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thing the load made. 제목만 들었을 때 이 영화는 나에게 굉장히 생소한 영화였다. 미국의 역사적인 일을 드라마로 풀어내는 형식의 영화는 보통 그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지루할 수 있는 장르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이러한 장르의 영화를 잘 보지 않았다. 이전에 비행기 역사와 관련된 영화를 봤다가 졸았던 기억이 있어서 이 영화에 대해서도 기대를 별로 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수업시간의 과제로써 알게 되어 보게 되었지만 나름 몰입해서 본 영화중 하나로 기억될 것 같다.이 영화에 나오는 소재는 당시에는 치료가 불가능했던 신생아의 청색증을 심장 수술로 치료하는 한 의사와 그의 조수이자 연구의 파트너였던 한 흑인의 이야기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영화에서 나오는 의사는 Alfred Blalock와 그의 파트너 Vivien Thomas는 청색증의 수술법을 개에서 시도하여 결국 신생아에서도 수술하여 치료를 하게 된다. Vivien Thomas는 가난한 집안에서도 목수 일을 하며 돈을 모아 의과대학 진학을 꿈꾸는 청년이었다. 그러던 중 의사인 Alfred Blalock의 연구실에 잡일을 하는 일꾼으로 들어가되 되어 일을 하던 중 Vivien Thomas의 재능을 알아본 Alfred Blalock와 함께 개를 이용한 동물실험 등을 수행하는 연구원이 된다. 그러던 중 사람이 외상 후 shock가 오는 이유가 출혈로 인한 혈압 강하로 이를 수혈로 치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낸 공로로 Alfred Blalock는 존스 홉킨스로 부임하게 되는데 이때 Vivien Thomas도 함께 존스 홉킨스로 오게 된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은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심할 당시였기에 Vivien의 생활은 매우 열악하였다. 하지만 Vivien의 능력과 Alfred Blalock의 배려로 차츰 Vivien은 인정을 받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Alfred Blalock은 선척적 심장 기형으로 청색증이 생기는 신생아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당시엔 심장 수술이 기술적으로도 쉽지 않았으며 심장에 수술을 하는 것에 대해 금기시 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둘은 개에서의 수술 결과를 토대로 결국 심장의 혈관을 우회하는 수술을 통해 청색증을 치료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Alfred Blalock은 더욱 저명한 외과의사가 되었다. 하지만 흑인인 Vivien Thomas는 그만큼의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이에 회의감이 든 Vivien은 Alfred Blalock를 떠나 다른 일을 해보지만 결국에는 다시 돌아와 자신의 일을 하게 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존스 홉킨스의 여러 사람들이 Vivien의 능력을 인정하게 되고 결국 명예박사학위를 받고 존스 홉킨스에 Alfred Blalock 옆에 초상화가 걸리는 영예를 얻게 된다.이 영화에서 Vivien은 결과적으론 의학에 관련된 학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연구에 대한 열의와 뛰어난 능력으로 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를 하게 된다. 당시에 흑인들의 사회적 지위를 생각한다면 정말 엄청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안에서도 알 수 있듯이 Vivien은 여러 상황에서 흑인이라는 불평등을 겪게 된다. 놀라웠던 것은 백인과 유색인종이 쓰는 화장실도 따로 있으며 벨보이가 아니면 호텔 리셉션에도 들어갈 수 없으며 흑인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노동자로 취급받는 등의 불평등한 상황이 나온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Vivien은 자신의 열정과 실력으로 다른 의사들의 인정을 받기에 이른다. 이러한 영화를 보며 나는 자신의 꿈과 좋아하는 일을 찾아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험난하여도 자신의 신념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하고 인정받는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현재 선택에 기로에 서있는 나에게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
1. 독도는?독도는 2개의 큰 섬인 동도와 서도, 그리고 주변의 89개 부속도서로 구성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최동단 섬이다. 위치는 북위 37도, 동경 131도에 위치해 있으며 울릉도에서 약 87km, 울진에서 216km 떨어진 위치에 있다. 또한 독도는 역사성과 더불어 자연과학적 학술가치가 매우 큰 섬이므로 천연기념물 제336호로 지정된 우리나라의 영토이다.독도는 연평균 기온 12도, 연평균 강수량은 1240mm이고 겨울철 강수는 대부분 적설의 형태를 갖는다. 난류의 영향을 많이 받는 전형적인 해양성 기후이고 안개가 잦고 연중 흐린 날이 약 160일 이상이고 강우일수는 약 150여일정도 된다. 해저 2000m에서 솟은 용암이 굳어져 형성된 화산섬으로, 신생대 3기 플라이오세 전기부터 후기 사이, 약 460만 년 전부터 250만 년 전 사이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독도는 철새의 이동경로의 중간 피난처 및 휴식처로 우리나라 생물의 기원과 분포를 연구할 수 있어 섬 생물 지리학적으로 중요하다.최초 독도 주민은 1965년 3월 故 최종덕씨가 거주하셨고, 현재 김성도씨 부부가 독도에 주민등록을 두고 어업을 생계로 거주하고 있으며, 독도경비대원 30명과 등대관리원 3명, 울릉군청 독도관리사무소 직원 2명이 근무 하고 있다. 1999년 이후에는 ‘범국민 독도 호적 옮기기 운동’이 전개되어 2010년 6월 기준으로 2211명이 독도에 등록기준지를 두고 있는 상황이다.2. 독도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입장우리 정부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해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적으로 명백한 대한민국의 영토이며 독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독도는 외교 교섭이나 사법적 해결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독도에 대한 확고한 영토주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어떠한 도발에도 단호하고 엄중하게 대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독도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수호해 나가겠다는 입장입니다.3. 독도가 우리의 영토라는 지리적, 역사적 근거1) 울릉도의 일부로 인식독도에서 가장 가까운 우리나라 울릉도(독도로부터 87.4㎞)에서는 맑은 날이면 육안으로 독도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으로 인하여 독도는 역사적으로 울릉도의 일부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나라 고문헌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예컨대 조선 초기 관찬서인 『세종실록』「지리지」 (1454년)는 “우산(독도) ? 무릉(울릉도) … 두 섬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울릉도 주변에는 많은 부속도서가 있지만 날씨가 맑은 날에만 육안으로 보이는 섬은 독도가 유일합니다.2) 독도 통치에 관한 관찬문헌조선 초기 관찬서인 『세종실록』「지리지」(1454년)는 울릉도(무릉)와 독도(우산)가 강원도 울진현에 속한 두 섬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섬이 6세기 초엽(512년) 신라가 복속한 우산국의 영토라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독도에 대한 통치 역사는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독도에 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1531년), 『동국문헌비고』(1770년), 『만기요람』(1808년),『증보문헌비고』(1908년) 등 다른 관찬문헌에서도 일관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히『동국문헌비고』「여지고」(1770년) 등은 “울릉(울릉도)과 우산(독도)은 모두 우산국의 땅이며, 우산(독도)은 일본이 말하는 송도(松島)”라고 기술함으로써, 우산도가 독도이며 우리나라 영토임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4. 한일간 울릉도쟁계와 우리의 독도 영유권 확인1) 17세기 한일 양국 정부간 교섭과정17세기 일본 돗토리번(鳥取藩)의 오야(大谷) 및 무라카와(村川) 양가는 조선 영토인 울릉도에서 불법 어로행위를 하다가 1693년 울릉도에서 안용복을 비롯한 조선인들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양가는 일본 정부(에도 막부)에 조선인들의 울릉도 도해(渡海)를 금지해달라고 청원하였고, 막부가 쓰시마번(對馬藩)에 조선 정부와의 교섭을 지시함에 따라 양국간 교섭이 개시되는데, 이를 ‘울릉도쟁계’라 합니다. 에도 막부는 1695년 12월 25일 돗토리번에 대한 조회를 통해 “울릉도(죽도)와 독도(송도) 모두 돗토리번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돗토리번 답변서」), 1696년 1월 28일 일본인들의 울릉도 방면 도해를 금지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이로써 한·일 양국간 분쟁은 마무리되었고, 울릉도쟁계 과정에서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나라 영토임이 확인되었습니다.2) 1905년 시마네현 고시에 의한 독도 편입 시도 이전한 · 일간 ‘울릉도쟁계’를 통해 독도가 한국 영토임이 확인된 이래, 근대 메이지 정부에 이르기까지 일본 정부는 독도가 자국 영토가 아니라는 인식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1905년 시마네현 고시에 의한 일본의 독도 편입 시도 이전까지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기록한 일본 정부의 문헌이 없고, 오히려 일본 정부의 공식 문서들이 독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고 명백히 기록하고 있는 사실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1877년 메이지 시대 일본의 최고행정기관이었던 태정관(太政官)은 에도 막부와 조선 정부간 교섭(울릉도쟁계) 결과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소속이 아님이 확인되었다고 판단하고, “죽도(울릉도) 외 일도(一嶋: 독도)는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명심할 것을 내무성에 지시하였습니다. (『태정관지령』)내무성이 태정관에 질의할 때 첨부하였던 지도인「기죽도약도(磯竹島略圖, 기죽도는 울릉도의 옛 일본 명칭)」에 죽도(울릉도)와 함께 송도(독도)가 그려져 있는 점 등에서 위에서 언급된 ‘죽도 외 일도(一嶋)’의 일도(一嶋)가 독도임은 명백합니다.5. 20세기의 독도1) 1905년 시마네현 고시에 의한 일본의 불법 독도 편입 시도일본은 1905년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통해 우리나라 영토인 독도를 자국 영토로 편입하고자 시도하였습니다. 당시 일본은 만주와 한반도에 대한 이권을 두고 러시아와 전쟁 중이었습니다. 1904년 2월 일본은 대한제국에 ‘한?일 의정서’의 체결을 강요하여 러? 일 전쟁의 수행을 위해 자국이 필요로 하는 한국 영토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일본의 독도 편입 시도도 동해에서의 러?일간 해전을 앞둔 상황에서 독도의 군사적 가치를 고려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일본은 1904년 8월 ‘제1차 한?일 협약’ 을 통해 한국 정부에 일본인 등 외국인 고문을 임명하도록 강요하는 등 1910년 한국을 강제병합하기 이전에도 이미 단계적인 침탈을 진행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독도는 이러한 일본의 한국 주권 침탈과정의 첫 번째 희생물이었습니다. 1905년 일본의 독도 편입 시도는 오랜 기간에 걸쳐 확고히 확립된 우리 영토주권을 침해한 불법행위로서 국제법상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2) 2차대전 종전으로 독도영유권을 회복한 우리 정부
대한민국의 저성장에 관하여과 목학 과학 번이 름한국은 7,80년대 고속 성장을 통해 지금의 경제 성장을 이루어낸 나라이다. 1960년대에는 주로 가내수공업이 한국 경제의 대부분을 차지하였었다. 그러다 70년대가 되어서 본격적인 산업이 시작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 되면서 우리나라의 산업이 시작되었다. 우리경제는 2002년 7.2%의 성장률를 기록한 이후 2008년까지 2∼5%대의 저성장 기조를 이어오다 2010년에는 6.1% 성장했다. 그러나 2011년 들어 미국의 경제불안과 유럽의 재정위기로 세계경제가 악화되면서 기업들이 긴축에 나섬에 따라 고용과 투자확대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가계도 지출을 억제해 성장률이 크게 낮아졌다.세계적인 미래학자인 짐 데이터 교수는 우리나라에 대해 “한국은 미래의 기회와 위기를 함께 보여주는 곳이다. 현재 역사적으로 아주 대단하고 부유하게 성장할 수 있는 전환점에 서 있다” 고 평가한바 있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를 내린 이유로 “한국인들은 늘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위험과 도전을 즐기는 민족” 이라는 단서를 달았다.실제로 한국은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잘 해쳐나간 모범생 중 하나로 칭송 받고 있다. 이에 짐 데이터 교수는 한국을 잠재적인 미래의 리더로 평가하며 동시에 이러한 잠재력을 잃지 않도록 꾸준히 미래를 살펴야 한다고 충고한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 계속 관심을 가지고 이러한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반대로 한국사회가 지금보다 더 미래지향적인 시스템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한국은 사람들 머릿속에 한때 미래의 리더가 될 잠재력이 있었던 나라 정도로 밖에 기억될 수 없다.그는 이러한 세간의 우려가 현실이 될 수도 있다며 한국의 미래는 ‘한국판 잃어버린 10년’을 기본 가정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향후 10년을 잘못 보내면 한국도 일본처럼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장기적 침체의 늪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과거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었던 일본에 10년간의 장기불황이 찾아온 것은 성장의 한계에 봉착한 시스템적인 문제를 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기존 산업의 성장 한계, 종신고용 붕괴, 저출산, 고령화, 재정적자, 경제성장률 저하, 부동산 거품 붕괴, 정부의 뒤늦은 정책’의 8가지 원인이 거론되고 있다.‘잃어버린 10년’으로도 모자라 현재 일본에서는 ‘잃어버린 20년’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아직도 이들을 불황으로 내몰았던 시스템을 고치지 못했기 때문인데, 우리나라도 앞서 얘기한 8가지 문제가 이미 나타났거나 진행 중이다. 특히 향후 10년 내에 이러한 문제가 더욱 심화될 것으로 예상되며 특히 한국은 사회적 분열, 갈등과 남북한 통일이라는 2가지 문제를 추가로 감당해야 한다. 이러한 모든 문제가 현재와 미래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 봐야 하는 시점이 되었다.우리나라는 1970년 4.59명의 출산율을 기록한 이래 저출산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출생아 수가 1980년 2.63명으로 급격히 줄었고 1990년 1.60명, 2011년에는 1.24명을 기록했다. 일본의 경우 1970년 2.13명, 1990년 1.54명, 2011년 1.39명으로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출산율이 줄었는데, 그 결과 사회 활력이 떨어지고 내수시장이 침체하는 등 저출산의 저주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에서 자동차 판매량이 2004년 585만대에서 2008년 470만대로 4년 새 무려 25%나 감소했으며 소매업, 교육산업, 자영업 등의 내수 산업들 또한 줄줄이 저출산의 폭탄을 맞고 있다.우리나라도 지금과 같은 저출산 추세가 지속된다면 미래의 내수 시장부터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지난 10년 동안 서울 지역에 위치한 유치원 중 30%가 문을 닫았다. 2008년에는 처음으로 초등학교 학생수가 한 반에 30명 이하로 떨어져 이젠 강남지역에서도 통폐합되는 초등학교가 생겨나고 있다. 저출산은 이 밖에도 수십조 원의 사교육시장, 출판, 놀이동산 등의 잠재시장을 날려버리는 시한폭탄이 될 수 있다.더 심각한 문제는 고령화다. 저출산 현상은 의학발전, 수명연장과 더해져 고령화 현상을 부추겼다.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는 우리나라의 65세 노인비율이 2030년이 되면 일본, 독일, 이탈리아 다음으로 높을 것이라 예측하고 있다. 여기에 종신고용 붕괴로 인한 55세-65세의 비자발적 노령계층까지 포함하면 충격은 더 심각할 것으로 보인다.당장 소득이 없어지면 지출은 60~70% 수준으로 떨어지고, 이는 곧 내수시장의 불황으로 이어져 경제는 더욱 침체에 빠질 수 있다. 그런 가운데 금융자산을 소진한 40대 이상 인구는 자산의 60~80%를 차지하는 부동산을 현금화하려 할 것이고, 이에 따른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은 부동산 버블 붕괴를 촉진해 연쇄적인 재앙으로 다가올 가능성이 있다.희망적인 미래를 기대한다면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현실인식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주로 현재에 머물며 미래에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되겠지’하는 심정으로 막연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저출산 문제라면 재정을 투입해서 출산율을 높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떨어진 출산율을 단기간에 높이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프랑스의 경우 출산율이 1.7명으로 떨어지자 저출산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신속하게 대책을 강구했다. 그 뒤로 15년 동안 매년 44조 5천억원을 투자해 인구 유지에 문제가 없는 2.1명 수준으로까지 출산율을 회복했다. 또한 매년 프랑스 GDP의 3.8%인 약 120조 원을 선제적으로 투입해 중산층 이하 가정을 대상으로 한 공교욱 무료시행, 출산 보조금 지급 등의 정책을 펼쳤다.반면 우리나라는 1983년 출산율이 2.1명으로 떨어졌을 당시 프랑스와 달리 적극적인 출산장려 정책을 시행하지 않았으며 지금까지도 출산과 관련해 직간접적으로 투입하는 예산은 연간 2조원 정도에 불과하다. 프랑스와 같은 정책을 시행한다고 해도 심각한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최소 10~20년의 긴 시간이 필요하며, 이 경우 10~20년의 불황에 대비하기 위한 대책 또한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대책은 개인이나 기업, 국가가 개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사회구성원 모두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서로 협조해나가야 한다.우리나라의 저성장을 위협하는 문제는 저출산 뿐만 아니다. 우리나라 내부의 문제 뿐만 아닌 세계적인 글로벌 금융위기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방식의 성장 지상주의가 종말을 고한 것은 2008년 하반기 본격화한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였다. 그 무렵 외환 유동성 위기와 경기 침체 우려가 짙어지자 당초 구상은 헛된 꿈이 되고 말았다. 위기 관리에 2년여를 쏟아붓고 나서는 정책을 바꿨다. 공정 사회나 상생 협력, 친서민 정책등 정치적 고려가 반영된 방향이었다. 이는 초기의 규제완화와 친기업 정책과는 완전히 상반된 노선이었다. 그 결과 이번 정부의 경제 비전과 정책은 이도 저도 아닌 상황으로 마무리 돼버렸다. 과거 패러다임에서 비전을 찾고 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지 못한 것이 이번 정부의 패착이었다.위기관리 능력에 대해 후한 점수를 줘야 한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다. 실제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우리 경제는 위기의 진원지였던 선진국은 물론 주요 신흥 국가들에 비해서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위기를 헤쳐 나왔다. 하지만 이는 특별한 비전과 정책의 결과라기 보다는 우리 경제의 구조적 요인에 약간의 행운이 더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외환위기 당시와 마찬가지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도 환율은 크게 뛰었다. 그 바람에 수출이 우리 경제에 숨통을 틔워줬다. 금융위기 직전 달러당 900원에 불과했던 원달러 환율은 2009년 3월 1570원까지 올라갔다. 현재는 1110원대로 안착한 상황이다. 환율 효과로 인한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이 20~50%까지 올라갔던 셈이다.현재 경제 상황은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보다 더 나쁘다. 미국경기는 더디게 나아지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유럽 재정위기가 초래한 글로벌 경기 침체는 언제까지 이어질지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금융위기 당시와 달리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들의 경제도 급전직하 중이다. 국가 신용등급 저하가 지속되면 일본 경제마저 불안정해질지 모른다. 경제에 대한 불확실성이 팽배하고 금융시장 내 신뢰가 무너진 상황에선 작은 충격으로도 대재앙이 불어닥칠 수 있다.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의 주요 국가간 공조도 이번에는 기대하기 어렵다. 주요 국가들이 모두 덩달아 통화를 푼 마당에선 오히려 무역과 환율 전쟁이 벌어질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의 권력 교체가 마무리되는 올 연말이 시발점이 될 것이다. 더욱이 주요국 간 무역과 환율 전쟁은 유로존 국가 사이의 해법을 둔 대치 상황처럼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새 정부는 재차 엄습한 글로벌 위기와 함께 임기를 시작해야 한다. 더욱이 이번에는 전 세계적인 무역과 환율 전쟁 와중에 과거 위기관리의 핵심 요소였던 환율 효과도 전혀 누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위의 내용들을 토대로 볼 때 지금은 우리나라의 미래를 걱정할 시점인 것 같다. 저출산, 글로벌 경제위기 그리고 거기에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바뀌고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였고 중국은 시진핑의 시대가 도래했다. 우리나라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얼마만큼의 위기 관리 능력과 미래의 비전, 새로운 성장동력을 제시하는가가 우리의 미래를 바꾸는 중요한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사회는 과학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손가락 하나로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이러한 세상에서 철학이란 학문이 우리에게 얼마나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생명과학을 공부하는 나에게 철학은 솔직히 멀게만 느껴지는 학문이란 것이 고등학생 때까지의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현대 사회일수록 철학과 같은 인문학적 학문이 사람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이 든다. 고대의 철학이라고 할지라도 현대인에게 적용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 줄 수 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객관적 관념론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유명한 이데아설을 제창, 이데아는 비물질적, 영원, 초세계적인 절대적 참실재이며 이에 대하여 물질적, 감각적인 존재는 잠정적, 상대적이고, 이 감각에 호소하는 경험적인 사물의 세계는 이데아의 그림자, 모상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내세웠다. 플라톤의 학교에서 공부하던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빗물체적인 이데아의 견해를 비판하고 독자적인 입장을 취하지만 플라톤의 관념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에서 동요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플라톤의 이데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플라톤은 철학 체계를 세운 사상사의 거장 중 처음으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는 이전의 사상가들과는 다르게 존재론, 인간관, 윤리학, 인식론 등에 관심을 보였고 소크라테스가 남긴 물음들에 형이상학적 가설을 제시함으로써 이후 서구 철학사에 길이 영향을 끼치게 될 형상철학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이데아론에서 이데아는 고차적인 순수사유에 의해 포착된 존재로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탈 물질적인 것이다. 이데아는 경험된 것이 아니다. 이 부분에서 플라톤은 개개인의 주관이나 분위기, 상황, 기질을 초월해서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 플라톤의 사상은 감각적인 것과 가지적인 것을 나누는 데서 출발한다. 수, 자연법칙, 정신적 가치, 기하학적 구조들 등이 가지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이 둘의 나눔은 인식론적 나눔이 아니라 존재론적 나눔으로 보았다. ‘감각으로 된 것만으로 사물을 보지 말라’ 라는 것이 플라톤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세상은 감각하지는 못하지만 가지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에 실재한다고 여길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감각적인 것 보다 기지적인 것이 더욱 실재적이라고 보았으며 감각적인 것은 오히려 실제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순수사유, 즉 인간의 노에시스의 작용에 대응하는 존재가 곧 이데아들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란 감각작용으로는 포착 할 수 없는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모든 개별 사물을 초월해서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는 독립적인 이데아를 주장한 것과 달리 경험적 현실 속에 존재하는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개체들만이 참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현실속의 개체들이야말로 스스로 존재하면서 세계를 이루는 실체이다. 따라서 현상 세계는 초월적 실재 세계의 단순한 모방이나 그림자가 아니라 그 자체로 참인 실재 세계로써 학문의 참된 대상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실체란 예를 들자면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라는 명제에서 소크라테스는 주어가 될 순 있지만 ‘사람은 소크라테스다’처럼 술어는 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보편적인 것을 형상이라고 부른다. 형상이란 개체에 본질을 규정하고 부여한다. 그래서 모든 존재자는 형상에 의해 형성된 것이며 마찬가지로 모든 생성은 형상을 받아들인 것이고 모든 소멸은 형상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즉 형상은 이데아처럼 모든 현상의 근거가 된다. 그에 의하면 형상은 개체들로부터 떨어져 있거나 초월해서 있기보다는 오히려 각 개체에 내재한다. 보편자로서의 형상이 제 기능을 하는 것은 그것이 시간과 공간 안에 개체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각 개체에 내재한 형상은 그 성격상 보편적이지만 항상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것으로 실현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라는 개념을 통해 보편자인 형상이 개별적 개체에서 발현되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질료는 그 어떤 형식이나 규정도 지니지 않은 것으로서 보편적 형상을 수용하는 물질이다. 형상은 다양한 개별자들이 종의 본질적인 통일성과 구조적인 단일성을 부여하는 원리인 반면 질료는 그 형상을 구체화하고 개별화하는 원리로 작용한다고 설명하였다. 결국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항상 질료와 형상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재론은 실체의 존재에 관하여 차이가 있지만 비교해 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철학을 통합시킴을 볼 수 있다. 플라톤은 본질적 실체는 이데아에 있고 감각적으로 경험되는 세계인 형상은 그림자라고 하였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 대신 사용하는 개념이 실체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은 진리를 의식할 때 감각에서 첫 출발을 시작한다고 한 반면 플라톤은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세계는 참된 세계가 아니며 감각을 통해 얻은 지식 또한 참된 것이 아니므로 완전한 사물의 본질인 이데아의 세계를 모방해야 한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플라톤의 윤리학은 개인은 자기가 타고난 기질이 어디에 속하는지 잘 알고 선의 이데아를 모방하여 알맞은 역할을 수행할 때, 개인적으로 정의롭고 자신의 자아실현을 잘 이룰 수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국가 또한 계급에 적합한 교육을 받고 거기에 알맞은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조화를 이룰 수 있을 때, 정의로운 국가를 형상할 수 있다고 하였다. 최고의 이데아는 선의 이데아로서 여기에 가장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철학자이고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는 철인정치론을 이상적인 국가로 내세웠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관은 목적론적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최고선으로서의 인생의 궁극적 목적인 행복을 제시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선이란 결국 덕에 일치하는 정신의 활동이다’라고 하였으며 행복 역시 어떤 종류의 정신의 유덕한 활동이라고 말하였다. 덕을 통하여 궁극적인 목적인 행복에 도달한다고 하였다.
생명과학은 왓슨과 크릭이 DNA 이중나선구조를 밝히고부터 급속도로 발전 해 왔다. 벌써 이중나선구조가 밝혀진지 60여년이 되었다. 이 발견 이후 생명과학분야의 발전이 가속되어 왔다. 복제 강아지가 태어났고 인간배아줄기세포 복제라는 연구를 통한맞춤 의학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약 60년 동안 이루어진 생명과학의 눈부신 발달은 DNA 구조의 발견으로부터 촉발되었다. DNA의 이중나선구조를 밝힌 사람은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다. 그 당시 유전 메커니즘에 대한 짐작만 무성했고 단백질과 DNA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가 관여를 한다고 생각했었다. 1953년 4월25일자 네이처지에 한 페이지의 짧은 논문은 왓슨과 크릭이 DNA의 구조에 관해 밝힌 것이었고 그 구조의 유전학적 의미는 대단했다. 한 개의 링을 가진 피리미딘과 두 개의 링을 가진 퓨린 염기쌍의 상보적 결합, 즉 아데닌과 티민, 구아닌과 시토신의 수소결합을 발견하여 두 사슬 가운데 어느 하나가 주형이 되어 그와 상보적인 사슬을 합성하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1950년대 DNA의 이중 나선 구조를 발견하고 핵산의 구조를 밝히기까지의 경위를 왓슨이 인간적인 모습으로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그려낸 에세이 형식의 과학서로 과학계에 얽혀 있는 사람들의 인간관계와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다.왓슨은 대학 4학년 때 유전자의 본질을 연구해보고 싶어 인디애너 대학, 켐브리지대학의 연구실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DNA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미생물학자 에이브리는 한 박테리아의 유전형질이 순수한 DNA 분자를 통해 다른 박테리아로 옮겨질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 발견으로 과학자들은 유전형질을 밝히는 열쇠는 단백질이 아니고 DNA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박테리아에 기생하는 바이러스 즉, 파지를 연구할 때 DNA는 파지의 구성물질의 약 절반밖에 차지하고 있지 않지만 에이버리의 실험결과는 이것이 유전자의 기본물질임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었다. 따라서 DNA의 화학구조를 밝히는 것이 유전자의 복제메커니즘을 구명하는 기본요건이 된다고 여겼다. 왓슨이 연구의 시작을 하게 된 계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지도교수인 루리아이다. 그는 자신의 연구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가지고 왓슨에게 화학 공부를 시킬 목적으로 왓슨이 코펜하겐에 갈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하였다. 코펜하겐의 칼카르 밑에서의 연구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DNA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에만 머물러 있던 왓슨은 우연한 기회에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윌킨즈의 DNA의 X선회절상은 왓슨에게 인상적으로 남아 DNA에 대한 호기심을 더하게 된다. 이 후에 케임브리지대학의 캐븐디쉬 연구소에서 DNA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프랜시스 크릭을 만나게 된다. 크릭과 왓슨은 캐븐디쉬 연구소에서 DNA의 구조에 관하여 깊은 대화를 나눈다. 이들은 DNA가 폴리뉴클레오티드 사슬이 서로 꼬여서 형성된 복합나선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하지만 나선구조를 밝히는 데에는 사슬들이 서로 붙들고 있는 힘이 수소결합인지 아니면 음으로 하전된 인산기가 관여하는 염결합인지 결정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또한 누클레오티드에 있는 염기의 배열도 과제로 제기되었다. 이러한 DNA의 구조를 밝히는데 있어서 선행되어야 할 중요한 일이 윌킨즈와 로지 프랭클린이 행하고 있는 X선회절법에 의한 사진을 판독하는 것이었다. 복잡한 분자의 구조를 결정하는 데 가장 강력한 수단은 X-선 회절(Diffraction)방법이다. X-선의 파장은 원자들 사이의 거리와 비슷하게 때문에, X-선을 결정에 쪼여 주면 회절 현상이 일어난다. 사진 필름에 나타난 회절에 의한 수많은 점들은 자세히 분석하면 원자들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다. DNA의 구조를 밝히는 데에도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 책에는 저자와 경쟁관계에 있었던 매력적인 여류 과학자 이야기가 나온다. X선 회절의 권위자로 결정학자였던 로저린의 결정 X선 회절 연구는 DNA 구조 발견에 한 단서를 제공하지만 아깝게도 그녀는 1958년 37세의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폴링이 제시한 알파나선에 빗대어 DNA가 나선구조일 것이라고 예상하고 그 증거를 찾게 되었다. 그 결과 초기에는 당+인+2가이온의 염결합의 사슬구조 모양으로 모형을 만들어 작은 규모의 발표를 하지만 오점이 발견되어 실패하게 된다. 따라서 연구의 중지 처분을 받기도 하지만 후에 슈람의 이론과 로지의 실험 결과에 힌트를 얻어서 DNA의 결합이 아데닌-티민과 구아닌-시토신의 수소결합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Mg++와 인산기의 음전하 사이의 관계에서 DNA의 구조를 찾으려 한 부분에 이르러 한 이론의 탄생이 힘들다는 것을 짐작했다. 그 당시의 다른 많은 과학자들처럼 삼중나선 구조에서 실마리를 찾으려 했지만 실패하였고 이중나선으로 만들어 보자고 생각하고 샤르가프의 염기 함량비(G-C 비)를 직접 구조에 이용하여 같은 염기들끼리 A-A, G-G, C-C, T-T 연결시켰으나 서로 길이가 같지 않음을 이유로 해서 다시 A-T, G-C로 나간 것을 보면 과학자의 직관력이 필요함을 알 수 있었다. 왓슨과 크릭은 이 구조를 실험적으로 알아낸 것이기 보다는 한 우물만 팠던 다른 과학자들의 실험 결과물과 조언을 조합해서 직관력을 바탕으로 조합했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로지와 윌킨스의 X-선 회절 연구 결과와 라이너스 폴링의 a나선 구조, 많은 유기화학자들의 연구 결과, 코크런과 다너휴의 조언등을 종합해서 내린 결론인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발견은 결코 이들만의 것이 아니고 그 동안에 쌓아졌던 생물학의 실험적, 이론적 지식을 발판으로 그들이 추리해낸 것이다. 이들이 이런 종합적인 추리를 하여 구조를 밝힌 대까지는 그때까지 뚜렷하게 없던 그들의 전공도 한 가지 이유일 것 같다. 라이너스 폴링이나 윌킨스, 로지는 자기의 전문 분야가 있어서 그쪽이 해결책이라는 생각으로 자기 분야만 연구하고 다른 분야의 정보를 공유하는 것을 그렇게 필요하지 않은 일이라고 치부해 버렸지만 아직까지 박사학위를 갖지 못한 이들은 어떤 연구를 하여 논문을 쓸 것인가 에 관해 주변의 여러 관심 가는 것에 대해 개방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을 것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