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보보 자소서1. 귀하의 성장과정(가족,학창시절,사회경험 등)을 토대로 성격 및 장단점을 기술하여 주십시오저는 학창시절 지각 한 번 없이 개근을 했으며, 대학 수업에도 결석한 일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중학교 시절 오른쪽 발이 찢어져 수술을 했을 때, 부모님의 만류에도 등교하였습니다. 이처럼 저는 스스로에게 혹은 타인과 약속한 사항에 대해 사소한 일이라도 지켜왔습니다.저는 어느 하나를 목표로 잡으면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합니다. 대학교 중간고사 기간 중 몸살이 걸린 적이 있습니다. 몸살이 너무 심해 집에서 휴식을 취하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저는 며칠 간 밤을 새며 시험공부를 하였습니다. 당시 집안사정이 어려워 장학금을 마련해야했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끈질기게 공부했습니다. 그 결과 3학년 전 학기 4.5 만점을 받아 장학금을 받았습니다.그러나 혹자는 저를 보고 타인의 말을 듣지 않는다며 충고를 합니다. 이를 고치기 위해 행동을 취하기 전,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는 습관을 가졌습니다. 또한 사고의 폭을 넓히기 위해 교육 봉사를 하며 다른 사람들과 교류를 자주 하였습니다.2. 인생에서 겪었던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은 무엇이며, 그 사건이 본인에게 미친 영향에 대하여 기술하여 주십시오2012년 겨울, 당시 분대장이었던 저는 지휘요원 분들과 몇 달간 대화를 나누고 나아가 중대장님과 단독 면담을 하여 부대 소통망을 세웠습니다. 당시 저희 중대 내에선 지휘요원, 대원 간의 대화가 단절되어 있었고, 지휘요원 분들의 부당한 업무 지시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대원들의 불만은 누적되고 있었고 연초에 있을 지방청 소원수리 때 대대적인 신고를 하자는 의견이 팽배했습니다. 다행히 부대 소통망이 실효적으로 실시되어 대원들의 의견이 중대장님께 직접 보고되었고, 대원들의 누적된 불만이 상당 부분 개선되었습니다. 그 결과 연초 소원수리에서 저희 부대는 우수한 성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이 사건은 후임 대원들과 지휘요원 분들의 신뢰 속에서 본인이 구상했던 방안을 성공적으로 구현한 일이기에 본인에게 매우 의미 있었습니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어떠한 일을 진행시키기 전에 사람 간의 신뢰를 쌓는 것이 중요하며 나아가 소통을 통해서 어떠한 갈등도 해결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3. 귀하에게 ‘직장’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이며, 그 직장으로서 SGI서울보증을 선택한 이유와 입사를 위해 준비한 본인의 경쟁력은 무엇인지 기술하여 주십시오. (500자 이내)본인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사회에 공헌하는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제게 있어 직장은 본인과 사회를 연결하는 가교이며, 동시에 사회에 보탬이 되도록 능력을 표출하는 창구입니다.저는 경제학을 공부하며 특히 게임이론에, 그 중 정보의 비대칭성에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SGI서울보증은 지난 40여 년간 보증서비스를 제공하며 비대칭적인 정보로 인한 경제 내 비효율성을 완화시켜 왔습니다. 이는 제가 관심 있던 분야이며, 특히 제 직업관과도 부합합니다.경제학과에 진학하여 업무에 필요한 경제학 과목들을 수강하였으며, 학부 수준에서 부족한 과목은 대학원 수업을 수강하였습니다. 특히 교내 경제학회 학회장으로 활동하며, 경제시사 및 현황을 주제로 매주 토론을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시사 분석 능력 외에 리더쉽을 향상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에 본인은 실질적인 업무를 배우기에 필요한 지적 소양을 충분히 쌓았으며, 다른 지원자들에 비해 주도적이고 분석적인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4. 최근의 금융환경과 관련한 이슈를 소개하고, 그에 관한 본인의 생각을 SGI서울보증이 추진해야 할 전략관점에서 기술하여 주십시오. (500자 이내)2008년, 금융기관들의 리스크 추구행위 및 도덕적해이 등의 문제가 누적되어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했습니다. 이후 금융건전성이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고 금융기관에 대한 감독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이에 맞춰 SGI서울보증은 미시적 차원에서 감독기능을 강화하여 자체 건전성을 향상시켜야 합니다. 최근 SGI서울보증은 해외보증확대를 위해 해외건설협회와 협약을 맺었습니다. 이처럼 보증의 범위가 넓어짐에 역선택 및 도덕적해이로 인한 피해가 예상됩니다. 이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신용 등급에 따라 보다 계층화된 보증 상품을 개발해야합니다. 또한 감독체계를 새롭게 개편하여 실효적인 감독을 시행해야 합니다. 물론 정보의 비대칭으로 인한 피해는 사전에 예방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가능한 이를 사전에 파악하고 예방하기 위해 해외 보증업체 및 전문가들과 프로젝트 리스크 및 업체 건전성을 평가하는 새로운 지표를 개발해야합니다.
바우하우스목차 1. 바우하우스의 역사 - 바우하우스 란 ? - 바우하우스의 역사적 배경 - 바우하우스 1 기 ~4 기 2. 바우하우스 건축물 및 작품 3. 바우하우스의 영향바우하우스의 역사1. 바우하우스의 역사 - 바우하우스 란 ? 1919 년 건축가 그로피우스 설립 . 미술 학교 + 공예 학교 ‘ 집을 짓는다 ’ , ‘ 건축의 집 ’ 바우하우스에서 말하는 예술은 종합을 이루어 건축이 되게 하는 것 .1. 바우하우스의 역사 - 바우하우스의 역사적 배경 19 세기 산업혁명 – 수공생산 기계생산 건축 , 공예 등 생산기술들의 수공생산과 기계생산 사이 의 괴리 . 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독일은 큰 혼란에 빠짐 . 기계가 도입되고, 적절한 디자인 형식을 개발하고자 함 . 독일공작연맹 조직 - 미술과 산업간의 연계를 추구 . 디자인의 모던화 , 모던화된 디자인 탄생 .1. 바우하우스의 역사 - 1 기 바이마르 바우하우스 (1919~1924) ( 1883~1969) ( 1883~1969) 독일의 철학 , 예술가들의 활동무대였던 바이마르에서의 기간 . 수공예가 를 양성하기 위한 일반적인 공예학교의 성격이 강하게 드러남 . 이념 및 교육과정 수공예 등 기초조형교육 의 필요성을 강조 . 물질적 욕구보다 정신적 욕구 를 더 중요시 함 . 이념이 통일되지 않고 대부분 표현주의 적 경향 .1. 바우하우스의 역사 ( 1883~1969) ( 1883~1969) ↑바이마르 바우하우스의 목판화 (왼쪽)와 설립 선언문(오른쪽 )1. 바우하우스의 역사 - 1 기 바이마르 바우하우스 (1919~1924) ( 1883~1969) ( 1883~1969) 발터 그로피우스 (1883~1969) 1919 년 , 바이마르의 미술학교와 공예학교를 ' 바우하우스 바이마르 ' 로 통합 , 1928 년까지 교장 역임 . 디자인 교육의 기초자세를 강조 . 수공예를 강조하고 물질적 욕구보다 정신적 욕구의 충족을 중요시하며 합목적성과 심미성의 결합을 시도 . 건축에 있어 표준화 , 대량생산 시스템과 합리적 기능의 추구 .1. 바우하우스의 역사 ( 1883~1969) ( 1883~1969) 데사우에 위치한 발터 그로피우스의 집 .1. 바우하우스의 역사 - 1 기 바이마르 바우하우스 (1919~1925) ( 1883~1969) ( 1883~1969) 요하네스 이텐 ( 1888~1967 ) 예술과 산업적 측면에서의 디자인을 끊임없이 고민하며 자연과 재료에 대한 연구를 함 . 기초교육의 지도를 담당 . 체험을 통해서 자연의 재료의 성질을 이해시킴으로써 각자의 창조력에 눈을 뜨게 함 . 대체적으로 신비적인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 기능주의를 지향하던 바우하우스와 뜻을 같이할 수 없어 1923 년에 바우하우스를 떠남 .1. 바우하우스의 역사 - 2 기 데소우 바우하우스 (1925~1927) ( 1883~1969) ( 1883~1969) 1925 년 3 월 말 정권 변경으로 인해 바이마르 교사가 계약해지 당함 . 데소우 바우하우스로 이전함 . 시립 대학 규모 . 이념 및 교육과정 기계 생산을 인정하여 교육활동과 생산활동을 분리 . 목적 산업 디자이너를 양성하는 데 주 목적을 가짐 .데소우 바우하우스1. 바우하우스의 역사 - 2 기 데소우 바우하우스 (1925~1927) 추상미술의 아버지이자 ‘ 청기사 ’ 파의 창시자로 사실적인 형체를 버리고 순수 추상화의 탄생이라는 미술사의 혁명을 이룸 . “색은 영혼에 떨림을 줌으로써 , 영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힘이다 .“ 순수하게 미술의 감정적이고 정신적인 힘을 증류하여 가장 응축된 형태로 만듦 . 1883~1969) 바실리 칸딘스키 ( 1866~1944)1. 바우하우스의 역사 - 2 기 데소우 바우하우스 (1925~1927) 현대 추상회화의 시조이자 ' 청기사 ' 파로 활동했고 색채에 눈을 떠 새로운 창조세계로 들어감 . 1933 년까지 독일에 머물렀으나 , 나치에게 102 점의 작품을 몰수당한 뒤 ' 독일은 이르는 곳마다 시체냄새가 난다 ' 고 말하고 스위스로 돌아감 . 1883~1969) 파울 클레 ( 1879~1940)1. 바우하우스의 역사 - 3 기 베를린 바우하우스 (1928~1930) ( 1883~1969) ( 1883~1969) 1928 년 2 월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에서 떠나면서 3 기 시작 . 이념 및 교육과정 후임 학장인 한네스 마이어는 형식주의적인 면을 비판 . 디자인의 역할 = 민중에 대한 봉사 . 건축은 미적 과정의 일부 라는 점을 강조함 . -1930 년 마이어가 떠나면서 3 기는 막을 내림 .1. 바우하우스의 역사 - 3 기 베를린 바우하우스 (1928~1930) 한네스 마이어 (1889~1954) 바우하우스의 2 대 교장에 취임 . 공산주의자 임을 숨기지 않고 , 건축비교예술론 을 주창함으로써 1930 년에 해고 .1. 바우하우스의 역사 - 4 기 미스 반 데어 로에 바우하우스 (1930~1933) ( 1883~1969) ( 1883~1969) 1930 년 마이어가 떠난 뒤부터 베를린 바우하우스가 폐쇄된 1933 년까지 . 미스 반 데어 로에가 교장이 됨 . 1932 년 나치의 정권장악으로 인해 베를린으로 옮김 . 시림 연구소 형태로 규모 축소 .1. 바우하우스의 역사 - 4 기 미스 반 데어 로에 바우하우스 (1930~1933) ( 1883~1969) ( 1883~1969) 이념 및 교육과정 기초 과정과 전문 교육 후 자유로운 디자인 활동 실시 . ( ex. 기금 조달을 위해 ‘카니발 행사’도 병행함 .) 목적 다른 시기와 비교했을 때 , 비교적 ' 자유로운‘ 디자인 활동을 추구 .1. 바우하우스의 역사 - 4 기 미스 반 데어 로에 바우하우스 (1930~1933) 미스 반 데어 로에 (1886~1969) 베를린 바우하우스가 폐쇄된 후 1937 년 미국 일리노이 공과대학 건축과 주임교수로 역임 . 시카고를 중심으로 활발하고 다양하게 설계활동을 펼침 .바우하우스 건축물 및 작품파구스 제화공장 (1913)독일공작연맹 박람회 사무소 (1914)시카고 트리뷴 신문사 건물 (1922)바우하우스 건축물 관련 영상2. 바우하우스 건축물 및 작품 바르셀로나 의자 MR20 의자 최초의 캔틸레버 의자2. 바우하우스 건축물 및 작품 천장용 전등 탁상용 전등 둥근모양 조명2. 바우하우스 건축물 및 작품 차주전자2. 바우하우스 건축물 및 작품 칸딘스키 작품 -Composition IV (1911) -Black Spot I (1912) -Composition VIII (1923)2. 바우하우스 건축물 및 작품 파울 클레 작품 - Sudiche Garden( 남쪽정원 ) 1936 -Tunisian Gardens( 튀니지의 정원 ) 1919바우하우스의 영향3. 바우하우스의 영향 〮 디자인에 관련된 많은 성과의 흐름을 하나로 통합하고 , 근대적인 흐름을 이끌어 내는 합류점이 되어 디자인 동향에 새로운 전기 를 마련 〮 기능적이고 구조적이며 , 기하학적인 디자인을 성취함으로써 미술과 산업 을 밀접하게 결합 하는 독일 디자인을 실천하였으며 , 미술가의 역할을 재 정립 〮 장식의 제거를 강조하는데 영향을 받아 대량생산과 가능성을 강조하고 기 계의 이용을 인정 , 인더스트리얼 디자인 을 예술의 한 분야로 정착시키는데 중추적인 역할 . ▷ 인더스트리얼 디자인 (industrial design) 공업 디자인 . 대량 생산을 전제로 디자인하는 시스템 . 공업생산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디자인의 총칭이며 사용하는 물건의 생산에 관계되는 디자인 을 말한다 . 가구ㆍ부엌용구ㆍ사무용기구ㆍ공업기구ㆍ교통기관용품 , 그 밖에 각종 공업제품까지 포함한다 .3. 바우하우스의 영향 〮학교 교육에 있어 예술 , 공예 , 공업의 통일을 실현 미술 대학의 커리큘럼이 바우하우스 프로그램으로부터 발전 , 현대 조형예술 분야에 많은 영향 . 〮짧은 기간 운용 하지만 많은 곳에서 모방 , 새로운 차원에서 대중의 생활에 공헌 현대적 형태 디자인을 성취 하는 활력소 .3. 바우하우스의 영향 독일의 산업디자인 컨셉 하면 뗄 수 없는 업체인 가전제품 생산업체 브라운 (Braun ) 1960 년대에 브라운을 이끈 디터 람스는 과거 울름 디자인 학교 ( 1953 년에 바우하우스의 자취를 뒤이어 보다 진취적인 산업 디자인 미학을 개척하는 취지로 설립 ) 에서 가르쳤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 기능성 ’ 과 ‘ 기술력 ’ 이 결합된 제품을 추구 . - 디터 람스 ( Diter Rams ) / 브라운 (Braun) 사디터람스 대표작 SK-4 (Radio-audio Combination, 1956) TP- 1 (Audio Transistor, 1959) 문 손잡이 , 1980ET-66 전자 계산기 현대적 감각으로 재탄생3. 바우하우스의영향 ‘ 단순함이란 궁극의 정교함이다 ’ 라는 디자인 철학으로 전 세계 소비자들을 사로잡은 애플의 디자인 원천이 독일의 바우하우스 양식에 기반 . 잡스는 짙고 어두운 소니 풍의 디자인을 선호했지만 1980 년대 초 국제 디자인 컨퍼런스에 참석한 잡스는 ‘ 디자인은 표현정신을 담으면서도 단순해야 한다 ’ 는 바우하우스의 스타일에 매료되어 디자인 철학을 바꿈 . - 스티브 잡스 ( Stevejobs ) / 애플 (Apple)애플 디자인3. 바우하우스의 영향 현대카드의 정태영사장은 디자인 철학을 논할 때 바우하우스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음. 북촌의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에서는 도서선정 또한 바우하우스 이후의 디자인을 집중 조명 . - 정태영 / 현대카드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Q A{nameOfApplication=Show}
이 책은 고등학교 때 국어시간에 필요해서 책을 사서 읽은 적이 있었다. 책을 읽는 것이 습관이 되어있지 않던 지라 어색했지만 금방 재미있게 다 읽었던 기억이 있다.이 작품의 저자 채만식은 대한제국에서 태어나 일제 치하에서 활동하다가 해방된 조국에서 죽었고 그의 삶은 한민족의 격동기에 해당한다. 이런 격동기의 지식인은 적극적으로 부역하며 사는 소수와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소수를 제외하면, 아마도 이도 저도 못하는 용기 없는 냉소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탁류라는 작품에서도 그의 냉소적 지식인으로서의 면모가 유감없이 나타 준다. 저자는 한편으로는 제목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타락 혹은 영락해 가는 군상들의 면모를 가감 없이 잔혹하게 보여 주다가도 군데군데 아이러니를 섞어서 피식 하는 쓴웃음을 짓게 만든다.전체의 줄거리를 보면 정 주사는 고향 용댕이에서 군산으로 이사를 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살림은 점점 줄어들어 빚에 담보로 잡힌 집마저 팔게 된 정 주사는 결국 미두장의 하비꾼으로 전락한다. 무능한 가장인 정 주사에게 두 딸 초봉이와 계봉이가 있습니다. 초봉이는 다소곳한 행동으로 제호와 승재, 태수의 마음을 끌게 된다. 초봉이는 승재와의 사랑을 성취하지 못한 채 서울로 와서 제약회사 일을 하려는 제호를 따라가려 하지만 그 일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결국 초봉이는 부자인 태수의 청혼을 받아들인 아버지의 결정에 따라 기구한 인생을 태수에게 맡기게 된다. 한편 형보는 태수를 죽게 하고 자신이 초봉이를 차지하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형보에게 추행을 당한 초봉이는 신혼살림을 부모에게 맡기고 제호를 찾아 길을 나서 그의 여자가 된다. 그러나 초봉은 마음속에 늘 승재를 품고 살고 있었다. 형보는 운이 좋아 마두와 고리업에서 돈을 벌어 초봉이를 찾아와 제호로부터 초봉이를 데려간다. 한편 계봉이는 서울에서 초봉이와 함께 살며 형보의 돈으로 살기 싫어 백화점에 취직한다. 초봉이는 지옥과 같은 형보와의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형보를 죽이고 자결할 결심을 한다. 승재는 의사 시험에 합격하게 되고 계봉이와 사랑하리라 생각하고 이에 승재는 계봉에게 청혼을 하나 계봉은 확답을 피하고 초봉의 이야기를 꺼냈다. 승재는 계봉으로부터 초봉의 기구한 사정을 전해들은 후 계봉과 함께 초봉을 형보의 굴레에서 빼내려는 생각을 하고 초봉을 찾아 나서지만 초봉은 이미 형보를 죽인 후였고 계봉은 초봉에게 자수를 권하고 초봉은 승재에게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말을 한다.탁류의 줄거리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초봉이라는 한 여인의 수난사이다. 잔혹할 정도의 수난사이다. 그리고 요즘 말로 막장드라마이다. 딸의 혼인을 통해 한 몫 챙기려는 아버지, 고객의 돈을 몰래 빼돌려서 미두판(요즘으로 치면 선물 시장)에 뛰어드는 은행원, 복잡한 치정관계, 강간, 독살, 아동학대 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민망할 정도이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주인공 초봉의 딸 송희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사람이 3명(태수, 형보, 제호)인 대목이다.
이 책을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언어시간 때문이었으나 학교 공지사항에 올라온 추천 도서 중 하나였기에 다시 한 번 읽어보기로 마음먹고 중고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고 앉은 후 꽤 흥미롭게 읽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조의관, 조상훈, 조덕기 삼대에 걸친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쓰인 이 이야기는 한 가문이야기지만 그 당시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우리나라를 빗대어 고등학교 때 배우기도 하였다.이야기 속 할아버지인 조의관은 대지주이고 양반 행세를 하기 위해 족보까지 살 정도로 명분과 형식에 얽매여있는 봉건적인 인물로 전형적인 구세대로 묘사되었다. 아버지인 조상훈은 교육과 교회 사업에 힘쓰는 지식인이자 독실한 기독교인인척 하지만 실은 인간적인 면에서는 거의 밑바닥수준으로 묘사된다. 아버지 조의관의 어마어마한 재산을 이용하고 주색에 빠지는 등 타락한 생활을 일삼는 이중적인 인물이다. 손자인 조덕기는 지식청년으로 사회의식이나 민족의식에 있어서 공평성과 정의감을 가지고는 있으나 대립을 피하고 소극적이며 우유부단한 인물이다. 할아버지의 죽음이 몰고 온 재산상속 문제에 불이 붙으면서 주변 인물들의 엄청난 추악한 모습으로 이 3대의 이야기는 절정을 맞게 된다.이 책을 보고난 후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조상훈이 3년만에 홍경애를 만나는 장면이었다. 물론 이 장면이 전체 이야기에 있어서 딱히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그저 조상훈과 홍경애의 관계와 재회를 조금 더 극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부분일 뿐이다. 먼저 홍경애는 조상훈과 같은 교회에 다니던 신자이자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는 교사이고 조덕기와 학창시절 친구이다. 하지만 학교에서 조상훈과의 소문이 이상하게 나면서 그 소문에 휩쓸리게 되어 조상훈은 홍경애를 흠모하게 되고 결국 홍경애는 임신까지 해 아이를 덜컥 낳게 된다. 그 후 조상훈은 3년간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집을 한 채 구해주고 그 곳에 홍경애를 넣어둔 후 거의 잊고 산다. 홍경애는 분하지만 그동안 도움 받았던 것을 생각해 그냥 조용히 살게 된다. 3년 후 조상훈의 아들 조덕기가 친구와 함께 술집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그곳에서 일을 하는 홍경애를 보게 된다. 조덕기는 알음알음으로 부친과 그녀사이의 일을 대충 알고 있었고 자연스레 조상훈에게까지 연락이 미쳐 그 둘은 다시 재회하게 된다. 다시 만난 이 장면이 정말 재미있게 느껴졌다. 홍경애와 조상훈이라는 거대한 두 축을 세워놓고 그 사이에 친구 병화와 일본인들을 절묘하게 배치해 긴장감이 감돌도록 조성해 두었다. 또한 홍경애를 오랜만에 만나는 조상훈은 죄의식, 호기심, 질투 등 이런 감정들이 엉키어 살짝살짝 드러나고 홍경애 역시 미움, 복수심, 그 외에 전에 느꼈었던 약간의 감정들이 알게 모르게 드러난다. 여러 복잡한 감정들이 섞여 긴장감과 흥미로움을 극대화시키는 동시에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스치듯 지나가는 작가의 필력에 놀랐다. 또한 이 소설이 1931년에 나왔지만 만나는 상황설정과 그 만남 이전까지의 과정 또한 세세하고 절묘하게 표현을 잘했다는 생각이 마구 들었다. 그리고 이야기 속 조의관과 조상훈의 갈등에서 드러나듯이 각 세대가 서로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며 전혀 타협하려는 생각이 없었다. 결국 세대교체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은 조가는 조상훈이 주색과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조덕기는 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붙잡히는 등 몰락하면서 비극적으로 끝나게 된다.
백범일지를 읽고1. ‘백범일지’에 관한 이해(1) 기본적 이해‘백범일지’는 김구(金九)의 자서전으로 1997년 6월 12일 보물 제1245호로 지정되었다. 1947년 조선인쇄회사간행. 현재 10여 본이 각 출판사에서 중간되고 있다. 민족이념의 역사적인 문헌이며 독립운동의 증언서이다. 상하이와 충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직을 지내던 필자가 항일운동의 최전선에서 방어할 각오로 유서를 대신하여 기록한 것이다.상?하편으로 구성되었는데, 상편은 인?신 두 아들에게 쓴 편지 형식으로 1929년 5월 3일 상하이에서 머리말을 기록하였다. 또 서두에 실린 저자의 말 은 1947년 개천절로 명기되어 있어 이 책이 20년에 걸쳐 완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상하이에서 집필한 상편은 ? 등으로, 하편은 ? 등으로 구성되어 지은이의 파란만장한 조국 광복 투쟁사를 엮었다. 상?하편 뒤에 수록된 은 완전 독립의 통일 국가 건설을 지향하는 민족이념을 그리고 있다.(2) 책 소개1947년 국사원에서 최초로 출간된 이후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져 왔던 「백범일지」는 27년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끌어왔던 독립운동가 백범의 생애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책이다.수많은 판본들이 출간되었지만 많은 부분이 삭제, 축약되거나 잘못된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 책은 백범의 친필 원본, 등사본, 필사본, 여러 가지 출간본 등 여러 저본을 면밀하게 검토, 대조하여 교감한 책이다.「백범일지」는 백범이 만리타국에서 자료없이 기억을 더듬어 집필했기 때문에 서술내용의 시기가 모순되거나 인명, 지명 등의 착오가 적지 않다. 따라서 이 책은 사전류는 물론이고 고전, 규장각 자료 등의 고문서, 수많은 회고록, 일본과 중국 등 해외의 임정 관계자료까지 두루 활용하고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로부터 자문을 받아 원본의 오류를 바로잡고 미흡한 점을 보완하였다.특히 「백범일지」의 하권 뒷부분인 해방 전후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발행된 모든 출간본이 공통적으로 국사원에서 나온 책을 저본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해방 이후 백범이 구술한 것을 측근이 기록하여 추가시킨 '추가본'이 유족의 의해 보관되어 왔으며 이 책은 그 추가본을 발굴하여 빠짐없이 실었다. 이 추가본에는 새로운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고 그간 신문 등으로 추적하지 못했던 해방 이후 격동기 백범의 행적이 상세하게 담겨있다.‘ 백범일지’는 김구의 생애와 사상을 진솔한 육성으로 기록한 20세기 전기문학의 고전이다.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상황에 있던 그는 두 아들에게 유서를 쓰는 마음으로 백범일지를 썼다고 밝혔다. 황해도 벽촌의 궁핍한 집안에서 태어나 임시정부의 주석까지 오른 민족 지도자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감동적인 인간 드라마 다. 백범일지는 여러 단체?기관에서 추천 도서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책이다. 백범일지는 상권과 하권으로 나뉘어 있다. 상권은 1928년 2월과 3월 사이에 집필을 시작, 다음해 5월 3일에 마쳤다. 하권은 1942년에 탈고했다. 끝 부분에 있는 나의 소원 에는 백범의 독립을 위한 간절한 소망과 함께 백범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원문은 국한문 혼용체다.(3) ‘백범일지’ 해설1) 상권상권은 머리말에 해당하는 두 아들에게 주는 글과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신 소장본(영인본)의 [두 아들에게 주는 글]은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이 부분이 이 책에서 유일하게 백범의 친필이 아니며, 사용된 용지 또한 본문의 원고지와는 다른 갱지라는 점이다. 또 다른 특징은 집필 당시 백범의 나이인데, 등사본?필사본의 54세와는 달리 53세로 기록하고 있다. 백범은 1928년(53세) 3월경에 『백범일지』 상권의 집필을 시작하여, 이듬해(54세) 5월 3일 종료했는데, 아마도 이 책에서는 집필 종료 후(54세) 쓴 서문을 앞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집필 시작 시기의 나이(53세)로 수정한 것인 듯하다. 아무튼 이 책의 [두 아들에게 주는 글]은 백범의 친필이 아니며, 시기적으로도 다음에 살펴볼 '등사본'보다 이후의 것이다.상권을 집필한 동기와 당시의 실정은 머리말인 [두 아들에게 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는 백범이 어머니와 두 아들을 고국으로 보내고, 임시정부의 국무령으로 피선되어 유명무실한 임시정부를 위해 고군분투하던 어려운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범일지』를 집필한 것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어린 자식에게 남기는 일종의 유서와 같은 것이었다.상권의 본문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앞부분 일부(一. 祖先과 家庭, 二. 出生 及 幼年時代)는 본문 속에 일련번호로 목차를 정비하였으며, 붓으로 집필하였다. 반면 뒤의 대부분은 원고지 본란에 펜 또는 만년필로 기록하고 목차는 주로 원고지 상단의 여백에 일정한 표식(∞)과 더불어 병기하였다. 여기서 펜으로 기록한 뒷부분이 1928~1929년 처음 집필 당시의 원본 그대로이며, 붓으로 정서한 앞부분은 책으로 출간하기 이전 어느 시점에서 시범적으로 다시 정비한 부분이다.이상의 검토를 통해, 김신 소장본의 경우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이지만, 면밀하게 조사해 보면 머리말은 다른 사람이 필사한 것, 본문의 앞부분 일부는 백범이 다시 정비한 부분, 뒤의 대부분은 최초 집필 당시의 원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2) 하권하권 역시 머리말인 [서문]과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권의 [서문]도 본문 앞에 있지만, 본문 이후에 집필한 것이다. 그것은 필기도구가 본문의 후반부와 일치하며, 필사본에 서문이 책의 마지막에 첨부되어 있는 것 등으로도 방증할 수 있다.하권의 집필 종료 시기는, [서문]에 기록된 백범 나이 67세와 본문 내용의 끝부분이 대한민국 24년(1942) 2월인 점 등으로 살펴볼 때 1942년이다. 그런데 하권의 [서문]에는 1943년 11월의 '카이로회담'을 의미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시기가 어긋남을 알 수 있다. 이 점으로 보아 하권 역시 집필 종료 후 일정 시점이 지난 후 [서문]이 다시 수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상권과는 달리 하권 집필 당시는 임시정부의 사정이 많이 개선되고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였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중국의 국민당 정부가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등 정세가 많이 호전되었다. 또한 백범의 두 아들도 장성한 상태였다. 따라서 백범의 지위, 가정의 형편, 임시정부의 사정 등을 고려할 때, 하권의 집필 목적은 백범의 개인사보다는 임시정부의 활동을 선전하고 기금을 확보하기 위한 측면이 더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세가 반영되어, 상권이 주로 백범의 성장과정과 다양한 경력을 소개하고 있다면, 하권은 임시정부와 그 저변의 일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하권의 본문에는 첫 목차를 원고지 여백에 병기한 것 이외에 어떠한 목차도 설정되어 있지 않다. 즉 백범은 상권을 집필하고 난 뒤 적절한 목차를 원고지 여백에 병기하였으나, 하권의 경우 그러한 여유마저 없었던 듯하다. 하권 집필 종료 당시는 태평양전쟁의 발발 등으로 백범이 매우 바쁜 시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사정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검토에서 알 수 있듯 하권의 [서문]은 재집필한 것이며, 본문은 목차마저 설정되지 못한 일종의 수고였다.2. ‘백범일지’를 읽고나는 ‘백범일지’라는 책을 통해, 그저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던 일제치하 당시 우리나라에 대해서 다시 한번 가슴속 깊이 깨달을 수 있었다. 몸 바쳐 마음 바쳐 오직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싸우신 애국선열들의 뼈저린 서러움과 아픔... 그리고 그들의 마음속에 언제나 함께 자리잡고 있었을 그들의 애국심까지도...백범일지는, 김구 선생이 손수 쓴 유언적 자서전으로 그 시대의 배경이나 상황이 솔직하게 담겨져 있다. 김구 선생은,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부의 벽지인 백운방 텃골에서 가난한 농민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양반들의 멸시와 가난 속에서도 꿋꿋이 학문에 열중한 김구는 과거 응시 과정에서의 부정부패로 하여금 분노와 실망을 느낀다. 단지 신분의 높고 낮음 그 차이 하나만으로 부당한 차별 대우를 받아야만 했던 그는 그 것을 계기로 삼아 현실타파의 개혁 정신을 움트게 함으로서 혁명가 적인 사상을 갖게 된다.나는 후에 김구선생의 비참한 형극 생활을 보면서, 일본에게 빼앗겨야만 했던 암울한 우리 현실에 대한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어떻게 같은 사람들끼리 그토록 참혹한 짓을 할 수 있는지에 의문이 앞서기도 했다.그러나 더 믿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그 속에서도 자신의 사상을 져버리지 않았던 애국선열들의 의지였다. 그게 만약 나의 일이었다면 죽음을 앞에 둔 시점에서 진정한 용기를 발휘할 수 있었을까? 이렇듯 시작된 파란만장한 선생의 일생은, 오직 나라와 민족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으로 55 년 동안 이나 계속되었다고 한다.그의 나이 38세에 한일합방으로 일제치하에서 벗어나려는 의도로 옥중에서 이름의 구자를 아홉구로 바꾸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미천하고 무식한 사람들도 모두 자신과 같이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뜻에서 백정의 백과 범부의 범자를 따서 호를 백범(白帆)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