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민족주의의 등장-19세기 국민국가 형성과 민족주의(동양의 대표 중국은 어떻게 국민국가를 형성하였는가)(목차)Ⅰ.머리말Ⅱ.정치적 민족주의란Ⅲ.19세기 유럽의 국민국가의 형성과 제국주의적 팽창(대표 사례: 영국)Ⅳ.19세기 중국의 국민국가 형성과 민족주의Ⅴ.맺음말[참고문헌]Ⅰ.머리말국민국가의 개념은 시민 혁명이 완성되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도입된 이후에 성립된 것으로 알고 있다. 즉, 국가가 각 개인의 생명권, 재산권을 보호하고 사회의 우선순위를 결정할 권한을 확보함으로써 국민국가가 생겨난 것이다. 서구의 근대적 국가들의 형성과정은 바로 이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데 봉건적 생산관계를 뒷받침하던 국가의 통제는 자본가들이 자유롭게 성장하는 것을 방해했고, 이윤추구 행위를 적대시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실질적으로 봉건제 국가에서의 왕권을 유지하기 위한 경제적 기초는 자본가에게서 나왔다. 이러한 모순은 근대 위대한 시민혁명을 불러왔고, 새로운 생산관계를 법적으로 보장한 채 ‘국민국가’가 등장했다.처음 국민국가가 지구상에 출현할 때 이 국가들에게 요구되었던 것은 시장의 자율적 이익추구를 방임하는 것이었다. 시장에서 이뤄지는 모든 행동을 통제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개개의 자산가들은 국가가 자신의 경제적 이익 추구 행위를 방임하기를 바랐고, 그것이 이전 국가와는 다른 새로운 국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성립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세계적으로 존재하는 시장을 필요로 하였는데 소위 ‘자본의 시대’가 불러온 유럽의 커다란 호황은 지속적인 자본의 투자처를 확보하기 위한 싸움으로 이어졌다. 홉스봄, 자본의 시대한길사 출판,(1998) 23p본 발표문에서 필자는 위와 같은 서구 근대 국가들이 언제 처음 동양의 국가를 세계 근대 물결 속에 편입시켰는지, 또, 동양의 국민국가는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서구 국민국가 형성과 비교하고 더 나아가 각 나라의 정치적 민족주의와 관련시켜 알아보고자 한다.Ⅱ.ⅰ.정치적 민족주의란민족이 본질적으로 정치적 실체라는.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에 급진적 민주주의의 이러한 원리는 프랑스 인민은 더 이상 단지 군주의‘신민’이 아니라 불가 양도한 절대적 권리와 자유를 소유한‘시민’이라는 주장 속에 반영되어 있다. 때문에 주권은‘프랑스 국민’과 함께 하게 되었다. 프랑스혁명으로부터 출현하게 된 민족주의 형태는 그러므로 인민 또는 민족을 다스리는 국민의 비전을 구체화했다. 그리고 자유, 평등, 박애의의 원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위의 책, pp31-34독일의 역사가‘마이케네’의 견해를 따르면‘정치적’민족은 종족적 정체성보다 시민의식이 더 큰 정치적 중요성을 갖는 민족이다. 비일상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 정치적 민족은 수많은 종족적 집단을 포함하고, 그리하여 문화적 이질성에 의해 특정지어진다. 영국, 미국, 프랑스는 가끔 정치적 민족의 고전적 사례로 보인다. 영국은 실제로 4개의 문화민족 잉글리시, 스코티시, 웰즈, 그리고 북아일리시 (후자는 비록 두 개의 민족, 신교 통일주의자와 구교 공화주의자를 포함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민족을 말한다.)으로 된 연합 국가인데 분명히 영국적 민족의 정체성에 관한 정치적 요소는 국왕에 대한 공통된 충성, 웨스트민스터 의회에 대한 존경, 영국인민의 역사적 권리와 자유에 대한 믿음과 같은 것에 기초하고 있다.‘이민자의 땅’으로서 미국은 분명히 공유된 문화와 역사적 연대의 기초 위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세우는 것이 불가능한 다종족적이고 다문화적인 성격을 띤다. 대신 미국인이 민족으로 되는 것은 의도적으로 교육을 통해, 그리고 독립선언서나 미국헌법에 명료하게 그 윤곽이 나타나 있는 일련의 공통된 가치에 대한 존경의 교화를 통해 발전했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민족적 정체성은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전통과 원리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Ⅲ.ⅰ19세기 유럽의 국민국가의 형성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유럽의 많은 지역은 원시 산업화를 겪으며 농촌의 원시노동이 임금노동으로 변하는‘프롤레타리아화’되었다. 그 후 19세기와 20세기에는 이런 자본이 폭발적으로 집중됨에 된다. 농업을 주축으로 한 생산 중심 지역은 강압 집약적이었고 거래와 시장 지향적인 생산이 지배적인 지역은 자본 집약적이었다. 찰스틸리 지음, 이향순 번역국민국가의 형성과 계보,학문과 사상사 출판, (1994), pp56-57일 천 년 동안 유럽의 도시와 국가의 관계는 서로에게 꼭 필요하기도 하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대이기도 한 애증관계상에 있어 왔는데 도시의 자본가들은 국가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주면서 국가의 보호를 받았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국가의 참견을 두려워했고 국가 역시 도시 자본가들의 반항을 두려워했다. 따라서 어느 한쪽이 지나치게 자신의 이익을 주장하면 그들 간의 협정은 파기되었던 것이다. 또한 전쟁 자금을 둘러싼 협상이 새로 나타난 대의제 형태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자본가와 부르주아 기관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는 국가들은 비용이 많이 드는 전쟁을 위해 자본을 동원할 때 유리하게 작용했다. 이렇게 자본을 동원하기 위한 수탈과 지배의 기회로 직업적 행정 공무원이 형성되었고 직접통치로 변화하게 되었으며 대중의 자문 기회도 열리게 되었다. 이로써 대중들은 일정한 일체감을 지니게 되었고 중앙 집권적이고 분화된 자율적인 구조를 가진 국민국가가 탄생하게 되었다.19세기 유럽의 거의 모든 지역은 명확하게 경계 지워진 국경선과 상호 관계를 지닌 국민 국가를 형성하게 되었고 유럽 체계는 사실상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밖의 국가들은 서로 협력해서 신생 국가들의 조직과 영토에 점점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세 가지 변동은 밀접하게 연관되는데 그 이유는 유럽의 지도적인 국가들은 비유럽국가들을 식민지화하고 정복하고 또 침투함으로써 유럽 체계를 적극적으로 전파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국제 연맹을 만들었다가 그 다음에 국제 연합을 창출한 것은 단지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을 단일 국가 체계로 조직화하는 것을 비준하고 합리화했을 따름이었다.일반적으로 국가 형성은 비교적 ‘내부적인’ 과정으로부터 극히 ‘외부적인’ 과정으로 옮겨갔다. 전쟁은 국가 형성에 도 아닌 ‘국민국가의 건설’이라는 것으로 수렴되었던 것이다. 위의 책, pp60-62Ⅲ.ⅱ.영국의 국민국가 형성영국은 유럽에서 전쟁을 계속 수행하였으며 프랑스와의 전쟁(1793-1815)을 통해 전쟁 동원에 필요한 과세와 국가 부채를 크게 늘렸으며 경제에 대한 국가 간섭을 거대하게 확장시키게 되었다. 즉 전쟁 동원과 관련해서 권력이 왕과 각료로부터 국회로 이전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19세기 초엽에 연합 왕국인 영국은 지주, 재정업자, 상인들이 지배하는 바로 입헌 군주제의 모형이 되었는데 제국주의적 팽창은 19세기의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를 겪으면서도 계속되었다. 영국 안에서는 단호하게 국가가 지방 업무에 직접 개입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는데 이러한 결과로 인해 왕과 국회가 결단을 내려야 하는 일에서와 법의 시행에 있어서 지방의 권력 기관들에게 언제나 의존하게 되었다. 위의 책, 102p영국 국가의 역사는 베니스와 러시아의 역사, 곧 강압 집약적인 국가와 자본 집약적인 국가의 역사를 단순히 절충한 것은 아니다. 잉글랜드 국가, 그 다음에 영국 국가는 매우 일찍부터 어떤 세습 군주에게나 막대한 전쟁 수행 수단을 이용할 수 있게 해주었던 자본과 강압의 결합지역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세습군주는 오로지 그 국가의 상인들과 은행가들에게 많은 양보의 대가를 치를 때만 전쟁 수행의 수단을 얻을 수 있었다. 지주들과 상인들 간의 거북스런 결탁 관계는 왕실의 제한했지만, 국가 권력은 한층 강화시켰다. 상업화한 농업, 원거리 무역, 제국주의적 정복, 경쟁 상대인 유럽 강대국들과의 전쟁은 해군력에 투자를 증진시키고 또 해외 원정을 위한 육군을 동원하기 쉽게 해 줌으로써 서로 보완해 주었다. 도시 경제와 농촌 경제 양자 모두의 상업화는 많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비교해 볼 때 과세와 전쟁을 위한 차용을 한층 쉽게 해 주었으며 또한 보다 적은 국가 기구로 나아갈 수 있었음을 의미했다. 자본화된 강압 국가들은 막강한 군대의 창설을 촉진시켰고 대규모의 장비를 잘 갖춘 육군과 해군이 그런 군서 구미 주요국가에서 확립되었다. 자본주의는 신속히 발전하여 대대적으로 식민지 확장으로 나아가 정치부패, 경제 낙후의 중국은 곧 바로 서구 열강의 침략, 확장의 주요 목표가 되었다. 특히 영국은 일찍이 산업혁명 이전에 세계 범위의 식민약탈과 식민 확장을 개시하였는데 식민지 쟁탈을 위해 네덜란드, 프랑스와 장기 전쟁을 벌였고, 1763년 해상의 패권의 지위를 취득했다. 18세기 중엽 서구에서 중국으로의 수출상품의 총액은 영국이 각국의 중국에 대한 무역 가운데 우위를 점하고 있었는데 영국의 자산계급은 이에 대해 만족하지 않고 1793년 ‘무역조건개선’ 요구를 하는 등 중국시장의 지배를 꾀하였다. 노태구민족주의와 국제정치백산서당 출판,(2002) pp316-318그러나 중국의 황제 건륭제가 이 요구를 거절하자 영국은 더 많은 이윤을 탈취하기 위해 인도로부터 중국에 아편밀수를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아편전쟁’을 초래했다.아편 전쟁 아래 중국의 역사발전은 뚜렷하게 나타났는데, 이는 1840년 영국이 발동한 아편전쟁의 결과이자 청정부가 무력 강박 하에 체결한 불평등 조약인 ‘남경조약’이 근대 중국을 하나의 독립적 봉건사회로부터 반식민지반봉건사회로 몰락되기 시작하는 것을 나타냈다.이후 1856년에서 1860년에 이르러 영국과 프랑스가 발동한 제 2차 아편전쟁은 서방자본주의가 청정부의 내정과 외교를 통제하기 시작하여 중외 반동세력이 정식으로 결탁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로부터 중국의 정치와 경제, 사회생활의 각 영역은 반식민지, 반봉건적 변화를 가속화했다. 19세기 70년대 이후 세계자본주의는 점차 제국주의로 넘어가 열강은 전 지구에서 식민지 쟁탈의 고조를 일으켜 호시탐탐 중국변경지구를 향해 대거 진출하여 중국근대사상 제 1차 변경위기가 되었다. 1884년 중불 전쟁은 중국의 민족위기를 심화시켰으며, 1894년 중일 갑오전쟁은 일본의 압력으로 청정부로 하여금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도록 하여 중국의 반식민지반봉건화는 대대적으로 심화되어 영토를 분할하는 위기에 직면했다. 시.
목차1. 서론2.내용 요약4장)Ⅰ청일러 세 제국의 패권경쟁Ⅱ반제 민족운동과 국제연대Ⅲ이중의 억압, 소수민족의 운명5장)Ⅰ사회주의 수용의 지역연쇄Ⅱ새로운 국민국가를 향한 모색Ⅲ도시화와 대중사회3.서평서론) 한국, 일본, 중국 역사는 서로 유기적인 관련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동아시아 역사를 하나의 지역사로 파악하여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이 저서를 통해 동아시아 지역의 민족들은 각 시기 동아시아를 둘러싼 국제적·국내적 조건 속에서 민족적 자립, 주체성 확립 등을 위해 어떻게 싸워왔는지, 그리고 서로 어떠한 공생 관계를 맺어왔는지 알아보려 한다. 요즘은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태평양 국가들까지도 연합하는 체제를 볼 수 있다. 이러한 체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발전하기 위한 조건도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민중연대와, 서로간의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여 서로 이해하고 공생할 수 있는 ‘협력’이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은 동아시아 태평양 국가들뿐만 아니라 세계국가들 모두에게 필요한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하는데 동아시아 역사를 통해 세계적 차원의 연대에 대해서 알아볼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4장)Ⅰ청일러 세 제국의 패권경쟁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적인 독립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강력한 중앙집권정부의 주도하에서 부국강병, 식산흥업, 문명개화라는 3대 슬로건을 빠르게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서구에 대한 열등감과 근린 아시아에 대한 우월감이 표리일체의 관계를 이루었던 것은 일본 근대화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특히 이웃 조선에 대한 일본의 우월감은 삼한정벌 신화와 조선 정벌을 근거로, 봉건체제가 흔들리던 18세기 후반부터 더욱 심해졌고, 19세기에 들어와 대외적 위기가 심화되면서 조선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로까지 발전하였다.갑신정변 이후 1885년에는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는 톈진조약을 체결하여 양국은 자국의 군대를 조선에서 철수하고 후에 파병할 때는 서로에게 사전에 통보한다는 합의를 보았는데 이는 곧 일본이 조선에 대해 적극적으로 외세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오랜 경제적 곤궁에 빠져있던 농민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마침내 동학농민전쟁으로 발전하였다. 1894년 6월 동학농민전쟁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 정부는 청국에 원군 파견을 요청하였는데 청국의 군사적 개입은 일본 정부에 전쟁을 일으킬 빌미를 제공하였다. 1894년~1895년까지 청일전쟁은 계속되었고,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은 1895년 4월 청과 시모노세키조약을 맺고 조선의 독립을 승인, 중국의 개항과 치외법권 등의 승인을 받아냈다. 청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은 민족의 우월성을 적극적으로 주창하였고, 1904년~1905년에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대립하였다. 일본은 뤼순군항을 기습 공격하면서 러일전쟁에 본격 돌입하였는데 110만의 병력을 동원하고 2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면서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어냈다. 그런데 이렇게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명예로운 승리를 얻은 일본은‘문명국’의 일원이 되었다는 자부심과 함께 아시아에 대한 멸시관이 한층 증폭되었다. 이후 일본은 한국을 침략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을 추진하게 되는데 먼저 제1차 한일협약을 강요하여 한국의 외교권과 재정권을 박탈하고 경찰고문, 궁내부고문 등을 모두 일본인으로 갈아치워 한국을 실질적인 속국으로 만들었다. 이후 미국, 영국 등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한국의 지배권을 인정받은 일본은 조선을 완전히 식민지화시켰고 가혹한 무단통치로 조선인을 중층적인 차별구조 속에 편입시켰다.4장)Ⅱ반제 민족운동과 국제연대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아시아 각지의 혁명가, 민족운동가, 유학생들은 일종의 환상과 기대를 품고 일본으로 몰려왔다. 당시 이들 대부분은 제국주의의 침략주의적인 본질을 내포한 일본의 아시아주의에 대한 실태를 간파하지 못하고 일시적으로 아시아 연대라는 환상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상 일본은‘서구열강의 아시아침략에 저항하기 위해서 아시아 국가들이 단결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아시아연대론을 미화하고 일본의 팽창주의에 앞장서 민주공화제를 표방한 근대국민국가의 수립이라는 목표가 한층 명확해지면서는 최초로 좌우익의 통일전선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에서는 3.1운동과 비슷한 성격의 5.4운동이 발생하였는데 이는 학생, 상인, 노동자들이 연합하여 데모, 파업, 불매운동 등을 무기로 정치를 움직인 대규모의 민중운동이었다. 운동이 전개되면서 국권을 옹호하고 민치를 촉진하기 위한 평민단체 조직인‘전국각계연합회’가 탄생하였으며 사회주의사상이 보급되면서 노동자들이 다음 시대의 민족 통일전선에서 선두에 서는 세력으로 등장하게 만들었다.3.1운동 후 독립운동은 다양한 형태와 양상으로 전개되었는데 국내에서는 물산 장려운동 같은 자산가 운동을 비롯하여 여성운동, 학생운동, 노동운동 단체들이 자유주의를 비롯하여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사상을 수용하며 활발하게 결성되었다.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의 공통된 목표는 일본제국주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었지만, 각각의 정치이념에 따라 새로운 민족국가 건설을 보는 시각에는 차이가 있었다.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 농민이 주도하는 프롤레타리아 정권의 수립을 지향했으며 민족개량주의자들은 일본제국주의와 타협하여 자치권, 참정권을 획득할 것을 목표로 삼는 식이었다. 이런 와중에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해져 국내외에 8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는데 초기 임시정부는 주로 국제사회에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외교활동에 주력하여 1919년 파리강화회의 등에 기대를 걸었지만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하였다. 이후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 또한 조직의 분열로 결렬되었지만, 회의에 참여한 대다수의 대표들이 외교제일주의의 한계를 인식하고 무장독립노선을 내세우고 해방운동과 연대할 것을 결의한 것은 하나의 성과였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민족해방을 위한 국제연대는 1919년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을 내세우면서 성립한 코민테른의 주도하에서 전개되었고, 프롤레타리아계급을 중심으로 한 사회 건설과 식민지 민족의 해방을 약속하면서 사회주의 사상과 이념이 급속하게 전파되기 식민지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오키나와는 1879년 유구의 합병으로 일본에 강제로 병합되기 전까지 역사적으로 일본과는 별도의 독립왕국이었는데 메이지유신 정부의 강제 합병으로 일본영토로 편입되었고, 훗카이도는 경제의 근대화와 국방 강화를 위한 개혁 프로그램에서 근세까지 미개, 야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던‘에조’라는 지명을 1869년 훗카이도로 개칭하고 개척사를 설치하여 사실상 일본의 영유권 안에 속하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소수민족이라는 명칭이 다수민족이었던 한족의 대응어로 사용되었는데 하나의 국가 안에 여러 소수민족에 대한 지배와 억압으로 생기는 문제는 중국의 팽창, 곧 중화제국의 역사 내내 지속되어왔다.근대국민국가 형성과정에서 국민통합을 위한 소수민족의 동화는 일반적으로 포섭과 배제를 동시에 수반하는 것이었다. 중국의 경우,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은 오늘날의 한족이 형성되기 전부터 존재하였는데 이들은 정치적으로 대등한 교섭을 일체 인정하지 않았으며 중국의 하위에 두는 형태를 취해왔다. 한족은 중국의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서히 형성되었는데 한족이라는 것은 중국의 영토가 고대로부터 고정불변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나 문화적으로 오늘날 한족의 문화라고 하는 것도 역사적으로 소수민족의 다양한 문화가 혼합하고 융합한 결과 탄생한 것이다. 따라서 소수민족의 문제를 생각할 때는 규모가 크고 풍요로운 국민국가만이 근대의 유일한 담당자라는 인식을 버리고 다양성을 수용하기 위한 다양한 역사적 보고의 수용이 수반되어야 한다.5장)Ⅰ사회주의 수용의 지역연쇄1910년대에 동아시아에서 사회주의가 확산될 때 아나키즘은 그 밑거름으로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아나키즘도 권력과 자본에 의해 자행되는 억압과 착취를 일소하고 무정부 공산사회를 세우겠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나키즘 안에는 다양한 유파가 있는데 자유로운 개인 혹은 그런 개인들로 구성된 소규모 단체의 자율적 활동에 의거하여 제각각 활동하는 차이를 보였다. 아나키스트들은 맑스-레닌주의자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에 반대하여 격렬한 논서 아나키즘과 사회주의를 먼저 받아들였는데 그 이유는 동아시아에서 자본주의 발달이 가장 빨랐던 제국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서구의 거의 모든 철학 사상과 문학 서적이 번역 출판되었는데 중국과 한국의 초기 맑스주의 저작의 대다수는 일본어판을 번역 출판한 것으로 특히 5.4운동을 전후로 해서 맑스주의를 중국에 전파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볼 때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사회주의가 수용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었다.소련은 제국주의 열강을 타도하여 세계의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는 것을 계획하였는데 그 수단으로 코민테른을 지원하여 각국의 공산당 결성을 도왔다. 한인들은 조국독립의 한 방편으로 소련의 지원을 받으면서 그 이념인 사회주의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는데 그 결과 한인사회당을 비롯하여 고려공산당 등 각지에서 소규모 단체가 설립되었다. 조선 국내에서는 소련과 일본에 유학하고 돌아온 지식인들에 의해 사회주의자의 소조직이 만들어졌고 3.1운동 직후 각지에서는 사회주의 성향의 청년단체가 다수 결성되기도 하였다. 요컨대 제국주의의 침략과 반제 민족해방운동이야말로 사회주의 실행의 정치경제적 조건이 결여된 식민지 박식민지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등장하고 세력을 넓히게 만드는 원천을 제공하였다.5장)Ⅱ새로운 국민국가를 향한 모색사회주의의 수용과 전파는 각국의 지식인들의 사회운동과 건국구상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노동자와 농민이 구체적으로 자신의 이해와 요구를 바탕으로 국가의 주권자로서 국정에 참여하는 방향을 제시한 것이 주목된다. 일본의 경우에는 학생들이 보통선거운동에 참여하고 브나로드의 기치 아래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계몽활동을 정력적으로 전개하였다. 중국에서는 1919년 5.4운동 과정에서 평민교육강연단을 만들어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브나로드운동을 시작하였고, 한국에서 브나로드 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농촌계몽운동의 형태로 전개되었다.사회주의의 폭넓은 유포는 새로운 국민국가 건설의 구상을 촉진하였는데 새로이다.
목차1. 서론2.내용 요약1)제국의 남쪽 문을 열다2)세계 최고의 갑부3)서양에서 불어오는 바람4)양귀비꽃에 감춰진 슬픈 노래3.서평중국 광동성 중산대학교 유학 시절 상업이 특히 발달한 광주 경제에 대한 관심이 생겼었다. 피부 색깔이 다른 서양인들과, 동남아인들이 광주 짝퉁시장에서 중국인과 흥정을 벌이는 모습은 꽤 인상적이었고, 서양인들이 언제 처음 광주에 등장하게 되었는지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이에 제국의 상점을 통해 중국과 서양의 교류 역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언제 어떻게 해서 막을 내렸는지 알아보고자 한다.1장) 제국의 남쪽 문을 열다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 유럽에서는 국가의 보호 아래 무역을 추진함으로써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는 사상의 바람이 불었고, 바다를 통해 동서양을 잇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였다. 이로 인해 유럽은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되었고, 17세기에는 더 많은 새로운 영토와 상업의 이익을 먼저 차지하기 위한 시도로 넓은 땅과 엄청난 인구를 지닌 '중국' 이라는 대륙을 발견하게 된다.17세기 후반에는 중국의 황제 강희제가 오랫동안 침체에 빠져 있던 연해 지역의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명나라 이래 실시해왔던 해금정책을 폐지하고 월해관, 민해관, 절해관, 강해관 등 4개의 세관을 설치하여 외부와의 통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개방 초기 청나라 정부는 오랫동안 봉쇄 정책을 유지한 터라 전문적으로 대외무역을 담당할 기구가 없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재력이 탄탄한 상인을 지정하여 외국 상인들과 거래할 수 있는 독점권을 주고, 동시에 세관을 대신하여 세금을 징수하게 하였다. 이렇게 초기에 광주에서 대외무역을 담당하던 중국 상인들의 상점을 양행이라 하고, 광주에는 13곳이 있어 13행이라고 하였다. 광주 황포항은 천혜의 인문, 지리 덕에 서양 상인들이 가장 활발히 통상하는 곳으로 자리 잡았고, 이로 인해 월해관은 중·서 해상 교통의 중요한 교차로이자 나라의 재화와 부가 모이는 곳이 되었다. 이후 광주 13행은 강희제의 손자 건륭제의 일구통상 정책을 통해 외국 상인들을 관리하고 대외무역을 독점하는 특권을 갖게 된다.18세기에는 영국이 중국과 무역하면서 서양의 다른 나라들보다 절대적인 우세를 차지하였고, 동인도 회사를 통해 동방 무역을 독점하였다.2장) 세계 최고의 갑부청나라 때 중국에는 세 그룹의 주요 상인이 등장하는데 이는 바로 표호를 경영한 진상, 소금 사업으로 큰돈을 축적한 휘상, 대외무역을 독점한 광주 해상이다. 사실, 휘상이 광주 행상보다 자산 규모는 컸지만, 행상의 자산은 반씨와 오씨 집안에 집중되었다. 반씨 집안은 행상 역사의 산 증인으로 13행 역사상 유일하게 백여 년을 유지하였고, 외국 상인들에게 반계관이라 불리며 무한한 신뢰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이 반씨 집안의 첫 행상인 반진승은 최고의 재력과 수안을 겸비하여 시장을 좌지우지하였고 영국과의 거래에 가장 먼저 환어음을 사용하면서 대외무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반진승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반진승의 셋째 아들 반유도가 그의 사업을 물려받았는데 시대의 맥락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외국인과의 관계 유지를 잘하여 반씨 가문의 사업을 안정적으로 유지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성실함과 신의를 추구하여 가장 좋은 품질의 상품만을 제공하려고 노력하였고, 거래 상대를 선택할 때는 아주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때문에 100여 년 동안 많은 양행들이 파산하였지만 반씨 가문은 흔들리지 않고 최고의 양행이라는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반씨의 동문행이 19세기 전후 광주의 상업계를 독주했다면, 그 이후에는 오씨의 이화행 시대였다. 이화행의 창업자 오국영은 처음에 동문행의 장방으로 일하다 자산을 관리하는 반씨 가문의 동업자가 되어 풍부한 경험과 재력을 쌓고 영국 동인도회사의 도움을 받아 이화행을 열게 된다. 이후 오씨 집안은 투자에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여 사업을 키워나갔고, 오국영의 아들 오병감이 가업을 계승한 뒤 최초로 서양 기업에 자본을 투자하여 오씨 가문은 당시 세계 최고 부자라는 명성을 얻는다.한 편, 미국은 영국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독립한 이듬해“중국황우호”라는 선박을 이끌고 중국과의 무역을 시작하였다. 첫 항해의 성공은 미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이후 미국인들은“이익을 위해서는 어떠한 위험을 마다하지 않는”개척정신으로 1792년 통상을 시작한지 10년이 되지 않아 중국의 두 번째 무역 대상국이 된다. 이렇게 1세기 반에 걸친 광주 13행의 역사는 대외무역의 번성과 함께 많은 상인들을 탄생시키고 동서 문화 교류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3장)서양에서 불어오는 바람13행은 중·서 문화가 교차하던 곳으로 해양 문화가 가진 특유의 개방성, 포용력, 중상주의, 창조성이 곁들여져 무역의 번성과 함께 다양한 예술 교류도 활성화되었다. 특히 강희제가 재위 기간에 있는 동안에는 서학에 대한 관심이 깊어져 프랑스 문물을 많이 들여왔고, 프랑스 상선“암피트리테호”는 일종의 문화 상선 역할을 하였다.미술-13행의 전성기에는 중서 문화 교류가 궁정뿐만 아니라 영남 지역에서도 광범위하게 진행되어 지역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18세기 광주 거리에는 서양화를 그리는 중국인들까지 등장하였는데 이들은 서양 기법과 재료를 이용하여 수출용 그림을 그려 외국인들에게 팔았다. 가장 유명한 화가로는 관작림과 남고가 있었다.의술- 서양인들이 중국에서 벌인 여러 사업들 가운데 중국에서 가장 큰 환영을 받았던 것은 바로 의학이다. 명나라 말기에서 청나라 초기 선교사를 통해 들어온 서양 의학은 황제의 신뢰를 얻었지만 옹정 이후 청나라 정부에서 선교 활동을 금지하자 서양 의학은 상인들을 통해 광주에 들어왔다. 이 기간 13행 상인들의 노력을 통해 종두법이 도입되었고 사람들의 생활에 큰 도움을 주었다. 13행은 서양식 병원도 설립하였는데 처음에는 외국인들만 치료하다가 차츰 중국인에게까지 의료 범위를 넓혀갔다.언어- 광주에서는 상업과 무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언어 문제가 크게 대두되었는데 15~16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바다를 지배하던 시대에는 그들의 언어가 대외무역의 공용어였고, 17세기 네덜란드가 새로운 패자로 등장하자 이번에는 네덜란드어를 할 줄 아는 중국인들이 각광을 받았다. 이후 18세기 영국이 동방 무역을 장악하자 광주 상인들은 영어 단어와 중국어 문법이 혼합된‘광동식 영어’를 만들어 대외무역의 통용어로 사용하였다.4장)양귀비꽃에 감춰진 슬픈 노래건륭 말기 광주의 행상들은 자금의 유동성 결핍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부패한 관리들의 갈취와 중서 무역의 막대한 관세까지 책임지느라 자금력이 약한 행상들은 도산하였다. 또한 한 행상이 파산하면 나머지 행상들이 공동으로 연대보증을 서서 빚을 나누어 갚는 방식이 자리를 잡아 결국 많은 상인들이 서로 연계되어 연쇄적으로 부도를 맞게 되었다. 한 편 서양 국가들은 동쪽의 중국으로 온 초기 자신들이 가져온 상품들이 환영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중국에 대한 수입 역조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결국 영국 상인들은 이 상황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특별한 상품“아편”을 들여오고 중국의 아편 중독자 수를 크게 증가시켰다. 청나라 정부는 이에 대한 심각성을 깨닫고 아편 금지령을 내렸는데 관리들의 부패와 직무 소홀로 많은 법령은 사문이 되었고, 영국 상인들과 중국인의 아편 밀거래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흠차대신 임칙서는 무역 정지와 상관 봉쇄를 명하고 밀거래된 아편을 모두 불살랐고, 이후 19세기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영국은 이를 앙갚음하기 위해 1840년 6월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REPORT개요1.서론1.1 연구 동기1.2 연구 목적2. 본론2.1 ODA의 정의2.2 유·무상 원조 논쟁1) 유상원조 지지의 논리2) 무상원조 지지의 논리3) 유·무자 원조 논쟁 평가2.3 다자간, 양자간 원조의 문제점과 사례1) 양자간 원조 사례2) 다자간 원조 사례2.4 개발 NGO 소개1) OXFAM2) CARE3) 지구촌 나눔 운동3. 결론3.1 해결방안 제시3.2 한국의 ODA와 우리들의 생각3.3 후기1. 서론1.1 연구 동기저희 조원들은 모두 이전부터 공적개발원조(ODA)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먼저, 채길환 학우의 경우 2012년 3월부터 9월까지 아이티에서 평화유지군(PKO)로 활동한 경험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ODA와 NGO의 관계 및 문제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임윤지 학우는 2012년 2월 부산대학교에서 개최한 모의 UN회의에 참가하였는데 이 활동에서 다룬 의제가 ODA였고 이는 임윤지 학우가 ODA에 대해 더 공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이다경 학우와 류보람 학우는 고등학교 때부터 NGO에 관심이 있어 이를 진로로 결정하고 공부해왔습니다. 그리고 대학 진학 이후 ‘NGO와 현대사회’ 수업을 통해 다수의 NGO활동이 ODA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에 관해 더 알아보고자 이번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이번 활동을 통해 같이 수업을 듣는 다른 학우들에게 ODA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이와 관련된 고민을 함께 나누고자합니다.1.2 연구목적국제 사회는 수십 년 동안 ODA를 통해 개발도상국 경제발전과 사회 인프라 구축 및 교육과 보건과 같은 국제적 문제 해결을 위해 힘써 왔습니다. 매년 수십 개의 공여국으로부터 천문학적인 양의 자금이 ODA란 이름으로 수원국에게 지원되고 있지만 정작 수원국의 경제적 상황은 개선되지 않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개도국에 대한 선진국의 ODA는 자국의 경제 활성화를 위한 도구 또는 자국의 정치적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으며 수원국의 근본적인 문제다.이것은 상당수 개도국들의 경제상황과 외채 문제 악화로 빈곤이 심화되면서 UN과 국제기구들이 빈곤퇴치를 구제원조 목적의 최우선 순위에 두게 된 상황을 반영합니다. UN은 전 세계적인 빈곤 확대와 환경 악화 등의 심각성에 대응해 2000년에 새천년개발목표(MDGs)를 제정하고 2015년까지 극단적인 빈곤과 기아를 절반으로 줄인다는 등의 8가지 목표 실현을 위해 국제사회가 적극 동참해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이를 위해 선진국들의 원조 확대와 동시에 특히 저개발국가에 대한 외채 탕감과 무상원조 확대 등이 촉구되었습니다. 부시 대통령의 무상원조 확대 방침은 이러한 국제사회의 분위기를 배경으로 나온 것이었습니다.유?무상 원조 효과 논쟁은 학술적 이론을 도출하기 위한 논쟁이라기보다 ODA의 바람직한 운영을 이끌어내기 위한 정책적 목표를 지향하는 논쟁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 논쟁에 대한 고찰로 우리의 ODA 정책에 대한 시사점을 찾고자 하는 시도는 주제와 논리의 자연스러운 연결이라 생각됩니다.유상원조와 무상원조를 둘러싼 논쟁은 어느 쪽이 개도국의 발전에 보다 효과적인가 하는 경제적 관점과 어느 쪽이 보다 효율적으로 재원을 관리하고 운용할 수 있는가 하는 실무적인 관점에서 전개되고 있습니다.1) 유상 원조 지지의 논리무상원조 지지자들은 구호 활동만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바로 그들이 걸려 있는 덫이라고 유상 원조 지지자들은 주장합니다. 시장이 빈곤국에서 올바르게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은 그러게 할 수 있을 만한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중국이나 인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두 나라 정부는 1990년대에 들어서야 마침내 민간 산업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제거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정부의 허가 부분이 장애물이었습니다. 과거 이 두 나라에서는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 정부 허가 없이는 어떤 산업도 시작할 수 없었고 어떤 산업에도 투자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정부는 산업을 통제하려는 의도로 웬만하면 허가를 거의 내주지 않았지만 이와 같은 장애물들을 제거하자갈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일견 논리적인 듯한 이 주장이 왜 비합리적인지를 논박합니다. 그는 이미 지금까지 많은 유상원조가 회수되지 못하였으며 이자를 포함해 더 많은 대출이 동일한 수원국(recipient)에 주어지거나 탕감돼 왔다고 말합니다.유상원조의 비효율성과 낭비에 대해 그는 “100달러를 대여해주고 25달러를 되돌려 받는 것과 75달러를 그냥 주는 것이 어떻게 다른가?”라는 질문으로 논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제 자본시장의 발달로 원조 기금을 효율적으로 투자할 경우 수원국으로부터 회수를 하지 않아도 무상원조를 충당할 여력이 충분히 유지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스탠포드 대학의 벌로우와 하버드 대학의 로고프도 무상원조 전환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유상원조가 최빈 개도국보다 중소득 국가에 집중되며 그 대부분이 사실상 위장된 보조금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들은 멜쩌의 지적과 마찬가지로 유상원조의 장점이라고 주장되는 대출금 회수에 의한 자본 확충도 실제로는 회수 비율이 낮아 사실로 입증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유상원조는 대출과 상환에 따른 불필요한 구속과 행정 낭비를 초래하며, 대출이 불필요한 경우에도 이를 압박하는 이른바 ‘loan pushing’ 사례가 빈번하다고 지적합니다.그들은 결국 무상원조가 자금집행의 투명성과 개도국의 발전에 보다 효과적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무상원조 지지론의 기본적인 관점은 개도국들의 외채 위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유상원조는 빈곤한 국가들에게 순수하게 도움을 주지보다 상환 부담을 지워 외채 문제를 심화시킨다는 관점에서 무상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컬럼비아 대학의 제프리 삭스는 외채 문제가 악화된 배경을 지적하면서 선진국들이 당초부터 유상이 아닌 무상원조를 제공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상원조론자들은 특히 HIPCs (Heavily Indebted Poor Countries)의 경우 현실적으로 상환 능력이 없고 ODA가 이들 국가의 발전에 투입되기보다 외채 상환을 위한 방어적 대출defensive lend을 쓴다는 조건 하에 투자되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 Idris Deby의 정부는 2005년 오일 머니를 일반 예산과 무기 매입 쪽으로 쓰거나 오일 회사가 퇴출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Deby는 정권 유지와 부정 선거에 오일머니를 쓰고 있습니다.2. Lesotho Highlands water project기부자 : World Bank, European Investment Bank, African Development Bank비용 : 35억잘못 된 점:남아프리카에서의 판매와 전기를 위해 산에서 신선한 물을 우회시키는 프로젝트가 1986년에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전기 공급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너무 비쌌고 너무 많은 양의 우회로 인해 환경이 파괴되고 경제적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물을 판매하여 생기는 이 개발 펀드는 2003년 종료되었습니다. 법원은 세계에서 가장 큰 세 건설 회사에 부패혐의로 유죄 선고를 내렸고 그 프로젝트의 최고 경영자는 투옥되었습니다.3.아이티위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아이티 원조는 지나치게 홍보와 가시적 성과위주의 외형적 사업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성과 보다는 단기성 사업을 선호하며, 가난한 사람들의 생계와 인권을 향상시키는 사업보다는 건물과 인프라와 같은 치적 중심의 사업을 강조합니다. 국제기구(UN)뿐만 아니라 NGO조차도 가시성의 노예가 돼 작은 우물 하나를 파주고도 기부자의 이름을 커다랗게 붙여주는 창피한 수준의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2.4 개발NGO 소개, 활동1) Oxfam1.설립동기나치점령과 동맹국들의 봉쇄로 인해 기아로 고통 받는 그리스 민간인들을 구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습니다. 세계대전 후 몇 년 동안 피난민들에게 원조를 제공하면서 활동을 확대해왔고, 세계 각지에서 기아, 빈곤 그리고 자연재해 등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보장할 수 있는 기본적인 의식주를 제공할 뿐 아니라, 개발의 촉진, 난민보호, 의료, 농업의 보급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입니다.-식량안전보장식량 원조는 1945년 창립 이래 CARE의 목표 중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유럽과 아시아의 제 2차 세계대전 생존자들에게 보내진 첫 CARE Package는 거의 식량소포들이었습니다. 1966~67년에는 인도의 비하르를 시작으로 70~80년대에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긴급기근 구조로 전문적 지식을 개발했습니다.오늘날, 케어의 목적중 하나는 가난한 가족들에게 식량안전보장을 개선하는 것입니다. 케어는 자연재해 또는 시민 분쟁과 같은 위급사태에 대응하고 자족의 이행을 위해 기부된 식량을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케어는 길, 다리, 학교를 만드는 Food for Work 와 같은 프로그램들을 지원하기 위해 식량자원을 사용하고 어린아이, 임산부, 어머니들과 같은 가장 위험에 처한 이들을 대상으로 식량안전보장을 개선합니다.또한 케어는 자금 개발 프로그램을 개선하기 위해 ‘모니타이징(monetizing)’으로써 잘 알려진 기부된 식량들을 판매합니다. 케어는 긴급사태 대처, 가족건강 증진, 자족과 장기간의 식량 안전보장의 의미로써 식량자원을 사용하는 데에 전념하고 있습니다.-건강과 인구출산건강에 대한 것으로 가족계획 서비스를 제공하고 AIDS에 대한 인식과 방지를 촉구합니다. 아동건강에 대해서는 아이들의 병을 방지하기 위해 사전에 면역시키고, 영양을 개선합니다.-경제개발작은 경제활동 개발프로그램은 사람들로 하여금 중소기업을 창업하게 하고 확장하도록 돕습니다. 농업과 천연자원들은 농부가 식량안전보장을 이루고, 지속가능한 수확물 생산을 통해 그들의 수입을 늘리고 환경보호를 하게 장려하는 것입니다.3) 지구촌 나눔 운동1.활동 목표지구촌의 가난한 이웃을 돕고 시민사회의 발전을 도모함으로서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지구촌 건설에 기여합니다.2.지원 활동 내용-개도국 주민들의 능력 배양을 통한 개발지원빈곤문제의 보다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 개도국 주민들의 능력을 배양하고 주민참여를 통한 개발 사업을 지원합니다.-지구촌 시민사회 발전지원지구촌 시민사회의 발전을 지다.
기독교에서 목사가 되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한 사람이라도 더 하느님 품에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서 승려가 되는 이유는 내가 중생들을 위해 이로운 일을 하겠다는 생각보다 자신이 깨달음을 얻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둔다. 물론 스님이 되려는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대부분 속세와의 인연을 끊기 위한 이유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어렸을 적 ‘이모’라고 부르던 어머니의 가장 친한 친구 분께서도 갑자기 배우자 분과 사별을 하시고 절에 들어가 비구니 생활을 시작하셨다. 그 때 왜 그런 선택을 하셨을까 생각해보았는데 아마 그것이 이모에게는 현실 세계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대부분 절에 들어가 승려 생활을 하시는분들이 돈독한 불심이 생겨서 승려가 된다기보다 우리 사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절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