같다. 예로 지적 안목이 있는 사람은 각자 schema를 이용하여 이것을 사실의 집합 이상으로 끌어올린다. Piaget는 특히 schema가 있다면 새로운 경험을 접하게 되더라도 친숙한 패턴에 의해서 구조화 된다고 했다. 이것은 사실 자체에 대한 원리를 알게 되는 한 차원 높은 이해라고 할 수 있다. Peters는 따라서 교육을 훈련과 매우 다른 개념으로 보고 전인을 기르는 데에 목표를 두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을 살펴보자. 두 번째 기준에서 대학교육은 특히 훈련인데, 이는 전공만 파고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범위가 넓지 않으며 한정되어있다. 이러한 점에서 넓은 안목을 길러주는 것이 교육이라고 주장하는 Peters의 두 번째 기준에서는 대한민국의 교육은 교육이 아닌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