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J E&M의 국내 문화 산업 주도 현황 연구과 원인 고찰-CJ E&M이 국내 문화 산업에 미치고 있는 영향과 원인을 분석하고 개선할 점과 발전 방향을 제시한다.? 목차Ⅰ. 서론Ⅱ. 본론1. CJ E&M 설립 배경2. CJ E&M의 성장과 현황3. CJ E&M의 문화 산업 약진 원인4. 문제점과 개선 방안5. 앞으로의 발전 방향 제시Ⅲ. 결론*참고자료Ⅰ. 서론“인류의 미래는 여가를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저명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한 말이다. 이 말 속에는 문화의 중요성이 내포되어 있다. 여가야말로 인간이 문화적인 삶을 즐기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문화는 우리의 삶의 방식이고 가치관이며 역사적으로 그 사회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오늘날에는 산업과도 결합되면서 부가가치의 새로운 원천이 되고 있다. 문화기술(CT, Culture Technology)은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첨단기술로 각광받고 있고 문화콘텐츠산업은 미래 산업으로 부상하고 있다. 바야흐로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최근 , , , , 등의 프로그램이 한창 인기몰이중이다. 약간씩 시기적 차이가 있을지라도 이들 모두 특정한 세대 혹은 전 세대에게 두루 사랑받았다. 놀라운 사실은 이 프로그램들이 모두 CJ E&M에서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CJ E&M은 불과 몇 년 전까지는 뚜렷하게 눈에 띄는 성과를 보이지 못했지만, 최근 들어 거의 모든 한국의 문화 콘텐츠들을 주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문화 영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문화가 주요한 미래 산업인 21세기에, CJ E&M의 이러한 행보는 충분히 주목받고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다. 이에 이 논문에서는 CJ E&M이 문화계에 끼치는 영향을 각 분야에 걸쳐 구체적으로 연구하고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원인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또한 개선할 점을 지적하고 유망한 미래 산업으로서의 발전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Ⅱ. 본론1. CJ E&M 설립 배경CJ E&M(Entertainment & Media)은 201를 신선하게 담아낸 , 등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또한 Mnet은 음악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제작하고 매년 ‘Mnet Asian music award(MAMA)’를 개최하며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게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이러한 성과로 CJ E&M은 현재 tvN, Mnet, OCN 등의 인기 채널 인프라에서 선보이는 신선하고 다양한 방송 콘텐츠를 통해 국내 시청 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방송 콘텐츠들이 위성방송, IPTV, 인터넷, 모바일을 통해서도 전달되어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②영화부문CJ E&M 영화 부문은 1995년 2월 제일제당 멀티미디어사업부로 출발하였다. 그 해 9월 제작투자 및 배급회사 CJ엔터테인먼트로 본격적인 영화사업을 시작하였으며 현재까지 기획, 제작, 배급까지 영화 산업의 모든 단계를 총괄하고 있다. , , , , 등 500만 관객을 돌파한 국내 인기작들을 제작·배급하였다. 그 외에도 60여 편의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제작·배급하여 국내 영화 시장에서 1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파라마운트, 드림웍스가 만드는 작품들을 단독 배급하고, 할리우드 유명 스튜디오들과의 공동 제작을 통해 국내를 넘어 전 세계 영화 산업의 허브로 자리 잡고 있다.③음악부문CJ E&M 음악 부문은 2003년 CJ미디어라인이 설립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뮤직 포털 사이트 엠넷닷컴을 런칭하였으며 2011년 영화사업부문으로부터 뮤지컬 사업이 이관되면서 사업 범위가 더 확장되었다. CJ E&M 현재 음악 부문은 국내 최대 규모의 투자, 제작, 유통을 통해 음악 사업 분야 국내 1위에 올라 있다. 또한 K-POP을 필두로 하는 활발한 해외 진출로 문화 한류를 이끌고 있다. 엠넷닷컴 운영을 비롯하여 연간 400여 타이틀, 2000여 곡을 제작, 유통하고 있으며 아티스트들과 함께 하는 브랜드 콘서트, 안산밸리록페스티벌, 글로벌 콘서트 브랜드 M-Live 등을 통해 공연 문화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고 이션 서비스 플랫폼 ‘interest.me'를 런칭하였다. 인맥 중심의 SNS를 콘텐츠 중심의 네트워크로 진화시킨 인터레스트미(interest.me)는 모바일과 웹사이트에서 누구나 쉽게 즐기고, 서로 공유하는 콘텐츠 큐레이션 서비스이다. 또한 엠넷닷컴은 음악, 비디오, 뉴스 등 해외에서도 열광하는 K-POP의 다채로운 콘텐츠를 전 세계에 독점 제공함으로써 한류 문화의 중심에 서 있다.CJ E&M은 이렇듯 각 분야에서 눈에 띄는 성과들을 보였으며 현재 글로벌 대중문화의 NO.1 콘텐츠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방송, 영화, 음악, 공연, 게임 등 다양한 미디어 콘텐츠와 플랫폼 서비스의 결합, 그리고 최초, 최고, 차별화를 추구하는 “ONLY ONE" 정신으로 아시아 POP문화의 세계화를 리드하게 된 것이다.3. CJ E&M의 문화 산업 약진 원인(1) 개별 사업 부문의 통합으로 인한 시너지 효과CJ E&M은 현재 방송사업부문, 영화사업부문, 음악사업부문, 공연사업부문, 게임사업부문 5개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5개 부문은 통합 이후, 기존과는 차원이 다른 글로벌 노력을 다각도로 전개하는데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예를 들어, 영화 사업 부문은 국내 투자, 배급 중심에서 제작 역량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사업 구조를 재편하여, 이를 바탕으로 글로벌 제작을 활성화해 규모의 확대와 수익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지역, 나이와 상관 없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 제작 사업에 진출하여 ‘쿵푸팬더’처럼 아시아 정서를 소재로 한 독창적 콘텐츠 제작으로 국내 애니메이션 수준 발전에 기여할 계획이다.또한, 방송 부문의 경우 동남아시아 7개국에 진출한 tvN 아시아를 11개국으로 확대하여 글로벌 발판을 넓힐 계획이다. 동남아시아의 한류 음악시장을 기반으로 Mnet 아시아 등을 추가 론칭해 해외 방송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하고, 대중 문화 소비 잠재력이 큰 중국에서 중국판 롤러코스터를 제작하는 등 국내에서의 높은 기획력을 바탕으로 합작 서든지 TV 뿐만 아니라 스마트폰 등의 개인 단말기로 자신의 성향에 맞는 전문화된 프로그램을 검색해 볼 수 있어 컨텐츠 수요와 가치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CJ E&M은 미디어 패러다임 변화로 전문화·단품화되는 컨텐츠 수요 증가에 대응해 합병한 여러 채널들 중 중복되는 내용의 방송 채널들을 시청자의 특성에 따라 전문화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예를 들어 중복된 영화채널을 OCN은 일반, CH CGV는 블록버스터, SuperAction은 액션, XTM은 남성위주의 하드액션, OCN Series는 드라마 전문채널로 재배치하는 방식이다. CJ E&M은 방송채널을 전문화함에 따라 멀티스크린 방송서비스 Tving과 같은 새로운 플랫폼에서 유통할 수 있는 컨텐츠를 풍부하게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②게임사업 부문⑴ 대형 엔터테인먼트와 파트너십 체결CJ는 현재 온라인 게임포털 '넷마블(www.netmarble.net)'의 서비스 운영을 주요 사업으로 삼고 있으며, 국내게임 포털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 퍼블리싱 게임 부문은 '마구마구', '대항해시대', 'SD건담캡슐파이터' 등 기존 대표 게임의 지속적인 업데이트와 '엠스타', '스페셜포스2' 등 신규 게임을 통해 성장하고 있다. 또한 전국 각지의 PC방에 자사 게임의 종량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러한 유통 역량을 기반으로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디아블로3', '월드오브워크래프트' 등의 PC방 유통을 대행하고 있다.웹보드 게임 부문은 안정적인 성장을 위해 게임 내 다양한 아이템 제공 및 네이트 등의 제휴사이트를 통해 넷마블의 게임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고객 기반 및 Service platform 확대를 도모해왔다. 또한 '모두의 마블' 등 신규 라인업을 통해 매출 기반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며, 자회사 미디어 웹의 PC방 관리 프로그램(PICA)을 통해 국내 최고의 PC방 게임 마케팅 역량을 확보하고 있다.③영화산업 부문⑴ 웰메이드 전략영화산업의 중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시장, 경쟁 환경의의 사업 포트폴리오에서 자체제작을 추가, 강화하고 자체 보유 음악 콘텐츠 확대를 중심으로 강화하고 있다.E&M 전 부문에 음악 콘텐츠 공급을 점차적으로 확대하고 강화하여 자체 콘텐츠의 가치를 증대시키고 이에 파생된 다양한 권리를 활용하여 매출 및 이익의 실현을 통해 앞으로도 국내 음악 콘텐츠 선도 기업으로서 음악 산업의 성장과 발전을 주도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⑤ 공연사업 부문⑴ Live Entertainment 사업으로의 확대서울 및 수도권에 편중된 공연시장 및 스타캐스팅에 의존한 제작비 상승 등은 뮤지컬, 연극산업의 지속적인 성장을 저해하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런 걸림돌에도 불구하고 CJ E&M 공연사업은 기존 뮤지컬과 콘서트에 한정되어 있던 사업의 범위를 확대하여 전시, 퍼포먼스, 문화 이벤트 등 다양한 Live Entertainment사업으로의 확대를 추진 중에 있다. 국내의 경우에는 2006년 초연 이래 시즌 6를 맞이한 “김종욱 찾기”를 비롯하여 11년 “지킬 앤 하이드”, “그리스”, “메노포즈” 등 재연 뮤지컬과 "막돼먹은 영애씨", "스트릿라이프", “키사라기 미키짱”등 신작도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최근 뮤지컬/연극시장에서는 대형 라이선스 작품의 흥행, 창작뮤지컬 선전, 뮤지컬 전용극장 설립 활성화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는 시장 팽창을 견인하여 전년대비 큰 폭의 성장을 보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에 맞춰 "풍월주", "파리의 연인" 등과 같은 자체창작물 제작 및 "댄스 레슨" , "아가씨와 건달들" 등과 같은 우수 라이선스 수입을 확대하고 있다.4. 문제점과 개선 방향(1) 기업 윤리의 실종①독과점의 폐해CJ E&M은 여러 사업 부문을 독점 혹은 과점하며 국내 1위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경쟁할 만한 상대가 많지 않다보니 그만큼 독과점의 폐해가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그 한 예로 얼마 전 영화사 ‘청어람’이 CGV, 롯데시네마와 영화 ‘26년’ 디지털 영사기 사용료 법정 다툼을 한 사건을 들 수 있다. 다툼의 발단은 201이다.
정전의 의미 고찰과 이를 통한 의 재평가역사적으로 정전에는 기본주의와 반(反)기본주의, 두 가지 접근 방법이 있다. 기본주의는 텍스트 속에 기초적인 근거나 기본 원칙이 있으며 정전이 이런 절대적인 가치를 내포한다고 보는 입장인 반면, 반(反)기본주의는 정전에는 특정 시대 속 특정 집단의 이해가 반영되어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물론 이 두 접근 방법 모두 각자 나름의 논리를 지니고 있어 타당해 보이지만, 필자는 정전의 조건으로서 기본주의의 입장에 동의하는 바이다.어떤 한 시대에 쓰인 텍스트는 거의 필연적으로 그 시대의 시대적 가치관이나 특정 집단의이해관계가 반영되어 있다. 작가 또한 그 시대에 사는 사람이고 어떠한 집단에 소속된 사람이므로 이에 따라 사고와 가치관이 형성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반기본주의적인 입장처럼 정전에 대해 상대적인 입장만을 취한다면 자칫하다가는 헌법에 명시된 인류의 보편적 가치마저 부정하게 되는 위험성이 있다. 정전은 일반적으로 학교 교과과정의 공인된 텍스트나 해석 또는 모방의 가치가 있다고 보편적으로 인정받은 텍스트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정전은 충분한 교육적 가치를 지녀야 하며 보편적 도덕률에 어긋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정전에 전 인류에서 통용될 수 있는 보편불변의 절대적인 어떤 가치가 내포되어야 한다. 즉, 텍스트 내에는 시대적 가치관이나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가 반영되어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 가치관이나 이해관계가 전 인류적 보편불변의 가치에 합당하다면 그 텍스트는 정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텍스트 내의 특정 시대나 특정 집단의 이해를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 절대적인 가치가 내포되어 있는지를 살피고 고찰하며 정전이 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정해야 한다.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는 정전으로서 타당하지 않다. 그 안에 남성 중심주의적 사고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 중심주의는 전근대 시대의 보편적 사고방식이다. 는 남성 중심주의가 우위에 있던 때에 남성 작가에 의해 쓰였으므로 그 안에 남성 중심적 사고가 반영되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문제는 ‘남성 중심주의’는 교육적 지침이 될 만한 절대적 가치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남성 중심주의’에서 인류에 유익이 되거나 귀감이 될 만한, 또는 높이 평가될 만한 가치를 찾기는 힘들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이 책의 교훈은 도덕적으로 그럴듯해 보이나 이 또한 남성 중심주의의 산물이기에 절대적 지위를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간 교과서에까지 실리며 널리 정전으로서 인정을 받아 온 에 대해 재평가 할 필요가 있다.얼핏 보면 가 남성 중심적 문학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남성 중심적 문학이라는 근거는 곳곳에서 발견된다.에는 이쁜이와 갑분이라는 두 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이쁜이는 양육적이고 모성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유순하고 자기희생적이고 숭고한 여성의 이미지를 완벽히 재현하고 있다. 결혼 플롯 속에서 이쁜이의 행운은 제한된 범위 안에서 선택을 수동적이고 억압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로 인한 고통을 참아낸 대가로서 일종의 보상의 형태로 주어진다. 이에 반해 갑분이는 이쁜이와는 반대되는 여성의 가치를 구현한다. 세속적 권력과 행복에 대한 평균적 인간의 욕망을 추구하는 다분히 인간적인 면을 보이며, 주체적으로 결혼을 거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갑분이는 그 욕망으로 인해 미언과의 결혼이라는 행운을 쟁취하지 못하며 이쁜이를 부러워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여성의 자기 억압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남성 주의적인 시각은 평균적 욕망을 가진 여성조차도 나쁜 여성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또한 미언이 결혼플롯에서의 모든 주도권을 쥐고 있고 이쁜이와 갑분이의 행복을 좌지우지 하는 인물이었던 점에서도 남성 주의적인 시각이 나타난다.작품의 주제이자 교훈이라고 할 수 있는 ‘진정성’ 또한 남성 주의적 사고의 산물일 뿐이다. 이쁜이는 보지도 않은 미언을 위해선 갑분에게 진정성을 가지라고 설득하고 있지만 자신에게 한결같은 삼돌의 진정성은 거부하는 자기모순을 보여준다. 이 지점은 작품과 작가의 현실인식의 틈을 보여주며 또한 ‘진정’이라는 가치의 세계란 지배계층의 이익만을 위해 강요된 논리이며 진리가 없이 누구에 의해 짜여 지는가에 의해 그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방의 묘사에서도 성(性)에 대한 남성주의적 시각이 드러난다. 신방에서 미언은 힘과 권위에 있어 이쁜이를 완전히 압도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녀의 성의 역할에 있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관계, 즉 남성성/여성성, 능동성/수동성, 공격/수세 등의 이항 구조를 극대화한 형태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욕으로 힐링(healing)이 가능하다고요?욕의 긍정적 측면이라는 화제로 어떤 글을 써야 할지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문득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배운 양주 별산대 놀이가 생각났다. 양주 별산대 놀이는 양주시에 전승되어 오는 가면극으로 말뚝이와 쇠뚝이라는 두 하인을 내세워 양반을 풍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극 속에서 말뚝이와 쇠뚝이는 ‘지랄’, ‘후래아들’과 같은 욕을 써가며 양반을 조롱한다. 옛 서민들은 이렇듯 욕과 조롱을 통해 양반을 희화화하고 풍자하는 데서 쾌감을 느꼈다. 욕을 하며 서민들은 억눌렸던 감정을 분출할 수 있었으며 정신적 정화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양주 별산대 놀이를 통해 욕이 사람의 정신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욕의 정신적 기능에 대해 더 알아보았다.먼저 욕의 정신적 기능에는 정화적 기능이 있다. 사람은 불쾌한 자극을 받은 것을 외부로 표현을 하지 않고 참을 때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화병에 걸린다. 이 때 대면하여 표현하는 욕은 상대방을 자극해 더 큰 갈등을 일으켜 결국 자신에게 정서적으로 안 좋은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간접적으로 우회 표현을 통해 감정을 정화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양주 별산대 놀이도 이에 해당한다. 양반에게 직접적으로 욕하지 않고 가면극을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마음에 쌓여둔 불쾌한 감정을 풀기 때문이다. 즉, 욕은 답답한 마음을 풀어 주는 정화적 기능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둘째로, 욕의 정신적 기능에는 친밀성의 기능이 있다. 아주 친한 고향 친구들이나 학교 동창들 사이에선 평범한 안부 인사보다는 과하지 않은 욕이 때론 더 효과적으로 친근감과 반가움을 표시하는 수단이 된다. 욕은 자신의 감정에 대한 직접적이고도 과장된 표현의 일종이기 때문에 욕으로 친근함을 표현하면 상대방이 느끼는 친근함은 더 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욕을 해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아서 다툼으로 번질 위험도 거의 없을 만큼 친하고 격식 없는 사이 임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일상생활에서도 친구끼리 친근감 표현을 위해 욕이 쓰이는 경우가 많으며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남자들 간의 우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려는 목적으로 욕이 쓰이는 경우를 빈번하게 볼 수 있다.마지막으로, 욕의 정신적 기능에는 자기 성숙의 기능이 있다. 무조건적이고 근거 없는 욕이 아니라 타당한 이유와 근거가 있는 욕은 듣는 사람을 각성시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만든다. 이 경우 듣는 사람은 순간적으로 기분이 나빠질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 욕을 계기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고 차차 그것을 고쳐나가려 노력하게 될 것이므로 더 나은 쪽으로의 자기 발전을 하게 되며 정신적으로는 더 성숙해질 것이다. 결국 궁극적으로 볼 땐, 욕이 자기 발전과 자기 성숙의 동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경과의 치료 방법인 충격 요법에서 이 기능의 타당성을 발견할 수 있다. 충격요법은 환자의 생명에 위험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급격히 최대한의 자극을 주어서 치료하는 방법이다. 즉 이를 자기 성숙의 기능에 적용하면, ‘욕’이라는 충격으로 상대방에게 자극을 주어 ‘자기 발전과 자기 성숙’이라는 치료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심한 욕은 상대방과의 갈등을 증폭시킬 수 있으므로 상대방에게 동기부여를 줄 수 있는 정도 수준의 욕만을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술과 관련지어 본 패왕별희 비평패왕별희는 중국을 배경으로 경극 배우인 주인공들의 일생을 192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린 영화이다. 1924년 군벌시대, 1937년 중일전쟁, 1945년 장개석의 국민당의 성립시기, 1949년 중국 공산당 해방시기, 1966년 문화대혁명 시기 등의 중국 근현대의 중요 역사적 사실들이 등장하나, 이러한 역사적 사실 하나하나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 사실들이 주인공인 데이와 샬로의 삶에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내용을 전개한다.도즈(데이)는 창녀인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경극을 배우는 곳에 맡겨지고 고된 훈련 속에서도 자신을 챙겨주는 시토(샬로)에게 의지하며 위안을 얻는다. 그는 패왕별희의 ‘우희’역할을 맡지만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며 계속해서 가사를 틀린다. 중요한 순간에 도즈가 가사를 틀리자 시토가 뜨거운 담뱃대를 도즈 입 속에 밀어 넣고 이러한 행위로 ‘사회적 거세’를 당한 도즈는 가사를 틀리지 않게 된다. 그 이후 데이는 경극에 빠져 자신과 우희를 동일시하며 살아가고 ‘패왕’역할의 샬로에게 자신과 항상 함께 할 것을 요구한다. 정치적·사회적 상황의 변화에도 별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신념을 지키며 오직 경극에만 자신의 인생을 바친다. 데이의 인생을 예술 그 자체였으며 예술의 생활화를 넘어 예술이 내면화되게 된다. 쥬산이 샬로와 결혼하고 샬로와 데이를 떼어놓으려 하는 과정에서 데이는 경극에서 벗어난 현실 세계를 경험하며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 대한 결핍과 정체성의 혼란 등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한다.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아편에 손을 대는 등 현실 도피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 우희가 죽은 방식과 똑같이 검으로 자살한다. 이러한 것들로 볼 때 데이는 예술을 자신의 삶과 동일시하였음을 알 수 있고 주워온 아이인 ‘서’에게 하는 말들에서 볼 때 예술에 대한 신념이 그 무엇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데이는 예술에 매개된 반영을 통해 자기정체성을 인식하였으므로 예술은 그에게 진리 또는 인식을 위한 수단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예술은 그에게 현실적 삶의 고통을 잊을 수 있게 해주었으므로 그에게 예술은 쾌락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예술만큼 세상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또한 예술만큼 확실하게 세상과 이어주는 것도 없다’라는 괴테의 말이 마치 데이를 말하는 듯하다반면 샬로는 경극과 현실을 확실히 구분 지으며 현실에서 자신의 지위를 누릴 줄도 안다. 데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창녀인 쥬산과 결혼하며 변화하는 시대에 따라 예술에 대한 신념을 굽히기도 하고 문화대혁명 때에는 데이와 쥬산을 고발하는 비겁한 모습까지 보여주기도 한다. 이렇듯 그에게 경극, 즉 예술은 생계 수단이자 쾌락의 수단이 되기도 하며 예술을 사랑하긴 하지만 시대 상황과 자신의 안위에 따라 쉽게 져버리기도 한다. 그에게 예술은 생활화 되어 있지만 내면화 되어있지는 않은 것이다.
조광조의 삶을 통해 본 시대상과 그에 대한 재평가? 목차Ⅰ. 서론 : 당대의 시대상과 맞물려 있는 조광조의 사상적 배경Ⅱ. 본론 : 조광조, 그는 누구인가?(1) 조광조의 생애(2) 정치 개혁(3) 그에 대한 주된 비판과 이에 대한 변론Ⅲ. 결론 : 조광조에 대한 재평가의 필요성과 그의 진정한 가치Ⅳ. 참고 자료 및 문헌Ⅰ. 서론 : 당대의 시대상과 맞물려 있는 조광조의 사상적 배경조광조는 중종 10년 8월 34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며, 38세인 중종 14년 11월 기묘사화로 사약을 받고 죽었다. 단지 4년 동안의 짧은 정치적 활동을 하였지만, 그는 조선 왕조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성종 13년(1482)에 태어나, 17세가 되던 연산군 4년(1498)에는 무오사화를 목격하였다. 그리고 23세이던 연산군 10년(1504)에는 갑자사화가 일어났고, 25세 때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정국이 바뀌는 소용돌이를 겪게 되었다. 조부 때부터 조선 왕조의 고위관직을 지내온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한창 과거 준비에 열중하고 미래의 삶을 계획해야 할 나이에 거듭되는 사회와 연산군의 학정 그이고 전제적 왕권을 휘두르던 연산군이 쫓겨나는 쿠데타를 경험하였던 것이다. 그의 스승 김굉필은 갑자사화 때 사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조광조 자신은 중종 10년부터 관직에 나아가 개혁을 시도하다가 중종 14년 기묘사화 때 희생되었다. 이처럼 조광조의 짧은 생애는 사화가 거듭되는 조선 왕조의 정치적 격량과 그대로 맞물려 있었던 것이다.그가 젊었을 때 과거에 큰 뜻을 두지 않다가 나이 34세가 되어서야 문과에 급제한 것도 이러한 혼란스러웠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광조는 관직에 나아간 직후부터 거듭된 사건들로 인해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유교 국가로서 당연히 지녀야 할 도덕적 가치가 바로 서야만 한다고 확신하였다. 즉 왕을 비롯하여 나라의 지배층이 마땅히 유교의 가르침을 배워야 하며, 배운 대로 실천해야만 이 난국을 을 가르치기에 이르렀다.조광조는 1510년(중종 5) 29세 때 과거 소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물론 급제는 시를 짓는 시험에 의한 것이었으나, 그가 과거 소과에 급제했다고 해서 공부하는 방향을 성리학에서 문장으로 바꾼 것은 아니었다. 그는 30세인 1511(중종 6)에 성균관의 관원과 학생들의 여론에 따라 성균관의 천거를 받았다. 그런데 이처럼 천거는 되었으나 바로 관직에 나가지는 못했다. 조광조는 아직 나이가 적고 학문에 큰 뜻을 두었으니 관직 임명을 미루자는 견해가 있었기 때문이다.그후 조광조의 천거를 다시 거론한 것은 4년 뒤인 1515년(중종 10) 6월이었다. 조광조가 김식, 박훈 등과 함께 다시 성균관에서 천거되면서 조정에 논의가 있었다. 이때는 조정에서 조광조를 보잘 것 없는 자리에 두지 말고 6품의 관직을 주자는 논의가 있었고, 결국 종6품 조지서의 사지로 임명했다. 하지만 과거에 급제하지 않은 사람은 정치의 중심에 뛰어들 수가 없었던 당시의 정치적 관행 때문에 조광조는 수령으로 진출하는 정도에 만족해야 했다. 그래서 조광조는 정치의 중심에 뛰어들기 위해 과거에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를 위한 문장 공부를 하지 않아 제술에 약했던 그는 당시 의 제술보다 경학을 중시했던 분위기 덕분에 알성시에서 좋은 답을 써서 2등으로 합격할 수 있었다.② 관직 경력과거에 급제한 조광조는 성균관의 전직에 임명되었고, 이어 사헌부 감찰을 거쳐 1515(중종 10) 11월에는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이후 4년 동안 정치 활동을 하는데, 그동안 조광조가 거친 관직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1516년(중종 11) 호조좌랑, 예조좌랑, 공조좌랑, 홍문관 수찬1517(중종 12) 홍문관 교리, 홍문관 응교, 승문원 교리, 홍문관 전적1518(중종 13) 홍문관 부제학, 동부승지, 동지성균관사, 사헌부 대사헌1519(중종 14) 홍문관 부제학, 사헌부 대사헌조광조의 관직 경력은 매우 간결하다. 활동 기간이 겨우 4년밖에 안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4년은 개인후 사림은 조광조 등의 사형을 면하게 하는 한편, 일의 적법성 여부를 따져 주모자들을 처벌하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그 과정에서 홍경주·이장곤·남곤·김전 등이 주모자로 드러났으므로, 정광필 등 사림은 오히려 주모자들을 처벌하여 사태를 역전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중종이 마음을 굳혀 남곤은 이판, 이장곤은 병판, 심정은 의금부사에 임명함으로써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또한 홍경주 등은 정국공신의 삭적을 부정하고 오히려 현량과 설치를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조광조 등의 잘못을 부각시켰고, 며칠 뒤인 12월 14일에는 조광조를 사형에 처하라는 상소까지 올라와 조정 분위기는 완전히 반전되었다. 결국 16일에 조광조의 사형이 결정되었으며, 처형 죄목은 붕당을 이루었다는 것이었다.조광조의 처벌은 사림 세력과 거취를 같이한 것인 만큼 조광조의 복권 또한 사림 세력의 주도권 확보와 같이 갈 수밖에 없었다. 중종 때도 이미 조광조의 복권 문제가 간간이 논의되었고, 1538년(중종 33)에는 현량과 급제자들을 다시 등용하는 조치를 취했다. 인종 대도 적극적으로 논의되었으나 성과는 없었으며, 선조가 즉위하고 사림이 정치적인 주도권을 잡으면서 이 문제가 재론되었다. 그뒤 선조 즉위년인 1567년 이황·기대승 등 사림의 핵심 인물들이 조광조의 복권을 주장한 결과, 이듬해 4월 조광조는 영의정에 추증되면서 복직되었다. 또한 이때 문묘의 배향까지 거론했지만 순탄하게 진행되지는 못했고, 1609년(광해군 2)에 이르러서야 문묘에 배향되었다.(1) 정치개혁① 소격서 폐지소격서는 나라의 천재지변이 있을 때 일월성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곳인데, 조선왕조에는 이 소격서 말고도 각종의 유교적인 제례가 있었으며, 전통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이끌어 왔던 불교적 제의의 전통이 조선 초기에도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산천과 성황에 관련된 토속적 샤머니즘적인 제의도 여전히 그 영향이 컸다.조광조가 관직에 진출한 중종 10년 이후 이 소격서 논쟁이 격화되었던 중종 13년 8, 9월에 이르기한 토지제도의 개혁안 등이 제시되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향약의 시행이었다. 향약의 시행은 1517년 6월 유생 김인범의 상소로부터 논의가 이루어졌다. 조광조는 “백성을 교화시키고 풍속을 이루는 데는 향약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라고 하며 향약 시행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사림파의 꾸준한 주장과 논의 끝에 사림파는 향약을 경중에도 시행함으로써 전국적인 범위로 그 체제를 확산시키려 하였다. 향약의 경중 시행은 사림파의 세력성장과 함께 국왕의 윤허를 받아냄으로써 공식화되었다.③ 현량과 실시중종에게 여러 문제를 제기하고 그 성과를 이룩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명분을 확보한 사림파는 사림 세력을 확대하고 공신 세력을 축소하는 길에 나선다. 현량과는 이 목적을 위해 만든 제도의 하나로서, 정식 명칭은 ‘천거 별시’였다. 이는 ‘천거제’라는 인사 방식과 과거제의 한 유형인 ‘별시’라는 형식이 결합된 것이었다. 전근대 시대의 인사 방식은 능력에 의해 선발하는 과거제와 인품에 따라 추천하는 천거제가 가장 중심이 되었다. 『주례』에 나오는 ‘향거이선’이라는 명분에 뿌리를 둔 천거는 오랜 역사를 지닌 것으로 과거제가 정비되면서 위축된 감이 있었으나, 제도적인 틀을 갖추면서 여전히 유지되었다.조선 초기에도 천거는 고위 관원들의 추천에 따른 임명이라는 형태로 유지되었으나, 지방 공론에 의한 선발이라는 본래의 뜻과는 거리가 있었다. 천거제를 활성화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 이들은 사림이었다. 지방에 근거를 가진 사림은 지방의 공론에 의한 인사인 천거제를 이상으로 여겼고, 특히 여러 차례 사화를 겪으면서 능력보다는 인품과 덕망에 의한 인사의 중요성이 절실해져 여기에 주목했다. 천거제를 활성화하려는 사림의 노력은 성종 때부터 구체화되었다. 천거제의 대상은 지방의 선비들이었으나 성종 때 이후 성균관 유생들의 주류가 지방 선비들로 채워지면서 성균관 유생도 그 대상으로 추가되었다. 천거는 이와 같이 사림의 노력으로 중종 때에 오면 일반화되면서 관행으로 정착되었다.조광조는 관직에 등용되면서 천거조는 반정공신으로 책봉된 이들 중에 반정 대상이었던 연산군의 총신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거론하면서 이들 가운데 공도 없이 공신에 들어간 이가 많으니 이를 바로잡자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는 2등 공신으로 유순 등 7일, 3등 공신으로 송이리 등 9인을 거론했으며, 4등 공신으로 50여 인을 지목했다. 이에 대해 중종은 “작은 공이라도 이미 공을 정하고 뒤에 개정하는 것은 매우 옳지 않다.”고 반대했다. 이후 사림은 양사와 홍문관을 중심으로 이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논의를 이끌어갔으나 중종이 계속 이를 허락하지 않자, 마침내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원들은 사직을 청하는 강공책을 썼다.일이 이와 같이 진행되자 정광필 등 의정부 당상들은 대간들이 논의한지 이미 오래되었고 마침내 사직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들의 의견을 수용할 것을 요청했고, 중재 방안으로 4등 공신에 한해서 여론이 문제 삼는 이들은 삭직하자고 제안했다. 같은 날 육조의 당상관들도 공신을 개정할 것을 요청했으나, 당시 육조의 당상에는 신상·김정·방유령·최명창·윤은필·정충량 등 사림들이 포진해 있었으므로 의정부의 중재안과는 달리 원안대로 개정하자고 요청했다.의정부와 육조에서까지 동의하자 중종은 70여 인을 모두 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언급하면서 그 가운데 문제가 되는 이들만 처리하자는 쪽으로 후퇴했다. 그리고 다음날 구체적으로 4등 공신 가운데 일부를 처리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정광필 등 의정부 당상들은 4등 공신만을 제거하는 것은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대신들이 계속 반대하자 중종은 이를 받아들여 공신 선정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의정부에서 올렸던 인원 76명 모두를 삭적했다.(3) 그에 대한 주된 비판과 이에 대한 변론① 융통성 부족으로 인한 임금과의 관계 악화조광조는 유교사상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임금인 중종에게까지도 철저한 유교적 규범에 맞춰 생활하도록 강요함으로써 중종으로 하여금 조광조의 경직된 도덕에 염증을 느끼게 하였고, 이로 인해 중종과 조광조 사이의 협력 관계에 금이 가게 되었고 결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