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종합제철소의 건설과정과 한국경제에 준 영향학 번201031740학 과경제학과담당교수윤대희이 름이규하제 출 일2013.10.16I. 포항종합제철소의 건설과정1. 철강 산업 육성 배경당시 베트남 전쟁을 마친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닉슨독트린을 발표 그 내용으로 금유출을 막는 금태환정책을 시행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에 대한 미국의 원조가 줄어들었고 또한 베트남전쟁으로 인해 한국의 주둔해있던 미군 1개사단이 전쟁을 위해 한국을 떠남으로써 국방의 문제가 생겼으며, 또한 그 틈을 노린 북한의 1.21사태 등 수차례에 도발에 더욱 큰 체제의 위협을 느꼈다. 이에 따라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적 자립과 국가존망을 위해 중화학 공업을 추진하였고, 그 중에는 산업의 쌀이라 불리는 철강 산업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큰 의욕을 보였다.2. 제철소 건설의 시작1965년 존슨 미국 대통령과 정상 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하면서 피츠버그 철강공업지대를 시찰하고, 미국의 제철소 건설 기술 용역회사인 코퍼스의 포어 회장을 만나 사업 실현에 필요한 외자를 조달하기 위해 국제 제철차관단을 구성할 것을 제의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1966년 12월 11일, 이른바 KISA(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 : 대한국제제철차관단)가 정식 발족했다.미국, 영국, 독일 등 5개국 8개사로 구성된 차관단은 며칠 동안 회의를 거듭한 끝에 한국의 종합제철사업을 지원한다는 내용에 합의, 첫발을 내디뎠다.3. KISA와의 불안정한 협정과 IBRD 보고서1967년 10월 20일, 마침내 KISA와 우리 정부 사이에 ‘종합제철 건설에 관한 기본협정’이 체결됐다. 전문 45개 조. 조강 60만 톤 규모의 제철소를 1972년 9월에 완공하며, 300만 톤급 확대를 전제로 설계하기로 돼 있었다. 건설자금은 1억 3,070만 2,000달러(외자 9,570만 2,000달러 / 내자 3,500만 달러).하지만 정부는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협정을 체결했다는 결과 자체에 만족하여 협정서에 중대한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바로 가장 중요한 자금조달 부분이 모호하게 처리돼 있던 것이다. 또한, 협정 불이행시 KISA 회원사들을 법적으로 구속할 수 있는 조항은 전혀 없었다. 이런 불안정한 협정 이후 우려하던 최악의 상황이 일어났다.차관공여 주체인 미국 수출입은행이 세계은행(IBRD)에 한국정부의 차관요청에 대한 심사를 의뢰했으며, IBRD는 한국의 종합제철사업에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은 것이다. KISA는 곧바로 IBRD 보고서 내용을 인용하면서 한국의 제철소는 경제적 타당성이 없기에 차관을 승인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IBRD는 한국 대신 브라질의 경제적 잠재력을 인정, 브라질에 제철소 건설 차관을 승인해주었던 것이다.4. 공식적으로 종합제철사업을 책임지게 된 대한중석박정희 대통령은 1960년도, 당시 대한민국 유일의 외화벌이 국영기업이자, 회사의 수출액이 국가 전체 수출액의 약 60%까지 차지한 거대 기업이었던 대한중석에 종합제철사업을 맡기기로 결심하였다. 그 이유로 대한중석은 사내 유보자금이 풍부해 내자조달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으며 능력 있는 인재들이 포진해 있어서 추진인력을 구성하기도 편하였다. 당시 적자였던 대한중석을 1년만에 흑자로 돌려놓은 박태준 사장은 박정희 대통령에 의견에 따라 종합제철건설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내정되었다.5. 하와이 구상KISA의 거절에 종합제철사업이 백지화가 될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박태준사장의 머리를 스치고 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대일 청구권 자금을 전용, 제철소 건설자금 1억 달러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박태준사장은 정부의 동의를 얻어 대일 로비를 벌였다. 일본의 철강업계, 경제계, 정치계 인사들을 만나 한국이 제철소를 건설 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고 설득했다. 박태준사장은 야와타제철 사장인 이나야마와 후지제철 사장 나가노를 만나 호의적인 답변과 지원을 약속 받았다.청구권 자금 3억 달러는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일종의 배상금으로 1966년부터 1975년까지 10년 동안 균등분할로 무상지급하게 돼 있었다.이 돈은 일본정부의 견제로 농림수산부문에 투자하기로 양국 정부 간에 합의가 끝나 이미 국회 비준까지 얻은 상태였다. 그러나 일본철강연맹의 영향력은 일본 정부를 움직였다.1969년 8월 28일 양국 정부는 각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다음날 일본 정부는 포항제철 프로젝트를 지원할 것이며, 서울에 대표단을 파견해 최종합의서를 마무리짓기로 했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6. 종합제철소 1기 건설앞에 이른바와 같이 여러 가지 역경을 겪어내고 난 후 드디어 1970년 4월 1일 오후 3시에 1기 건설 착공식이 거행되었다. 착공식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하여 정부요인 등이 참가하여 이루어졌다. 제철소 부지 조성은 잘 진행되고 있었다. 문제는 설비였다. 기술력이 없는 우리나라는 전적으로 해외에서 설비를 구매하여야 했다. 설비구매는 제철소의 경쟁력을 결정지을 만큼 최신의 설비를 싼 값에 갖추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다. 포스코는 먼저 설비구매팀을 만들었다. 설비구매팀이라지만 그들도 한번도 설비를 본적이 없었지만 그들은 오로지 책임감하나로 열심히 뛰어다녔고 좋은 가격에 설비를 구매 할 수 있었다. 경험부족 등으로 인해 공사기간이 지연되면서 포스코는 24시간 쉬지 않고 공사를 강행하였고 그 결과 공사기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마침내 1973년 6월 9일 마침내 포항 1고로에서 황금빛 쇳물이 쏟아지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포항제철소가 완공되었다. 그 이후 포항제철소는 3년만에 수출 1억불을 달성하였고 77년에 기술연구소, 86년 포항공과대학, 87년 포항산업과학연구원을 잇따라 건설하면서 인재양성과 기술력 개발에 힘쓰며 자생력을 키워나갔다. 그리하여 차츰 규모를 키워가던 포항종합제철소는 현재 세계적인 기술력과 생산량을 보유한 글로벌기업 포스코(POSCO)로 성장하였다.1970년 4월 1일 포항 1기 설비 종합 착공식 현장박정희대통령(가운데)의 모습II. 포항종합제철소가 한국에 준 영향1. 국내 최초이자 최고의 철강기업위 그래프를 보면 포스코의 자산규모는 약 52조원으로 포스코를 제외한 국내의 다른 철강업계의 합보다도 크며 매출 역시 독보적으로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자산이나 매출의 규모에 비해 부채의 비중이 크지 않은 것을 보면 굉장히 건전한 기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2. 수요산업의 경쟁력 향상에 기여자동차산업의 총 철강원재료 구입비는 95년 기준으로 2조 2000억 원이며 이중 국산은 1조 8000억 원이다. 일본과의 철강구입가격차로 인해 한국의 자동차산업은 철강산업으로부터 5조 3000억 원의 경쟁력 지원(원가절감) 효과를 얻고 있다.조선산업의 경우도 철강소재 구입비 9200억 원 중 국산으로 4조 9000억 원을 구입하고 있어 일본과의 가격차로 대비할 때 한국의 조선산업은 철강산업으로부터 936억 원의 경쟁력지원(원가절감) 효과를 얻고 있다. 결과적으로 포항제철소는 철강을 수요하는 산업 조선(세계1위), 자동차(세계5위)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효자산업으로 자리매김 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