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사회의 문제점과 해결방안서론고령화 사회의 정의한국의 고령화 정도본론고령화 사회가 경제성장에 미치는 영향결론다른 나라들의 사례들한국의 해결방안4. 맺음말서론고령화 사회의 정의현재 진행 중인 인구학적 변화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 인구의 고령화이다. 이에 대해 UN은 이미 1982년에 고령화 현상의 심각성을 제기하면서 ‘고령화에 대한 세계회의’를 개최한 바 있다. 이처럼 고령화는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며 이미 전 세계적으로 큰 이슈이다. 고령화 사회에서 고령이란 UN에서 지정한 고령연령인 65세 이상을 말하는 것으로 한 국가에서 65세 이상인 인구 비율이 7% 이상이면 고령화 사회(Aging Society), 14%이상이면 고령사회(Aged Society), 20%이상이면 후기고령사회(Post-aged Society) 혹은 초고령사회라고 칭한다. 주요한 원인으로는 각종 의학기술과 위생관념 그리고 의식주를 비롯한 생활수준이 개선됨에 따라 영유아 사망률 감소와 출산율 감소가 있다.우선 그림 1을 보면 1990년에 12,000,000 (1천2백만, 12 million)명의 영유아가 사망했는데, 2011년에는 6,900,000 (6백9십만, 6.9 million)명으로 사망자 수가 41% 줄었다. 다음으로 그림 2를 보면 영유아 사망률이 1990년 87/1000명에서 2011년 51/1000명으로 감소했다. 게다가 그림3을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출산율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시간이 더 흘러 2045년 정도에는 대체출산율 수준(한 국가가 인구규모를 현상유지하는데 필요한 출산율)인 2.1명까지 줄어든다. 이로 인해 죽는 사람의 수는 적어지고 태어나는 사람의 수도 줄어들어서 결국에는 인가 증가속도는 둔화되고 중위연령이 늘어나게 된다. 결국에는 고령화 사회를 유발한다. 이를 그림 4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그림 4를 보면 이러한 현상을 더 명확히 드러난다. 1950년대 인구 피라미드를 보면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갈수록 비율이 점점 늘어나는 일반적인 록 생산가능인구 비율이 줄어들기 때문에 증가할 것이다. 실제로 예상 수치로도 2040년이 되면 생산가능인구 1.8명이 노인 1명을 부양해야 한다. 이는 생산가능인구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세금 증대를 초래해 노동에 대한 의욕을 저하시킬 수도 있다. 따라서 이로 인해 세대 간 갈등이 첨예화 될 수 있으며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그림 13표 4저축률 저하에 따른 악영향지난 11월 25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열린 한 세미나 발표에 따르면 표 5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1%포인트 늘어나면 저축률은 최대 0.7%포인트 하락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는 모딜리아니(F Modigliani)와 안도(A Ando)에 의해 제시된 생애주기가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즉, 사람들이 현재소득이나 자산만을 근거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남은 생애에 기대되는 소득을 염두에 두고 소비수준을 결정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사람들은 보통 청장년층 시절에 사회 및 경제활동에 참여함으로써 고소득을 얻고 이후 노년층이 되었을 때는 청장년층보다 소득이 낮아지는 현상을 겪는다. 따라서 현재 소비를 저축함으로써 미래에 소비할 자산을 미리 비축하는 것인데 고령인구가 증가하면 자연스럽게 저축률이 감소한다. 저축이 감소하면 기업이나 정부가 투자를 할 여력이 줄어들어 경제성장률에 악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고령인구 증가에 따른 저축률의 감소는 경제성장을 저해한다.표 5재정 및 연금제도 악화 가능성고령인구 증가에 따라 연금이나 공적 의료, 노인 복지 등 공공지출이 대폭적으로 증가될 것이다. 그림 14를 보면 노인 인구의 의료 수요가 크게 증가하고 노인 구성 비율보다 건강보험 상 노인 진료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더 빠르게 증가한다. 이는 향후 노인의료비 지출의 급격한 상승을 초래해 건강보험 재정 악화를 야기시킬 수 있다. 그림 15를 보면 한국의 GDP 대비 고령화 지출 비율 추이는 큰 폭으로 증가함을 알 수 있다. 또한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중국중국은 13억 인구라는 엄청난 인적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비록 고령화에 대한 문제는 현재 나타나지는 않지만 인구만을 놓고 봤을 때는 향후 10년에서 20년 동안은 인적 자원의 영향으로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오늘날 시장경제를 받아들이면서 해외 자본의 유입과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통해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에는 많은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국가 차원에서 강력한 산아제한 정책과 남아선호사상으로 심각한 사회적 문제의 불씨를 갖고 있다. 현재는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등 4명의 조부모와 2명의 부모가 한 아이를 떠받드는 4-2-1구조가 확산되고 있다. 'one mouth six pockets'이라는 말이 상징하듯이 어린아이 한 명을 6명이 키우는 구조이지만 1에 해당하는 어린들이 생산연령인구에 진입했을 즈음에는 고령화로 인해 거꾸로 4명의 조부모와 2명의 부모를 모두 부양해야 하는 상태에 놓일 수도 있다. 'one pocket six mouths'가 되는 것이다. 이는 유례없이 심각한 고령화 문제의 원인이 될 수 있다.한국의 해결방안1983년 처음으로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대체출산율 2.1명을 밑도는 2.08명을 기록했다. 이후 저출산 문제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시기는 합계출산율이 1.17명으로 떨어진 2002년부터이다. 한국의 고령화에 대한 대책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정년연장으로 인한 평생직장을 보장해 주는 방안과 가족이 노인을 부양하는 책임을 지도록 하는 방안이다. 그러나 고령인구의 비율이 갈수록 높아지는 상황에서 이제는 이러한 단편적인 해결방안으로는 부족하다. 좀더 구체적이고 현실성이 있는 다양한 방안이 필요하다.출산 장려현재 고령화사회의 큰 원인 중 하나는 출산율 저하이다. 출산율 하락에 따른 인구구조의 고령화로 인한 복지 관련 부담의 증대 등도 중요한 문제이지만, 인구규모의 감소는 장기적으로 성장잠재력을 저하시킬 뿐만 마련해야 한다.표 6그림 18노동생산성 제고개인적 차원에서 생각한다면 단순히 노동인구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육의 질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다. 노동 인구 두 명이 할 일을 노동 인구 한 명이 하게 한다면 노동인구의 절대적 감소를 일정부분 해결할 수 있다. 따라서 선진국들이 고령자의 노동시장 참여 촉진에 초점을 맞추고 반면 고령자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높은 우리나라는 동시에 취업 내 비중이 지속적으로 증가할 고령자의 생산성 제고를 위한 정책 개발에도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고령인구의 생산성 제고를 위해 평생학습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될 것이기에 평생학습기관의 기능을 자격증 부여에 단순히 국한시키기보다 빠르게 변화하는 노동시장 환경에 대응하여 실질적인 직무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직업재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 이는 단순히 고령자들을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없어지면서 일반인들도 변화하는 노동시장에 발맞추기 위해 교육기관에서 더 효율적인 직무 능력을 습득한다면 전체적인 노동생산성 제고에 긍정적인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또한 정책적 차원에서는 주어진 인력을 가장 생산성 있는 일에 종사할 수 있도록 배치하는 전략적 접근이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경제운용을 시장원리에 맡기는 것이 필요하다. 개별 경제주체의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기본적인 방안도 중요하지만 그 생산성을 가장 잘 이끌어내도록 제반 환경이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국민연금을 포함한 노인 부양 부담 개선 및 노인 삶의 질 향상노동인구의 비노동 인구에 대한 부양 부담은 항상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개인 혼자 사는사회가 아니기에 부양 부담은 피할 수 없다. 우선 탈 많은 국민연금을 지속 가능한 사회복지 정책으로 확실히 개편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국민연금제도를 민영화하자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경제학적으로 시장의 원리에 맡겨놓았을 때 발생할 실패를 줄이기 위해 정부가 개입하지만 정부 개입이 오히려 더 큰 손실을 발생시킬 때 정부 실패라고 한다. 같은 맥락에서 연금 제도의 민p://blog.daum.net/jywt0321/2021157" http://blog.daum.net/jywt0321/2021157고령화사회의 문제점과 대책인구의 고령화를 미래의 재앙으로 보는 시각들이 많다. 유엔(UN)이 펴낸 '세계 인구 고령화1950~2050 보고서'에 오는 2050년이 되면, 60세 이상 노인 인구가 14세 이하의 아동 인구를 크게 앞지르는 대역전 현상이 빚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국이 가장불행한 나라가 될지 모른다. 현재 우리의 고령화 속도가 세계 1위를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노인 인구의 급속한 증가는 소비의 격감뿐만 아니라 노동력 감소로 인해 국가의 성장 잠재력이 줄어드는 부작용도 문제가 되지만 단기적으로는 노인복지가 가장 큰 문제이다. 연금 소득이 없는 노인들은 이미 절대 빈곤의 상태에 있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고, 앞으로노인 인구가 늘어나면서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따라서 노인복지를 위해서는 노인의 소득을 높이고 증대되는 노인의 의료 수요에 대비해 의료 보험 재정을 충분히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이다.이에 대해 정부도 최근 노인의 일자리 창출과 퇴직연금제도를 개선하는 등의 대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적 보완만으로 고령화로 인한 노인복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노인복지를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노인 계층의 실질소득이 높아지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노인층의 소득 증대는 정부의 복지 예산 증대를 통해서도 가능하고 또한 개인연금을증대시키는 방법도 있다.따라서 정부는 우선 예산의 0.4%에 불과한 노인 복지 예산을 크게 늘려야 한다. 우리나라는현재 다른 OECD 국가와는 달리 복지에 대한 정부 지출이 비교적 적은 편이어서 재정 적자가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앞으로는 출산율 저하와 맞물려 인구의 고령화로경제성장률이 낮아지면서 세금을 통한 수입은 적어지는 반면에 복지 지출은 늘어나 재정적자가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그러므로 복지 예산의 확대뿐만 아니라 개인457
정약용의 실학사상1. 실학의 개념- 조선 후기의 실학을 논함에 있어 먼저 그에 대한 개념 정립과 성격 파악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실학은 ‘실사구시’의 줄임말이다. 이는 중국 한 대의 반고가 쓴 책 《한서》〈하간헌왕전〉에 나오는 말, “학문을 닦고 옛것을 좋아하며 실사에서 옳음을 구한다”에서 나온 것이다. 그 원래의 의미는 학구적인 태도는 실제적이고 진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실학이라는 용어는 통시대성을 지닌다. 즉, 실학은 어느 시대이던지 간에 현실성 또는 현실적 의의를 지니는 학문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송대(宋代)에 이르러 노불의 ‘허무적멸적’성격에 대해 유학의 현세주의적 성격을 부각시키기 위해 유학을 실학이라 하였고, 마침내 후대에는 실학이 유학의 대명사인 양 고정되다시피 하였다. 그런데, 수기치인을 표방하는 유학의 경우, 시대에 따라 ‘수가’와 ‘치인’, 또는 도(도덕, 윤리)와 기(경제)에 두는 비중이 달랐던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시대적으로 어느 측면이 더 요구되느냐에 따라 그 한 측면만을 가리켜 실학이라 하기도 하였다.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실학의 개념이 각 시대에 따라 변천하였다. 여말선초에는 ‘적멸위락’의 불교나 ‘부화무실’한 사장학에 대하여 성리학을 실학이라 하였고, 다시 왜란과 호란을 겪은 뒤에는 번쇄하고 지리한 데로 흘러버린 성리학과 예학의 말폐에 반발하여, 일부 학자들이 경세치용 · 이용후생 · 실사구시를 부르짖으면서, 이를 목적으로 하는 학문을 실학이라 하였던 것이다.2. 조선 시대의 실학- 17세기 초에 조선에서 대표적인 신사조이자 학풍으로서 비판적 · 개혁적 · 주체적 · 과학적 · 계몽적 성격을 띤 실학사상이 형성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는 그 당시 사회와 과학 기술의 발전에 깊이 근거한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의 실학 형성의 조건에 대해서 알아보자. 조선은 임진왜란과 두 차례에 걸친 호란으로 인구가 크게 줄었고 유민까지 발생하였다. 또 농경지의 대량 감소로 농업 생산이 현저히 줄어 백성의 생활은 곤궁에 처 건설하기 위하여 토지 개혁을 중심으로 하는 일련의 사회 개혁안을 내놓았다. 이 외에도 중국과의 잦은 교류와 조선에 표류해 정착한 외국인들을 통해서 전래된 서양의 자연 과학 기술은 조선시대의 실학사상 형성에 중요한 조건 중 하나였다. 서양의 자연 과학 기술과 새로운 사상의 영향으로 각성한 진보적인 학자들은 주자학 만능론에 회의를 품고 이를 타파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주자학이 실제에서 벗어난 청담공론임을 밝히고 국가와 백성의 생활에 도움이 되는 학문을 추구하였으며, 구체적인 사물 혹은 실천을 통하여 진리를 탐구하였다. 그들은 다만 조선의 천문과 역학 · 지리 · 수학 · 의학 등 자연 과학의 성과를 연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치 · 경제 · 군사 · 교육 · 문학 · 음악 등에도 관심을 갖고 실학의 내용으로 삼아 연구하였다. 그들은 부국유민을 위해서는 외국의 선진 과학 기술을 반드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조선의 봉건 쇄국 정책에 도전하는 진보적인 주장이었다.3. 정약용의 실학사상- 정약용은 이전 실학자들의 전통을 이어받아 조선 봉건 사회의 무너져 가는 정치 · 경제 등의 제도와 고루한 유교 사상을 폭로하고 비판하였다. 토제 제도 · 정체 제도 · 조세 제도 · 종교 · 국방 문제 등에 대해서도 일련의 개혁 사상과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로써 그는 실학을 집대성하여 당시 학문의 최고 수준에 도달하였다. 그의 실학사상은 주로 사회 개혁과 경제 개혁 그리고 국방 개혁에 관한 사상으로 표현되었다.첫째, 정약용의 사회 개혁 사상은 그의 사회 · 역사관 위에서 형성되었다. 그는 고대 사회를 이상화함으로써 군주제를 반대하고 민주 정치를 부르짖었다. 그는 이상적인 고대 사회가 이후 왕도와 예치의 사회를 거쳐 패도와 법제의 사회로 변했다고 파악하였다. 이렇게 이상적인 정치가 무너지자 원래 백성을 위해 만들어졌던 국가와 법이 통치자가 백성을 수탈하는 도구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인류는 태고시대의 무리생활로부터 사회적 분쟁의 조절을 위하여 통치자 군주제가 민주제를 대체한 것은 우연으로서, 황제가 민의와 민권을 위반하고 혼자서 그렇게 바꾼 것이라고 한다. 이는 당연히 관념론적 역사관이다. 그러나 황권을 신성불가침으로 여기던 봉건 사회에서 감히 군주제를 부정하고 민주제를 제창한 것은 매우 진보적인 것이라 하겠다. 정약용은 〈탕론〉에서 중국 봉건 사회의 역성혁명을 예로 들며 민권 사상의 정당성을 논증하였다. 그는 은의 탕왕과 주의 무왕이 신하로서 군주를 정벌한 사실이 군주 전제 시대에는 반역행위라고 할 수 있지만, 민주 정치의 시대에는 도리어 백성을 위한 행위라고 말한다. 그에게 도덕규범은 정치와 국가 제도에 따라 변하는 것이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다. 천자는 하늘이 내린 존재가 아니라 백성에 의해 존재하기 때문에, 백성이 그의 행동에 찬성하지 않으면 천자를 다시 뽑을 권리가 있다고 본 것이다. 아울러 그는 군주제를 민협의회로 대체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는 당시의 조건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평등을 바라는 백성의 요구를 반영하고 상공업자의 요구 또한 부분적으로 반영함으로써, 왕권에 심각한 타격을 입힌 반봉건적이며 민주주의적인 계몽사상이라 하겠다.둘째, 정약용의 정치적 균권 사상은 경제 개혁론에도 반영되었다. 그는 특권 양반과 부호들이 토지를 겸병하고 농민을 수탈함으로써 다수의 농민이 토지를 잃고 소작농과 유민으로 전락해 가는 당시의 실정을 깊이 우려하면서 지주가 토지세를 부담하고 군포법이나 환곡제를 폐지하며 공전과 균세를 실시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공전과 균세로는 봉건 지주의 토지 사유제를 폐지할 수 없으며, 백성의 빈곤을 해결할 수도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따라서 당시의 토지겸병과 수탈을 배제하기 위해서 그는 이전의 전제 개혁론을 계승하여 여전제, 즉 토지 공유와 농자수전의 원칙을 바탕으로 한 집단 농장제를 주장하였다, 이 집단 농장제는 세 가지 기본 강령을 두고 있다. 첫째, 토지 공유와 농자수전, 둘째, 마을 단위의 공동 경작과 공동 수확, 셋째, 노동 일수에 따른균분을 주장하는 것은, 대대로 토지를 요구해 온 농민들의 절박한 바람을 잘 반영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정악용이 농민에 대한 과중한 수탈과 농민의 유민화를 방지하고자 노력했던 애민정신을 볼 수 있다. 더욱이 농자수전이라는 구호는 근대 각국의 반봉건적 민주주의 혁명이 제기한 경작하는 자가 토지를 소유한다는 토지 강령과 비슷한 것으로 뒷날 반봉건적 민주주의 혁명에서 토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셋째, 정약용의 실학사상 중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국방 사상이다. 그는 당시 무능하고 고루한 봉건 통치자들이 구미 자본주의 열강이 침략해 오려는 기미가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태평성세만 부르짖으며 부패타락하고 안일한 생활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국방을 소홀히 하여 무방비 상태에 놓이도록 한 데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에 그는 왜란과 호란에서 얻은 교훈을 총화하고 이전 실학자들의 사상을 계승하여 자신의 국방 개혁 사상을 내놓았다, 정약용은 도탄에 빠진 백성의 생활 문제를 해결 하는 것이 국방 문제를 해결하는 선결 조건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군포제를 개혁함으로써 백성을 중간 수탈자에게서 벗어나게 하여 병역 부담의 폐해를 시정하고, 또 환자법도 개혁하여 국가의 전시 식량 축적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백성에게 부과되는 병역 의무와 관련된 각종 폐해를 없애야만 백성이 군대에 기꺼이 복무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런 견지에서 그는 백성이 전시에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직접 보위하는 것이 자신의 이해와 직결되기 때문에 결국나라도 잘 수호할 것이라는 자기 보위 사상을 제기하였고, 또 그것을 상술한 여전제 실시와 결합시켜 병민일치 · 병농일치를 실현하는 것이 효과적인 방도라고 보았다. 이와 동시에 정약용은 군사 시설과 군사 장비의 낙후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성 구축의 기술적인 문제를 고찰하였다. 함선을 만들어 일상적으로 훈련하고 훌륭한 군사 무기를 제조하기 위하여 상공인에 대한 대우를 개선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런가 하면 ‘이용감‘을 통하여 새로운 군사전체의 모습은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바로 이 점에서 정약용은 한 번 거쳐 가는 사상가가 아니라 평생을 두고 연구할 만한 다양하고 풍부한 세계를 간직한 사상가이다. 그는 그 시대의 여러 사상적 흐름에 대해 폭넓게 관심을 가졌으며,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면 어떤 사상이라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을 지녔던 사상가였다. 바로 이러한 열린 마음에서 정약용의 창조적 사유가 배양되었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 주는 혁신적 사상을 체계화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정약용의 사상이 고전으로서 지닌 중요한 가치를 네 가지 점에서 확인하고 싶다. 그 첫째는 인간의 재발견이다. 둘째는 애민정신이다. 셋째는 객관적 증거를 중시하는 합리적 학문자세이다. 넷째는 과학적 실용정신이다.첫째 인간의 재발견이란 특히 육경사서의 유교 경전 전체를 창의적으로 재해석한 경학을 통해 인간 존재를 새로 해명하는 데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인간 존재의 근원으로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해명하면서, 인간이 두려움으로 하늘의 명령을 따르고 하늘을 섬겨야 하는 신앙적 인간 존재라는 점을 생동적으로 밝혀주고 있다. 또한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인식하면서 도덕적 의식과 의지가 있는 인간 존재와 사물을 엄격히 구별할 것을 요구하였다. 나아가 덕은 인간 존재가 태어나면서부터 지닌 것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과 행위를 통해서 실현할 수 있는 것임을 주장하였다. 바로 이 점에서 성리학의 인간 이해가 ‘이’의 보편성에 근거하여 하늘과 인간이 ‘이’에서 일치하고, 인간과 사물도 ‘이’를 공유하며, 인간은 도덕성을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다는 성리학의 인간관을 전면적으로 극복하는 새로운 인간 이해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둘째 나라의 근본이 백성이라는 민본의 원칙은 유교사회에서 지속적으로 확인되어 왔으나, 백성들은 현실적으로 항상 계급적 신분질서 아래서 착취의 대상이 되어 극심한 빈곤과 학대 속에 시달려야 했다. 정약용은 백성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고 보호할 수 있도록 법률과 행정제도의 개혁을 추구하였으며, 시다.
중앙아시아의 음식문화최근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면 케밥이란 메뉴를 쉽게 볼수 있다. 처음 케밥이란 메뉴를 보았을 때는 밥이란 뒤의 명칭탓에 볶은밥같은 밥의 일종으로 생각이 들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케밥은 유럽이나 미국음식으로 닭꼬치의 일종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원래 뜻은 ‘꼬챙이에 끼워 불에 구운 고기’이며, 중국·프랑스 요리와 함께 세계 3대 요리의 하나로 꼽히는 터키 요리 중에서도 대표적인 요리로써 드넓은 중앙아시아 땅을 누비던 유목민족 조상 덕분에 빠른 시간내에 쉽고 간편하게 해먹는 요리에 익숙해졌고 케밥도 그과정에서 태어났다고 한다.나는 지금부터 중앙아시아의 먹거리 문화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중앙아시아의 문화를 살펴보는데는 식생활만큼 훌륭한 소재도 없을 것이란 생각과 더불어 케밥의 탄생 배경이 중앙아시아의 유목생활에 있다는 데에 대한 호기심도 발동하였기 때문이다.몽 골도시의 가정을 방문하거나 시골의 '게르'를 방문하면 그 집 안주인은 반드시 찾아온 손님들에게 '수테:차이(우유차)'를 권하고, 또 '차강:이데:(유제품)'와 '보즈/보쯔(찐만두), 양고기 삶은것 등을 대접할 것이다. 이 때 이것을 받아들면서 "바야를라 '바이를라(고맙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고 맛을 보는데 아마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먹기가 힘들지도 모르겠다. 이럴때 입에 맞지 않는다고 이상한 표정을 짓거나 바로 식탁에 내려놓는다거나 하는 것은 큰 실례이니 되도록 막을 것을 권한다. 입에 맞지 않는다고 아예 손도 대지 않는 것보다는 적당히 분위기를 봐서 먹는 시늉이라도 할 것을 권한다. 먹다가 정 못 먹겠으면 그대로 내려 놓는게 좋으며, 남았다고 해서 그것을 바닥에 엎질러 버린다거나 하면 절대로 안된다. 특히 '차강:이데(유제품)류는 신성한 음식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그들의 눈앞에서 이를 함부로 땅에 버리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될 것이다.우리가 일반적으로 몽골인들의 주식은 유목민들의 주식은 유목민들이기에 쉽게 육식으로 생각을 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몽골인들은몽골인들은 물고기를 먹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금방 배가 고파지고 영양도 없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실제로 몽골의 고양이에게 물고기를 주면 먹지 않는다. 난 생 처음 본 물건을 대하듯 고양이가 물고기를 어색하게 생각하고 그냥 지나친다. 한국인들의 의식으로는 도저히 믿기 어려울 것이다. 유제품은 종류가 너무나 다양하기에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지만, 간단하게 몇 종류 상용하는 것들만 설명을 하자면1)유제품 류- 뱌슬락 : 몽골치즈로 짠맛이 없고 서양치즈보다 약간 단단함- 으름 : 우유를 끓일 때 맨 위에 뜨는 유지를 굳혀서 만듦.- 아롤: 으름을 만든뒤 우유를 다시 끓여 으럼 처럼 굳혀 만듦.- 수태자: 우유와 찻잎을 같이 넣고 끓여 만든 차로 몽골인들이 가장 즐겨 마시는 식품- 수민 아리흐 : 우유를 증류시켜 발효하여 만든 술로 도수가 약하나 많이 마시면 정신을 잃을 정도임- 타락:몽골식 요구르트- 아이락: 마유주라고도 하며, 말 젖을 푸대에 넣고 막대기로 1500 - 3000번 정도 저어 발효가 되면 그 다음날 이용한다. 보통 어른들은 여름이 되면 다른 것은 먹지 않고 이 아이락만 하루에 10-15리터 마시며 생활을 한다. 6월부터 10월까지만 생산이 되고 남쪽의 고비사막지역의 마유주를 최고의제 품으로 여기고 있다.몸 속의 나쁜 찌꺼기를 씻어 준다고 하기도 하는데, 처음 먹는 사람들은 설사를 조심해야 한다.2)육류:몽골인들에게 고기는 혹독한 자연환경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식량이다. 몽골인 들은 보통 하루에 일인당 200그램의 고기를 섭취한다. 불에 굽는 방법은 사용하지 않고 물에 소금 넣고 삶아서 먹는다. 주로 소고기와 양고기를 몽골인들은 즐겨 먹는다.3)음식류- 보쯔:귀한 손님이 오거나 명절이 되면 우리의 고기만두와 비슷한 보쯔라는 만두를 빚어 먹는데 몽골의 설날에는 이 보쯔를 1500-3000개 정도 빛는다. 이 보쯔라는 말의 기원은 중국어의 '빠오즈(두러 산 물건)'이라는 말에서 왔을 가능성이 크다.- 호쇼르:손바닥만한 크기의 튀김만두로돌을 넣고는 공기가 새지 않도록 잘 묵으면 된다. 겉의 털은 고기가 익으면 스스로 빠져 떨어진다. 다 만들어진 버덕은 보기에 흉측 하지만 맛이 좋고 특유의 노린내가 나지 않기 때문에 야외에서 외국인들에게 주로 대접하는 요리이다. 보통 3-4시간 정도 기다려야 맛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인내력이 필요한 요리이다.- 허르헉:뜨겁게 달군 돌을 이용하는 점에서 버덕과 비숫한 요리이지만 더 손쉽고 양고기로 한다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우선 양을 잡는 방법부터 다르다. 우리 안에 있는 양을 고른 다음 산체로 양을 배를 10㎝정도 가르고 손을 넣어 페동맥을 손가락으로 끊는다. 삼사분이 경과하여 양 숨이 넘어가면 조심스럽게 양의 가죽을 벗긴다.그리고 양의 가죽을 펼치고는 그 위에서 양을 조각조각 각을 뜬다. 이 때 양의 가슴 안에는 심장에서 나온 피가 가득 고여 있는데, 이를 그릇에 담아 내장에 넣고 삶아 피순대를 만들어 먹는다. 내장들은 모두 삶아 먹는데 한국인들이 와서 이 때 양의 생간을 먹는 것을 몽골인들이 보고는 기겁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리고 이 고기 조각들을 양철통에 달군 돌과 함께 차곡차곡 넣고는 뚜껑을 닫고 김이 새지 않도록 잘 닫는다. 이 때 양파나 마늘 등 한국인들의 입맛에 맞게 양념을 가미할 수 있다. 뚜껑이 완전히 닫히고 40분 정도 있으면 달군 돌이 고기를 맛있게 익혀준다.특이한 점은 이 고기를 익힌 돌을 나중 꺼내 손바닥에 쥐고 있으면 혈압과 심장 등 몸에 좋다고 여기고 있다. 이 돌들은 고기를 익히고 나서도 손에 쥐고 있기 힘들 정도로 뜨겁다. 몽골인들은 짐승의 뼈를 절대로 잘르지 않고 관절을 꺾어 해체를 한다. 또한 가축을 잡을 때 되도록 빨리 숨이 넘어가도록 하고 이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심한 욕을 먹는다.티베트티베트의 먹거리는 별로 발달되어 있지 않다. 보통 밥처럼 먹는 수유차(버터에 밀가루 차를 타서 미숫가루 처럼 먹는)와 야크 고기로 만든 면, 스프등이 티베트 인들의 주식이다. 농업이 발달되어 있지 않아 볼 수 있는데, 특히 사천요리가 주를 이루고, 가격은 조금 비싼 편이다.그리고 수유차같은 것을 맛볼 수 있는 찻집도 많고, 통조림이나 면 종류를 파는 백화점들도 있다. 그래서, 아리(阿里)지역 같이 외진 곳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지역에서 만족스럽게 배를 채울수 있다. 고원(高原)에서는 공기가 희박해서, 80℃만 되어도 물이 끓는다. 따라서 압력솥을 이용하지 않는 한, 쌀이나 고기,채소등이 완전히 익지 않기 때문에 살균이 되지 않고 이로 인해 설사를 하게 되는 일이 흔하다. 아리(阿里)지역과 전장(藏)공로에서는 종종 설익은 음식을 먹게 될 것이므로, 항상 유의하여야 한다.카자흐스탄(본문 자료출처: 세계인터넷 선교학회 - 카작스탄)카작인들은 다양한 종류의 고기(말,닭,소,양)와 낙농물(치즈, 양젖, 발효성 유제품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즐겨 먹는다. 말고기로 만든 진미요리가 아주 인기있는 음식이며 주식은 쌀과 빵이다. 카작 남부지역에서는 과일과 야채가 풍족한 관계로 집에서는 주로 포도, 메론, 가지, 토마토 등 많은 과일과 야채들을 즐긴다. 이슬람교를 믿는 카작인들에게 돼지고기와 술은 금기로 되어 있지만 일반적으로 많은 카작인들은 술을 마시고 어떤 부류에 따라서는 돼지고기도 먹는다. 중앙아시아는 농작물이 풍부하지만 인공관개시설을 필요로 하며 이것이 주요 생태적 문제를 야기시켜 왔다. 곡류, 야채, 과일, 멜론이 제철 수확기에 맞춰 나온다.각 가정은 자기 집과 더불어 밭(다차)을 갖고 있는데, 여름 내내 그곳에서 야채와 과일을 재배하여 자급자족할 뿐 아니라 일년의 먹거리를 충당하며, 충분한 경우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한다. 수확기에 거둔 야채와 과일을 이용하여 다양한 저장음식(각종 과일쨈과 오이지류)을 만들어 야채와 과일이 비싼 겨울을 대비한다. 따라서 여름은 카작인에게 있어서는 가장 바쁜 계절이다. 다차가 없는 가정은 모든 야채와 과일을 시장에서 사야 하므로 훨씬 많은 경제적 부담을 갖게된다. 음식물은 90년대 초반 동안 있었던 식량부족과 비교해 볼 때 상당히 많구르:라그만, 고려인:각종 샐러드)로부터 전해 온 음식들도 해먹는다.손님을 위한 특별한 식사 주요음식은 베스바르막, 만띄, 뿔로프 중 하나가 나온다. 만띄(만두종류)와 뿔로프(기름밥)등의 주음식에 여러 종류의 샐러드를 곁들여 낸다. 식사 후 후식에는 과일이나 말린 살구, 건포도, 호두 등 건과류와 케잌(토르트)과 사탕, 과자, 쵸코렛, 각종 쨈, 과일 등이 나오며 우유를 넣은 차와 함께 마신다. 전통적으로 둥근 상 위에 식탁을 차리고 둘러앉아 먹거나 러시아식으로 의자에 앉는 식탁을 준비하기도 한다. 여성에게는 각종 음식을 격식에 맞게 잘 차려 훌륭한 식탁을 꾸미는 것을 하나의 미덕으로 생각한다. 잔치시에도 이와같은 식탁의 구성은 비슷하다. 손은 식사전후로 조심스럽게 씻게 되어 있는데, 주인이 손님을 위해 물수건을 주거나 조그만 그릇에 물을 담아 수건과 함께 돌린다- 샤슬맄?(양구이): 일종에 바베큐라고 할수 있다.?주로 양고기가 사용되며, 그외 닭,돼지등을 재료로 사용할수도 있다?- 베스바르막 ('다섯손가락'이란 뜻의 카작 전통음식); 주로 재료는 양고기와 밀가루가 사용된다. 베스바르막은 가정에 손님이 방문했을 때, 반드시 준비하는 전통음식이다. 밀가루 반죽을 얇게 밀어 사각이나 칼국수 모양으로 썰어 양고기(말고기나 쇠고기로도 함)를 삶아 건져 낸 국물에 끓여낸 후, 큰 쟁반에 담아내고 그 위에 삶아 놓은 고기를 썰어 놓고 위에 쏘스를 끼얹어 낸다. 이때 귀한 손님에게는 양의 머리중 귀중한 부위를 집주인이 손수 잘라 손님에 대접한다. 이것은 과거 유목생활에서 전해 내려온 음식이다. 수저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먹는 음식이라 해서이 이름이 붙여졌다. ?- 러시아 셀러드; ?사탕무를 주 재료로 사용한다. 사탕무는 아주 달고 색깔이 붉은색의 색소를 다량포함하고 있다. 맛이 달콤하고 인상적이다.??- 말 순대; 고려인들이 만드는 특별한 음식이다. 말고기는 카작에서 가장 값비싼 고기이며 카작인들이 즐기는 음식이다. 식용으로 말을 키운다고 한다.- 라그만; 우이그루 민족
실학에 대하여(1) 실학의 개념'실학'은 '실사구시'의 약칭으로 중국「전한서」의 "학문을 닦고 옛것을 좋아하며, 실제의 일에서 옳은 것을 구한다"라는 말에서 연원한다. 따라서 실학은 학문을 연구하는 데는 사실과 증거가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론과 학설만 따지는 당시의 유학과는 달리 우리의 역사, 지리, 언어 등에 관한 국학의 연구가 중시되었다. 이러한 실학은 민족의식과 민족에 대한 자각을 높여 현실 개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였던 민족적, 근대 지향적 성격의 학문이다.(2) 등장배경조선 후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두 번에 걸친 오랜 전쟁으로 우리나라의 많은 땅이 황폐화되어 못쓰게 되고, 식량 생산이 줄어들어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나라 일을 맡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고 백성들의 어려운 사정은 소홀히 하여 많은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의 유학자들은 이론과 학설만 따지면서 백성들의 어려운 처지를 외면하고 이러한 때에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학문을 연구하자고 주장한 학자들이 많이 나타났다. 성리학이 초기의 참신한 기운을 잃고 현실 생활과 동떨어진 이론에만 치우치자 사실에 입각한 비판정신이 일게 되어 청나라에서 들어온 고증학과 서양의 과학적 사고방식을 받아들여 새로운 학풍으로 일어났다. 실학자들은 학문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에 도움을 주어야하고 백성들의 실생활에서의 쓰임과 생활을 풍족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학은 기존의 성리학이 조선사회에서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자, 실학이 대체학문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 것이다. 실학은 크게 나뉘어 두 가지로 형성되는데 하나는 농촌개혁을 주창한 중농주의 학파와 상공업 발달과 자유 무역을 주장하는 중상주의 학파로 나뉠 수 있다.(3) 실학사상의 특징1) '실사구시'의 학문- 실학파의 실학사상은 주자학의 실제를 벗어난 청담공론에 반대하고 학문을 사회적 생산과 생활에 응용할 것을 주장하였고, '경세치용'과 '이용후생'을 목적으로 형성되었으며, 실학 사상가들은 모두 주자학의 '공소·공론'을 반대하고 생산과 생활에 실용적인 학문 연구를 강조하였다.2) 민본적 민주사상- 실학파의 민본적 민주 사상은 유교의 중민 사상이라는 테두리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제기한 평등사상은 객관적으로 상공업 자본가의 이익을 미약하게나마 반영했다는 점에서 진보적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3) 민족적 자주 정신- 실학파는 사대주의에 반대하고 자주 정신을 강조 하였는데, 이는 조선이 진보적인 학자들이 발전한 서양 과학 문화를 받아들인 결과이고, 사대주의가 조선 봉건 사회에, 초래한 심각한 위기에 대한 반성이며,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였다.4) '탁고 개제'의 개혁 정신- 사회 개혁 사상의 특징은 옛날 사람의 도를 빌려 현실을 개혁하려는 탁고 개제의 방법에 있다. 경제 개혁의 측면에서 보면 실학파는 전제 개혁을 매우 중시하여 그것을 부국강병의 중심 고리로 보았고, 정치 개혁의 측면에서 보면, 실학파는 주로 고대 사회의 왕도·인정에 대한 미화와 패도·폭정에 대한 반대를 통하여 정치 개혁의 목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5) '기 일원론'적 철학 사상- 실학파의 철학 사상을 보면, 그 철학의 기본 경향은 리 일원론이 아니라, 기 일원론, 즉 유물론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예로 이수광은 세계의 기원을 물질적인 기, 즉 태극으로 보았고, 아울러 그것이 세계 만물을 창조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기 일원론적인 철학 사상이다.(4) 중농학파와 중상학파☞경세치용학파(중농학파) : 경기도 지방의 재야 남인들, 농업중심의 개혁 사상중농학파들은 토지 소유의 편중으로 인해 농민 생활이 안정되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토지제도의 개혁을 가장 중요시 했습니다.중농학파는 농촌 문제의 해결과 토지제도 개혁을 주장하였습니다,유형원(농업중심 개혁론의 선구자)균전론(신분에 따른 차등적인 토지 재분배 주장) 문벌숭상, 과거제도, 노비제도 등 신분제도 비판, 자영농을 바탕으로 농병일치의 군사조직과 사농일치의 교육제도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익한전론(토지 소유의 상한선을 두어 토지 소유를 제한하고, 영업전을 제외한 모든 토지의 매매를 허용하여 토지 소유의 균등화' 영업전을 정해 영업전을 제외한 토지는 매매할 수 있게 하여 점진적인 토지 소유의 평등을 이루자고 주장) 농촌이 피폐한 원인으로서 노비제도, 과거제도, 양반문벌제도, 기교(사치, 미신), 승려, 게으름 등을‘나라의 좀 ’이라고 규정. 양반도 농업과 상업에 종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정약용(실학의 집대성)여전론(한 마을을 단위로 한 공동농장제도를 시행하여 공동으로 경작하여 그 수확량을 노동량에 따라 분배하자는 주장) 주로 사회 개혁과 경제 개혁 그리고 국방 개혁에 관한 사상으로 표현되었다. 사회 개혁 사상은 고대 사회를 이상화함으로써 군주제를 반대하고 민주 정치를 부르짖었으며, 경제 개혁에서는 여전론을 주장 하였는데, 여전론은 한 마을을 단위로 하여 토지를 공동 소유, 공동 경작하고, 그 수확량을 노동량에 따라 분배하는 일종의 공동 농장 제도를 말하였다. 마지막으로 국방 개혁은 '여전제' 실시와 결합시켜 '병민 일치'·'병농 일치'를 실현 하는 것이 효과적인 방도라고 보았다.박세당에서 성리학(주자학)을 비판함, 이라는 농업서적을 지음☞이용후생학파(중상학파,북학파) : 중상학파는 상공업의 진흥, 기술 개발, 청의 문물 수용 등을 주장하였다. 이들의 관심은 상공업의 유통 및 생산기구, 일반기술면의 발전을 지표로 하고 있어서 중상학파라고 불린다. 상공업정책론으로 점차 성장해가는 상공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며, 봉건사회의 해체를 촉진시키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시대적 산물이었다.유수원(상공업 중심 개혁론의 선구자)'우서'에서 중국과 우리나라를 비교하면서 지나치게 농업에만 의존하지 말고 상공업을 진흥시켜 나라 살림을 튼튼히 해야 한다고 주장 농업의 전문화?상업화?기술혁신을 주장하였다.홍대용(성리학적 세계관 부정)'균전제'를 주장하며 농업에도 관심을 보였으나, 기술 문화 장려, 신분제도 철폐, 성리학의 극복이 부국강병의 근본이라 주장. 그의 사상에서 중요한 것은 전제를 개혁하고 놀고먹는 자를 없애며 신분에 관계없이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등 통치 체제를 개편하고 국방력을 강화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홍대용의 사회 개혁안은 토지 겸병이나 지주의 사적 토지 소유가 없고, 놀고먹는 양반과 세승제가 없이 누구나 다 일하며, 학식과 재능 있는 관리에 의해 부국강병이 실현되는 모습으로 알려진다. 홍대용의 자연 과학 사상과 그에 기초한 기 일원론적 견해 그리고 진보적인 사회 정치 사상은 실학 발전에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하겠다.박지원청나라에 건너가서 생산과 유통의 중요성을 실감한 다음부터는 상공업 진흥에 보다 관심을 기울였다. 수레와 선박의 이용이나 화폐 유통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양반 특권을 폐지하여 도덕을 바로 잡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사회 개혁 사상을 제시하였다.박제가(박지원의 사상을 보다 확충)박제가가 이해한 실학의 구체적 내용은 상업·무역·화폐·유통·농업기술·수공업·교통 운수·국방 등이었다. 그는 이것들이 모두 '이용후생'에 필요한 것으로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학문대상으로 보았다. 그리고 청나라를 다녀온 박제가는 상공업의 발달을 열렬히 희구하여, 그 방안으로서 청나라와의 통상을 강화할 것과, 수레나 선박의 이용을 늘릴 것, 그리고 절검보다는 소비를 권장하여 생산을 자극시킬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또한 양반도 상업에 종사할 것을 주장하였다.(5) 여러 가지 분야에 관한 연구-농업에 관한 연구유형원 : '반계수록' 을 저술하고 , 농촌 체험을 바탕으로 각종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이익 : '성호사설' 을 저술하고 , 농민의 입장에서 개혁 방법을 제시하였다.
이황과 이이의 사상에 대한 비교와 논의1. 유학의 발전- 굳이 보려고 하지 않아도 볼 수밖에 없는 한국의 철학자가 있다. 바로 퇴계 이황(1501~1570)과 율곡 이이(1536~15844)이다. 그들의 사상을 알아보기 전에 먼저 조선을 대표하는 두 유학자인 이황과 이이를 있게 만든 유학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오늘날 우리가 조선시대를 통해 배우는 유학은 신유학이다. 원시유학이 중국의 송나라 시대를 거쳐서 새롭게 발전한 단계가 신유학이다. 우리는 이 신유학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율곡 이이가 19세 때 금강산을 유력하던 시절 어느 암자에서 노승과 문답을 나눴다. 그런데 그 문답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율곡 이이가 “불교의 핵심적 교의가 우리 유가를 벗어나지 않거늘 굳이 유학을 버리고 불교를 찾고 있소?” 라는 말을 했다. 불교와 유교는 서로 공통점이 없어 보이지만 이이의 발언에서 불교와 유교의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발견의 체계’이다. 발견의 모델은 이루어져야 할 모든 것이 ‘이미 자신 속에서, 본유를 통해 완성되어 있다.‘는 발상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서로 다르게 보이는 불교와 유교가 공통점이 있을 수 있는지 알아보자. 송나라 때 불교의 폐단이 심해짐에 따라 사람들은 점점 유학으로 눈길을 돌리고 그로 인해 유학은 새로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원시유학에 부족한 우주론을 보충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와 도교에 견주어서 상대적으로 부족한 부분이라고 생각되는 형이상학적인 내용을 이 시대의 유학자들은 많이 연구하였다. 여기서 탄생한 유학은 기존의 유학에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2. 조선시대의 유학 수용 배경(주자성리학)- 고려 말에도 불교의 폐단이 심해지자 유학자들은 불교를 비판하면서 이성계와 결탁하여 조선의 건국 세력이 되어서 나라의 사상을 유교로 바꾸었다. 그 이후 조선의 봉건지배계급에게는 자기의 정치적 지배를 실현하고 공고화할 수 있도록 봉건적덕질서를 합리화하려는 데 있었다. 따라서 주자성리학에서는 자연의 모든 사물 이전에 존재하는 태극은 모든 사회적 관계 이전에 존재하면서 사회적 관계를 규정하는 영원불변하는 법칙(원리)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렇듯 주자성리학에서는 자연의 합법칙적 현상과 마찬가지로 군신 관계도 사회의 자연스러운 질서로, 어길 수 없는 절대적 질서로 합리화하고 군신관계에서 “임금은 하늘과 같다”고 함으로써 왕권을 절대화하며 봉건지배계급들이 필요로 하는 사상과 이론을 제공하였다.3. 이황과 이이의 철학 사상- 이황과 이이는 조선시대 중반에 활동했다는 점과 성리학을 연구했다는 점에서 닮았지만 이들의 철학에는 큰 차이점도 있다. 두 사람의 생몰연대에서 보듯이 둘의 나이는 한세대 정도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 한세대는 조선의 전-후기를 가르는 나름대로 격변의 시대였기 때문에 그만큼 변하는 사회를 안정시킬 지도적 사상이 필요했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유학(儒學)의 유(儒)자는 需필요할 수이다. 즉 사람이 정신수양을 하는 데 있어서 필요로 하는 학문이다. 성리학의 목표는 수기치인이다. 즉 학문의 목적을 도덕적 인간과 사회에 구현에 두었다. 즉 윤리적인 자아완성을 통하여 세계와 우주 경영을 목표로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성리학이 사회를 안정시킬 지도적 사상이 되었던 것이다. 일단 이황과 이이의 사상을 알기 전에 이(理)와 기(氣)의 개념부터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다. 쉽게 말해 ‘이’는 변하지 않는 근본 원리를 뜻하고 ‘기’는 만물을 구성하는 재료를 뜻한다. 물이 들어있는 그릇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때 물 자체는 ‘이’에 해당하고 물을 담고 있는 그릇은 ‘기’에 해당한다. 물이 어느 그릇에 담아도 변하지 않는 근본적인 물질이라면 그릇은 그 모양과 넓이에 따라 달라지는 피상적인 물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먼저 간략히 이황과 이이의 철학사상을 살펴보자면 이황은 리와 기의 혼합을 거부하여 양자가 뒤섞일 수 없다는 ‘불상잡’의 관계를 강조하는 리기이원론적 입장이고, 리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주조하였다. 따라서 이황의 이기론을 정리하자면 이황은 ‘이는 귀하고 기는 천하다'는 이귀기천(理貴氣賤) 사상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도덕적 원리와 인식에 뜻을 두고 본성을 중시했다. 이황이 정의하는 ‘이’에는 양반, 상민, 천민과 같은 계급도 포함됐다. 그는 신분을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근본적인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신분제를 옹호하는 정책을 폈다. 특히 ‘이가 발하면 기가 이를 따른다’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은 ‘이’를 우선시하는 이황의 핵심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반면에 이이는 ‘이는 통하고 기는 국한된다’는 이통기국론(理通氣局論)을 펼치며 ‘이’와 ‘기’가 서로 의존ㆍ보완 관계를 유지해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했다. 또한 이황과 달리 ‘기’를 중시해 사물의 본성인 ‘이’가 ‘기’를 통해 변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이는 밖으로 보이는 인간의 행동이 ‘기’에 해당한다고 생각했고, 이 행동이 이념과 생각을 발현한다고 주장했다. 이이의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이’에 해당하는 신분도 ‘기’로 바꿀 수 있다. 때문에 이러한 이론은 후에 신분제 철폐를 주장하는 학파에게 사상적 근거를 제공했다. 이처럼 이이의 사상은 이황의 사상에 비해 유연하고 현실적인 면이 많았다.2. 이황과 이이의 심성론 : 법제적으로 볼 때 조선은 전대인 고려에 비해 굉장히 개방적인 사회로서, 양반 신분이 사회 지도층일 근거가 매우 빈약하다. 고귀한 혈통을 타고 나는 것도 아니고, 본질적(법적)으로 농부나 중인과 차이가 있지도 않다. 양반이라는 사회 지도층이 되려면 최소 친가나 외가 쪽의 4대조 안에 문반이나 무반에서 5품 이상 관직을 지낸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조선 성종 이후 정계에 많이 진출한 사림파의 경우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켜 관직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이름난 선비'는 있어도 '법제적 양반'은 드물었다.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사림파는 주로 향촌의 중소 지주로서 기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향촌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한 '평범하지 않은 지도층 것)에 의해 격발되어 이가 그 뒤를 쫒아간다는 것이고, 고귀한 감정은 이에 의해 격발되어 물질적인 것이 이의 통제를 받으며 쫓아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단을 추구하는 군자(=선비=양반)는 물질적인 것에 흔들리지 않으며 이(理 ; 우주 만물을 주재하는 근본 원리)에 의해 행동하는 고귀한 신분인 것이다. 상것들과는 레벨이 다르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황에게 신분적 구분의 정당성은 '이'에 속하는 본성을 가졌느냐, '기'에 속하는 본성을 가졌느냐에 달린 것이며, 선비들에게 '이'를 추구하는 활동(경 : 敬)은 가외의 활동이 아니라 '선비로서 부여받은 본성'으로 규정하며 수양에 게으른 것은 본성(=즉 우주의 원리에 따라 주어진 역할)에 게을리하는 것으로 보고, 끊임없는 선비 수양을 강력하게 권고했다. 이것이 이기호발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조선 중기의 마지막을 장식한 이황의 입장이 "모든 것이 정연했던 전세대의 질서를 다시 튼튼하게 손질"하려는 것이었다면 한세대 후에 태어난 이이는 변화에 적응하고 그것에 적합하도록 사상을 손질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이발은 불가하고 기발만 가능하며, 사단이고 칠정이고 모두 기발이승이다. 또는 이는 통하고 기는 국한된다는 것은 일종의 보편과 특수 관계로 생각하면 된다. 즉, 모든 실제의 상황들은 '구체적인 조건 속에서 발생하며' 모든 구체적 상황에는 보편적 원리가 들어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보편적 원리가 그 자체로 실존하거나 스스로 움직일 수는 없다. 이러한 점에서 우주 만물의 운행 원리인 '이'는 모든 곳에 존재하지만 (이통), 실제 상황을 이루는 물질적인 조건들은 구체적 현실 속에서만 존재하게 된다(기국). 그러므로 순수한 '이'만을 추구하는 것은 뜬구름 잡는 부질없는 짓이며 구체적인 현실에 얼마나 우주의 원리를 입히고 더 잘 발현될 수 있게 하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심성론의 관점에서 볼 때 상민의 희노애락이나 선비의 인의예지가 '본질적 근원에서는 같은 것이다.'라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도 보았지만 율곡은 이는 발할 수 없고 발하는 것은 기뿐이라고 한다. 그래서 율곡의 학설을 기발이승일도설이라고 한다. 기가 발하여 이가 기에 내재한다는 것이다.) 사단은 인의예지인 인간의 순선한 것이고 칠정은 희로애락애오욕의 감정으로서 가변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사단은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 다시 말해서 본연지성을 말하는 것이고 칠정은 기질지성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인 순선한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 되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 된다. 이란 보편적인 것을 발하게 하는 것이고 기는 특수한 것을 발하게 하는 것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가 발하여 기가 이에 따른다고 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 율곡은 퇴계의 학설을 반대한다. 그런데 그 반대의 논점이 기대승의 논점을 그대로 계승했다는 점이다. 너무도 유명한 이황과 기대승의 7년 서신의 결정체인 사단칠정론에서 기대승이 이황의 이기양발설의 논리가 부당함을 역설한다. 그 논점을 율곡이 그대로 계승하였다. 복잡하지만 그 이론의 뼈대만 소개하자면 이황은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율곡은(율곡의 이 이론이 기대승이 비판한 이론이다.) 사단과 칠정이 모두 기가 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발하는 것은 기이고 이는 운동성이 없어 발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는 쉽게 말해서 움직이게 하는 동인이지 스스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발한 기 중에서 순선한 것이 발현되면 그것이 사단이고 발한 것이 순선하지 못하고 불순한 것이 섞여 있으면 칠정이라는 것이다. 즉, 칠정 속에 사단이 포함되어 있다는 구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이황처럼 사단과 칠정이 따로따로 발하는 구조가 아니라 서로 섞여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것이 이기지묘라는 것이다. 그래서 발한 기 중에서 순선한 것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이것은 수양론으로 연결된다.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기 때문에 이가 중요한 것이 된다. 곧, 이황은 선정의 근원을 리에 둔다. 그리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