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2 고려시대사고려사회의 시기구분과 고려중기론 정리201xxxxxxx ○ ○ ○목 차Ⅰ. 서론Ⅱ. 2시기 구분Ⅲ. 3시기 구분Ⅳ. 4·5시기 구분Ⅴ. 고려중기론Ⅵ. 총평 및 결론I. 서론한 사회의 발전과정에 대한 인식은 시기구분으로 총괄한다. 따라서 사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사회발전의 과정을 알려면 시기를 유의 깊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고려사회의 변화와 고려중기론의 논문의 요약을 위해선 고려시대의 시기구분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고려의 세부 시기구분은 2시기 구분, 3시기 구분, 4·5시기 구분 등 여러 구분이 있지만 필자의 논문을 바탕으로 고려시대의 세부시기 구분에 대해 알아보고 고려중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알아본다.II. 2시기 구분고려의 변화를 구분할 때 가장 일반적인 것이 12세기의 어느 시점을 분기점으로 잡아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는 방식이다. 민족주의 사학의 관점으로 묘청의 반란에 주목하여 이 사건을 계기로 전기와 후기로 나누기도 하며, 민족주의 사학의 관점과는 다른 시각으로 12세기 변화에 주목하여 시기를 구분한다. 또한 지배세력의 성격과 변천을 중심으로 사회의 발전을 파악하려고 하여, 인간을 계층 집단으로서 파악하고 그들의 위치와 성격을 사회구조 속에서 분석하려고 하였다. 무신정변의 신분사적 의미를 강조하며 무신정권을 기점으로 구분하기도 한다.III. 3시기 구분고려사회의 변화를 2시기 구분만으로 변화를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워서 시기를 더 세분했다. 전기 말 또는 후기 초로 처리되던 12·13세기를 묶어 사회의 동요기 또는 귀족사회의 분열과 상극기라고 파악하였고, 고려를 전기·후기로 나눠 설명하는 것에 중기를 추가하여 파악하였다.이밖에 왕실의 혼인유형의 변화를 연구하여 이성후비가 부각되는 현종대부터 무신집권기까지 중기로 구분한 견해도 제시되었다.IV. 4·5시기 구분2시기구분론을 보다 세분하여 전기는 성립기와 발전기, 후기는 무신집권기와 그 이후의 시기로 나뉘어진다. 두 번째 단계가 중기로서 고려사회의 전체적 성격을 규정하고, 후기의 전형인 네 번째 단계가 전기체제 해체 내지 신흥사대부의 개혁모색기라고 파악했다. 그 밖에 정치세력 결집양태도 비슷하게 분기설정을 했고, 견해마다 시기를 앞당겨 나누는 구분하는 견해도 있다. 문화론 관점에서는 다섯시기가 있으며 사상사적 시각을 강조한 견해는 불교사 연구에서 한층 구체화 되었다. 한편, 토지제도, 관계의 추이를 고려해서 시기구분이 나뉜다.V. 고려중기론고려는 12세기 들면서 지배체제의 모순으로 사회, 부세제도, 토지제도, 지방제도와 신분계층 질서를 변화시켰다. 또한 자연재해를 극복하고 생활조건을 개선시키려는 노력들이 다각도로 추구되었으며 그 일환으로 생산기술상으로 진보가 이루어졌다. 농업생산력에 대해서는 자료가 부족해서 경지이용방식을 중심으로 연구되었다. 지배층은 원간섭기 동안 원을 배경으로 지배체제를 강화했고, 농민들은 유망이라는 소극적 저항을 하였다. 또한 지배질서는 중앙지배층 사이에서 문벌화 경향이 강화되고 호부층에 의한 자율적 향촌지배의 바탕이 된 사회경제적 상황이 달라지면서 12세기 무렵부터 동요하였다.중기를 설정한 선행 연구들은 그 시점 파악에서 성종대, 현종대, 문종대, 12세기 초 등 다양하였고 몇 시기로 구분하느냐 또는 무엇을 변화 기분으로 삼느냐에 따라서 달랐다. 고려사회의 변화를 세 시기로 구분해 본다면 10~11세 전기 지배구조의 성립과 발전, 12세기~초 13세기중반 중기 사회 변화와 항쟁, 13세기 말~14세기 후기 지배구조의 재편과 한계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기 구분이 안고 있는 한계는 많다. 고려중기가 사회변화와 민의 항쟁기로서 역사성을 갖추고는 있다 하더라도 전·후기 구별되는 독자적인 지배세력 또는 지배구조를 추출해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에는 아직 답하기 어렵다. 그리고 지배세력의 추이와 신분제 변화에 주목하여 선행 연구에서 부각시켰던 무신집권기의 특징들이 상대적으로 묻혀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러한 한계들이 아니라도 역사의 다양한 면모들을 정밀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글에서 제기한 시기구분이 선행의 다른 구분방식들과 병존하면서 상호 보완되어야 하고, 앞으로 또 다른 관점에서 다양한 시기구분론들이 제시되어야 한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다.Ⅵ. 총평 및 결론이상으로 고려시대의 시기구분별 간단한 논지와 대요를 살펴보았으며 필자가 고려중기를 어떻게 논하는지 알아 보았다. 고려시대 시기구분은 다양한 관점에서 파악한 학설들이 정말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각각의 학설들마다 시기를 구분하기 위해서 사회경제사, 역사의식의 변천, 정치사, 지배집단 유형의 변천 등의 나름의 화두를 가지고 접근하였는데, 시기를 구분 짓는다면 시기별로 상황이나 분위기, 환경 등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여줄 수 있는 화두로 접근해야 된다. 참신한 시기구분론들이 많이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역사의식의 변천이나 농업기술, 왕실의 혼인유형 등으로 시기를 구분하는 것은 특정 화제의 변천을 설명할 수 있을 뿐이지 시기별로 확연히 구분되는 상황이나 분위기 등은 잘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왕실의 혼인유형과 같은 특정 화제에 초점을 맞춰 시기를 구분하는 것 보다는 사회경제사적, 지배집단의 유형 등에 초점을 맞춰 시기를 구분하는 것이 좀 더 고려를 일반적으로 시기 구분하는데 합당하다고 한다.시기의 상황과 분위기를 살펴보려면 그 시기의 행위자들을 살펴봐야 되는데, 고려시대에는 행위자가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확연히 구분되어져 있다. 그래서 지배층의 변화와 피지배층의 변화를 통합적으로 살펴 시기를 구분한다면 좀 더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각각의 시기가 만들어 질 것이다. 간략하게 정리를 하자면 먼저, 제1기는 고려개국 후 성종대까지로 예측 할수 있다. 새로운 국가가 개편되면서 지방세력으로서 나말여초기의 사회변동에 주체적인 역할을 했던 호족이 자리를 잡고, 백성들은 새로 개편되는 국가에서 취민유도 정책으로 통일신라 말기보다는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된다. 제2기는 경종원년부터 무신정변까지로 구분한다. 경종대를 특별히 잡은 이유는 전시과의 형성 때문이다. 전시과 제도를 통해서 지배층은 경제적인 기반을 형성하게 되고, 이것을 기반으로 앞으로 관료층이 고려사회에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백성은 전시과 제도로 인해 수조권적인 지배체제로의 편입이 더욱 강화되고, 이로써 사전의 개념도 더욱 발달한다. 제3기는 무신집권기로 천대받던 무반 계열이 득세하게 되고, 피지배층의 변화는 무력에 기초한 정치지배를 받으면서 국가기강이 떨어지고 사회가 혼란하면서 농촌경제가 파탄한다. 반면에 무인계층에서 노비출신이 많았던 점이 피지배층의 신분 상승의 기회가 새로이 생기면서 고려사회의 신분질서를 흔들었다고 볼 수 있다. 제4기는 원간섭기이다. 이 시기에 지배층은 무신계열에서 부원배 등이 자리 잡고 있는 권문세족으로 바뀌고, 피지배층은 대농장으로 인해 극심한 수탈을 겪는다. 제5기는 말기로 고려가 멸망하기까지이다. 이 시기에는 신흥무인세력과 신흥사대부가 등장하여 실권을 장악한다. 그리고 피지배층은 제4기 때의 수탈이 공민왕의 전민변정도감으로 개혁되는 듯 하였지만, 이 개혁이 실패하고 대농장화가 다시 추진되면서 고려가 멸망하기까지 수탈로 인한 어려운 삶을 영위한다.
I. 머리말 11세기 중엽에 많은 그리스도 교도들이 성지 순례를 떠났다. 그 무렵 이슬람 세계에서는 셀주크 투르크가 세력을 확장하여 비잔틴제국 영내에까지 진출하고 시리아 ·아르메니아 ·소아시아를 지배하고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였다. 1092년 셀주크왕조의 통일이 깨어지고 그 영토는 왕족간에 분할되었다. 이 기회에 비잔틴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비잔틴제국을 다시 부흥시키고자 군사적 원조를 청하는 사절을 로마 교황청으로 보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최초로 십자군을 제창하였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전쟁의 경과와 이러한 십자군 전쟁 상황 속에서 최초로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한 제1차 십자군전쟁의 전투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2~8차에 걸친 십자군 전쟁을 간략하게 서술하고, 마지막으로 십자군전쟁 당시 활동한 기사 수도회를 유의해 살펴보고자 한다. II. 십자군 전쟁 1. 십자군의 선발대(군중 십자군) 교황의 명령에 의해 각 지방에 파견된 사람들과는 달리 멋대로 십자군에 대한 열을 부채질하고 다니는 자도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은자 피에르는 십자군 사상의 창시자로 불릴 만큼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처음으로 동쪽을 향해 떠난 것은 농민으로 구성된 농민 십자군이었다. 이 십자군에는 많은 농민들이나 기사들과 같이 그리스도와 함께 가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신앙을 가진 훈련받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우선 고티에가 이끄는 농민군과 이어서 은자피에르를 따르는 한 부대가 출발했다. 양군은 헝가리, 불가리아를 통과할 때 이미 그곳에서 식량이 떨어져 약탈을 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럴수록 심한 보복 공격을 받았다. 양군은 합동하여 소아시아에 건너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해서 니케아를 점령하러 갔다가 투르크군에게 전멸당하고, 은자 피에르만 살아 돌아온다. 그러나 이밖에도 3개의 민중 십자군 부대가 이어졌는데, 그들에 의해서 유대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특히 라이닝겐의 백작인 에미코의 박해는 처참하였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XXXXXXXXXX ○○○목 차Ⅰ. 머리말Ⅱ. 베르길리우스의 생애Ⅲ. 아이네이스 요약1) 아이네아스 일행의 카르타고 도착2) 화염에 휩싸인 트로이3) 신이 내린 방랑4) 디도와 아이네아스의 사랑5) 장례식 경기6) 저승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남7) 예언의 땅 라티움8) 로마에 간 아이네아스9) 니수스와 에우뤼알루스10) 동맹군과 돌아온 아이네아스11) 여전사 카밀라12) 운명의 결투Ⅳ. 소감문Ⅴ. 맺음말I. 머리말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기원전 30년 전부터 기원전 19년 죽을 때까지 11년간에 걸쳐, 로마 건국의 기초를 다진 영웅 아이네아스의 전설을 전 12권으로 구성된 약 1만여 행의 기나긴 시로 노래를 했다. 이 작품은 미완성된 작품으로, 작자는 죽을 때 원고를 없애 버리도록 부탁을 했으나,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으로 세간에 발표되었다. ‘아이네이스’란 ‘아이네아스의 노래’라는 뜻이다.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노래되어진 그리스와 트로이와의 전쟁이 끝난 뒤에 트로이의 용사 아이네아스는 일족을 이끌고서 새로운 나라를 찾아 항해를 나서게 되었다.일행을 태운 21척의 배는 7년 동안이나 바다 위를 표류한 뒤에 폭풍우를 만나 카르타고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그 나라의 여왕인 디도는 그들을 환영해 주었고, 아이네아스는 여왕에게 트로이 함락의 상황을 알려주었다.이에 디도는 그를 사랑하게 되어, 아이네아스를 자기 옆에 붙들어 두려고 하였다. 하지만 아이네아스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 출발해 버리고 말았다. 디도는 그를 원망하였고,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어 버리고 말았다.한편, 일행은 시실리아 섬에 도착을 하게 되었고, 거기에다 일부 사람을 남겨 놓은 뒤에 다시금 배를 북쪽으로 향하여 나폴리 근처인 쿠마이에 도착을 하게 되었다. 아이네아스는 아폴론의 무녀인 시뷸레를 방문해서 그녀의 안내로 죽음의 나라로 가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아버지는 아들에게 아이네아스가 건설한 로마 국가와 그곳에 등장할 인물들에 관하여 이야기해 준다.땅에 다시 돌아와 아이네아스는 그동안 까맣게 모인 피난민을 보고서는 깜짝놀란다. 하지만 곧 이들을 이끌고 ‘이다’산을 향해서 유랑 길에 오른다.이와 관련하여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를 읽고 각 권마다 요약과 소감문을 작성하고자 한다.II. 베르길리우스의 생애로마 최고의 시인으로 북이탈리아의 만투아에서 태어났다. 크레모나와 밀라노에서 교육을 받고 16세 때 로마로 나아가 에피쿠로스파의 철학과 수사학을 공부했다. 그의 일생은 마침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한 로마 통일과 번영의 시기에 해당한다. 그는 문예 보호자로서 유명한 마이케나스에게 발견되어 조용히 시작에 힘쓸 수 있었다.그가 〈농경시〉(37-30 B.C.)를 쓴 것은 이 마이케나스의 권고에 따른 것이다. 이 시는 날씨, 수학, 가축, 양봉 등을 노래한 농업시로 그 기교적 완성도에 있어서는 후의 걸작 〈아이네이스〉를 훨씬 능가한다고까지 일컬어지고 있다. 이즈음 이미 아우구스투스의 직접 권고로 후세에 남길 만한 기념비적 작품으로서 로마 제국을 기리는 서사시를 계획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후 여생의 11년간은 대작 〈아이네이스〉에 몰두해 기원전 20년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풍물을 직접 보려고 그리스로 길을 떠났으나 도중에 발병하여 미완의 대작을 가슴에 품은 채 남이탈리아의 칼라브리아의 항구에서 죽었다.III. 아이네이스 요약1. 아이네아스 일행의 카르타고 도착 ? 제1권아이네아스는 트로이의 해변에서 망명을 해 이탈리아와 라비니움 하늘의 신들의 뜻에 따라서 숱한 시달림을 당했으니 유노는 노여움을 풀지 않았다.전쟁에서도 그는 많은 고통을 당했으나 마침내, 도시를 세워서 라티움 땅으로 신들을 모셨다. 유노는 트로이 혈통에서 한 지파가 갈라져 나와서 언젠가 튀로스의 성채를 뒤엎고 광활한 지역을 통치하고 전쟁에 뛰어난 한 민족이 태어나게 되어 리뷔아에 파멸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운명의 여신들의 뜻을 받아들인다.그녀는 다나이족과 사나운 아킬레스가 남겨두었던 얼마 안 되는 트로이인들을 라티움에서 멀리 떨어져있도록 했다. 또한 윱어있음에 틀림없다면서 말렸었지만, 때맞추어 포로가 잡혀왔다. 그 포로는 다나이족은 지쳐서 도망치려고 했으나 바다 위의 거친 폭풍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고 말하며, 입을 열기 시작을 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바로 그 포로 자신이 제물로서 지목이 되었지만 그는 밧줄을 끊고 죽음에서 빠져나왔고, 이제 그들은 벌을 받아 자신들의 죽음으로 죄를 갚게 될 것이라고 장하며 불쌍히 여겨달라고 호소를 하였다.거대한 말의 목적이 무엇인지 묻는 프리아무스의 질문에 대하여 그 포로는 그 말은 칼카스의 조언에 의해 팔라디움과 여신에게 가한 모욕을 보상하며 신상을 모독한 죄에 대해서 용서를 빌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고 답을 했다. 이런 거짓진술을 하는 포로 시논의 술수에 걸려들은 모두는 신성한 제단에 황소 한 마리를 제물로 바치고 있었던 라오코온을 뱀 한 쌍이 나타나 그와 아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과정을 지켜봄으로써 더욱 더 그 거짓을 믿게 되었다.결국 목마를 성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고 그날 밤 온 시내의 테우케르 백성들은 편안히 누워 잠에 빠져 있었다.어느 새 아르고스는 함선을 정렬시켜서 해안으로 움직여왔고 목마가 열리며 뱃속에 갇혀있던 다나이족이 나오기 시작을 했다. 이렇게 해서 트로이인들도 일리움도 테우케르 백성들의 영광도 화염에 싸여 다 지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3. 신이 내린 방랑 ? 제3권트로이가 서 있던 들판을 떠나면서 아이네아스는 망명자의 몸으로 전우들과 아들과 더불어 페나테스 신들과 위대한 신들을 모시고서 바다로 나갔다.그곳에 가서 그곳 만에다 성벽을 쌓기 시작을 했지만 운명은 이 계획에 아주 적대적이었다. 그러므로 새로운 섬을 발견했는데 그곳의 이 해안에서 저 해안으로 떠돌아다니곤 했다.궁술의 신이 감사를 하는 마음에서 높다란 뮈코노스와 귀아로스에 단단히 매어 움직이지 않게 해주었고 바람들을 무시할 수가 있게 해주었다.그들은 그곳으로 항해를 했고 도착한 후에 아이네아스는 신전에 경의를 표하며 지친 그들에게 성벽과 후손과 지속될 도시를 달라고 간청을 했다.이 때에 처음에 뜻이니 테우케르 백성들을 위해서 경기를 개최할 것이라고 말을 했다. 먼저 함선들의 경주가 열리고, 달리기 선수들과 투창과 가벼운 화살에 재주가 있어서 담력을 믿고 경기장에 들어온 자들과, 무두질하지 않은 가죽 끈을 손에 두르고 싸울 자신이 있는 자들은 모두 참가를 하라고 알렸다. 때문에 인근 주민들이 몰려와서는 즐겁게 모여 앉아 해안을 가득 메웠는데 더러는 아이네아스의 백성들을 구경하려고 그러했고, 더러는 경기에도 참가할 생각이었다.6. 저승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남 ? 제6권우여곡절 끝에 바다에서 또 한번의 전쟁을 치룬 아이네아스에게 예언녀는 바다의 큰 위험을 물리쳤으나, 육지에서는 더 나쁜 일들이 기다리고 있고, 유노는 여전히 적개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일러주었다. 아이네아스는 모든 것을 예상했으며, 마음속으로 이미 다 겪었지만 사랑하는 아버지를 저승에 가서 보고 싶다는 간청을 했다.그늘을 드리우는 나무에 잎들과 나긋나긋한 줄기가 황금으로서 되어 있는 가지 하나가 감추어져 있는데 저승의 유노에게 바쳐진 것이라고 한다. 저승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 나무에서 황금 잎과 열매를 따서 프로세르피나에게 선물로서 가져가야만 한다.마침 비둘기 한 쌍이 아이네아스 일행의 길라잡이가 되어주었고 장소를 고르다가 이색적인 황금빛이 반짝이는 나무 위에 앉았는데, 그 사이에 테우케르 백성들은 미세누스의 관을 어깨에 메고서 관습에 따라 화장용 장작더미 밑에다 횃불을 갖다 댔다. 그리하여 결국 저승으로 간 아이네아스는 여러 망령들을 보았는데 그 중에서는 디도, 팔리누루스도 포함이 된다. 마침내 아버지 앙키세스를 만난 아이네아스는 아버지로부터 다르다누스의 자손들이 어떠한 영광을 누리는지, 이탈리아의 부족에게서 그가 어떤 후손들을 기대할 수가 있는지 설명을 들었다. 또한 그의 운명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들었는데 훗날 로마는 그 통치권이 온 대지에 미쳐 그 기백이 하늘을 찌를 것이라는 예언과 카이사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었다.앙키세스는 아들에게 결단코 전쟁에 마음을 길들이지 말고 조국의 심그들은 윱피테르가 적들이 늘 받곤 하던 도움을 거두어버린 것이라고 해석을 하고, 양군 사이의 방벽과 공격을 지연시키는 해자들이 저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고 있으니 칼로서 방벽을 허물고 함께 진영 안으로 들어갈 용기 있는 자를 구하였다.무장한 트로이인들은 전군이 방벽 위에서 보초를 섰으며, 제비를 던져 위험한 곳을 정한 뒤 각자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였다.한편, 아스카니우스는 윱피테르에게 서약을 하며 기도했고 이를 들은 테우케르 백성들은 그의 공적을 찬양하면서 환성을 올렸고 그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리하여 트로이인들의 승리로 전쟁이 치러졌고 유노도 감히 이들에 대항을 할 힘을 적군에게 주지 않았다. 윱피테르가 하늘에서 이리스를 보내 유노에게 전갈을 전했기 때문이었다.10. 동맹군과 돌아온 아이네아스 ? 제10권신들을 윱피테르가 소집하여 이탈리아가 테우케르 백성들과 겨루는 것을 금한 바 있다고 언급을 하면서 신들이 명령을 어기고 서로 다투는 것에 대하여 지적하고, 휴전조약을 맺도록 한다.베누스는 아이네아스가 멀리 나가있는 동안 트로이인들의 포위가 위험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도움을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유노가 역정을 내면서 응대했고 이에 대해 윱피테르는 앞으로는 모든 것을 불문에 부칠 것이므로 그들은 운명의 길을 찾아내게 될 것이라고 말을 했다.한편, 아이네아스는 에트루리아의 진영으로 가서 왕을 만나보고는 자신이 원하는 것과 제공하는 것, 그리고 메젠티우스가 어떤 군대를 제 편으로 삼았는지 말해주었다. 이리하여 많은 정예의 장수들이 서른 척의 함선에 나누어 타고는 트로이를 도우러 가게 되었었다. 격전이 벌어져 싸움은 한동안은 백중지세를 이루었으나 투르누스가 팔라스의 가슴을 뚫어 전리품을 빼앗고, 아이네아스의 군사들이 파멸 일보 직전에 이르렀다. 하지만 아이네아스의 등장으로 인하여 다시 전세가 역전되었다.결국 아이네아스와 싸우던 튀르레니아인은 시신이 땅에 묻히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권리를 주장하면서 목숨을 잃었다.11. 여전사 카밀라 ? 제11권아이네아스는 승리자하였다.
《朝鮮物産共進會와 근대박람회의 본질》○○○과 201xxxxxxx ○○○目 次I. 머리말II. 박람회란 무엇인가III. 조선물산공진회1) 조선물산공진회의 개최과정2) 조선물산공진회 둘러보기3) 조선물산공진회의 개최목적IV. 근대박람회의 본질1) 1851 런던 대박람회2) 1993 대전 엑스포3) 근대박람회 비교분석V. 맺음말I. 머리말1993년 대전엑스포는 1988년 서울올림픽 다음으로 한국에서 개최된 세계구급의 행사이다.대전엑스포는 서울올림픽에 이어서 세계 속의 한국의 위상을 높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하지만 대전엑스포는 국력과 산업의 홍보를 그 목적으로 하였다는 점에서 그 이전과 이후의 세계의 여러 박람회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일본만 해도 1964년 도쿄올림픽 이후 1970년 오사카엑스포를 개최하였고, 중국 또한 2008년 베이징올림픽 이후 2010년 상하이엑스포를 개최하면서 이들을 각각 자국 홍보의 수단으로서 활용하였다. 애초부터 근대박람회라는 것은 산업혁명 이후 각국의 국력과 산업이 성장함에 따라 이를 홍보함으로써 국가위신을 높이고 자국 상품의 판매를 촉진시키기 위한 자본주의적 측면에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확산, 그 과정에서 일제의 식민지도 전락한 조선에서 1915년 조선총독부의 식민통치 5주년을 기념하는 [施政五年紀念朝鮮物産共進會]가 개최되었다. 이 공진회는 근대박람회의 전형적인 유형이면서 동시에 박람회가 식민통치와 같은 정치적 홍보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는 특수한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공진회의 구성과 전개과정에 대해서 소개함으로써 공진회 개최의 숨은 목적을 살펴보고, 더불어 이를 여타 근대박람회들과 비교함으로써 공진회의 근대박람회적 본질, 그중에서도 특히 식민주의를 통한 제국주의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바이다.II. 박람회란 무엇인가박람회를 사전적으로 설명하자면 한 나라 또는 지역의 문화와 산업의 상태를 소개하기 위하여 그에 관련한 각종 사물이나 상품을 진열해 판매하기 위해서 영국 런던에서 개최한 ‘프랑스물산전시회’라고 할 수 있다. 이후에도 영국과 프랑스 등지에서 각종 근대박람회가 개최되었고, 18세기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그 규모는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게 된다. 이제 박람회는 세계적인 규모로 변모해나가게 되었으며, 이로써 1851년 영국 런던의 ‘대박람회’가 첫 번째 세계박람회(엑스포)로서 막을 올리게 된다. 그 후 제국주의 열강들은 자국의 국력과 산업을 홍보하기 위해서 여러 엑스포들을 개최하였으며, 1928년 세계박람회기구(BIE)가 창설되면서 엑스포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게 되었다. 더불어 굳이 엑스포뿐만 아니라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자국 내에서도 각종 전문적인 박람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으며, 이는 메이지유신을 통해 신생 제국주의 열강 대열에 합류한 일본과 반대로 그 식민지도 전락해갔던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III. 조선물산공진회1) 조선물산공진회의 개최과정데라우치 마사다케(寺?正毅) 조선총독에 의해 1913년에 기획?발의된 1915년의 조선물산공진회는 조선 통치 5주년을 기념한 행사였다. 1913년 6월 29일 훈령에 의하여 공진회사무장정을 공포하고, 그 해 8월 3일에는 관보를 통하여 공진회 평의원에 관한 장정을 확정하였다. 1913년 8월 6일 총독부 고시에 의해 기간은 1915년 9월 11일부터 1915년 10월 31일까지로, 장소는 경복궁으로 확정되었다. 1914년 3월 제31회 제국의회에서 예산을 지원받아 준비에 착수하였다. 1914년 7월 8일에 공진회의 모든 사무를 총괄할 사무처를 설치하고, 이윽고 사무총장과 사무위원장 및 사무위원 등 159명을 1914년 7월 8일과 7월 10일에 각각 임명하였다. 또한 출품물들의 심사를 위해 심사장을 비롯한 심사부장, 심사원 등 161명을 1915년 7월 1일과 8월 6일에 각각 임명하였다. 이처럼 공진회는 개최 2년 전부터 미리 체계적으로 준비되었던 박람회라고 할 수 있다.기왕 5년 동안에 새롭게 발전시킨 농산공예품이 굉장히 많고, 이것을 실제로 본 조선의 성과로서 전시해 놓았다. 더불어 그 2차적인 목적으로는 내지의 일본인들이 조선 식민통치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조선에 더 많은 투자를 함으로써 조선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을 그 요지로 하였다. 하지만 이는 후술할 데라우치 총독의 또 다른 발언과는 대비됨을 알 수가 있다.2) 조선물산공진회 둘러보기→조선물산공진회 관련 사진들은 PPT를 봐 주시기 바랍니다.(사진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의 근대박람회』 도서 내부 사진)◎국적별 입장객 현황구분주간야간총합일본인206,03993,502299,541조선인472,503254,651727,154중국인3,3261,3334,659기타1,7059382,643무료 입장객(국적 미상)88,95341,214130,167총합772,526391,8571,164,383◎출품물의 부문별 분류구분내용구분내용제1부농업제8부교육제2부척식제9부토목 및 교통제3부임업제10부경제제4부광업제11부위생 및 자혜구제제5부수산제12부경무 및 감옥제6부공업제13부미술 및 고고자료제7부임시 은사금사업◎참가한 주요 일본기업들경성일보사, 남만주철도주식회사, 대일본맥주회사, 덕성광산광업소,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미쓰비시(三菱), 미쓰이(三井), 미쓰코시(三越)백화점, 시바우라(芝浦)제작소, 오사카상선회사, 이시카와지마(石川島)중공업, 일본우편선회사, 일본제강소, 일한(日韓)인쇄주식회사, 조선면업회사, 조선우편선회사, 천평면업회사, 후루카와(古川)광업회사, 히타치(日立) 등◎상징물들의 의미-경복궁 근정전의 일장기: 일제의 식민통치 그 자체를 상징-신축 건물들에 근대적 물품들을 전시하고 경복궁 잔존 전각들에 전통적 물품들을 전시함→ 근대적 일본과 전통적 조선을 대비 → 일제의 식민통치 홍보를 상징-각종 야간 조명 당식: 일제의 ‘문명의 빛’을 상징-철도특설관의 케이블카: 철도를 통한 일제의 대륙 진출을 상징-비행기 미에호(三重號)의 시범운행: 일제의 과학 기술을 상징-미국 스탠다드 석유회사(Standard Oil Company)의 광고탑: 식민지 조선된 자산)있는 양민으로 만들어야 한다.또한 당시 데라우치 총독을 맞이한 공진회 회장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지금 공진회장에 모아 놓은 각종 출품물을 보아도 병합 후에 조선인들의 기풍이 얼마나 근면해졌는지, 그리고 그들이 온량한 양민이 되었는지를 어렵지 않게 살필 수 있고, 이는 전적으로 총독 정치가 선사한 것입니다.두 사람의 대화는 일제가 겉으로 홍보하는 말과는 다른 그들의 숨은 목적을 뚜렷이 보여준다. 공진회는 조선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일본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함인 것, 그리고 일제의 식민통치를 선전하고 조선인들을 일본인들과 동화시키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는 공진회장에서 각종 일본 기업들을 동원하였으며, 조선과 관련해서는 합방 이전의 전통적인 모습들과 합방 이후의 근대적인 모습들을 대비시켜 식민통치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려했던 것이다.IV. 근대박람회의 본질조선물산공진회의 근대박람회적 본질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여타 근대박람회들과 비교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본고에서는 세계 최초의 세계박람회(엑스포)라 불리는 1851년 런던 대박람회와 한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박람회인 1993 대전 엑스포를 소개하고 분석해보는 바이다.1) 1851 런던 대박람회1851년 5월 1일 산업혁명의 선두 영국의 수도 런던에서 ‘모든 국가가 이루어낸 산업성과의 대박람회(Great Exhibition of the Works of Industry of All Nations)’, 약칭 ‘대박람회(The Great Exhibition)’가 하이드 파크에 위치한 수정궁(The Crystal Palace)에서 화려한 막을 올렸다. 전시장인 수정궁만 하더라도 세계 최초의 철골구조 건축물로 오로지 유리와 철제 빔만으로 지어졌으며, 좌우 564m, 높이 39m의 거대한 건축물이었다. 이날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자신의 일기장에다 ‘내 생애를 통틀어 진정 영원히 살고 싶은 하루다’라고 썼다.◎주요 전시품목-영국의 물리학자 베이크웰(Frederick Bakewell)jon International Exposition. Korea. 1993)’이다. 대전엑스포에는 세계 108개국과 33개 국제기구, 그리고 대한민국 내의 200여 개 기업이 참가했으며, 국내외 합쳐서 총 1,450만 명이 관람하였다. 정부는 대전 엑스포를 통해서 생산 유발액이 3조 643억 원, 이로 인한 소득 유발액이 1조 2,500억 원이며, 총 21만 2,000명의 고용창출 효과를 거두었다고 분석하였다.◎주요 전시관과 참가기업도약관(금강제화, 동아오츠카, 유한킴벌리, 데이콤(현 LG U+)), 롯데환타지월드(롯데), 미래항공관(대한항공), 번영관(KOTRA), 소재관(포항제철(현 포스코)), 우주탐험관(삼성), 이미지네이션관(선경(현 SK)), 인간과 과학관(대우), 자기부상열차관(현대), 자동차관(기아), 자연생명관(KT&G), 정보통신관(KT), 지구관(쌍용), 테크노피아관(럭키금성(현 LG)) 등외국기업의 전시관으로는 한국IBM관(미국), 한국후지쯔관(일본) 등이 있음3) 근대박람회 비교분석고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박람회는 전술한 페르시아와 이집트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홍보의 수단, 즉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한편 근대박람회는 이 같은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더하여 자본주의를 통해 성장한 산업, 즉 기업과 기술의 홍보의 목적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와 산업 홍보라는 근대박람회의 두 가지 측면은 조선물상공진회와 런던 대박람회, 대전 엑스포는 각각 일본제국, 대영제국, 대한민국의 국가 홍보를 위한 측면이 크다. 셋 다 당시 정부 차원에서 대폭적인 지원과 홍보를 하였으며,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조직적으로 국민들을 동원한 점도 동일하다.더불어 산업 홍보의 측면에서도 공진회, 런던 대박람회, 대전 엑스포는 각각 일본, 영국, 한국의 다양한 기업들이 참가하였고, 또한 외국 기업들도 참가하였다. 이는 자국의 기업과 기술을 홍보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목적이 크며, 외국 기업들의 참가 또한 박람회가 더 이상 한 나라만의 전있다.
3.1운동기 천주교회의 동향과 한계201xxxxxxx ○○○目 次1. 머리말2. 1910년대 일제의 종교규제3. 3.1운동 이전의 천주교회의 동향4. 3.1운동기의 천주교회의 동향5. 일제시기 천주교회의 한계6. 맺음말1. 머리말일제가 한국을 식민지화하면서 가장 고심한 것 중 하나는 종교문제였다. 그 중 기독교의 경우 서구의 선교사들이 많이 활동을 하고 있어, 자칫 종교를 무단으로 통제할 경우 외교문제로 비화하여 국제적인 문제로 번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통감부 시기부터 서구 선교사들을 그들의 정책에 동조하도록 회유하고 정교분리 테제를 내세워 그들이 민족운동이나 국권회복운동에 가담하지 못하도록 했고 한편으로 헌병경찰들을 동원하여 종교계를 감시 억압했다. 종교적인 입장에서는 일제는 그들의 고유 신앙인 신사 신앙을 내세우며 다른 종교들을 억압해 나갔다.그 와중에 1910년대 가장 활발했던 3.1운동이 발발한다. 3.1운동은 천도교와 야소교의 독립운동이라 불릴 정도로 두 종교 지도층의 주고 및 기층 신자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민족의식이 불타오른 운동이기에 다른 종교에서도 참여가 활발했다. 그러나 천주교만은 그 반응이 소극적이었다. 이러한 소극적인 원인은 당시 천주교회의 상황과 그들의 지도층들이 친일적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물론 그럼에도 기층 신자들은 지속적으로 참여 의지를 드러냈다. 두 계층 간의 충돌은 결과적으로는 일제에 긍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이 때의 천주교는 큰 맥락으로 봤을 때는 비판받아야 마땅하지만 한국 신자들의 의지만은 당시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다름이 없었다.당시 천주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일제의 종교 탄압 정책에 대해서 살펴보고 다음으로 3.1운동 당시에 천주교가 처했던 상황과 취했던 동향을 살펴봐야한다. 그렇게 하면 천주교 신자들의 행동이 보인 한계점의 이유를 알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2. 1910년대 일제의 종교 규제일제의 기독교 규제는 교육 분야에서 시작되었다. 1908년 8월 26일 친일정권에 의 제정, 공포한 기독교 규제법령이 없었다. 통감부 시기의 기독교 방침은 한국인의 교화를 시정의 기본 방침으로 했고 이러한 기능에 충실할 경우 통감부가 재정을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1906년 11월 한국 통감부는 을 선포했다. 이는 식민지 권력에 의해 처음으로 시행된 종교 관련 법령이었다. 이 법령은 재한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한국인들과 그 이외의 외국들에 관한 법령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계 종교단체에 속해 있던 한국인에 한해서는 포교 활동을 허용했다.宗敎取締에 관해서는 明治39년(1906년)〈통감부령〉제45호로 내지인의 종교선포 수속절차를 정한 바 있다. 하지만 조선인 및 외국인의 종교에 관한 것은 하등의 법규도 없어서 그로 인해 포교소가 함부로 설치되고 있어 그 폐해가 크다. 특히 조선인의 조직과 관계되는 것으로는 天道敎?侍天敎?大倧敎?大同敎?太極敎?圓宗宗務院?孔子敎?大宗敎?敬天敎?大成宗敎 등의 여러 宗이 있는데, 그 종류가 너무 많고 잡다할 뿐 아니라, 그 움직임도 정치와 종교를 서로 혼동하여 순연히 종교라 인정하기 어려운 것이 많아 그 취재가 불가피하다위의 1911년의 시정보고서를 보면 총독부의 종교 억압, 통제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리하여 이후 통제가 가능한 불교와 유교부터과을 제정하여 총독부가 직접 통제, 장악을 꾀했다. 하지만 기독교에 대해서는 국제적인 이목을 피하기 위해 ‘105인 사건’을 날조하여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대거 점거함으로써 그 활동을 위축시켰다.1915년 3월 기독교계 학교를 더욱 탄압하기 위해 을 개정하였다. 기독교 교육이 그들의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식민지 교육과 대치되기 때문이다. 이 규칙은 기독교계 학교에서 성경과목을 가르치거나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고 교수 용어도 일본어로 하게 함으로써 선교사들을 교사직에서 배제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식민지 교육을 총독부가 독점하고 교원도 일본어에 능하고 식민지 교육 실시에 적합한 인물로 하겠다는 의미였다.1915년 8월 조선총독부령 제 83호로 이 모습을 드러였던 ‘신도국교화정책’을 그들의 식민지 조선에도 적용하여 일반 민중에게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신사신앙을 강요하고, 일본 풍속을 이식하여 ‘동화’시키는 것이 조선통치상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조선신사를 건립하려 하였던 것이다.3. 3.1운동 이전의 천주교회의 동향한국 천주교회를 관할하고 있던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각축하는 제국주의 세력의 판도 변화에 주의만 기울일 뿐, 종교적 입장에서 사회 안정을 중시하였고 한국의 자주권 회복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한국에서 제국주의 열강의 세력 판도가 어떻게 변화하였느냐에 따라 자신들의 태도를 변화시켰다. 이 때문에 초래되는 자기모순은 정교분리 테제의 강화를 통해 합리화시켰다. 이러한 선교사들 중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긍정적이었던 이들은 찾기 어렵다. 안중근의 영세신부였던 빌렘(Wilhelm Nicolas Joseph Marie) 신부도 처음에는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에는 방관자적 태도를 오히려 반대하는 태도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안중근과 빌렘 신부 간의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한국 천주교회의 관할권자였던 뮈텔(Muttel Gustave Charles Marie)은 투옥된 상태에서 신부를 보내달라는 안중근의 요청도, 안중근에게 종부성사(終傅聖事)를 주러 가겠다는 빌렘 신부의 요청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안중근은 신실한 신도였기에 뮈텔 주교와는 예전부터 아는 사이였다. 그럼에도 그는 안중근이 자신의 잘못을 사죄하는 정치적 입장을 밝히지 않는 한 마지막 성사를 줄 수 없다고 고집했다. 그는 한국의 실제 통치자인 일제와 마찰을 피하여 한국에서의 선교권을 보장받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한국 천주교회의 입장 표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1914년 7월 유럽에서 시작된 전쟁은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는 동원령을 내렸고 한국에 있는 소집에 해당되는 선교사들은 징집되어 유럽으로 떠났다. 많은 선교사들이 징집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는 선교인력의 기근 상태에 빠져신자들의 사례는 적지 않게 발견된다. 천주교 내에서는 대구의 성유스티노신학교가 3.1운동에 가장 먼저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외부와 거의 격리된 채 생활했지만 민족의식을 지니고 있었고 3월 5일 저녁 약60명의 신학생들은 신학교 운동장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김구정 서정도가 중심이 되어 3월 9일 약전골목에서의 만세운동 계획에 참가하려했지만 교장에게 알려져 계획에 대하여 추궁받았다. 이러한 상황을 보고받은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신학교를 방문하여 학생들에게 만세운동 참가를 금지시켰고 신학생들은 주교에 대한 복종을 약속하였다.서울의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신학생들도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3월 23일 신학생들은 신학교를 나와 만세군중에 합류하였다. 후에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서울교구장 뮈텔 주교는 신학교로 달려갔고 신학생들에게 훈계를 했다. 신학생들은 일제에게 짓밟히고 있는 조국을 외면할 수 없다고 눈물로 호소했다. 그러나 뮈텔은 단호하게 만세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시켰고 참여하려는 학생들에게 신학교를 나가라고 명령하였다.이와 같이 천주교 신학교들의 만세운동은 제대로 시작도 못하고 막을 내렸다. 프랑스인 주교들은 신학생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한다면 퇴학시키겠다고 하고 학교를 폐쇄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므로 신학생들은 성직자의 길을 계속 걷기 위해서는 만세운동을 포기해야했고 만세운동에 참여하려면 신학생의 신분을 포기해야 했다. 그 결과 소수의 신학생만이 신학생의 신분을 포기했다.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3.1운동은 민족적 공감대를 형성하여 갔고 그에 따라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또한 만세운동 준비 단계에서 배제되었던 천주교와 타종교와의 연합도 이루어졌다. 3월 10일 황해도 해주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은 천도교와 개신교, 불교 그리고 천주교신자들이 협력하여 이끈 것이었다.천주교신자들이 대체적으로 소극적인 운동을 펼쳤지만 참여가 저조하진 않았다. 경기도에서 천주교신자들이 3월 27일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 지도자는 구장 김교영(區長 金敎永)이었다. 김교영은 전국적하다 체포된 천주교신자는 5월 말까지 53명으로 집계되었다.지역날짜만세운동전체 규모참가주도참가신자 수주도 신자체포된신자 수경북, 대구3.5약 60주도약 60명성유스티노신학교신학생경북, 대구3.8약 2,000주도?김하정과 김찬수20여 명황해도, 해주3.10참가?황해도, 신천4.7약 200주도?김경두1명서울3.23참가?용산예수성심신학교신학생경기도, 강화3.18약 10,000참가?3명경기도, 인천참가2명경기도, 광주3.279주도6명김교영6명경기도, 용인3.27약 100주도?한영규와 김운식2명경기도, 수원4.3약 2,000주도?이순모6명경기도, 안성주도?김중묵출전 : 『DEMANGE주교일기』 1919년 3월 7.8.26일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1971, 『독립운동사』 2, 226~227쪽, 289쪽5. 일제시기 천주교회의 한계3.1운동에서 종교계, 특히 개신교와 천도교의 역할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천주교회는 3.1운동에 거의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저조한 참여율은 3.1운동기 천주교회가 보여준 민족적 한계였다. 당시 한국 천주교회는 일제 식민화라는 민족적 모순,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침략을 묵인한 제도교회의 교회적 모순이라는 이중적인 모순 아래 놓여있었다.모순의 원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는 주교를 정점으로 직된 천주교회의 구조 때문이었다. 천주교회는 교리의 통일성, 전례의 균일성, 전통과 성예전으로 대한 강조, 엄격한 중앙집권적 구조, 성직자의 위계질서, 성직자와 평신자의 분명한 구분을 중심으로 하는 교계제도(hierachy) 등을 특성으로 하고 있다. 당시 한국 천주교회는 프랑스인 주교들이 관할하고 있었다. 일제하 외국인 선교사들은 식민통치로 한국에 기독교가 더 발전할 것을 기대하였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은 자주독립의 능력이 없다고 인식하였다. 그래서 더욱 한국인 신자들에게 일제에 항거하는 정치투쟁을 피하도록 권고하였다. 드망즈 주교 대구교구 설립 초기 교구에 크게 공헌하였던 대구의 유력한 천주교 신자인 서상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