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즈맨의 죽음』세일즈맨의 죽음은 미국의 대표적인 현대극작가 아서 밀러가 1949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아서 밀러의 희곡은 대부분 미국인의 공통된 비극적 생활면을 주제로 한 점에서 큰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미국의 현대산업의 사회 고발적인 면과, 비극적인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현대인의 삶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현대의 인간 소외현상과 산업화사회의 비정함에 대한 폭로와 고발은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고민과 처한 입장을 잘 표명해주고 있다.우리는 ‘세일즈맨의 죽음’ 의 주인공 ’윌리 로만‘을 통해 그 당시 미국사회를 살아가던 소시민들의 삶이 어떠했으며 그들이 어떠한 가치관을 가지고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 확인해볼 수 있었다. ‘경제대공황’은 미국 사회를 살아가던 소시민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으며 그들은 이에 대한 분명한 현실직시를 하지 못한 채 여전히 허황된 꿈만을 쫓고 있었다. 이제까지 사회적으로 신분차별 등으로 인해 억눌린 삶을 살아야만 했던 소시민들은 민주주의와 더불어 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하자 자신들의 노력만으로도 무조건 성공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게 되었지만 아직 성숙하게 자리 잡지 못한 자본주의 사회는 결국 그 한계점을 내비추면서 소시민들로 하여금 비참한 삶을 살게 한 것이다.이 영화의 주인공 윌리는 고생하지 않고 성공하겠다는 심산으로 세일즈맨이 되어 한평생을 살아왔다. 그는 “성실하게 일하면 반드시 성공한다. 인기만 있으면 뭐든지 잘 될 것이다.”라는 신념을 지니고 살아왔다. 그리고 그 신념을 두 아들 비프와 해피에게도 불어넣으며 그들에게 성공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윌리의 두 아들은 윌리의 기대를 저버리고 타락되어 버렸다. 그러나 늘 윌리는 아들들이 꼭 성공하리라는 집착으로 살아왔다. 윌리는 언제나 비프와 해피를 사랑하고 역시 비프와 해피도 윌리를 존경한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비프는 정신을 차리고 올리버에게 돈을 빌려 사업을 해보겠다며 올리버를 찾아가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온다. 게다가 윌리는 36년이라는 오랜 세월 근무한 회사에서 해고를 당한다. 이런 착잡한 심리변화 속 윌리는 점점 과거를 회상하는 횟수가 많아지게 되고 허상의 벤과 대화하며 탈출구를 찾으려 한다. 그때 과거에 수학 낙제를 하고 찾아온 비프가 자신이 다른 여자와 있는 것을 목격했던 기억이 상기된다. 이때 윌리의 이중적 갈등이 빚어진다. 결국 자기정당화를 위한 방법밖에 되질 않는다. 이런 심리변화를 겪으면서 윌리는 괜히 비프의 타락은 자신의 탓이 아니라며 격분한다. 결국 속마음은 자기 탓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과 현실로 궁지에 몰린 윌리는 비프에게 보험금을 남겨 줌으로써 자신의 위대함을 보여 주려 한다. 결국 윌리는 비프와 화해하던 날 밤에 자동차를 몰고 나가 자살한다.
『사랑방손님과 어머니』감상문『사랑손님과 어머니』는 여러 번 관심을 갖고 보아왔던 작품이다. 이번 과제로 인하여 나름대로 소설과 영화를 비교분석하며 많은 것을 공부하게 되었다.소설:『사랑손님과 어머니』에서는 '옥희'라는 서술자가 등장해서 이야기를 전달해 준다. '옥희'는 소설의 중심인물인 어머니의 딸인데, 소설에서는 그 어린 소녀의 눈을 빌려 어른들 세계를 그리고 있다. 아직까지 사랑이 무엇인지, 사회적인 가치관과 관습을 모르는 어린이를 서술자로 내세워 이야기를, 이야기의 대상인 '어머니'와 '사랑손님'의 관계에서 한 발 물러서서 이야기를 전달한다. 서술방법은 매우 흥미로운데 '옥희'의 순진무구한 말투가 소설적인 상황의 전개에 효과적으로 기능하고 있다. '옥희'의 천진스러운 말투로 이야기가 진행되므로 몰입과 흥미를 유발시키며, 자칫 통속적이며 신파적으로 진행되기 쉬운 소재의 소설에서 과장 없이 순수하게 그려질 수 있는 것은 '옥희'라는 어린서술자를 설정했기 때문이다. 아주 흔하고 상투적인 사랑과 이별이야기임에도 그 이야기가 어린아이의 눈을 통하여 전달되면서 인물들의 욕망이나 감정을 직접적으로 노출시키지 않고 어린화자의 입을 통해 간접서술 함으로서 오히려 독자들로 하여금 어른들 간의 미묘하고 수줍은 사랑에 대한 애틋함과 안타까움을 효과적으로 조성해내고 있다. 또한 독자들은 소설이 '옥희'의 관찰을 통해 알 수 있는 '어머니'와 '사랑손님'의 외양과 행위만을 제시해 주기에 그들의 사랑과 사회적인 가치관에 의한 슬픔에 관해서는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작가는 어머니와 사랑손님의 감정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장면에서도 인물의 내면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모르겠다'는 말로 얼버무림으로써 작품의 묘미를 극대화하는 효과를 노리고 있다. 이러한 효과는 소설의 애틋함을 더해주며 독자의 몰입을 높이고 있다. 결국 소설『사랑손님과 어머니』는 이러한 흥미로운 시점이 전반적인 극을 이끌어가는 중심이 되고 있다.영화의 서사적 측면: 영화의 서사적 측면을 보면 최종적으로 사랑손님이 떠나고 어머니가 옥희와 둘만 남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종결된다. 이 서사 속에서 영화 속에서 보였던, 사랑방손님에 대한 어머니의 애정이 간접적으로나마 성취되기도 했던 순간들의 표현이 약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사랑방손님과 옥희와 어머니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이나 옥희가 몹시 아팠던 날 밤, 그들은 한 가족을 이루고 있다. 한편 사랑방 손님이 떠나는 결말도 비탄이나 슬픔과는 거리가 있다. 우선 원작에서와 달리 영화의 결말은 이들의 영원한 이별을 암시하지 않는다. 사랑방 손님은 딸 옥희에게 “갔다가 곧 올게”라고 말하며 약속한다. 그리고 시장의 점쟁이도 그녀가 결국은 귀인을 만나 부귀영화를 누리고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 후반부로 가면 욕망을 담은 어머니의 시선이 카메라에 종종 클로즈업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감독이 관객을 대상으로 결말을 하나의 이야기로 확정짓지 않는 ‘열린 결말’을 의도했다고 볼 수 있다. 더불어 유심히 볼 것은 여주인공이 가부장적 질서로 혹은 처벌받는 것으로 영화가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머니는 근대 문물들과 친숙하지만 그렇다고 봉건적 굴레에 고스란히 굴복하지도 않는다. 이는 어머니의 모습이 언뜻 연약해 보이고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이지만 그 속에서 자기존중과 정체감을 잃지 않는 이지적인 여인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영화 속 기법: 옥희의 내레이션과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으로 시작되는 도입부는 아이의 시점으로 본 어른들의 잔잔한 사랑이라는 주제를 드러난 설정으로 보여준다. 이 영화의 전체적인 시점상의 특징을 도입부에서 보여주면서 앞으로의 시점도 이와 같이 ‘옥희’가 모든 이야기를 설명하는 구성으로 진행된다는 것도 암시한다. 이러한 도입부의 창조적인 기법은 최근 상영되는 영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고 한다.『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50년 전에 만들어진 오래된 영화지만 그 서정성이 현대 멜로영화와 비교해도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서정성을 강조하는 결정적인 요건은 바로 고정된 위치에서 프레이밍을 한 카메라의 시각이었다. 그 때 당시에는 기술상의 문제로 달리 촬영하진 못하였을 것이다. 카메라의 앵글을 고정해놓을 수밖에 없었지만, 이는 정적인 이미지를 관객에게 제공하여 화면을 더욱 더 서정적이고 심미적으로 표현하는 하나의 카메라워크가 되었다.시점측면: 시점측면에서 철저하게 1인칭 관찰자시점을 고수하는 이 영화의 옥희는 모든 사건과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관찰하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며 중간위치에서 중심 매개역할을 하는 서술자이자,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소설에서도 이와 같은 시점을 사용한 것처럼 영화에서 영상으로 그려지는 직접적인 이미지 속에서도 관찰자시점을 도입한 이유는 어린소녀인 '옥희'에게 관찰자와 서술자의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맡게 함으로서, 자칫 상투적이나 통속적으로 빠지기 쉬운 남녀 간의 사랑을 매우 신선하고 창의적인 각도에서 바라보게 해 순수한 애정을 드러내는 효과를 내려한 것 같다. 그리고 어머니와 사랑방손님사이에 '옥희'라는 관찰자로 하여금 주인공 둘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어린아이의 관념적 특성을 이용해 어른들의 마음속에 숨겨진 그리움과 망설임, 애틋한 감정을 어린아이만의 직관으로 선명하게 포착하여 아이의 시선을 활용했다고도 볼 수 있겠다.영화에서 어린아이의 서술묘사는 매우 표면적이고 기본적인 어휘사용으로 이루어진다. 영화에서 옥희의 모습은 6살짜리 애가 아니라 40살 먹은 아줌마의 능글맞음이긴 하다. 이러한 불충분함이 영화의 예술성을 극대화시키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밖으로 분명하게 드러낸다는 느낌보다 의미를 일정부분 숨긴 상태로 보여주는 기법을 사용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고, 이는 장면이 암시하는 의미를 드러냄과 동시에 의미를 감추기도 하는 예술적기법이 아닌가 생각한다.[예 : 어머니와 사랑방손님은 서로가 서로의 감정을 알고 있지만 자꾸만 계속되는 옥희시점에서 ‘왜 저럴까’ , ‘모르겠다’] 라는 어휘의 반복사용 등이다.영화는 원작에서 몇 가지를 변형시켰는데 옥희가족이 외가에서 살고 있는 것을 친가로 바꾸었고 부수적인물인 계란장수의 역할을 또 하나의 플롯으로 진행시켰다는 점, 그리고 원작에 존재하지 않는 사랑방손님과 어머니와의 포옹신이 있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이렇듯 원작과는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이러한 차이들이 원작주제를 변형시켰다고 보진 않는다.시점 비교: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옥희’라는 어린 관찰자에 의해 이야기가 진행된다. 물론 영화 속에서도 소설과 마찬가지로 어린 ‘옥희’가 화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영화는 어른들의 복잡한 심리를 드러내는 데 있어서는 복합적인 시점을 사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소설 속에서 맛볼 수 없었던 어머니와 아저씨의 사랑의 감정들이 영화 속에서는 더 적극적으로 표현되고 묘사된다. 소설 속에서 ‘옥희’의 제한된 눈에 의해 가려졌던 아저씨와 어머니의 감정들이 영화 속에서는 직접 표출되면서 재미를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소설 속에서 아저씨의 편지를 받고 '옥희'의 묘사에 따르면 많이 화가 났거나 아픈 어머니이지만, 영화 속에서 어머니는 아저씨 방을 직접 정리하며 옷의 냄새를 맡아보고 모자를 써 보며 자신의 감정을 보다 자세히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소설 속에서 편지를 쓰고, '옥희'의 모습 속에서 어머니를 찾는 소극적인 사랑방손님은 영화 속에서는 괴로운 마음에 술도 먹고, 어머니를 안는 등 적극적인 사랑의 행위를 보여주고 있다. 소설에서는 작품이 오직 ‘옥희’의 시점에서만 이야기를 전개해 나갔다면, 영화에서는 관찰자인 ‘옥희’외의 인물인 ‘어머니’와 ‘사랑방 손님’의 다양한 시점이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되어 자신들의 심리를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에게 원작인 소설에서보다 더 잘 느껴지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는 한참을 망설이는 모양이었읍니다. 그러더니 무슨 결심을 한 듯이 그 종이를 채근채근 펴 들고 그 안에 쓰인 글들을 읽었읍니다. 나는 그 안에 무슨 글이 씌여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으나 어머니는 그 글을 읽으면서 금시에 얼굴이 파랬다 빨갰다 하고 그 종이를 든 손이 이제는 바들바들이 아니라 와들와들 떨리어서 그 종이가 부석부석 소리를 내게 되었습니다. 하얀 손가락에 네 모로 접은 쪽지가 잡혀 있다. 손이 바르르 떨린다.옥희 「엄마! 그게 뭐야」어머니 「아무것두 아냐」하며 돌아서 짐짓 망설이다 결심한 듯 쪽지를 펴본다.「이 여사! …(중략)… 사랑합니다. 비로소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또한 이 한마디가 아무리 모순되고 부당할지라도 생명처럼 절대적인 것임을 자부하고 또 고백합니다. 많은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것 뿐 입니다.」 어머니의 손이 떨린다. 얼굴을 든다.서사 비교: 원작이 영화로 옮겨가면서 일어난 이야기의 가장 뚜렷한 차이는 성환댁과 계란장수의 사랑이야기다. 원작에서는 계란장수는 한 차례 잠깐 등장하는 역할에 불과하지만 영화에서 그는 성환댁과의 사랑을 서사를 끌고 나가는 또 하나가 되면서 주요한 플롯을 형성한다. 물세례 실랑이를 벌이며 시작된 그들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사랑으로 이어지고 그 사랑은 자유롭게 전개된다. 그들은 서로에의 관심을 스스럼없이, 또한 아무런 중개 없이 직접 드러내며 자신들의 감정에 충실하면서 결국 행복한 결합으로 마무리된다. 이는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사랑에 대비되면서 전개된다. 성환댁과 계란장수의 사랑은 직접적이며 적극적이지만 사랑손님과 어머니는 간접적이며 조용하다. 계란장수와 성환댁이 야외에서 공개적으로 데이트를 즐기는 동안에도 사랑손님과 어머니는 여전히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화가 난 것 같은" 얼굴로 어색한 시간만을 보낸다. 서로 시선조차 쉽게 주고받지 못하는 사랑방손님과 어머니는 달리 성환댁은 결혼도 하기 전의 관계로 임신을 하고 그것조차도 그들에게는 비난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성환댁과 계란장수의 사랑이 자연스럽게 전개되고 행복한 결합으로 이어지는데 반해 어머니와 사랑방손님의 사랑은 '옥희', 꽃과 편지 등을 통해 여러 차례 우회하며 간접적으로 전달되면서도 결국 맺지 못한 채 이별로 끝나고 만다.
『고령화 가족』감상문왜 소설 ‘고령화 가족’과 영화 ‘고령화 가족이’ 차이를 보이는 것일까?소설과 영화의 차이를 확인해 본다. 먼저 원작과 영화가 다루는 가족의 구성원의 차이부터 들여다본다. 소설에서는 오한모와 오인모는 이복형제이고, 오인모와 오미연은 동복남매이다. 즉, 어떻게든 혈연으로 구성되어 있는 가족이다. 단지 이들이 나이를 먹어 어머니 집으로 거의 비슷한 시기에 들어올 뿐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오한모는 아버지전처의 전남편에 아들이고, 오미연은 전파사 구씨가 아버지다. 다시 말하면, 오한모는 오인모나 오미연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 즉 비혈연가족인 것이다.그리고 소설에 없는 부분이 영화에는 설정되었다. 온 가족이 바닷가로 소풍을 갔다가 횟집에서 싸우는 장면이다. 옆자리의 젊은이들이 가족에게 시비를 걸자 온 가족이 일어나 그들과 싸운다. 어머니는 가족은 그래야 한다고 칭찬까지 한다. 소설에도 고기를 먹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영화에서는 그야말로 매일매일 삼겹살을 먹는다. 세상사에 치인 자식들을 먹여 거두는 것이 어머니의 역할이라는 것을, 때문에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식구라는 것을, 그런 식구가 힘을 모아 세파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을 영화는 선명히 부각시킨다.소설과 영화에서 여성의 성을 그리는 방식에서도 차이가 있다. 소설에서 젊은 시절 어머니는 이쁜이 수술을 ‘야매’로 하고, 전파사 구씨와 바람나 자식과 남편을 버리고 야반도주한 사람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어머니는 젊은 시절 잠깐의 실수로 전파사 구씨와 바람이 났을 뿐이다. 이런 면을 보면서 소설은 여성의 성을 자유롭게 그리는 반면, 영화는 다소 자유롭지 못하다는 면을 알 수 있다. 아마 소설보다 영화가 더 대중적이기 때문에 이런 방식을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설과 영화의 성을 드러낸 부분에서는 영화가 조심스럽다는 차이점을 더 확연히 알 수 있다. 가족구성원을 그리는 내용이다 보니 대중들에게 성을 드러내는 설정이 부담스러워 드러내는 것이 쉽지 않았으리라 나는 생각한다.한편 소설과 영화의 결말에서 차이가 난다. 소설에서 오한모는 수자와 동남아로 떠나고, 어머니는 전파사 구씨와 결혼하고, 오인모는 캐서린과 동거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영화는 다르다. 영화에서 오한모는 약장수 때문에 다리를 크게 다친 후 불편한 몸으로 수자와 결혼해 미용실을 운영하고, 오인모는 전파사 구씨와 결혼한, 어머니와 함께 같은 집에서 살아간다. 어머니는 죽지 않고 살아서 끝까지 가족과 함께 하는 것이다. 두 매체의 차이점은 소설에서 오한모는 동남아에 살며 어머니가 죽은 것도 모르고 살아간다. 오인모 역시 캐서린과 살며 에로 영화감독으로 정신없이 살아간다. 소설에서는 고령화 가족이 해체되어 각자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러나 영화에서의 오한모는 수자와 결혼해 어머니 옆에서 살고, 오인모는 어머니가 재혼한 오미연의 아버지와 함께 살아간다. 여전히 어머니의 품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영화에서는 가족이 모여 어머니의 품 안에서 살아간다. 이렇게 내용면의 분석만으로도, 감독과 작가의 세계관을 들여다볼 수 있다. 소설과 영화라는 매체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분명 발생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소설과 영화의 차이점은 분명히 드러나고 각 분야에서 독창성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독창성을 바탕으로 두 분야의 상호교류방법이 도출될 수 있다. 소설의 창작의 주체는 작가이지만 영화의 창작주체는 다수가 되고 예술작품과 문화상품의 두 가지 속성을 지니게 된다.표현매체의 차이에서도 영화는 영상을 활용한 표현으로 장면구성차이로 연결된다. 소설은 문자를 활용한 표현으로 사유를 기반으로 한 매체라는 것은 익히 배워 알고 있다.소설은 사건과 사건사이의 연관성으로 인물심리 변화과정의 논리적 타당성이 장면구성의 중요요인으로 작용한다. 말하자면 서사구조를 대표하는 인과관계에 의한 플롯이다. 이것은 독서행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예를 들자면 오인모가 모든 것을 잃고 무의미한 생활로 보내다가 엄마 집으로 들어갈 때의 표현들이다. 작가는 서술자의 진술을 통해 인모행동의 목적을 밝히고 심리적 인과관계를 명료하게 한다.이렇듯 소설은 ‘보여주기’와 ‘말하기’ 기법을 같이 쓸 수 있다.영화는 움직임을 기반으로 한 매체로 소설에 비해 사물의 역동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영화는 장면구성과 결합방법이 중요시 된다. 장면구성으로 한 장면의 모든 이미지의 구성요소가 주제를 드러내도록 하는 감독의 작업을 의미한다.예를 들어 미연이가 민경이 가출사건이 있었을 때 안절부절 슬픔에 빠진 장면이 이 방법으로 영화가 가진 고유의 양식이다.서술주체와 서사주체에서 소설과 영화의 또 다른 차이점은 초점화 이론과 연결되는 것이다. 소설에서의 소설주체와 서사주체의 문제는 ‘시점’으로 보여준다.
『밤으로의 긴 여로』감상문작가가 작품에 끼친 영향 유진오닐의 화려한 수상경력과 희곡에서 유진오닐이 차지하는 비중과 영향력은 매우 크다고 한다. 유진오닐의 작품은 의식적이다. 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소재와 주제 면에서 모든 작품에 작가자신의 실제생활이 직접적으로 극화되었다고 알고 있다. 많은 호기심을 갖고 있는 작품이기에 다시 공연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이번 과제는 어쩔 수 없이 대본으로만 독후감제출을 하게 된다.그의 작품을 분석하자면 그의 내면적과 외면적생활을 우선 살펴보아야 할 것 같긴 하다. 오닐의 인생에서 문제되는 점들은 대략, 가족관계, 가톨릭교, 마르크스주의, 해양 생활, 소외감, 사랑, 절망감등을 들 수 있다고 한다. 이런 문제점 중에 사회나 개인 혹은 가족으로부터의 소외감이야말로 오닐이 살면서 가장 크고 절실하게 느꼈던 부분이란 생각한다.오닐은 인색한 아버지와 마약중독자인 어머니, 그리고 나쁜 곳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형 사이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의 소원은 그를 사랑해 주고 이해해 주는 아내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가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두 번의 이혼을 해야 했고 노년에는 자식들로부터도 가족애를 느끼지 못하고 죽어간다. 그가 써온 많은 희곡들이 사실적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은 그의 생활이 그대로 글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리란 생각을 한다. 특히 그의 작품 중에 『밤으로의 긴 여로』 는 등장인물의 이름부터 성격까지 그의 가족관계와 같다는 이야기를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다른 극에서도 그의 주변 인물들은 오닐의 주변인물들이 극의 실제인물들이었으며, 이런 인물들은 한 작품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연이어 다른 작품에도 같은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고 검색을 통하여 공부하게 되었다. 오닐이 그가 만난 사람들에게 집착을 가지는 이유도 어쩌면 그가 항상 남들로부터 소외되어왔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그의 희곡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인생을 더욱 자세히 알아야 할 것 같다. 우리 보통사람들은 자신의 나빴던 기억들을 잊어버리려고 애를 쓰지만 그는 자신의 힘들었던 과거를 당당히 밝힘으로써 우리에게 사실적인 극의 느낌을 선사한다.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는 가장 우수하고 감동을 주는 작품으로 평가되는 자전적 희곡이라고 한다. 이 극은 작가 자신과 그의 가족의 심각하고도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기 때문에 자신이 죽은 후 25년 후까지 출판 또는 공연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대중들에게 다가가게 된 것은 그가 죽은 후 15년 뒤라고 한다. 이 극은 미국의 위대한 사실주의 희곡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작가오닐의 내면생활을 표출하고 있다. 오닐자신이 그렇게도 어려워했던 자기가족의 진실한 모습, 가족이라는 운명의 울타리에 갇혀 평생 동안 따라 다니며 자기 자신을 괴롭히던 자신의 영혼의 비밀을 적나라하게, 그러나 동정과 이해와 사랑으로 파헤치고 있다.『밤으로의 긴 여로』는 유진 오닐의 또 다른 극작품으로 작가 자신이 겪은 비극적이고 불운한 삶을 작품소재로 하여 자신의 가족사를 공개한 작품이다. 티론의 가족은 보통 다른 가족처럼 집이 아닌 별장에 모여 정상적인 가족의 일상적인 모습으로 극이 시작된다. 그러나 커튼처럼 드리워진 자욱한 안개와 병든 고래의 신음소리와 같은 음울한 무적이 암시하듯 이 극은 서로에 대한 불만과 갈등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가족구성원들의 문제점을 하나씩 들추어낸다. 지극히 인색함과 토지에 집착하는 아버지 티론을 중심으로 마약중독에 빠진 엄마 메리, 냉소적 성격의 알코올 중독자인 형 제이미, 염세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죽음을 바라보고 있는 예민한 성격의 에드먼드로 구성된 가족의 모습은 하루라는 짧은 시간의 여정을 통하여 서로에 대한 미움과 증오로 상처를 주지만 그 내면에는 서로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여름날 아침에서 밤으로의 시간적인 이동은 과거에서 현재로의 여정, 어떻게 보면 인간이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인생 전체의 여정이기도 하다. 이 극의 구성은 가족의 과거사로부터 현재까지에 이르는 비극의 전체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즉, 현재에 이르는 개인의 존재, 즉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곱집매』『일곱집매』는 평택 안정리 미군기지촌에서 살았던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미국에서 한국기지촌여성에 관한 논문을 쓰기위해 ‘하나’라는 학생이 도착하면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집안의 가난 때문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기지촌에 뛰어들었고 가족의 곱지 못한 시선과 사회에서 손가락질까지 받아야했던 두 할머니의 인생이야기가 가슴을 참으로 먹먹하게 만들었다. 이 연극이 주는 메시지는 한국현대사에 있어 모순된 점을 날카롭게 비방하고. 우리 모두 생각하지 못한 것에 대한 울림을 주었던 작품이었다.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의 작고 허름한 집에 미국에서 한국 기지촌여성에 관한 논문을 쓰기 위하여 하나가 방문하면서부터 연극은 시작되었다. 순영할머니는 젊은 시절 기지촌클럽에서 미군을 상대하다 얻은 아들 마이클을 입양 보내고 혼자 쓸쓸히 살아간다. 화자할머니 역시 젊은 시절 폭력적인 아버지를 피해 집을 나왔다가 순영할머니를 만나 기지촌에서 일하기 시작하였고 순영할머니와 함께 살아왔다. 이 집을 방문한 하나는 논문을 쓰기 위해 인터뷰하려 하지만 번번이 거절당한다. 순영할머니는 자신의 과거와 닮은 필리핀여성 써니를 보면서 그 동안 속에만 담아두었던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의 진심 어린 노력으로 순영 할머니는 마음을 열고 어쩔 수 없이 자기가 낳은 혼혈아들을 미국으로 입양시켜야 했던 가슴 아픈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또한 이 집에 살면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필리핀을 떠나 한국에서 돈 벌고 있는 써니를 만나게 된다. 필리핀 여성 써니는 가수의 꿈을 안고 한국에 들어왔지만 미군 클럽에서 스트리퍼로 일하며 한국 여성들이 떠난 자리를 채우게 되는데 이는 기지촌의 현재와 역사의 변주된 반복을 드러낸다. 미군기지 철수를 위하여 활동하는 상철, 그리고 그곳에서 태어났고 자라온 현재 미군기지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춘권 등을 만나 기지촌에 얽힌 그들의 사연도 듣게 된다.연극 일곱집매를 보면서 우리역사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단 한 번도 그들의 아픔을 생각하여 본적이 없었고 기회도 가져보질 못하였다. 기지촌 할머니들의 아픈 사연을 다루고 있는 이 연극은 관객에게 눈물을 자아내게 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눈물과 공감 또한 얻고자하지도 않았고 관객들에게 잔잔한 작은 메시지를 읽을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저 담담하게 할머니들 아픔을 연극에서 풀어내 주었다. 그녀들의 삶을 비극의 소재가 아니라 현대사회가 많은 관심을 갖고 책임지며 그들의 아픔을 감싸 안아야 할 문제라는 생각을 하여본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국가는 그들에게 무관심하였고, 그 여성들은 독거노인으로 살다가 말없이 사라져가고 있는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