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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숫타니파타 - 불교 최고(最古)의 서적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불교서적인 숫타니파타는 일종의 ‘말 모음집’이다. ‘숫타sutta'는 말의 묶음, '니파타nipata'는 모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여타 종교와는 다른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신(GOD)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다. 세계적으로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 흰두교와 같은 대중적인 종교와 더불어 불교는 존재하고 있는데,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구도적 관점에서 신을 바라보고 있다. 불교의 다신교적 특성을 제외하고도, 불교는 ’나(I)‘라는 존재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숫타니파타는 이를 아주 쉽게 설파하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붓다(Buddha) 즉, 부처는 깨달은 자라는 일반명사로 하나의 존재만 있는 유일신이 아니다. 이것은 흰두교의 다신교적 특성을 보여주지만, 흰두교와 다른 점은 ‘나’라는 존재가 신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수련을 쌓고 깨달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구도자’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 지점에서 바로 불교라는 독특한 종교의 특징이 설명된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부처가 된다는 것이 ‘신'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기본적으로 기독교에선 신은 무한(Infinite)한 존재를 뜻하는데, 이와 반대로 유한(finite)한 존재인 인간이 설정되어 있다. 무한한 존재와 유한한 존재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존재하는데, 이는 정확하게 관념과 현실을 구분하는 잣대로 사용될 수 있다. 시공간의 세계인 코스모스(cosmos)에서는 무한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가령, 똑같은 공간에 내가 동시에 존재할 수 없으며, 현재의 나는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신은 무한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초월해 있으며, 이는 신이 코스모스의 시공간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식으로 규정된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은 오직 관념적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흡사 플라톤이 이야기한 이데아(idea)와 같다. 관념적으로 나는 현재정신만으로 교감을 한다거나, 돌아가신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결국 상상력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조작된 세계이거나, 최소한 현실적 세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코스모스를 초월하는 인간이 있다면,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이는 이미 인간이 아니라 신이라고 할 수 있다.따라서 순간의 행복을 위해 관념의 세계에서 사는 것은 인간에게 큰 위안을 줄 수 있으나, 현실의 세계에서 이것은 오히려 독이 된다. 왜냐하면 결국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시공간이 존재하는 현실의 세계에서 평생을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실적 제약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일평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러한 물음에서 출발하는 것이 바로 불교라는 종교이다. 그래서 싯다르타(Siddh?rtha)는 관념적 물음이나, 사후세계에서 대해는 침묵하거나 비판을 했다. 싯다르타에게 있어서 관념적 세계는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오히려 독으로 작용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가 고민한 것은 관념적 세계인 미래가 아니라 현재였다.숫타니파타는 싯다르타가 현재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해야 하는 것들을 제자나, 중생들에게 설파한 것을 모은 것인데, 싯다르타는 ‘나’라는 존재에 고통을 주는 것들과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크게 행동 여섯 가지와 마음 다섯 자지로 이를 나눌 수 있는데, 행동은 업/무지/식별/접촉/움직임/음식으로, 마음은 물질/느낌/망상/집착/마음의 동요로 구분할 수 있다. 종국에선 이러한 행동과 마음을 다스리면 바른 지혜를 얻게 되고, 이를 통해 누구나 부처 즉, 깨달은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부분에서는 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수행자들이여.....그대들이 거룩하게 출가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여러 가지 진리를 듣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하고 누가 묻거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라. ‘두 가지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라고.....두 가지란 무엇이냐고 한다면, ‘이것은 괴로움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이다.’ 하는 것이 첫째 관찰이고, 이것은 괴로움은 업에 따라 생기는 것이다’하는 것이 첫째 관찰이다. ‘그러나 업을 남김없이 끊어버리면 괴로움이 생기지 않는다.’ 하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모든 괴로움은 무지/물질/식별/접촉/움직임/음식으로 인해서 생긴다.’ 하는 것이 첫째 관찰이다. ‘그러나 무지/물질/식별/접촉/움직임/음식을 남김없이 없애버리면 괴로움은 생기지 않는다.’ 하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여기서 말하는 관찰은 인간에 대한 관찰이자, 인간 욕망에 대한 관찰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욕망을 버리라는 식으로 이를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소유라는 개념이 중요한 것은 소유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소유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나의 상태를 깨닫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정스님은 이를 ‘무소유’라는 개념으로 이야기한바가 있다. ‘무’라는 것은 소유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소유를 인정하고 나의 소유 욕망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싯다르타는 중생에게 단 하나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것이다. 욕망을 버리는 것은 독각의 수행법을 통해 이룩할 수 있는 경지이기 때문이다.“홀로 행하고 게으르지 말며비난과 칭찬에도 흔들리지 말라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한 편의 시처럼 전해지는 싯다르타의 가르침은 무소의 뿔처럼 하나의 방향성을 말해주는데,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데 많은 이유로 흔들리고, 무너지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마냥 흔들리고, 넘어져 있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보조국사 지눌은 ‘사람은 넘어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야 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인간이기에, 신이 아니기에 인간은 타인의 비난이나 칭찬에 흔들리며, 소리에 놀라며, 그물에 걸리고, 진흙에 더렵혀진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이러한 고난 속에서 오직 혼자의 힘으로, 홀로 이를 이겨내고 혼자서 가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의 약하고, 고통 받고 있는 중생에게 싯다하는 것이다. 언뜻 보면 간단해 보이기까지 한다. 단순히 마음만 평안하다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행자는 마음이 평안해야 한다. 밖에서 고요함을 찾지 말라. 안으로 평안하게 된 사람은 고집할 것이 없다. 하물며 버릴 것이 있으랴.” 하지만 마음의 평안을 언제나 유지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직장에게 듣는 상사의 핀잔, 부모님에게 듣는 잔소리, 친구들의 칭찬 등등. 나를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칭찬과 비난이 생길 때마다 동(動)하는 마음의 물결이 나를 휘감았을 때, 이미 나는 번뇌의 바다에 있는 것이다.그래서 어떤 이들은 마음의 평화를 가져가기 위해 산으로 바다로, 조용한 곳으로, 인적이 드문 곳으로 여행을 가거나, 시간을 보낸다. 그곳에서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마음의 안정이 온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렇지만 이는 단순히 착각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평생 그곳에서 머물러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국 사람과 사람 속에서 살아가고, 그 속에서 웃고, 울고, 말하고, 듣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그러니까 열반으로 이르는 과정은 평화로운 장소가 아니라 시끄럽고, 왁자지껄한 장소,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는 그곳이어야 한다.지눌이 말했던, ‘나’가 넘어졌던 그곳에서부터 모든 것은 시작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넘어졌던 곳이 무서워 돌아가거나, 뒤로 가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임제스님의 말씀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수처작주 임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서 있는 곳마다 주인공이 되면 이르는 곳마다 참되리라.” 매 순간, 순간마다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싯다르타가 말한 무소의 뿔과 그 맥이 닿아있다.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한편으론 멋있어 보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고독하며, 고통스럽다. 주인공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거나, 나쁜 사람을 무찌르기도 해야 한다. 여기서 선택의 문제가 등장한다. 주인공의 삶을 선택할 것인지, 조연의 삶을 선택할 것인지 말이다.물론 조연의 삶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의 문제이다. 부모님의 기대, 친구들의 기대, 연인의 기대, 선생님의 기대 등등 속에서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살고 있는지, 아니면 남이 원하는 것을 원하는 것인지 분명하게 해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이런 상황을 두고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타인의 욕망 속에 감춰진 나의 욕망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면 내 인생에서 주인공은 될 수 없다. 심지어 내가 선택한 주인공 혹은 조연의 삶이 내가 원해서 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이러한 점 때문에 싯다르타는 속박, 집착을 벗어버려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바라본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싫어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모르는데, 어떻게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현자는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본다. 그들은 ‘연기(緣起)’를 보는 자이며, 행위와 그 결과를 잘 알고 있다.” 또한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종국에는 원인과 결과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업(業)”이라고 말한다. 현재 발생하는 사태는 과거의 업을 이유로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업을 과거의 관점에서만 보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즉 과거에서의 잘못을 통해 현재의 굴레가 결정된다는 의미로만 업을 바라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업은 현재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현재의 나의 행위, 행동이 미래의 사태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는 미래에 대한 결정은 바로 현재에서 생기는 것이 업의 참모습이다. 때문에 있는 그대로 현재를 바라보고 행동하는 나라는 주체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는 임제스님이 말씀하신 어느 곳에서나 삶의 주인이 되는 주인공의 삶과 그 맥이 닿아있다. 과거의 잘못은 현재를 규정하지만, 현재의 잘잘못이 미래를 결정한다는 것은 다시 말하자면,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독후감/창작| 2017.04.29| 5페이지| 1,000원| 조회(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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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몸과 삶이 만나는 글쓰기 -고미숙>
    몸과 삶이 만나는 누드 글쓰기 -고미숙인류의 언어를 상상해보자. 상대방에게 소리를 냈다. 배고프다. 아프다. 즐겁다. 위험하다 등등의 갖가지 나의 심리를 상대방에게 전달했다. 이것이 점차 발전하면서 최초의 말하기가 탄생했다. 지금의 동물이 내는 소리가 그 출발이었음은 분명하다.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아이의 울음소리는 발생되는 음성은 비슷하지만, 상황에 따라 의미가 변한다. 더 많은 것을 표현하고 더 많은 것을 말하기 시작한 인류는 드디어 언어를 발명한다. 최초의 언어가 태동하고 나서 말하기가 쓰기로 확장된다. 또한 최초의 말하기 과정에서 어떤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누군가가 쓰기를 하고자 하는 욕망을 표출하였고 지금 사용하고 있는 언어가 발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의사소통은 크게 4가지로 구분되고 있는데,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가 있다. 듣기와 읽기가 이해의 영역이라면 말하기와 쓰기는 표현의 영역이다. 즉 말하기와 쓰기가 없다면 듣기와 읽기는 생성될 수 없다.그렇다면 말하기와 쓰기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인간은 의외로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말을 할 때 인간의 사고는 멈춰 있다고 느낄 정도이다. 외국어를 배우다 보면 그 자체가 더욱 확연하게 느껴지는데, 외국어와는 다르게 모국어를 사용할 때 의자를 보면서 우리는 의자라는 단어를 생각해내지 않는다. ‘의자가 어제보다 하나 더 있다’고 했을 때, ‘-보다’와 같은 문법적인 방향성을 고민하고 문장을 완성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의자가 어제보다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하고 문장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생각이 있기 때문에 말하기가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말하기가 있고 생각이 진행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언어의 한계가 의식의 한계’라고 이야기하였다. 인간의 언어가 진행되는 한계가 바로 인간의 의식이 진행되는 경계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말하기와 쓰기는 경계가 만들어진다. 쓰기는 이와는 반대로 생각이 존재해야 만들어지기 때문이다.생각을 한다는 것, 그리고 이를 정리하는 것이 바로 쓰기인 것이다. 흥미롭게도 쓰기의 이런 점은 곧 말하기와 연결된다. 쓰기를 통해 정리된 생각들은 체화되어 말하기에서도 사용되며, 이러한 나의 생각을 모으고 붙이면 나의 경계가 만들어진다. 유명한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생각을 말하고 쓸 수 있다는 것, 어떻게 하면 이를 잘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적이다. 즉 제목에서와 같이 몸과 삶을 통해 나만의 글쓰기에 도달하는 것이다. 단순히 글쓰기의 기술적인 부분이 아니라 글에 쓰게 될 내용과 글을 쓸 수 있는 힘을 기르는 방법에 대한 내용들이 기술되어 있다. 글을 쓸 수 있는 힘을 기른다는 것은 곧 나를 키우고 나를 성장시킨다는 것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나만의 글쓰기를 한다는 것을 말한다. 힘을 기르지 못하면 나만의 글쓰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만의 글쓰기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인생의 순환은 단선 레일 위를 유유히 달리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조건이 만나는 틈새로 새로운 복수의 길을 여는 과정이다. 인생은 그렇게 주체와 조건이 중층으로 얽혀 있는 다차원의 세계이다. 넓고 평평한 도로와 비포장도로가 섞여서 나타나기도 하고, 막다른 골목과 틈새의 길이 동시에 주어지기도 하며, 갈림길인가 하면 어느새 길이 모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삶이란 알다가도 모르고 잡힐 것 같으면서도 종잡을 수 없는 것. 그러므로 눈을 뜨면 역설이요, 감으면 모순인 인생의 길들은 그 자체로 지극히 정상적인 순환의 논리 안에 들어와 있는 셈이다. 따라서 자신의 삶을 보고자 한다면 뫼비우스의 띠 같은 이 모순과 역설의 논리를 익혀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힘을 스스로 터득하는 것, 즉 사주명리를 혼자 힘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자신만이 알 수 있다. 자기 자신만이 그 복잡한 조건과 더불어 운명을 통찰할 수 있으며, 다양한 변수와 대면에서도 그 맥락과 서사를 엮어 낼 수 있다.”즉 나의 인생에서 생기는 물음에 대해 어떻게 나만의 답을 내리고, 결정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이다. 하지만 글쓴이는 길게 고민할 것 없이 오직 자신만이 그 답을 알 수 있으며, 그에 대응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끊임없이 유혹에 빠지는 나를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계발서를 읽는 이유도 이로 설명이 가능하다. 성공한 사람들의 이유를 나도 똑같이 따라해 실패 없는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가는 힘을 기르기 위해선 삶에 직면해야 됨을 직시할 필요성이 있다. 삶에 직시한다는 것은 나로써 살아가고, 나로써 행동하는 삶을 말하며, 이를 위해선 나의 인생을 책임진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주인’으로써 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주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남을 노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에 주인으로 행세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당연한 것으로 보이지만, 현실에서 이는 간단하지 않다. 현실에서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스스로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운명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결과로 이어지는 촘촘한 원인망을 살피고 주어진 결과를 몸으로 수용하는 일이다. 즉 모든 인과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만약 부모님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직장 상사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권력자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나에게는 무슨 일이 생길까? 자유에 대한 갈망을 한낮 반항이라고 치부하고 있다면 그것은 자유에 대한 오해라고 할 수 있다. 자유는 인간이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는 당연한 결과물이 아니라 치열하게 쟁취해야 하는 매듭의 결과이자 끊임없이 숙고해야 되는 과정의 일부이다. 주인이 된다는 것은 곧, 자유로운 인간이며, 그리스인 조르바에 등장하는 조르바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나를 옥죄는 것에 대한 탈출이 아니며, 끊임없는 투쟁의 시작이자, 과정인 것이다. 부모님에게 나의 이야기를 못 한다는 것, 직장 상사에게 나의 이야기를 못 한다는 것, 권력자에게 나의 이야기를 못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주인의 삶을 살아가지 못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몸으로 수용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나의 말을 하고 나의 생각을 글로 그대로 쓸 수 있음을 의미한다.그러므로 무언가를 감당할 수 있다는 용기가 바로 몸을 쓴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나의 눈을 통해 직접 보고, 나의 귀를 통해 직접 듣고, 나의 몸을 통해 직접 느끼고 이를 말과 글로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글쓴이는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 스스로 타자를 찾아 나서지 않으면 내 구원은 언제까지나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이 피곤함. 이것이야 말로 개운이다.” 여기서의 타자는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무나 바다가 될 수도 있고, 음악가에게는 악기, 애완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동물,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음식이 될 수 있다. 나와 연관된 모든 것이 바로 타자이며, 그 중에서도 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바로 나를 설명해주는 타자인 것이다. 즉 스스로 타자를 찾아 나서지 않으면 그 누구도 대신 찾아주지도 않으며, 설령 찾아준다고 해도 그것은 진정한 나만의 타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독후감/창작| 2016.11.15| 3페이지| 1,000원| 조회(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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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위버멘쉬가 등장하기 우리는 바란다.” 차라투스트라가 신이 죽었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선/악에 대한 부정을 말하고 있다. 선/악을 넘기 위해 차라투스트라는 끊임없이 길을 떠나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지혜를 전달한다. 그렇다면 선(good)과 악(evil)을 넘는 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좋음(good)과 나쁨(bad)라는 감정으로 가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선과 악에 대한 모든 명칭들은 비유일 뿐이다. 그것들은 암시를 할뿐, 분명하게 말해주는 것이 없다.” 인간은 어린 시설부터 학교에서 도덕에 대해서 교육받는다. 도덕의 범주는 이분법을 통해 사회의 옳고, 그름을 나누는 잣대로 작용한다. 때문에 도덕을 지키면 착한 사람, 혹은 올바른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도덕을 어기면 나쁜 사람,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여기서 선과 악에 반대편에 있는 개념이 있다. 바로 좋음과 나쁨이다. 선과 악이 교육을 통해 인간이 얻는 ‘이성’이라면 좋음과 나쁨은 교육이 아니라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감정’이다.회사 사람들과 점심에 중국집에 갔다고 해보자. 모두가 짜장면을 시켰다. 하지만 나는 볶음밥을 먹고 싶다면 나는 무엇을 시킬까? 아니 일차적으로 우리는 왜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것인가? 마음과 생각의 괴리가 생기는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것과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감정’이라면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이 바로 ‘이성’, ‘도덕’이라고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가 선과 악을 넘어야 한다고 했던 것은 ‘이성’, ‘도덕’에서 벗어나 나의 감정을 바탕으로 살라는 뜻인 것이다.선/악, 좋음/나쁨이라는 4가지 상황이 있다고 했을 때, 선=좋음, 악=나쁨의 경우는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문제는 선=나쁨, 악=좋음의 경우의 수가 발생했을 경우이다. 다시 말해 사회적으로 선이라고 규정하는 일이 나는 싫고, 악이라고 규정된 일이 좋을 경우이다. 가령 모든 사람들이 공무원이 좋다고 하지만(선), 난 공무원 되는 것이 싫다고 했을 때(나쁨) 결국 나는 무엇을 선택하게 될까?아주 단순한 문제인 것 같지만, 선택은 쉽지 않다. 여기서의 선택은 단순히 이성vs감정에 대한 선택이 아니라 사회vs나에 대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내적으로 이성vs감정에 대한 선택에서 감정을 선택했다고 하더라도 외적으로는 아직 ‘사회’가 남아있는 것이다. ‘사회’는 가깝게는 부모님, 친구, 친척 등이 있고, 멀리는 사회의 통념과 시대적 가치가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신이 죽었다고 말하면서 ‘위버멘쉬’를 기다린다고 말했다. 위버멘쉬는 사회적인 모든 가치와 판단, 통념을 이겨내고 좋음(good)을 실천하고 나쁨(bad)을 멀리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위버멘쉬가 되기 위해 차라투스트라는 세 변화에 대해서 말해준다. ‘낙타-사자-아이’의 변화이다. 낙타는 선/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사회의 가치, 타인의 가치에 끌려 다니는 존재이다. “짐깨나 지는 정신은 그렇게 묻고는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짐이 가득 실리기를 바란다.”, “짐깨나 지는 정신은 이처럼 더없이 무거운 짐 모두를 짊어진다. 그러고는 마치 짐을 가득 지고 사막을 향해 서둘러 달리는 낙타처럼 그 자신의 사막으로 서둘러 달려간다.” 낙타가 매고 다니는 짐은 낙타가 원해서 매는 짐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서 짊어지게 된, 짊어져야만 하는 짐이다. 그래서 더없이 무겁고, 힘들다.낙타의 정신은 사자의 정신으로 변화한다. “정신은 이제 자유를 쟁취하여 그 자신이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즉 사자는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성난 의지를 가진 정신이다. 낙타가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는 자조적인 삶에서 살아간다면 사자는 ‘나는 하고자 한다.’는 전투적인 자세로 삶에 임한다. 그리고 사자는 세상으로부터 자유를 강탈하는 포효를 이룩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사자의 정신도 어린아이의 정신이 되어야 한다.“어린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거룩한 긍정이다. 그렇게 형제들이여,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거룩한 긍정이 필요하다. 정신은 이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의욕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어린아이가 망각과 창조의 놀이를 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했다. 망각은 무엇인가?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관념에 대한 해체인 동시에 새로움에 대한 받아들임이다.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상, 생각, 관념은 시간이 지나면서 화석화된다. 즉 구조화되는 동시에 선입견으로 자리 잡는다. 즉 공고히 자리 잡은 인간의 의식화 구조를 허물어뜨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 망각인 것이다. 망각을 통해 인간은 창조성을 발현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길거리에 떨어진 돌멩이를 돌멩이로만 여기는 것과 그것을 가지고 공기놀이를 하는 것의 차이는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는 새로운 시작, 창조의 놀이의 정신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세계의 획득인 것이다. 또한 차라투스트라는 ‘의지는 창조하는 자’라고 말했다. 즉 어린아이의 정신은 의지의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이러한 의지, 창조는 결국 위버멘쉬의 모습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신을 죽임으로써 나를 발견하고, 나의 의지를 통해 사회에서 원하는 낙타의 정신이 아니라, 나의 의지로 살아가는 어린아이의 정신을 바탕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위버멘쉬 말이다. 위버멘쉬는 또한 외롭고, 고독한 존재이기도 하다. 독립된 상태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버멘쉬는 그 길을 걸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더없이 행복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낙타의 정신에서 타인의 존재는 나를 속박하는 존재이지만, 어린아이의 정신에서 타인은 같이 마주보고 창조의 놀이를 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독후감/창작| 2016.02.09| 2페이지| 1,000원| 조회(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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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명우의 <세상물정의 사회학>을 읽고
    - 노명우이 책은 세속을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라는 물음에서 출발한다. 사회학자의 눈에 세상은 처세와 용기의 앙상블이 필요한 곳이었다. 처세는 '세상과 교류하는 방법'을 말하는데, 세상과 교류하기 위해서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비판적인 시각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세상물정의 사회학에서는 이를 '팔자타령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삶에 대한 개인의 생생한 느낌과 때로는 냉정한 사회학이 균형을 이루는 시도에 세상물정의 사회학'이라는 이름을 부여한다......비판이란 본래 투덜대지 않으면서도 세상에게 불만을 말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러한 비판 고유의 능력은 세속이라는 리얼리티와의 용감한 대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에겐 용기가 필요하다.' 라고 말하고 있다.책에서는 용감한 대면의 출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 세속, 평범성, 좋은 삶을 위한 공격과 방어의 기술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결국 세속을 산다는 건 결국 평범한 우리의 삶에서, 세상의 공격에 맞서 나를 방어하고 적절한 타이밍에 맞춰 세상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망치지 말고 세속의 굴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 있다. 비판은 가까운 거리의 유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자본주의 밖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밖에서 이루어지는 비판은 냉소주의에 빠질 뿐이고, 냉소주의에 빠져 있는 것은 비판하는 대상을 정확하게도, 바로 볼 수도 없다고 할 수 있다.먼저 세속의 리얼리티, 그러니까 우리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현상은 어떤 것이 있을까? 책에서는 프랜차이즈에 대한 내용으로 이를 정리하고 있다. 프랜차이즈 식당은 우리 삶의 구석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그 수가 너무도 많고 광범위해서 외국에서도 한국 음식을 한국에서 먹는 비슷한 맛으로 느낄 수 있다. 조지리처의 에서는 '사람들은 맥도날드라면 의외의 제품을 제공받을 일이 없으라라고 믿기 때문에 편안함을 느낀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을 에서는 편안함의 요인 즉, '표준화'로 말하고 있다.표준화된 건물, 표준화된 옷, 표준화된 음식, 표준화된 생각, 표준화된 문체, 표준화된 음악 등등, 종국에 이르러 표준화된 생각과 사고로 이어지는 우리의 삶에서 표준화가 아닌 다른 것을 보기는 매우 힘들다. 세상 모든 것들이 표준화되는 상황에서 생각이 다르고, 의식이 다르게 되면 우리는 별종 취급을 받는다. 게다가 흥미롭게도 표준화된 세상은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편안함을 준다. 외국 여행을 갔을 때, 한국에서 본 음식, 물건을 보면 우리는 새로움이 침해당했다는 느낌보다 안도감을 느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표준화가 주는 안정감과 편안함은 교육된 것일 뿐만 아니라 이미 삶 깊숙한 곳까지 안착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다음으로 삶의 평범성의 부분에서 나, 너, 그리고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그 중 가족의 문제는 이를 모두 포괄하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가족은 나라는 개인이 접하는 최초의 사회임과 동시에 너라는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환경이기 때문이다. 책의 이 부분을 보다 문득 자주 듣는 말 중에 하나가 생각났다. '가족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결혼하고 아이가 있는 가정을 가진 부부끼리 자주한다는 말이었다. 가족은 어떤 존재이기에 ‘가족끼리는 이러는 거 아니다’라는 말이 나왔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권위주의 국가는 섹스를 쾌락이라는 욕망과 분리시켜 국가와 민족을 위한 재생산이라는 틀 속에 가둔다....권위주의는 여성을 어머니로 칭송하는 방법을 통해 섹스를 도덕화한다. 라이히는 여성을 어머니로 만드는 무성적 과정에 개입하는 권위주의의 장치를 이렇게 분석했다. "쾌락을 위한 성행위는 여성과 어머니를 타락시키는 것이고, '창녀'는 그 쾌락을 긍정하고 추구하며 사는 여성이다. 반동적 성정치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성을 생식의 목적에 봉사할 때만 도덕적이라고 보는 것이며, 따라서 생식의 범위를 넘어서는 성은 비도덕적이라는 관점을 가진다는 데 있다." 즉 권위주의적 사회에서 가장 도덕화된 여성인 어머니는 섹스를 탐하는 여자일 수 없다.사회적 분위기에 따른 섹스는 욕망과 감각을 무시하고 섹스를 오로지 동물적 생식의 수단으로만 인식하게 되는데. 이것이 확장되면 이른바 가부장제 사회의 섹스의 프레임이 완성된다. 그런데 프레임은 남자와 여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고, 여자에게 불리하게 적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남자에게는 권력이나 남성성의 상징이 되지만, 여자에게는 오로지 억압과 '어머니'라는 이름의 타락을 불러온다. 지금까지의 사회가 남성의 우월성을 도모하기 위한 방향으로 간 것을 생각해보면, 결국 여성은 남성에 의해 피해를 받는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어머니라는 존재, 혹은 어머니가 될 존재는 쾌락을 부정하고, 오로지 도덕적인 관념안에서만 섹스를 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독후감/창작| 2014.12.09| 2페이지| 1,000원| 조회(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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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란츠 카프카 <성>을 읽고
    프란츠 카프카베스트 백작의 성에 당도한 k. k는 여관에서 잠을 청하다 자신을 깨우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납니다. 쉬바르처는 k에게 '이 마을은 성의 영지입니다....누구든 백작님의 허가 없이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은 k는 자신이 성에 초대로 온 측량기사라는 말은 합니다. k를 깨운 성의 집사 아들 쉬바르처는 에 확인 전화를 하고 첫번째 전화를 통해 k라는 측량기사를 에서 초대한 사실이 없다는 것을 듣습니다. 하지만 잠시 뒤, 다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k는 조용히 귀를 귀울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성에서 그를 측량기사로 임명했던 것이다.' 은 갑자기 k를 측량기사로 임명한 것입니다.그리곤 바르바나스라는 클람의 심부꾼에게 '존경하는 귀하께 ! 귀하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귀하는 영주이신 백작의 성에서 일하도록 채용되었습니다.....본관은 언제나 가급적 귀하의 요청에 응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고 있을 것입니다.' 라는 편지를 받게 됩니다. k는 이 편지를 통해 클람이라는 사람이 자신이 측량기사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의 일을 명확하게 알기 위해서 성의 관료들이 있다는 헤렌호프(herrenhof)를 찾습니다. 이곳은 성의 관료가 마을에 오게되면 머무는 여관이었는데, k는 이곳에서 클람의 정부 프리타라는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프리다가 클람의 정부라는 것을 알게 된 k는 그녀에게 호감을 보이고, 프리다는 더 노골적으로 k에게 호감을 표시합니다.'주인이 방에서 나가기가 무섭게 프리다는 스위치를 비틀어서 전등을 꺼 버리고 목로 밑에 있는 k 옆으로 와서 드러누웠다. "내 사랑! 그리운 내 애인!".....두 사람은 서로 껴안았다. 여자의 작은 몸은 k의 품안에서 불타고 있었다. 두 남녀는 마치 넋 잃은 사람처럼 두서너 발짝의 거리를 둘러서 돌았다.....거기서 두 사람의 호흡은 하나로 합쳐졌고, 심장의 고동조차 하나가 된 채 몇 시간이 흘렀다. 그러는 동안 k는 길을 헤매고 있는 듯한, 또는 일찍이 아무도 가본 적 없는 타향에 발을 디뎌 놓은 듯한 기분에 휩사였다. 이 타향에서는 모든 게 너무나 달라서 숨막힐 지경이지만, 이곳의 어리석고 의미 없는 유혹에 사로잡혀서 계속 방황하며 걸어갈 수밖에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k와 프리다의 사랑은 과감하고 정열적인 모습입니다. 그들의 사랑은 두 가지 점에서 비약을 보여줍니다. 첫번째는 교감의 방법이고 두번째는 자유에의 의지입니다. 인간이 타인과 하는 모든 촉감의 교류는 교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감은 감각을 교류하고 나누고 느끼는 것을 말하는데, 인간이 교감을 나누는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스킨십입니다. 서로 만지고, 애무하고, 느끼고, 교류하는 과정을 통해 연인은 사랑을 극대화하고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 연장선상에 키스와 섹스가 이루어집니다. 보통 스킨십을 말할 때 단계라는 단어를 같이 사용하는데, 손을 잡고, 키스를 하고, 섹스를 하는 순서를 말할 때 사용하게 됩니다.그런데 k와 프리다의 방식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단계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계적인 접촉이 아니라 동시적인 접촉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애무에 있어서 가치의 상대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손을 잡는 것이 키스하는 것보다 낮은 가치에 있고, 키스하는 것이 섹스하는 것보다 낮은 가치에 있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 더 확장하면 사랑이 깊어져서 키스를 하고 섹스를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사랑이 깊어져야만 깊은 스킨십을 해야된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연인끼리 하는 스킨십에 수직적인 가치를 두기 때문입니다.수직적인 가치판단은 k와 프리다의 동시적인 접촉을 통해 발휘되는 수평적인 관계에 반대되는 속성을 띄고 있는데, 수직적 가치는 기존의 위계질서와 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손을 잡고 있는 커플은 이미 키스를 하고 있고, 섹스를 하는 교감을 나누고 있습니다. 각각의 사랑 표현은 에너지가 발휘되는 양의 차이가 다를 뿐 사랑의 테두리에서는 이미 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 손을 잡는 것이나 키스하는 것, 서로 만지는 것, 섹스하는 것은 수평적 사랑의 행위 측면에서는 모두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접촉을 수직적인 의미에서 받아들이게 되면 k와 프리다와 같은 동시적인 접촉이 아닌 단계적인 접촉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단계적 접촉의 문제점은 교감의 수위에 따라 사랑의 가치를 판단하는데 있습니다. 애무와 접촉, 교감은 사랑이라는 동일한 가치만을 가질 뿐 그 안에 상하의 관계는 필요가 없습니다. 손을 잡고 있는 그 순간부터 연인은 이미 키스도 하고 섹스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손을 잡고 있지 않는 연인에게서는 사랑을 느낄 수 없습니다. 반대로 손을 잡고 있는 연인에게는 사랑을 느낍니다. 손을 잡지 않는 부부가 키스도 섹스도 하지 않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이것은 손을 잡는 것이 스킨십의 첫번째 단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감이라는 은밀한 사랑의 표현이 없다면 접촉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k와 프리다의 동시적 접촉은 이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감에 필요하는 것은 단계가 아니라 접촉 그 자체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키스와 섹스가 손을 잡는 것보다 강렬한 이유는 에너지가 강렬하기 때문입니다. 키스를 하는 에너지와 섹스를 하는 에너지가 다르기 때문에 몸이 그 강렬함을 기억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이것이 사랑의 깊이와 척도를 가늠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 이야기 했던 것처럼 손을 잡는 것, 키스하는 것, 만지는 것, 섹스하는 것은 연인끼리 교감을 나누는 하나의 방법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다음으로 자유에의 의지는 프리다에게 나타납니다. 사실 k가 프리다에게 접근한 것은 온전한 끌림이 아닌, 클람의 정부라는 요소에 기인합니다. 하지만 프리다가 k에게 접근한 것은 이와 다릅니다. '자기 두 손으로 프리다를 안고 있는 것은 더없이 행복했으며, 또한 너무나도 행복하기에 불안하기까지 했다. 프리다가 그를 떠나간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 같은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리다도 k의 동의를 얻어 더욱 힘을 얻은 듯 주먹을 불끈 쥐고 문을 두르리며 말했다. "저는 토지측량사와 함게 있어요! 토지측량사 곁에 있어요!" 이제 클람은 조용해졌다......"우리 둘 다 끝장이요.""아뇨"프리다가 말했다. "저만 끝난 거예요. 하지만 전 당신을 얻었어요."'
    독후감/창작| 2014.12.09| 3페이지| 1,000원| 조회(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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