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증의탄생’ 과연 독자들의 이해를 잘 도울 수 있는가?‘논증의 탄생’ 이란 책은 책제목에 나와있는 탄생이란 말과는 달리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논증을 제대로 할 수 있고, 논증에 대한 글쓰기를 잘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는 책이다.이러한 책들은 독자들의 수준을 판단하여 이해를 도와야 한다. 하지만 이 책은 충분하지 못한 이해를 돕는다. 특히 독자들이 쉽게 접하지 못한 용어들을 사용하여 혼란스럽게 한다. 물론 어떤 독자들은 이 책을 재미있고 쉽게 읽을 수 있지만 대다수의 독자들이 혼란스럽고 지루한 책이라고 생각 할 것이다. 그래도 독자들을 위해 쉽게 각 장마다 쉽게 요약을 한 페이지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요약 페이지에는 명확한 예시가 없으며, 어려운 용어의 개념이나 설명이 불충분하다. 독자들의 충분한 이해를 돕도록 이 책은 명확하고 간결한 표현과 용어로 수정되어야 한다.여기서 “정말로 이해가 잘 안될까?” 등의 문제를 제기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자신이 이미 독자로서 경험을 해보았으며 주변 지인들도 이 책을 읽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선 명확하게 답변할 수 있다. 답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이다. 일단 주변 지인으로부터 생각들을 많이 듣게 됨으로, 대부분의 독자들 생각이 이렇다고 알 수 있었다. “왜 이해가 안될까?” 에 대해 본격적으로 나의 견해와 주변 독자들의 견해를 이용하여 논해 보겠다.어려운 용어가 독자들에게 책에 대한 반감과 혼란스러움을 유발한다. 이것은 독자들 모두가 거의 동의 할 것이다. 몇 가지 알아보자면, 로고스(Logos), 에토스(Ethos), 파토스(Pathos) 라는 용어는 설득의 3요소 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러한 용어는 처음 접촉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는 이 용어에 대해 설명이 나와있다. 설명하는 책은 이해를 돕기 위한 책이지 무작정 외우라고 강요하는 책이 아니다. 하지만 이 책에는 외우라고 강요하는 식으로 설명만 떡 하니 나와있고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예시나 개념이 충분하지 못하다. 만약 뒷 페이지에 에토스란 용어가 나온다면 독자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당연히 첫 페이지를 보고 “아 이런 뜻이었지~” 하고 다시 참조를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외우라고 강요하는 것이지 이해를 시키는 것은 아니다.예시와 저자의 주장 구분이 어렵다. 내가 이 책을 읽었을 때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예시를 넣었다는 걸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의 단락구분이 명확하게 되어 있지 않아 예시 들어가는 부분은 알겠는데 예시가 끝났는지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았다. 평소 책을 많이 읽었다거나 이런 부류를 좋아하는 독자들은 판단함에 있어서는 정확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와 같은 독자들이 읽는다면 작은 따옴표같이 자세히 봐야 보이는 작은 문장부호 같은 것들은 그냥 지나칠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 보니 예시와 저자의 주장 구분이 어렵기 마련이다.‘논증’ 이란 주제의 대해 너무 장황하게 설명해 놓았다. 이 책 초반부에 나와있는 ‘논증’ 은 우리 일상생활 속 어디나 존재한다 라고 말한다. 저자는 상대방과의 간단한 대화도 논증일수 있으며 논증이 없다면 민주주의도 없다는 글을 썼다. 하지만 정작 글을 읽다 보면 거창하고 장황하게 설명되어 있어 ‘논증’에 대해 다가가기 어렵고 구체적이고 힘든 것이라고 판단하게 될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해 처음 접한 독자들은 혼란스럽게 되고 하나의 전문적인 지식이라고 생각할 것이 분명하다.이 문제들에 대해 반론이 있을 것이고 수용도 있을 것이다. 나는 문제에 대해서 내 견해와 주변 독자들의 견해일 뿐이다. 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을 무시한 결과가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문제를 내놓는 것은 어디에나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고, 이 문제들을 보고 읽을 때는 그냥 지나쳤던 문제점들을 다시 끄집어 낼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인 것이다.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번역판이니 만큼 외국에서 쓰던 실용어들을 우리나라만의 실용어나 실용적인 예시로 수정하여 많은 사람들에 이해를 도와야 하며, 글속에서의 명확한 구분법으로 구분하여야 하고, ‘논증’이란 주체에 대해 쉽게 받아들일 수 있고 반감을 사지 않기 위해 제목이나 챕터를 친숙한 표현이나 간단하게 축소하여 수정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였다면 독자들이 혼란스러워 하거나 반감을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우리는 책을 읽는 독자일 수도 있고 책을 쓰는 저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와 독자 모두 독자라는 초점에 맞춰서 생각하고 쓰고, 읽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다양한 독자들이 있기 때문에 그 모든 독자들에게 정확히 맞는 책은 없을 것이다. 이 책도 이 세상 모든 독자들에게 쉽고 이해하기 좋은 책이 아님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논증의 탄생’ 이란 책은 나에게 좋은 경험을 하게 해주었고, 내가 학생을 벗어나, 사회로 나가게 되었을 때에도 영향을 줄 수 있을 만큼의 영향력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좋은 책들이 많은 독자들에게 읽혀 지려면 독자들에게 특히 혼란스러움을 주지 않도록 수정하고 또 수정하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한다.‘논증의 탄생’60092851윤성찬
창조의 복음0. 문제제기현대 진화론이 주장하는 오랜 지구 역사에 관한 발견들을 볼 때, 더 이상 최근특별창조론의 주장은 무리이다. 수십억 광년 떨어진 별들에서 오는 별빛이나 공룡 화석과 암석 등에 의해 추정된 지구의 나이가 수십억 년이라는 점에는 과학적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최소한 지구의 나이에 관한 한, ‘전통적인’(최근특별) 창조론은 더 이상 그 입장을 유지할 수 없다.이로써 전통적 창조론의 대한으로서 현대 진화론의 대화 상대가 될 만한 새로운 성경적 창조론은 어떤 것인가?1. 교회들의 반응현대진화론에 대한 각 교회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우선 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은 교회의 통제 혹은 비호하에, 영혼불멸 교리에 저촉됨이 없는 한도 내에서, 진화론 연구를 허락한다.정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은 한편 창조기사를 하나님의 직접 증언으로 받고 다른 한편 그 기사를 진화론적으로 해석한다.성공회의 공식적인 입장은 학문 연구의 자유와 창조기사 해석상의 개방성을 근거로 하여 진화론을 개방적이고 적극적으로 검토한다.개혁파 교회는 공식적으로 유신진화론을 인정하는 교회와 전통창조론을 고수하는 교회로 나누어지지만, 모두가 교회 안에 서로 다른 견해들이 존재함을 인정한다.국제적인 기독교 협의체의 공식적인 입장은 교회의 일치를 위해 니케아 신경 같은 가장 포괄적이고 다의적이고 성경 자구를 그대로 인용한 선언을 채택하여 논쟁을 피하는 것이다.매우 개방적인 영국 성공회와 미국장로교회(PCUS) 두 교회를 제외한 모든 교회가 전통적인 창조 교리를 따른다고 선언하였다.전통적인 창조 신앙의 특징으로 첫째로는 개인의 해석을 최대한 배제하고 성경의 자구를 그대로 인용하여 창조 교리를 세우는것과 둘째로 인간 영혼의 신적인 기원에 대한 전제적인 확신을 들 수 있다.그러나 진화론과 연관된 최근의 선언들은 최소한 성경의 자구를 그대로 인용하는 경향에서 벗어나고 있다. 하지만 대개의 보수적이고 복음적인 교회들의 경우, 개혁파의 고전적 신앙고백을 여전히 교회의 신앙 고백으로 채택하고, 현대의 신앙 선언들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따라서 조직신학과 현대과학에 대한 교회의 낮은 관심은 시급히 시정되어야한다. 현대진화론의 도전을 현대과학의 정당한 도전으로 보고 교회의 전통적인 창조교리에 결부된 통속과학적 요소를 검토하는 계기로 삼는 지혜가 요청된다.2. 대안적 창조론 모색창세기 1장의 기사를 재검토함으로써 새로운 성경적 창조 이해를 모색하는 것이다. 창조 기사 재검토가 필요한 이유는 전통적인 창조론은 창세기 1장에 나온 ‘표현 그대로를’ 인용할 뿐, 그 의미를 밝히지 못했기 때문이다.새로운 창조 이해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종말론 이해가 필요하다. 종말론에 따라 전체 신학의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이다(Schuurman, 1991:2; Spykman, 1992:40; Wright, 1951:223). 전통적인 창조론은 전통적인 종말론에 근거하고 있다. 종말론은 그대로 두고 창조론만 새롭게 할 수는 없다. 종교와 현대과학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창조 이해를 얻기 위해서는 새로운 종말론 관점에 따른 창조 기사 재검토가 필요하다.또한 창조를 현대 과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현대과학적인 창조론을 모색하기 위해 피터 J. 와이즈만의 가설적 이론인 ‘간기설’을 우선 검토한다. 이유는 통상 ‘창조 주간’이라고 부르는 창세기 1장의 엿새는 사실은 ‘계시 주간’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특이한 제안을 하였기 때문이다.(1) 와이즈만의 계시 주간창세기에서 10회 사용된 ‘톨레돗’(한글개역에선 주로 ‘대략’ ‘계보’ 등으로 번역)의 의미이다. 이 단어는 역사를 의미하는 단어로서, 통상 가족 역사의 기원적 측면을 말할 때 사용된다. 창세기 2:4의 사례처럼,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 또는 대략이었다.”라고 번역해선 안 되고,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시작이었다.”라고 번역해야 한다는 말이다.ㄱ. 인간교육을 위한 엿새와이즈만 가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관하여 하신 말로 하여금 여러 측면을 고려해 볼 때, 제7일이 인간의 유익을 위한 날이었다면, 그 엿새 동안 한 일들 역시 반드시 인간과 관계있는 일이었다고 가정하고 엿새 동안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땅과 그 위의 모든 생물을 창조하시는 일이 아니라, 과거에 이미 창조하신 창조적 행위들을 계시하신 것임이 명백해진다고 주장하였다.ㄴ. 간기설와이즈만은 구약학자들이 톨레돗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문을 창세기에서 가장 중요하고 특징적인 구문으로 인정하지만, 그 의미나 용례에 대해서는 오해하였다고 주장한다.아담의 시대보다 앞서는 주전 3천 년경의 근동 지방 문서들에 대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톨레돗 구문에 이름이 적힌 인물의 주된 역사는, 그 문구 이후가 아니라, 그 문구 이전에 다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2) ‘새 거주지 소개’ 모델전체 창조 주간은 교육을 위한 주간이었다. 가장 많은 교육 내용은 구분하고 이름 짓는 것, 즉 새로운 생태 환경에 대한 소개였다. 첫 ‘인류’인 아담은 처음부터 성인으로 나타난다. 다른 피조물들은 그냥 거기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들이 어떻게 해서 거기에 존재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은 창조 기사가 관심을 갖는 질문이 아니다. 창조 기사는 단지 자신의 ‘이야기’ 가치를 가진 내러티브를 마치 그 자리에 아담과 하나님만 계셨던 것처럼 서술한다. 연구자의 새 모델이 창조 기사 해석에 있어서 새롭게 조명한 것은, 과거에 부정적으로만 해석되던 2절의 ‘혼돈과 공허’를 ‘생명을 살리는 복된 상태 묘사’라고 제안한 것이다. 창조 기사는 우리에게 가상적인 관찰자가 본 지구의 복된 상태를 소개한다. 그러므로 전통적으로 ‘창조 주간’이라 부르던 것은 ‘새 거주지 소개 주간’이라고 부르는 것이 문맥에 맞을 것이라고 제안한다.결론적으로,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는 ‘새로운 거주자들을 위한 처음이자 가장 중요한 소개’라고 보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들은 그들에게 제공된 지식을 가능한 언제까지나 ‘더 깊이’ 발전시켜야 하는 운명을 받았다. 그러나 이 제안은 “그 소개를 누가, 누구에게 해 준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아무런 대답을 제시할 수 없다. 그것은 차라리 ‘초인간적’ 질문으로 놓아두는 편이 낫다. 언젠가 새로운 자료가 더 많이 쌓이고, 언젠가 새로운 연구 방법이 생겨서 옛 데이터에서 더 많은 정보를 밝혀낼 수 있게 되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3. 신학적 함의(1) 과학적 학문으로서의 신학현대 신학은 현대 과학의 한 분야이어야 한다. 목회자들은 과학적 사고 훈련을 받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교회 신학자들이 과학적 도전을 무시했으므로 평신도 과학자들이 적절한 신학적 지식도 없이 교회 입장을 대표하여 그 도전에 대응을 하게 된 것이다. 평신도들은 필요는 느끼지만 그에 대응할 준비가 없었고, 목회자들은 필요를 느끼지 못하여 비판적인 검토를 하지 못했다.현대 과학의 도전은 대답을 요구한다. 만일 교회가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한다면 먼저 취약한 교인들부터 교회를 등지게 될 것이다. 교회가 우선 할 일은 중요한 교리들을 재검토 하는 일이다. 목회자들이 먼저 과학적인 방법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과학적으로 훈련된 사고를 가진 교인들을 독려하여 함께 교리들을 개정할 길을 찾아야 한다.(2) 비판에 대한 열린 마음성경은 유신진화론 법칙이나 하나님의 창조에 관한 세부 사항에 관하여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시도는 침묵으로부터의 논증에 해당할 뿐이다. 그러므로 최선의 방법은 개방적인 창조론을 찾는 것이다. 동시에 진화론자들 역시 진화 가설과 초경험적 근본 전제를 자체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전통적 단순 진화론을 개방적이고 비판적이고 과학적인 오류검증이 가능한 진화론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환 헤이스스티언은 자신의 진화론적 초경험적 인식론을 이렇게 표현한다. “진화적 인식론의 근본 전제는 우리 인간은 다른 여타의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진화 과정의 결과이며, 따라서 우리의 정신적 능력들도 생물 진화 메커니즘에 의해 강제적으로 틀 잡혔다고 보는 것이다.”(Van Huyssteen, 1999:4) 한편,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그런식의 존재론적 선언을 이렇게 비판한다. “요점은, 진화론자들 중 일부 존재론적 환원주의자들이 하는 선언들은 논쟁을 일으키는 선언일 뿐, 명확한 목적을 지닌 주장들이라 할 수 없다. 창조론자들이 그런 제안들의 부적절성을 문제 삼는 것은 충분히 근거가 있는 주장이다.”(Livingstone, 1987:181)(3) 축복되고 책임 있는 삶이 세상은 선한 것들로 충만하다. 악한 것들은 주로 인간의 잘못에서 생긴 것들이다. 우리 인류가 세계를 바르게 다스리기 위해서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먼저 보편적인 선행을 장려하는 균형 잡힌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 기독교인의 삶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성취하는 삶, 감사와 의미로 충만한 삶이어야 하는 것이다. 탕자가 모든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나 고생하며 결국 발견한 것은 자기 아버지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이었다. 탕자는 그때 자기 자신을 발견하였지만, 다른 아들, 집에서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 있었고 아버지의 것이 다 자기 것이었던 아들은 아버지께 감사하는 마음도 없었고 아버지의 집이 얼마나 복된 환경인지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따. 성경은 우리에게 하늘에 있는 나라를 주겠다는 약속을 주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 땅,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과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중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는 도전 앞에 오늘 우리를 불러 세우신다. 그리고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4. 결론우리는 이 놀라운 행성 지구가 얼마나 복된 행성인지, 그 근본적인 사실을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그 복됨을 인식하면서 성경의 표현 그대로를 반복한다고 주장했던 전통적인 창조론이 사실은 특정한 종교적이고 초자연적인 전제들을 성경 본문에 넣어서 해석한 것임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과학적인 방식으로 개정할 수 있는 한 가지 제안을 제사하였다. 그 제안에 의하면, 아마도 종교와 과학이 합리적으로 상호 반응할 수 있는 건전한 길이 열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