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문가 요청 쿠폰 이벤트
*수*
Bronze개인인증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12
검색어 입력폼
  • [레포트] 러시아혁명 - 배경과 과정, 그리고 의의와 비판까지 -
    과목명 : 서양사사료강독러시아혁명- 그 배경과 과정, 그리고 의의와 비판까지 -머리말2014년 4월 세월호 사고가 일어난 후, 나는 그렇게도 자랑스러워하던 우리나라에 대한 애정을 조금은 잃게 되었고, 국가가 우리를 지켜줄 거라는 믿음은 완전히 잃게 되었다. 과제의 주제를 무엇으로 잡을까 고민하던 중에 세월호 사고가 러시아혁명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러시아의 군주였던 차르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가지고 있었던 노동자들, 차르가 그들의 말을 들어줄 것이라는 믿음 하나로 그를 찾아갔지만 그 사람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으로 대응했던 정부. 이것이 우리나라의 지금과 닮아 보였다. 현 상황을 타개하고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에 대해 정부가 내놓은 답은 양파껍질 까듯 드러나는 온갖 부정부패들이었다.이러한 이유에서 러시아혁명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하였는데, 러시아혁명의 대략적인 전개과정만 알고 있던 나에게 혁명은 많은 시사점들을 안겨주었다. 그것의 시작이 우연하게 발생한 쿠데타였으며, 볼셰비키가 주도한 위로부터의 쿠데타였고, 근본적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던 점과 혁명이 낳은 비극적인 결과들은 내가 알고 있던 러시아혁명에 관한 내용을 근본에서부터 바꿔버렸다.나는 러시아혁명의 과정을 살펴본 후, 그 내용은 권력을 잡으려는 자들의 의도였는지, 민중들의 의지에 의한 산물이었는지에 대해 탐구하고자 했다. 또한, 혁명의 문제점들을 비판한 후에 지금의 사회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어떠한 것들이 필요할지 생각해보고자 하였다.1. 러시아혁명의 배경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러시아는 전제군주인 차르가 절대 권력을 유지하는 전제국가였다. 20세기가 되도록 서유럽의 시민사회, 의회정치, 합법적 노동조합조차 허용되지 않았고, 차르 1인의 전제권력만이 모든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주체였다. 이러한 체제는 다른 세력들의 정치 세력화 또한 용납하지 않았다.차르는 서유럽과 일본이 공업 자본주의 덕택으로 새로운 전쟁 수행 방식을 습득할 수 있게 되자, 러시아를 유지하기 위해서 선진적인 자계급으로 바뀌는 일을 수반하였는데, 노동자에게는 파업권도 없었고 독립적인 노동조합 결성권도 없었고 사용자와의 단체교섭권도 없었다.농노제 철폐를 전후한 시기부터 러시아에는 인민주의와 마르크스주의라는 사상이 도래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상을 표방하고 따르면서, 노동자들은 개혁을 부르짖고 노조를 결성하고 파업을 통해 불만을 드러냈다. 러시아는 19세기 후반부터 노동운동과 농민봉기가 과격화되었으며, 비합법적 혁명정당들이 생겨났다. 제정러시아가 안고 있던 구체제적 모순들은 결국 세 차례의 혁명으로 폭발되었다.2. 1905년, 제1차 러시아혁명러시아 혁명의 출발은 1905년의 “피의 일요일 사건” 이었다. 불만에 가득 찼던 노동자들은 결국 니콜라이 2세의 거주지인 동궁으로 행진하기 위해서 시 외곽지역으로 모여들었고, 노동자들은 노동자들의 생활과 노동조건이 개선되도록 직접 군주에게 청원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군대가 무차별 사격으로 대응하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차르에 대한 믿음과 존경심은 사라졌다. 노동자들은 본격적으로 항의시위와 총파업에 돌입하였고, 이는 러시아의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파업의 요구는 노동시간 단축, 임금인상 등이었고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사회민주당의 선동가들이 노동조합 결성권 같은 정치적 목표도 추가하도록 고무시켰다.결국 차르는 1905년 8월 자문권이 있는 제한된 대의제 기구인 듀마를 승인하였고, 10월에는 의회 듀마에 입법권을 부여할 것을 약속하였다. 노동자들은 시종일관 혁명투쟁의 선두에 서서 봉기를 일으켰다. 그들의 열기는 혁명정당들이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폭발적이었다.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는 노동자들의 지도적인 구실을 하였는데, 레닌을 비롯한 사회 민주당의 지도자들,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12월, 차르의 강력한 진압 때문에 관련 지도자들이 체포당하자, 이후에 일어난 시위와 파업들은 힘을 잃게 되었다.3. 1917년, 3월혁명 (구력2월)이런 와중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하였고, 전쟁갔다. 시위대는 경찰이 다리를 막자 얼음 위로 네바강을 건너 도심으로 진출하였다. 몇 차례에 걸쳐 부대는 시위대에 발포 하였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당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 군중에게 발포했던 볼린츠키 연대의 병사들이 사건을 논의하고, 다음날은 국민들에게 발포하지 말자고 결정한다. 아침이 되기 전에 이 부대들은 연대의 주 교육 부대를 끌어들일 수 있었고, 이 부대는 거리를 순찰하라는 명령에 복종하지 않기로 하였다. 결국 이들 부대가 시위대에 합류하면서 차르는 퇴위하지 않을 수 없었다.노동자들은 고통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농민들은 지주의 토지를 취득할 것을 기대했으며, 병사들은 전쟁이 끝날 것을 기뻐했다. 모든 사람들이 차르의 퇴위를 기뻐했고 차르의 퇴위가 러시아 사회의 모든 위기를 해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폐회한 듀마의 온건파 지도자들은 의회가 열렸던 따브리다궁에서 비공식 회합을 가졌고, 그들은 과도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이 위원회는 그날 저녁 임시정부로 명명되었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3월 혁명을 통해 자신들의 힘을 깨달았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민주적으로 대의원을 선출해 소비에트를 세웠으며 각지에 노동자, 농민, 병사 소비에트가 결성되었다.즉, 이제 러시아는 한편에는 부르주아의 임시정부가, 다른 한편에는 프롤레타리아의 소비에트가 병립하는 이중권력의 체제를 이루게 되었다. 정부는 제헌의회의 소집과 전쟁의 계속적 수행을 목표로 하였고, 혁명의 구심점이자 원천인 소비에트는 공식적인 권력 장악을 거부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임시정부는 승산 없는 전쟁에 몰두하였고, 영토획득을 위한 국제 경쟁 대열에서 뒤처지지 않으려 하였다. 사회혁명당 역시 농민을 위한 정당이라 자처해 왔으나 토지개혁에 의욕을 보이지 않고 전쟁문제에 신경을 썼다. 소비에트는 민중의 절대적 신뢰라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도 그들의 절박한 문제들을 처리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었다.4. 1917년, 11월혁명 (구력10월)볼셰비키는 3월 혁명 당시 당원이 2만 명을 넘지 못하는 소수정당이었부도 소비에트도 정치상황을 완전하게 통제하지 못하였다. 한편 7월, 동맹국에 공격을 가하는 일이 일어나자 정당한 합리성을 상실한 정부의 결정에 군인들은 등을 돌리고 부대를 탈영하여 군은 거의 해체되었다. 또한 전쟁에 대한 격화는 민중들의 반발도 반영하여 볼셰비키가 시위를 주도하게 되었다. 하지만 온건 사회주의자들의 도움을 받아 정부가 통제력을 다시 가질 수 있게 되었고 레닌과 볼셰비키는 은신해야 할 상황을 맞게 되었다.그러나 인민들이 레닌의 구호와 요구를 지지하고 그동안 노선을 달리했던 트로츠키가 레닌과 제휴하면서 볼셰비키는 득세하게 되었고, 마침내 볼셰비키는 레닌의 주도 하에 1917년 10월 24일부터 3일 동안에 무력으로 임시정부를 전복시켰다.임시정부는 별다른 무력 저항을 벌이지도 못하고 붕괴되었고, 케렌스키는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하였다. 그리하여 레닌을 의장으로 하는 인민위원회가 정권을 장악하였고, 외무 인민위원에는 트로츠키가, 민족문제 인민위원에는 스탈린이 임명되었다. 볼셰비키 정권은 11월 혁명 이전부터 계획되어 있던 제헌의회에서 사회혁명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자 제헌의회를 강제 해산하고 일당 독재를 강화해 나갔다. 결국 의회민주주의의 발전은 좌절된 것이었지만 무산자계급의 정당이 정권획득에 성공한 최초의 역사적 사례였으며, 소비에트 국가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후진적인 사회가 취할 수 있는 근대화 경로의 한 전형을 보여주었다.5. 러시아혁명의 의의주지한대로 무산자계급의 정당이 정권획득에 성공한 최초의 역사적 사례였으며, 후진적인 사회가 취할 수 있는 근대화 경로의 한 전형을 보여주었다는 의의를 포함해서 러시아혁명은 유럽을 비롯한 자본주의 체제 국가들이 복지 정책과 자본주의 체제, 그리고 민주주의적 원리를 다듬어 나가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러시아 혁명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큰 잠재적 위험이 될 계급갈등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던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들은 러시아 혁명 자체를 위협의 시작으로 여겼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본지 피지배층의 권리를 위해 다양한 정책들을 시도하였다. 물론 대부분의 정책이 거의 실패라고 볼 수 있지만 그러한 시도들은 노동자의 권리, 여성의 참정권 확대 등 그동안 외면되었던 약자 층의 권리를 세계적으로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6. 러시아혁명의 문제점러시아혁명 이후 나타난 비참한 현실들을 보면 이 혁명이 과연 민중들을 위한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후, 경제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산업은 정지되어서 수도의 60% 이상의 노동력이 실직상태였으며, 도시와 농촌의 교역은 와해되어갔다. 노동자, 군인, 농민 사이의 연대의 붕괴는 물론이고 식량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여러 문제들 중 가장 불길했던 징조는 도시와 농촌 사이에서 유발된 상호 적대 감정이었다. 그러한 적대 감정들은 도시민들이 농촌 거주민들의 생활을 배려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루블화의 가치가 상실된 이유로 도시 노동자들의 식량문제는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이들은 농촌의 농민들에게서 강제로 식량을 빼앗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굶주리던 도시 노동자들은 식량을 구할 수 없어 결국 도시를 떠났으며 그 결과 10월 혁명이 일어난 지 단 6개월이 지났을 때, 수도의 인구는 1백만 명 이상이 감소하였다.사실 볼셰비키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고 평가되곤 한다. 그들은 1918년까지도 내부적으로 심하게 분열되어 있었고, 당내에서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없었다. 중앙에서의 명령을 지키려는 자들도 없었으며, 토지 문제에 관한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의 갈등에서 결국 지방의 현실을 반영하자는 의견도 무시하였다. 또한, 질서도 없었고 규율도 없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볼셰비키 세력은 와해되어 정권을 잃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계속해서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볼셰비키 이외의 집단이 볼셰비키보다 더 심하게 분열되어 있었고, 볼셰비키의 가장 큰 장점이었던 정치적인 수완이 그 힘을 발휘하였기 때문이.
    독후감/창작| 2016.06.28| 6페이지| 2,000원| 조회(368)
    미리보기
  • [인터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평가A+최고예요
    [인터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기자)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 인터뷰에 모실 분은 신항로 개척과 아메리카 대륙 발견으로 유명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입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스페인의 후원 아래에서 신대륙을 발견한 인물입니다. 이 신대륙의 발견으로 인해 새로운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유럽인들의 세계관은 엄청나게 커질 수 있었습니다. 콜럼버스의 발견은 구대륙에서 신대륙으로 엄청난 규모의 물자와 생물, 인구가 이동함으로써 근대의 한 출발점을 열었다는 의의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콜럼버스 씨를 모셔볼까요? 어서오세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씨. 인터뷰를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평소에도 콜럼버스씨한테 궁금했던 것이 많았는데 이번 기회에 궁금증을 해소해 보고 싶습니다. 몇 가지 질문을 준비해 왔는데 대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콜럼버스씨는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이시고, 바다로 첫 발을 내딛은 것도 제노바에서였는데 콜럼버스씨의 어린시절과 제노바에서의 삶에 대해선 많이 알려지지 않았어요. 제노바에서의 삶과 어떻게 배를 타게 됐는지에 대해 얘기 좀 들려주실 수 있나요?콜럼버스) 제노바라. 그 곳에서의 삶은 풍족하지도 좋지도 않았지만 제가 제노바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어요. 그렇다고 알려지길 바라는 것도 아니지만. 제노바에서의 삶은 스스로를 위한 삶이 아니었어요.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서 고생만 했던 기억, 빚 때문에 감옥에 갇혔던 기억도 떠오르는군요. 당시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기본적인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어요. 제가 능통한 제도학, 천문학, 라틴어도 뱃사람이 된 이후에 독학으로 공부한 거였죠. 수많은 서적들을 읽을 수 있었던 것도 뱃사람이 된 이후였어요. 아무튼 저는 아버지에게서, 빚에서, 제노바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제노바는 상업도시이면서 항구도시였고 덕분에 제노바 상인들에게 고용될 기회를 얻은 저는 선원으로써 배를 타게 됐습니다. 그렇게 배를 타다가 1476년 프랑스 해적선의 공격으로 배에서 헤엄쳐 나와 우연히 포르투갈 리스본에 으로 참여할 수 없었던 나라였죠. 대신에 대서양으로 진출하기 시작했어요. 후추를 비롯한 향료, 비단, 면, 금은보석 등 동양의 물산을 아라비아 상인이나 이탈리아 상인의 손을 거치지 않고 직접 구득하기 위해서였죠. 그리고 점점 이탈리아인들도 포르투갈로 모였죠. 콘스탄티노플에 이어 카파까지 터키의 영토가 되면서 이탈리아의 지중해무역과 흑해무역이 점점 축소됐기 때문이었어요. 특히 콘스탄티노플에 자치구를 가지고 있던 제노바는 단숨에 무역지역으로서 흑해 전체를 통째로 잃어버렸죠.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를 돌아 전설적인 풍요의 나라 ‘인도’로 통하는 해로를 탐색하기 시작했어요. 아조레스 제도를 차지하고 아프리카 해안을 탐험했던 포르투갈 인들은 아프리카에 황금과 노예가 널려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무역을 확대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더 넓은 아프리카 지역들이 개척되었고, 금이나 향신료 같이 탐나는 보물들에 직접 접근할 수 있게 되었죠. 그리고 1488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배를 타고 아프리카의 남쪽 끝을 돌았음을 리스본에서 공포했어요. 인도로의 직항로가 열린 것이죠. 리스본은 유럽의 상업도시 중에서도 최고였어요. 항해에 뜻을 둔 수많은 이들이 모여드는 항구도시로 성장하는 중이었죠. 그리고 포르투갈에서는 일찍부터 상업이 시민계급에게 사회적 인정을 받는 수단으로 작용했어요. 리스본은 저에게 있어 직업적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의 땅이라는 걸 바로 알아차렸답니다.기자) 콜럼버스씨는 항해에 나서기 전까지 기다림의 시간이 길었잖아요. 계속된 후원 거절로 좌절하고 포기할 수도 있었을 텐데 신항로 탐험에 대해 그렇게 확신하고 계속된 설득에 나설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나요?콜럼버스) 제 자신에 대한 확신과 제 이론에 대한 자부심이 원동력이었던 것 같군요. 1477년 초에 영국과 아일랜드로 여행을 갔었는데 동양에서 온 중국 사람들과 진기한 것들을 많이 보게 되었죠. 이때 서쪽에서 부터 동쪽을 찾자는 생각이 머리에 싹텄었죠. 저는 서쪽으로 항해하여 인도에 닿을 수 있었는데 그 지도를 통해 다시 한 번 대서양을 서쪽으로 항해하는 것이 역시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가는 것보다 더 빨리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제 이론이 맞았다고 생각할 수 있었어요.기자) 결국 콜럼버스씨는 스페인 왕실에 도움으로 항해를 떠날 수 있었죠. 사실 스페인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의문점이 생겼어요. 왕실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라면 본인의 요구사항을 낮추는 등의 노력을 보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콜럼버스씨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셨죠. 이사벨라 여왕으로부터 재정적 원조를 얻기 위한 설득이 어렵고 잘 되지 않자, 극단적으로 탐욕스러운 계약을 몰아 부친 일이 있었어요. 왜 그랬나요?콜럼버스) 저는 정말로 항해에 나서고 싶었어요. 스페인 이전에도 저는 원정비를 조달하기 위해 먼저 포르투갈 왕을 접견했지만 거절당했죠. 제가 포르투갈에 머물고 있던 1488년에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아프리카 남단을 돌고 왔답니다. 포르투갈은 동쪽 항로를 개척하는 데 정신이 팔려있었죠. 제 동생 바르톨로메오는 영국 왕 헨리 7세를 설득시키려고 했어요. 그게 불가능하자 어린 왕 샤를 8세의 프랑스 왕가를 찾기도 했죠. 전 스페인으로 갔습니다. 제가 스페인에 도착할 때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은 신앙인의 의무에 전념하기로 다짐하며 이슬람 세력에게 빼앗긴 이베리아 반도의 땅과 신앙을 되찾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어요. 이슬람 교도의 마지막 보루(그라나다)를 탈환하고 있던 상황이었죠. 저는 원정비를 후원받고 싶어서 왕실을 쫓아갔죠. 서쪽으로 가면, 포르투갈을 따돌리고 인도에 먼저 당도할 수 있고, 교황청으로부터 독점권도 얻을 수 있고, 아시아의 재물을 독차지 할 수 있다고, 서둘러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설득은 쉽지 않았습니다. 정말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어요. 스페인 여왕님과 국왕님과의 첫 접견 후에 심의기구가 발족되었는데 거의 4년을 기대하게 하더니 부정적인 결정이 내려졌죠. 하지만 1492년 이슬람교도 최후의 거점인 그라나다를 함락시킴으로써 재정복운동을 완성했고 스페인 왕실은의 1과 모든 무역 거래에 8분의 1 지분으로 참여할 수 있는 권리, 상거래에서 발생하는 모든 분쟁을 다룰 무제한의 재판권을 요구했었죠. 또 발견한 모든 땅의 총독 겸 최고행정관의 직함과 그곳에 배치할 관리들을 직접 선택할 권한도 요구했고, 모든 직함, 권한, 경제적 특권들이 아들에게로 세습되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이런 조건 때문에 다시 한 번 제 계획은 거부당했죠. 하지만 왕실 재정관리인인 루이스 데 산타앙헬가 제 계획이 성공만 한다면 풍부한 금, 향신료, 값비싼 옷감 등 유럽인들이 탐내는 모든 보물들을 아주 간단히 손에 넣을 수 있다며 이사벨라 여왕을 설득했다고 들었습니다. 스페인 왕실도 바닥난 금고 때문에 신항로를 개척할 사람이 필요했던 거죠. 아무튼 저 역시 탐험을 지원해 줄 사람이 필요했으니 서로 윈윈(win-win)이었다고 생각해요. 제가 탐욕스러운 계약을 몰아붙인 이유는 저를 믿어주지 않았다는 것, 기다리게 했다는 것에 대한 어느 정도 울분의 표현이었던 거 같아요. 제가 제시한 조건이 저를 굉장한 욕심쟁이로 비쳤겠지만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어요.기자) 콜럼버스씨의 항해록을 보면 인디언들을 만난 그 순간부터 그들을 잠재적인 신하로 본 것 같은데, 미지의 나라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을 신하로 인식했다는 게 이해가 잘 되지 않네요. 교역과 선교를 위해 도달한 새로운 땅의 주인인 사람들을 기적적으로 만났으면 보통 인간 대 인간으로 그들에게 접근하고 손님의 입장에서 잘 보이려고 노력을 했을 것 같은데 콜럼버스씨가 인디언들을 왕실의 신민이 아닌 다른 존재로 보려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던 이유가 궁금해요.콜럼버스) 그들은 마치 우리를 신처럼 여겼어요. 우리가 주는 모든 물건들에 대해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뻐했고,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내주었고 우리가 주는 것은 무엇이든 받았죠. 그리고 그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벌거벗은 채로 살았답니다. 우리 유럽 땅의 노예들은 그래도 옷은 입고 다녔어요. 그런 원주민들을 어떻게 동등한 인간으 개종되어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로 만들고자 했죠. 그래서 나는 그들을 무조건 호의적으로 대하라고 지시했답니다.기자) 하지만 그 호의적인 태도도 잠깐 뿐이었죠. 사실 콜럼버스씨의 신대륙 발견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점점 안 좋은 쪽으로 치닫고 있어요. 저는 콜럼버스씨에 대해서 교과서에서 처음 알게 됐는데, 그때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영웅으로 서술되어 있어서 대단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어요. 하지만 대륙을 발견하고 난 뒤의 행적을 보면 솔직하게 인간적으로 실망스럽다고 말하고 싶어요.콜럼버스) 호오. 어떤 점이 실망스러웠나요.기자) 인디언 마을을 공격할 때 맹견을 투입해서 인디언들을 물려죽게 만들었고, 노예로 팔려고 스페인으로 데려갈 때 벌거벗은 채 음식을 제공하지 않아서 굶어죽게 만들었고, 황금찾기에 혈안이 되어 ‘엔코미엔다’라는 강제노역을 시킬 수 있는 원주민 구역을 할당해서 수많은 인디언들에게 무자비한 노동까지 시켰죠. 원주민들은 죽도록 금광을 찾아 일해야 했고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렀고요. 도망가다가 잡히면 불에 타죽었죠. 심지어 칼을 잘 드는지 실험하기 위해 인디언들을 누가 단칼에 동강내는지 내기를 했다고도 들었어요.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많은 인디언들이 카사바라는 독을 먹고 자살을 했을까요. 콜럼버스씨가 아이티 섬에 도착한 2년 동안 전체인구 30만 명 중에서 10만 명이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콜럼버스씨를 포함한 스페인 사람들은 인디언들을 인간이하로 취급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거예요. 저는 사실 콜럼버스씨 때문에 식민지라는 단어도 생겨났다고 생각해요. 제국주의를 아메리카 대륙까지 확장시키는데 가장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고도 생각하고요.콜럼버스) 저는 식민지를 세우라고 아이티 섬에 사람 몇 명을 내려놓고 다시 배에 올라 탐험을 했었죠. 전 식민지 경영보단 탐험을 더 좋아하니깐요. 하지만 다시 아이티에 왔을 땐 황금은커녕 식민지 주민의 절반은 죽어 있었고 질병과 의욕상실로 다들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벌이를 못했고 다들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믿고 맡
    독후감/창작| 2016.06.28| 6페이지| 2,000원| 조회(571)
    미리보기
  • [레포트] 미국사 - 미국 대통령 선거의 특징과 역사 (간접선거, 승자독식제, 선거인단 투표)
    미국 대통령 선거의 역사민주주의 사회에서 주권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선거이다. 우리는 선거를 통해서 나라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뽑고, 우리의 의견을 대변해 줄 대표자를 뽑는다. 한 나라의 인구수는 모든 사람의 의견을 하나하나 반영하기 힘들 정도로 증가했기 때문에 내 의견을 대변해 줄 사람을 뽑는 것과 향후 몇 년간 나라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뽑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렇게 선거를 통해 대표를 선출하는 것은 우리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면서 기본적인 권리이다. 우리는 5년마다 이루어지는 대통령선거에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당연하게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아님에도 대선의 결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몇몇 나라들이 있다. 바로 미국이 그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언론에서는 미국 대선을 대서특필하면서 실시간으로 관심을 기울인다. 미국이 최근 100년간 세계경제를 이끌어 온 강대국이면서 아직도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것에 이견은 없을 것이다. 또한,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는 분단국가인 우리에게 미국대통령이 누구인지, 미국의 한반도정책이 바뀌는지 아닌지에 따라서 한미동맹의 장래가 달라질 여지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미국의 대선에 관심을 가진다. 미국은 다른 나라에는 없는 독특한 대통령 선거방식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미국의 독특한 대통령 선거 방식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무엇을 염두에 두고 채택된 것인지, 상황에 따라서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에 대해서 서술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미국 대통령 선거제도 속에서 내가 발견할 수 있었던 비민주적인 요소들에 대해서도 서술해 보겠다.미국은 세계에서 최초로 대통령제를 채택한 나라이며, 국가의 최고권력자를 시민이 선거로 뽑는 제도를 가장 오랫동안 유지한 나라이다. 미국은 간접선거를 통해서 대통령을 선출하고 있는데, 미국의 대통령 선거제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선거인단 투표’와 ‘승자독식제’이다. 유권자들은 각 주의 형편에 따라 각 가운데 메인과 네브라스카 주를 제외한 48개 해당 주에서 한 표라도 더 많이 얻은 후보에게 그 주에서 미리 할당된 선거인단 전체를 몰아주는 방법이 바로 ‘선거인단 투표’와 ‘승자독식제’이다. 선거인단은 50개 주별로 인구와 상관없이 선출하는 2명의 상원의원 100명과 각 주의 인구수에 비례해서 적게는 3명에서 많게는 55명의 하원의원 435명과 수도 워싱턴 선거인단 3명을 합치면 모두 538명이기에, 과반수인 270명을 확보해야 당선된다. 미국 대선에서는 이러한 두 가지 독특한 특징 때문에 표를 더 많이 얻고도 대통령에는 선출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미국은 이러한 경우를 지금까지 4차례나 겪어왔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2000년 대선이다. 민주당 후보 앨 고어는 지지율 면에서 53만 표 앞서면서도 선거인단 수에서 266명밖에 차지하지 못함으로써 공화당 후보 조지 W 부시에게 패해서 대통령에 선출되지 못했다.대중투표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후보가 선거인단 투표에서 과반수 표를 얻지 못해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하는 일이 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자칭하는 미국에서 발생한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미국 대통령 선거 방식 내부에는 이렇게 비민주적인 결과를 불러오는 요소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미국은 ‘선거인단 투표’와 ‘승자독식제’라는 독특한 특징 때문에 4년에 한 번씩 선거시즌이 다가오면 ‘비민주적이다’, ‘복잡한 선거방식이다’, ‘미국 대선제도를 고쳐야한다’라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그런데도 지금의 선거제도를 고집하고 있다.미국만이 지닌 이 선거방식은 연방국가인 미국의 특징을 반영한 것이다. 미국은 약 220년 전에 채택한 대통령 선거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왔다. 1776년 미국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을 때 독립에 참여한 13개의 주는 각각 하나의 나라와 같았다. 지금도 사용하는 주(state)라는 단어는 국가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데, 각 주는 경계선이 있었고, 독자적인 의회와 독자적인 헌법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나라와 진 연합국가를 결성했고, 정식 명칭을 미국(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이라고 결정했다. 각 주의 의견을 조정하고 효율적인 정치를 하기 위해서 연방정부가 필요했던 각 주의 대표들은 1787년 5월부터 9월까지 펜실베니아 주 필라델피아에 모여 연방 헌법을 제정함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연방 체제를 갖추었다. 헌법 기초자들은 연방의 권한이 지나치게 확대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주와 연방이 적절하게 서로 견제함으로써 균형 잡힌 권력을 가지기를 바랐다. 그 예가 연방 대통령 선거제도에 잘 나타난 것이다.미국 건국 초부터 대통령의 권한에 대해서 많은 논쟁이 있어왔는데 어떤 자들은 미국의 대통령이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새로이 수립되는 정부를 효율적으로 이끌어 가길 바랐고, 어떤 자들은 당시 헌법에는 재선 자격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기 때문에 대통령에게 많은 권한을 집중시킨다면 그들이 이주해온 영국의 왕처럼 절대군주가 될 수도 있다고 걱정하며 대통령에게 의회가 대통령을 통제할 수 있을 만큼의 제한적인 권한을 부여하고, 의회를 압도할만한 권한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그래서 헌법회의에서 처음 대통령선거에 대해 논의할 때 2가지의 견해가 대립되었다. 첫 번째로는, 입법부우위의 원칙에 입각하여 대통령을 입법부에서 선출하자는 견해였다. 이들은 영국의 식민지하에서 영국왕과 영국정부에서 파견한 총독의 폐해를 직접적으로 경험했었기 때문에 미국 중앙정부의 권력이 단일 대통령에게 집중되는 것에 비판적이었다. 미국 헌법의 아버지이며 제4대 대통령에 취임한 제임스 매디슨은 대통령은 의전적인 역할만을 담당하고, 임기와 권한에 있어서도 매우 유동적이고 제한적인 대통령제를 제안했다. 두 번째로는, 권력분립의 원칙에 입각하여 국민이 직접 선거하자는 견해로 대립되었다. 펜실베니아 대의원인 제임스 윌슨은 강력한 대통령제를 제안했다. 강력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을 연방의회와는 독립적으로 선출하고, 임기에도 제한을 두지 않으며, 연방의회의 의결에 대하여 거부권을 가지고, 주요 임명라는, 즉, 권력분립원칙에 위배되는 의회 선출제와 위험한 국민직선제를 함께 피할 수 있는 미국만의 독특한 선거제도를 낳았다. 그들은 그들의 새로운 선거방식이 ‘완벽하게 새로운’ 창안이라며 자랑스러워했다.1789년부터 시작된 초기 대통령 선출방식은 지금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초기 방식은 선거인단 표에서 과반수이상을 얻은 최다득표자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차점자를 부통령으로 선출했다. 선거인단은 한 사람이 2표씩 던질 수 있었다. 3대 대통령을 뽑는 1796년 대선에 이 같은 대통령 선거방식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연방정부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존 애덤스(John Adams)와 주의 권한을 보호해야한다고 생각하는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격돌하여 정치적 견해가 전혀 다른 두 인물이 대통령과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자 1800년 대선에서는 선거제도를 고의적으로 왜곡시키는 일이 발생했다. 당선이 유력시 되던 토머스 제퍼슨이 차점자 존 애덤스가 부통령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과 같은 정파 출신인 아론 버(Aaron Burr)와 본인에게 선거인단이 1표씩 투표하도록 한 것이다. 통상적인 방법이었다면 좀 애덤스가 부통령이 되었겠지만 아론 버가 부통령이 되었다. 결국 미국은 헌법을 수정했다. 1804년 수정 헌법 12조에는 선거인단이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에게 각 각 따로 투표하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일반투표의 다수 득표자가 선거인단 투표에서 패배할 수 있는 가능성은 수정되지 않았다. 그 탓에 앞서 설명했던 2000년 대선과 같은 일이 4차례나 발생한 것이다.선거인단 제도는 앞서 설명했듯이 이렇게 대중투표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후보가 선거인단 투표에서 과반수 표를 얻지 못해 대통령이 당선되지 못하는 경우의 비민주적인 허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승자독식제’를 담은 ‘선거인단 투표’ 방식 때문에 대통령 후보들은 선거인단을 확보하기 위해서 선거인단이 많이 할당된 지역 즉, 인구수가 많은 캘리포니아나 텍사스 같은 주의 선거인단을 확보된 지역보다는 선거 때마다 지지후보들이 바뀌는 곳을 공략하기 위해서 총력전을 펼치는데, 이러한 경합주를 ‘스윙 스테이트(swing state)’라고 한다. 미국에서는 10개 내외의 경합주가 있는데, 사실상 미국의 대통령을 결정하는 곳이 바로 이러한 경합주이다. 후보들은 경합주 위주의 선거운동을 벌이기 때문에 미국 국민 전체의 의사를 수렴하고 합의를 유도하는데 한계를 가진다는 것 역시 미국 대통령 선거제도가 지니고 있는 비민주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또한, 주의 인구수에 따라서 똑같은 1표를 행사하더라도 어디에선 3표의 가치를 지니고, 어디에선 55표의 가치를 지닌다는 것은 유권자의 평등성도 왜곡시킨다고 생각한다.미국이 이러한 ‘선거인단 투표’ 방식을 바꾸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제 선거 방식을 다각도로 고려했던 초기의 대표들은 일반투표에 의한 직선, 주지사회의에서의 간선, 연방 상하양원회의에서의 간선 등에 대해서도 고려했지만 당시 대표들은 일반 국민을 신뢰하지 않았다. 국민들은 지적수준이 낮고 이성적인 판단 능력이 없으며, 교통통신이 불편하여 올바른 지도자를 직접 선출하는 것에 무리가 있다고 여겼다.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충분한 정보와 자율적인 의견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 더해 넓은 미국 땅에서 동시에 선거를 진행하기 힘들었다는 이유로 보통선거방식은 압도적인 투표에 의하여 거부되었고 선거인단 투표방식이 채택되었다. 하지만 현재의 미국은 세계를 이끌어가는 강대국이라고 칭해도 부족하지 않으며, 다양한 사람들과 세계 각지의 문화가 모인 나라가 되었다. 온 국민은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통해 모든 상황을 즉각 알 수 있게 되었고, 선거인단 제도는 현재 미국의 인구수를 봤을 때도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선거 비용과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따라서 18세기의 낡은 제도를 21세기에 맞게 고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하고 있지만, 신분과 계급이 존재했던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출발부터 누구나.
    사회과학| 2016.06.25| 5페이지| 2,000원| 조회(450)
    미리보기
  • 대중예술의 이해 - 대중예술 이론의 약사를 정리하라 (아도르노, 문화주의, 피에르 부르디외)
    - 대중예술 이론의 약사를 정리하라.대중사회는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의 출현과 연결시켜 이야기된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18세기에 산업혁명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정치 참여가 가능한 사회적 의미로서의 대중의 출현은 20세기였다. 그리고 문화에 대한 구매력을 가진 대중은 1920년대 이후에 출현하였다. 대중예술의 출현도 1920년대 이다. 대중에 대한 담론은 대중예술에 대한 담론과 출현시기가 다르다. 대중에 대한 담론은 20세기 초부터, 대중예술에 대한 담론은 1930년대 아도르노부터 시작된다.아도르노는 부정의 방식으로 담론을 전개하였다.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을 기초로 한 것인데 대중예술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억압적 작동 메커니즘을 은폐하고 그 속에서의 삶을 이상화하는 관점이 녹아있으며 대중이 이를 즐기면서 그 관점을 흡수하여 사회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못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세력이 대중을 기만하기 위해 대중예술이 사용된다고 보았다. 아도르노의 담론이 중요시되는 이유는 부정적 입장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초로 대중예술에 대한 미학적 논증을 펼친 점이다.문화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는 반대로 문화의 적극적이고 문화의 능동적인 역할을 강조하여 문화와 사회를 연결하고자 한다. 좋은 대중예술이 존재한다고 주장한 스튜어트 홀이 대표적이다. 좋은 대중예술은 특정 대중들이 공동체적으로 공유하는 보편적 가치와 경험을 해석하고 대변해 준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특정 대중들은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의 위계를 의심하지 않았다. 자각 있는 대중들은 좋은 대중예술을 선호하고 최고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본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주의의 한계는 대중예술의 긍정적인 면을 생각했지만 본질적으로 대중예술 자체가 열등하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피에르 부르디외는 현대사회에서 지배구조가 어떻게 유지되고 생산되는 지와 피지배계급이 어떻게 그들의 지위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분석하였다. 그는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위계는 지배계층의 노력의 산물이라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지배계층은 자신의 예술취향이 더 고급예술이라는 것을 사회적으로 공인받고 이를 통해 지배체제를 공고이하여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당연한 것으로 보이게 하려고 하였다. 즉, 예술의 위계는 잘사는 사람들이 억지로 세뇌한 불순한 목적의 허상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의 한계는 대중예술과 고급예술의 정의를 고민하지 않고 사회에 통용되는 관념을 적용하여 연구를 진행한 점이다.
    예체능| 2016.06.25| 1페이지| 1,000원| 조회(177)
    미리보기
  • 대중예술의 이해 - 맥도날드와 그린버그의 대중예술 이론에 대해 설명하라. 평가A+최고예요
    1. 맥도날드와 그린버그의 대중예술 이론맥도날드는 주변 환경과 무관한 사물 자체의 속성을 통한 접근을 하여 대중예술에 대해 부정적 가치를 부여하였다. 맥도날드의 대중예술을 정리하기에 앞서 대중문화와 대중적 문화를 구분을 해보면 대중문화는 대량소비를 목적으로 생산된 문화이고 대중적 문화는 의도와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문화이다. 또한 대중예술, 고급예술, 민중예술도 구분할 수 있다. 대중예술은 대량소비를 목적으로 생산된 예술이다. 대중예술은 이윤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이것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수동적인 소비자들이다. 이 소비자들은 사거나 사지 않는 것을 선택할 뿐이다. 따라서 대중예술을 만드는 자들은 이윤을 남기거나 그들의 계급을 유지하기 위해 대중의 문화 수요를 착취하게 된다. 이에 반면, 민중예술은 민중 스스로 즐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고급예술은 개인의 예술적 전망을 표출한 것이다. 고급예술은 다시 아방가르드 예술과 아카데믹 예술로 분류할 수 있다. 아방가르드 예술은 대중예술처럼 예술작품이 대량 소비를 위한 상품으로 전락하는 것에 저항하는 예술이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각 사회의 예술이 다르기 때문에 사람마다 정의가 다르며 좀 더 앞서나가는 예술이다. 아카데믹 예술은 전 세대의 성공한 예술을 따라하는 것이다.맥도날드는 고급예술처럼 개인의 예술 전망이 드러나는 예술을 좋은 예술로 여겼다. 그런데 대중예술은 개인의 예술 전망이 드러나지 않는다. 대중예술은 대량 소비가 목적이고 대량 소비를 목적으로 하면 개인의 표현성이 배제된다. 이러한 개인의 표현성이 배제된 예술을 맥도날드는 나쁜 예술로 여겼다. 개인의 취향은 제각각인데 대량 소비를 목적으로 하면 대중의 평균적 취향에 가까워지게 된다. 이 평균적 취향을 나쁘다고 생각하였다. 대중 예술이 나쁜 예술이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은 나쁜 것을 알지 못하고 나쁜 것을 알더라도 중독이 되어서 습관처럼 끊지 못하기 때문이다. 맥도날드는 사람들이 대중예술을 좋아하는 이유를 ‘악화가 양화를 몰아낸다.’는 그레샴의 법칙에 비유해 설명하였다. 대중예술 자체가 나쁜 것도 문제이지만 고급예술의 예술가들이 대중예술 같은 작품을 만들게 되므로 좋은 예술을 추구할 수 없게 된다고 말하였다. 대중예술은 사람들의 평균적인 기호에 가까워질 뿐이고 이 평균적인 기호가 고급예술에까지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예술에 대한 이중살인으로 평가한 것이다. 즉, 대중예술은 대량생산된 것이고, 대량 생산된 것은 대중의 평균적인 취향을 목표로 하며 대중의 평균적인 취향은 나쁘다. 결론적으로 대중예술은 나쁜 예술이라는 것이 맥도날드의 이론이다.대중예술을 나쁘게 본 또 다른 이론으로 그린버그의 이론이 있다. 그린버그는 모더니즘의 입장에서 대중예술을 이야기하였다. 모더니즘은 보편적이고 이성 중심의 신고전주의에 의지하지 않고 모더니티를 추구하는 것이고 모더니티는 부르주아 문명의 모더니티와 미적 모더니티로 나누어진다. 부르주아 문명의 모더니티는 과학, 기술, 산업혁명을 강조하며 당시 사회를 지배하였고 미적 모더니티는 부르주아 문명의 이성, 합리주의 ,진보, 물질주의를 혐오한 것이고 예술의 순수성을 강조하였다. 그린버그는 이러한 역사적 모더니즘 전개 과정에서 자기비판을 강조하였다. 또한, 미술에 있어서 다른 것과 구별하여 순수해지는 것은 2차원 평면에 구현되는 물질성에 주목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이야기와 이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2차원 평면 위에 선, 점, 면의 회화만이 가지는 형식미를 지키는 것을 중요하다고 여긴 것이다. 그 예로 몬드리안의 , 피카소의 등의 작품이 있다.
    예체능| 2016.06.25| 2페이지| 1,000원| 조회(442)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7
7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5
  • A좋아요
    0
  • B괜찮아요
    1
  • C아쉬워요
    0
  • D별로예요
    1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4월 16일 목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6:14 오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