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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크라이나(Украина)와 조지아(Грузия)의 NATO가입을 둘러싼 러시아와의 갈등
    우크라이나(Украина)와 조지아(Georgia)의NATO 가입을 둘러싼 러시아와의 갈등1. 서론소연방의 해체는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세력관계 및 지정학적 재편성을 가져온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1990년과 1991년에 각각 독립을 선언한 리투아니아와 조지아의 뒤를 이어 대부분의 공화국들이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렇게 도미노처럼 일어난 공화국의 독립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이 중 우크라이나와 조지아는 탈 소련 이후 독립된 국가로 러시아에 의존적인 경제구조를 개편하고, 독자성을 유지하며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지닌 하나의 완전한 국가로 성장하고자 했다.이들의 강력한 의지는 나토와 EU가입으로 표출되었고, 친 서방적인 국가 지도자의 등장으로 인해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 러시아는 과거 소연방 시절 소련의 일부 공화국이었던 우크라이나(Украина)와 조지아(Georgia)의 나토 (NATO, 북대서양조약기구)가입을 두고 예민한 반응을 보이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러시아의 영향력 행사는 과거 두 국가와의 갈등을 겪어왔던 수 많은 문제들을 다시금 제기하면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우크라이나와 조지아의 NATO가입 의사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NATO 또한 이 두나라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의지는 있지만, NATO회원국 사이의 의견 대립, 러시아의 무언의 압박 등으로 인해 NATO 가입 전망은 희망적인 상황으로 변화하지 못했다.우크라이나와 조지아는 러시아에 있어서는 잃어서는 안될 중요 국가 중 하나이다.우크라이나 같은 경우에는 러시아에서 생산된 가스가 유럽으로 통하는 길목이며, 조지아는 러시아와의 분쟁국가 중 하나로 끊임없는 갈등을 겪고 있는 국가이다.양 국을 둘러싼 러시아와의 갈등은 앞으로도 지속 될 것으로 예상된다. 본 글에서는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의 NATO가입 추진배경과 그의 경과 앞으로의 전망 그리고 러시아와의 갈등은 어떠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볼 예정이다.2.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갈등4월 초에 루마니아의 수도 부큐레슈티(Bucharest)에서 열리는 나토 정상회담에서 우크라이나 나토가입을 위한 액션 플랜 결정이 나올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이 담겨 있었다.하지만, 우크라이나 내부의 친 러시아 성향의 야당인 지역당과 공산당 의원들은 의회의 진행을 방해하는 등의 강한 불만을 표시했으며, 대외적으로는 대러 관계 악화를 우려한 독일과 프랑스의 반대로 가입 결정이 유보되었다.우크라이나 내에서는 연합여당의 나토 가입 신청은 공정하고 명백한 절차를 통해 이뤄진 것이 아니며,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은 전국적인 국민투표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결정 발언에 러시아는 강한 불만과 반대입장을 고수했다.당시의 러시아 대통령 메드베데프(Медведев)는 당선 당시 발언에서 «과거 소비에트 공화국의 일원이었던 우크라이나와 그루지야를 나토에 포함시키는 것은 유럽 안보를 위협할 수 있으며,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국가들이 러시아가 참여하지 않는 군사 블록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라고 말을 했다.당시 총리였던 블라디미르 푸틴(Владимир Путин) 역시 우크라이나가 나토 회원국으로 가입할 경우 미사일을 겨눌 수 밖에 없다는 발언과 함께 강력하게 반박하고 나섰다. 이에 더불어 푸틴은 «나토 회원국 가입은 미국의 미사일 방어체제의 일부가 우크라이나 땅에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하고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는 러시아 핵미사일 공격에 대한 무력화 전략이며, 만약 그럴 경우 러시아는 즉각 보복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이러한 러시아의 위협은 1991년 소련의 붕괴로 독립하면서 러시아에 지나치게 의존적인 우크라이나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취약한 경제부분에서의 원조를 위해 친 서방정책을 펴게 된 것에 대한 강한 불만표출이었다. 또한, 나토의 지속적인 동진 팽창을 막고 CIS 국가들의 통합을 공고히 하고자 하는 러시아의 입장에서 우크라이나의 친 서방정책 노선은 용인할 수 없는 문제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특히 친 서방세력이 주도과 공급가격인상에 대한 협상 결렬이었다.사실, 2006년 1월에도 비슷한 공급중단사태가 있었다. 당시에는 많은 유럽국가들이 일시적인 불편을 겪었으나, 과거의 경험으로 2008년에는 유럽국가들이 수 주 동안 버틸 수 있는 가스 비축량이 있었고, 우크라이나 또한 2008년 4월 초까지 사용 가능한 비축량이 확보되어 있어 즉각적인 경제 피해는 적었다.당시 상황을 보게 된다면, 우크라이나는 나토 가입에 절대적인 의지를 보이고 있었고, 러시아가 조지아 침공 당시 조지아의 편에 서서 반러, 친서방 정책을 견지하고 있었다.즉,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갈등은 온전히 가격 협상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이다.표면적으로는 이 분쟁은 가격 문제와 우크라이나를 통해 나가는 가스관의 문제 등이었지만, 이러한 문제들 내부에는 우크라이나 올리가르히(олигархи)들의 가스 거래 이권을 둘러싼 다툼을 비롯, 우크라이나 정계 친서방파와 친러시아파 간의 내분 및 친서방 노선을 걷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정치적 갈등 등이 있었다. 또한 에너지를 무기로 서방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러시아의 야심 등의 복합적인 요인들로 작용하여 가스 중단 사태를 낳게 된 것이다두 번째 갈등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 군사적 문제에서 등장한다.나토가입, 조지아 전쟁, 가스 분쟁 등으로 관계가 소원했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 세바스토폴 항에 주둔 중이었던 흑해 함대 분쟁으로까지 번지게 된다.먼저, 2008년 8월 러시아와 조지아의 전쟁이 시작된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조지아에 무기를 조달하고 있었고, 우크라이나가 조지아에 지원한 대공포가 4대의 러시아 군용기를 격추시켰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태는 미국과의 러시아 갈등을 넘어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등의 동유럽으로 확산되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후, 2009년 7월 29일 러시아 외무부에서는 모스크바 주재 우크라이나 외교관 1명에 대한 추방을 명령했다. 이 전에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 외교관을 추방한 사건이 있었다.러시아에서는 이러한 우크라이나 측의 외교적 참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것은 조지아의 꿈입니다»라는 발언을 하며 나토 가입에의 강한 의지를 보였다.2007년 1월에는 국민투표에서 국민의 77%가 나토 가입에 찬성했고, 이듬해 3월 13일, 조지아 의회는 만장일치로 나토에 가입하기로 결정했다. 이 후 조지아는 조지아는 2008년 나토 가입을 목표로 러시아가 주도하는 독립국가연합 군방장관 협의회에서 탈퇴했으며 자국에 주둔한 러시아 군을 물러가게 하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오히려 미군과의 합동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가 하면 미국과의 공조를 통해 훈련 부대를 이라크에 파병하기도 하였다.당시 조지아의 이러한 행동에 러시아는 2006년 조지아의 주요 수출품인 포도주의 생수의 수입을 금지시키는 등의 금수 조치로 응수했다.이 밖에 러시아의 국가 두마에서는 대통령과 내각에 조지아 내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 등 2개 자치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해 줄 것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채택했는데 이는 나토 가입 의사를 밝힌 조지아에 대한 노골적인 경고 조치를 취했다.2008년 3월, 러시아의 드미트리 로고진(Дмитрий Рогозин) 나토 대사는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조지아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 조지아의 나토 가입 시도가 지속된다면 러시아는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 두 자치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해야 할 것이며 그것은 조지아의 분열을 심화시킬 것이다» 라고 경고성 발언을 하였다.이 후 남오세티야 독립 문제를 둘러싸고 전면전을 겪으며 러시아와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회복 불능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 사건을 통해 사카쉬빌리 정권에 대한 반정부 시위가 계속되었고, 대∙내외적으로 NATO 가입의 추진력을 잃게 된다.하지만 2012년 조지아의 총선에서 친러 성향의 야권 정당연합이 승리를 거두며 그 동안의 친서방 정권에서 갈등을 겪어온 러시아와의 관계가 회복될 것이란 기대가 나오고 있다.야당 지도자 비드진 이바니슈빌리가 이끄는 정당연합 '그루지야의 꿈'은 NATO가입과 러시아의 협력을 동시에 추구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그 동안의지지와 함께 러시아를 강력히 비난하지만, 러시아는 국제사회의 이러한 우려를 무시하며 그 지역들에 대한 정책을 더욱 강화시킨다.결국, 조지아는 군사 행동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2008년 8월, 조지아 군과 친러성향의 남오세티야 분리주의자들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다. 이는 조지아 군과 친 러시아 성향의 남오세티야 분리주의자들의 전쟁으로 알려져있다.2008년 8월 7일, 조지아군이 분리지역인 남오세티야의 수도인 츠힌빌리(Цзинвал)에 진군하여 군사 작전을 실시하며서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러시아가 이러한 공격에 반응하여 8월 8일 국경을 넘어 남쪽 오세티야에 전차 및 야전포 등의 지상부대를 진군하여 전투가 본격화되었다.당시 러시아 대통령이었던 메드베데프는 러시아 연방군의 진군은 남오세티야에서의 러시아 국적의 민간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 일축했고, 조지아 대통령은 조지아는 러시아 침략에 대한 방어를 하고 있다고 하며 러시아군이 조지아의 민간인을 폭격하고 있다며 이는 러시아 군의 일방적인 침략행위라고 하였다.하지만, 조지아와 남오세티야의 전쟁은 8월 12일, EU 의장국인 프랑스의 중재로 끝이 나게 된다. 이 전쟁을 통해 사카쉬빌리 대통령은 조지아의 CIS 탈퇴를 선언하고, 같은 달 16일 러시아는 평화협정안에 최종서명을 하게 된다.2008년 8월 23일 러시아는 철군협정에도 서명을 하면서 군대를 이 지역에서 철수하게 되지만, 미국은 국경 인근 완충지대에 군대를 남긴 것이 협정위반이라며 반발의 목소리를 내었다.이 전쟁은 단기간 내에 끝이 났지만, 전쟁의 후유증은 점차 확대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분석되고 있다. 특히, 남오세티야 전쟁은 러시아와 서방의 힘이 각축을 벌일 수 있는 장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며, 이것이 현실화 될 경우에는 국제문제로까지 비화될 가능성이 충분할 것으로 예상된다.참고문헌서적고재남, 『구소련지역 민족분재의 해부』, (서울: 경남대학교 출판부, 1996)홍완석∙홍석우∙윤성학∙박정호, 『동과 서 사이에서: 우크라이나의 국가발전전lt
    사회과학| 2014.03.31| 9페이지| 2,000원| 조회(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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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정러시아와 소련의 종교정책
    제정러시아와 소련의 종교정책러시아는 지구 표면 육지의 약 1/6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의 러시아 공화국만 해도 약 1/7.5를 차지하는 세계 최대 영토 대국이다. 동서로 약 1만 km, 남북으로 약 4,000km에 걸쳐 유라시아 대륙의 약 40%을 점령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남북한을 다 합친 넓이의 약 100배이고 중국과 미국을 합한 것 보다 훨씬 넓다. 이러한 넓은 영토에는 다양한 기후, 식생 그리고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존재한다.앞에서 언급했듯 러시아는 다민족 사회로 민족구성이 복잡하다. 러시아 제국이 팽창하면서 여러 민족을 통합한데다가 그 후 효율적인 통치와 개발을 위해 곳곳에 많은 러시아 인들을 강제 이주 시키면서 더욱 더 복잡하고 많은 민족구성을 가지게 되었다.넓은 의미의 러시아를 생각할 때 민족의 수는 120여 개에 이르는데, 민족에 따라 언어와 종교도 달라 이질적인 요소가 많다. 우선 이들을 4~5개의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가장 비중이 큰 민족은 러시아-CIS 전 인구의 절반 정도인 1억 4천만의 대러시아 인과 4,200만의 우크라이나 인, 1,000만 가까운 백러시아 인을 포괄하는 동슬라브 족이다. 이들은 모두 러시아 정교의 종교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이들 다음으로 많은 것은 19세기에 러시아에 편입된 투르크 계의 중앙 아시아의 여러 민족들이다.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투르크메니스탄∙키르기즈스탄∙타지키스탄 인 등으로 총인구의 10%를 차지한다. 이들 외에 아제르바이잔∙타타르∙츄바쉬∙바슈키르 등 남우랄과 시베리아 지방의 여러 민족도 이 계열에 속한다. 이들은 대부분은 이슬람교 신자이다.러시아 영토의 북서부에는 옛 소련 구성원 중 가장 독자성이 강한 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 인이 산다. 이들은 가장 유럽적인 면모를 보인다. 앞서 열거한 민족들과 달리 라틴 문자를 상용하며 카톨릭이나 개신교를 믿는다. 이 밖에도 상당수의 유태인이 러시아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다. 종교는 한 민족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그 삶을 지배한다. 또한 그 신의 축복을 구체화하는 상징이었다.키예프 루시의 대공인 블라디미르(Владимир Ⅰ Великий, 978-1015)는 키예프 공국의 기독교화를 꿈꾸며 그리스 정교를 국교화 시킨다.『Повесть временных лет(원초연대기, 1111년)』에 그리스 정교 수용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블라디미르가 정교를 수용하기 2년 전 986년, 주변 여러 나라에서 여러 교파의 대표들이 블라디미를 개종시키려고 그를 만나러 온다. 먼저 유태계 하자르 인이 그에게 유태교의 장점들을 설명하며 개종할 것을 설득하지만 유태인이 예루살렘에서 추방된 이유를 듣고 흩어진 민족의 종교에서 장래성을 볼 수 없어 물리친다. 다음으로 동쪽에서 볼가-불가르 인이 이슬람교의 장점을 들고 온다. 하지만 이슬람교는 미녀를 얻는 대신 술을 마실 수 없다는 이유로 이 또한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를 분석하여 의식이 아름다운 그리스의 정교를 받아들인다. 이 전설 같은 이야기에 담긴 의미는 깊다. 당시 동서양 문화의 교차로에 서서 두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던 키예프 루시는 서양문명을 상징하는 기독교를 선택함으로써 자신을 유럽 세계의 일원으로 편입시켰다.블라디미르 대공은 그리스 정교의 국교화를 통해 자신의 권력기반 강화와 정통성의 확립, 무엇보다 문명화된 외국 지배층들과의 교류확대를 이루고자 했다. 우선, 도시에 교회와 수도원을 건립했고 점진적으로 농촌에도 건립했다. 수도원은 종교의 전도사로의 역할 뿐 아니라 국민들을 개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이렇게 키예프 루시에는 정교의 문화가 그들의 삶 속에 점점 자리를 잡고 있던 도중인 1054년에 동∙서 교회의 공식적인 분리가 로마 교회와 그리스 교회간의 교리상 차이를 확대시키면서 러시아가 서구문화로부터 격리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 사건에 더해 몽고-따따르 족의 지배로 더욱 심화된다.240년 간의 몽고 지배기는 제정러시아 사회의 모든 것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교회는 몽골의 지배에 의해 큰 손해를 받ина Ⅱ, 1762-96)에 의해 완결되었다. 1764년 교회 토지의 세속화가 시작되었고 교회의 사제는 국가의 녹을 받는 고용인으로 교회위상이 하락하게 되었다.교회는 그 후 계속적으로 국가예속으로부터의 탈피와 종교의 자유 확대를 열망하는 교회의 목소리가 1869년대부터 꾸준히 표출되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1905년 차르의 칙령에 따라 모든 시민에게 종교의 자유를 부여한다는 결과를 얻게 되었으나 혁명이 일어나면서 교회의 자유는 다시 억압되기 시작하였다.이슬람교구소련 지역에는 약 5,000만에 달하는 이슬람 교도가 존재했다. 이슬람교는 수 세기 동안 국민들의 생활, 정치, 문화 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슬람교에 대한 반종교적인 정책에도 불구하고 중앙아시아, 카프카즈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의식세계에서는 아직도 막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이슬람교가 어떻게 러시아의 영토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어떠한 과정으로 성장하게 되었는지 다섯시기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다.제 1기는 아랍에 의한 정복이 이루어진 600-800년으로, 이 시기에 이슬람교는 트랜스카프카즈 동부지역과 중앙아시아 지역에 전파되었다. 이후 계속적인 동진 정책으로 8세기에 들어 아제르바이잔과 다게스탄 남부지역의 대다수 주민들이 급속히 이슬람화가 되었다.중앙아시아 지역은 원래 불교도와 마니교도 그리고 네스토라우스파 기독교도들이 각기 지역에 나뉘어 살고 있었으나 아랍세력에 의한 정복이 시작되어 10세기 중엽까지 이슬람교는 이 지역의 유일한 종교로 정착되었으며, 이 때부터 16세기까지의 중앙아시아는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귀중한 문화 중심지로 발전하게 된다.제 2기는 무역로를 따라 이슬람교가 번창했던 시기이다. 800-1200년 사이에 이슬람 세계는 두개의 주요한 무역로가 있었다. 이 무역로를 따라 이슬람교는 오늘날의 타타르공화국이 위치한 볼가강 중류의 볼가 왕국에까지 뻗어 그 인근 지역을 모두 이슬람화시켰다. 11세기에서 12세기 사이에는 우랄 지역까지 영향을 뻗치게 되었다.제 3기는 몽골-따따르 멍에의시아로 유입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 이유는 유태인들이 러시아인 기독교들에게 독초를 사용하여 타락시킨다는 이유에서였다.19세기 유태인에 대한 차르의 정책은 '사멸', '동화', 또는 '이민' 등으로 요약된다.유태교의 역사는 유태인들이 기원전 722년에 그루지야와 아르메니아로 이주함으로 시작되었다고 기록된다. 이후 970년경에 키예프 공국에 유태인 정착촌이 형성되지만 블라디미르 대공의 기독교 수용으로 반 유태인 정책이 시작되었다.1648-49년, 1년 사이에는 우크라이나지역에서 10만에서 50만 명 정도의 유태인들이 학살을 당했고 그들의 거주지도 황폐화되었다. 예카테리나의 우호적인 종교정치로 인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게 된다.예카테리나는 러시아 사회를 서구의 계몽문화를 바탕으로 발전시키려 노력하면서 종교적 자유를 널리 인정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유태인과 러시아인 사이에 상업적인 이해가 충돌하게되고 유태인들의 거주지역이 확장되려 하자 예카테리나는 정책을 바꾸어 유태인 거주지를 건설하게 된다. 유태인은 이 지역에서만 거주할 수 있으며, 러시아 인들보다 2배의 세금을 내도록 하였다. 다시 유태인에 대한 탄압정책이 시작되면서 니콜라이 1세(Николай Ⅰ, 1825-55) 때에 가서 절정을 이룬다.유태인의 언론 검열을 실시하고 정교도들의 고용을 금지하는 한편 유태인을 개종시키기 위해 특수학교를 유태인 정착촌에 설치하기도 했다. 유태인의 상급학교 진학이 제한되었고, 시온주의가 불법화 되었다.제정 러시아내의 반 유태주의는 사회혼란기에 현실화되었고, 1918-20년 내전기에는 약 3만 명의 유태인이 학살을 당했다.소련의 종교정책소련 정부는 '신을 주장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는 레닌(Владимир Ильич Ленин, 1917-24)의 말에서 알 수 있듯, 공식적으로 무신론을 내세우고 있었다. 이는 마르크스가 종교를 아편으로 구정하고 반 종교적인 입장을 견지한 것에 근거한다.하지만, 다양한 자료에 의하면 소련 국민이 1/3이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고 기록된다. 보다도 더 엄격히 제한되었다.그러나 브레즈네프(Леонид Ильич Брежнев, 제 1서기: 1964-66/ 서기장: 1966-82/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1977-82)는 반 종교 정책을 하면서도 불편한 공존체계를 추구하였다.고르바초프(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Горбачёв, 1985-1991)는 반종교정책을 추구했으나 1987년부터는 반 종교 운동을 포기하였고, 이에 따라 언론매체들의 종교활동에 대한 보도 태도도 우호적으로 변화했다. 고르바초프는 1988년 4월 러시아 정교회 수장인 총대주교를 크레믈린에서 접견하였다. 이것은 최초의 공식적인 종교계 최고 지도자의 만남으로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이슈였다. 당시 만남에서 고르바초프는 전 시대의 종교 탄압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였고 신앙의 자유가 허용될 것임을 강조했다.그 결과 1990년 중반에 정교회 교구가 설립되거나 재개되었다.이슬람교이슬람교도 1917-19년 사이에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볼셰비키 혁명 세력에 의한 무력탄압을 받았다. 하지만 1919-28년 사이에 이슬람계 민족주의자들이 공산당에 가입함으로써 이슬람교권 공화국들에 대한 탄압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후에 와크프의 폐지, 신학교의 폐쇄 등과 같은 이슬람교 성직자들의 경제적, 문화적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규제들이 진행되었다.1928-41년에는 스탈린의 공업화 정책과 공산당 체제의 강화로 이슬람교에 대한 본격적인 박해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1968년에 들어서는 이슬람 사원의 수가 현저하게 줄어드는 현상을 보였다.브레즈네프 통치 기간인 1964-82년 사이에는 반 이슬람교 운동이 점차 약화되어 정부의 이슬람교 지도자에 대한 공식적인 공격은 사라졌고 7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하지만 1979년 이란에서의 이슬람교 혁명과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인해 다시 반 이슬람교 운동이 전개되었다.고르바초프는 초기에는 정교회에 펼쳤던 정책과 동일하게 반 이슬람교 정책을 폈으나, 후기에들어서는 우호적인 om
    인문/어학| 2014.03.31| 10페이지| 3,000원| 조회(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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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의 내용
    표트르 대제(Пётр Ⅰ Великий)의서구화(근대화)정책의 내용목 차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추진배경당시 러시아의 시대적 배경소피야의 섭정17세기 개혁가들개혁내용국가개혁 및 군사개혁경제개혁교육개혁교회개혁문화개혁개혁 정치 상징물 신도시 “상트 페테르부르크”참고문헌표트르 대제(Пётр Ⅰ Великий, 1682~1725)의 서구화 정책표트르는 제정 러시아에서 서구화 정책을 가장 구체적으로 체계적으로 실행한 차르로 평가된다.표트르는 러시아를 근대화 하고 서구화하려고 노력했던 군주이다. 귀족들을 통제하고 성직자의 권력을 줄였으며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서구의 기술을 도입했다. 또한 군대를 개혁하고 해군을 창설해 러시아를 유럽 강국의 대열에 올려놓았다.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그는 외국인 수공업자, 군인, 상인들과 교류하며 서구 문명을 접하게 되었고, 1697년에는 서구의 기술과 관습을 직접 익히려 독일, 네덜란드, 영국, 오스트리아에 파견한 사절단에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참가했다. 이 대사절단 파견은 표트르 대제가 유럽 열강과 정치 협상을 벌이고, 군사 기술이나 선박 건조 등 서구의 기술과 관습을 받아들이려고 추진한 정책이었다.그렇다면, 이러한 서구화 정책이 러시아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가 펼쳤던 서구화 정책은 어떠한 배경에 의해 시작이 되었는지, 어떠한 방법으로 실행되었는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추진배경당시 러시아의 시대적 배경17세기 후반 러시아의 사회∙경제적 생활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러시아 내에는 수공업이 발달하고 새로운 도시가 발생했으며, 최초의 제조공장들이 세워졌다. 서로 떨어져 있던 지역들 사이에는 경제적인 관계가 맺어졌으며 점차 전 러시아적 시장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외국과의 무역도 증대되었다. 1653년부터는 국민회의(전국회의, Земский собор)의 소집이 중단되었고 귀족회의(Боярская дума) 또한 드물게 소집이 되면서 전제군주제가 확립되던 시기였다.이 밖에도 대외적으로는 러시아에 대한 외국 영향이 강화되던 표트르는 다른 지역에 나가 살면서 외국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서양문물을 직접 배우고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또한 소피야는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적극적인 정책을 폈기 때문에 이 후 표트르가 닦을 러시아 근대화의 길을 예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17세기 개혁가들17세기 우크라이나와 키예프로 합병한 이후 강화되었던 서방의 영향력 중에 러시아의 문화발달에 있어 영향을 끼쳤던 우크라이나 인들과 벨로루시 인들은 예술문화와 교회 양식에, 교육 발전에 큰 기여를 한다. 그들 중에는 대표적인 인물 3명이 존재한다.첫 번째로는 시메온 폴로츠키(Симеон Полоцкий)이다. 그는 벨로루시 인으로 1656년 27세의 나이로 삭발을 하고 수도승이 된 이후에 시메온이라는 성직명을 갖게된다. 시메온은 도덕적이고 직업적인 자질 덕분에 주민들로부터 높은 신망을 얻어 교화에 힘썼다. 또한 벨로루시 어와 폴란드어로 시를 썼으며, 통합된 러시아 국가구조 내에서 우크라이나인, 벨로루시인, 러시아 인들의 통합을 주창한다. 그의 명성으로 인해 그는 모스크바로 초대된다. 1664년부터 모스크바 행정 부처에서 일할 사람들을 교육시켰다. 이 때 시메온은 자신의 작품에서 차르의 가문을 찬양한 최초의 궁중시인이기도 했다. 이후 시메온은 로마노프 왕가의 자손들에게 교육을 시작하게 된다. 그 중 표도르(Фёдор, 1676~82)와 소피야(Софья, 1682~1689)는 최초 서구식 교육을 받은 군주들이다. 이로 인해 그들의 치세기간 중 서방식으로 개혁을 진행하려는 새싹이 자라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두 번째로 기억해야 할 문화 전파자는 아나파시 라브렌티예비치 오르딘-나소킨(Анафасий Лабрентьевич Ордин-Нащокин)이다. 오르딘-나소킨은 프스코프 귀족으로 17세기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가 중에 한 명이었다. 1658년 그는 외무성 총독이 되었고 이때부터 그는 서유럽 국가들과 동방 국가들과의 경제적∙문화적 관계의 확대를 위해 노력했다. 또한다.1718~1729년의 개혁은 이반 4세(Иван Ⅳ Грозный, 1547~84)시대에 만들어졌던 성(省, приказ)를 폐지하고 위원회(коллегия)를 도입했다. 외무위원회는 대외정책을 담당했고, 육군위원회는 지상군을, 해군 위원회는 함대를, 사법위원회는 민사와 형사 재판을, 광산위원회는 광업산업을, 제조 위원회는 제조산업을 관장했다. 이 전의 성(省, приказ)과는 달리 이곳에서의 결정은 집단적으로 채택되었다. 다시 말해 이 위원회는 제국 통치원 아래에서 국가의 여러 분야에서의 행정을 맡은 여덟 개의 부서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 부에 다시 3~5명으로 구성된 운영위원회를 두어 행정력이 한 개인에 집중되는 것을 막았다.이 위원회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총칙과 각 위원회의 규정들이 생겨났다. 또한, 프레오브라젠스키 프리카스(Преображенский приказ)는 반역죄 등의 국가 범죄를 담당했다. 이는 후에 비밀관청으로 변하게 된다. 이 관청은 황제직속기관이었다.1714년 표트르 대제는 궁정귀족 지주와 세습귀족의 지주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장자상속에 관한 칙령에 서명한다. 이 서명을 통해 세습귀족과 관직귀족간의 경계를 제거하려 한 것이다. 이 후 이 두 개의 귀족계급은 토지 소유에 관한 차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1722년에는 관직에서도 구 귀족과 신 귀족간의 경계가 제거된 관등표(Табель о рангах)를 채택했다. 새로운 법에 따르면 봉직은 궁정, 민간, 군사업무로 나눠졌다. 이로서 14등급의 관직이 정리되었다. 민간분야에서는 위원회의 서기에서부터 총무에 이르기까지, 군사분야에서는 하사관에서 장군까지, 해군에서는 하사관에서 제독까지 등의 등급으로 나뉘었다. 8급의 관직을 부여 받은 모든 관리들은 세습되는 궁정귀족이 된 것이다. 관리들은 자신의 봉직에 대한 대가로 봉토와 농노뿐 아니라 금전적인 봉급도 받았다. 이러한 제도는 출생에 관계없이 신분상승의 기회를 주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매우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기회였다엽까지 30개의 수공업 공장만이 있었는데, 1725년경에 이미 200개 이상의 수공업 공장이 있었다. 이러한 공장 수의 증가는 군대를 소총 무기와 포병으로 혁신해야만 할 불가피성 때문에 초래된 것이었다. 이 결과 수공업 공장의 주요한 형태는 광산과 금속, 무기 공장이 주요한 모습이었다. 이 시기의 러시아 공장제 수공업은 유럽에서 스웨덴과 영국 다음으로 금속 생산으로 유명한 세 번째 국가가 되었다.그 밖에 경제 개혁에서 가장 중요한 표트르의 혁신책은 그 동안 세금 부과하는 방식이었던 가구세를 폐지하고 인두세로 바꾼 것이었다. 이는 농민과 농노들이 한 지붕 밑에 모여 살아 과세를 피한다는 것을 알고 바뀐 것이었다. 그 밖에도 늘어나는 재정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관∙수염∙꿀벌∙목용탕 등에까지 이르는 모든 물품에 간접세를 부과하였다.그 중 술과 소금에 부여한 간접세가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였다.표트르의 경제 개혁 중 마지막인 화폐 개혁이다. 화폐 개혁은 북방전쟁의 결과로 현금 부족에 직면하게 되어 이루어지데 되었다. 1700년 표트르는 네르친스크(Нерчинск)의 은과 납의 광산 개발을 허락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구리를 포함한 새로운 종류의 돈을 만들었다. 1711년 새로운 화폐 개혁을 계획했고 그 과정에서 동전 속의 은의 함량을 약 20%가량 낮췄다.이렇듯 표트르 1세의 화폐와 세금의 개혁은 국고를 세배나 증대시켰다. 하지만 이것은 국민들에게서 착취한 대가로 이루어진 것이라 후에 많은 원성을 사는 계기가 된다.교육개혁표트르 대제는 그의 일생 동안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당시 러시아는 숙련된 사람이나 전문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18세기까지 러시아에는 교회학교 밖에 없었다. 그러나 표트르의 명에 의해 어린이들이 기초 지식을 배울 수 있는 세속적인 산술학교가 1701년에 설립되었다.또한 항해학교와 포병학교 및 공병학교, 해양아카데미와 같은 군사학교를 세웠고, 공장 지대에는 숙련공을 길러 내는 기술학교를 세웠으며, 병원에는 부속 의학학교를 세 인들에게 턱수염은 러시아 정교를 신봉하는 신자로써 종교적 신앙과 자기 존경의 기본적 상징이었다. 턱수염을 깎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자 표트르는 스스로 자신의 턱수염을 깎았고, 스스로 면도기를 들고 측근 고관들의 턱수염을 깎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성직자와 농민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턱수염을 깎아야 한다는 법령마저 실시했다. 만약 수염을 기른다면 조세를 내야 했다.표트르는 재단사들에게 구식의 러시아 의복을 만드는 것에 대한 금지를 지시했다. 특히 러시아 귀족들이 즐겨 입는 외투의 긴 옷자락을 자르게 했으며, 재단사들에게 유럽식의 의복을 입게 했다.이어 차르는 유럽에서 러시아로 새로운 형식의 교제와 오락을 반입하여 정착시켰다. 1718년에는 '야회(夜會, ассамблея)'라는 독특한 사교모임을 열도록 하였다. 이 모임에는 고관, 장교, 성직자, 부유한 상인 등이 초대되었다. 무엇보다도 여기에 여성들도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주로 야회에서는 상류사회의 담화, 최근의 소식에 대한 논의, 춤과 공연 등이 있었다.지배층의 생활관습의 혁신은 세태풍속의 좋은 품행의 규율에 대한 특별한 참고서가 필요할 정도로 컸다. 그리하여 독일어로 된 책이 번역∙출판되었는데, 이는 젊은이들의 행실을 규정해 놓은 ≪젊은이들의 교훈서≫(Юности честное зерцало)였다. 내용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장화를 신고 춤을 추지 말 것, …… 손수건에다 큰 소리로 코를 풀지 말 것, 손가락으로코를 후비지 말 것, 손으로 입을 훔치지 말 것, 손가락을 핥지 말 것, 음식 앞에서는 머리를긁지 말 것, 쩝쩝 소리를 내며 음식을 먹지 말 것. 왜냐하면 이와 같은 행위는 농민들이나하는 짓이기 때문이다"이를 통해 젊은 귀족들의 행실을 서유럽화시키고자 했다. 하인들 앞에서 젊은 귀족들이 외국어로, 특히 프랑스어로 말하는 것이 권장된 것도 이 때부터였다.개혁 정치의 상징물 신도시 "상트 페테르부르크(Санкт-Петербург)"표트르는 자신의 개혁 정치를 상징하기 위해 172
    사회과학| 2014.03.31| 12페이지| 5,500원| 조회(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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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옐친의 대내외정책
    옐친의 대∙내외정책(Внутренная и Внешняя политика Ельцина)옐친 (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Ельцин)1.1 옐친의 생애 (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Ельцин, 1931년 2월 1일~2007년 4월 23일)보리스 옐친은 우랄산맥(Уральские горы) 부근 부트카(Бутка) 촌 농가에서 태어나 공업도시 스베들로프스크 주(Свердловская область)에서 성장하였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옐친은 어릴 적 매우 가난한 삶을 살았다.그의 아버지는 건설노동자로 전신했다가 다시 집단 농장(Колхоз)으로 돌아왔다. 그의 집은 너무 추워 보온을 위해 집에서 기르는 산양을 끌어안고 자야 했을 만큼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하지만 옐친은 학교에서는 언제나 우수한 성적을 받는 우수학생이었다. 중학생 때는 친구들과 수류탄을 훔쳐 분해하는 일을 하다 수류탄이 터져 손가락 두 개를 잃기도 했다.1955년 그는 우랄 지역에 있는 카로프공과대학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 토목기사증을 받아 토목기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이 후, 옐친은 1961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 공산당에 입당해서도 우랄 지역의 주택건설공단에서 건설부장의 일을 역임하고 있었고, 당에서도 승진이 계속되었다.이러한 그의 정치적 성장은 수슬로프(Михаил Андреевич Суслов)와 브레즈네프(Леонид Ильич Брежнев)가 뒷받침 하고 있었다.하지만 소련 공산당 내에서의 그의 정치적 입지는 고르바쵸프의(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Горбачёв) 절충개혁 정책을 비난함으로써 잠시 줄어드는 듯 보였으나, 1990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 소비에트 의장이 되었고, 그 해 7월 12일 공산당에서 탈당하였다.그로부터 1년 뒤 1991년 6월 12일 러시아 연방 최초의 대통령 선거에서 57.30%의 득표율로 7월 10일 러시아 연방의 제 1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이후 재선에도 성공하여 1991년부터 1999년까지 러시아 연방을 이어진 8인의 비상사태 위원회들은 옐친과 러시아 공화국 지도자들을 검거하려 했으나, 이들은 이미 러시아 공화국 의사당으로 피신해 있었고, 의사당 주변에는 옐친 지지자들이 속속 모여 들었다.8월 20일 오후, 주요도시에서 총 인원 80만이 참여하는 반 쿠데타 집회와 시위가 전개되었다. 모스크바에서는 옐친, 레닌그라드에서는 시장 솝차크(Совчак)의 주도 하에 각각 20만 규모의 쿠데타 규탄 집회가 열렸다. 군대는 이 시위를 적극 봉쇄하지 않았고, 일부 병사들은 시위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그날 밤, KGB 특수부대에서 러시아 공화국 의사당을 공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다음날 새벽, 전차부대가 의사당으로 진격해 들어왔고 의사당 앞의 시민들은 인간사슬을 만들어 탱크에 저항했다. 이로 인해 5명의 청년이 사망했지만, 시민들은 방어태세를 굽히지 않았다.의외의 사태로 전개되는 상황에 비상사태위원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 사태에 미국 정보기관 또한 동조하여 옐친을 도왔고, 옐친은 저항을 총 지휘했다. 8월 21일 오후가 되자 비상사태위원회 중 7명이 모스크바 탈출을 기도하고,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푸고가 자살하면서 쿠데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사실, 이들은 초기 군 통제와 언론을 장악하지 못한 이유가 가장 큰 실패의 원인으로 나타났다.우선 쿠데타 군의 의사당 진입시도는 좌절되었고 쿠데타 군에 대항한 러시아 장갑부대가 국회 의사당 보호를 위하여 모스크바 시내로 진입하였다. 당시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 옐친은 탱크 위의 연설이 전 세계 방송과 러시아 라디오를 통하여 전달되었고, 이로써 고르바쵸프의 시대가 끝나고 옐친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이 연설은 옐친을 일약 스타로 만들게 되었고, 민주주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다.옐친의 국회의사당 공격사건1991년 쿠데타 진압 이후 러시아 공화국의 실질적 권력은 옐친에게 있었지만, 의회와 행정부 내의 보수세력은 옐친 행정부의 개혁에 반대하였다. 특히 부통령 루츠코이(Александр Владимирович Руцкой)와 하 Всевоподович Гайдар)1992.06~1992.12제 1부총리 3인, 부총리 6인, 24개 부옐친 집권 2기체르노미르딘(Виктор Степанович Черномырдин)1기1992.12~1996.08제 1부총리 1인, 부총리 7인, 22개 부2기1996.08~1998.03제 1부총리 3인, 부총리 8인, 24개 부키리옌코(Сергей Владиленович Кириенко)1998.04~1998.08부총리 3인, 22개 부, 국가위원회 11개, 연방위원회 2개, 연연방국 17개프리마코프(Евгений Максимович Примаков)1998.09~1999.05제 1부총리 2인, 부총리 3인, 24개 부, 국가위원회 13개, 연방위원회 2개, 연방국 17개스테파신(Сергей Вадимович Степашин)1999.05~1999.08제 1부총리 2인, 부총리 3인, 24개 부(무인소 2인, 내각 사무총장 1인 포함), 국가위원회 11개, 연방위원회 2개, 연방국 15개푸틴(Владимр Владимирович Путин)1999.08~1999.12(~2000.04: 대통령권한대행)제 1부총리 2인, 부총리 3인, 28개 부, 국가위원회 10개, 연방위원회 3개, 연방국 14개표 SEQ 표 * ARABIC 2 옐친기 내각개편의 결정요인과 성격대통령총 리내각개편의주요 결정요인성향∙성격의회와의관계옐친 집권 1기가이다르▷ 대통령과 의회 간 권력 갈등▷ 의회에서의 임명 부결급진개혁갈등∙대립옐친 집권 2기체르노미로딘▷ 정책조정과 제정과의 타협▷ 의회와 행정부간 권력관계▷ 집권 2기 출범과 신내각 구성▷ 옐친의 정치적 견제점진개혁중도성 지향조정∙타협키리옌코▷ 친정체제 강화 의도▷ 정책 실패에 따른 문책소장 개혁테크노크라트갈등∙대립프라미코프▷ 제정파간 타협▷ 옐친의 정치적 견제중도∙좌파적성향의 연립화합∙조정스테파신▷ 조각과정에서의 불협화음 내재▷ 선거정국의 대두▷ 크렘린 패밀리의 영향과도기적충복내각소강∙답보푸틴▷ 옐친의 정치적 선택정권재창출 및 선하고 있던 상태의 기업들이 사유화되고 가격결정이 시장에 맡겨지면서 물가가 급등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기록에 의하면 1992~1993년 사이 물가가 166배로 치솟는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이 기록되었고, 경제체제가 마비되면서 생산이 격감하여 1990년을 100의 수치로 할 때 1993년의 국내 총생산은 64의 수치로 떨어졌다.또한 공업생산은 절반 수준으로 격감했고, 실업자가 2,000만을 헤아리고, 국민의 90% 이상이 절대 빈곤선 이하로 전락했다.집권 2기 (1996년~1999년)정치새 헌법의 채택과 발표는 러시아 연방공화국이 ‘러시아 제 2공화국’의 시기에 접어들었음을 말해준다.옐친이 집권 2기를 맞이하면서 펼친 정치부분은 1996년 대통령 선거에 중심을 두고 설명하고자 한다.새 헌법의 채택으로 대통령의 권한을 더욱 강화시킨 옐친은 1996년 6월 16일 대통령 선거에 임하게 되었다.집권 1기에서도 보여진 그의 정치적 성향은 선거를 앞두고 다시금 등장하게 된다. 옐친은 과거 자신에게 유리한 정책을 펼치는 정치가들을 등용한 후 자신의 목적이 달성되었거나, 자신의 목적에 달성할 수 없으면 가차없이 내쳐버리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1996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옐친은 ‘민주개혁’을 내세우는 것보다는 보수주의와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것이 유리하다는 계산을 하게 된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는 자신의 측근에 민족 이익을 앞세우는 프리마코프(Евгений Максимович Примаков)를 외무장관에 강경 민족주의자인 예고로프 (Николай Дмитрович Егоров)를 대통령 행정실장으로 기용했다.또한, 기업의 사유화 정책으로 성장한 기업인들을 자신의 지원 세력으로 끌어들였다. 거기에 더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언론매체들을 이용했다. 그 결과, 옐친에 대한 지지도는 3월부터 1위로 올라서게 되었다.1996년 6월 16일에 예정대로 대통령 선거는 실시되었다. 이 선거는 제 1차 선거라고도 분류되는데 이 선거에서 옐친은 유효투표의 35.28%를 얻어 1위의 자리를91년 가을에 '서구, 특히 미국이 우리를 돕는다'라는 논리하에 친미적인 러시아의 외교정책이 공식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94년 1월 클린턴은 미국 대통령 취임이 후 러시아를 방문하고, 옐친과 더불어 '모스크바 선언'을 발표했다.선언의 내용은 탈냉전의 세계적 분위기 속에 평화를 더욱 확산시키기로 다짐했던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장거리미사일을 상대국과 그 동맹국들에 겨냥 배치하지 않는 다는 합의를 담고 있었었다.1994년에는 옐친이 미국을 답방하고 클린턴과 더불어 유럽의 안보문제를 논의했다. 여기서 제 2단계 핵무기감축협정(START Ⅱ)의 일정을 앞당겨 핵탄두를 해체하기로 합의했으며, 러시아군과 나토군 사이에서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하기로 합의했다.이처럼 러시아의 새로운 친 서구적 외교정책 전략은 코질레프 장관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그는 서구 지도자들로부터의 도움에 대한 기대와 서구의 정치적 공간으로 러시아의 참여 정책을 역설하였다.또한, 이러한 정책은 군사적 이익 보다는 러시아의 경제적 부흥에 주요 관심을 두면서 추진 된 것으로 외교 정책이 국내 정치에 도움을 주는 도구로써 인식한 것이었다.하지만, 이것은 미국과의 비슷한 대외정책을 펼친 것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또한 존재했다.3.3.2 아시아∙태평양 지역1993년에 채택된 신 헌법과 함께 대통령 중심적 외교정책이 수립되는데 이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자율적 다변화 외교전략이 실현화 된다.1992년 12월부터 1993년 12월까지 기간에 해당되는 시기에는 서구지향적인 외교 정책 노선을 지속하면서 동양에 대한 기대치가 증가되고 있던 시기이다. 이러한 현상은 서구지향적 정책이 러시아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하면서 자국이 속해있는 유라시아 대륙적 지정학적 상태와 국제정치에 있어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역할이 증대가 될 것으로 생각되면서 시작된 것이다.당시 소련의 국제적 지위를 이어받았던 러시아는 혹여나 자신들의 국제적 영향력의 상실을 우려했기 때문에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대한 관심을 더욱 가지01/1
    사회과학| 2014.03.31| 20페이지| 4,500원| 조회(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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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슬라브 민족의 역사적 분화와 러시아의 역사
    러시아 정치문화 및 대외 정책성격형성의 “歷史的” 조건슬라브 민족의 역사적 분화와 러시아 역사목 차슬라브 민족의 역사적 분화과정슬라브족의 분화대러시아, 소러시아, 백러시아“키예프 루시”의 노르만 기원설과 슬라브 기원설노르만 기원설슬라브 기원설러시아 역사 개관키예프 루시속령 러시아모스크바 대공국제정 러시아러시아 혁명소련참고자료슬라브 민족의 역사적 분화과정슬라브 민족의 분화슬라브 인에 대한 확실한 정보는 서기 1-2세기에 살던 로마의 역사가 플리니우스와 타키투스, 그리고 6세기 비잔틴 제국의 역사가 프로코피우스, 고트 족의 역사가 요르다네스의 저서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슬라브 인은 베네디, 안테스, 스클라베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프로코피우스는 슬라브 인에 대해 “그들은 초라한 움막에서 서로 멀리 떨어져 살고 있으며 거주지를 자주 바꾼다”라고 설명한다.슬라브인의 기본 생업은 화전 농업과 목축이었으나, 어로나 수렵, 양봉기술도 갖추고 있었다.2-4세기에 고트 인이 남하하면서 슬라브 인의 거주지를 공격하자 슬라브 인은 동과 서로 나뉘었다.이어 4-5세기에 훈 족의 공격을 받은 슬라브 인들의 한 무리는 다뉴브 강 하류를 거쳐 발칸 반도의 비잔틴 제국으로 들어가게 된다.그 뒤 훈 족이 제국이 붕괴하면서 슬라브 인은 서로는 엘베 강에서, 동으로는 발트 해 남동부와 드네프르(Днепр) 강 상류 전역으로 진출했다.이러한 분화과정을 겪으면서 슬라브 인들은 세 갈래로 나뉘어진다.하나는 서쪽으로 흘러 들어가 로마 카톨릭을 받아드리며 서 유럽권에 통합되었다. 이는 오늘날의 폴란드〮체코〮슬라바키아 인이 이에 속한다.남서쪽으로 이동해 발칸 반도에 정착한 남 슬라브인들은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불가리아 인이 되었다. 그리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러시아 평원에 정착한 것이 동 슬라브족이다. 동 슬라브족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벨로루시가 해당된다’.동 슬라브족동 슬라브족은 러시아인으로 9세기 말에 노르만족이 정복하여 노브고로드(Новгород) 공국과 키예프(Киев) 공국을 세웠다나온 문자 그대로, 러시아인이 노르만족의 한 부족 혹은 한 집단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루시라는 집단은 스칸디나비아 자체에서도 발견되지 않으며, 서유럽에도 전혀 알려진 바 없는 집단이라는 점이 발견되어 노르만 학설에 대항하였다. 아랍의 몇몇 저술가도 루시 인들은 슬라브족의 한 부분이라고 저술하고 있다. 슬라브 기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노르만 인들을 국가 형성과정에서 배제시키고 싶지만, 류릭(Рюрик), 올레크(Олек), 이고리(Игорь), 올가(Ольга) 등 공후들의 이름이 노르만 계통이고 올가의 아들인 스뱌토슬라프(Святослав)에 와서야 슬라브식 이름이 나오기 때문에 노르만 기원설을 완전하게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러시아 역사 개관유럽 동부와 아시아에 걸친 다민족 국가 러시아의 역사는 주로 유럽에 속한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아시아로 확장한 것은 17세기경이었다. 러시아는 1917년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으나, 1991년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은 해체되었고 현재의 러시아가 탄생하였다.키예프 루시(Киевская Русь)고대(Древняя Русь)키예프 루시가 형성되기 전 러시아의 초기 역사는 기원전 13세기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에 흑해 북부에 살고 있단 킴메리 족은 기원전 8세기경에 중앙아시아에서 온 스키타이 족에 정복당했다. 스키타이 족은 기원전 3세기경까지 흑해 북부 지역을 지배하다가 사르마티아 족의 공격을 받아 사르마티아 족의 지배를 받거나 다른 곳으로 밀려났다. 스키타이 족과 사르마티아 족은 흑해 북부 연안에 있던 그리스 식민지들과 무역〮결혼 등을 통해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그리스 식민지들은 이러한 관계를 통해 스키타이 족과 사르마티아 족에 그리스와 로마의 생활 방식을 전파했다.3세기경에 이르러 게르만족 일파인 고트족이 사르마티아 족이 살던 지역을 정복해서 370년경에 훈족에 참패할 때까지 지배했다. 훈족의 제국은 지도자인 아틸라가 453년에 죽은 뒤에 분열했고 그 뒤 아바르 족이 6세기 중엽부터모스크바의 지배자로 군림하며 동북 러시아를 통일하여 오랜 공국시대를 마감하고 러시아를 중앙집권 국가로 만들었다. 또한 이반 3세는 1497년 러시아 농노제의 법적 기초를 마련하였다.이반 4세 (Иван Ⅳ Грозный 1533~84년)1547년 섭정을 끝낸 이반 4세는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대관식을 갖고 차르(Царь)로 즉위했다. 이반 4세는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모스크바 공국을 중심으로 러시아를 통일했다. 이반 4세의 통치는 흔히 전〮후반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 말한다. 전반부에는 능력있는 군주의 특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후반부에는 폭군의 특징이 두드러진다. 대공 대신 '차르'라는 칭호를 공식으로 채택하였으며, 오프리치니나(Опричина) 제도를 도입했다.또한 아스트라한과 카잔에서 몽골 타타르와 싸워 영토를 차지했으며, 그 후에는 우랄산맥을 넘어 시베리아 서쪽을 정복하였다.동란의 시대 (Смутное время) : 1598~1613년이반 4세가 죽은 뒤 차르의 자리를 계승할 사람이 없자, 권력을 거의 갖고 있지 않은 일종의 의회인 젬스키 사보르(Земский Собор)가 보리스 고두노프(Борис Годунов, 1598~1605년)를 차르로 선출했다.보리스 고두노프가 차르가 된 후 연이은 냉해와 혹한으로 대기근이 찾아오고 두 명의 가짜 드미트리(Лжедмитрий)를 비롯 차르와 왕자를 참칭하는 자가 여럿 나타났으며, 대규모 반란, 러시아 국토의 유린 등이 발생하였다. 이를 «스무타(Смута)» 즉, 동란시대로 일컫는다.1610년 폴란드는 모스크바를 점령한다. 폴란드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어가는 가운데 각지에서 농민〮카자흐〮귀족〮사족〮상인들이 일어나 해방군을 결성하고 모스크바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폴란드 군은 빈약하게 무장한 해방군을 무참히 짓밟고 크렘린을 점령한다. 하지만 포자르스키 공작이 이끄는 러시아 해방군은 1612년 10월 폴란드 군을 항복시킨다.1613년 전국회의가 소집되어 미하일 로마노프(Михаил Романов, 1613~16451853년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서 크림전쟁(Крымская война, 1852~56년)이 일어난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오래 전 오스만 제국에서 빼앗은 영토를 일부 포기해야 했으며, 흑해 주변에 군함과 요새를 주둔시킬 수 없게 되었다.그리하여 러시아는 아시아로 눈을 돌려 아시아 팽창정책을 펴기 시작한다. 1858년과 1860년에는 처와의 조약으로 아무르(Амур) 강 북쪽과 우수리 강 동쪽 땅을 획득했고, 1865년부터 1876년까지 중앙아시아로 군대를 파견해 영토를 확장했다. 1867년에는 알래스카를 720만 달러를 받고 미국에 팔아 넘긴다.알렉산드르 2세 (Александр Ⅱ) : 1855~81년알렉산드르는 크림전쟁 중 죽은 니콜라이 1세를 이어 즉위한다. 알렉산드르 2세는 즉위한 직후에 크림전쟁에서 패하자, 러시아가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려면 서유럽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하여 그는 경제와 생활 수준을 향상하려고 개혁에 착수한다. 1861년에는 농노를 해방하고 철도 부설, 은행제도를 만들었다.또한 교육제도 개혁을 촉진하고, 언론에 대한 통제를 줄였으며, 배심원제도를 비롯해 사법제도에 여러 개혁 조치를 도입했다. 마지막으로 도시와 농촌에 자치정부를 세웠다.대다수 젊은이들은 알렉산드르 2세가 취한 개혁 조치에 만족하지 않았다. 사회주의 체제를 확립하고자 하는 혁명 단체도 있었고, 헌법 제정과 공화국 건설을 원하는 사람도 있었다. 1870년대 중반 급진적인 혁명 집단인 나로드니키(Народники) 가 농민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선동했다. 나로드니키는 사회주의나 무정부주의 체제를 만들고자 했다.이러한 나로드니키의 노력이 실패하자, 나로드니키의 일파인 다른 세력에서 차르 암살을 여러 번 시도한다. 모든 게 실패로 이어지지만 1881년에 상트 페테르부르크(Санкт-Петербурк)에서 테러리스트의 폭탄에 암살당하고 만다.알렉산드르 3세 (Александр Ⅲ) : 1881~94년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의 죽음을 목격한 알렉산드르 끝난 후 스탈린은 독일 동부와 동유럽에 공산국가를 세웠다. 그리고 동유럽 국가들과 서방의 관계를 차단하고, '철의 장막'이라고 하는 통신〮무역〮여행에 대한 장벽을 세웠다. 이 시기 이후 세계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진영으로 나뉘어진 «냉전(Cold war, Холодная война)»의 시대가 도래한다.흐루시초프 (Никита Сергеевич Хрущёв) : 1953~1964년1953년 스탈린이 죽고 흐루시초프가 권좌에 앉는다. 스탈린보다는 훨씬 개방적인 정책을 펼쳤고, 1956년에는 평화 공존의 원칙을 발표해 서방의 관계를 개선했다. 또한 1956년 2월 25일 제 20차 당 회의에서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을 강하게 비판했고 이 비밀보고는 미국 국무부가 영문으로 전문을 발표하여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흐루시초프의 평화 공존론과 스탈린 비판은 국〮내외에 큰 파장을 일으킨다. 하지만 스탈린 비판을 통해 더욱 입지를 굳힌 흐루시초프는 개혁 프로그램을 힘있게 밀고 나간다. 1958년 3월, 흐루시초프는 수상까지 겸하며 막강한 권력을 장악했다.또한 그는 우주 탐험에 많은 비용을 들여, 이 무렵인 1957년 10월 4일, 소련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Спутник)을 쏘아 올리는 데 성공했다. 뒤이어 1961년 최초의 유인 우주선을 발사하여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Юрий Гагарин) 일약 세계의 저명인사가 됐다. 미사일 개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이어 우주개발에서도 소련이 미국을 앞서게 된다.1960년 5월 미국 첩보기 U-2기의 소련 영공침입 격추사건이 일어나면서 흐루시초프의 평화공존 노선은 난항에 부딪힌다. 미〮소간의 가시 돋친 설전이 오가는 가운데 동서대립의 상징인 베를린에서 위기가 발생하고 1961년 8월 동서 베를린을 가르는 장벽이 생긴다. 베를린, 핵실험, 군축문제 등 위기를 내포한 현안들을 두고 힘겨루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1962년 가을 카.kr
    인문/어학| 2014.03.31| 18페이지| 4,500원| 조회(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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