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균진의‘죽음의 신학Ⅰ. 삶 한가운데 있는 죽음의 현실죽음은 확실성과 비확실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사실을 인간을 알기에 죽음에 대한 대처를 한다. 인간은 어떻게 죽음에 대한 의식을 갖게 될까? 인간은 생물학적, 직관적 의식, 실존적 의식, 문화적, 사회적 의식, 종교적, 신학적 의식을 통하여 죽음에 대한 의식을 갖게 된다.삶 속에 있는 죽음의 현실은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아는 인간의 의식 안에 존재한다. 죽음의 현실성을 다섯 가지 측면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존재론적 현실이다. 인간은 유한하다. 그렇기에 인간의 존재는 죽음을 향한 존재이다. 죽음은 인간의 존재 자체와 함께 주어져 있다. 둘째, 생물학적, 의학적 현실이다. 죽음은 먼저 질병을 통하여 하나의 현실로서 삶 속에 존재한다. 셋째, 영적, 정신적 현실이다. 인간은 정신과 영혼과 신체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총체적 존재이다. 그렇기에 이별, 영혼의 슬픔과 고통, 삶의 무의미 속에도 죽음의 현실이 존재한다. 넷째, 사회적 현실이다. 정년 은퇴, 사회로부터의 소외, 노인 계층의 현실적 문제, 잘못된 교육 제도 등을 통해 죽음이 현존한다. 다섯 번째, 정치적, 경제적 현실이다. 사회적 부유층과 빈곤층의 경제적 차이, 제1세계와 제3세계의 경제적 차이를 통해서도 죽음은 현존한다. 여섯 번 째, 생태학적 현실이다. 오늘날 파멸의 보편적 상호 의존이 전 세계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Ⅱ. 현대 사회와 “죽음의 배제”현대 사회는 총체적 죽음의 의식에 사로잡힌 사회인 동시에 죽음이 배제된 사회이다. 죽음의 배제는 죽음으로부터 오는 불안을 극복하고 심리적 평형 관계 내지 평정을 유지하고자 하는 인간의 방어 장치로서 긍정적인 기능을 가지지만, 그 보다는 더 많은 부정적인 결과들을 초래하고 있다.죽음의 배제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인간에게는 죽음의 불안을 회피하고자 하는 심리가 있다는 심리학적 원인, 세계의 탈신화화에 의한 죽음의 탈신화화, 현대 사회의 산업화, 개인주의화, 현대 사회의 더 많은 기능과 생산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 가치관, 핵가족화로 인해 임종과 장례를 경함할 수 있는 기회가 감소, 현대의 병원 체제와 장례식의 상업화, 현대 사회는 죽음에 익숙함이 그 원인이다.죽음의 배제의 결과로 인하여 인간은 현실에 집착하며 그것에 탐닉하는 삶의 자세를 갖게 되며, 결국 욕망의 노예가 되어 끝없이 자기 자신을 추구하는 삶을 모습을 갖게 된다. 또한 주변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무관심해지며 이러한 무관심, 무감각은 결국 무감각한 사회, 냉정하고 냉혹한 사회, 비인간적인 사회를 형성한다. 또한 죽음을 잊으려는 잘못된 삶의 태도를 갖게 되며 사회의 요구에 대해서 순응해버리게 된다. 죽음의 배제는 환경 파괴로도 이어진다.성서는 죽음의 배제에 대해서 방법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먼저 삶 속에 있는 죽음의 현실을 의식하며 그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죽음을 의식함으로써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삶의 지혜는 이 세계의 모든 부정적인 것에 대하여 눈을 뜨게 하고 이것을 제거하고자하는 마음이다. 그리하여 비정하고 비인간적인 사회가 인간적인 사회로 변화할 수 있도록 한다.Ⅲ. 죽음에 대한 성서의 기본 인식성서는 인간을 다양한 측면을 가진 하나의 전체적 존재로 보기 때문에 죽음도 전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죽음을 뜻한다. 구약성서에서는 죽음을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이라고도 보지만 생명을 위협하고 파괴하는 세력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신약성서에서도 죽음은 하나님 없는 삶 속에 있는 파괴적이며 반신적 세력이다.죽음에 대한 성서의 이해의 특징은 죽은 자들의 세계를 하나님이 그 속에서 활동하는 산 자들의 세계로부터 엄격하게 구분하다는 점에 있다.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구약성서에서는 두 세계의 접촉을 엄격하게 금지한다.죽음의 세계는 하나님을 벗어난 독립된 영역이 아니다. 하나님은 생명과 죽음을 지배하는 분이시다. 구약성서에는 죽음의 한계를 깨뜨리는 하나님이 나타나는데 당시의 부활 신앙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부활은 인간의 총체적 존재의 다시 살아남이며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부활이다. 죽음은 부활을 통하여 극복 될 뿐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궁극적으로 폐기 될 것이다.신약성서를 보면 예수의 지상 활동은 죽음에 대항하여 생명을 회복하는 운동이다. 예수의 죽음과 무덤이 그의 생명 회복 운동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말하는 듯 하지만 예수의 부활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은 깨어졌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의 폐기의 시작,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며 새 창조, 새 시대에 대한 보증과 약속이다.Ⅳ. 죽음은 자연적인 것인가? - 죽음의 의미의 이중 구조죽음은 끝인 동시에 완성으로 생각할 수 있다. 죽음을 단순히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생명의 단절로만 본다면 소유의 인간상이 형성될 것이다. 하지만 죽음을 인격적 차원의 의미로 본다면 삶은 죽음의 순간에 완성되는 아름다운 자화상이 형성될 것이다.죽음은 인간의 삶의 전 과정을 통하여 그의 존재가 완결되고 확정되는 순간이다. 또한 이 순간은 자기 존재의 탄생의 순간이기도 하다. 죽음의 순간에 인간의 정체성이 결정적으로 완결되어 참 자기가 새롭게 탄생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모든 인간에게는 선과 악의 구조가 있다. 죽음은 인간의 죄성에 대한 하나님의 부정이요 심판이다. 이와 동시에 죽음은 은혜로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의존성을 계시한다. 죽음은 두 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다. 부정적인 측면은 죽음을 자상에서의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부정으로 이해한다. 긍정적인 측면은 죽음을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의 시작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안식과 교통이 있음을 믿으면서 하나님께 자기의 생명을 맡겨야 한다.죽음은 자연적인 것인가, 죄의 결과인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인가 아니면 본래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만 생각하기에는 요즘에는 비자연적인 죽음이 많다. 자연적 죽음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인간은 자연적인 존재가 아니라 문화적인 존재로서 죽음도 문화적으로 중재된 것으로 인식한다. 구약성서는 죽음을 삶의 자연적 끝으로 이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죄의 결과로 이해한다. 신약성서는 죽음을 하나님을 대적하여 생명을 파괴하는, 있어서는 안 될 반신적 세력으로 생각하며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라고 생각한다. 죽음은 인간의 욕망에 끝을 내며 다음 세대에게 삶의 자리를 내어 주며 새로운 발전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죽음은 필요하다.Ⅴ.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되는가? - 죽음 후의 상태에 대한 이론들영혼 불멸설은 플라톤의 이원론적 인간학에 근거한다. 죽음과 함께 육은 썩어 없어지지만 영혼은 영원한 신적 세계로 돌아가서 영원한 자유와 열락을 누리게 된다. 영혼 불멸설과 기독교 부활 신앙의 차이점은 영혼 불멸설은 육을 천시하는 세계관, 개인주의적 구원관, 지상에서의 삶의 유일회성 상실의 내용을 포함하지만 부활 신앙은 육의 부활, 총체적 구원관, 삶의 유일회적 가치와 진지성의 내용을 포함한다. 윤회설은 인간의 자아가 신체의 죽음 후에도 계속하여 실존하여 새로운 다른 생명 속에 실존하면서 궁극적 완성을 향하여 성장해나가는 것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영혼 윤회설은 증명될 수 없는 하나의 종교적 상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톨릭 교회는 죽은 다음 인간의 영혼은 연옥에 있을 것이라는 연옥설을 주장한다. 연옥은 죽음의 순간 인간의 육체를 벗어난 영혼이 이 세상에서 지은 모든 죄에서 씻음을 얻고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하여 불에 타는 고통을 당하는 장소, 과정을 말한다. 가톨릭의 죽음 속에서의 부활은 인간은 죽는 순간에 부활하며, 그의 존재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20세기 초반기의 많은 개신교 신학자들은 죽음의 순간에 영혼과 육체의 통일체로서의 인간 전체가 완전히 죽어 버린다는 전적 죽음설을 주장하였다. 성서에서는 죽은 자들의 상태를 잠자는 상태로 보는 전통이 있다. 예수가 계신 곳에 낙원이 있다. 낙원은 예수와 함께 예수 안에서 열려진다. 바울도 죽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친교 안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죽음 후의 생명”사상은 죽는 순간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는 사상이다.Ⅵ. 영원한 생명을 기다리며죽은 자들의 부활 신앙은 죽음의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을 고백하며 죽음의 세력의 폐기를 요구한다. 인간은 총체적인 존재이다. 그렇기에 부활은 각 사람의 삶의 역사, 이웃과의 만남과 교통 속에서 형성된 존재, 새로운 존재인 영적인 몸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동경은 모든 인간의 공통적 요소라고 말할 수 있다.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가.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통, 사귐, 하나님과 하나 됨이다. 또한 이웃과 교통하며 이웃을 섬기는 삶에 있다. 또한 영원한 삶은 충만한 삶이며, 몸적인 삶이다. 영원한 생명 속에서는 남녀의 성적 구별이 없으며 노동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이 세상의 연약한 피조물들에 대한 사랑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 현재적으로 경험된다.Ⅶ.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하여 - 안락사의 문제와 함께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병원에서 죽음을 맞는 오늘이다. 병원에서는 환자의 비인간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인간성 있는 의학을 위해서 종교의 타당성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성 있는 의학은 의학의 기술적 측면과 도덕적 측면의 조화를 추구하며, 종교에 대하여 개방된 의학일 것이다.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하여 안락사가 허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품위 있는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교통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서평 『선비목회자 봉경 이원영 연구』이원영 목사는 1886년 7월 3일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성이며 퇴계 선생의 14대 손으로 전통적인 유교 가정 출신이다. 성품이 온유하고 용모가 수려하고 총명하며 만 15세에 사서오경을 통독하였고, 20세에는 주를 붙여 설명할 수 있었다 한다.1909년 19세의 청년기에 보문의숙에 동생과 함께 입학하여 2년 간 공부하여 형제간에 1,2등으로 졸업하였다. 보문의숙은 일제치하의 위대한 저항 시인 육사의 조부인 치헌공이 그들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인근의 유지들과 가산을 털어 예안에 세운 2년제 신식 교육기관이다. 여기에서 그는 철저한 민족 교육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3.1 운동이 일어나자 안동을 중심으로 하여 인근 각처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는데, 1919년 3월 17일 오후 3시 경 봉경(鳳卿)은 노수인, 조병건, 이맹호와 함께 안동군 예안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그 날 시가 행진을 하여 주재소 정문 앞까지 시위운동을 하다가 동지들이 체포됨으로 인해 그는 다음 시위를 계획코자 피신하였다. 같은 날 오후 6시 경에 남은 동지들과 군중 수백 명을 결집하여 독립 만세를 부르며 구속된 동지들을 석방하라고 시위운동을 하던 중 체포당하였다.3.1 만세 사건으로 그는 인생에 있어서 대전환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것은 옥중에서 이상동 장로를 통해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 사실이다. 이상동 장로는 석주 이상룡 선생의 아우로 일찌기 형과 함께 의병장 신돌석 휘하에서 활약하였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대한협회 안동지회에 가입하여 구국운동에 몸을 바쳤다. 1910년 왜적에 의해 나라가 무너지자 이듬해 기독교에 입교하여 장로가 되어 교회를 세우는 등 전도에 힘썼고, 을미년 3.1 만세 운동시 안동 시장에서 교인들을 중심으로 만세 시위를 지휘하다가 체포되어 대구 지방법원에서 2년 형을 선고받고 대구 형무소에서 복역한 인물이다. 그 후 그는 왜인의 신사참배, 창씨개명을 거부하여 여러 차례 구속되어 고초를 겪은 바 있다.이원영 목사는 그 후 성직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전통 유교 출신의 가문에서 한 개인이 기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당시 상황으로는 매우 어렵고도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1921년 1월 8일 권찬영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후 섬촌교회를 설립하였다. 전통 유림의 정신적인 지주인 퇴계의 후손으로서 예수교인이 된 것도 마땅찮은데, 도산서원이 내려다보이는 섬촌에 교회당을 짓는다고 하자 문중에서는 족보에서 제명하겠다고 위협했다. 핍박 속에서도 그는 교회를 설립하였는데, 문중의 어른들이 몇 번이나 도끼를 들고 와 교회기둥을 찍고 파손시켰다고 한다.성직자가 된 이원영 목사에게는 또 하나의 커다란 시련이 다가왔다. 그것은 기독교가 민족 독립운동의 요람임을 간파한 일제에 의해 기독교 말살정책이 실시된 것이다. 예배 시간에 형사를 파견하여 사찰을 하게 하고 1936년부터는 신사참배를 강요하게 되었다. 일제는 1938년 2월 9일 교세가 가장 강하던 평북노회에 신사참배를 강제 가결시켰고 1938년 8월 31일에는 전국 23노회 중 17노회가 신사참배를 시인하는 결의를 하였다. 이에 대한 반대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선교사들이 세운 미션 스쿨은 문을 닫고 선교사들은 한국을 떠나기 시작했으며, 신사참배의 박해를 통해 백여개의 교회가 문을 닫았고, 평양 신학교가 1938년에 폐교되었으며, 투옥된 성도는 2천명에 달했고 59명의 교역자가 순교를 당했다. 신사참배 반대에 앞장섰던 인사들로는 평북의 이기선 목사, 평남의 주기철 목사, 경남의 한상동 목사, 경북의 이원영 목사, 전남의 손양원 목사, 만주의 한부선 선교사 등이 있다. 1939년 5월 31일에 일본의 신사참배 거부로 인하여 이원영 목사는 안동 경찰서에 피검되어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게 되자 혹독한 고문과 혹형으로 악질에 걸려 죽을 지경에 이르므로 왜경은 하는 수 없이 석방을 시켰다. 그의 이와 같은 태도는 애국열과 독립 의욕이 신앙과 직결되어 죽음으로써 일본에 항거하게 된 것이다. 1940년 2차 수감을 거치며 중병을 얻어 치료 중 완치도 되기 전 1941년 7월에 3차로 구속되어 포항, 영덕, 경산 등지의 경찰서에 전전 유치되면서 계속해서 신사참배를 강요당하였으나 끝까지 불복하였으며 수감 기간 중에 전도받은 자가 70여 인에 이르게 되었다. 1945년 5월 22일에 4차 수감되어 해방 다음 날인 8월 16일에 출옥하였다. 이러한 옥중 생활은 3.1 사건을 합하면 5차에 걸쳤고 그 기간은 독립운동에 1년, 신사참배 거부로 5년의 세월을 옥중에서 보낸 셈이되었고, 그리고 그는 옥중에서 개종하였으며 옥중에서 전도를 통해 많은 사람을 개종케 하였다.
『선교현장 이야기』 레나 테일러 지음, IVP 서평(토의 질문을 중심으로)◎ 표준자1) 당신은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료 봉사 부분만큼은 다른 활동들 ? 예컨대 교회에 관계된 제반 사업들 ? 보다 현지인들에게 권한과 책임을 이양해 주는 시기를 더 늦춰야 한다고 생각하는가?수 주일이 지나면서 그는 병원이 이전처럼 청결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한번은 심한 폐렴 환자가 차가운 돌마루 위에서 자고, 윤리적인 원리와 비본질적인 서양의 ‘표준’사이의 차이점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찾을때까지(p.36)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료 산업은 그 어떠한 경우(문화적, 종교적 측면) 에도 소홀히 해서는 않된다고 생각합니다. 현지인들의 문화가 의료 활동에 요구되는 만큼의 청결함이나 의료지식이 부재하다면 권한과 책임을 이양하는 시기를 늦추어 충분한 교육이 이루어 져야 합니다.2) 윤리적인 원칙과 문화적인 표준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피터 록스버러의 주장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둘을 구별하기 위해 무슨 척도들을 적용할 수 있겠는가?인간의 생명과 존엄성과 가치를 신념이자 삶의 지침으로 삼게 되었다는 다마리스 수녀의 말처럼 의료 봉사 부분에서는 문화적 표준 보다 윤리적인 원칙을 그 우위에 두어야 한다.◎ 파업1) 선교사와 현지 그리스도인의 생활 수준의 차이에 관해 이 글 속에 나타난 다양한 견해들에 대하여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항생 생활 수준의 차이는 존재하게 마련이지요. 그렇지 않다면 열 번째 계명이 왜 필요하겠어요? 우리는 어떤 생활 수준에 이르자마자 즉시 더 높은 생활 수준을 원하게 됩니다.(p.59)데벤코의 말과 같이, 현지 그리스도인들과 선교사의 생활수준은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선교사의 신앙과 태도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차이가 나는 환경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2) 당신은 레다가 ‘그것이 바로 당신네가 우리에게 가르쳐 온 기독교’ 라고 한 말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가?반쯤 정당하지 못하다. 그들은 선교사의 신앙과 믿음을 동경한 것 뿐 아니라 그들이 더 우월한 경제적 여건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점을 동경하였다. 그들에게 복음은 경제적 수준의 향상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복음에 대한 잘못된 태도이다. 하지만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에 대한 바른 신앙의 태도를 가르치지 못한 선교사의 책임도 절반이다.◎ 뿌리에 놓은 도끼1) 당신은 라사 감독이 현재 상태로는 아프리카 교회와의 진정한 동역이 불가능하다고 한 말이 옳다고 생각하는가?라사 감독이 말하는 ‘진정한 동역’은 단순히 경제적인 차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만은 아니다. 백인들이 가진 우월감과 동시에 흑인들이 가지는 피해의식이 온전하게 해결되지 않는다면 라사 감독이 생각하는 진정한 동역은 정말 불가능하다.2) 당신은 론다가 만일 다시 교사로서 아프리카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녀의 행동이 어떻게 달라지리라고 생각하는가?론다는 케직 사경회에서 라사 감독이 노래를 부르는 상황에 몹시 분개한다. 이것은 대화를 통해 이른바 ‘동등한 사역’에 대한 고찰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프리카로 돌아가 현지인들에게 사역의 상당부분을 일임하고 자신의 지위와 권위를 하나둘 내려 놓을 것이라 생각된다.3) 우리가 베푼 일에 대해 감사하다는 표현을 받아 내지 않고는 정녕 살수 없는 것인가?하지만 그들의 마음 저변에는 항상 ‘내가 왜 감사해야 하나? 그녀가 저런 위치에 있게 된 것은 그녀의 마음이나 몸이 더 훌륭해서가 아니라 단지 우연히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다는 것 때문일 뿐인데’ (p.99)감사하다는 표현을 받아내지 않고 살수는 있지만, 반드시 감사하다는 표현은 수반 되어야 합니다. 현지인들이 때로는 저렇게 증오심과 피해의식에 쌓여 감사의 표현을 비판적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좋은 환경과 위치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자신의 가진 것을 남에게 베푸는 것은 희생이 요구되는 행위입니다.◎ 행간의 의미1) 이 이야기는 빗나간 의사 소통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어디서 어떻게 빗나가기 시작했는지 논의해 보라.선교사역의 다양성과 선교사의 재정에 대한 문제를 현지 목회자가 잘 파악하여 성도들에게 바르게 전달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선교사와 현지 목회자 및 교회와의 대화통로가 매우 한정적이기 때문이다.3) 당신은 모든 선교사들이 직업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모든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한 선교활동 이해는 책에도 나와 있듯이 오래된 이해이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선교활동이나 현지인들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만을 선교라고 생각하는 이해이다. 하지만 그것 뿐 아니라 하워드와 펫이 감당한 사역이나 현지인들을 위한 교육 및 의료활동 역시 간접적인 복음전달의 사역이라고 생각한다.
생명을 살리는 선교학 (김영동)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파와 하나님 나라 구현”을 이루기 위한 교회를 위한 교회의 학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받은 거룩한 성도의 무리로서의 교회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성도의 교제를 이루며신앙의 시작과 계승과 보존을 위해 교육을 한다. 다른 한편 교회는 세상에 빛 과 소금으로 작용함으로써 세상을 섬기며 변화시키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관점에서 볼 때 교회의 본질은 선교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모이는 교회이면서 흩어지는 교회요, 세상에 예속되지 않으면서 분리되지도 않는다. 신학은, 특히 선교신학은 교회를 살리는 학문이며 동시에 세상을 살리는 학문이다. 따라서 모든 신학은 선교적 신학이요, 교회와 무관한 신학은 추상적인 철학 으로 전락하고, 신학 없는 교회는 신비적이며 비역사적인 단체로 추락할 수 있다. 생명을 살리는 교회의 신학으로서 선교신학은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와선교의 실태를 비판적으로 숙고하며 세상을 살리는 일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건설하는 사명과 목적을 가진다.선교의 목적은 선교의 주체 못지않게 신학논쟁에 중요한 과제이다. 누가 선교를 하느냐가 중요하지만,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선교에 임하는가도 분명해야 한다. 지난 세기부터 지금까지 논의된 선교사역의 목적은 다양한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에 대한 이해나 신학에 따라 선교목적도 달라진다. 선교의 목적은 선교의 동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동기가 목적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전적인 선교목적은 잃어버린 개인의 영혼구원이다. 지금도 복음주의 선교는 영혼구원을 최우선의 목적으로 삼는다. 영혼구원은 개인의 회심과 함께 추구되는 목적이다. 이와 함께 강조되는 목적은 교회개척과 성장이다. 선교사역의 방향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로서의 교회 성장을 우선시하는 관점이다. 이 운동은 20세기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교회성장학파가 생겨나 한 때 세계 교회에 많은 도전을 주었으며, 세계선교에 교회개척과 성장이 선교에 중요한 요소임을 부각시켰다. 자본주의 가운 논쟁이 되었던 선교목적은 인간화였다. 인간화란 독재와 불의한 사회 구조로부터의 인간 해방을 의미하며, 가난과 불의에서 최소한의 인간 존엄성을 지키도록 하는 정의로운 사회 건설을 의미한다.기독교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 일컬어지는 기독교 중심축의 이동과 세계선교의 구심점 이동은 21세기 선교의 가장 큰 흐름이다. 기독교의 분류도 전통적인 개신교, 가톨릭, 정교회라는 세 가지 분류에다가 오순절, 카리스마 운동을 추가한다. 이것은 서구에서 시작된 세 종류의 기독교 외에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며 등장한 가난한 주변부에서 시작한 오순절, 카리스마 기독교의 존재를 새롭게 인정한 것이다. 세계 교회가 제3세계의 기독교 움직임을 적극 수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이제는 ‘세계 기독교’ (World Christianity), 혹은 지구촌 교회 (Global Church)라는 말이 하나의 상식이 되었다. 일찍이 스위스의 선교학자 발베르트 뷜만은 서기 3천 년대의 교회는 ‘제3의 교회’ 시대가 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21세기에 ‘새롭게 지평위에 떠오르는 태양’으로 비유되는 ‘제3의 교회’는 20세기 중반부터 급성장하고 있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오세아니아 등의 소위 제3세계의 교회를 말한다. 이것은 세계 선교의 동향과 전망을 말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다. 이제는 서구 중심의 선교학과 서구 선교사들에 의해 주도된 선교에 대한 접근 방법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 범세계적인 지평에서 논의되는 새로운 선교신학과 방법을 모색하고 적용해야 한다. 전 세계적인 관점의 선교이해와 선교실천을 모색해야 하며, 전 지구의 모든 교회와 선교단체가 상호이해와 상호협력의 선교를 실천해야 한다.세계 기독교 시대의 선교신학과 실천은 이전까지의 서구 중심적인 경향에서 탈피하여 남반구 교회들의 영향을 받을 것이다. 신학적인 주제나 용어와 주장을 남반구 교회들이 주도하거나 남반구 문화와 역사의 경험에서 통찰력을 얻어 신학화 할 것이다. 뷜만도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미래이미 독일 선교학자인 테오 준더마이어는 남미인들의 공생 (共生)과 상부상조를 의미하는 콘비벤츠 (Konvivenz)를 신학화하여 전 세계 교회의 협력과 전 지구적인 에큐메니칼 공동체 형성을 촉구하였다. 이번 2월에 있었던 WCC 제 9차 총회도 브라질 포르토 알레그레에서 열린 것과 아울러 공식적인 총회 일정이 아닌 총회 행사, 혹은 “총회장 밖의 총회”인 무찌라오 (Mutirao)를 열어서 놀라운 경험을 하였다고 한다. 무찌라오란 말은 브라질 말로 ‘만남의 장소’ 혹은 ‘공동사역’이라는 뜻인데, 일종의 박람회와 같은 것이다. 무찌라오는 총대와 옵서버들 외에도 모든 참가자들이 에큐메니칼 운동을 이해하고 나눌 수 있는 열린 광장을 제공하는 모임의 기능을 하였다. 이를 통해 전 세계 교회들의 경험과 목소리들이 교환되었다. WCC는 이를 위해 2300명의 사람을 무찌라오에 초대하였다. 회원교회와 에큐메니칼 기구는 자신들의 선교 과제와 이슈들을 거리, 전시장, 강당과 교실에서 워크 숍, 세미나, 부스, 예술 공연 등을 통해 나타내었으며, 250개 이상의 모임이 열렸다. 이번 무찌라오 모임에서 한국교회는 한반도 통일문제와 한국교회의 노력을 표현하는 부스를 운영하였으며, 전체 무찌라오에서 다섯 명의 한국인 대표가 강연 및 발표를 하였다. 그 중에서도 남상도 목사의 “대안 농업으로서의 자연적 생명 살리기 농법”이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지구적인 환경오염과 생태계의 위험으로 최근에 등장한 선교의 목적은 모든 생명 살리기이다. 생명 살림은 치유와 화해와 평화를 동반한다. 단절과 나눔과 폭력 극복 없이는 참된 생명 살리기는 불가능하다. WCC 제9차 총회에서 총무 사무엘 코비야는 ‘총무 보고서’ 제목을 “생명의 잔치” (a festa da vida) 붙였다. 그는 10개 항목에 걸쳐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이 관심을 가져야 할 부문을 제시하면서 “생명의 잔치”를 중심 가치로 잡고 20회 이상 이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는 ‘변화를 일으키는 정의를 위한 사역’이란 항목에서 하나님이 선물로아야 할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행동의 주체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코비야는 그들이 자신의 이익을 직접 주장할 수 있도록 능력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능력이란 자신의 언어로 경험을 이야기하고, 생명 살리기 행동을 지속함이다. 생명 살리기 선교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형성이요 한 가족으로서 나눔과 사랑의 삶의 축제이다.“생명의 축제는 모두를 하나님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즉, 다른 이들의 고통과 고난을 경험하고, 자기 자신이 유약하고 불완전한 인류 공동체의 일원임을 느끼도록 합니다.”한국교회는 어떻게 보면 순수한 열정과 헌신으로 세계 선교에 동참했다고 할 수 있으나, 다른 관점에서는 너무나 순진하고 어린 선교로 하나님의 선교에 혼란을 가중시켜왔다. 한국교회는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 관점에서 한국교회 선교를 진단하고 강점을 계속 발전시키되, 보완할 것은 보완하고 수정·폐기해야 한다.선교는 ‘하나님의 선교’로서 보편성과 통일성을 가져야 하지만, 이를 화두로 삼은 데는 지난 300년의 근현대 선교가 너무 서구 중심주의적 행태를 보여왔고 이를 통한 긍정적 영향도 있었지만 결정적 약점이 내포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한국 선교는 특히 지난날 서구 선교를 무비판적으로 답습하는 것과 더불어 한국문화 특유의 문제점까지 선교 현장에서 드러내 왔다.한국선교는 자기중심적이고 개교회 중심적인 선교방식을 따랐다. 이로인해 독선적인 선교봉사활동이 이루어졌다. 또한 개교회 끼리의 지나친 과열 경쟁으로 인해 선교사역이 개교회의 명성과 성과를 드러내는 도구가 되었다. 선교를 교회의 본질이며 하나님의 사역으로 보기 보다는 일회성 교회 프로그램이나 프로젝트, 그리고 유행을 따라 나가는 선교로 오해하기 일수였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더 큰 힘을 가진 조건으로 이른바 ‘힘과 강자의 선교’를 추구하여 복음을 거저받은 빚진자의 모습과 청지기의 모습을 상실하였다.이러한 반성 위에서, 한국 선교신학은 지역적 경계나 문화적 특성에 머무르고 왜곡되기 쉬운 민 6대륙에 배속”되는 선교사 (로잔 언약 제9항) 시대가 제기된 것은 세계 기독교가 선교라는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볼 것과 전 세계 교회의 통전적 선교를 제시한 것이다. 제3세계 교회들의 선교 참여를 ‘떠오르는 선교’라고 표현하여 오늘날 제3세계 교회의 선교를 지칭하는 용어가 되게 한 사람은 로렌스 키이즈이다. 그는 “선교운동의 새 시대가 도래 하였다. 세계복음화의 초점이 제3세계 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하면서 제3세계 교회들의 선교가 급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50 여 년 밖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장구한 서구 교회의 선교역사에 비하면 아주 시작에 불과하다. 따라서 기독교의 축이 남반구로 옮겨가고 있고, 기독교 선교 중심축의 이동을 이야기하지만 전 세계를 향한 선교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성공을 하려면 북반구와 남반구의 자원이 함께 동원되어야 한다. 물론 지금까지 서구 교회 중심으로 움직여 오던 세계선교 사역에 필연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키며 새로운 패러다임의 출현을 요구하는 변화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제 선교 신학, 선교 방법, 선교사 선발과 훈련, 선교사 후원방식, 선교사의 생활방식, 선교현장에 대한 새로운 이해 등 여러 면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청되고 있다.무엇보다도 전 세계 기독교가 예수님의 선교 위임령에 대한 확신과 그 사명에 순종하려는 열정과 선교적 책임에 대한 확실한 헌신을 공유해야 한다. 이러한 확신과 열정과 헌신을 바탕으로 새로운 협력 체제를 구축하며 북반구 교회와 남반구 교회, 전통적인 교단과 새로운 교단, 선교회와 교회 등 여러 측면에서의 다자간 협력 선교가 요청된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바라보며 한국교회는 무엇보다 세계선교의 현실을 인식하고 주체적으로 협력 선교에 참여해야 할 당위성을 가진다.세계화 추세는 선교 사역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겠다. 예컨대 기독교 문서 선교를 들 수 있겠다. 성경 번역 선교사가 신약 성경을 에콰도르의 부족 언어로 번역한다고 하자. 항공 선교회가 이 선교사를 원주민이 살고 있는 오지의 외딴 마을로 날라되었다.
신석방 주해 과제: 『히브리서 2:5-18』1. 히브리서 본문 비평5-18의 소단락 주제는 ‘그리스도의 한시적 비하와 고난의 의의’로 볼 수 있다. 이를 다시 세분화하면 (1) 5-9절: 그리스도는 한시적으로 천사보다 낮아져 고난을 당하셨음 (2) 10-13절: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신 것은 성도를 형제삼기 위해서임 (3) 14-18절: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신 것은 성도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다.2. 문맥적 구조히브리서 1장과 2장은 하나의 문학적 단위 이다. 이 장에서는 구약의 계시(참조,1:1-3)와 천사들(참조,1:4-2:18)보다 예수께서 더 우월하심을 계속하여 말한다. 2장의 강조점은 예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련성에 있다(2:10-18). 예수께서 자신을 그들과 참으로 동일시 하셨기에 그들은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 더 우월한 언약의 목적은 범죄한 인간을 회복시켜(2:9-11,14-18) 예수께서 가지신 창조의 빼어난 위치로 옮기는 일이다(시8편). 예수께서는 이상적인 사람이시며 우리를 위한 완벽한 모델이시다. 또한 2장은 일련의 연속적인 경고가 나오는 처음 본문이다(2:1-4;3:7-4:11;5:11-6:12;10:19-39;12:14-29).3. 단어연구1) 육 (사르코스, σαρκο???) 의 의미 (14절)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헬라어에 몸 혹은 육신을 표현하는 단어는 크게 프뉴마(πνευμα), 소마(σομα), 사르코스(σαρκο???)가 있다. 프뉴마(πνευμα)는 인간을 존재와 인격의 결합체로 보는 통합적 단어이다. 프뉴마(πνευμα)가 전체적, 통합적 인간을 나타내는 추상적 개념인 반면에, 사르코스(σαρκο???)는 눈에 보이는 육체를 가진 존재를 나타내는 구체적 개념이다. 따라서 추상적인 인간 대신 구체적인 ‘살’, ‘몸’ 혹은 ‘신체’로 번역된다. 그러므로 히 2:14의‘예수 그리스도도 혈육에 함께 속하셨다’의 살과 피를 가지고 연약함 속에 스스로를 던져 넣은 구체적 존재로 자신을 드러내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요1:14).”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영광이 보여 지는 자리는 하늘도 아니고 선재하신 그리스도가 스스로 존재하는 것 안에서도 아니고 우리 가운데 거한 바로 ‘여기서’ 라고 말한다.둘째, “예수 그리스도가 사르코스(σαρκο???)가 되셨다” 는 선포에는 기독교적 구원의 독특성이 드러나고 있다. 하나님의 약함을 통해 인간의 약함을 고치고 하나님의 낮아짐을 통해 낮아진 인간을 높이는 것이다2) 죽음 (θα?νατο? 싸나토스) (15절)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브리서에는‘죽음’과 관련된 구절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관련 단어가 들어있는 구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9, 14, 15; 5:7; 6:1, 2; 7:8, 23; 9:14, 15, 16, 17, 23, 27; 10:28; 11:4, 5, 12, 13, 19, 21, 29, 35, 37; 13:20.히브리서에 등장하는 죽음의 종류에는 크게 2가지가 있을 것 같다. 첫째, 모든 인간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의 필연적인 사망이다. 우리 피조물은 원죄로 말미암아 평생 동안 사망 권세를 잡은 마귀에 눌려 종노릇하고 있다. 즉 인간은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해 일생동안 사망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피조물과 같은 모양으로 혈육을 취하셔서 우리를 그의 형제로 삼으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고 사망의 눌림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음의 길을 택하셨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인간의 죄를 없이하셨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에게는 영생과 부활의 소망을 허락하신 것이다. 이것은 거룩한 죽음이다. 따라서 루터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부활신앙을 갖고 있지 못하고 현세를 내세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아들을 경배하도록 명함 받았던 때인 승귀 시에, 그 아들의 입성을 하늘의 실제 세계인 세상을 이미 확인했다. 아들의 좌정으로 시작된 새 창조를 장차오는 세상으로 지칭한다. 히브리서 12:28에서 “진동치 못할 날”에 대한 분명한 암시는 저자가 글을 쓸 때에 이 구절들을 염두에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구원의 종말론적인 영역의 지칭인데, 공동체는 이런 실제의 영향을 경험하기 시작했었다.5절의 기능은 구약성경 인용들의 두 연쇄를 연결하여준다. 첫 번째 인용들(즉 1:5-13)은 천사들에 비하여 높아지신 예수의 우월성을 전개하고, 두 번째(2:6-16)는 아들이 천사들보다 열등한 조건을 받게 되었고, 또 죽음에 복종했다는 근거 위에서 예수의 우월성을 다시 한 번 말한다. 하나님이 천사들에게 장차 올 하늘의 세계의 관리를 맡기시지 않고 높아지신 아들에게 맡겼다는 사실이 상기하는 것은 뒤이어지는 인간의 조건과 예수와의 유대에 관한 해석을 적절한 관점으로 인도한다.6-8a절 에는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διεμαρτυ??ρατο δε?? μου?? τι? λεγων) 인용 형식의 모호함은 성경의 신비적인 특징에 관한 히브리서 전체의 강력한 강조와 일치한다. 구약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언급했던 사람의 신원은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된다. 논증의 기본적인 중요성은 그것의 자료에 있지 않고 말씀된 것의 실제적인 권위에 있다. 이런 의도에서 저자는 70인경 시편 8:5-7(MT 8:4-5)의 인용으로 자신이 언급하고 있는 것의 확증한다. 시편 8편은 하나님 앞에서 인류의 피조됨을 묵상하는 경외의 표현을 담고 있다. 주님에 의해 기억되고 보호되며, 천상의 존재보다 못하게 창조되었으며 영광의 존귀로 관을 쓴 인간 존재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대한 책임을 갖는 주권적인 피조물의 신분을 부여 받았다. 이 신분은 창세기 1:26-28에 표현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땅을 정복하고 모든 것을 복종하게 만8:6-7에 한정시킨다. 시편 8편의 인용을 어휘에서 복음서의 인자 기독론에 함축된 언급을 발견함이 없이 곧바로 예수에게 적용한다. 실제로 시편 8:5(70인경 8:6)의 히브리 본문의 의미는 모호하다. 히브리 구절의 근본은 “하나님보다 낮은” 또는 “천상의 존재보다 낮은”을 의미할 수 있었다. 하지만, 헬라어 번역자들은 그것을 천사들로 언급함으로써 그 모호함을 해결하였고, 이 해석은 탈굼에서도 발견된다. 천사들보다 거룩한 아들의 비교할 수 없는 우월성을 유지하려면, 본문의 이런 요소는 해석되어야만 했다.8b-9절 에는 인용된 성경본문은 저자의 관심의 요지를 정확히 암시한다.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그는 이 주제를 취하여 이중 부정어를 통해 이 용어의 절대성을 강조한다. ‘만물’[τα?? πα??ντα]을 복종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그의 조정을 받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게 하셨다. 여기에서 부정어 명사인 우덴[ου??δεν]을 부정어 부사인 아누포탁톤[α??ωυπο??τακτον]으로 보충한 의미는 창조의 영역에 속한 모든 것을 포괄한 “만물”이라는 집합적 표현을 강조한다.9절에서는 시편 기자에 의해 천상의 존재보다 못하게 하신 것이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게 되었다는 명제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는 첫 번째 소절은 예수의 일시적인 비하와 관련되는 반면 두 번째 소절은 뒤이은 승귀와 영광을 언급하는 것을 볼 수 있다.12절에는 3개의 구약성경 구절(시 22:22, 사 8:17, 사 8:18)이 인용되고 있다. 이 인용구절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형제로 불러 자신과 동일시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로써 제시되고 있다. 본 절에서 인용된 구약성경은 시편 22:22 (LXX 시편 21:23)이다. 시편 22편은 초대 교회에서 메시야 시로 소문난 시이다. 시 22편 1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외치신 말씀을 (막 15:34; 마 27:46), 시편 22 곧 예수의 성육신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시편 22편은 그 아들의 성육신, 고난 그리고 가족으로서의 관계를 논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히브리서 저자는 메시야 시편이라 일컫는 시편 22편에서 한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본절의 주어 ‘내가’ 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더욱이 본서 저자는 70인역 시편의 내용을 낱말 하나만 바꾸고 그대로 인용하여 메시야 시편으로서 본절의 내용이 곧 메시야가 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70인역 시편을 인용하면서 바뀐 낱말은 ‘선포하고’이다. 본서에서는 ‘아팡겔로’(??παγγελw' ) 라는 말을 쓰는 반면 70인역에서는 ‘디에게소마이’(διηγ?σομαι) 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아팡겔로’ 는 ‘알리다’, ‘고지하다’를 뜻하는 ‘아팡겔로’ (???παγγε??λλω) 1인칭단수 미래 능동태 직설법으로 ‘내가 알릴 것이다.’ 라는 의미이며 ‘디에게소마이’는 ‘말하다’를 뜻하는 ‘디에게오마이’ (διηγε??ομαι)의 1인칭단수 미래 중간태 직설법으로 ‘내가 말할 것이다.’ 라는 의미이다. 두 낱말의 비교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의미상으로 큰 차이는 없다.인용된 시편에 따르면 메시야이신 예수님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δελφοι? μου), 곧 믿는 자들에게 알리겠다고 고백하고 있다. 여기서 ‘주의 이름’ (το?? ?νομα?? σου) 은 문자적으로 ‘당신의 이름’이라는 의미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뜻한다. 히브리적 용법을 따르면 ‘당신의 이름’을 가리키는 το?? ?νομα?? σου는 12절 하반절에서 말하는 ‘주’ (σε), 곧 ‘당신’과 동일한 의미의 표현이다. 이렇듯 하나님을 지칭하는 두 가지 표현은 모두 본 절에서는 크게 강조되지 않았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이름이나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내 형제로 부르고 그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부르는데 강조점이 있기 때문이다.13절은 사 8:18 상반절에서의 인용으로, 정확히는“여기 나와 및 하나님께서 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