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물 ‘전우치’1) 실존 인물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기인·환술가(幻術家).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송도(松都) 출생.※ ≪청장관전서 靑莊館全書≫의 〈한죽당필기 寒竹堂筆記〉에는, 가정연간(嘉靖年間, 1522∼1566)에 역질을 도술로 예방하였다고 하며, ≪지봉유설 芝峯類說≫에는 본래 서울 출신의 선비로 환술과 기예에 능하고 귀신을 잘 부렸다고 한다. 또, ≪오산설림 五山說林≫에는, 죽은 전우치가 산 사람에게 ≪두공부시집 杜工部詩集≫을 빌려갔고, ≪어우야담 於于野談≫에는, 사술(邪術)로 백성을 현혹시켰다고 하여 신천옥(信川獄)에 갇혀 옥사했는데 뒤에 친척들이 이장하려고 무덤을 파보니 시체 없이 빈 관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또, 밥을 내뿜어 흰나비를 만들고 천도(天桃)를 따기 위하여 새끼줄을 타고 갔다는 설화 등이 있다.중종 때 서울에서 미관말직을 지내다가 사직하고 송도에 은거하며 도술가(道術家)로 널리 알려졌다. 야담집을 중심으로 한 20여종의 문헌에 행적이 전하니 사실로 인정해도 좋을 것이다.2) 소설 속 ‘전우치’민중의 소원과 고통을 해결해 주는 정의의 화신이며, 민중의 지배층에 대한 비판의식을 대변하는 대변자로서 민중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민중의 대변자 역할을 하고 있다.2. 창작1) 창작시기「전우치전」은 역사상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것이어서 비교적 창작 시기를 추정하기에 용이한 편이다. 전우치가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살았던 인물이므로, 사후에 행적이 설화화되어 전승되다가 소설로 정착하자면 한두 세대는 지나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전우치전」 창작의 상한선은 17세기 초라고 본다. 그러나 하한선을 잡을 만한 구체적인 단서는 뚜렷한 것이 없으므로, 국문학계에서는 「전우치전」의 창작 시기를 대체로 17세기로 잡으며, 개화기까지 내려 잡는 견해에까지 걸쳐져있다.2) 소설 형성 과정「전우치전」의 형성과정을 추측하자면 전우치에 관한 사실이 일단 설화로 전환되고, 집적되어 소설화하는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도술,본뎐우치젼 (62면)신문관, 1914년 발행뎐우치젼 (37면)창서관, 1917년 발행全雲致傳 (36면)해동서관, 1918년 발행뎐우치젼 (32면)세창서관, 1919년 발행뎐우치젼 (33면)동창서관, 1919년 발행뎐우치젼 (28면)회동서관, 1926년 발행뎐우치젼강동서관 발행3. 이본대표적으로 ‘전운치전’으로 되어있는 서울대학교 도서관 일사문고 필사본(43장), 경판 37장본, 경판 17장본, 경판 22장본, ‘전우치전’으로 되어있는 1914년 신문관 발행 활자본(62면), 단국대학교 율곡도서관 나손문고(김동욱 소장본) 필사본 (31장) 등이 있으며, 지금까지 소개된 바로 총 16종이 있다.이들의 계통이나 선후관계 등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대략적으로 비교하여 대부분의 학자들이 세 가지 계통으로 나눈다. 먼저 경판본들과 서울대 일사문고본을 하나의 계열로 보고, 경판본을 일사문고본의 축약의 해당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에 대해 최근에는 경판 37장본을 모본으로 보는 견해가 강하다. 두 번째로 신문관본은 후대에 출간되었으나 선행본이 있었으리라 짐작하고, 오히려 경판본 계통보다 고형으로 본다. 그러나 이야기가 경판본과 일치하여 앞의 계열에 묶는 견해도 있다. 마지막으로 나손본(김동욱 소장본)을 내용상 두 계열과 전혀 다른 계통으로 보고, 한글 필사본 중 박순호 소장본, 사재동 소장본 등을 모두 이 계열에 묶는다.경판본 계열은 서두부 또는 결말부가 탈락되는 등 각 이본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전개부에 전우치의 도술 행각에 대한 여러 삽화들이 병렬적으로 짜여진 삽화중심의 서사구조를 띠고 있다. 서울대 도서관 일사 문고에 소장된 「뎐운치전」은 전우치에 대한 공감이 약화되며 기이한 흥미 거리를 찾을 때 나온 것으로 보인다. 천상인의 하강인 주인공이 만득의 외아들로 태어나 온갖 고난을 겪게 된다는 내용을 통해 민중들의 기대심리를 담은 것이다.1914년 신문관에서 활자본으로 간행한 「뎐우치전」은 선행 필사본이 있을 것으로 보이며 기존의 화소에 구한말의 어지러운 정치현실.2) 영웅소설고귀한 혈통 - 비정상적 출생 ? 시련 - 구출자에 의하여 양육됨 -투쟁으로 위업을 이룸 - 고향으로의 개선과 고귀한 지위의 획득 - 신비한 죽음주인공의 영웅적 삶을 그린 고전소설. 영웅이란 보통사람보다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개인적 가치보다는 집단적 가치를 우선하여 실현하고 성공한 인물이다. 전우치 또한 도술이라는 비범한 능력을 지니고 사회 곳곳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을 구제한다. 대부분의 영웅소설은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진다.이렇게 볼 때 「전우치전」도 영웅의 일대기를 다루었다고 할 수 있으나, 이본에 따라 나타나지 않은 부분도 많다.3) 사회소설사회문제를 직접 취급하거나, 사회적 관심이 농후한 소설. 가정의 영역을 넘어서서 사회의 본성·기능·제도 등에 주요 관심을 두고 사회조건이나 사회문제의 해결을 주장하는 소설이다. 우리 소설사에서는 「홍길동전」이 출발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를 「전우치전」이 이어받았다.「전우치전」에는 왕권약화, 봉건 윤리관의 붕괴, 민란 ,빈곤한 일반 백성과 재력을 모은 일부 계층과의 생활 차이, 부패한 관리들의 윤리 의식 등을 보여준다. 이에 우치는 도술을 이용해서 문제를 해결한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한 사회상임을 의미한다.- 신문관본우치가 세상에 뜻을 두게 된 이유를 ‘질고에 허덕이는 백성을 내버려둘 수 없어서’ 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경판본에서의 개인적 문제 해결을 사회적 차원의 문제로 상승시키고 있다. 전우치가 지배층을 징벌하고 굶주린 민중들에게 곡식과 종자를 나누어주었다는 등의 내용은 당시의 극도로 피폐한 민중의 생활상을 반영한 것이다. 지배층은 정권 다툼에만 눈이 어두워 민중들의 생활고를 몰라서 우치는 이를 보고 행동으로 옮긴다. 그의 행동은 민중을 업신여기는 지배층에게 각성을 주는 것이다.- 필사본 계열조선 및 중국 왕과의 대결을 통해 반체제적인 성격을 뚜렷하게 나타낸다. 김동욱 필사본에서 우치는 ‘중국이 항시 조선을 업신여겨서 통한을 참지 못해’ 도술을 부리게 되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전개 방식과 주제 의식의 차이를 주목한다면 그렇게 볼 수 없다는 반론이 있으며, 아직 확실한 판단을 내리기는 어려우므로 ‘작자 미상’으로 해 두어야 한다.다만, 「전우치전」은 「홍길동전」과 비슷한 시기에 허균처럼 이단적이고 반역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짓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은 가능하다. 또 신문관본이나 일사문고본 계통 모두 전우치가 나중에 서경덕을 만나 굴복을 하고 함께 공부하기로 했다는 공통적인 결말로 보아, 작자는 서경덕의 학통을 존중하는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필사본에서 전우치 부자의 계속되는 신분상승은, 작자가 양반층이 아니라 경제력은 있으나 신분이 미천한 신흥재력가일 것이라는 추측도 확대시켰다. 신흥 재력가들이 소설을 통해 신분상승의 욕구를 대리 만족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작가에 대한 논의김태준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작가를 허균으로 보았고, 박성의는 「전우치전」을 「홍길동전」의 모방작으로 간주하고, 작자는 미상이라 하였다.임철호는 「전우치전」이 작품의 체재면이나 사회적 배경, 도술의 유형에서 거의 「홍길동전」과는 유사점을 찾을 수 없다고 하여 허균의 작가설을 부인하고, 야담이나 설화를 모은 수집가로 추정했다.박일용은 「전우치전」의 세계관과 문헌설화에 나타난 세계관을 비교하면서 소설 담당층 이라는 집단으로서 작가층을 제시하고 그 작가층은 당대의 현실 속에서 현실적 체계에 의해 고통을 받고 있었던 민중층 이라고 주장했다.방대수는 나손본계 「전우치전」을 미천한 신분 - 천자명당설화 - 연나라 왕 이라는 핵심적 요소를 통해 현실에서 불가능한 자아와 세계와의 화해를 소설 속에서 추구하려는 체제 순응적 세계관 을 지닌 상민층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추정하고, 경판본 및 활자본계 「전우치전」에 대해서는 작품의 내용과 구조를 모두 다루어 전우치의 의식이 몰락양반의 의식구조와 같다고 하여 체제 저항적 세계관을 지닌 몰락 양반층에 의해 쓰여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6. 줄거리1) 신문관 발행 활자본조선 초에 송경 겨루다가 전우치는 곤욕을 치르고 결국 그의 제자가 되어 태백산 배달 밑에 정사를 얻고 계속 도를 닦으며 살았다.2) 일사문고본전우치가 천상 선동으로 속계에 내려왔는데, 어려서 여우 입 속에 들어 있는 구슬을 먹고, 다시 구미호에게서 천서(天書)를 빼앗아 도술을 익히게 되었다고 하는 내용이 서두에 더 있다. 그 밖의 내용은 대체로 같다.3) 김동욱본전생에 손오공이었던 전우치가 강릉 지방 관노의 아들로 태어나 자기 가문의 지위를 높이는 한편, 중국에 가서 활인동 도적의 두목이 되어 중국 천자가 조선을 업신여길 수 없도록 하고, 마침내 연나라 임금이 된다.4) 공통적으로는 크게 다섯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① 전우치의 출생과 도술습득과정② 전우치가 임금을 조롱하는 이야기③ 전우치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해주는 내용④ 전우치가 조정에서 벼슬을 할 때의 이야기⑤ 서화담과 강림도령에게 제지를 받고 우치가 산 속에 들어가 도를 닦는 이야기/※ 도술행위의 반복, 나열「전우치전」에서 도술은 현실 타개의 한 방편으로 이용되며, 반복 나열된다.첫째, 조선 왕(혹은 중국 천자)에게서 황금들보를 탈취함둘째, 백발노옹의 아들 이가의 억울한 살인죄 누명을 변신술을 사용해서 벗겨줌셋째, 백성의 돼지머리를 빼앗는 부패한 관리를 혼내줌넷째, 사치한 연회를 베푸는 설생과 소생의 하문과 창기의 소문을 도술로 없앰다섯째, 회계장부를 잘못 정리해서 죽게 된 장계창을 바람으로 변신하여 구출함여섯째, 가난한 한자경에게 족자를 주어 어머니를 봉양케 함.일곱째, 허참연을 강요하는 선전관들을 능욕하는 도술로 선전관들의 부인을 데려와 그들의 술자리 시중을 들게 함.여덟째, 가달산에서 염준의 난을 토벌할 때, 독수리로 변신, 적진을 염탐하고 분신을 만들어 염준을 사로잡음아홉째, 시기하는 선전관을 혼내줌열 번째, 벌레로 변한 국고의 재산을 원상태로 바꿈열 한 번째, 역모죄로 죽게되자 그림 속의 나귀를 타고 도주함열 두 번째, 부녀자를 훼절하려는 중을 전우치 자신의 모습으로 변하게 하여 조정에 압송되게 함.열 세 번째이다.
학번- 김기림론학과 이름片石村 金起林論- 시론의 통시적 분석과 시기별 대표 작품을 중심으로Ⅰ. 서론Ⅱ. 김기림의 생애Ⅲ. 김기림의 시론1. 초기1) 시론 형성의 배경2) 주지주의적 모더니즘2. 중기1) 전체시론2) 과학적 시학3. 해방 이후1) 민족시의 방향과 공동체 의식2) 새나라 건설Ⅳ. 결론교 과 명:담당교수:학 과:학 년:학 번:성 명:제출일자:Ⅰ. 서론문예사조론에서 모더니즘(Modernism)은 다다이즘(dadaism), 미래파(futurism), 이미지즘(imagism), 주지주의(intellectualism), 초현실주의(surrealism), 신심리주의(new psychologism) 등의 근대적 문예 사조를 통칭하는 개념이다.우리 문학사에서는 다다이즘, 이미지즘, 주지주의, 초현실주의, 신심리주의 등이 소개된 바가 있으며, 주로 이미지즘과 주지주의를 중심으로 이해되어 전개?창작되었다. 대표적으로 흄(T. E. Hulme)에서 엘리엇(T. S. Eliot)으로 이어지는 주지주의는 김기림, 파운드(E. Pound)의 이미지즘은 김광균에 의하여 창작적 실천이 이루어졌다 할 수 있다.1920년대의 우리나라의 시는 중반까지 주로 감상적 낭만주의적 색채를 띠었으며, 후반에 들어서서는 계급주의 이데올로기를 앞세우며 정치성과 사상성을 앞세운 프로시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30년대 모더니즘은 시의 예술성과 자율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지향에서 출발하였다.모더니즘 시론의 소개와 형성은 대체로 김기림의 초기 시론 전개 과정과 일치한다. 김기림은 모더니즘 시운동의 기수(旗手)로서 과학으로서의 시학을 정립하여 시작(詩作)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고, 그에 따라 창작되는 시작품에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종래 시에 대한 일반적 통념을 뒤엎는 새로운 시를 주장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그러나 그의 시는 후기에 접어들수록 참여적 역할에 주목하여 본래의 주지주의적 경향과는 다른 모습으로 전향하게 된다. 이 글에서는 김기림의 시론에 나타난 특색을 초기, 중기, 해할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이미지를 중시했기 때문이다.김기림이 초기에 영향을 받은 또 다른 모더니즘 계열은 미래주의로 보인다. 김기림은 현대의 첫 번째 특징을 기계문명 시대라고 보았기 때문에 기계에 대해 열렬한 미감을 표현한 미래주의를 자기 시학의 한 축으로 수용했다.또한 일본의 주지주의 문학운동의 영향도 받았다. 그가 일본에 1차 유학했던 시기는 일본 모더니즘 운동 시기상 주로 신흥예술학파와 『詩와 詩論』誌 초기와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으로 의식적 제작이라는 의미의 주지적 문학론은 서구의 모더니즘보다 오히려 일본의 영향으로 보이며 표현론 쪽이 아니라 현실을 중시하는 인생론 쪽에 선 것은 특히 키타가와 후유히코(北川冬彦)의 영향으로 보인다.2) 주지주의적 모더니즘모더니즘 시론은 1920년대초 우리나라 시문학의 감상적·퇴폐적 낭만주의와 1920년대말부터 1930년대초까지 목적성에 치우치는 프로 문학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했다. 김기림 또한 감상주의를 과잉정서에서 오는 현실도피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이것을 극복하여 건강하고 명랑한 정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지성에 호소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프로문학이 중시하는 시의 내용, 즉 시대정신을 담지할 새로운 방법론을 제창하며, 현실의 감각과 비판은 새로운 형식에 담겨져야 한다고 주장한다.따라서 그는 시의 음악성 및 시간성을 비판하고, 회화성·공간성·감각성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시’를 추구하였다. 이것이 바로 주지주의적 태도로, 시의 언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통해 언어의 형태미를 추구하고 감각적 이미지를 창조하는 시작 방법론이다.모더니즘은 두 개의 부정을 준비했다. 하나는 로맨티시즘과 세기말 문학의 말류인 센티멘탈리시즘을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의 편내용주의의 경향을 위해서였다. …(중략)… 모더니즘은 우선 오늘의 문명 속에서 나서 신선한 감각으로써 문명이 던지는 인상을 붙잡았다. 그것은 현대의 문명을 도피하려고 하는 모든 태도와는 달리 문명 그것 속에서 자라는 문명의 아들이었다. 그 일은 바꾸어 말하면 이르는 것이다.내용과 형식 = 사상과 기술이 혼연(渾然)한 통일체로서만 시를 이해하려는 의견은 한 전체주의(全體主義)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오전의 시론, 기술편」에서그는 언어의 기교적 측면에만 관심을 갖는 일부 모더니즘 시인들을 '기교주의'라 비판하면서 내용과 형식이 조화가 된 '전체시'를 창작할 것을 주장한다. 그의 장시 「氣象圖」가 바로 김기림 자신이 주장한 '전체시론'의 방법론에 근거하여 의도적으로 창작된 작품이다.비늘돛인海峽은배암의 잔등처럼 살아났고아롱진 ?아라비아?의 의상을 둘른 젊은, 山脈들.바람은 바닷가에 ?사라센?의 비단幅처럼 미끄러웁고傲慢한 風景은 바로 午前 七時의 絶頂에 가로누었다.- 「世界의 아침」 서두이 시는 김기림 자신의 모더니즘 이론을 충실하게 이행하려 한 시이며, 현대시가 지녀야 할 주지성과 회화성, 그리고 문명 비판적 태도 등을 동시에 시도하여 본 작품이다. 따라서 이 시는 그 시적 형상화의 면에서보다는 시사적인 면에서 더 의의를 지니는 작품이다.먼저 형식의 면에서 본다면, 우리는 김기림의 모던한 비유를 충분히 맛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해협’을 “배암의 잔등”으로 비유한 것이나, ‘산맥’을 “아라비아의 의상”을 둘렀다고 표현한 것이나, ‘바람’을 “사라센의 비단 폭처럼”미끄럽다고 표현한 것이 그것이다. 하나같이 이국적이면서도 감각적인 비유들이다. 세계의 기상도를 돌아보는 여행의 출발선에서 이러한 비유를 구사한 것은 화조풍월(花鳥風月) 일변도의 전통적인 비유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또한 뒷부분에서는 시가 내포한 내용에 주목할 수 있다. 육지와 하늘과 바다를 모두 연결하여 시적 공간을 확대하고, 근대적 물질문명의 상징이 되고 있는 열차와 비행기, 기선을 등장시킨다. 이 같은 시상의 발단은 근대적인 것의 출발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열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장면, 여객기가 공항을 떠날 준비를 하는 모습, 내가 항구를 출발하는 모습 등을 통해 인간 삶의 새로운 출발 장면을 보여주면서 밝고 가볍고 동적인 느낌을 준정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문학적 입장 역시 전통을 부정하고 과학적이고 주지적인 태도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부각된다. 감성보다 지성, 내용보다 형식을 강조함으로써 그는 전례 없이 명징(明徵)한 문학 언어를 구현할 수 있었다.그러나 김기림의 과학적 시학의 결정적인 한계는 현실인식의 실패로 귀착된다. 그는 무절제한 감상과 무기력 상태에 빠져있는 문학의 전통에 반발하여 다양한 형식 실험과 객관적인 과학의 방법을 문학에 적용하려 하였으나, 주관과 경험이 배제된 문학실험에서 현실은 논리적인 구성의 범주를 넘어서지 않았다. 그는 식민지 상황이라는 현실의 특수성과는 무관하게 형식논리에 입각하여, 전통과 근대에 대한 찬반을 뚜렷하게 표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현실에서의 전통 부정이 갖는 현실적 의미를 생각해 볼 때 김기림의 과학적 시학이 내포한 인식면의 한계는 분명해진다.이론가로서의 김기림이 보여준 논리적 선취(先取)는 당대 현실의 인식으로는 적절치 못한 것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절실한 문제가 되어있다. 현실의 변화를 파악하고 그에 합당한 문학의 형식을 제시하려한 그의 선구적 인식은 후대 시인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문학의 형식과 언어를 인식 내용과 일치시키려한 실험의식은 문학적 자의식의 표현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문학의 과학화를 지표로 현실의 변화에 대응할 합리적인 인식과 형식의 실험으로 행한 과학적 시학이야말로 선구적 이론가로서의 김기림이 갖는 한계와 의의를 분명히 보여준다.3. 해방 이후1) 민족시와 공동체 의식일제강점기 하의 김기림은 모더니즘에 기반을 둔 주지주의, 전체시론, 과학적 시학 등의 시론을 전개하고 이에 대응되는 시 창작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마침내 1945년 해방을 맞으면서 김기림은 새로운 역사 인식 속에서 시의 변모를 꾀하게 된다. 당시 많은 시인들이 그랬듯이 김기림 역시 해방 정국을 맞아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우리 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논의를 거듭하게 된다. 그는 먼저 우리말을 민족문화를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수단으로 보았다. …(중략)… 시인 각자가 그 생리와 인격의 전부를 기울여서만 자신과 시대와 민족과 세계의 문제를 시와의 관련에서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이다.민족의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는 후기시론을 전개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김기림은 개인적인 감상주의를 거부하는 작가들의 진실성과 소박성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자칫 시가 상식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염려로, 공동체 의식이라는 새로운 제재를 시로 적절히 표현하기 위해서 대중화와 관련된 새로운 문체의 수립을 논의한다. 문체에 대한 관심은 시인이 어떤 식으로 대중들을 대변하고 그들에게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현실의 실용적인 입장에서 새로운 내용에 어울리는 적절한 형식을 추구하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한편 김기림은 또한 「시조와 현대」라는 논문을 연재하며 시조에 대한 관심을 피력하였다. 산문화를 주장했던 초기의 시론과는 매우 다른 경향으로서, 새로운 검토를 통해 시조에 대한 반성을 주장하고 우리 문학의 잃어버렸던 가치를 찾아내 다시 살펴보려는 의미라는 점에서 큰 변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시조의 정형성은 기반일 뿐이며 약간의 ‘파격의 묘미’를 아울러 갖추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이 파격의 묘미를 현대화하여 자유로운 인간의 충동과 개인적 서정을 그려낼 것을 주장한다. 이는 8?15 해방 이후 민족의식에 대한 자각과 함께 그에 관심을 갖게 된 데에 연유하는 것으로 보인다.2) 새 나라 건설에 대한 관심새 나라 건설은 해방 이후 최대의 과제였다. 이에 대해 김기림 역시 관심을 기울이는데, 이러한 경향은 그의 네 번째 시집인 『새 나라』에 잘 드러난다. 해방 이후 김기림이 발표한 최초의 글 「우리 詩의 方向」에서 그의 모든 관심은 ‘새 나라의 건설’에 쏠려있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새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민족적 자기반성이 있어야 하며 그 반성을 통해 적극적인 정신을 북돋워나가야 한다고 말한다.또한 그는 민족과 시대의 과제 앞에서 그 방향을 제시하는데 있어서 새로운 기반은 大衆이라고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