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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국어국문학과 졸업논문] 재난을 통한 인간 말하기_김애란과 편혜영을 중심으로
    [국어국문학과 졸업논문] 재난을 통한 인간 말하기_김애란과 편혜영을 중심으로
    졸업논문재난을 통한 인간 말하기- 김애란과 편혜영의 소설을 중심으로지도교수 * * ***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 *2014목 차I. 서론Ⅱ. 재난 서사 속에서의 인간1. 재난의 징후2. 재난 속의 인간 다루기1) 김애란: 고립감과 공포에 사로잡힌 인물들2) 편혜영: 욕망과 추락의 아이러니 속 인물들Ⅲ. 몰락과 신생의 가능성Ⅳ. 결론◈ 참고문헌I. 서 론본고는 김애란, 편혜영의 ‘재난’을 소재로 한 소설 비교를 통해 두 작가가 재난을 다루는 방식에서의 차이 분석을 목적으로 한다. 더불어 두 작가가 제시하는 재난 속의 인간상을 살펴보고, 그 속에서 재난을 통한 신생의 가능성을 짚어 볼 것이다.그 동안 ‘재난’ 키워드로서의 김애란과 편혜영 소설 연구는 ①2000년대 이후 재난과 묵시록 서사 연구의 일부로 언급되거나, ②김애란론/편혜영론 이라는 작가론적 범위와 개별 텍스트 논의의 일부로 언급되어 왔다.2000년대 이후 재난과 묵시록 서사 연구에서 복도훈은 ‘세계의 끝’이라는 키워드로 2000년대 묵시록 소설을 분석하며 김애란의 「물속 골리앗」이 재난의 자연화라는 한계를 가진다고 지적한 바 있다. 더불어 편혜영의 「재와 빨강」에 언급되는 ‘일상의 면역력’에서 재난에 대한 무감각을 포착하며, 이것이 자아와 타자의 구분이 불가능한 자가면역질환을 닮아있다고 말했다. 신수정은 2000년대 한국 소설의 묵시록적 상상력을 편혜영과 박민규의 소설을 중심으로 ‘포스트모던 묵시록’으로 규정하고, 이것이 인간의 조건을 심문하는 계기로 작용한다고 보았다.다음으로 작가론적 범위와 개별 텍스트 논의의 일부로 언급된 경우, 장미영은 김애란의 소설을 ‘청년의 고립된 자아와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으로 읽으며 그 공간성에 주목했다. 벌레들과 물 속 골리앗에서 재개발구역과 맞닿은 공간은 재난과 함께 그 비극성을 증폭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조효원은 편혜영의 재와 빨강에서 재난은 기능하지 않으며 핵심은 재난 이전과 같은 이후라고 지적한 바 있다.이처럼 이제까지 다른 김애란과 편혜영의 ‘재난’ 키워 앞에 있던 거라 모를 수가 없었다. 한동안 위태롭게 휘청거리더니 폭우를 이기지 못해 결국 꺾인 모양이었다. 가지는 얼마나 물을 빨아들였는지 한껏 부풀어 있었다. 부러진 기둥이며 허옇게 드러난 뿌리는 처참하고 음란해보였다.「물속 골리앗」,p.115커다랗고 오래된 나무가 쓰러지고 꺾이고 난 후에도 굴착기와 골리앗 크레인은 묵묵히 제 할 일을 한다. 어찌 보면 나무를 쓰러뜨린 자리를 그것들이 차지한 것 같은 느낌마저 준다. 굴착기와 골리앗 크레인이 문명의 상징이라면 나무는 그에 의해 파괴되는 자연의 상징일 것이다. 두 소설에서의 나무는 ‘3백 살쯤 먹었’(p.54)을지도 모르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p.115) 있던 고목이며, 주인공들에 의해 신성한 것으로 비유된다. 나무가 가진 신성성, 생명성은 여성 혹은 어머니의 이미지와도 연결된다. 「벌레들」에서의 쓰러진 나무는 ‘자궁이 적출된 여자’(p.79)로 비유되고 그것은 마치 수천마리의 벌레들을 낳는 듯한 장면을 연출해낸다. 이어 ‘헤프게 다리를 벌리고 있’(p.79)는 나무 앞에서 주인공이 다리를 벌리고 출산을 준비하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물속 골리앗」에서도 소년이 놓친 어머니의 시신은 ‘마치 여러 개의 팔을 가진 신’(p.116)처럼 보이는 나무와 함께 떠내려간다. 또한 소설 앞부분에 제시된 나무의 ‘살아남는 것’(p.86)에 대한 의지와 그 생명성은 홍수 속에 표류하게 될 소년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다. 이렇듯 신성성과 생명성을 가진 나무가 쓰러지고 꺾이는 것은 소설 속에서 재난의 징후로 작용한다. 이는 벌레가 떼를 지어 등장하거나 세상이 물에 잠기는 것이 결코 어느 날 갑자기가 아님을 짐작케하는 대목이다.반면 편혜영의 소설에서 재난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거나 주의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재난의 징후를 포착하거나 재난이 일어나는 과정 자체는 별 주목을 받지 못한다. 은 전염병이 창궐한 C국의 입국심사대에서 검역을 받게 되는 주인공의 모습으로부터 시작된다. C국은 전염병으로 검역과 방역이 일험이 닥칠 때는 어떤 경고도 없는 법이었다.’(p.8)2. 재난 속의 인간 다루기1) 김애란: 고립감과 공포에 사로잡힌 인물들고립과 타인의 존재에 대한 믿음김애란이 제시하는 재난 속 인간은 고립이라는 키워드 안에 있다. 사실 김애란의 소설에서 고립감은 낯선 감각이 아니다. 타인과의 분리, 좁혀지지 않는 거리, 거기에서 오는 고립감은 소설집 『비행운』을 관통하는 감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만 이 고립감이 「벌레들」과 「물속 골리앗」에서는 극단적이고 가시적으로 나타날 뿐이다. 산달이 다된 임산부와 열다섯의 소년이라는 주인공들의 처지는 극단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고립감을 더 심화시킨다. 그러나 이들은 굳이 콘크리트 잔해 속에서의 출산이나 대홍수 속에서의 표류가 아니더라도 그 상황 이전부터 공간적으로 외부집단과 분리된 위치에 있었다.외부집단과의 물리적 거리는 그들이 살고 있는 장소의 속성으로부터 온다. 「벌레들」에서 ‘나’의 집은 빌라 뒤편에 있는 낭떠러지와 연결되어 있고, 그 밑에는 재개발구역인 A가 있다. 그리고 A를 둘러싼 얇은 부직포 가림막을 넘어서면 모텔촌과 교회와 패밀리레스토랑이 있는 ‘바깥세상’이 있다. 말하자면 장미빌라는 재개발중인 A구역으로 인해 바깥세상과 단절되어 있다.(소설에서는 절벽 위에 빌라촌이 있다고 설명하지만 ‘나’의 시선은 집과 연결된 A구역과 그 바깥세상만을 주시한다.) 「물속 골리앗」의 강산아파트는 그 거리가 더 심화된 위치에 있다. 소설은 강산아파트가 ‘시내 외곽에 을씨년스럽게 서 있’(p.88)다고 표현한다. 더구나 재개발 대상인 아파트에는 소년과 어머니 이외에 누가 남아있는지 알 수 없다. 처음부터 외딴곳에 있던 강산아파트는 차오른 물로 인해 동네가 사라지면서 외부와의 거리를 가늠할 수 없게 된다. 외부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럽게 되는 상황이다.그러나 김애란의 소설에서 물리적 거리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외부 혹은 타인과의 심리적 거리이다. 「벌레들」과 「물속 골리앗」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집은 빌라와 아파트, 즉 집단적 주(p.63)이라고 부른다. 그녀에게 있어서 ‘가난’을 상징하는 A구역에서 들어오는 모든 것을 지우려는 노력은 가난한 A구역과 자신의 집을 구분 지으려는 노력과 같다. 그러나 어디에서 들어오는지 알 수 없는 ‘벌레들’만은 주인공이 손쓸 수 없는 대상으로 묘사되는데, 주인공의 집에서 벌레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이 인상 깊다.“나 요새 생리를 안 해.”순간 남편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뭔가 끔찍한 걸 목격한 듯 얼어붙은 표정이었다.“왜 그래?”남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저것 좀 봐.”「벌레들」,p.60~61집에서 본 첫 번째 벌레인 돈벌레는 주인공이 남편에게 임신 사실을 고백함과 동시에 나타난다. 그러니까 남편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하는 것이 마치 임신 사실을 들었기 때문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것이 오해였음은 금방 드러나지만, 이 장면의 배치는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이제 겨우 안정된 삶을 시작하려는 부부에게 임신은 또 다른 지출을 의미한다. 넓은 집으로 이사 옴으로 인해 안정된 삶으로 한 발 나아갔다고 생각했는데, 임신으로 인해 또 한 발 퇴보하게 생긴 것이다. 따라서 불안정한 삶, 곧 가난에 대한 공포는 벌레에 대한 공포와 맞닿아있다. 재개발 구역을 그저 관망할 때에는 그에 대한 구분 짓기가 가능했지만, 그것이 벌레가 되어 나타나는 순간 그것은 가시적이고 통제 불능한 실재가 되어 주인공을 공포로 몰아넣는다.「벌레들」의 ‘벌레’와 비슷한 형상화 방식은 「물속 골리앗」에서도 나타난다. 「물속 골리앗」의 주인공은 「벌레들」과는 달리 재개발지역의 철거민으로 등장한다. 철거 통지에도 불구하고 공동화된 아파트에 계속 살아가던 주인공은 어느 날 일어난 대홍수로 집을 버리고 세상을 표류하게 된다. 대홍수의 발생으로 인해 보금자리를 빼앗기고 물 위를 표류하는 소년의 모습은, 설령 홍수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도 집을 잃고 떠돌았을 철거민의 신세가 되었을 소년의 처지와 별 다르지 않다. 이렇게 생각하면 ‘전 국토가 공사 중’(p.112)인 세상이 홍수에 잠기는 97조효석과 그의 아내는 비상상황을 위한 벙커 제조업체 올세이프에 근무하고 있다. 이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업무를 ‘두려움을 파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올세이프의 상담원으로 근무하는 아내는 오지 않은 재난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이야기로 고객의 두려움을 자극한다.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잃고 싶지 않다’라는 욕망을 자극하고, 욕망은 소비로 이어진다. 이는 소비자의 욕망을 생산함으로써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극명하고도 단순하게 제시한다.가진 것을 지키고 영원한 안전을 보장받고자 하는 욕망은 재와 빨강의 주인공에게도 작동한다. 그는 매일 같은 빵을 먹는 삶에 어느 정도 만족한다. 적극적으로 회사와 커뮤니케이션을 하거나 타인과 부딪히기보다 그저 아파트 안에 있기를 택한다. 하는 일이라곤 고작 전처의 전남편이자 동창인 유진에게 집에 두고 온 개를 봐달라고 부탁할 뿐이다. 그에게는 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상황을 어필하며 고립된 현재의 상태를 상의할 사람마저도 없다. 그러다가 전처를 죽인 유력한 용의자로 자신이 떠오르자 그는 두려움에 아파트에서 뛰어 내리며 거리로 나간다. 가진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 자신마저 잃게 하고, 안전을 위한 욕망이 그 자신을 완전한 위험에 노출시키는 아이러니다. 그는 이 행위로 인해 ‘자신을 입증하기’라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 이름을 상실하게 된 계기가 순전히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점이다. 이 시점에서 사내의 과거는 그의 이름을 규정하는 본질적 경험이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의 과거를 자의로 부인한다. 이 과거를 부인하는 순간 그의 추락과 전락은 이미 예상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비행기로부터 4층 아파트로, 아파트에서 쓰레기 소각장이 있는 공원으로, 공원에서 다시 도시의 지하를 흐르는 하수구로 점차 하강하는 주인공의 추락은 점염병과 소독약 냄새, 쓰레기와 부랑아, 그리고 쥐의 상태로 떨어지는 그의 존재의 전락 과정을 암시하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그가 바닥으로 전락하기까지 가장 많이 마주
    인문/어학| 2022.12.25| 16페이지| 2,000원| 조회(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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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작문과 발표] 소설, 식민지 조선을 담다_김철의 <복화술사들>을 읽고
    [작문과 발표] 소설, 식민지 조선을 담다_김철의 <복화술사들>을 읽고
    소설, 식민지 조선을 담다-김철의 『복화술사들』을 읽고문학은 시대를 반영한다. 그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사실일지도 모른다. 비록 허구일지라도 그것을 창작해내는 데에는 당대를 살아가는 글쓴이의 경험과 사상이 반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거꾸로 문학을 통해 당대의 경험과 사상을 읽어낼 수 있을까? 김철의 『복화술사들』은 191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 발표된 조선작가들의 소설을 통해 ‘식민지 조선’을 들여다보며 이러한 물음에 좋은 예시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의 대학 입시를 거친 세대라면 익숙할 이광수, 김동인과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돋보기삼아 일제강점기 조선의 언어, 기술, 문화 등을 엿보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과정에서 한 가지 공통된 키워드를 제시한다. 바로 식민지 조선에서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근대성’이라는 키워드이다.소설로 읽는 식민지 조선, 그 속에 드러난 ‘근대성’이라는 것유교국가 조선이 망하고 대한제국을 거쳐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서는 전례 없이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른바 근대문물의 도입으로 조선인들은 ‘근대’라는 것과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다. 일제강점기는 특히 식민지라는 특수성과 동시에 전근대와 근대가 혼재된 모습이 강하게 드러났던 시기이다. 앞서 말했듯이 문학은 시대를 반영한다. 그러므로 1910년대에서 1940년대의 소설 역시 전근대와 근대가 동시에 존재하던 조선의 현실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이 책은 기차·전화와 같은 신문물의 등장이나 재판·우편과 같은 신제도의 등장, 혹은 영어·일어와 같이 조선에서 새로운 위상을 차지하는 언어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일제강점기 조선의 모습을 소설을 통해 탐구하고 있다.그러나 또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근대화된 현실을 소설이 담아내는 것뿐만 아니라, 근대화된 현실이 소설의 근대화를 가져왔다면? 이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말이면서도 동시에 필연적으로 함께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예를 들면, 기차라는 근대 문물의 도입은 당시의 작가들에게 새로운 감각의 경험과 창작의 실마리를 제공함과 동시에 결과물로서의 소설 속에서 시대를 비추는 핵심이 된다. 또 다른 예로 이광수의 작품에서 영어나 일어가 단편적으로 나오는 부분은 굳이 이광수가 근대적 언어습관을 담아내려는 의도 없이도, 이미 이광수 안에 내재된 근대적 습관으로 인해 창작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이렇듯 일제강점기의 근대성이라는 것은 식민지 소설에서 창작의 원천이자 창작의 결과물로 나타난다. 저자는 책에서 두 가지 관점을 동시에 사용하여 소설에 나타난 일제강점기의 근대성을 분석한다.언어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이 책은 여러 가지 개별적인 대상을 다루는 챕터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나의 이목을 끈 챕터는 언어에 관한 챕터였다. 보통 근대의 상징이라고 하면 기차, 전화와 같은 물질적인 것을 생각하기 쉬운데, 근대로의 이행기에서 언어의 변화라는 것은 내게 매우 흥미로운 일로 다가왔다. 한국소설과 표준어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세 번째 챕터 은 방언 사용자인 내가 가장 먼저 읽은 챕터이다. 표준어와 방언의 구분과 그로 인한 국어 내에서의 위상 변화가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을 이 책으로 인해 처음 알았다. 또한, 그 동안 수없이 읽어왔던 이광수의 에서 평양출신 기생 영채가 표준어를 쓰고 있다는 사실 역시도 여태껏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비교 대상으로 제시된 김동인의 를 비슷한 시기에 읽었는데도 말이다. 이는 당시에 계몽주의자였던 이광수가 이러한 표준어와 방언의 위계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로 제시된다. 이광수의 소설은 이 책이 다루는 언어에 관한 내용들에 자주 언급된다. 소설이라는 것이 언어로 구현되는 예술인만큼, 이광수의 근대적·계몽주의적 엘리트의식이 그의 언어에 그대로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또한, 당시에 영어와 일어의 혼용이 꽤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던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당시의 지식인이었던 윤치호처럼 한글이 쓰기 불편한 언어로 인식하고 대신에 영어와 일어를 선택한 사람도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이는 저자가 가진 한국어에 대한 관점의 근거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저자는 글머리에서 “나는 ‘국어의 순수성’ ‘국어의 단일성’ 따위의 말을 결코 믿지 않으며, 더구나 ‘국어의 우수성’ 따위를 주장하는 사람들 보기를 ‘돌같이’한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여태껏 정규 교육과정에서 ‘국어의 우수성’에 대해서만 배워왔고, 그것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아왔던 나에게는 이 말이 마치 폭탄발언처럼 들렸다. 그러나 윤치호의 경우와 관련지어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근대화를 거치며 한국어와 한글이 ‘제 1의 것’으로 선택된 것이 그다지 필연적이지만은 않다는 얘기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하는 나로서는 새롭고 흥미로운 관점이다. 이 책, 특히 언어에 관한 챕터들에서 저자가 제시하는 다양한 관점들은, 고등학교 때까지 배웠던 얕은 지식에만 의존해왔던 나의 편협함을 반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우리가 가진 근대성의 출발은?앞서, 저자는 일제강점기의 소설을 통해 식민지 조선의 근대성을 탐구한다고 밝힌바 있다. 그렇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우리와 닮아있는 것은 진정 100년 전의 조선일까? 저자는 글머리에서 이렇게 말한다.지금 우리가 읽고 쓰고 말하는 한국어와 한국 문학은 일제 식민지 기간에 그 기본적인 틀이 형성되고 자리가 잡혔다. 식민지가 근대며, 근대는 식민지다. 이것을 부정하면 실상이 안보이고, 실상이 안보이면 어거지와 폭력이 난무한다.물론 언어와 문학에 한해서이지만, 사람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다소 파격적인 관점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민감한 부분인 만큼 모두들 한번쯤 생각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문제가 아닌가 싶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근대성의 출발은 과연 어디서부터일까?
    인문/어학| 2022.12.25| 3페이지| 1,000원| 조회(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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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불교와 현대물리학] 空假中(공가중)의 불교적 해석과 현대물리학적 설명
    [불교와 현대물리학] 空假中(공가중)의 불교적 해석과 현대물리학적 설명
    주제: 불교와 현대물리학의 물질관-空假中의 불교적 해석과 현대물리학적 설명Ⅰ.들어가며불교는 흔히 종교로 불리지만 그 사상은 철학에 가깝다. 그래서 불교와 현대물리학의 만남은 철학과 과학의 만남으로서 역설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 불교의 사상의 현대물리학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다. 이 보고서에서는 불교 사상의 핵심 원리인 空(공)·假(가)·中(중)을 해석하고 그것을 현대 물리학과 연관시켜 설명할 것이다. 사실상 불교 사상에서 공·가·중은 따로 떼어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개념이다. 그러나 이 보고서에서는 편의를 위하여 하나씩 분리하여 설명할 것임을 미리 알려두는 바이다.Ⅱ.空假中의 불교적 해석ⅰ.空(공)불교에서는 사물을 볼 때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불교의 관점에서 일체는 연기적으로 얽혀 있어, 일체의 존재는 실체가 없고 관계론적 의미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실체가 없다’는 말은 공사상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불교에서는 ‘나’의 존재 자체도 부정한다. 이것을 무아(無我)론이라고 한다. ‘나’의 존재도 나의 의식 속에서만 존재할 뿐, 나의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아무것도 없다’라는 허무주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연기의 원리로 이어져 있는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일정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건의 연속이라는 것이다.불교의 이런 공사상은 불교경전에서 가장 유명한 말인 ‘색즉시공’이라는 말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색즉시공이란 눈앞에 전개된 사물이 실체가 없는 빈 것으로서 사실상 헛것이라는 뜻이다.ⅱ.假(가)앞서 공사상의 핵심이 ‘실체가 없다’라는 말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실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에서 ‘가립(假立)’이라는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가립이란, 사실 실체가 없는 일체의 존재에 사람이 정의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실체가 없는 것에 사람이 임의적으로 의미를 부여했으니 이것은 사실상 거짓(假)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이 정의하고 의미를 부여한 존재들은 본래적이거나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다. 이것은 다시 ‘일체의 존재는 실체가 없다’라는 공의 원리로 귀결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과 가는 떼어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ⅲ.中(중)불교에서 중은 중도의 원리를 말한다. 중도란, 이분법에서 벗어나 전체를 파악하는 것이다. 사람은 어떤 것을 인식할 때 ‘이것 아니면 저것’의 이분법에 기초하여 하나의 극단만을 취한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편견으로 보고 편견에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으로 중도를 제시한다. 어느 것 하나만이 옳은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견지에서 볼 때에는 모두가 옳다. 앞서 일체의 존재는 연기적으로 얽혀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은 일체의 존재는 끝없이 상호작용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주와 객의 구별은 무의미하며 전체는 하나이다.중도의 원리는 사물의 이중성과도 연결된다. ‘젊은 아내와 그의 어머니’라는 그림에서는 ‘젊음-늙음’이라는 논리적으로 대립되는 개념이 중첩되고 있다. 그림이 이중성을 가지는 것이다.Ⅲ.空假中의 현대물리학적 설명ⅰ.空(공)-입자와 파동고전 역학적 세계에서 본 입자란 질량을 가진 실체로서, 입자는 다른 입자에 충격을 가하여 운동량을 전달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파동은 입자로 된 물질이 진동할 때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으로 정의한다. 고전 역학에서는 입자와 파동은 상이한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입자가 파동의 성질을 갖거나 혹은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할 수 없다.1801년 영국의 물리학자 영은 빛이 의심할 수 없는 파동이라는 증거를 제시했다. 빛을 두 개의 슬릿에 보냈을 때 마치 파동을 보냈을 때처럼 보강간섭과 소멸간섭이 일어나 스크린에 간섭무늬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1923년 미국의 물리학자 컴프턴이 빛이 전자를 튕겨나가게 하는 현상을 발견함으로서 빛도 운동량을 가진 입자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냈다. 이로서 빛은 입자이자 파동으로 정의되었다. 빛이 이중성을 가지는 것이다.데이비슨-거머는 영의 실험을 전자빔으로 다시 하여 전자는 입자이면서도 파동성을 띠고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렇다면 전자를 하나씩 보낸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전자가 입자이든 파동이든 둘로 쪼개지지 않는 이상 간섭무늬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간섭무늬는 파동이 두 개의 구멍을 통과할 때만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자를 하나씩 보내어도 간섭무늬가 나타났다. 이상한 것은 전자가 어느 쪽 구멍으로 오는지 관찰하면 간섭무늬가 사라졌다. 그리고 관찰하지 않으면 어김없이 전자는 간섭무늬를 만들었다.이 두 실험은 무엇을 뜻하는가? 자연은 이중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입자와 파동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측정하기 전에는 파동으로서 전 공간에 파동이 파져있으나 측정하면 어떤 한 지점에 입자가 생겨나고 파동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측정 전에는 입자가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다.이것은 자연을 이분법으로 보아 입자와 파동으로 나누는 인간의 의식 때문에 나타나는 혼란이다. 이는 자연이 중도의 원리, 그 자체임을 나타낸다. 자연을 입자와 파동으로 나누는 것은 양 극단으로 나누는 인간의 어리석음일 뿐, 자연의 전체로 본다면 이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또한, 측정 전에는 입자가 없다는 물리학적 결론은 애매하고 불확실한 미시세계에서는 관찰자가 관찰을 행할 때에만 구체적인 실체를 갖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관찰이 행해지지 않을 경우, 원자나 소립자는 하나의 허깨비에 불과하다. 이것은 가립된 존재인 것이다. 인간의 분별이 만들어낸 존재이고 실체가 없는 것에 의미를 부여한 것뿐이다. 이는 곧 공사상과 연결된다.측정 전에는 파동으로 퍼져 있던 것이 측정하면 입자가 생겨난다는 해석의 연장선에는 ‘코펜하겐 해석’이 있다. 이는 물리이론으로서 ‘측정량은 측정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측정하기 전에 미리 말할 수 있는 물리적 실재는 없다’라는 내용이다. 관측결과는 관측 행위에 의해 나타난 것으로 객관적 실재는 없다는 것이다. 이 또한 불교의 공사상을 현대물리학적으로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ⅱ.假(가)-재규격화와 가유물리학자들이 입자라고 할 때 이것은 특정한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 어떤 물리량의 세트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만약 측정한 물리량이 입자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것이라면 이 물리량들은 입자의 고유성질로서 외부의 영향 없이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외부의 영향을 최소화 하려면 물리계를 진공상태에 두어야 한다. 그런데 양자론에서 보면 진공이란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입자와 반입자의 생성-소멸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상태이다. 그래서 입자가 진공과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 가상적인 상황에서 갖는 물리량인 ‘벗은 물리량’의 개념이 필요하다. 그러나 벗은 물리량은 실제로 정의되지 않는 개념이다. 모든 물리량은 진공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영향을 받는데, 이 상화작용을 통해 얻은 물리량과 벗은 물리량을 합치면 측정된 물리량이 얻어진다. 그러나 상호작용을 통하여 얻게 되는 물리량들은 계산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실제로 의미 없는 ‘이 값’과 의미 없는 ‘저 값’을 결합하여야 비로소 의미 있는 측정값이 나온다는 결론을 낼 수 있다. 이처럼 물리량이 의미를 갖도록 결합하는 것을 ‘재규격화’라고 한다.‘재규격화’는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측정이전에는 물리적 실재에 관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즉, 입자라는 실재가 있어서 측정값을 얻는 것이 아니라, 측정값의 세트를 입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측정값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측정값이 에너지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어느 범위를 넘어서는 높은 에너지에서는 입자의 정체성이 완전히 바뀐다.따라서 이것은 ‘존재한다는 것’은 연기적 관계에서 나타난 가유(假有)일 뿐 자성을 가진 존재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자성이 없는 존재란 곧 실체가 없이 가립된 존재라는 뜻이다. 어떤 존재가 실체가 있어서 특유의 속성(=자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그렇게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에 잠정적으로 그렇게 존재하는 것뿐이다.ⅲ.中(중)-중도와 상보성 원리인간의 일상적 경험세계는 거시적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이 거시적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질량, 에너지, 위치, 운동량 등의 개념과 용어를 만들어내었다. 인간은 이들 거시적 세계를 기술하는데 적합한 용어와 개념을 떠나서 사물을 기술할 수단을 달리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미시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도 거시세계를 기술하는 수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인문/어학| 2022.12.25| 4페이지| 1,000원| 조회(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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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완득이> 레포트_ 영화 <GO>와의 비교 분석
    마이너리티의 소년들;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에서-영화 와 비교분석1. 들어가며‘다문화, 퀴어, 외국인 노동자, 지겨워, 장애인, 탈북자, 혼혈, 제기랄, …’시대를 막론하여 사회에는 필연적으로 주류가 발생하고 그에 따른 소수자가 발생한다. 특히 지난 총선에서 필리핀 출신의 이자스민 의원이 비례대표로 당선되면서 우리 사회에 가장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소수자 문제가 ‘다문화’이다. 한국 사회는 총선 이후 이어진 다문화 정책으로 인해 한바탕 논쟁을 겪은 바 있다. 이처럼 메이저리티와 마이너리티는 항상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갈등에서 약자의 입장이 되는 마이너리티에 주목한 영화가 바로 (2011,한국)와 (2001,일본)다. 두 영화는 각각 10년의 차이를 두고 한국의 다문화 가정, 일본의 재일조선인 가족을 영화의 주체로 끌어오며 한국과 일본 사회에 마이너리티에 대한 재고를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마이너리티를 다룬 영화라는 커다란 범주 안에 함께 속한 두 영화일지라도, 영화 속에서 마이너리티의 모습과 그가 속한 사회의 모습을 구현하는 방법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본보고서는 영화 와 에서 나타나는 마이너리티로서의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세계, 그리고 갈등과 영화 속에 재현된 마이너리티의 모습을 중심으로 두 영화를 비교분석 하고자 한다.2.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세계2.1. 영화 의 주인공과 그의 주변먼저 의 주인공인 도완득(유아인 분)부터 살펴보자. 완득은 ‘얌마, 도완득!’이라는 담임 동주(김윤석 분)의 부름으로 표상될 만큼 선생님에게 자주 불리는 문제아로 등장한다. 그러나 완득의 행동을 살펴보면 수업시간에 잠을 청하고 싸움을 좀 잘할 뿐, 문제아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착하다. 그는 동주의 말을 거역하는 법이 없다. 기껏해야 교회에서 동주를 제발 죽여 달라는 어린애 앙탈 같은 기도가 전부다. 꼽추인 아버지와 지능이 모자란 삼촌이 장을 돌며 공연을 하는 바람에 완득은 집에서 늘 혼자다.그러나 이렇게 착하고 외로운 완득의 주변에는 항상 조력자가 있다. 앞집에 사는 동주는 완득에게 사사건건 관심을 쏟지 못해 안달이고, 싸가지 없는 모범생 윤하(강별)는 어째서인지 완득에게 먼저 다가온다. 영화 의 세계는 완득에게 가혹한 듯하지만 결국에는 친절하다. 부잣집 아들임에도 사회운동을 하는 담임, 학교에서는 싸가지 없지만 완득에게만은 친절한 여자친구, 말은 험하게 하지만 완득에게 킥복싱을 가르쳐주는 관장까지, 세상은 마이너리티인 완득을 몰아붙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완득에게 친절한 사람들로 가득 차있다. 이들은 소년인 완득이 세상에서 마주하는 갈등을 원만하게 해소할 수 있도록 끝없이 그를 도와준다.2.2. 영화 의 주인공과 그의 주변반면에 의 스기하라(쿠보즈카 요스케)는 문제아보다는 ‘또라이’로 불린다. 그는 ‘민족의 배신자’라는 소리까지 들으면서 조선인학교에서 일본인학교로 가지만 그가 ‘또라이’로 불리는 것은 변함없다. ‘또라이’라는 호명 방식은 그를 조선인학교와 일본인학교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데, 그 역시 스스로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조선인학교와 일본인학교 어디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없고 또 찾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또라이적인 면모는 영화 도입부의 ‘슈퍼그레이트 치킨 레이스’에서 잘 드러나는데, 그것은 다가오는 지하철처럼 그를 쫓는 세상에 대한 해방의 몸짓이자 나름의 반항이다.이렇듯 마이너리티로서의 정체성 때문에 흔들리는 소년 스기하라에게 세상은 아버지의 주먹만큼이나 맵다. 그의 주변 인물들은 누구 하나 그에게 위로를 건네지 않는데, 그것이 이 영화의 일관된 방식이다. 조선인학교의 선생은 일본인 학교에 가겠다는 스기하라에게 주먹을 날리고, 일본인 학교의 농구부원들은 대놓고 차별에, 여자 친구 사쿠라이(시바사키 코우)마저 그의 피가 더럽다며 교제를 망설인다. 스기하라는 이런 세상에 아버지의 방식으로 대항한다. 아들의 이가 부러질 때까지 주먹을 날리는 아버지(야마자키 츠토무)처럼 그를 차별하는 세상에 주먹을 날리며 반항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주먹도, 스기하라의 주먹도 폭력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마이너리티에 대한 세상의 폭력에 비하면 그들의 주먹이 너무 약하기 때문일까?3. 영화 속의 갈등과 해결 양상3.1. 영화 에 나타난 갈등과 해결양상영화 에서 나타나는 갈등은 크게 두 가지다. 집요하게 자신에게 관심을 쏟는 동주와 그를 싫어하는 완득의 갈등과 갑자기 나타난 필리핀인 어머니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완득의 내면적 갈등이 그것이다. 동주와 완득의 갈등은 영화 전반에 걸쳐 폭넓게 다뤄지고 비교적 완만하게 해결된다. 영화 초반부터 완득은 교회에서 ‘똥주 좀 죽여 달라’는 기도를 하곤 하는데, 그것은 진심이 아닌 애교에 가까워 관객들을 웃음 짓게 한다. 두 사람의 갈등이 가장 크게 치달을 때는 완득과 어머니를 만나게 하려는 동주에 대해 완득이 거부의사를 내비칠 때이다. 이 갈등을 푸는 열쇠는 두 번째로 제시한, 그러니까 필리핀인 어머니를 받아들이는 문제에 대한 완득의 내면적 갈등이 어떻게 해소되느냐에 달렸다. 그러나 완득이 의외로 서투르지만 따뜻하게 어머니를 받아들임에 따라 동주와 완득의 갈등은 싱겁게 무마되고, 완득이 다친 동주를 업고 뛰는 장면에서 두 사람의 갈등은 완전히 해소된다.이처럼 영화는 갈등의 증폭보다는 갈등의 봉합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갈등의 날은 무디고 인물들은 의외로 쉽게 서로를 이해한다. 동주 역을 맡은 배우 김윤석은 영화 를 ‘인물들의 갈등구조를 극대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눌러버린 영화’라고 설명한다. 이는 영화의 결말부에서도 잘 드러난다. 완득의 동네에 다문화센터가 설립되고 모든 등장인물들이 잔치를 벌이는 장면은 세계와 완득의 갈등을 서둘러 봉합하고 화해라는 이름으로 잘 포장된 해피엔딩을 내놓는다.3.2. 영화 에 나타난 갈등과 해결양상영화 에서는 여러 가지 갈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편인데, 역시 크게 두 가지로 간추리자면 여자 친구 사쿠라이와 스기하라의 갈등, 그리고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스기하라 내면의 갈등으로 나눌 수 있다. 스기하라의 내레이션이 ‘이것은 나의 연애 이야기이다’라며 분위기를 환기하는 만큼, 사쿠라이와의 갈등은 영화의 플롯에서 절정부에 해당한다. 스기하라가 재일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사쿠라이에게 거부당하는 순간 정체성에 대한 스기하라의 고민과 자괴감은 정점을 찍는다. 사쿠라이가 먼저 화해의 제스처를 보냄으로서 두 사람이 화해하게 되는 장면은 스기하라가 ‘나는 그냥 나야!’라고 외치며 내면의 갈등을 희석하는 지점과 맞닿아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스기하라는 원 밖으로 나갈 것을 다짐하며 세상과의 갈등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암시한다.그러나 관객들은 스기하라를 차별하는 세상과 스기하라의 갈등은 영화가 끝나도 계속되리란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스기하라가 ‘나는 그냥 나’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해도 내면의 갈등이 해소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스기하라가 바락바락 악을 쓰는 장면은 관객으로 하여금 대견함보다는 연민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스기하라와 사쿠라이의 행복한 모습을 보이며 끝나지만 영화에 제시된 나머지 갈등에 대해서는 정확한 답을 내리지 않고 있다.4. 영화가 마이너리티를 말하는 법앞서 언급한 와 는 두 작품 모두 사회 소수자인 사춘기 소년들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각각의 영화가 마이너리티를 다루는 법은 각각 상이하다.에는 다양한 소수자가 등장한다. 신체장애인, 지적 장애인, 이주 노동자, 혼혈아… 그러나 그들에게 가해지는 세상의 차별은 영화 속에서 해프닝 정도로 언급될 뿐이다. 영화는 어떻게든 그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달려가는 느낌이다. 그 과정에서 없었던 엄마, 그것도 필리핀인 엄마를 갑자기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야하는 열여덟 소년의 감성을 다루는 손길이 섬세하지 못한 점은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유쾌하고 부드럽게 갈등을 봉합한다. 그렇게 다소 교훈적인 메시지를 전하며 관객들에게 훈훈한 미담을 들려주는 방식으로 사회적 편견을 희석시키려는 의도가 보인다.
    인문/어학| 2021.11.07| 4페이지| 1,000원| 조회(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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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정희 <야국초> 레포트_작품 속 모자관계 분석
    어머니와 그의 분신으로서의 아들-최정희의 「야국초」에 나타난 모자관계 분석Ⅰ.들어가며최정희의 야국초는 그 태생부터가 해석의 다양함을 안고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 강점기라는 배경, 친일파인 작가, 여성 화자의 서술까지, 야국초는 열다섯 쪽 남짓의 적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부터 젠더적 관점까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일 프로파간다 소설이라는 그 본연의 목적과 이 텍스트의 기본 정서가 여성화자의 남편에 대한 복수라는 것에서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그러나 이전의 연구는 친일적 성향 혹은 여성의 복수라는 서사에 매몰된 나머지 여성-국가 혹은 ‘나’-가부장제 등의 대립관계에 초점을 맞추어왔다. 그동안 아들인 승일은 소설 전반에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비극의 씨앗 정도로 주변화된 인물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담론에서 주변부로 밀려나있던 승일이라는 인물은 ‘나’의 복수에서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나’가 복수를 결심하게 된 계기이면서 동시에 복수를 가능케 해주는 존재이다.그래서 이 글은 어머니로서의 ‘내’가 아들인 ‘승일’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 소설에서 ‘나’와 승일의 관계는 어떠한가? 나는 승일을 어머니인 ‘나’의 분신이자 대리인으로 보고자 한다. 어머니인 ‘나’는 아들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고 그 욕망을 실현시킬 대리인으로 아들을 내세운다. 그렇다면 먼저 ‘내’가 하고자 하는 복수에 왜 하필 아들이 필요한 것인 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Ⅱ.결핍된 남성성과 아들의 존재1.남성성에 대한 욕망과 아들먼저 ‘나’는 소설의 말미에서 아들을 잘 키움으로서 ‘제게 하신 당신의 행위에 대한 복수’를 하겠다고 분명히 밝힌다. ‘나’에게 아들을 잘 키운다는 것은 곧 제국의 군인으로 만들겠다는 말과도 같다. 아들을 제국의 군인으로 만든다는 것이 ‘당신’에 대한 복수가 된다는 것은 곧 아들이 없이는 그녀의 복수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아들을 키우는 것이 어째서 복수가 되는가? 또 그녀는 왜 아들을 키울 때까지 복수를 유예했는가? 이것을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여성화자가 자신이 버림받은 원인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를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나’는 유부남인 ‘당신’과의 불륜관계에서 아이를 가진다. ‘나’는 ‘당신’에게 기쁜 마음으로 임신소식을 전하지만 ‘당신’은 아이를 지우라고 요구한다. 그러자 ‘나’는 자조적으로 말한다.‘제가 모든 걸 떠맡아서 처리할 테니까요. 여자란 본디 뒤치다꺼리를 하도록 생긴 게 아닌가요.’‘나’는 자신이 배신을 당하고도 모든 것을 떠맡고 조용히 물러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자신의 젠더에서 찾는다. 아이를 가지는 것에 있어서 선천적으로 여성은 남성보다 더 직접적인 책임을 질 수 밖에 없다. 그녀는 자신이 여성, 그것도 부적절한 관계로 아이를 가진 여성이라는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정상적인 가정을 가지고 지위와 명예를 가진 남성에게 책임을 묻기에는 선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약자이다. 그렇다면 여성으로서의 약점을 극복하고 ‘당신’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남성성이 된다. 이 남성성을 획득하는 방법은 소설의 말미에서 언급하듯이 ‘아들을 키우는 것’이다. ‘나’는 자신에게 결핍된 남성성(말하자면 남근)을 아들을 통해 획득하고, 그 남성성을 ‘당신’의 수준까지 잘 ‘키워야’하는 것이다.그렇다면 ‘나’에게 아들이라는 존재는 복수의 대리인이며 어머니-아들로 구분되는 존재를 뛰어넘어 ‘나’의 분신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아들은 ‘남성성을 가진 나 자신’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인생의 실패’(176쪽)를 시인한 그녀가 아들에게 승일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승일’은 인생의 실패를 겪은 자신과는 달리 아들만은 모든 것에서 승리하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긴 이름이다. 이 염원은 ‘내’가 ‘당신’이 가진 남성으로서의 권위 때문에 제대로 대항한번 해보지 못하고 패배한 것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내가 하지 못한 것을 아들에게 바라는 어머니의 모습을 ‘나’는 가지고 있는 것이다.2.아버지와 구분되는 남성성남성성에 배신당한 ‘내’가 복수를 위해 또 다른 남성성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은 일변 역설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승일이 가진 남성성은 그녀가 ‘당신’이 가진 남성성에 복수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타협해야할 대상이다.소설 속에서 ‘나’는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상황을 두 번 맞이한다. 외나무다리에서 휘청거릴 때 첫 번째에는 ‘당신’이 손을 잡아준다. 위험하니 손을 놓으라는 ‘나’의 말에 ‘당신’은 그녀를 위해서라면 강에 빠져도 괜찮다고 대답한다. ‘나’는 이 말에 당신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지만 그 신뢰는 얼마안가 깨지고 당신의 말은 위선이었음이 밝혀진다.두 번째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상황에서 ‘나’의 손을 잡는 것은 아들 승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당신과의 옛 일을 떠올리고는 벌레를 쫓듯이 승일의 손을 되밀고 만다. 자신의 손을 잡아주는 승일의 모습이 그 아버지와 너무도 닮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옳지 못했다고 뉘우치며 승일의 손을 다시 잡는다. 소설은 ‘내’가 자신의 기분을 살피는 승일 탓에 정신을 차린 것이라고 묘사한다. 그러나 ‘나’는 필연적으로 그 손을 잡을 수밖에 없는 입장에 놓여있기도 하다. 복수를 위해서는 승일의 남성성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의 남성성을 거부하고 불신하는 마음이 손을 뿌리치는 행위로 나타났다면, 다시 손을 잡는 행위는 승일이 가진 남성성과는 타협하고 인정하는 마음의 반영이다.그렇다면 승일의 남성성은 ‘당신’의 남성성과 어떻게 다른가? 승일의 남성성이 ‘당신’의 남성성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모자가 들국화를 보는 장면에서 가장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녀는 들국화를 보고 ‘당신’이 자신에게 들국화와 닮았다고 한 말을 기억해낸다.언젠가 당신과 함께 둘이서 이렇게 논길을 걷고 있었던 때였읍니다. 그때도 지금처럼 들국화가 굉장히 많이 피어있어 당신께선 그 꽃 한 송이를 꺾어 제게 주시면서, "작고 가련한 꽃이지. 꼭 너 같아..." 하셨읍니다.(중략)"승일아, 꺾어가지고 가면 금방 죽을 테니까 그만둬라"저는 추억을 되새기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뿌리째 뽑아가지고 가서 창 밑에다 심으면 오래 살거야, 그지?""그래도 못써. 들국화는 서리가 내리면 시들어버리는 슬픈 꽃이란다.""그래도 한번 시들어버리면 내년 이맘 때 또 피지 않아.""그건 그래도""그럼, 괜찮지?"승일이는 기어코 들국화 몇 뿌리를 뜯었습니다.(밑줄강조; 필자)‘당신’의 말로 인해서 ‘나’는 들국화에 자신을 투사한다. 때문에 들국화는 ‘나’ 자신을 의미한다. 승일이 들국화를 뽑겠다고 하자 그녀는 ‘들국화는 금방 시든다’라며 만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일은 ‘그래도 한번 시들어버리면 내년 이맘때 또 핀다’고 대답하고는 들국화를 뽑는다.주목할 만 한 점은 당신이 들국화를 ‘꺾어’주는 행위와 승일이 들국화를 ‘뿌리째 뽑는’ 행위이다. 시든 들국화가 내년에 또 핀다는 승일의 말과 뿌리째 뽑는 행위는 재생과 다시 태어남의 이미지를 함축한다. ‘나’의 인생을 실패로 몰고 뱃속의 아이를 죽이라고 했던 당신은 ‘나’라는 꽃을 시들게 한 장본인이다. 그러나 ‘나’는 아이를 살리는 것을 선택했고 그 아들은 시들어버린 자신을 다시 피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즉, 계속해서 살아갈 이유와 복수를 꿈꾸는 원동력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들국화=작고 가련한 꽃=나’라고 정의한 당신의 말을 부정하고 들국화를 강인한 꽃으로 키우기로 결심한다.Ⅲ.사회적 지위의 획득- 제국의 군인앞서 주인공 ‘나’는 아들로 인해 결핍된 남성성을 얻었다고 한 바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선천적 남성성, 즉 남성이라는 성별일 뿐 ‘당신’과 같은 수준의 사회적 위치를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또 다른 남성성의 결핍과 마주친다. 일제강점기시대에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생각했을 때 권력이라 불리는 사회적 지위는 남성의 전유물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신’이 ‘나’를 떠날 당시에 가졌던 ‘고향 지점의 지점장’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감안하면 어느 정도의 사회적 권력 또한 복수를 위해 갖춰야할 남성성인 것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기 전에도 예상했듯이 조선사회에서 아버지 없는 자식의 괴로움, 그것도 미혼모의 자식으로서의 괴로움을 가진 승일은 주류사회로의 진입에 커다란 장애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인문/어학| 2021.11.07| 4페이지| 1,000원| 조회(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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