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 대동아 동아시아‘침략에 대한 정의는 학계에서도, 국제적으로도 확실하지 않다.국가 간의 관계에서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현재 일본의 총리인 하시모토 아베의 발언이다. 아베는 일본의 대표적인 극우 정치가이고 노골적인 우경화노선을 걷고 있다. 이 발언으로 인해 한국 국내뿐 만아니라 전 세계가 발칵 뒤집혔다. 아베총리는 일본의 자칭 ‘다케시마의 날’ 행사에 중앙 정부 당국자를 처음으로 보냈고, 그 후에는 외교청서를 통해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하는 등 망언을 해왔다. 이러한 발언을 하던 아베가 이번에는 한국을 비롯한 피해국들을 완전히 무시하기로 한 모양이다. 침략에 대한 정의가 확실하지 않다는 것으로 보아 아베는 일본의 침략역사를 완전히 부정하겠다는 의도를 내비치듯 하다. 이러한 발언 뿐 만아니라 일본의 ‘다함께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은 국회의원 168명이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했다고도 했다. 이에 한국과 중국이 반발을 하자 ‘야스쿠니 참배는 매년 해 온 일’이라면서 ‘새삼스럽게 이야기될 일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했다. 이러한 일본의 모습은 언제부터 이루어 진 것일까? 왜 그들은 자신들의 바르지 못한 역사를 인정하지 못할까...?일본의 삐뚤어진 태도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그들의 이러한 모습은 근대 오리엔탈리즘의 일면을 보여준다. ‘동아, 대동아, 동아시아’의 책을 쓴 고야스 노부쿠니는 대표적인 근대 일본사상 비판학자로써 근대 일본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비판과 역사적 고찰을 바탕으로 앞으로 일본 사상계가 나가야할 방향과 새로운 동아시아의 건설을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일본이 형성시킨 ‘동아’라는 개념부터 ‘대동아’, ‘동아협동체’ 등등이 언급되었다. 일본의 근대 오리엔탈리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형성시킨 개념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탈아’라는 언설구성은 서양은 문명 선진국이며 비서양과 아시아는 비문명국이라는 이분법적 세계인식 속에서 신흥문명국으로 규정하였다. 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우열을 정하였던 것이다.이렇게 일본은 자신들을 우위에 있는 국가라고 내세우면서 동아의 국가질서를 재구성하려고 시도하였다. 일본은 스스로를 아시아의 맹주라고 자칭하며 무력으로 아시아를 유럽 중심의 문명적 세계질서 속에 편입시켰다. 동시에 일본은 아시아의 유일한 문명국이라고 규정하며 자신들을 중심으로 아시아를 방위적으로 재편성할 것을 요청하면서 이러한 개념들을 확립시켜나갔다. 이러한 세계전략이 일본의 20세기 전·중기를 지배하였다.한편 일본을 맹주로 동아시아의 국제지서를 재구성하려 하는 것은 동아시아의 맹주가 중국에서 일본으로 교체됨을 의미했다. 당시 중국은 화이질서라고 하는 중화 문명적 국제질서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 하지만 19세기 유럽의 월등한 항해기술과 군사력으로 동아시아 세계에 그 새로운 문명적 위력을 과시하게 되면서 중국은 충격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근세 중국의 지위는 다분히 이념적이었고 명·청 교체기를 거치면서 주변국에서는 이미 중국에 대한 회의와 동요가 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여전히 중화사상에 머물렀다. 그리고 여전히 이념적으로는 중국이 동아시아의 맹주였다. 이에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맹주의 지위를 빼앗기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군사적인 승리뿐만 아니라 이념적인 승리도 필요하였다. 동아시아에서의 이 맹주의 교체는 신구 문명의 교체이며, 정체에서 진보로 역사관을 혁신하는 것이어야 했다.‘동아’는 1945년까지 제국 일본의 역사과정과 깊이 연계되어 있던 개념이다. ‘동아’만이 아니라 ‘아세아’도 ‘동양’ 등과 마찬가지로 매우 역사적이며 정치적인 개념이다. 결코 지리적 개념만 포함하는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동아’라는 개념과 함께 확립되어진 일본인의 아시아관이다. 이때 확립된 일본인들의 역사관, 아시아관을 문제로 삼음으로써, 동아로부터 동아시아로의 전환에 대해 잘 알아야 할 것이다. 즉,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을 기점으로 한 이 전환이 일본인의 아시아관에 어떠한 영향을 중화 주의적 문명 중심에 대한 일원적 벡터를 변용시킨 곳에서 발생한 지역적인 문화개념이기도 하다. 따라서 새로운 문화 개념으로서의 ‘동아’는 지역내의 다원적인 문화 발전을 예상하게 했다. 그것은 ‘동아불교사’ 전파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다. 동아불교사는 인도·남해 국가들에서 인도차이나 그리고 티베트·서역에서 지나·몽고·만주를 거쳐 조선·일본에 이르는 전파과정을 가지고 있다. 이 과정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여러 영역과 각 시대의 불교를 다원적으로 추적하고 있는 것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화 개념으로서의 ‘동아’는 어디까지나 제국 일본의 학술적인 관점에서 성립된 것이었다. 결국에는 제국 일본을 구성하는 정치적인 개념으로서 ‘동아’ 혹은 ‘대동아’에 흡수될 수 밖에 없었다.일본은 동아를 자신들의 정치적인 이념의 개념으로 확립시키고 더 나아가 ‘동아협동체’라는 개념을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세계 구질서에 대해 ‘동아’의 협동체적 세계를 새로운 세계사적 사명을 띤 ‘신질서’로서 구성하고자 하였다. ‘동아협동체’론을 이렇게 하여 구성시켜 나갔다. 따라서 ‘동아협동체’론을 이루는 신질서 주장은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제국주의적 패권 확립의 의도와 행동을, 영국과 미국에 대항한 ‘일·만·지’ 공동의 ‘동아신질서’를 건설하기 위한 성전으로 뒤바꾸면서 성립된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동아신질서’를 건설하자는 주장은 아시아의 선진국인 동시에 후진 제국주의국인 자신들이 자립을 원하는 후진 아시아 민족들의 자립 요구를 이념적으로 대표하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말하자면 일본의 이 주장에는 위장된 대표자의 자격으로 세계의 기존 질서를 재편하려는 요구가 담겨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아협동체’론은 분명히 일본이 중국과 아시아에서 감행한 제국주의 전쟁이 만들어낸 이론적인 산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대 일본의 학자들과 지식인들 대다수가 아시아문제를 둘러싸고 참여를 하여 구축시킨 역사적 체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동아협동체’론은 온전히 일본인의 관점에서 아시아문제를 구축시동아’는 ‘동아’의 개념에 이러한 ‘남방권’을 포함하여 형성되었으며, 그때부터 ‘대동아’는 ‘서양과 동양, 식민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종속과 자립’과 같은 형태로 개념적 틀 속에서 이념화되었다. 일본이 동아 민족들의 위장 대표로서 동아협동체로 이념화 한 방식을, 이번에는 더 나아가 세계사적인 규모로 세계구질서의 재편 요구와 함께 재현하고자 한 것이다. ‘대동아 공영권’의 이념은 태평양 전쟁을 거치면서 ‘남방’에 대한 일본의 전략적이고 인식적인 관심의 확대와 함께 ‘동아협동체’로 다시 이념화되었다. 이 이념은 동아신질서의 건설이념을 새롭게 확대된 ‘대동아’에 적용함으로써 성립된 것이다. 하지만 ‘남방권’으로 확대시킨 것은 ‘동아신질서’이념이 내포하고 있었던 가식적인 논리를 한층 더 강화한 것이 되었다. 즉 영국과 미국 등 서구의 지배를 받고 있던 아시아 민족들의 독립과 해방, 또 민족들 간의 호혜적인 협력 관계의 수립 요구를 이념에 반영시킨 공영권의 이상을 표명하게 된 것이다.아시아 내에서는 외부에 속해있던 남방을 대동아회의에 포함시킨 것은 아마, 이미 전쟁을 수행하는데 곤란한 처지가 된 일본이 전쟁 협력을 위해 소집한 것일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대동아회의에서는 자주독립과 인종차별 철폐를 선언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이 선언은 일본의 전쟁이 아시아가 영국과 미국에게 보여준 아이러니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이 위장된 이상도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현실을 은폐할 수가 없었다. 제국 일본이 아시아 민족들의 대표임을 자처했다는 것과, 그들이 대동아전쟁이라고 부른 이 전쟁은 아시아의 여러 지역과 여러 민족들에게 커다란 불신만을 남겼을 뿐이다.‘동아’는 결코 지역 개념이 아니라 확실한 역사성을 띠면서 성립된 지역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1920년대 제국 일본에서 문화적 지역개념으로 성립이 되었다. 그리고 1930년대에서 1940년대에 걸쳐서 제국 일본이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지역으로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지적인 경략을 근대 유럽의 인문과학적 시각으로 발견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학문적 체계 내에 자리매김이 되었으며 학문적 방법으로 서술되었던 것이다. 동양에서 살고 있는 동양 사람에게서 발견된 것이 아니라 서양 사람의 눈에서 동양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동아문화에 대한 토론회를 열게 된다면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시작되어야 할 것이며 동아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 면밀히 검토해봐야 할 것이다.앞에서도 말했듯이 동아라는 개념은 문화사적인 개념으로 성립이 되었다. ‘동방아세아’라는 문화적 지역 개념을 가진 미술사를 역자가 ‘동아 미술사’로 일본 독자들에게 제공하였다. 여기서 ‘동아’란 중국에 기원을 둔 미술이 중국에서 조선, 그리고 일본으로 전개된 것을 말한다. 그리고 각각의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발달한 미술을 중국 밖의 관점에서 역사적으로 기술하면서 성립한 문화적 지역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안에서 성립한 관점은 ‘중국 미술사’의 주변에 대한 영향사라고 할 수 있으며 ‘동아 미술사’는 아니다. 만약 중국에서 동아미술사를 성립시키고자 한다면, 중국 미술을 기원으로 보아 중심적 성격을 부여하면서도 그 미술사적 전개를 동아시아 미술의 한 전개로 상대화하는 관점이 필요할 것이다.하마다는 고고학적 관점에서 ‘동아’를 문화적 지역 개념으로서 구성하였다. 문명적 기원인 중국과 그 중국과 동일한 문명권을 구성한 조선과 일본을 포괄하는 지역을 동아라고 가리켰다. 그것은 중화문명권이라고 불릴 수 있는 지역이기도 했다. 그러나 하마다는 그 문명을 ‘동아 문명’이라고 말했고, 결코 ‘지나 문명’, ‘중국 문명’이라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동아 문명’이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문명권에 포괄되는 지역에서 중국 이외의 나라와 지역으로 까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문명에 대한 새로운 학술적 관점을 가지고 만들어낸 문명론적 혹은 문화사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반에 학술적 관점을 자신의 것으로 한 근대 일본은 문명론적이고 문화사적인 ‘동아’라는 개념을 창출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이있다.
사화와 반정의 시대Ⅰ. 들어가며오늘날이나 과거 조선시대나 사람들은 각자의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주도권을 잡으려한다. 이에 대한민국의 대통령, 여당, 야당과 조선시대의 왕, 훈구파, 사림파를 빗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왕, 대통령) 아래 여러 이해관계(여·야당, 훈구·사림)가 있고 그들은 각자의 의견을 주장한다. 물론 한쪽 의견으로 치우치면 안 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여러 의견이 있다는 것은 매우 좋은 점일 것이다. 이에 조선시대에는 삼사(三司,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라는 언론기관이 존재했다. 왕이나 기존세력들이 빗나가지 않는 정치를 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사화와 반정의 시대’ 이 책에서는 단순히 훈구와 사림의 대립이라는 이분법적 구조와는 다르게 삼사라는 기관을 통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조선시대의 이해관계를 들여다보려 했다.조선 제 9대 왕 성종부터 제 11대 왕 중종까지 3대 75년은 정치적 안정과 불안정이 교차하거나 공존하던 시기였다. 성종연간에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반포로 유교정치가 꽃피웠다고 할 수 있다. 경국대전은 나라를 다스리는 큰 법전이라는 뜻을 가진 것처럼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거의 그대로 조선의 토대가 되었던 법전이었다. 그러나 성종 사후 연산군 대에 이르러 두 차례의 사화(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중종 대에 한 차례 기묘사화를 겪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정치적 측면에서 삼사의 위상이 급격히 제고되었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과전법이 붕괴되어 경제구조의 전면적 수정이 필요해졌다. 사회적 측면에서는 사림세력이 등장함으로써 지배세력의 교체가 시작되었다. 이 중 특히 삼사의 기능 확립을 중심으로 정치제도가 발전하여 그 사이에 사화와 반정이 발생했다. 이 책에서는 국왕, 대신, 삼사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이 시기 정치적 변화를 보았다. 여기서 말하는 대신은 주로 2품 이상의 관원으로 주로 의정부 당상과 육조 판서를 의미한다. 또한 이 책에서 전근대의 왕정에서 국왕의 영향력, 개인적 성향이 치세을 자주 받았으며, 동왕 9년 4월에 신하 이심원은 “세조대의 훈신을 쓰지 말자”고도 했다. 대간의 위상이 제고될수록 대신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요컨대 성종은 대신을 견제하기 위해 대간의 언론활동을 격려했지만, 인사권에 대한 침범은 조금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우회적인 방법, 즉 세련되고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왕권을 행사했다. 이것은 시간을 지나면서 대간의 언론활동이 점점 많아지고 있음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시기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왕권이 확립되면서 대신의 세력이 약화된 반면 대간의 육성을 통해 그들의 위상이 제고되는 변화를 겪었음을 알 수 있다. 성종의 기본적인 생각은 그 내부의 균형과 함께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간이 성장하면서 비타협성과 배타성이 점차 드러났으며 새로운 월권세력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특히 동왕 12년 송영의 인사 발령 문제로 대간의 언론활동에 대한 성종의 인식이 변화했다. 점차 성종은 대간이 작은 일은 끝까지 우기지만, 본질적 문제에 대해서는 건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지만 이 시기를 한 줄로 정리하면 국왕, 대신, 삼사가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정치적 정립구도라는 안정적 모습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점점 대간에 대해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한 성종은 우선 대간의 언론권을 적절한 수준으로 제어하기 위해 홍문관의 언관화를 시도했다. 훗날 홍문관은 대간과 함께 언론 삼사로 거듭나지만 당시에는 초창기 대간의 대안적 언론기관으로 시작했다. 홍문관의 언관화는 먼저 경연제도의 변화를 통해 이뤄졌다. 치세 초반에는 대신들이 경연관을 도맡았으나, 친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8년부터는 홍문관원이 강의를 거의 전담하게 되고 대신의 영향력을 줄였다. 그리고 세조대에 혁파된 집현전의 직제를 계승하기도 했다. 이렇게 홍문관은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동왕 17년까지 홍문관의 언론권은 아직 일정한 한계를 갖고 있었지만 점차 성종 후반에 제3의 언론기관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홍문관은 초창기 대간에 대한 탄핵국왕의 권위를 높이는 데 매우 핵심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에 삼사가 반하자 많은 마찰을 빚었다. 또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에 대한 추숭과 사당 건립 과정에서도 마찰이 있었다. 여기에 관해 삼사는 백 번이 넘을 정도로 끈질기게 사직 상소를 올리는 등 시작부터 그 대립각은 매우 불편했다. 연산 3년부터는 대간의 탄핵에 매우 과격한 표현이 동원되었다. 결국 왕과 대신은 삼사의 능상이 당시 가장 커다란 문제점이라는 데 동의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조선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무오사화는 역사와 관련된 숙청이라는 의미로 사화(史禍)로도 불린다.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그것은 세조에 대한 비판을 담은 문서를 작성한 김일손과 그의 스승 김종직, 그리고 그들과 관련된 사람들을 국왕과 훈구대신들이 숙청한 사건이었다. 저자는 이 사건에 대해 그동안 전개된 삼사의 지나친 언론활동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던 국왕과 대신들의 폭력적 제재라는 측면에 좀 더 주목했다. 이에 대해 무오사화를 일으킨 유자광과 이극돈은 김종직과 김일손에게 원한이 있었지만, 신수근은 그렇지 않았다. 신수근은 자신이 승지에 지명되었을 때 대간이 반대했다는 이유 때문에 사화를 일으키는데 가담했다. 그리고 이 사건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도 점차 그 범위가 넓어졌다. 그 사건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종직 일파와 사화 당시의 대간이 동일시되었다. 그러나 무오사화에서 김종직 일파와 삼사를 사림세력으로 분류하고, 그들이 훈구세력과 모든 측면에서 대립각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사림세력의 종장으로 평가되는 김종직의 정치적, 경제적, 사상적 면모가 훈구세력과 그리 다르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많은 친연성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한명회 등 훈구대신들을 칭송하는 글들이 김종직 문집에 드러나나 후대에 삭제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훈구세력의 한 사람인 이극균은 대표적인 사림세력의 일원인 김굉필을 천거하는 등 이분법적으로 나누기에는 어려움이 있은 간언을 올리면서 정치세력의 협력, 대립 관계는 대신과 삼사가 서로 가까워지고, 국왕은 점차 고립되는 구도로 재편되었다. 여기에 대해 연산군은 삼사를 제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대간의 말을 기록해 이후의 증빙으로 삼게 했고, 대간이나 서연관을 지낸 사람은 경연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연산군 입장에서는 삼사이외의 대신들까지도 능상 풍조에 젖어들었다고 생각했고 그는 상황적으로 고립되었다. 국왕에 대한 능상의 척결과 폐모 사건에 대한 처벌이라는 명분으로 시작된 갑자사화는 관원 및 성종의 후궁, 나인, 환관, 게다가 죽은 사람까지도 잔인하고 참혹하게 숙청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갑자사화는 연산군과 그 통치를 폭군, 폭정으로 규정하게 되는 역사적 증거가 되었다.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의 폭정은 더욱 심화되었다. 언론기관의 기능을 극도로 제한해, 지평과 정언의 관직을 없앴을 뿐 아니라 사간원 자체를 혁파했으며 홍문관도 폐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게다가 재수사의 기능 강화를 통한 왕실 재정 확충과 교육 탄압도 두드러졌다. 성균관의 각종 시설을 철폐하고 교육 과목과 의례를 변경했으며 불경한 유생을 감찰해 처벌했다. 이처럼 연산군은 과도한 편집증적 증상들을 보였는데, 갑자사화에서 자행된 집요한 소급 처벌에서 잘 드러난다. 예컨대 환관 김처선과 관련된 조처도 이러한 사례에 해당한다. 이외에도 광기에 가까운 집착을 드러내곤 했다. 이러한 연산군에 대한 기록에는 중종대 이후의 비판적인 시각이 투영되었을 것이지만 실제로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많았다. 특히 연산군은 자신의 친아버지를 원수처럼 여긴데서 비롯된 문제들이 많았다. 연산군 말기에는 연산군이 폭정 때문에 폐위될 것을 두려워했던 여러 기록들이 남아있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예상은 실제 중종반정으로 일어났다. 중종반정은 사전에 면밀하게 준비된 거사는 아니었으나 일단 시작된 뒤에는 많은 지지를 얻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어 두 달 뒤에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이하고 권세를 함부로 부리는 것을 비유한 말)에 비유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이는 탄핵 대상자보다도 국왕을 무능한 이세 황제에 비유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모욕적인 표현으로 간주될 수 있는 표현이었다. 이처럼 중종대 초반에는 반정의 특수한 정황상 중종의 왕권이 아직 제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에서 정국공신이 중심이 된 대신들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국면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삼사가 점차 영향력을 회복하면서 대신과 대립각은 악화되었다. 여기에 대해 삼사의 능상 풍조가 동왕 6년부터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삼사는 천거 받은 사람을 관직에 임용하는 문제와 관련해서도 대신과 팽팽하게 맞섰다. 당시에는 문음으로 대신들이 자제들을 관직에 나아갈 수 있게 했고, 그 때문에 천거 받은 유생들이 등용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삼사는 이를 강력히 비판했다. 요컨대 중종 6년 후반 능상 풍조가 다시 거론되고, 중종 9년 6월에 주요 대신 4명을 교체시킨 사례는 사화를 불러올 정도로 삼사의 영향력이 지대했던 연산군대의 위상을 거의 회복한 것으로 판단된다. 삼사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점점 고조되고 부정적 인식 또한 커졌다는 상황적 배경을 두고 중종은 기묘사림을 등용하게 되는 중요한 정치적 결단을 내리게 된다.중종 10년을 지나면서 중종은 올바른 정치를 위해서 두 가지 방법으로 노력해야했다. 먼저 당시 능상의 무제를 다시 드러내고 있던 삼사를 적절히 제어하며, 상당히 위축된 대신의 위상을 회복시키는 일이었다. 국왕과 대신의 역할을 충분히 인정하는 새로운 정치세력을 발탁해 삼사를 구상하는 것으로 그것을 해결하려했다.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등의 주요 공신들이 사망한 이후에 대신들의 입지는 매우 위축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입지를 강화시키려고 중종은 의정부 서사제를 재시행했다. 기묘사림은 이러한 배경을 통해 발탁되었다. 당시 상황적 맥락을 살펴보면 기묘사림의 등용 배경은 기존의 삼사를 억제하거나 대체함으로써 권력의 역전 현상을 타개하려고 한 것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기묘사림의 영수인 조광조가 삼다.
만국공법서양과 동양은 지구의 정 반대에 위치한다. 위치적으로도 반대인 서양과 동양은 가치관, 문화적 등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서구국가들은 자신들이 최고의 국가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양에서도 중국이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살았다. 중화사상의 개념으로 자신들이 가장 강한 국가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19세기가 되자 중영전쟁을 거치면서 서구열강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위협받는 시기를 겪게 된다. 이에 대한 조선, 청, 일본의 대응과 적응과정을 볼 수가 있다. 특히 조선보다 먼저 청과 일본은 서구와의 접촉과 그로 인해 빚어진 충돌을 겪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만국공법의 수용과 이해는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중화사상과 화이질서를 바탕으로 하는 조공체제에서 만국공법을 기반으로 하는 조약체제로의 변화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변화의 과정에서 각국은 새로운 국제질서를 인식하는 것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게 된다.청과 일본은 동아시아 당사자들 사이에서 최초의 서구적 질서에 따른 조약인 천진조약을 시작으로 동아시아에서도 새로운 국제적인 관계가 출현할 것을 예고한다. 이후 조선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에서의 주도권과 자국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대립하고 이 과정에서 전근대적인 조공체제 아래서의 조선, 청, 일본 삼국의 전통적 관계가 만국공법 체제에 편입이 되었다. 그러면서 서로 다른 국제 질서가 일시적으로 공존하는 가운데 삼국간의 새로운 국제 관계가 성립되어 나갔다. 그래서 이 시기에 대한 국제관계를 살펴보는 것은 삼국의 전통적인 관계가 만국공법체제로의 편입되는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동양에는 사대질서의 개념이 있었다. 사대질서를 이루는 개념 중에 하나는 사대자소이다. 사대자소는 “큰 것이 작은 것을 어여삐 여기지 않는다면 작은 것은 큰 것을 섬기지 않는다”라는 개념이다. 대국은 어진마음으로 소국을 포용해야하고 소국은 지혜로움으로서 대국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대자소의 개념은 이를 이루는 행위자들의 불평등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이렇게 동양에서는 전체적으로 중국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소국들이 조공과 책봉 관계를 이루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을 중심으로 조공제도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중화사상 때문이다. 중국은 중화사상을 내세우면서 자신들을 하늘의 천명을 받은 천자라고 말했다. 이러한 천자로부터의 거리에 따라 국가를 대하는 개념을 달리하기도 했는데 바로 화이사상을 내세운 것이다. 자신들과의 거리가 가까우면 중화, 멀어지면 화외라고 칭하였다. 화이사상의 화는 문명의 세계, 사람의 세계, 중국 등을 뜻하고 이는 야만, 금수, 바깥 등을 뜻한다. 이는 자신들과 거리가 먼 국가들을 모두 야만 취급을 한 것이다. 외국으로 간주하지 않고 모두 이적으로 몰아버린 것이다.19세기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사대질서가 파괴된 것은 유럽의 중세질서가 해체되면서 나타난 공법의 독특한 성격과 충돌하면서였다. 유럽의 중세질서를 파괴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새로운 법질서가 필요했는데, 이를 유스겐티움이라고 한다. 유스겐티움에 관하여 세 가지 견해가 있다. 비토리아는 근대 국제법의 시조로 간주하고 있고 스와레즈와 그로티우스에 이르러 명백해졌다. 스와레즈는 유스겐티움을 국가 안의 법과 국가 사이의 법으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보다 실효성을 갖기 위해서는 관습법으로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로티우스는 로마법의 유스겐티움을 국가 사이의 법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였고 자연법, 귀납적으로 추론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유스겐티움은 유럽의 대국가와 기독교 세계의 법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아직 근대국가가 완성 단계에 들어가지 못한 역사적인 단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아직 국제법에 대하여 명확한 이론이 제시되지 못하였고 막연한 것이었다. 19세기에는 유럽의 세계 팽창을 합리화하는 법적도구로 전락하게 되었다. 19세기의 유럽공법은 유스겐티움의 전통을 이어받아 실정법주의, 유럽중심주의, 팽창주의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실정법주의는 법을 국가의사인 합법성으로 귀착시키는 법적 태도, 학설, 입 서구는 사대질서의 개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주변 국가들과 더욱 억압적인 관계가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유럽의 공법은 팽창주의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개념은 실정법주의와 유럽중심주의를 전제로 하여 나타난다. 유럽 공법이 세계로의 팽창을 부축여 19세기에는 동양과 충돌을 하게 된다.각 나라마다 가치관과 세계관은 다를 수 있다. 또 다른 것이 있는데 바로 언어이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여기에서 오는 충돌도 피할 수 없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를 만국공법이 동양으로 유입되는 과정에서 볼 수가 있다. 동양의 언어와 서양의 언어가 번역의 문제로 처음 충돌하게 되는 것은 아편전쟁 때이다. 아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린쩌쉬는 흠차대신의 직함을 가지고 중국 광둥에 도착한다. 광둥에 이르자 린쩌쉬는 위안더후이의 추천을 받고 국제법 저술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고는 바텔의 저서 중 외국 상품을 몰수하는 내용의 것을 위안더후이와 파커에게 번역을 부탁했다. 이것이 서양의 국제법 관련 글을 한문으로 번역한 최초의 글들이다. 이 번역으로 인해 두 문명권의 충돌은 시작하게 되었다. 먼저 파커가 번역했지만 그 내용이 모호하여 위안더후이에게 다시 부탁을 했다. 위안더후이의 번역은 보다 정확하였다. 이 두 번역은 짤막한 글로 웨이위안의 해국도지에 수록되어 있다. 위안더후위와 파커의 번역은 린쩌쉬에게 큰 영향을 주었지만 큰 충돌의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동양과 서양의 국제 질서 충돌의 시작은 미국의 선교사 마틴이 휘튼의 저서를 한역했을 때이다. 휘튼은 유럽 문명권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합리화하는 국제법 이론가였다. 그래서 그런지 마틴의 번역은 세계정치의 중심과 주변이 지닌 성격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휘튼의 저서에는 여러 가지 번역본이 있는데 마틴은 그 중에서도 로렌스의 판본을 번역의 저본으로 삼았다.이렇게 마틴은 개인적인 것으로 시작된 번역 작업이 1863년에는 중국정부와 연결되었다. 당시 중국은 프랑스와 외교적인 문제로 분쟁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데 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동양 사람들은 서양의 국제법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 내용을 더더욱 이해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또 다른 문제점은 마틴은 목사였고 자연법주의자였기 때문에 그 문화를 중국에 전파시켜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있었다. 만국공법을 번역할 때 원저에는 있지도 않은 항목을 넣기도 하였다. 다행히 동양도 자연법적인 전통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서양 국제법에 대하여 호감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마틴은 고대 중국에서도 서양 공법과 유사한 규칙이 있었다고 하면서 만국공법이 중국에서도 통용될 수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중국 관료층은 이에 대하여 소극적이고 저항적인 태도를 보였다. 서양의 공법을 높이 평가하면 탄핵의 대상이 될 정도였다. 이에 마틴은 만국공법의 내용은 과거 춘추전국시대에도 볼 수 있었던 제도라는 점을 알려서 서양 국제법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려고 했다. 마틴은 중국 지식인들에게 아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틴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이는 당시 중국의 국제적인 불평등 관계를 고정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국제조약은 일방적인 힘으로는 파기될 수 없다는 명분이 있었다. 따라서 만국공법은 중국의 예속화를 합리화시켜주는 법적도구가 되었다.마틴은 휘튼에 이어 마르텐스의 저서를 번역하였다. 마틴은 diplomatie, diplomacy란 서양의 용어를 사대 질서에서도 사용한 외교라는 낱말로 번역을 했다. 여기서 사대질서의 외교는 나쁜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번역을 할 때 어느 특정지역의 용어 하나가 나쁜 뜻이던 좋은 뜻이던 한 단면만을 보여준다면 그것이 문제로 발생할 수 있다. 사대질서는 부정적인 면만 보여주는 개념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언어로 번역을 할 때는 용어의 쓰임에 따라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마틴은 공법편람, 공법회통, 공법신편을 번역했다. 각각의 본 저자는 울지, 블룬칠리 그리고 홀이다. 이들이 저술이 마틴에 의해 한문으로 번역되면서 동양에 커다란 혼란을 가져다줬다. 이들은 유럽 며, 자주와 독립에 대한 다른 해석으로 혼란을 야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양 국제법의 상주 외교사절제도와 교린 질서의 통신사 제도에 대해서도 충돌이 일어났다. 통신사 제도는 서양 중세의 외교제도와 흡사했으나 조선과 일본의 해석방식에 대해서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서양의 공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없었던 조선에게는 일본과의 관계가 더욱 혼란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조선에도 서양 국제법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만국공법이 들어오게 된다. 만국공법이 조선에 들어온 시기는 정확하진 않지만 1876년 2월 이전에 전래된 것은 확실하다.중국의 중화사상의 개념이 조선을 지배할 때, 조선은 당연히 ‘중국만이 대국이다’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보다 강력한 서양세력과 만국공법이 조선에 유입되고 나서야 조선인들은 그것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김옥균과 박영효는 이동인을 일본으로 파견시켰다. 바로 서양 국제법 지식을 터득하게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으로 보아 당시 개화파들이 사대 질서와 국제법 질서의 충돌을 인식하고 서양 국제법에 대한 지식을 아는 것이 시급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 서양세력과 만국공법이 유입되고 나서도 그를 알려고 하는 노력이 없었더라면 조선은 영원히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갔을 지도 모른다. 조선이 동양국가들 사이의 관계에서만 살다가 다른 문화관과 세계관을 가진 여러 국가들의 질서에 포함이 되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에 대한 다른 세계관을 생각해 봐야한다고 본다. 각자의 세계관만이 옳다고 주장하면 서양과 동양은 공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조선내부에서는 반대의 입장이 심하였지만 몇몇 개화파가 만국공법을 익히려는 노력을 보였다는 것에 큰 세계사적 안목을 내비췄다고 생각한다.이동인에 이어 김홍집도 일본에 파견하게 된다. 이것은 조선의 대외인식 변화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김홍집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일본에 머물면서 조선이 서양 열강과 통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새로운 세계정세와 유럽 국제정치의 핵심
왜관, 조선은 왜 일본사람들을 가두었을까?우리나라에게 일본은 항상 가깝고도 먼 나라이다. 과거 일본의 무자비한 악행을 들여다보면 끔찍할 정도로 멀게 느껴지지만, 그들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가깝게 느껴질 때도 있다. 바로 그 예시 중 하나가 ‘왜관’이다. 왜관은 조선 중기 이후 부산에 위치했던 일본인 거주 지역을 말한다. 조선과 일본이 무역을 하기 위해서 만들어졌고 무역 이외에도 많은 것들이 이루어졌다. 참고도서는 ‘왜관, 조선은 왜 일본사람들을 가두었을까?’이다. 그런데 계속 읽어나가면서 이 책 제목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다. 왜, 조선이 일본사람들을 가두었다고 제목을 지었을까? 그저 나는 한국 사람의 입장으로서 ‘조선은 왜 일본인 마을을 국내에 두는 것을 허락해 주었을까?’ 가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조선시대 왜관이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보통은 15세기 초라고 한다. 많은 수의 일본인이 조선에 와서 무역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을 하면서 그들을 통제하기 위한 정책의 하나로서 세워진 것이 왜관이다. 14세기부터 왜구가 매우 활발한 활동을 벌이게 된다. 동아시아해역을 걸쳐 폭력과 기만을 일삼고 조선에 들어와 약탈을 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처음에는 강경한 대응을 하였다. 하지만 이는 별다른 소용이 없어 회유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왜구의 우두머리에게 투항할 것을 촉구하고, 만일 거기에 따르는 사람에게는 조선의 관직을 주어 수직왜인의 입장에서 조공무역을 할 수 있도록 허가를 해주기도 하였다. 이런 회유책에 가장 적극적인 통교 무역자는 대마도의 소우 씨였다. 소우 씨의 출신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원래 고래무네라고 하는 성을 가진 사람들로 일본의 헤이안 시대부터 규슈 다자이후의 관료 계통의 일족이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들이 대마도로 건너가 사무라이로 성장하는 가운데 스스로 도주라고 칭하고 성을 소우 씨로 바꾸게 된다. 이러한 소우 씨는 그들 스스로 조선 측의 제도정비에 협력하고 왜구 단속은 물론 통교자에 대한 통제까지도 맡고 있었다.이러한 일본인 하지만 제포왜관과 서울의 왜관은 사량왜변과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되었다. 부산포왜관은 임시왜관이었지만 일본에서 여러 차례 사신이 파견되었고 조선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대마도가 노력을 한 결과 조선에서도 반응을 보였다.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으로 취임한 이듬해였다. 외부에서 사신이 온다는 것은 내부의 권력을 과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대마도에게 특권을 주었고 소우 씨와 도쿠가와 바쿠후를 공인된 정식 중개자로서 조선과의 외교교섭을 맡겼다. 이렇게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우호적이게 되고 부산포에 두모포왜관을 설치하여 교역을 하게 되었다. 두모포왜관은 고왜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두모포왜관에 사신이 들어오고 교섭을 하게 되는데 이번 교섭의 핵심은 무역 재개의 조건을 포함한 약조의 체결과 교환이었다. 이때 체결된 약조는 계해약조와 임신약조, 정사약조로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선박이 계해약조에는 50척, 임신약조에는 25척, 정사약조에는 30척으로 체결되었다. 약조마다 선박의 수가 다른데 이는 양측의 상당한 견해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는 조선의 주장에 의해 타결이 시도되어 기유약조를 체결하였다. 기유약조는 일본의 입장에서 대마도에게 엄격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기유약조로 인해서 단절되어있던 조선 도항이 허용되었고 무역을 시작되는 발판이 되었다. 대마도는 역시나 조약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왕래하는 선박의 수가 적다고 느꼈는지 선박의 수를 늘리기 위하여 갖은 공작을 펴기 시작했다. 정해진 선박 이외에 별도로 배를 파견하고 사절을 왜관에 내려놓은 채 배만 대마도를 다시 왕복하는 등의 방법을 쓰기 시작했다. 대마도가 조선에 건너오는 사선의 파견수에 집착하는 것은 무역이 사신의 왕래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마도는 경작할 만한 토지가 부족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급자족생활이 불가능하였다. 이에 조선에서 쌀 등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일본의 사신이 왜관으로 건너오게 되면 진상, 공무역, 사무역의 형태로 나누어 조선과 무역을 하게 된다.고, 장기체류자가 상당히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왜관에 머무르는 사람들 중 겐포우 일행은 로쿠쥬닝으로써 중국산 백사를 입수하여 대량의 은을 왜관으로 들여오기도 했다. 그리고 겐포우는 1호선과 2호선으로 왜관과 대마도 사이를 왕복하고 있었다. 이것은 실질적인 무역액 증가를 꾀한 공작이 이미 일상적인 일처럼 되어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왜관은 객관을 이유로 세워졌지만 새로운 주민들의 출현으로 항거왜인들을 내부로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장기 체류자들로 인해 그들의 거주를 위한 시설도 하나둘씩 세워졌다. 그리하여 원래의 목표에서 벗어나 그들을 위한 마을이 조금씩 증축되기 시작했다.겐포우가 조선의 수도로 올라갔을 때 대마도는 야나가와 씨와 소우 씨가 대립하고 있던 상태였다. 처음엔 단순한 집안싸움이었다면 갑자기 외교의혹이 얽혀 국제사건으로 번지게 되었다. 바로 국서위조사건, ‘야나가와 사건’이다. 사실 당시 대마도는 일찍부터 공문서를 위조를 하는 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른바 가짜사신을 파견하는 ‘위사체제’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하지만 후에 위사체제가 붕괴되고 근세적인 통교무역이 시작을 하게 되었다. 겐포우가 소유하고 있었던 권리가 소우 씨에게 넘어가고 사선의 도항도 정리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의 요구로 하나의 사자가 몇 건의 사자를 겸하여, 한꺼번에 외교문서를 지참하고 오는 겸대제가 생겨났다. 이것은 사신, 무역, 선박의 내왕이 각기 별개로 운용된 결과 효율이 증대되었고 조선과 일본 사이의 교환을 사무역 주체의 근세형으로 이행시켜 주었다. 또 그 해에 왜관전체에 관수제도가 시작되었다. 관수는 한반도나 중국 대륙에 관한 정보의 수집, 왜관에서 발생하는 범죄자에 대한 단속, 왜관 시설의 확충을 위한 교섭에 이르기까지 매우 넓은 범위에 걸친 역할을 수행했다.왜관은 원래 객관을 목적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시설이 당연히 완벽할 수가 없었다. 이에 일본인들은 지형, 항구 등에 대해 불만을 표했다. 그러고는 조선과 일본은 합작으로 건축에 나섰다. 이렇게 시 성벽을 쳤다는 것에서 왜관이 돌담으로 둘러쳐져있는 독자적인 성을 연상하게 하기도 했다.신왜관은 대마도주 소우 요시자네를 정점으로 하는 브레인들의 강력한 정치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풍부한 자금력에 있었다. 요시자네는 아버지가 죽고 집안의 대를 이어받는다. 후에 자신의 적자인 요시츠구에게 자리를 물려주었으나 요시츠구는 2년뒤에 갑자기 사망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의 동생인 요시미치가 대마도주가 된다. 후에도 대마도주의 자리는 모두 45년에 걸쳐 요시자네의 아들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 시기를 천룡원 시대라고 부르며, 이 때가 대마도의 전성시대이다. 그는 토목건축에도 많은 신경을 쓰지만 사람에 대한 투자도 아끼지 않았다. 유능한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서 대마도 밖으로 사람을 내보내 장기간 유학을 시키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부터이다. 이 유학생에는 기술자들도 포함되어있었다. 대마도주로써 이끌어가려면 굉장한 자금이 필요했을 텐데 그렇다면 요시자네는 어떤 경로로 자금을 끌어왔던 것일까? 바로 조선이 배후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전에 조선이 일본에게 겸대제를 요청했었다. 일본에게 불리한 것처럼 보였지만 천룡원시대가 되어 대마도에게 아주 이득이 되는 제도가 되었다. 조선은 겸대제가 실시된 후에 해마다 목화의 작황이 좋지 않았다. 대마도는 이를 이용하여 공목의 일부를 대마도 사람들의 식량이 될 쌀로 바꾸어 주도록 교섭을 하자는 주장이 떠오른다. 공목을 쌀로 바꾼다고 하여 공작미라고 불렀다. 이렇게 대마도는 조선과 무역을 하여 쌀을 확보했고 이것은 마치 영지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더 나아가 요시자네는 선대인 요시나리가 남겨 둔 과제 중 하나였던 ‘조선무역’의 번영화를 이끌어 가기도 했다.일본은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에 ‘무역’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조선고의 무역은 사정이 달랐다. 그들의 입장에서 조선과 무역을 하면 중국의 생사, 견직물 등을 얻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쿠후는 쇄국정책으로 인해서 일본으로 들어오는 외국물자가 줄어드서는 굉장한 인삼 붐이 일어나기도 했다. 환자만 복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삼구입이 투기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생겨났다. 값이 비싸도 잘 팔렸기 때문에 조선의 인삼은 대마도에게 꽤 좋은 장사거리였다.에도시대의 한일관계는 ‘두 개의 층을 가진 외교’였다. 도쿠가와 쇼군이 대군이라고 하는 외교상의 호칭을 사용하여 조선의 국왕과 대등한 서식으로 작성된 국서를 주고받는데, 이것이 표면층에 드러나 있는 층이다. 그리고 조선과의 외교에서 모든 실무를 대마도 소우 씨에게 맡겼는데 이것이 또 하나의 층이었다. 이렇게 양 국이 복잡한 관계로 얽혀있었던 것은 중화 주의적 사상 때문이었다. 조선과 일본은 각각 이질적인 사회체제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대마도 소우 씨가 조선과의 외교를 맡게 된 것이다. 조선과 일본이 외교를 하는데 있어서 소우 씨는 바쿠후를 대신하여 외교 실무를 추진해야했고 그 장소가 바로 왜관이었던 것이다. 바쿠후는 일본 국내에는 왜관과 같은 시설을 설치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대마도 외교활동에 의지하고 있었고 조선과 일본의 외교 집무소로서는 왜관이 유일했다. 왜관의 서관에는 정례와 임시라는 사신이 파견되었다. 연례송사는 겸대제를 실시하여 연간 8회가 파견이 된다. 이것을 팔송사라고 부르며 계절 인사 등 정기적인 외교의례가 그들의 주된 역할이자 임무이다. 그리고 차왜가 연간 10회 정도 파견이 되기도 한다. 외교는 서관뿐만 아니라 동관에서도 이루어지는데 여기서는 주로 실무 외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관수가 왜관의 주관자로써 모든 일을 절충해 나가야 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었다. 또 관수는 왜관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을 기록하여 남겼다. 중국대륙을 비롯하여 한반도까지 이르는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바쿠후의 왜관무역에 바라는 기대 중 하나였다. 이 대목을 보고 역시 무역품 교환만이 일본의 목적은 아니었다라는 생각에 확신이 들었다. 타국을 다니며 그 나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는 것에 일본의 치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