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지원서 작성 총괄 자기분석연번구분기간업무(구체적)역할 및 성과(구체적)관련 직무역량관련자소서 항목1(예시)교내2010. 1~11자격증 취득동아리 활동1.학습동아리의 리더로서 자격증 취득 목적으로 전공지식 전달 및 공유1. 리더십2. 대인관계3. 적극성1. 학교생활2. 성격 장단점2교외2005. 12~2006. 3회사 사무가구 셋팅 및 점검1. 고객사 인사이동에 따라 야간에 컴퓨터, 파티셔, 가구 등 사무가구 셋팅 및 점검1. 집중력2. 책임감3. 현장 판단력1. 성장과정2. 입사 후 포부345678910※ 1) 관련 직무역량 - 다른 항목을 작성한 후 기업?직무분석표의 매칭되는 직무역량을 선택하여 작성2) 자소서 항목 - 성장과정, 성격의 장단점, 학교생활, 지원동기, 입사 후 포부 中 선택(Final)입사지원서 작성 세부 자기분석연번구분Whom(고객)Where(조직)When(기간)Why(목적)What(역할)How(수행방법)성과(배운점)관련 직무역량자소서 항목1(사례)교내학우전기공학과2010. 1~11(11개월)기사 자격증취득을 위한전기지식과실기능력 향상기사자격증 취득 학습동아리운영1. 방중 전문학원 수강2. 인터넷을 통한 온라인 학습3. 학습동아리를 구성하여 선행 학습한 전공지식 전달 및 공유1.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지식 습득과 공유를 통해 대인관계 역량을 향상2. 동아리 구성과 학습방법에 대한 추진력, 적극성, 리더십 개발1. 리더십2. 대인관계3. 적극성1. 학교생활2. 성격 장단점2교외고객사사무실 이사회사2005. 12~2006. 3(4개월)사회 경험과노동의 소중함을 체득사무가구 셋팅 및 익일 고객사 사무실을 방문하여 현장 점검, 보수와 고객만족도 조사 업무1. 사무실 출근 이전 야간(20시~8시)에 업무 수행2. 인사이동에 따라 가구, 파티셔, 컴퓨터, 콘센트 셋팅3. 익일 현장점검, 보수 및 고객 만족도 조사1. 제한된 시간에 업무 완료를 위한 집중력과 책임감 배양2. 고객 만족을 위한 고객지향적 사고의 중요성 인식3. 사무실 구조에 맞는 최적 셋팅을 위한 판단력 향상1. 책임감2. 고객지향3. 실행력1. 성장과정2. 입사 후 포부34567※ 1) 관련 직무역량 - 다른 항목을 작성한 후 기업?직무분석표의 매칭되는 직무역량을 선택하여 작성
현대사회의 이해 ★ 필수 문제★ 근학편(勤學篇) 1번子曰, 博學而篤志하고 切問而近思면 仁在其中矣니라. / 濁자왈, 박학이독지하고 절문이근사면 인재기중의니라. /(흐릴탁)뜻: 공자가 말씀하기를, “널리 배우고 뜻을 독실하게 하며 간절하게 묻고 깊이(가깝게-직역) 생각한다면 인(仁)은 그 가운데 있느니라.” (직역으로 쓰기)의역: 널리 두루 공부하고 뜻을 독실하게 잡아라① 누가 말하고 있는가? 공자② 책 이름은? 근학편(勤學篇)※ 근사: 내가 가까운 곳(데)에서부터 확대 보편화하라(수기치인: 내 몸을 닦고 나서 남을 다스린다) 개인-가정-나라★ 교우편(交友篇) 7번君子之交는 淡如水하고, 小人之交는 甘若醴니라.군자지교는 담여수하고, 소인지교는 감약례니라.뜻: 군자의 사귐은 맑기가 물과 같고, 소인의 사귐은 달콤하기가 단술 같으니라.☆ 물의 특징색(투명)향맛과하다(해롭다)필수불가결자정작용물(水)XXX데미지XOO군자탁주(濁酒)OOO데미지OXX소인☆ 대학교수, 국회의원, 장삼이사공부관직사회적 지위와 신분(쇼셜 포지션)ex)군자OOO대학교수, 국회의원소인XXX장삼이사※ 장삼이사: 장씨집안의 셋째 아들, 이씨집안의 넷째 아들너무나 흔해서 이름조차 생각나지 않음※ 군자: 아닌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人, 있는 그대로 본심을 이야기함※ 소인: 꼼수를 부림, 이득을 얻어야함, 앞에서는 동감하지만 배신할수도 있다.※ 대학교수, 국회의원 = 간혹가다 군자라고 부를 수 없는 경우도 더러있음※ 디지털캠퍼스 자료 A, B와 추가로 연결시켜 답안 작성☆ 디지털캠퍼스 자료 A (4편-16번째)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 喩군자유어의, 소인유어이 / (깨우칠유)뜻: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밝다.대의 개인적인 이익디지털캠퍼스 자료 B (13편-23번째)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뜻: 군자는 화합하나 附和雷同하지 않는다. 소인은 부화뇌동하나 화합하지 못한다.준례편(遵禮篇) 7번父不言子之德하며 子不談父之過니라.부불언자지덕하며 자부담부지과니라.뜻: 아버지는 아들의 덕을 말하지 말아야 하며, 아들은 아버지의 허물을 말하지 아니할지니라.※ 언&담: 같은 의미, 다른 글자: 자기를 유식하게 들어낼때① ※ 우리가 배운 정직의 의미에 가까운 것은? 섭공※ 공자의 입장: 직(순수한 감정: 정감)② ※ 천자지존 < “부자지친”→ 맹자강조→ 가까운 사이일수록 조심하라③ 국가보안법 “불고지죄”※ 본범과 친족관계가 있을 때에는 그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한다.④ 형사소송법 224조※ 합헌 판정이 났지만 합헌난 이유? 아직 유교를 백그라운드로 하고 있다.★ ①②③④ → 공통점: “효”현대사회의 이해 ☆ 후보 문제근학편(勤學篇) 6번朱文公이 曰, 家若貧이라도 不可因貧而廢學이요,주문공이 왈, 가약빈이라도 불가인빈이폐학이요,家若富라도 不可侍富而怠學이니라.가약부라도 불가시부이태학이니라.貧若勤學이면 可以立身이요, 富若勤學이면 名乃光榮하니라.빈약근학이면 가이입신이요, 부약근학이면 명내광영하니라.惟見學者顯達이요 不見學者無成이니라.유견학자현달이요 불견학자무성이니라.
영화 감상문학부생으로써 ‘현대사회의 이해’를 접하기 전에 과목명만 보고 굉장히 기대를 많이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금새 걱정으로 바뀌어 버렸다. 강의를 들으면 들을수록 고전 명구에 대한 부분이 어렵게만 느껴져 피로도가 점점 쌓여만 갔다. 이번 중간시험으로 영화 “Dear Friend”를 보고 감상문을 제출해야 한다기에 사실 고전 명구들로 가득한 영화를 보겠거니 라고 생각했기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그 동안의 현대사회의 이해의 과목을 들으며 이번 영화를 통해 고전 명구에 대한 해석과 나의 생각들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좋았다.먼저는 등장인물에 따라 느낀 점을 서술하려 한다. 도입부에 봉사활동 인원을 꾸려서 가려는 오오미야를 보며, 본인이 보호감찰직 임에도 불구하고 봉사활동에 보호감찰 대상 아이들만을 꾸려서 가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과 본인도 함께 봉사활동을 참여하였다. 이를 통해 보호감찰 대상 아이들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음을 볼 수 있었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사회 통합까지 바라보는 오오미야를 보게 되었다. 사회에서의 일탈을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 통합을 통해 당장은 반항하거나 힘들지는 모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지의 마음을 점점 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보호감찰 대상 아이들만을 꾸려서 갔다면 분명 일탈 등의 문제가 더 불거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본인도 함께 하고 일반 봉사원과 함께 꾸려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장기적으로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항하는 아이들을 무조건적인 훈계보다는 아이가 나쁜 환경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대목이었다.주인공 노랑머리 유지는 미혼모 가정에서 양육 받아왔고, 유지의 어머니 또한 유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을 보며, 양육과 환경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아이가 어리기에 잘 모를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오히려 아이를 잘 못 이해할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최근 우리 사회에 이혼가정이 많아졌고, 필자 또한 이혼가정이다. 본인도 한때 방황기를 거쳐 지금의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가정환경이 아이에게 좋지 않은 행동과 성격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이혼을 심사숙고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필요하고 부부가 함께 지내야 아이의 정신건강도 좋을 수 있는 것 같다. 또한 오직 자기를 위해 사는 유지의 어머니를 보며 이 시대 또한 점차 개인주의화가 되어 가고 있는 우리 사회의 가정에 문제가 있지는 않는지 조심스럽게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주인공 흰머리 사타케 입장에서 본다면 타인에게는 자존심을 내세우지만 정작 본인 아들에게는 한없이 작아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들이 잘못한 것에 대한 훈계를 하지 못하는 상황을 보게 되었고 그런 사타케는 그 동안 자기 자신의 잘못 또한 타인의 탓으로 전가하는 성향이 보였다. 과연 이것이 사타케만의 문제일까? 필자는 사타케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현재 ‘세월호’ 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한 가운데 지금도 정부 탓, 나라 탓, 공무원 탓, 등등 전부 타인 탓만 하고 있는 우리 사회를 바라보며 남 탓이 아닌 내 탓이요 하는 리더십이 필요한 지금 이 시점이 아닌가 생각해본다.또한, 사타케는 지금까지 했던 것에 미련을 버리고 100만 엔을 인출하여 자기의 소소한 목표를 위해 앞으로 달려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늦은 나이임에도 그렇게 꿈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원동력은 젊음이 아닌 생각의 차이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런 꿈이 사실 세상에서 보았을 때는 별것 아닌 것이라 생각이 들 수 있겠지만 그러한 환경에서 손녀를 만나러 가는 것 자체가 어쩌면 큰 도전일 수 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여기서 놀라웠던 장면은 불량배를 만나 가지 못할 환경에 노출됨에도 불구하고 이에 굴하지 않고 손녀를 찾아가려고 했다는 점이다. 우리 세대들의 경우 목표에 있어서 금방 질려하고 포기해버리는 것이 팽배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사타케가 노인인 것을 감안한다고 해도 그 목표를 성취하려는 태도에 있어서는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하게 되었다.좀 더 전체적인 측면으로 보자면 음악의 변화를 통해 기분과 상황에 맞는 배경음악을 느끼게 해주었다. 먼저는 산만한 음악이 나옴으로써 유지가 산만한 아이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듯 했다. 또한, 유지와 케이코가 만나는 장면을 통해 둘의 공통점인 젊음을 상징하는 배경음악이 나왔기에 둘의 젊음을 느낄 수 있는 음악이었고, 또한 유지에서 사타케로 주도권이 바뀌면서 전세 역전되는 장면에서도 빠른 화제전환에 맞는 배경음악이 선보였기에 금세 주도권이 유지에서 사타케로 전세역전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잔잔한 음악과 경쾌한 음악이 번갈아가며 나오면서 화제가 어떻게 될 것이라고 미리 예측할 수 있었던 것 같다.이 영화를 보며, 현대 사회에서의 가족은 우리 사회보다 지지받지 못하는 곳으로 묘사되는 것 같아 너무나 안타까웠다. 사타케 역시 자식에게 천대받는 모습, 유지 또한 가족이 신경써주지 못해 방황하는 모습, 오오미야 역시 가족에게 본인의 직장에 대한 지지를 얻지 못하는 모습들을 보며, 현대 사회에서 각자 본인들이 가족에게 받지 못한 지지와 사랑을 사회에서 받으려고 하는 모습들을 보게 되었다. 그러한 지지와 사랑을 가정에서부터 시작한다면 사회적 일탈이나 반항이 줄어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사회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가정의 역할을 대신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하는 모습들을 보며 아직 우리 사회가 그렇게 삭막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현대 사회에 있어서 점차적으로 개인주의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가운데 이러한 정문화가 점점 사라지는 것이 아닌지 걱정해보게 되었다.또한, 이혼을 너무 쉽게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서로가 맞지 않으면 이혼한다는 식의 발상은 위험하다. 이 영화에서 사타케의 아들이 이혼한 가정이고, 유지의 어머니 또한 어린 시절 이혼한 경우라고 말한다. 이러한 이혼 문제가 과연 이들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혼 가정이 점점 많아짐에 따라 아들, 딸들의 양육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버린다. 자식을 위해서라도 이혼은 지양해야한다고 생각한다.헤이크의 경우, 이혼이라기보다 불륜에 더 가깝다. 헤이크는 가정이 있는 남자를 사랑했던 불운의 여성이다. 본성은 착하지만 사랑의 방법이 잘못되었기에 더 안타까울 뿐이다. 헤이크 또한 사랑받지 못한 사람 이였을 가능성이 높다. 불륜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선입견을 가지지 않고, 그 속에 있는 내면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불륜 행동을 좋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불륜한 사람이 어떠한 환경에 놓여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헤이크의 가정을 자세히 다루지 않아 아쉽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유지가 저지른 범죄는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위에도 설명했듯이 사타케의 가정을 돌아볼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사타케는 공갈협박, 갈취, 상해 등으로 보호감찰 중이라고 초반 도입부에서 설명되었다. 이러한 범죄 하나 하나를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이 사회적 병리와 가정 양육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들이 사회에서 방치되었고, 가정에서 또한 방치되어있음을 알 수 있어서 안타까울 뿐이다. 잠깐이나마 등장하지만 함께 봉사를 하던 여자 아이 또한 원조교제에 대해 말한다. 이처럼 아이들이 범죄에 쉽게 노출되어있고, 쉽게 돈을 벌 수 있기에 그 유혹을 뿌리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의 상대가 어른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사회적 어른으로써 그들을 돈으로 사는 노리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그들 또한 어느 집의 귀한 아들, 딸들임을 기억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무 다하기” 요약정리착한 몸매와 착한 행동 : 몸매가 됐든 마음씨가 됐든 착한 것은 좋은 것이다. 착하게 살고 싶어도 어떨 때 착하다고 하는지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양심 냉장고의 도덕 원리 : 똑같은 행동을 했을 때 그 계기가 각자 다를 수 있다. 그 계기를 안다면 착하다는 평가도 약간씩 달라질 수 있다. 철학자들은 자신의 행동이 옳다는 것을 정당화하며 제시하는 이유를 윤리 또는 도덕 원리라고 부른다. 그리고 ‘착하다’라는 말보다는 ‘옳다’라는 말을 더 많이 쓴다. 이 책에서도 ‘옳다’라는 말이 더 많이 등장할 것이다. 자신의 행동을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도덕 원리를 제시한 것은 맞다. 자신의 행동이 옳다는 이유를 제시하는 원리라면 한 상황에만 들어맞아서는 안 되고 비슷한 경우에 두루 맞아야 한다. 원리에 의한 정당화라고 말하기도 힘들다. 보상으로 주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다고 해서 그 사람을 비난하지도 않는다. 도덕 원리라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이 원리를 실천하라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이 옳다고 믿고 그것의 근거를 댈 수 있어야 한다. 도덕원리가 되기 위해서는 일반화가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원리를 나에게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다른 모든 사람들과 상황에 두루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나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너도 이런 생각을 가지라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도덕 원리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하지만 거꾸로 두 가지 조건을 갖추었다고 해서 곧 도덕 원리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지칠 것은 지킨다? : 정당화와 일반화라는 두 조건을 만족하는 도덕 원리는 의무론과 결과론이다. 윤리적인가 비윤리적인가 판단할 때 의무론은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 곧 규칙을 중시한다. 반면에 결과론은 행위의 결과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도우라는 것은 하나의 규칙이다. 누구에게 배웠든 윤리는 그러한 규칙의 체계이며, 그 규칙을 제대로 지키는 행위가 옳은 행위라고 생각하는 이론이 의무론이다. 한편 결과론은 행위가 가져올 결과 또는 어떤 행위를 할 때 목적을 따져봐서 좋은 결과가 나오면 옳은 행위라고 판단하는 이론이다. 의무론자들은 어떤 결과가 생길지 따져오지 않고 지켜야 할 규칙을 지키는 것이 옳은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사소한 규칙은 사람마다 다르고 문화마다 다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규칙도 있다. 꼭 기록되어 있지 않더라도 어느 사회에서나 이 규칙은 받아들여진다. 사람들은 모든 이들이 동의하는 규칙부터 개인마다 사회마다 다른 규칙까지 수많은 규칙들을 가슴속에 담고, 규칙이기 때문에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주어진 규칙을 따르기보다는 행동을 했을 때 따라올 결과가 좋다면 그 행동은 옳다고 생각한다.종교의 윤리 : 의무론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이론은 크리스트교 윤리와 칸트 윤리학이다. 의무론은 우리가 지켜야 할 규칙들의 체계가 윤리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대부분의 종교에는 십계명처럼 지켜야 할 규칙의 목록이 있고, 그 목록이 종교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 규칙들은 그 종교의 구성원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지켜야 하는 절대적인 것이다. 자신들만의 윤리라면 상관이 없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하려면 보편적인 도덕 원리가 될 수 있는지 검토해야 한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대화편 에우티프론에서 윤리는 종교 없이 성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모든 종교에서는 옳은 것은 신이 시켰기 때문에 옳은 것이라고 말한다. 학살이나 고문 같은 행위는 이미 나쁜 행위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학살이나 고문은 신이 시키든 안 시키든 어쨌든 나쁜 행위라는 것이다. 어떤 행위가 신이 시켜서 옳은 것이라고 한다면 극악무도한 행위마저도 신의 명령인 경우 용납할 수 있게 되고, 원래 옳으므로 신이 시킨 것이라고 한다면 신의 개입 없이도 그 행위는 옳은 것이 된다. 신을 끌어들여 도덕적으로 옳음을 규정하려는 시도는 이래도 문제, 저래도 문제가 되는 것이다. 다만 종교에 근거를 둔 윤리적 가치를 종교 밖에까지 일반화하여 도덕 원리로 내세우려는 시도에 대해 문제 삼는 것뿐이다. 종교는 오래 전에 과학에서 분리된 것처럼 윤리와도 분리되는 게 맞다.칸트의 의무론 : 도덕적인 행동에 대한 칸트의 생각은 대표적인 의무론이다. 그는 의무감에서 한 행동만이 도덕적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결과는 똑같지만 어떤 동기에서 그런 행동을 했느냐에 따라 도덕적이라는 평가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칸트는 무조건적으로 착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선의지밖에 없다. 우리의 품성에는 착하다고 할 수 있는 선의지 외에 용기, 행복, 끈기, 절제 등등 이런 것들은 무조건적으로 착하다고 할 수 없다. 무조건적으로 착한 것은 선의지 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선의지는 결과나 경향성이 아니라 의욕 때문에 선하다. 여기서 경향성이란 불쌍한 감정을 말한다. 우리가 정말로 착하다고 생각하는 행동들은 칸트의 이론에 따르면 착한 행동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사람이 불쌍한 마음 즉, 경향성에 의해 강도를 만난 행인을 도왔다면 칸트의 기준으로는 착한 사람이 아니다.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를 강조하다 보니 예외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이 경우에도 약속이라는 의무를 지켜는 것이 옳은 일이다.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는 의무를 어기는 것이다.칸트를 위한 변명 : 칸트가 모든 사람이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해야 함은 할 수 있음을 함축한다’라는 원리가 있다. 할 수 없는 것을 해야 한다고 강요할 수 없으므로 할 수 있는 것만 의무로 부과한다는 뜻이다. 의지 또는 의무감은 제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나 경향성은 통제권 밖에 있다. 그래서 칸트는 결과나 경향성을 가지고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쁜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아주 높긴 하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말하긴 힘들다. 결과 예측을 잘못해서 똑같은 행동이 다르게 평가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그런 예측에 약한 사람에게는 불리할 수 도 있다. 사실대로 말할 때의 그 결과가 꼭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쁜 결과가 나올 가능성은 높다. 칸트도 좋은 결과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결과를 기준으로 도덕 규칙에 자꾸 예외를 두게 되다 보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닥칠 것을 우려했을지 모른다. 좋은 결과를 내세워 ‘다른 사람을 이유 없이 괴롭혀서는 안 된다’나 ‘다른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규칙에 예외를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향성은 우리의 타고난 기질이나 성향을 말한다. 하기 힘든 일을 확고한 의무감을 가지고 했을 때 도덕적으로 칭찬받을 수 있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다. 내가 불쌍함을 느끼는 경향성을 타고났다면 그 것은 우연이다. 내가 불쌍함을 느끼는 경향을 타고났다면 그것은 우연이다. 그 유연 때문에 사람들에게 항상 칭찬받는다면 그건 행운이기도 하다. 칸트에 따르면 이런 행운에 의해서 착한 인생과 나쁜 인생이 나뉜다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 아무런 갈등이나 저항도 없이, 우리가 하는 자연스러운 행동 하나하나가 곧 도덕적인 행동이 되는 삶 말이다. 순전히 의무 때문에 하는 선한 행동은 받는 사람도 뭔가 불편하고, 지속되리라는 신뢰감도 주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칸트가 경향성이라고 말한 것은 도덕적인 행동을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측은지심은 불쌍하게 생각하는 마음이다. 맹자는 이것이 어짐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맹자도 칸트처럼 사람들이 결과를 보고 착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칸트가 도덕과 무관하다고 생각한 불쌍한 마음이 착한 일을 하는 계기가 된다고 주장했다. 불쌍한 마음뿐만 아니라 죄책감, 양심의 가책 등의 감정이 도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게 없으면 인정머리가 없다고 비난하는 게 우리의 상식이다. 이런 감정들을 도덕에서 분리하면 도덕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무시하게 된다.
“결과가 좋아야” 요약정리결과론은 행위하는 사람의 의도가 아니라 결과에 따라 그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는 도덕 원리다. 지금까지 의무론자, 특히 칸트를 애먹이던 상황이 결과론으로는 선의의 거짓말이 용납된다. 거짓말 한 마디로 수십 명, 더 나아가서 수천 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거짓말은 적극적으로 권장되어야 하고, 반대로 그런 경우에 거짓말하지 않는 것은 나쁜 행동이 된다. 결과론자들에게는 어떤 상황에서 의무 또는 규칙을 지키는 것보다는 그 상황에서 이런 행동을 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살펴봐서 더 좋은 결과를 낳는 행동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이기주의자는 자기밖에 모르는가? : 우리는 이기주의자라고 하면 자기만 아는 나쁜 사람으로 인식한다.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이익만 챙기는 것은 도덕 원리 자체가 될 수 없다. 이기적인 사람은 보통 비윤리적인 사람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도덕 원리로서 가능한 이기주의도 있다. ‘내 것은 내 것, 네 것은 네 것’이라는 원칙이 그것이다. 나도 내 이익을 챙길 테니 너도 네 이익을 챙기라고 생각하는 이기주의는 얼마든지 보편화할 수 있다. 이런 이기주의를 놀부 심보와 같은 이기주의와 구별하기 위해 보편적 이기주의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결국은 사회의 발전을 가져온다고 믿고 있다. 그렇다고 보편적 이기주의는 그럴듯한 도덕 원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런 이기주의자들이 남을 전혀 돕지 않고 자기 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자기한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면 얼마든지 돕는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두 자기 이익을 최대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상에는 윈윈 게임처럼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다 이익이 돌아가는 일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편적 이기주의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화되어야 한다.나를 포함한 공공의 이익 (공리주의) : 이기주의가 자기 이익을 위해 사는 사람이라면 이타주의자는 남의 이익을 위해 사는 사람이다. 무슨 일을 하든, 이 일이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지를 따질 것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 묵묵하게 이타주의자로 살아간다. 그러나 도덕 원리로서 이타주의는 나도 이타주의자로 살려고 하니 당신도 이타주의자로 살아야 한다고 권할 수 있어야 한다. 이타주의는 보편화될 수 없다. 그래서 보편화할 수 있는 그럴듯한 이타주의는 남의 이익뿐만 아니라 나의 이익도 고려해야 한다. 어떤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 결정할 때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이익, 곧 공공의 이익을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 바로 공리주의다. 공리주의는 가장 대표적인 결과론이다. 공리주의자들은 인간 행동의 목적은 행복의 증진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기주의자처럼 나만의 행복도 아니고 이타주의자처럼 다른 사람만의 행복도 아니다.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행복의 양을 극대화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 행복은 좋은 것이다. 행복은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다. 공리주의의 주장은 나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행동이 옳으며, 우리는 그런 행동을 해야만 한다. 이때 ‘모든 사람’에는 내가 아는 사람만이 포함되지 않는다. 행복이 좋은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 가족, 우리 동네 사람뿐만 아니라 내가 속한 사회 전체, 나아가 모든 인류가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행복이 누구의 것이냐는 중요하지 않다.그래서 공리주의의 창시자인 제러미 벤담은 “모든 사람은 하나로 계산되며 어느 누구도 하나 이상으로 계산되지 않는다.” 나만 행복하게 되는 경우와 나를 포함해서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하게 되는 경우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공리주의자는 당연히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나를 포함한 사람들의 행복보다 나와 생면부지의 사람들의 행복이 더 크다면 공리주의자는 그쪽을 선택해야 한다. 벤담은 이런 공리주의의 입장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말로 정식화했다. 그것은 이것을 ‘최대 행복의 원리’ 또는 ‘공리의 원리’라고 부른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고 해서 최대 다수만을 고려해야 한다고 오해할 수 있다. 마치 다수결의 원리처럼. 그런데 다수결의 원리에서는 단순히 사람들의 수에 따라서 결정을 내리지만 공리주의에서는 각 사람들의 선호하는 정도까지 고려한다. 그러므로 다수결의 원리에서 문제되는 소수 억압이 발생하지 않고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심각하지 않을 수 있다. 실제로 밀의 자유론은 소수자 억압에 반대한 대표적인 책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말하는 공리주의자들의 의도는 행동의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의 이익을 고려하여 그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행동이 옳다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어떤 행동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아주 소수다. 그러나 공리주의자들에 따르면 우리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고려해야 한다. 행복의 양을 계산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공리주의에서는 행동의 결과로 나올 행복의 양을 계산해보라고 한다. 행복의 양이라고 해서 꼭 즐거움 또는 쾌락만 계산하는 것은 아니다. 불행도 함께 계산해야 한다. 한 행동에서 행복과 불행이 동시에 생긴다면 그것들의 손익계산서를 짜서, 곧 행복의 양에서 불행의 양을 빼고 남은 양을 고려해야 한다. 개인의 행동뿐만 아니라 공적인 정책을 결정할 대도 공리주의 계산법은 유용하게 쓰인다. 이런 점에서 공리주의는 단순히 도덕 원리가 아니라 유력한 정치 또는 행정 이론이다.행복의 계산 : 공리주의는 아주 간단명료하다. 의무론처럼 지키기 힘든 상황에서도 규칙을 지켜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이익의 결과를 계산하면 되니 센스와 융통성이 있는 이론인 것 같다. 하지만 벤담은 행복은 즐거움이 있고 고통이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그는 즐거움이 원리적으로 계산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러 즐거움들을 비교해서 계산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공리주의자는 행위의 결과를 계산할 때 관련되는 모든 사람에게 미칠 영향까지 계산해야 한다.행복의 양과 질 : 벤담이 즐거움의 양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벤담은 즐거움을 산출하는 것이 어느 것이든 상관없이 산출된 즐거움의 양을 계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같은 생각의 선상에서 그 즐거움을 만들어낸 주체가 누구인가도 상관없다고 주장한다. 똑같은 양의 즐거움이라면 그리고 똑같은 양의 고통이라면 그것은 내 가족의 것이든 모르는 사람의 것이든 다른 민족의 것이든 똑같이 취급해야 한다. 벤담은 더 나아가 그 즐거움이나 고통이 동물의 것이어도 똑같이 취급해야 한다고 한다. 벤담이 공리주의의 창시자라면 밀은 그 계승자다. 밀은 벤담에게서 공리주의의 기본 원리를 받아들이지만 즐거움의 양을 강조하는 것은 세련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즐거움의 양보다는 질을 계산해야 한다는 것이 밀의 생각이다. 그는 즐거움을 고급의 즐거움과 저급의 즐거움으로 나눈다. 대체로 정신적 즐거움이 고급의 즐거움이고 육체적 즐거움은 저급의 즐거움이다. 밀은 그 두 가지를 다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정신적 즐거움을 더 선호할 것이므로 그것이 질적으로 더 나은 즐거움이라고 생각한다. 흔히 벤담의 공리주의를 양적 공리주의, 밀의 공리주의는 질적 공리주의라 부른다. 하지만 밀의 주장처럼 고급과 저급의 즐거움을 모두 경험해본 사람이 고급의 즐거움을 더 선호한다면 그쪽의 즐거움의 양이 더 많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밀의 주장을 즐거움의 양을 계산할 때 질도 고려하라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사실 고급의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즐기기 위해서 오랫동안 훈련이 필요한 것들이다. 각종 즐거움을 모두 경험해본 사람만이 즐거움의 질을 평가할 수 있다는 주장은 엘리트주의처럼 들린다. 이것은 모든 것을 알고 경험해본 사람만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판단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다. 소크라테스는 철학하는 즐거움을 누리며 살았겠지만 자신의 이상으로 생각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생기는 괴로움도 컸을 것이다.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가 밀의 질적 공리주의보다 공리주의의 정신에 더 충실한 것 같다.정의롭지 못한 공리주의? : 공리주의의 문제는 즐거움의 계산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만이 아니다. 우선 공리주의는 정의롭지 못한 이론이라는 심각한 비판에 직면한다. 다시 말해서 공리주의는 우리가 직관적으로 봤을 때 부도덕한 상황을 허용하게 된다. 우리의 직관과 상식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되고, 따라서 공리주의가 지지하는 상황이 우리의 상식적인 도덕과 다르다고 해서 비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우리의 직관이 잘못되었음을 그 직관을 가지고 있는 상식인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객관적인 증거를 제시하여 설명한다. 국민들의 ‘법 감정’이라는 말이 언론에 자주 등장한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도덕 감정’이라는 것도 있다. 물론 그것은 절대 틀릴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시대에 따라 변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도덕적 직관에 잘못이 있다는 합리적 근거가 제시되기 전까지 그것은 존중되어야 한다. 자신들의 이론이 ‘도덕적 직관’보다 더 우위에 있음을 입증할 책임은 ‘도덕적 전문가’를 자임하는 공리주의자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공리주의가 사회의 도덕 감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막나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다. 공리주의자들은 규칙들 간에 충돌이 확실하게 일어날 경우에는 비판적인 수준에서 이익 계산을 하여 더 좋은 결과를 낳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보통의 경우에는 전승된 규칙을 따르는 것이 좋은 결과를 낳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엄격하게 비판적인 입장이 된다면 어느 쪽의 결과가 더 좋은지 잘 계산하겠지만, 그러기에는 지식도 부족하고 실수할 가능성도 있으며 감정이 앞설 수도 있다. 그러므로 공리주의자라도 지금까지 교육받은 규칙을 직관적으로 따르는 경우가 훨씬 많다. 이 점 때문에 현대의 대표적인 공리주의자인 헤어는 도덕 추론을 비판적인 수준과 직관적인 수준으로 구분하여 일상의 삶에서 다소간 넓은 윤리적 원칙들을 채택하고 거기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훨씬 좋다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