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Bronze개인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3
검색어 입력폼
  • 한국고대사의 인식과 논리 서평
    과목명 : 한국고대사제출일 : 2013. 04. 18.교수님 : 김영하 교수님학 번 : 2008313884이 름 : 조 창 대Ⅰ. 서론고대사는 인류가 기록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입니다. 현재로부터 가장 먼 시기이기 때문에 고대사 연구에 대한 사료가 부족합니다. 사료의 부족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는 고대사는 역사가들에게 절망적인 연구 대상이면서도 동시에 역사적 상상력을 확장할 수 있는 연구 대상이기도 합니다.) 또한 고대사는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현재의 성격과 위치를 규명하는 것으로 역사를 인식하였을 때 고대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파악하느냐에 따라 현재가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일제식민통치시기에 민족말살정치의 일환으로 일제가 왜곡한 역사를 배운 우리 민족은 현재를 파악함에 있어 왜곡되어온 고대사를 올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사료에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실증을 통한 새로운 역사해석의 방향을 제시하고 현재를 인식함에 있어 제국주의의 외부적 압박에 의한 식민사학의 왜곡을 비판했다는 점에서 김영하 교수님의『한국 고대사의 인식과 논리』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김영하 교수님은 책의 서문에서 기존에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실을 다시 검증하고 근대사학의 해석 논리를 점검하는 입장)에서 세 가지의 주장을 하십니다. ① 고구려, 백제, 신라에 대한 일국사적 접근을 넘어서 동질의 고대사회로 인식하려는 관점 ② 신라의 삼국통일전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신라의 백제통합전쟁에 불과하다는 시각 ③ 한국사에서 7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전을 고대에서 중세로의 전환 계기로 파악하는 시대구분)이 그것입니다.저는 기성 역사적 담론에 얽매이지 않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기존 담론과는 상반되는 입장을 주장하며 논리를 펼쳐하고 있다는 것에 매우 큰 흥미를 느꼈습니다. 특히 김영하 교수님의 위의 세 가지 주장 중 ②, ③에서 매우 큰 지적 희열을 느꼈는데 이는 제가 학교에서 배워왔던 내용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신라가 일통삼한의 생각으로 한 한국을 시대구분할 때 고대시대는 통일 신라까지, 중세는 고려부터라고 생각하는 인식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김영하 교수님의 위의 주장은 굳어졌던 나의 역사인식과 해석에 자극을 주었습니다.따라서 저는 본 책 전체에 흐르고 있는 큰 줄기의 세 가지 주장 중 ②, ③ 주장에 주목하여 김영하 교수님의 논리를 정리하고 저의 부족한 생각을 적어보겠습니다.Ⅱ. 신라의 백제 통일 전쟁1) 일통삼한의 의식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통일했는가 백제만을 통일했는가를 생각하기 앞서 일통삼한에 대해 먼저 생각해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일통삼한은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하나의 민족으로 보고 그 세 나라가 하나로 통일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일통삼한의 인식이 당대 신라시대에도 존재했는가에 대한 생각은 7세기 국제전을 일으킨 신라의 국제전 동기에와도 직결될 것이며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을 일통삼한의식 속에서 인식했는가는 위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가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한 김영하 교수님의 생각은 ‘제 2편 한국고대사의 해석논리 - Ⅲ. 일통삼한의 실상과 의식’ 장에서 알 수 있습니다.7세기 국제전의 동기와 관련하여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아우를 의도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김유신 전에서 처음 보입니다.) 하지만 김유신이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해야하는 뚜렷한 이유는 없습니다. 『삼국사기』에 등장한 김유신의 의지는 일통삼한에 대한 인식으로 시작했다기 보다는 변경지방에서 군사적 능력을 통해 금관가야계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려던) 가문의 염원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신라가 백제와 실제적인 전쟁의 원인이었던 642년 서변과 대야성의 함락을 주목해면 신라의 전쟁 동기가 일동삼한 의식과는 관계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백제에 서변의 40여성과 대야성을 함락당한 신라는 당과 고구려에 청병을 보냈습니다. 이 때 신라가 고구려에 청병을 보낸 사실은 7세기 국제전의 동기에 고구려의 통합의 의도는 없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7세기 국제전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당은 신라와 이해관계를 함께하 요구에 의해 신라는 당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해야했습니다. 다시 말해 신라는 애초에 고구려를 공격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백제를 공격함에 당의 힘이 컸기 때문에 당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함께 고구려를 공격한 것입니다. 이는 662년에 문무왕이 백제 평정을 기념하는 연회를 베풀었다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신라가 668년 외환의 원인이던 백제와 고구려의 평정을 태평으로 선조묘에 고유했을 때에도 문무왕은 두 왕동의 함락에 유의하여 제?려 평정으로 인식할 뿐 아직 일통삼한으로는 의식하지 않았습니다.)신라에서 이 같은 의식이 일통삼한의식으로의 전환은 당과의 관계에서 마련되었습니다. 당의 측천무후는 태종무열광의 묘호가 당 태종의 저촉된다는 난제를 제기했고 신문왕은 두 왕조의 통합에 기초하여 태종무열왕의 업적으로 부회된 일통삼한의식으로 표방하여 묘호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위와 같은 일통삼한의 의식의 흐름에 대한 김영하 교수님의 논리는 7세기 국제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주었습니다. 일통삼한의식이 아닌 백제 평정의 동기로 시작한 전쟁과 백제를 확실히 통합하는 과정에서의 고구려에 대한 출병은 신라가 처음부터 고구려와 백제를 모두 통합하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는 동기적 측면이나 당대의 의식적 측면에서 당대 신라 왕실에서 7세기 국제전의 결과로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통일한 것이 아니라 백제만을 통합하였다고 생각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신라가 가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하였다는 기존의 담론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줍니다.2) 신라통일론의 함의위와 같은 논의로 인해 신라통일론은 일정한 한계가 드러났습니다. 김영하 교수님은 제 2편의 Ⅳ에서 신라통일론의 궤적과 함의에 대해 밝히고 있습니다. 신라통일론의 궤적과 함의의 대해 밝히는 것은 신라통일론이 주장되어 온 과정을 살핌으로 역사학자들의 의도적으로 왜곡하거나 재구성한 내용은 없는 지를 밝히는 중요한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신라통일론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김영하 교수님은 신라통일론에는 현실인식과 발해인식이라는 두 함의가 있다고 서술합니다.) 신라통일론은 일본근대사학에서 처음으로 제기 되었습니다. 한국사에서 신라의 통일을 강조하고 발해를 배제하려는 의도로 신라통일론을 주장했고 이를 통해 한국과 만주의 내부경계를 설정했습니다. 또한 식민사학에서도 ‘민족의 의미를 배제한 국가/영토 위주의 반토 통일론’ 주장하였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제도화된 신라통일론에 공명한 결과 민족적 의미를 추가하여 신라가 676년 당 세력을 구축함으로 쟁취한 통일이며, 민족문화의 형성 계기로서의 의미를 부가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해석에는 한계가 있었는데 그것은 고구려의 ‘남쪽 경역’인 대동강 이남까지 통일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학계에서는 ‘발해와 후기 신라’의 남북국론의 수용의 과정을 거치지만 당의 침략자가 축출된 지역을 압록강 이남으로 설정한 지나친 주체적 해석이 있었습니다.) 남한학계에서는 신라통일론을 계승하는 수준에 머물렀고, 발해에 대한 이해는 점진적으로 수정과정을 거친 결과 ‘통일신라와 발해’와 같이 교육하는 것으로 집약되었습니다.) 김영하 교수님은 위와 같이 신라통일론의 궤적을 살피면서 7세기 국제전의 결과로 신라의 백제 통합과 고구려 고지에서 발해 건국이라는 기본 사실 위해 ‘신라와 발해’로 인식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제시합니다.)신라통일론이 발해와 한국을 분리시키기 위한 의도로 시작되었다면 우리는 식민사학을 극복하는 차원에서 신라통일론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라가 고려로, 고려가 조선으로, 조선이 현재의 대한민국으로 계승되었다는 사실에서 신라통일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현재 한국이 고구려에 대한 정통성의 정당성이 사라지는 것은 사실이고 그것은 우리에게 불편함을 줍니다. 하지만 고구려 고지에서 고구려의 정신을 이어받은 발해가 존재하였고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7세기 국제전의 결과로 신라와 발해인 남북국으로의 인식은 보다 정확하게 현실을 볼 수 있는 시각을 줄 수 있을하다는 사실을 정리해보았습니다. 신라는 국제전을 시작할 당시 일통삼한의 의식을 갖고 있었다기보다는 백제를 통합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하였고 실제로 백제만을 통합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이 후 근대 일제사학과 식민사학에서 만주와 한국의 경계를 짓기 위해 발해를 한국의 역사에서 배제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 같은 필요로 근대일제사학과 식민사학은 신라통일론을 주장했으며 발해를 한국에서 분리시켰습니다. 이런 역사해석은 현재까지도 신라통일론의 바탕에서 발해를 인정하는 정도로 이어져왔습니다. 하지만 발해의 재인식의 필요성과 식민사학의 극복의 필요성 그리고 대동강이남 영역의 문제와 관련하여 7세기 국제적의 결과를 신라의 삼국통일이 아니라 신라의 백제통합으로 이해하는 것은 적합한 주장이라 생각합니다. 또 이러한 주장은 현재를 재인식하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는 비판이라 생각합니다.Ⅲ. 고대와 중세의 시대구분삼국 말기의 대왕전제체제하에서 야기된 귀족세력 간의 갈등과 대립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대립의 결과로 삼국 말기에 나타난 권력의 집중 현상은 남북국시대에 중앙집권체제의 수립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신라에서는 무열왕의 즉위로 성립된 중앙집권적 귀족관료체제가 수립되었습니다.) 무열왕이 자파의 김유신을 상대등으로 임명한 사실을 통해 귀족회의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또 문무왕과 신문왕은 불만을 품은 진골 귀족들을 율령에 따라 숙청함으로 체제를 안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성격은 한국 중세사회의 특징인 중앙집권성을 고려할 때 고대사에서 새로운 사회의 이행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발해에서도 대조영, 무왕 대무예, 문왕 대흠무를 거치면서 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체제를 수립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남한학계에서는 발해사회를 고대사회로 이해하지만 남북국이 고대사회로서 삼국의 대내외적 모순을 지양하는 과정에서 성립되었으므로 신라의 경우에 비추어 발해사회의 역사적 성격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남북국은 모두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수립하는 데 필요한 지배기구)
    독후감/창작| 2013.06.03| 5페이지| 1,500원| 조회(397)
    미리보기
  • 가족의 위기와 대안
    Ⅰ. 서론최근 가족의 위기, 가족의 해체와 같은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자아실현과 경제적 이유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독신주의자들이 전 세계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며 결혼기피현상과 이혼율 급증은 가족이란 제도의 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억압과 차별을 가족제도에서 찾음으로 가족이 성차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판단하고 가족폐기를 주장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가족 간의 사랑과 가족애는 우리가 마땅히 지녀야할 덕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대중매체의 TV 드라마나 영화 역시 가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점으로 미루어보면 여전히 가족은 우리 삶의 영역에서 떼어놓을 수없는 부분임에 틀림없습니다.다원적 민주주의와 다양한 주체의 요구를 통해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형성되고 있고 가족 내의 젠더의 역할 또한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족의 변화는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우리 관념에 깊게 자리매김해오던 가족의 관념을 변화시켜야할 필요성 제기했습니다. 따라서 Ⅱ장에서는 가족에 대한 상식과 오해를 서술함으로 가족의 개념을 좀 더 명확하게 할 것입니다.가족의 모순적 요소를 논하기 위해서는 근대가족의 형성과 성격에 대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이는 근대 산업화와 자본주의 경제구조는 사회전체의 구조를 상당부분 바꾸어 놓았는데 가족제도에서도 큰 변화를 가져왔고 그러한 변화의 산물은 현재 가족제도의 모습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세 경제의 생산 기본단위였던 가족은 근대로 접어들면서 작업장과 가정의 분리를 가져왔고 이는 경제생산 영역인 작업장과 경제 재생산 또는 사적인 영역인 가정이라는 이분법적 인식을 동반하였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었으며 가정은 전 근대사회처럼 생산과 관계된 영역이 아니라 소비와 여가 생활의 단위가 되어버렸습니다. 또한 공적인 영역의 작업장은 남성의 영역으로, 사적인 영역인 가족은 여성의 영역이라는 인식은 남녀의 역할구분을 가져왔고 현재까지 가사노동은 여성의 책임으로 전가되는 경향성이 짙어졌습니다. 이와 같이 근대 산업화와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형성되었던 근대가족의 구조는 가족제도의 모순으로 현재까지 남아있습니다. Ⅲ장에서는 근대가족의 형성과 모습을 통해 가족제도의 남성과 여성을 착취구조를 살펴볼 것입니다.마지막으로 결론부분에서는 관계적 자아로서의 가족의 의미를 살피고 대안가족의 올바른 방향성을 제시할 것입니다.Ⅱ. 가족에 대한 통념가족에 대해 객관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정의를 내리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가족이 우리생활과 인식에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가족에 대한 강한 고정관념이 존재하고 그것 외부에서 가족을 관찰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가족의 개념에는 다음과 같은 지배적 통념이 존재합니다. 첫째로 가족은 자연 발생적, 생물학적으로 형성된 것이라는 점과, 둘째로 가족은 공동체적인 본성을 지니고 있고, 셋째로는 핵가족이 가장 보편적인 형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통념들은 역사적?사회적 가족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위와 같은 통념을 분석함으로 가족에 대한 오해를 밝힘으로 가족의 개념을 보다 분명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첫째, 가족은 출산과 양육, 성적 욕구 충족과 같은 생물학적 자연적 기능을 수행하는 제도이므로 초역사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사회에 공통적인 보편적 제도일 것이라는 상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지역적으로 가족은 매우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지금도 그 형태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가족 사유 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에서 엥겔스는 동일한 세대 내에서 자유로운 성교를 허용하는 형태인 혈연가족을 제시합니다. 또한 중국 윈난 성의 모쒀족에게 부부는 아주 유동적인 관계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엥겔스의 혈연가족개념과 윈난성의 모쒀족은 가족의 모습과 개념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과학과 출산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가족구성에서 생물학적 근거를 약화시키는 데 정자, 난자은행으로 출산한 아이와 그 가정은 생물학적 기원과는 무관하게 실제로 양육을 담당한 부모의 관계가 가족의 더 강력한 조건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입양가정을 생각해 보았을 때 입양아동을 양육한 가정과 낳은 가정 사이에 부모자녀 관계, 형제자매 관계는 생물학적 요인은 물론 사회적으로 형성된 가족관계에 의해 규정됩니다. 더욱이 입양 자녀들이 자신을 낳은 가정과의 관계를 지속한다면 그 가족의 범위와 경계를 정하는 문제는 매우 어려워질 것입니다.둘째, 우리는 흔히 가족은 공동체성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어 개인주의와 경쟁이 만연한 삭막한 이 시대에 최후의 안식처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가족 안에 명백히 존재하는 권력관계를 간과한 생각임과 동시에 가족 내부에 존재하는 갈등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한 것입니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가족은 연령의 축에 따라 위계적으로, 그리고 성별의 축을 따라 가부장적으로 존재하였습니다.) 여성 취업이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가사노동의 책임을 여성이 감당하는 사실은 가부장적인 위계질서가 현재에도 존재함을 보여줍니다. 삭막한 사회에 개인이 위로받을 수 있는 곳이 가족이라는 인식에도 불구하고 가족내부의 갈등은 명백히 존재합니다. 가족 내 폭력 사건은 간과할 수 없을 만큼 많은데 한국가정 중 약 30%에서 구타가 발생한 것이 있다는 조사 결과가 있습니다.)셋째, 사람들은 핵가족 제도가 보편적인 제도이며 이 제도는 ‘정상적’인 가족의 형태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핵가족이 보편적인 제도이며, 미혼?이혼 가구와 한부모 가족 등은 ‘정상적’인 제도를 벗어나는 ‘비정상적’ 가족이라는 인식입니다. 이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서선희 교수는 아버지, 어머니, 자녀로 구성된 핵의 존재는 항상 있었으며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핵은 가족 구성의 핵심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다양한 가족 유형이 생겨나면서 핵가족은 보편성을 잃었으며 이러한 통념은 일종의 신화가 되었습니다. 2003년에 전국 3500가구를 대상으로 한 조사의 결과를 보면 전체 가구 중 부부와 미혼 자녀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핵가족은 약 절반만을 차지하며(51.2%), 나머지는 부부만 살거나(15%), 혼자 사거나(15.5%) 한 부모가족(5.2%)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수치로 미루어 보았을 때 더 이상 핵가족만이 전형적이거나 정상적인 가족의 형태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미혼?이혼 가구 등 다양한 가족이 존재하는 이 사회에서 핵가족만을 ‘정상적’가족의 형태라고 보는 것은 핵가족 이외의 다양한 가족의 다수를 타자로 분류하여 다수를 소외시키는 것입니다. 때문에 ‘정상적’ 가족에 대한 고정관념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인식하고 가족 모델의 다양성을 인정하여 가족의 개념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Ⅲ. 근대가족의 형성과 모습으로 본 가족제도의 모순중세 경제에서 가구는 생산의 기본단위였으며 특히 농민가구에서는 노동력과 토지상속의 필요로 가족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여성은 가구의 구성원으로 남성과 함께 생산에 필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결혼은 경제적 조건이 크게 작용하였으며 가구는 가부장제적 생산 공동체의 성격이 강하였습니다.) 경제의 기반이 가족이라는 점은 노동의 가치를 임금만으로 평가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근대 자본주의로의 전환은 가족 구조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가족과 관련하여 산업화가 가져온 중요한 변화는 가정과 작업장의 분리였습니다. 작업장과 가정이 통합되어 있었던 중세와는 달리 분업과 산업화는 공장을 만들어 냈고 이는 공(작업장)과 사(가족)의 영역을 분리시켰습니다. 그 결과 남성은 공장으로, 여성은 가정으로 남녀의 역할을 구분 지었으며 남성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작업장에서 끊임없이 노동해야하고 가정일은 여성이 전담하여 맡으면서 가정을 신성한 안식처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나타났습니다. 이에 따라 성별 분업이 정교화되어 여성은 생산영역에서 배제된 채 자녀양육에만 전념하게 되었고 가사노동을 신이 허락하신 소명으로 생각하게 하여 여성을 가정에 고립시켰습니다.) 또 모성애를 강조하면서 사랑이란 감정을 앞세워 여성이 가정에서 하는 모든 가사노동을 당연시하고 정당화하였습니다. 이런 가정상은 오늘날까지도 여성 노동에 대한 태도나 의식에 영향을 주어 여성 노동자를 가정에 소홀한 사람으로 비난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이와 같이 부르주아 사이에서는 이데올로기가 여성의 가정성을 강조하였지만 하층 노동자 계급의 가족은 낮은 임금으로 인한 생계문제로 여성이 노동현장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본가들도 여성 노동자의 저렴한 임금과 노조에 의한 전투 성향이 약하다는 점에서 여성노동자를 선호하였습니다.) 남성노동의 보조 격으로 여성노동을 인식한 까닭에 같은 작업장에서도 성별 분업화가 이루어졌으며 성별 임금차이도 있었습니다. 남성노동자들은 아내를 가정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남성 노동자들에게 가족 임금 지급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가족 부양의 책임이 없는 여성에게는 임금을 적게 주어도 된다는 변명의 구실을 제공하였습니다. 가족임금은 여성 노동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독신이거나 이혼?사별한 여성을 궁핍으로 몰아넣으면서 노동계급을 분열시켰다는 비판을 받기도하지만) 여성의 가정성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노동자들이 취한 생존전략이었습니다. 이는 여성의 영역을 가정에 한정시키려는 것과 여성이 노동현장으로 나갈 수밖에 없도록 하는 모순적인 사회 구조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근대에 들어서면서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이 분리되고 사회로부터 독립된 사생활이 보장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사회나 국가에 의한 사생활에 개입이 일어났습니다. 여성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사적 영역이 전문화?분업화되면서 의사나 교육자 등이 개입하기 시작했고 출산과 양육과 같은 성의 영역에서도 출산정책으로 인해 여성의 자율이 제한되었습니다.
    인문/어학| 2013.06.03| 5페이지| 1,500원| 조회(132)
    미리보기
  • 제르미날 감상평
    은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영화이다. 이 영화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이 영화가 개봉할 당시 에 맞선 영화로 프랑스에서 큰 찬사를 받은 작품이다. 과는 대조적으로 흑백에 가까운 색채와 대부분이 탄광촌과 그 주변의 배경으로 하였다. 하지만 1990년대 프랑스 국민들과 대중들에게 감동을 주기 충분한 작품이었다. 특히 노동자들의 궁핍한 삶과 그 삶을 극복하기 위한 발악은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은 영화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노동자인 에티엔이 3대째 탄광에서 일하고 있는 마외 집안을 만나면서 영화의 내용이 시작된다. 이 영화는 당시 19세기 후반 프랑스 사람들의 삶, 특히 노동자들의 삶을 현실적으로 묘사하였다. 이 글은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는 19세기 후반 프랑스 사회의 모습을 서술하였고 그 모습 대한 나의 생각을 정리하였다.먼저 19세기 후반 프랑스 노동자들과 고용주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고용주는 부르주아 계급이라 할 수 있다. 마외 부부로 대변되는 노동자들을 대가족을 부양하기위해 성인 남자들 대부분은 탄광에서 일을 해야 했다. 심지어는 성인 여자까지도 탄광에 들어가 남성과 같은 일을 부여받는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하루하루가 힘들고 궁핍하다. 이는 영화에서 잘 나타나는데 마외 부인은 빵집 주인에게 빵을 구걸하고 귀족의 집에서 돈과 옷을 구걸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고용주가 최저생계비도 보장되지 않는 임금을 주기 때문이다. 고용주는 노동자들의 안전과 생계에는 큰 관심이 없다. 이윤에 모든 관심이 있는 고용주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임금을 적게 주기 위해 노력한다. 영화에서 고용주들은 지지대를 부실하게 세웠다는 이유로 임금을 차감하고 판매량이 줄어든다는 이유로 노동자들의 임금을 줄이려고 한다. 더 많이 받으려는 노동자들과 임금을 더 줄이려는 고용주들의 의견 대립은 결국 파업이라는 국면으로 치닫는다. 광산을 노동자들은 에티엔을 중심으로 파업을 위한 돈을 계획적으로 모으고 파업 선언한다.이 영화는 노동자들의 처참하고 비참한 생활을 객관적이면서도 관객이 공감할 수 있도록 잘 표현한 듯하다, 특히 마외씨가 얼굴조차 씻지 못한 거뭇한 몸으로 갓난아이를 안고 아이의 이유식을 먹이면서 자신이 너무 배고파 아이의 이유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 퍼먹는 장면은 노동자의 삶을 잘 표현한 장면이었다. 마외씨는 자신의 아들을 너무 사랑하지만 배고픔과 굶주림 앞에서는 아빠이기 이전에 자신의 배를 채우고 싶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묘사해 주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더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은 그런 가슴 아픈 장면들을 슬픔을 조성하는 배경음악이나 카메라 기법 없이 정말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이런 일은 아무 것도 아니란 듯이, 자주 있는 일인 것처럼 묘사하여 노동자들의 궁핍한 삶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빵을 살 돈이 없다는 이유로 파업을 일으킨 노동자들을 향해 부르주아는 ‘대체 빵이 뭐길래’라며 노동자들을 행동을 책망한다. 하지만 노동자들에게 빵은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다. 오늘 당장 먹을 빵이 없으면 가족 모두가 굶는 것이고 그들은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노동자들의 현실을 거대한 저택에서 고급 요리를 대접받으며 파티를 여는 부르주아들이 알 리가 없었다,노동자들의 가장 안타까운 현실은 바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적극적인 투쟁을 하였음에도 그 투쟁은 실패로 돌아가고 노동자들은 어쩔 수 없이 다시 모순덩어리의 탄광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파업은 부르주아들에게 큰 타격을 줄 것이라 예상되었지만 부르주아들은 다른 노동자들을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를 실업자로 만들어버렸다. 파업을 함으로 손해를 입는 집단은 부르주아들이 아닌 노동자들이었던 것이다. 당시는 산업혁명으로 인해 토지로부터 분리된 농민들이 노동자로 탈바꿈 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노동자의 공급은 풍요로웠다. 이런 이유로 노동자들은 다시금 모순덩어리의 탄광을 자신들 발로 찾는다. 마외 부인의 마지막 표정은 당시 노동자들의 마음을 잘 드러내주는 듯했다. 부르주아들 때문에 남편과 자식들을 잃었기 때문에 절대로 다시는 탄광에서 일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마외 부인은 다시 탄광을 찾았다. 마외 부인이 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자신과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부당하고 모순이지만 자신과 가족이 살기 위해선 조금의 빵 부스러기라도 먹기 위해서는 스스로 노동자가 되는 것 이외에 노동자들에게는 다른 선택권이 없다. 어쩌면 마외 부인은 자신도 남편과 딸처럼 그렇게 언젠간 탄광에서 비참하게 죽을 지도 모른다고 예상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더 살기 위해 탄광을 스스로 찾아 들어갔을 것이다.영화를 통해 살펴본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모습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자본을 쥐고 있는 부르주아, 그리고 자본에 의지해서 생계를 유지해야하는 노동자들 사이에는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모순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모순을 노동자들이 알기 시작했고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적극적인 투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순은 결국 해결되지 않고 노동자들은 모순의 생산체제 속에서 해방되지 못한 채 자신을 악 순환의 고리 속으로 밀어 넣는 희생자로 전락하고 만다.나는 이런 모순을 보면서 19세기 뿐 아니라 여전히 우리 사회에도 남아있는 이 같은 상황들이 떠올랐다. 최근 많은 여전히 투쟁하고 있는 노동권과 임금 문제들 말이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모순이든 현재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은 모두 자본주의의 모순인 듯하다. 자본주의를 정의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자본주의는 개인주의, 자유주의와 함께 개인의 사유재산제를 인정하여 자신의 자본을 이용하여 이윤을 남기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경제체제이다. 이는 자본의 특성상 자본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이윤을 남기고 더 많은 자본을 생산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반면 자본이 없거나 부족한 사람들은 이윤을 남기기에 목적이 있기 보다는 생존의 목적으로 자본가들의 자본을 빌리거나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는 마르크스의 용어인 자본가와 노동자로 대체하여 써도 무방할 것이라 생각한다. 위의 상황에서 자본가는 노동자에 대해 구속력을 갖게 되고 이 관계에 의해 자본가는 강자가 되는 반면 노동자는 약자로 전락한다. 이에 자본가는 강자의 입장에서 약자인 노동자를 착취하고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게 되고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는 더욱 심화 고착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비판하는 이와 같은 자본주의의 모순은 영화에서 묘사한 것과 같은 한 인간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고 악순환의 덧으로 그들을 몰아간다.
    독후감/창작| 2012.11.26| 3페이지| 1,000원| 조회(116)
    미리보기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5월 22일 금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1:50 오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