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독. 문자 그대로 ‘잘못 읽거나 틀리게 읽음’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이 사전적 의미로서의 오독이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의일 것이다. 비록 수업중의 과제로 접하게 된 책이지마는 산문 집 제목으로 조금은 기이하다는 느낌을 받은 터였다. 머리말을 접하게 되면 작가가 말하는 오독 이라는 것과 내가 알아왔던 오독의 차이점을 금새 알아차릴 수 있었다.작가가 말하는 오독. 정확하게는 창조적 오독은 결국 1에서 2를 보거나 3을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단순히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최초의 1이 보여주고자 했던 모습을 뛰어넘어 보다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내는 그러한 모습의 오독을 말하고 있다. 실상 책의 제목만을 접하여 생각했던 바는, 이러한 특정기법에의 고찰이 주된 내용일까 하는 짐작도 하였지만, 작가는 머리말에서만 오독이라는 단어를 제시할 뿐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실상 작가 자신의 살아온 삶. 정확히는 그 속에 거대한 비중으로 자리하고 있는 ‘문학’이라는 것을 다방면에서 표현하고 있다.본문은 여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첫째로 작가는 작가 자신의 삶 속에 녹아있는 자신의 문학관과 형성된 배경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제목이 그러한 것 처람 학창시절 접했던 시구들과 문학작품들을 작가 자신 내면의 세계에서 어떻게 재해석되어 자신의 근간이 되었는지를 말해주는데, 여기에서부터 작가가 말한 오독의 시작임을 알 수 있다. 시간이 지난 현재에 그 당시 자신의 모습과 일련의 사건을 되짚어 보면서, 단순히 작품을 접하고 오독하여 자신의 것을 찾은 것 뿐만 아니라, 수십년전 작가의 어머니가 작가에게 보여주었던 양태와 메시지를, 현재에 이른 작가가 다시바라보며 그 장면 자체를 ‘오독’ 하여 새로운 가치와 귀중함을 깨닫게 하여주는 듯 보인다. 실제로 이 부분에서부터 머리말에 작가가 설명한 ‘오독’ 이라는 것을 의식하며 한번더 곱씹으며 책을 읽게되었다.이 챕터에서 작가는 자신의 삶과, 자신이 중요하게생각하고있는 것들을 작은 주제들로 풀어놓으면서, 자신이 읽었던 책들을 열거하였는데, 그 서로 다른책들이 작가 나름대로의 시선으로 받아들인 ‘오독’의결과물로써 자연스럽게 호응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자시에 대한 이야기로 첫번째 이야기를 해 나갔다면, 두번째 장에서는 본격적으로 글쓰기란 무엇이며 독서란 무엇이고, 궁극적으로 문학이란 어떻게 향유하는것인지에 대해 말하고있었다. 작은 소제목들과 작은 주제들이 이야기를 이끌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것들은 끄트머리에 작가의 진짜 생각을 끄집어내주는 일종의 얼굴 역할을 한다. 그 무엇인가를 말하기 위하여 작가는 많은 작품들을 열거하고 또한 인용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어색한 부분을 찾기 힘든 것이 과연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른 부분을 받아들인다는 창조적 오독의 효과인가 싶다.이 두번째 장에서 작가는 문학자체보다는 인간의 삶 정신근간을 이루는 것이 문학적인 요소라고 보았을 때 , 바로 그 인간의 마음텃밭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주로 질문하고 대답하고 있다. 서로 전혀 연관 없어 보이는 작은 이야기들 이었지만, 실상 문학적 마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세번째 장에서는 작가가 지금껏 문학인으로 살아오면서 만난 인연들을 소개하고있다.누구나 알고있는 유명작가로부터 생소한 이름들에 이르기까지, 단순한 인물의 설명이라기 보다는 작가의 인생길에 친구이고 스승이었던 사람들과, 그안에 저마다 다른모양으로 가지고있던 문학적 감수성을 작가 자신이 속한 일화와 함께 소개하고있다. 이 부분에서는 딱히 ‘작품’이 돋보이기보다는 ‘인물’이부각될수밖에 없는데, 사견으로는 작가가 인물을 ‘오독’ 한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인생에서 이런저런 모양으로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들의 모습에서 작가는 자신이 말하고자하는 사회적 문화적 주제들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저마다 자신들의 작품세계가 뚜렷한 인물들이었는데, 작가는 그속에서 실제적으로 깊은관계를 가지면서 그들 작품,혹은 그들 스스로가 발하는 그 무엇을 창조적오독으로 받아들인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리하여 작가는 자신의 문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생사에서 문학동도들로부터 받은 영감을 자신만의 가치관으로 해석하여 스스로에게 뿐만 아니라 문학이 감당해야할 시대적인 책임도 함께 강조하고 있었다.나로써는 생소한 작품과 , 인물들 이었지만 오히려 나처럼 생소한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공감대를 형성할수 있는 요소를 인물과 작품에서 꺼내와 문학과 인간에 대한 의미를 환기시켰다.네 번째 장 경계를 넘는 길목은 작가의 외부활동과 그안에서 발견한 문학의 또다른 일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부분이 개인적으로 굉장히 흥미로웠다. 앞선 장들과 달리 이론적인 문학의 모습보다는 주로, 재외한국인들의 문학사적 의의나 해외의 문학사적 발자취 들이 그것이었는데, 원론적 이야기들이 문학 본래의 의의를 갖추는 역할 이었다면, 이 부분은 현실적이고, 또한 그 현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좀더 근원적인 질문들, 예컨대 역사와 자연안에서 찾을수 있는 인간의 사유 같은 것들이다.작가는 이번 장에서도 세계 이곳저곳을 무대로 이야기를 전개시켜나가지만, 이 또한 하나의 통일된 주제의식으로 ‘창조적오독’ 이라는 시각으로 자연과 사람 그리고 이방세계를 바라보며 그안에서 오로지 작가 자신만이 발견한 사실들을 자연스럽게 펼쳐내고 있다. 장의 말미에는 헤르만헤세의 작품과 존펄린의 작품을 주제로 두 작품이 인간의삶, 나아가서는 인류의 삶에 어떻게 적용될수 있는지를 역설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느낀것이라면. 작가의 문학적용범위가 대단히 넓고 깊다는 점이었는데, ‘오독’ 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책들을 이렇게 오독 할수도 있구나 하는 일종의 감명어린 느낌을 받았다.그렇게 이론과 외부의실재를 돌고돌아 다섯 번째 장에서 드디어 작가의 강렬한 외침을 들을수 있었다. 마치 이전의 장들이 준비단계 인 것처럼, 우리의 삶. 바로 지금 우리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말이다. 정부에대해 이야기 하면서 얼핏 주제를 벗어나능가 싶더니, 정치적인 이야기조차 문학의 창을 통해 바라보는 작가의 모습에서 ‘이러한 시각도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나라의 근간인 역사교육을 지적하면서도 행동하는 민주사회를 이야기 하는 대목에서도, 대통령의 올바른 결단을 촉구하는 글에서조차 감정적이거나 정치적 이슈로 흐르지 않고 문학적인 시각으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앞서 작가가 작품과 인물들을 오독하여 적용시켰던 것처럼 인물과 작품을 절묘하게 매치시켜 지식인들의 중립성을 호소하고,이 정부의 문화배척을 비판하는 모습은 정말로 문학인이 취해야할 가장 합리적인 자세로 보이기까지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점은 이 파편적인 현대시대에 우리사회가 문학에 대해 취해야할 태도와 지원 그리고 현주소를 꼬집는 대목이었다. 그 누구도 문학을 근간이라 여기지 않는 세태속에서 무엇하나 나아지지 않는 현실이 문학을 도외시한 결과라고 보는 것도 크게 무리가 아니다.이윽고 맞이한 마지막 장에서는 북한문학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의외의 감정이 우선 들었다. 작가도 본문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일반대중이 북한 문학을 얼마나 이방시 하고 있는지를 나 자신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느낄수 있었다 하겠다.개인적으로는 전혀 생소한 부분이었기에, 곧 잘 이해가 가지않는 때도 있었으나, 기실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문학을 이야기 할 때 우리 삶과 가장 밀접한 부분들을 이야기 해야 한다라고 한다면, 또 그것이 앞으로 우리문학이 낭가야할 방향성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이라면 응당 북한의 문학도 우리가 결국 같이 가야한다는것에 공감이 갔다. 또한 글로벌 시대를 맞이하여 우리 문학이 북한을 포함하여 재외동포문학 나아가서는 한중일의 동북아 문화권의 문학적 협력을 통한 미래를 그리고자 한다는 점에서 수긍이 쉽게 갔다. 늘 그렇듯이 작가는 문학이 인가느이 삶에 어떠한 역할을 해야하고 그것이 이러이러 한 방법이 있을수있다는 형식을 취했다.
메논의 시작은, 소크라테스에게 질문을 가지고 찾아온 젊은 이방인청년 메논의 질문 으로부터 출발한다. 메논은 ‘탁월함’의 교육가능성과 그 방법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다.‘그것은 크게 세가지로써, 첫째 탁월함은 가르쳐질수 있는 것인가? 둘째 본인의 수련을 통해 획득 가능한 것인가? 셋째 본성적으로 가지게 되는 것인가? 혹은 그 외의 요소에 의한 것인가? 하는 것들이다.그 질문에 소크라테스는 먼저, 자신의 무지함을 이야기 하며, 자신 역시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메논이 그에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자, 소크라테스는 본격적으로 탐구에 들어가기에 앞서, 선행되어야하는 규정을 말한다. 그것은 ‘탁월함’이란 무엇인가 하는 좀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되려 이것에 대해 자신은 모르겠다며 메논의 대답을 요구한다. 메논은 자신이 알고있는 탁월함의 개념을 여러 가지 경우들로 표현하지만, 그것은 탁월함의 부분적인 모습일 뿐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반론에 부딪치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그 개념들의 부정확함을 직설적으로 이야기 하지않고, 문답의 형식을 취하여 메논 스스로가 이것이 참된 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소크라테스가 탁월함의 전체적인 정의를 다시한번 요구하자, 메논은 지배하는 것으로 탁월함을 설명하지만, 이것 또한 아이와 노예를 예로들어 부적절함을 피력한 소크라테스에 의해 반박당한다. 그러면서 소크라테스는 형태와 색깔의 정의를 자신이 설명하면서, 메논 자신이 저지른 오류가 무엇이며, 자신이 그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일종의 예시를 한다.메논이 이 설명에 동의하고, 다시한번 정의 내린 것이, 탁월함이란 ‘훌륭한 것을 반기고, 힘을 갖는 것’ 이라고 주장한다. 이 대답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문답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훌륭한 것을 욕구하는 사람이 있다는 명제는 나쁜 것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둔다. 그러나 욕구하는 것이 자신에게 해가될줄 알면서 일부러 욕구하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의 범위내에서 훌륭한 것을 욕구한다. 그러나 획득하는 모든 것이 탁월한 것일수 없다. 왜냐하면 메논은 획득방법에 있어서 부정한 방법을 취하는 것은 탁월함이 아니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정의,절제,경건 같은 요소가 부가되야 한다고 제시한뒤, 그렇게 된다면 결과적으로 정의, 절제, 경건 은 탁월함의 일부일뿐이라고 앞서 동의한 것들에 의해, 메논의 탁월함에 대한 정의는 또 다시 부분적인 모습일 뿐이라고 반박한다.결국, 메논이 내놓은 대답이 모두 소크라테스에 의해 무너지자, 메논은 자신이 소크라테스의 주술적인 말에 현혹당하고 있으며, 마비되는것과 같다고 주장한다. 그는 소크라테스를 전기가오리에 비유하면서, 남들을 마비시켜 어쩌지못하게 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동요하지않고, 자신은 어떤 부분에서 전기가오리와 같은 것이 맞다고 대답한다. 자신은 원래 이 탁월함에 대해 알지못하는 사람이고, 메논은 아는 사람처럼 보였으나 , 지금에와서는 모르는사람과 같이 되버렸으니,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둘다 무지한것이므로, 탐구하여야 한다는 논리를 펼친다.이에 대하여 메논은 알지 못하는것에 대하여 어떻게 탐구할수 있느냐며 소크라테스에게 묻는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영혼은 불멸하여 사람은 전생의 모습이 있다는 이야기를 통해 설명한다.우리는 모두가 이미 알고있는 것에대하여, 수면아래로 가라앉은 지식을 다시 상기시키는것이라는 것이 핵심인데, 이 주장의 이해를 위하여, 메논이 데려온 하인 아이를 대화에 참여시킨다. 소크라테스는 기하학적 지식을 배우지 못한 아이에게 간단한 도형의 제시와, 질문을 통해 아이가 도형에 대해 인식하게끔 유도한다. 일련의 과정들이 진행되고, 아이는 정답을 찾아내지는 못하지만, 질문을 통해 전혀 몰랐던 사실들에대해 스스로 나아가며, 점점 어떠한 확신을 갖게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를통해 소크라테스는 메논에게, 현재 모르는것이라 할지라도, 질문을 통해 일깨우는 것이 반드시 필요함을 주장한다. 따라서 탁월함에 대해 알지 못하는 우리가 이것에 대해 함께 탐구해야만 한다고 말한다.메논은 이것에 동의하지만, 자신이 맨 처음했던 질문의 대답을 다시한번 요구한다.소크라테스는 거부하지않고, 받아들여 탁월함이 가르쳐질수 있는가에 대한 새로운 방법을 메논에게 제시한다. 여기서부터 소크라테스의 가설을 활용한 증명법이 나오는데, 앞서 소크라테스가 말했던 상기의 측면에서, 인식과 상기가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라면 인식 외에것은 사람에게 가르쳐질수 없음을 얻어낸다. 반대로 탁월함이 인식이라면 그것은 가르쳐질수 있는 것이다. 라는 가설로부터 출발한다. 소크라테스는 지속적으로 문답식 대화를 통하여, 메논의 동의와 이해를 확인하는 동시에 가설을 진행시켜나간다.앞선 가설에 의하여, 탁월함은 뛰어난 것이라는것과, 뛰어난 것은 유익하다는 가설을 메논으로부터 동의를 얻어낸다. 계속하여, 유익한 것이 그것으로써 존재하려면 지성, 즉 앎 이 수반되어야한다는 것을 주지시킨다. 왜냐하면 앎이 없는 인도는 필연적으로 유해한 것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메논의 동의를 통해 알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탁월함과 뛰어남과 앎이 상호 관계되어있다는 것을 전제로 둘수있게 된다. 그러므로 뛰어난 사람들은 앎을 겸비해야하고, 이것은 곧 본성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앎은 곧 지성이자 배움을 통해 학습되는 것이므로.앞선 논의를 통해, 소크라테스는 유익한 것은 곧 앎이고, 탁월함은 유익한 것 이므로, 탁월함은 또한 앎이라고 정의하여도 문제가 없음을 밝힌다. 결국 메논은 일련의 논의들을 통해 스스로의 주장으로 고백하기를, 탁월함이 인식이라면, 그것은 가르쳐질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자연스럽게 결론이 도출될 무렵, 소크라테스는 또 한번 반론을 제기한다. 그것은 탁월함이 인식이 아닐수도 있다는 것인데. 그는 지금까지 도출한 결론, 즉, 탁월함이 인식이라면 가르쳐질수 있다는 결론을 부정하지는 않은채로, 또 하나의 의견을 펼친다.소크라테스는 일련의 결과들로 인해 탁월함이 인식이어서 가르쳐질수 있는 것이라면, 필연적으로 그것을 가르치는 교사가 존재하야만 한다고 말한다. 메논역시 이에 동의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즉각 말하기를 교사나 학생들이 없다면 이런것들이 성립하지 않는게 아닐까 하는 질문을 메논에게 던진다. 메논은 그 의견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그런 교사들을 발견할수 없었다고 말하며, 동석했던 아뉘토스에게 그 질문을 넘긴다. 소크라테스는 아뉘토스에게, 무엇인가를 배우기위해 그 분야의 전문가에게 찾아가는 것이 타당함을 주장하고, 아뉘토스 역시 이에 동의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메논을학습 시키기위해 소피스테스 의 필요성을 거론하자 거센 거부반응을 보인다.소크라테스는 아뉘토스의 소피스테스에 대한 극단적인 거부반응에 의문을 나타내면서, 그렇다면 메논을 교육시키기에 적합한 자가 누구인지를 물었고, 아뉘토스는 선대들을 거론하며, 그들로부터 좋은것들을 배울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아뉘토스의 이런 의견에대해, 많은 훌륭한 선대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후예들은 선대의 좋은 것을 온전히 물려받지 못했음을 지적하며, 한사람 한사람을 호명해가면서 실제예를 들어 아뉘토스에게 반박한다. 아뉘토스는 이에 대하여, 소크라테스가 그들을 모욕하고 악담을 하고 있다고 판단하며, 더 이상의 논의는 거부한채로, 소크라테스에게 박해에 대한 충고를 하며 대화의 뒤로 물러난다.다시 메논과 이야기를 이어가는 소크라테스. 메논이 주장하기에 교사라고 자처했던 소피스테스 들을 거론하며, 그들이 교사가 될 수 있는 이유를 메논에게 묻는다. 메논은 처음에는 자신에찬 어조로 답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들이 스스로를 가르치는 자라고 공언하면서도, 어떤때에는 가르칠 수 있고, 어떤때에는 그럴수 없으며, 어떤 것은 답을 해줄 수 있고 또 어떤 것은 그러지 못한다는 것을 제시하여, 그들역시 참된의미의 교사가 아니라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교사가 없으므로 학생이없고, 탁월함은 가르칠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러면서, 인식이 이처럼 부정되었으나, 또 하나의 것을 제시한다. 그것은 올바른 확신 으로써 인식과는 다른종류지만 올바르게 사람들을 인도한다는 점에서 같은 형태를 취하며, 앞선 논의로인해 탁월함은 인식이지만 가르쳐질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올바른확신만이 남겨진다. 적어도 정치적행위에 있어서 정치가들은 올바른 확신으로 사람들을 인도해 나가는데, 이것은 다른데가 아닌 신의 섭리로부터 온다고 주장한다. 즉 지성이 없는 신적인 요인으로써 그들속에 생겨난다는 논리를 취한다.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는 아뉘토스를 설득해보라는 과제를 메논에게 부여하고, 탁월함은 생성방식이 중요한 것이 아닌, 탁월함 그 자체를 탐구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며 대화는 끝이난다.[메논]을 읽고...플라톤의 책은 변명 이후 나에게는 두 번째 책이었다. 오래전이어서 많은 부분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 메논을 읽게되면서 많은 부분이 다시 기억나기도하여, 이 난해한 책을 읽는데 어느정도 도움이 되었음을 부인할수 없다.우선 작중내용은 그다지 길지않은 대화로 되어있는데, 당시 시대적 화두였던 탁월함과 그 습득방식에 대한 토론이다. 메논과 소크라테스 는 많은 의견들을 서로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결국 소크라테스는 어린 청년 메논에게 주지의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하여 특유의 산파술을 잘 이용한 듯 보였다.메논이 질문한 것들에 앞서, 탁월함의 정의에 대해 문답하는 장면을 보아도, 그는 답을 아는 것처럼 보이지만, 직설적으로 가르치려 하지않는다, 오직 문답을 통하여 그 스스로 깨우치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사실 책의 모든 내용을 종합적으로 상기해봤을 때, 신의섭리를 들먹이는 소크라테스의 논리구조가 황당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탁월함은 인식일때만 교사도 있고, 가르쳐질수 있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는 이 결론을 정답으로 메논에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또 한번의 문답을 통하여, 이 설정을 스스로 뒤집어버림으로, 다른 이외의 방법으로 얻어지는 탁월함. 즉 당시 정치인들이 가지고 있는 지성이없는 신의섭리로써의 탁월함을 이야기한다.
- 소로우의 무소유 월든 을 읽고수업시간의 과제물이 아니었다면, 접하기 어려웠을 책. 월든. 자연주의나 생태주의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던 내 입장에서 이책은 그다지 큰 감흥을 불러 일으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근들어 개인적으로 현대산업사회가 가진 모순점과, 인류가 나아가야할 미래의 방향에 대해 공교롭게도 다른 클래스에서 많은 생각을 가질 기회가 있었고, 그것이 이책을 바라보고 이해하며, 또 내 생각을 덧 입히는데 있어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것을 먼저 밝혀둔다.이책은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딱히 줄거리를 요약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사실상 개인 수필집이라고 보는것이 적절한 정도로, 소로우 자신의 2년간의 숲속 생활과 그안에서 자신이 느낀것들과 보아왔던 것들, 그리고 이 모든 일련의 행동들을 자신이왜 경험했는지에 대한 담백한 생각들을 써내려간 책이기 때문이다.비록 이책이 19세기에 쓰여졌지만, 오늘날의 우리세계 나의 세계에도 아주 정확하게 들어맞는다는 사실을 부인 할 수는 없다. 당시의 세계도 급격한 산업의 발전으로인한 부작용이 점점 드러나고 있었고, 사람들은 자연속의 인간이 아니라, 자연과 따로 떨어진 존재로써, 인생의 대부분을 자신이 소유해야하는 것들을 위해 노동하며 투쟁적으로 살아간다. 그것은 비단 그때의 사회가 가진 모습이 아니며, 현대에 살고있는 우리가 오히려 더욱 심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당장 내 자신만 하더라도, 이책을 읽으면서 현재의 생활에 대해 약간의 회의감이 든것도 어느정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물론 난 그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소로우가 물질화되고 기계화된 세상을 바라보면서 외친 그의 말들, 그이 책들은 분명히 생각해볼만한 여지를 남겨두었다.그는 여러 가지를 이야기했다. 하지만 포인트는 왜 그렇게 사느냐는 냉철하고도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이에대해 우리는 많은 대답을 가질수 있다. 더좋은 집과 더좋은 옷을 구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 일을 하고, 공부를 하며 살아간다. 누구도 이 굴레에서 벗어나진 않는다. 적어도 내가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은 그러하다.그렇지만, 소로우는 바로 이점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는 더 잘살기 위한다는 타이틀을 달고 열심히 사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노예화 시키고 있으며, 그것은 전적으로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는 다른사람들의 평판때문이라고 일갈한다.나는 이것에 대해 적절한 반론을 제기 할수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내가 하고있는 또는 해왔던 노력들의 대부분은 나자신의 만족보다는, 그 일들로인해 다른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봐줄것이고, 그 시선들로 인한 만족감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월든에서도 얘기하듯이,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기자신이 내리는 평판이다. 그것의 다른이름은 고정관념 혹은 편견이라고 불려도 좋을것 같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속에 갇혀사는지도 모른다.예컨대, 좋은 직장에 취직하지 않으면 실패한 사람이다 라는 명제나, 이런옷을 입으면 내 자신이 창피할것이다 라는 명제는 충분히 내자신을 훌륭히 속여왔고 또 앞으로 속일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속이는 편견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무섭다. 우리는 지금껏 그렇게 살아오는데 익숙해졌기 때문에, 다른누군가가 정해준 틀안에 자신을 가둬두는데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처음 그것을 다른 누군가가 던져줬다고 하더라도 그다음부터 그것을 받아들이고 순응해가며 사는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현대산업사회는 우리로 하여금 앞만 보고 달려가라고 한다. 더 빠르게 앞으로 갈때에 우리의 행복이 바로 그곳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물질의 노예가 되고, 기계의 부속품처럼 인생을 살게되는것이다. 마치 찰리 채플린이 영화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임종의 순간에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돌아볼수 있어야 한다는 소로우의 말처럼, 그렇게 앞만보고 달려온 삶에 무엇이 남는지를 다시한번 생각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정말로 그길이 아니면 행복을 얻을수 없는걸까 하는 질문이 일어나야한다.월든은, 그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지금당장의 일에 관심과 전력을 쏟기보다는 한걸음쉬고 주위를 돌아보라고 말하고 있는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그길 이외에도 선택할수 있는 많은 길들을 가지고 있다. 단지, 다른길들에는 돈이 없을수 있고, 좋은 옷이나 주택이 없을수 있다는 두려움이 우리를 그 이른바 실패자의 길로 들어서길 꺼려지게 만드는 것이다.나역시 돈이 많아야하고, 좋은집이 필요하며, 좋은옷이 가지고 싶다.이러한 대다수의 사람들의 소유욕과 욕망에 대해 소로우는 본질적인 측면을 언급한다. 우리가 인간으로써 살아가는데에 필요한 의복은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것 만큼 많이 필요하지도, 더 화려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그는 숲속 생활로 증명해 냈으며, 우리가 원하고 또 살고있는 주택은, 인간이 얼마나 필요하지도 않은것에 많은 진력을 낭비하고 있는지, 그의 오두막을 통해 깨닫게 한다. 우리는 지금 얼마나 집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우리나라만 해도 주택난이 가장큰 화두로 떠오를만큼 이 문제는 우리와 아주 깊게 연관되어 있다.평생 얼마를 버는 기준이 집을 한 채 살수 있느냐 없느냐로 결정되며, 어느 공문서를 보더라도 소유한 집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따지고 들어간다. 이러한 사회에서 좀더 크고 넓은 집은 자신의 행복과 직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소로우의 오두막을 보면, 또 그러한 집을 선택하게된 배경과 그의 생각을 읽어보면, 사람에게 있어서 집이란 잠을 잘 때 위에 덮어두는 비가리개나 바람가리개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그다지 큰 공간도, 화려한 공간도 필요없음을 알게된다.의복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누구도 헤어진 옷을 입고 십어 하지는 않지만, 사실 그러한 옷을 입는다고 해서, 나 자신의 본질적 품격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단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 그 시선 때문에 우리는 의복에 디자인적인 요소를 생각하고, 명품을 찾게된다. 하지만 이역시 소로우에 관점에서는 하잘것 없는 짓거리일 뿐이다.식량은 또 어떠한가, 우리는 스테이크를 썰기위해 한주를 살아가지만, 스테이크가 없다고 사람이 만족감을 느끼지못하거나, 영양소 결핍으로 죽지는 않는다는것을 소로우가 몸소 보여주었다. 자 이렇게 의식주라는 모든 형태의 인간기본요소들이 소로우의 관점에서 해부되었다. 그의 관점과 현대사회가 가지는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나 자신이 느끼는 무언가에 집중하기 보다는,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존중받는것에 더 치중하는 현대인들의 의식구조의 차이일 것이다.소로우는 사람들의 생각이 세상의 의견으로 인해 천편일률적으로 되어가고 있다는것에 치를 떨었다. (적어도 내게는 이렇게 보였다.) 그래서 그는 이른바 대세에 따르지 않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본문을 계속 살펴보면, 그가 숲속 생활을 하며 느끼고 경험한 여러 가지 일상의 모습들이 나열되어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하나의 사건들과 사실들 보다는, 그속에서 그가 자꾸 같은것을 반복적으로 전달하려 하고있다는것을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