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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양효과 이론 개념과 사례 평가A좋아요
    배양효과이론1. 배양효과이론 개념배양이론(cultivation theory)이란 조지 거브너(G.Gerbner)교수가 개발한 이론으로써 ‘문화계발효과이론’ 또는 ‘문화규범이론’이라고도 불린다. 간단히 말해서, 매스미디어가 현실세계에 대한 인간들의 상 내지 관념을 구성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TV를 시청할수록 TV 드라마나 뉴스가 묘사하는 자극적인 현실을 여과 없이 받아들여, 현실세계에 대해 왜곡되고, 매우 제한적 믿음을 갖게 된다. 1970년대 미국 사회에서 ‘TV에서 묘사되는 폭력’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됨에 따라 커뮤니케이션 학자인 조지 거브너의 ‘배양효과이론’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배양이론은 어른이든 어린이든 TV 노출로 인한 장기적 효과를 다룬다는 특징을 갖는 것이다. 문화배양은 기본적으로 시청자들이 미디어에 의해 수동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와 상호작용을 전제한다. 시청자와 미디어는 닮아가는 점이 있으며, 그 과정에서 개인의 지각된 현실은 점차 TV 세계에 비슷해져 간다는 것이 배양효과이론의 핵심이다.2. 주류화와 공명주류화(mainstreaming)는 TV가 계발시키는 경향이 있는 모습의 상대적 공통성을 말한다. TV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사람들의 생각이 그다지 획일적이지 않았으나, TV와 같은 대중 매체가 비슷비슷한 내용을 유사한 이미지로 거듭 보여 주면서 획일적 이미지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거브너는 이 같은 주류화가 TV의 3B(Blurring, Blending, Bending) 과정을 통해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즉 중시청자들은 경계의 흐림, 혼합, 왜곡 과정을 거쳐 TV의 세계를 실세계인 양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공명이란 TV에서 보던 것들이 실세계에서 동일하게 일어났을 때 TV 매체의 영향력, 즉 계발 효과는 더욱 커진다는 것이다. 누구나 한 번은 물리적 폭력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데, 실제 그 경험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더라도 TV 화면에서 반복되는 상징적 묘사가 시청자들의 마음속에서 실제 경험을 되풀이하도록 함으로써 "TV 세계와 실제 생활환경이 일치되면서 공명효과를 가져옴으로써 증폭된 배양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즉 TV를 통해 두 번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TV의 '배양 효과'가 특정 집단에 편중되어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을 설명해 주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3. 배양효과이론 사례1) 초등학생 장래희망 1순위 '운동선수' - 존경하는 1순위 김연아, 2순위 유재석동아일보 2013년 1월 15일 기사에 나온 것과 같이, 우리나라 초등생들의 장래희망 1순위는 '운동선수'이며 그 밑으로 '교사', '연예인'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SBS 1억 퀴즈쇼에서는 최종라운드 진출자 선정하는 단계에서 '초등학생들이 존경하는 인물 2위는 누구인가'라는 문제가 나왔고, 보기로 세종대왕, 부모님, 유재석이 등장했다. 1위 김연아, 2위 유재석, 3위 반기문 총장으로 나타났다. 어린아이들의 TV시청률과 시청프로그램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를 확보할 순 없었지만, 어느 때보다도 연예인들의 활동이 활발하고, 연예인들의 문화적 영향력이 큰 요즘 초등학생 장래희망이 운동선수, 연예인에 큰 비중이 있는 것은 미디어 매체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TV 프로그램을 통하지 않고서는 접하기 어려운 김연아, 유재석, 반기문 사무총장 같은 이들도 TV 매체에 비교적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피겨여왕 김연아는 뉴스에서 자주 볼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광고와 예능프로그램인 '무한도전', '황금어장' 등에서 게스트로 출현한 적 있다. 국민MC 유재석은 현재 시청률이 높은 '무한도전', '런닝맨', '해피투게더'에서 MC역할을 하며, 이전 많은 예능프로그램에서도 볼 수 있었다. 즉, 정보제공 수단으로서 TV가 가지는 정보접근가능성이 장기간 시청자들에게 비춰지면서 시청자들의 가치관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매스미디어가 현실세계에 대한 인간들의 상 내지 관념을 구성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사회과학| 2014.01.28| 3페이지| 1,500원| 조회(4,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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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사회 기본성격에 대해서
    고려사회의 기본성격에 대해서‘고려사회의 기본 성격’은 고려사회를 지배한 계층의 정치·사회적 성격이 어떠했는가에 대해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현재 고려시대의 귀족제·관료제 논쟁이 본격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고려사회의 지배신분층의 성격이나 특성이 심층적이고도 다각도로 검토되었다. 고려를 귀족제로 보는 논자들은 음서제(蔭敍制)를 귀족제 사회론의 중요한 근거로 보고 있으며, 관료제 논자들은 과거제(科擧制)가 더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논쟁의 핵심은 고려사회가 신분귀속사회인가, 아니면 능력에 의한 성취사회인가 하는 것이며, 지금부터 알아볼 것은 주요 쟁점거리가 되고 있는 음서제와 과거제, 그리고 귀족과 문벌의식이 되겠다.음서제도는 문무 5품 이상의 관품에 오르거나, 자격을 갖춘 관리의 자손에게 관직을 줌으로써 그 후손을 관리로 복무하게 하는 제도이며, 몇 대에 걸쳐서 다수의 자손이 계속하여 음서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한편,『고려사』나 묘지명 기록 등에서 음서가 시제 시행된 사례를 찾아보면, 일반적인 음서와, 그 범위를 벗어나서 시행된 특별한 음서도 있었다.특별한 음서는 부정기적으로 시행되었지만, 일반적인 음서는 실제 사례를 조사해보면 연중 어느 때나 시행된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음서를 의탁한 탁음자(托蔭者)의 관품도 문무 5품 이상에서 2품·1품까지 다양하게 나오며, 탁음자가 사망한 뒤 음서가 시행되는 경우도 많다. 이것은 고려시대의 음서가 본인이 필요할 때 언제든지 시행될 수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두 번째 특징은 음서를 제수받기 위한 일정한 시험이 없었고, 음서를 통해 재추(宰樞)와 같은 고위 관직은 물론 문화시중과 같은 최고의 관직에 오른 인물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음서 출신자가 일정한 제약이나 제한을 받지 않았음을 말한다.결론적으로 음서제는 본인의 능력이나 자질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가문의 배경에 의해 관리의 신분을 획득하고, 그 가문이 계속하여 관리를 배출할 수 있게 하는 제도로서 지배계층의 신분과 특권을 세습해나가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특권적인 제도였다.고려의 과거제는 광종 9년에 처음 실시되며, 제술과(製述科), 명경과(明經科), 잡과(雜科)로 나뉜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제술과였으며, 명경과와 잡과와는 달리 응시자격이 향리의 자제로 제한되어 있었다. 즉, 고려의 과거를 대표하는 제술과는 제한된 신분층에게만 문호가 열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향리를 ‘특권신분층’에 포함하면 계층의 범위가 넓어지고, 실제 과거급제자 중에서 중앙의 관리자제 이외에도 향리 출신이 많았다. 이점을 강조하여 귀족제를 비판하는 입장에서 과거제 원리를 능력위주로 선발한다는 점과 똑같은 조건에서 경쟁하는 과거제 자체가 귀족제적 질서를 파괴 한다는 점을 근거로 설명하고 있다.하지만 고려의 과거제가 운영되는 모습에서 과거제의 시행횟수, 제술과의 평균 급제연령과 국자감시 평균 급제연령, 양인(良人)들이 역(役)을 짊어지는 나이를 비교하여 살펴보면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과거에 합격하려면 학문적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경제력도 넉넉하게 갖추어야 했다. 임춘(林椿), 오세재(吳世才) 등의 인물이 그러한 사정을 말해주며, 더구나 과거에 급제했다고 하여 곧바로 좋은 관직을 받고 출세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관직을 받는 과정에서 성적이나 행정능력보다는 그의 가문이 더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좌주·문생 관계를 맺거나, 유력자에게 자천·타천의 글을 올려 구직을 호소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야만 승진, 출세를 할 수 있었다.그 밖에도 학문적 능력과는 거리가 있는 은사급제(恩賜及第)가 여러 차례 주어졌다는 점에서 과거제가 여러 조건을 골고루 갖춘 지배계층에게 유리하게 운영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즉, 고려시대의 과거제는 순수하게 실력만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정치적·경제적·문화적으로 유리한 지위를 갖고 있는 자에게 특권을 배타적으로 공유하는 방법’으로 운영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실상에 더 접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지금부터는 음서출신자와 과거출신자의 관직생활을 살펴보겠다. 고려시대의 관리들은 여러 관직을 거치며 승진하는 동안 한품제(限品制)와 한직제(限職制)라는 두가지 제도를 적용받았다. 한품제는 출신에 따라 일정한 품계 이상의 관직에 오르지 못하는 제도이고, 한직제는 일정한 관직에 취임하지 못하는 제도이다. 음서출신자와 과거출신자는 모두 한품제의 제약을 받지 않고 모든 품계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 조기에 관직에 진출할수록 승진에 유리했다. 즉, 음서출신자들이 과거급제자에 비해 더 이른 나이에 고위관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그러나 과거급제자와 달리 음서제출신자는 한직제를 적용받았다. 특히, 문한직의 경우 과거급제자가 아니면 이 관직들을 맡을 수 없도록 규정되었기 때문에 과거출신자들은 특정한 관직을 독점하고, 그들만의 조직을 만들어 권익을 지켜나갈 수 있었다. 이점에서 고려시대의 음서제와 과거제는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운영되었고 지배계층을 형성·유지 시켰다.마지막으로 귀족과 문벌의식을 살펴 볼 텐데, 귀족제 비판론자들은 귀족제를 서양 귀족 개념과 연관하여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지배계층에게 중요한 것은 작위를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관리라는 신분을 어떻게 자손에게 이어주는가 하는 데 있었다. 이점에서 작위 세습을 근간으로 하는 서양귀족제를 상정하고 거기에 맞춰 고려의 귀족제를 논하는 것은 처음부터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인문/어학| 2014.01.28| 3페이지| 1,000원| 조회(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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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봉 정도전의 생애와 통치사상
    1. 주제(제목): 정도전의 생애와 통치사상2. 주제 선정 이유조선 건국에 있어서 공신 중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있다. 그 인물은 바로 삼봉 정도전이며, 그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왕조교체기에 사회이념과 제도의 변화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정치, 사상가였다. 한양천도를 주도하고 조선왕조의 제도를 개혁하고 정비하며 이념체계를 정립하는 등 중대한 사업이 거의 그의 의해 추진되었다. 필자는 얼마 전에‘뿌리깊은 나무’라는 드라마를 보았다. 이 드라마의 주요 쟁점은 훈민정음 반포에 대한 삼봉의 유지를 이어가는 세력과 세종의 정치다툼이었다. 물론 드라마이기에 작가의 상상력으로 각색된 것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훈민정음 반포에 대한 권력다툼보다는 조선시대 초기 기득권층이 정도전의 사상 중 어떤 면을 계승하여 조선왕조를 주도해 나갔는지가 필자의 주요 관심이며, 주제를 선정한 이유이다.정도전의 사상을 이어가는 관학파는 고려 말 신진사대부 계층 가운데 조선의 역성혁명을 지지했던 부류였고, 조선 개창의 정치이념을 확립하고 중앙권력을 장악하여 현실정치의 장에서 국가 경영의 실무를 담당하였던 존재였다. 또한 세조의 즉위를 위한 계유정란의 주동 세력으로 관학파 학풍을 이어받은 후손, 즉 훈구파는 정국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따라서 정도전의 통치사상을 살펴보면서 조선시대 초·중기를 주도한 기득권층이었던 관학파 및 훈구파에 대한 정치 성격을 파악하고자 한다.3. 구성요소(차례와 개요)1. 들어가며정도전은 고려 말 성리학 이념을 가지고 치열한 권력투쟁을 거쳐 새로운 왕조를 개창시켰고, 초기 국가운영의 설계자 역할을 도맡았던 인물이다. 이 같은 설명만으로도 정도전은 충분히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며, 국내 학계에서 주목을 받아왔다. 현재까지 그에 관한 단행본과 논문이 수십 편이 될 정도로 연구가 많이 되어왔고, 이러한 많은 연구는 부남철, 한영우, 도현철, 최상용 교수 등에 의해 다양한 분야에서 성과를 걷었다. 정도전에 대한 연구 성과를 얻음으로 인해 정도전의 생애와 권문세족에게 돌아갔고, 이들은 친원반명(親元反明)의 외교정책을 펼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도전은 우왕 원년(1375) 외교문제의 갈등으로 전라도 나주의 거평부곡(居平部曲)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는 거평부곡 가운데서도 소재동(消災洞)의 산간 마을에 살았는데, 여기서 부곡민들과 어울려 살면서 느낀 여러 가지 체험을 시와 산문으로 썼다. 이것이 뒤에《금남잡제》와《금남잡영》으로 편집되었고, 다시《삼봉집》으로 실려 전해지고 있다. 그 중에서 가난(家難), 소재동기(消災洞記), 답전부(答田父), 금남야인(錦南野人)등이 유명하다.(2) 유랑기: 우왕 3년~9년정도전은 우왕 3년 7월에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또 7년 동안 삼봉, 부평, 김포 등지를 전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도전은 정신적인 면에서 유배되었을 때보다 더 어려웠던 시기로 보이는 데, 그 이유는 우왕 원년에 함께 유배되었던 동지들이 관직에 서서히 복귀하면서 심한 고립감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육체적인 어려움뿐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도 ‘유량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3) 재기와 모색의 시기: 우왕 9년~14년정도전은 혁명을 모의하기 위해 함주(咸州) 이성계를 찾아갔다. 당시 이성계는 왜구 토벌로 명성이 높았고, 동북면도지휘사로서 동북지방의 국토방위를 책임을 맡고 있었다.1384년, 정도전은 혁명을 위해 다시 벼슬길에 올라 7월에 서장관 직책으로 정몽주를 따라 명나라에서 외교사업을 성공적으로 마쳤으며, 이듬해인 4월에 성균좨주(종3품)으로 승진하여 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었다. 그 후 이성계의 추천으로 성균관대사성에 오르게 된다.우왕 14년(1388) 5월 22일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한 뒤 최영을 처단하고 실권을 잡았다. 그 후, 보수반동 정치를 주도한 우왕을 폐위하고 그의 아들 창왕(昌王)이 옹립되었다. 그러나 이성계의 요구를 가장 충실히 받아들일 수 있는 임금을 모시기 위해 이듬해 창왕마저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옹립하였다.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킨 뒤에 정도전은 그 공으전이 재정권을 장악하고, 군사훈련을 통해 군사 지휘권을 장악해 가던 시기였으며, 태조 3년(1394)부터는 병권을 장악하고 문물제도 정비에 참여하였다. 이 시기 정도전의 업적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새 왕조의 통치규범인《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편찬했다는 것이다. 이는 훗날《경국대전》편찬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조선경국전은 조선왕조 500년의 통치기틀을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이 외에 주목할 만한 업적 중의 하나는, 한양 건설 사업이었다.태조 이성계는 한양의 무악을 주산으로 하여 도읍을 건설하고자 하였는데, 여론에 반대가 있자 8월 12일에 여러 재상들로 하여금 새 수도 후보지에 대한 의견을 올리도록 명하였다. 이에 정도전은 새 수도 건설보다는 민생안정이 더 급하기 때문에, 도읍 건설을 천천히 할 것을 왕에게 건의하였으나, 이성계의 한양에 대한 애착을 꺾을 수 없었다. 결국 9월 1일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이 설치되었고, 그 이후 정도전이 종묘·사직·궁궐·시전·도로 등의 터를 정하고, 도면을 만들어 사업을 주도하였다.한양의 도시설계는《주례》의 동관고공기에서의 국도조영의 원리를 따른 듯하지만, 우리나라 자연환경에 맞게 조정하였다. 그리하여 백악산을 주산으로 해서 그 밑에 정궁인 경복궁(景福宮)을 두고, 경복궁의 좌우에 종묘(宗廟, 동쪽)와 사직(社稷,서쪽)을 배치하였다.태조 4년(1395) 정도전은《고려사》(37권)의 편찬을 완료하였으나, 지금은 남지 않아 알 수 없다. 하지만 김종서 등이 편찬한 ‘고려서절요’의 모태가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6월 6일 정도전은 판삼사사로서《경제문감(經濟文鑑)》을 지어 왕에게 바쳤다. 이해 9월 궁궐과 종묘가 완공되어 12월 정사(丁巳)에 새 궁궐로 이사하였다. 10월 정유에 경복궁을 비롯한 근정전(勤政殿), 사정전(思政殿), 교태전(交泰殿), 강녕전(康寧殿), 연생전(延生殿), 경성전(慶成殿) 등의 이름과 궐문의 이름을 지었다.태조는 정승 조준과 김사형에게 이듬해 1월부터 한양 주변에 도성을 쌓으라고 명하였다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즉, 고려사회가 몰락하게 된 데에는 권문귀족들의 전횡도 큰 몫을 차지하지만 국가의 공적인 통치 질서를 와해시키고 국가의 경제를 무너뜨렸다는 점에서는 이들도 같은 역할을 하였다. 정도전은 이러한 점에서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를 강력히 주장하게 된다.이러한 문제를 시정하려면 권력구조상 두 가지 조건을 필요로 한다. 하나는 백성에 대한 지배권을 일체 중앙정부에 집중하여 관권으로 이들을 억제하고, 다른 하나는 관권의 남용을 관권으로 하여금 감독·견제를 하게 하는 일이다.정도전은 鄕(향)-縣(현)-州(주)-諸路(제로)-臺省(대성)-宰相(재상)에 이르는 상하 통솔관계를 명확히 하고자 했다. 이는 府(부), 州(주), 郡(군), 縣(현)으로 이어지는 지방 행정체계를 체계적으로 정돈하여, 마치 몸이 팔을 부리고 팔은 손가락을 부리는 것과 같아야 한다는 논의로 연결된다. 여기서 상하관계가 정해져 대(大)가 소(小)를 통제하고 소(小)를 대(大)에 예속시켜 상하 명령계통이 확립되도록 했다. 이를 통해서 중앙의 지방에 통제력을 강화시키고, 호족이나 권문제족들에 의한 사적 지배에서 나오는 폐단을 막으려 하였다.또한 수령에 대한 감독을 철저히 행하고 관내지역을 순행하여 민정을 살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집권체제를 확고히 다지기 위해서는 제도적으로 감사의 위상을 정립하고 이를 통하여 지방의 토호·향리 등 지방 유력자들을 제어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수령에 대한 감독권을 높이고, 지위와 권한이 높아진 감사를 재상에게 귀속시켜 일원적이고 직선적인 지배관계를 확립하려고 했다. 결론적으로, 정도전은 중앙정부로 전국을 일원적으로 지배하려 하였고, 권력을 상하로 계층화하여 전문화시킨 뒤, 권력 상호간에 견제와 감독 기능을 부여하려 하였던 것이다.2) 군주론정도전은 유학자로서 유교적 이상군주를 지향했다. 그는 왕조국가에서 군주는 천명의 대행자이고 왕정을 이끌어가는 최고의 통치자이며, 천하의 인민과 토지를 소유하는 최고의 권력자로 보았다. 그러나 왕권은 상징적이면서 관념적인 한하기 위한 상징적이고 관념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정도전에게 있어서 군주가 토지와 인민에 대한 최상급 소유권자라는 사실은 별도의 사적 소유권을 제한할 수 있는 근거였다. 그렇기 때문에 정도전은 과감하게 군주의 사유재산 보유가 모든 폐단의 근원임을 주장할 수 있었다.3) 재상정치론재상은 수직적 정치질서 하에서 위계상으로 국왕 밑에 있기 때문에 위로는 국왕을 돕고 아래로는 모든 상·하급 관료를 이끌어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이다. 정도전은 재상의 어원을 따져 재상제체를 풀이하였는데, ‘재상’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재(宰)는 주재하여 다스린다는 재제(宰制)의 뜻하고, 상(相)은 국왕을 도와준다는 의미의 보상(輔相)의 뜻을 갖고 있다. 즉, 재제는 재상이 실권을 가지고 정치의 기본원칙을 정하며, 그것을 집행하는 것을 의미한다.재상의 실권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첫째는 최고의 정책결정자로서의 권한이다. 재상은 정화(政化)와 교령(敎令)을 결정하며, 이것을 재상이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국왕과 협의하여 결정한다. 이 때, 국가의 정책결정과정에 있어서 국왕과 재상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존중하는 자세로 대화하여 진지하게 협의해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정도전은 국왕과 재상이 주의해야 할 점을 말하고 있는데, 재상의 경우 국왕의 의지만을 순종하는 것은 격군의 책무를 소홀히 하는 것이 때문에 재상은 적극적으로 헌가체부(獻可替否)할 것을 주장하였다. 반면 국왕은 현인을 쓸 줄 모르고 자기의 주장만을 내세우는 독재자가 되지 않도록 주의를 주고 있다. 따라서 정도전은 현명한 국왕이란 재상을 잘 고르고 그 재상의 의견을 경청할 줄 아는 왕이며, 치국의 기본원칙은 국왕의 재가를 얻어 확정하지만 그 결정의 주도권은 재상에게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여기서 정책을 협의·처결할 때 군주가 독재를 고집한다면 재상은 막을 수 있는 직접적인 견제방법이 없기 때문에 어떤 왕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재상의 권한이 신축될 수 있다. 그러나 정도전은 국왕의 전단을 막을 수
    인문/어학| 2014.01.28| 10페이지| 2,000원| 조회(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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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후기 대외관계 평가A+최고예요
    조선 후기 대외관계의 전개-청과 일본을 중심으로-1. 들어가며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은 뒤, 중국에서는 왕조가 바뀌어 명(明)에서 청(淸)으로의 왕조의 교체가 있었고, 일본에서도 에도막부가 성립되어서 나름대로의 국내적인 변화를 겪는 상황에 있었다. 이에 따라 조선후기 청과 일본과의 관계에 변화를 가져오면서 동아시아 정세도 변화의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다. 본 발제에서는 17~18세기 조선의 대외관계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 정치·경제사적으로 알아보고자 한다.2. 호란이후 외교관계인조 15년(1637) 정월 30일 인조가 청 태종 앞에서 굴욕적인 항복의 의식을 행한 후,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청나라에 들어가 명나라 정벌을 위한 문제로 조병(助兵)·군량(軍糧)·향화(向化)와 관련 된 활동을 하였으며, 또한 청측의 요구에 의하여 의례적인 행사·서정(西征) 및 사냥에도 참여했다. 세자가 귀국한 것은 1645년 2월 17일이며, 순치제(順治帝)가 중원(中原)을 평정하였을 때 조선국 인질인 소현세자를 귀국토록 했다.그 해 4월 소현세자가 갑자기 죽자 봉림대군(鳳林大君)은 5월에 청에서 돌아와 9월 27일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1649년 인조가 죽자 창덕궁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다. 효종은 즉위 후 곧 강경책인 대청 무력정벌을 시도하는 북벌론(北伐論)을 결의하고 그 계획과 준비에 힘을 기울였다. 먼저 남한산성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수어청(守禦廳)의 군사력을 정비했고, 이완(李浣)을 대장으로 어영청군(御營廳軍)을 크게 증가시켰다. 또 북벌정책의 일환으로 국왕의 친병(親兵)인 금군(禁軍)을 전부 기병화(騎兵化)하여 강화하였다.효종 5년(1654년)과 9년(1658년)에는 청조가 조선에 군사력을 요청하면서, 흑룡강 방면의 나선(羅禪)정벌에 참여하였다. 나선정벌은 1차와 2차를 걸쳐 진행되었다. 2차에 걸친 나선정벌은 비록 적은 수의 군사를 보냈으나 큰 전과를 올리게 된 것은 당시 사격술과 전술이 뛰어났음을 보여준다.그 후 북벌이 촉진되는 과정에서 적지 보고의 형식으로 작성된 것도 있었지만, 조선의 연행록이라 하면 대개 사적인 성격으로 저술된 것이며, 그 종류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품종이 많고 분량 또한 방대하다. 최초로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수집, 간행한 연행록선집(燕行錄選集)에는 총 20종이 수록되어 있으며, 현재 학계에서 파악된 연행록의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연행록은 견문과 관찰이 광범위하다는 점을 주목할 수 있다. 당시 중국은 조선인이 접할 수 있는 대외세계의 거의 전부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중원의 문물 경관에 대해 깊고 넓게 호기심을 가지고 관찰하였다. 그리고 조선인은 청나라에서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청조의 통치와 사회상을 기술할 때 표현의 자유를 가지고 있어서 조선인들은 청조의 언론통제에 영향을 받지 않고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 중국에 간 사신들 가운데 당대 최고의 문인, 학자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고위자제도 수행원자격으로 사행에 적극 참여하여 견문을 넓히고 중국 인사들과 교류할 기회를 가졌다.18세기에 쓰여진 연행록으로는 김창업(金昌業)의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홍대용(洪大容)의『담헌연기(湛軒燕記)』,박지원(朴趾源)의『열하일기(熱河日記)』등이 있다.(1)김창업의노가재연행록김창업의 『노가재연행록』은 기행문(紀行文)으로 『가재연행록(稼齋燕行錄)』이라고도 부른다. 1712(숙종 38)년 저자의 형 김창집(金昌集)이 동지사 겸 사은사(冬至使 兼 謝恩使)로 청에 가면서 146일간, 행정(行程) 600리(里)의 기행문과 시 402편을 수록하였다. 또 자유로운 대화를 그대로 제시하여 상황을 주관의 개입없이 사실대로 보여준다. 기행문에서는 연도(沿道)의 산천 · 관방(關防) · 사관(寺觀) · 백성(百姓) · 속요(俗謠) · 비판(碑版) · 서적(書籍) · 기용(器用) 등을 기록하였다.(2) 박지원의 열하일기『열하일기』는 조선 정조 시기의 실학자 박지원의 연행기이다. 그는 동행자라는 자유로운 관점에서 요동(遼東), 열하 등지를 지나며 보고 들은 중책정하고, 당상관원에게는 특별히 1,000냥을 더하여 3,000냥을 8포 정액으로 규정하였다. 당상·당하역관들은 각기 주어진 은으로 청의 물화를 대량 수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역관들은 자기 몫의 8포외에도 상통사가 상의원, 차상통사가 내의원의 8포 무역을 담당하는 등 사행정관의 8포와 구분한 각 관아의 별포무역(別包貿易)도 대행하였다.(2) 18세기 사행무역의 구조17세기 후반부터 사상은 사행원역들과 결탁하거나 서울과 지방 관아에 청탁하는 방법으로 사행무역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 점차 무역로에 접한 평양(平壤)·의주(義州) 등의 부상들은 관장들에게 청탁하여 무역을 전담하는 ‘무역별장(貿易別將)’으로 등장하였다.17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관동에서 상품생산이 증가하여, 상품이 조선 사행로에 있는 심양·요동·책문으로 집하되면서 양국 상인들을 자극하였다. 그 중 책문과 심양에서 이루어진 교역이 주목되었다.당시 사상들이 부연사행으로서 북경까지 가지 않고도, 책문과 심양에서 관동물화를 수입할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단련사제(團練使制), 둘째는 여마제(餘馬制), 셋째는 연복제(延卜制)였다. 그리고 심양·책문무역을 조종한 난두들의 역할도 컸는데, 이들은 운송청부업체로서 조선의 사상들과 결탁하여 단련사 일행이나 여마제 및 연복제에 편승하였고, 관동 각지의 상고를 책문으로 유치하여 후시무역을 실현시켰다.이러한 제도에 따른 폐단 증가하자, 숙종은 연복제와 여마제 자체를 혁파하여 책문후시를 봉쇄하였고, 이에 사상들은 점차 단련사행에 파고들었다. 이들을 ‘심상(瀋商)’이라고도 불렀는데, 그 수가 늘어나면서 단련사들이 이들로부터 사사로이 상세를 수취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1705년(숙종31) 정부는 이를 규제하고 재정에 충당하기 위하여 “단련사는 의주부 내의 군관 대신 부근의 변장(邊將)을 윤차(輪差)토록 하고 사상에 대한 수세도 상고들이 직접 의주부에 납세하여 고마비(雇馬費)에 충당하되 세은액을 각각 4~5냥 정도로 책정하라” 명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시청하는 장군의 국서를 먼저 보내되, 장군의 호칭은‘일본 국왕’으로 칭하도록 할 것둘째, 임진왜란 당시 도굴된 왕릉의 도굴범을 잡아서 보낼 것셋째, 죄 없이 끌려간 조선 피로인을 돌려보낼 것조선에서 제시한 3가지 조건이 1606년 8월 쓰시마 섬에 전달되었고, 1개월만인 9월, 도쿠가와의 국서와 도굴범 두 명을 압송해왔다. 조선에서는 이미 그것들이 거짓임을 알고 있었으나 조선의 요구가 관철되었다는 명분과 교섭의 주도권을 조선이 갖는다는 외교적 실리를 취해 당초의 계획대로 강화를 성립시키기로 하고 사절을 파견하기로 했다. 1607년 1월, 강화를 위한 조선 사절단‘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가 막부에 파견되었다. 이로써 임진왜란에 의해 단절된 양국의 국교가 정식으로 회복되었다. 이후 2년 뒤인 1609년(광해군 1) 무역을 위한 기유약조(己酉約條)를 맺어, 임진왜란에 의해 단절된 교린(交隣)관계를 다시 회복했다. 이후 1617년 2차 회답겸쇄환사를 파견해 일본의 오사카 평정을 축하했고 이어 1624년 3차 회답겸쇄환사 460명을 파견해 에도막부 3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미츠(德川家光)의 장군직 습직(襲職)을 축하했다. 본격적으로 통신사 사행이 활성화 되는 것은 1631년 국서개작사건(園廣改作事件)이후로, 조선은 일본과 새로운 외교 체제를 수립하는 한편, 북방에서 세력을 팽창해 가는 후금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하게 됐다. 이런 대륙 정세 변동과 맞물려, 1636년부터 통신사를 부활시켜 마지막 사행인 1811년까지 막부의 장군이 교체 될 때마다 축하의 의미로 사행을 보냈다.1811년 이후 통신사행이 이루어지지 못한 데에는 일본의 경제적 궁핍과 조선 멸시관, 19세기 접어들면서 조선과 일본 모두 서구 세력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는 요인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1811년 이후에 조선과 일본의 교린관계는 단절되었다.2) 통신사의 사행 경로통신사는 궁궐에서 국왕에게 인사를 한 뒤, 부산까지 내려가면서 미비 된 여러 가지를 준비했다. 그리고 부산에 도착한 통신사 일행은 고구마 종자를 가져와 조선에 재배시키므로 인해, 구황작물로서 백성들의 생활을 이롭게 했다는 것과, 통신사를 통해 고추·토마토·후추 등이 들어옴으로 우리나라 한식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점을 들어 단지 사행기록으로의 역할만이 아닌 그 사회의 변화를 기록했다는 것에도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5. 일본과의 무역1) 왜관설치조선후기 왜관은 절영도(絶影島)에서 두모포(豆毛浦)로 그리고 초량(草梁)으로 이어지는 부산 단일왜관이었다. 왜란 직후 일본에서 파견된 강화교섭사자들에 대하여 당시의 국내정서상, 대의명분상 출입을 허가할 수 없었던 상황 속에서 절영도왜관은 성립되었다. 두모포왜관 시기에는 왜관운영을 위한 각종 제도가 생겨나고 왜관시설이 갖춰졌으며, 초량왜관의 성립으로 조선전기부터의 일관된 왜관 정책인 ‘왜관통제’ 및 왜관 시스템이 완성되었다.그리고 조선전기와 달리 후기에는 부산에만 왜관이 설치되면서 외교의례 및 접대는 서울, 무역은 서울과 포소왜관이라는 도식이 무너졌다. 부산포왜관은 양국의 외교교섭이 수시로 진행되는 공간이었고, 안정적인 무역장소를 제공하였다.2) 사무역과 밀무역쓰시마 섬 상인과 동래상인은 매달 여섯 번 왜관에 모여 무역을 상감하고 수출과 수입을 결정하였다. 이것을 개시무역(開市貿易)이라 하며, 동래상인은 개시무역을 하는 대가로 상업세를 내었다. 이 세금은 왜관을 관할하던 동래부(東萊府)와 호조(戶曹)의 중요한 자원이 되었다. 상인들은 개시대청(開市大廳)에서만 무역을 할 수 있었는데, 이는 밀무역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상업세는 상인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기 때문에 상인들은 왜관의 일본인 방에 몰래 들어가 거래를 하는 밀무역을 선호하였다. 이러한 밀수가 성행하면서 일본상인은 미리 동래상인들에게 돈을 주고도 물건을 받지 못하는 일이 많았고 또 왜관의 각방에서 하는 밀수가 많이 이루어져 동래부와 호조의 재정이 점점 악화되자 동래부에서는 왜관을 관리하는 역관(譯官)에게 책임을 묻기도 하였다. 왜관무역은 당시 일본이 청과의 국교가 닫혀있어서 청과 일본
    인문/어학| 2014.01.28| 12페이지| 2,000원| 조회(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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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폭(점화)효과이론 개념과 사례
    기폭 효과(priming effect)1. 기폭 효과 개념기폭효과(priming effect)란 미디어 수용 이전에 습득된 개념, 사고, 지식 등이 미디어 내용과 관련되어 있을 경우 미디어 수용 이전의 개념, 사고, 지식 등을 상기시키며 미디어 내용과 연결되어 강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강화의 과정은 일시적인 현상으로 머물지 않고 영구적으로 연관되기도 한다. 또한 기폭의 활성화는 미디어 수용자의 행위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2. 기폭 효과의 모델1) 저장 선반 모델(storage bin model)저장선반모델은 미디어 수용자의 기억 층위를 설명하고 있는데, 기억을 저장하는 선반에 과거 기폭 된 개념을 밑으로 하고 그 위에 최근에 기폭 된 개념들이 쌓여 진다는 것이다.2) 저장 배터리모델(storage battery model)저장 배터리모델은 배터리를 충전하는 것과 같이 두뇌 속에 특정 개념들이 계속 보강될 경우 장기적으로 강한 충전효과를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3) 시냅스관점모델(synapse view model)시냅스관점모델은 저장선반모델, 저장배터리모델 중 어떠한 개념이 중요한가는 시간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인데, 저장선반모델은 단기적 효과를 암시한다면, 저장 배터리모델은 장기적으로 나타날 기폭효과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3. 기폭 효과의 활성화 변인1) 지각된 의미지각된 의미란 미디어 수용 이전 학습 내지 경험을 통한 기억이 미디어 수용 시 재활성 화 되면서 기폭효과를 높이게 되는 것이다. 매스미디어 시청 이전에 지각된 정보가 매스미디어 시청 내용에 반영된다는 점이다.2) 지각된 정당화 가능성지각된 정당화 가능성은 시청한 내용대로 행동할 경우 야기될 수 있는 결과가 어떠한가를 인지하고 있을 경우 기폭활성화 정도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다.3) 등장인물과 동일시등장인물과 동일시는 미디어에 등장하는 인물과 자신을 얼마나 동일시하느냐에 따라 미디어 등장인물과 정신적 네트워크가 형성되면서 기폭효과를 활성화하게 된다는 것이다.4) 지각된 현실감지각된 현실감은 매스미디어의 내용을 얼마나 현실로 받아들이냐에 따라 기폭효과가 달라진다는 것이다.4. 기폭 효과의 사례1) 예능 프로그램 '스피드 퀴즈'스피드퀴즈는 기폭효과를 이용한 게임으로 흔히 예능 프로그램 구성으로 사용된다. 스피드퀴즈의 기폭효과 원리를 말하자면 전달자는 답에 관한 유사한 몸짓 또는 단어를 알려준다. 그 몸짓과 단어의 한 개념이 수용자의 머릿속에서 활성화 되면 수용자는 그것과 관련 된 개념들을 떠올려 답을 말한다. 예를 들어 무한도전 290회 스피드 퀴즈에서 탕수육이라는 답을 가진 박명수는 자장면 집이라는 단어를 수용자에게 던진다. 수용자 머릿속에서는 자장면 집이라는 한 개념을 활성화시켜 그와 관련된 여러 단어를 떠올리는데, 단무지, 짬뽕, 탕수육 등이 그러한 것이다. 이 밖에 기폭효과와 관련된 게임은 실루엣 토크, 냄새로 음식이름 맞추기 등이 있다.2) 드라마 뒤 광고인기 있는 연예인을 광고에 등장시키는 이유는 그들이 가진 긍정적인 이미지를 광고의 이미지로 끌어올려 서로 연관시키는 기폭효과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드라마 시청률이 높기 때문에 기폭효과가 무의식적으로, 자동적으로 큰 힘을 발휘한다.
    사회과학| 2014.01.28| 3페이지| 1,500원| 조회(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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