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이승구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세상을 보는 관점’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를 좀 더 구체화한 표현으로 왈쉬와 미들턴은 ‘지각의 틀’, 혹은 ‘삶에 대한 시각’이라고도 말한다. 이 세계관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의 개념으로 인식조차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저자가 본서를 기록한 목적은 무엇일까?저자는 기독교 세계관을 ‘그리스도인이 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과 그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이해한 내용, 그 둘을 다 포함한다.’고 정의한다. 앞서 했던 질문처럼, 저자가 본서를 통해 기독교 세계관을 논하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인을 인도하는 세계관을 좀 더 명확하게 외현화시키기 위함이고, 이렇게 외현화시키려는 목적은 첫 번째로 그리스도인은 자신 뿐 아니라 이 세계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바르게 반응해야 하는 일로 부름을 받았으며, 두 번째로 이 세계에서 살면서 활동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지식적&실천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한다. 그 특징으로 영적이며 성경적이고 신국적이며, 기본적인 구조에 있어 『창조-타락-구속-극치(이승구 교수의 주장)』로 역사적 성격을 띠고 있다.그 뒤에 이어지는 내용들은 (차례에 따라)중생자의 세계관을 기독교 세계관의 출발점으로 삼고, 순차적으로 신국적 토대, 존재론적 토대, 인간론적 토대, 인식론적 토대, 가치론 토대에 이론적인 측면을 다룬다. 곧이어 실천적인 측면에서 직업관에 대해 논한 뒤, 성경적 경건에 대해, 마지막으로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요구와 기독교 세계관의 요구에 대해 다룬다.기독교 세계관의 각 안경(창조, 타락, 구속, 극치)에 따라 해설하는 본서를 통해, 필자는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교리적 토대를 쌓았다. 사실 본서를 접하는 종종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분야를 굳이 나누지 않아도 성경의 교리 안에서 다 설명이 가능한 부분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본서를 마무리하는 지금 앞선 생각은 필자가 현실을 더 고려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 말인즉,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분야가 현통치하심을 드러내며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이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관점이어야 한다.“창조: 존재론적 토대”창조로부터 하나님과 피조계의 관계가 시작된다. 철학적인 표현으로 존재적으로 우리의 근거가 되실 뿐 아니라, 인식적으로도 우리의 인식 근거가 되신다.창조는 그 과정을 인간들이 지금까지 발전시키고 있는 과학의 틀로 증명하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창조에 대한 유일한 인식의 길에 대해 히 11:3로 간결하게 설명한다. 사실 창조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창 1, 2장 외에 얻을 곳이 없다.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서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의 언어는 “물리적 현상을 현대인의 과학적 정신과 연관해서 검토하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는”보이는 대로의 현상을 기술하는 현상의 언어요, 일상적인 언어인 것이다. 혹 신학자들 중에서도 창 1, 2장의 내용을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며 해석하는데, ‘비유’로 보는 관점은 흥미롭기는 하나 결국 창조의 사실성을 강조하는 일에서 실패하고 있음을 강조해야만 할 것이다. 또한 ‘문학적 틀’로 보는 점에 있어서 데렉 키드너는 ‘성경의 참됨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멸밀하게 조사해 보면 개연성 없는 해석을 취하고 있다.’고 말한다. ‘날들’의 길이와 관련해 그루뎀은 ‘? 분명한 결정에 이르기에 충분한 정보를 주지 않으시기로 선택하셨다고 할 만하게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신설성의 참된 시금석은 선한 양심과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으면서 이 문제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에게 대해서 어느 정도 관대하고 친절하게 행동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되려는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다.창조는 크게 6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무로부터의 창조이다. 이는 히 11:3과 롬 4:17의 말씀에 근거해 아무 것도 없는 데서 홀로 존재하셨고,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이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단순히 공간 뿐 아니라, 어거스틴의 말처럼 ‘이 세지만, 동시에 피조물의 대표이자 지배자로 위임된 존재이다. 이러한 인간 창조에는 3가지 독특성이 있다.첫째, 하나님께서 인간을 가장 나중에 창조하셨다. 이는 인간이 해야 할 일을 미리 창조하신 후에 인간을 창조하신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휴즈는 “인격적 피조물인 사람을 창조하시고 하신 하나님의 결정은 모든 창조 명령의 과정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다.”라고 말한다. 둘째, 인간을 창조하실 때 먼저 인간을 일정한 목적을 위해 일정한 방식으로 창조하시는 의지를 천명하시고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창 1:26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라는 인간의 특성과 온 세상이 있는 것들을 다스리는 존재라는 인간의 존재 이유를 담고 있다. 셋째,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를 모두 만드실 계획에도 불구하고 남자부터 만드셨다. 이는 사람을 창조하시는데 일종의 과정이 있게 하신 것이다. 문화 명령을 수행하게 하시는 목적 외에도 이일을 수행하도록 돕는 배필이 필요하다는 것과 아담으로 하여금 그 사실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신 것으로 봐야 한다.이어서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는 다른 인간의 독특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첫 번째로 하나님의 형상적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다른 것들을 창조하실 때는 ‘그 종류대로’창조하셨지만 인간만큼은 ‘하나님의 모양대로’만드셨다. 여기에서 사용된 ‘형상대로’와 ‘모양을 따라’는 일종의 병행법적인 표현으로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말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이 원형이시고 인간은 하나님의 반영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형상됨은 인간됨에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또한 창 2:7에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이 파생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무엇을 반영하고 나타내야 하는가? 이 반영은 인간 존재 전체를 가지고 나타내지만 동시에 피조물의 한도 내에서 반영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을 때, 그때야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 역할을 제대로 하나님의 뜻에 가까운 문화가 가득하게 해야 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됨은 인간의 큰 특권인 동시에 의무이자 과제이다. 셋째, 인간 중심주의에 결코 빠져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중심주의적 입장을 잘 견지해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저버리는 것은 결국 자신의 근본을 저버리는 것이며, 비인간화되는 것이다. 하나님 중심적 입장을 잘 유지하면 인간은 이 피조계를 결코 자기의 마음대로 착취할 수 없다.“진리 이해: 인식론적 토대”어떻게 진리를 알 수 있는가? 전통적으로 네 가지 견해가 있다.? 상응설: 머리 속에 있는 개념이 밖에 실재하는 실재와 일치하면 참이라는 입장을 취하는 경험론적 전통에서 강조되는 진리관이다. 그러나 실재하나 물질화 되지 않는 개념에 대해선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문제가 제기된다.? 정합설: 생각하는 관념과 명제들이 일종의 내적 모순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진리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견해로, 진리성 여부는 감각적 경험보다는 논리적 사유에 의해 증명될 수 있다는 합리론에서 제시한 입장이다. 그러나 이 도한 어떤 진리체계나 출발점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은 결국 진리를 진리 자체로 정의하는 일종의 순환론에 빠지게 된다.? 실천적 진리관: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것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적 진리관으로, 이들은 바른 실천이 바른 이론이 되는 듯이 말한다. 특별히 미국에서 발전된 실용주의적 진리관은 인간은 결코 절대적 진리를 획득할 수 없으므로 그저 신념의 가장 유용한 기능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말한다.? 실존적 진리관: 이들은 인간 실존 문제에 대한 진리는 다른 영역에서의 진리와는 다르게 적용되어야 한다며 일종의 이중 진리관을 말한다. 예를 들어 과학적으로 진리인 것이 실존적으로는 진리가 아닐 수도 있기에 각기 서로 다른 영역에 대한 언급일 뿐이라고 본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인간 지식과 인식의 불완전성을 지적하며 겸손의 모습을 보이는 반면에, 인간에 대한 어떤 진리 규정을 다 거부하며 각자가 스스로 의님이 있을 자리가 없게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포이뜨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반역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하기 위해 하나님의 선물을 사용하는 것이다.’ 중생하지 않은 인간은 자신의 경험이나 판단이 진리에 중요한 시금석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중생한 인간은 이제 하나님의 계시라는 시금석에 근거해 자신들의 경험과 이성의 활동을 통제해 나가려 한다. 중생자의 의식은 다시 계시를 수납하여 그것을 재구성하는 의식이다. 이성은 사용하지 않는 자가 아니고 그 이성의 작용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파악하고 세상을 바르게 해석하려 한다. 비록 원칙상(in principle) 타락 이전의 아담적 의식으로 회복되었지만, 실제로(in practice) 철저하게 계시 의존 사색을 하지 않을 시 이 원칙에 충실하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인은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하며 다시금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쓴다. 개혁된 사유는 항상 하나님의 계시의 빛에서 개혁된다.기독교의 인식론은 존재론에 근거한 인식론이므로 하나님께서 객관적으로 주신 계시에 대해 중생한 의식이 작용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세상을 바르게 인식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든 인식 활동의 존재의 원리이며, 일반&특별 계시가 우리의 객관적 인식의 원리이고, 중생한 이의 의식 활동이 인식 활동의 주관적 원리가 된다.그러므로 기독교적 진리 이해는 결국 하나님이 진리의 원천이시고 하나님의 특별 계시의 빛 아래서 해석된 일반 계시를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진리는 하나님 자신의 인격성에서 나온 것이므로 반드시 인격과 삶에서 드러나야 한다.“가치 이해: 가치론 토대”가치라는 용어는 사용범위가 매우 넓어서 윤리적, 심미적, 종교적 가치 등 폭넓게 포괄할 수 있지만, 본 단락에서는 윤리적 가치로 한정짓는다.전통적으로 사람들은 윤리적으로 가치 있는 것을 선과 바름이라고 생각해왔다. 그 중에서 인간이 마땅히 추구하고 지향해야 하는 목적에 없다.
강해설교데이비드 헬름예수가족교회 백금산 목사는 목회와 더불어 이 땅의 목회자, 그리스도인들을 세워나가는 것에 있어 독서를 통한 영적 유익을 외치고 실천하고 있다. 이에 그가 강조했던 서적 중 하나가 바로 데이비드 헬름의 강해설교이다.본서는 생각보다 짤막한 서적으로,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9가지 표지 시리즈의 첫 번째 서적으로 출간되었다. 시리즈 중 하나의 서적임에도 이렇게까지 추천을 한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기대하는 마음으로 목차를 살폈다. 목차에서부터 느껴지는 분위기는 아주 간단명료해 보인다는 것이다.본서는 크게 4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 1장: 상황화, 2장: 주해, 3장: 신학적인 숙고, 4장: 오늘(사실 1장에서 상황화라 하지만, 오늘날 설교의 문제점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진정 상황화에 대한 설명은 4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한 사람의 독자로 1장에서부터 느낀 것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현 시대 맹목적인 상황화로 인해 생긴 설교의 문제 유형에 대해 3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인상적인 설교, 도취적인 설교, 영감 받은 설교’ 왜 하나님께서 요즘 설교에 대해 고민하게 하시는지, 저자의 명쾌한 현실분석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2장에서는 본문을 어떻게 주해할 것인지 설명한다. (위에도 기록했지만)가장 먼저 중요한 원리를 선포하는 저자의 논지는 정말 인상 깊다. ‘첫 번째 것을 첫 번째로 유지하기’ 사실 당연하면서도 그러하기에 쉽게 놓치게 되는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3가지를 강조한다. ?문맥이 지배하게 하라, ?가락에 귀를 기울이라, ?구조와 강조점을 보라. 3가지를 결과적으로 종합해보면 역사적/문학적 문맥이라고 할 수 있다.곧이어 3장에서는 신학적인 영역을 다룬다. 저자는 여러 신앙의 선배들의 모습 속에서 모범을 발견하고, 여기에서도 3가지를 이야기한다. ?역사비평 방법론의 도전, ?성경 신학의 유용성, ?조직 신학의 역할. 이 또한 간단하게 정리하면, 앞서 주해를 했다면 성경 신학과 조직 신학을 통해 그 주해를 확인/검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 신학의 유익은 무엇인가? 성경 전체를 보게 하며, 그리스도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볼 수 있으며, 지적/도덕적인 설교를 방지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조직 신학의 역할 또한 3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난해한 본문을 안내해주고, ?복잡한 장르가 복음과 연결되기 쉽게 하며, ?변증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존 녹스와 종교개혁마틴 로이드존스, 이안 머레이제 1장. 종교개혁을 기억하라!? 존 녹스의 종교개혁을 기억해야 할 이유무려 400년이나 지난 종교개혁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오늘의 상황이 종교개혁 이전의 상황과 점점 닮아가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당시 도처에 도덕적, 사회적 타락이 너무나도 심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교회의 상태는 어떠한가? 교회의 권위는 어떠한가? 종교개혁 이전에 나타난 교리적 혼란과 무관심이야말로 요즘 교회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닌가? 설교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참된 교리에 대한 무관심과 권위의 상실, 그로 인한 결과들이 교인의 숫자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오늘날 우리는 교회의 생존과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중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교회는 왜 과거로 돌아가 거기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하는가? 다른 모든 곳, 곧 삶의 다른 모든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잇는 일들을 왜 유독 교회만 외려하려 하는가?”라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런 비난에 대해 나는 이렇게 말한다. “종교개혁이 가르치는 많은 교훈 중에서도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교회의 사역과 성령께 속한 일을 승리로 이끄는 비결임을 깨달아야 한다. 400년 종교개혁자들도 1세기로 돌아갔다.“ 이처럼 종교개혁자들은 근본으로 돌아가 신약성경에 일치하는 교회를 설립하려고 노력했다.종교개혁은 교회의 역사뿐 아니라 온 세상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미국 또한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절대로 세상에 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모든 사람은 도덕적 문제를 의식하고 있다. 그러나 심리적인 방편을 통해 이를 해결하려하나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경건한 믿음이 없이 도덕성도 없기 때문이다. 지난 수백 년간 나타난 불행은 기독교 교리를 버려도 그 윤리만 굳게 붙들면 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롬 1:18과 같이 경건한 사람들이 없으면 의로운 사람들도 없다. 종교개혁이 이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실례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은 경건한 믿음을 배제한 채 윤리와 의로움과 훌륭한 도덕적 개념만을 추구하려 애쓴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얻는 교훈우리는 종교개혁자들에게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 한 점은 그들 안에 불길처럼 타오른 확신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확신은 무엇이었나?①성경의 권위를 믿었다. 종교개혁 이전 교회는 인간의 총명을 자랑하는 스콜라주의 철학의 지배 아래 깊이 빠져있었으나 종교개혁자들은 그 가운데 성경으로 돌아갔다. 성경의 권위를 분명하게 인정하기 전에는 교회의 건강과 권위를 되찾을 수 없다. 성경은 일관성과 통일성을 지닌다. 신구약을 통틀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눅 24:27).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주권’교리를 통해 주관적 접근 방법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라는 문제만을 생각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자신들의 생각과 행위와 삶을 주관하는 분이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 교리’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죄를 그리스도께 맡기시고 그 죗값을 대신 치르게 하셨다. 이것이 바로 ‘대리 속죄’ 교리이다. 이 대리 속죄 교리에서 ‘이신칭의’가 파생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신칭의를 믿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속죄 교리도 믿지 않고 ‘생명의 존엄성’만을 신조로 삼는다. 만약 선하고 희생적인 삶을 살고 인류의 정신을 드높이는 삶이 사람들이 구원 받는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굳이 이 땅에 오셔서 죽은 것인가?이에 대해 존 녹스는 그런 가르침을 부인하고,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하심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구원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이다. 교회가 권위 있고 힘 있고 강력할 때는 믿음의 대상을 분명히 알고 믿음의 온전한 확실을 담대히 외치는 목회자가 주를 이루었다. 또한 종교개혁자들은 ‘만인사제설’을 믿었다. 예배를 단순화 하며 순수한 교회를 원했다. 참된 교회의 3가지 표징에 대해 ‘순수한 복음이 전파되는 곳이자 성례가 집행되는 곳이요, 권징이 실시되는 곳’이라고 가르쳤다.②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들은 교리에서 출발했지만 더 두드러진 특징이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교리가 아무리 정통적이고 바르다 해도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음을 인정하며, 기도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③예언자적 설교를 했다. 그들은 의식과 성례 대신 설교를 예배의 중심으로 삼았다. 중요한 것은 참된 설교를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참된 설교의 증거는 무엇인가? 바로 능력이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신다는 사실, 곧 자신이 거룩하고도 영원한 은혜를 나르는 통로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은 제사장적 설교가 아니라 예언자적 설교를 했다. 자상하고 조용하며 수려한 문체와 문장으로 이루어진 설교가 아니라 권위 있는 설교를 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영향을 미쳐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 앞에서 말씀을 외쳤다. 그들의 설교는 선포요 외침이었다. 존 녹스도 동일했다. 선지자들은 그보다 훨씬 더 강인한 사람들이었다. 아모스와 예레미야, 낙타 털옷을 걸치고 광야에서 살았던 세례 요한도 모두 이상한 사람이요 미치광이라는 말을 들었던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역사존 녹스에게 허락하신 재능들, 칼빈의 지성, 화산과 같은 위력을 발휘한 루터, 존 위클리프와 존 후스 모두 위대한 사람들이 될 수 있던 비결은 무엇이었나? 이는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셨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길을 준비하시고, 정확한 때에 종교개혁자들을 보내신 것이다. 이에 대한 우리를 위한 교훈은 무엇인가? 결론은 의, 오직 의만이 민족의 품격을 높일 수 있으며, 경건한 믿음이 없이는 의도 없다는 것이다. 사실 종교개혁 이전 시대보다 더 암울한 시대는 없었다. 그런데도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그렇기에 오늘날 우리도 이렇게 물어야 한다 “존 녹스의 하나님은 어디 계시니이까?” 이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인가? 답은 히 4:14-16에 있다. 우리는 믿는 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한다. 믿는 도리란 바로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고백을 뜻한다. 주님께서는 하늘의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지식을 말한다. 우리는 믿는 도리, 즉 믿음과 말씀, 그리고 우리 선조들로부터 전해 내려온 위대한 신앙고백을 붙들어야 한다. 그렇게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 존 녹스의 하나님은 지금도 그 자리 그대로 계신다.제 2장. 존 녹스, 청교도주의의 설립자제네바에는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의 이름을 새긴 기념비가 있다. 거기에는 녹스, 칼빈, 파렐 등 많은 종교개혁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토마스 칼라인이라는 망명 높은 역사가는 녹스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녹스는 스코틀랜드와 뉴잉글랜드와 올리버 크롬웰의 믿음, 곧 청교도주의의 설립자이자 제사장이었다.”? 녹스의 사람됨녹스보다 비방을 많이 받은 사람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비방은 모두 로마 카톨릭교회의 무지와 악의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눈에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능력이었다. 서로 다른 것들을 구별할 줄 아는 능력을 지녔다. 또 다른 특징은 넘치는 활력이었다. 그는 신중한 특징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정치인들의 생각과 이중성을 놀라울 정도로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개혁의 실패를 여러 번 막을 수 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어떤 상황에서든 어디까지가 한계인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 선을 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온건한 사람이었다. 진리를 거스르는 선이 아니라면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화합을 추구했다. 이어서 그는 독창적인 사람이었다. 자신이 성경에 대해 명확히 이해했다고 확신할 때는 틴데일이나 칼빈의 견해일지라도 선뜻 동의하지 않고 적절히 비판했다.? 설교자 녹스무엇보다 그는 탁월한 설교자로 큰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는 그의 설교를 듣고 분노의 눈물을 흐르게 만들 정도로 그를 두려워했다. 왕의 신하이자 대사였던 랜돌프는 그의 설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 시간에 걸친 한 사람의 목소리가 500개의 나팔이 끊임없이 우리의 귓전을 때리는 것보다 더 많은 생명을 우리에게 가져다줄 수 있다.”
노스포인트 교회이야기앤디 스탠리? 교회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사도 바울은 문화와 깊이 접촉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만큼 접촉한다면 뒤죽박죽이 된다. 모든 사람들은 뒤죽박죽인 중간 지대를 불편해한다. 하지만 중간지대를 없앤다면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에클레시아를 발표하실 때 본래 의도하셨던 바를 형편없이 변질시킨다. 이에 저자는 요 1:14, 17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라는 말씀을 통해 본질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예수님께서는 은혜와 진리, 둘 사이의 균형이 아니라 둘 다의 충만한 구현을 말하신다. 그분은 율법을 희석하지 않으셨고 은혜에 조건을 달지 않으셨다. 그러나 세상은 은혜가 없고 진리에 등을 돌렸다. 복음서 전체에서 예수님을 따라가 보면 알 듯이 그분은 죄의 의미를 철저히 인정하면서도 죄인들을 정죄하지 않으셨다.사실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불공평도 이런 불공평은 없다. 청년 관원에게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으면서, 마지막에 십자가 옆에서 죄수에게는 바로 그 자리에서 낙원을 약속하셨다. 일관성이 없어 보이는 예수님의 모습은 종교 지도자들을 미치게 했다. 예수님은 공평성 뿐 아니라 일관성도 없어 보이셨다. 이러한 원리가 바로 교회가 따라야 할 운영 원리가 아닌가? 결국 공평성은 사람들과의 접촉을 거두는 구실이 되었으며, 일관성의 추구는 사람들을 돕지 않는 구실이 되었다. 일관성에 대해서는 조심하지 않으면 결국 모두에게 해줄 수 없다는 이유로 아무에게도 해주지 않게 된다. 그러나 모두에게 해줄 수 있었으면 하는 일을 한 사람에게 해주는 것이 더 좋은 접근법이 될 것이다(이것은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으면 충분히 오해받고도 남을 것이다). 사실 모든 사람들을 동일하게 대하는 것은 오히려 사역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은혜와 진리를 둘 다 품는 접근법은 뒤죽박죽이다. 하지만 우리는 무수히 많은 시간을 들여가며 모든 만일의 사대에 대비한 정책을 만들지 않는다. 저자는 제도, 체계보다 성령님의 그때그때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교회는 일관성이 없으며 때로 공평하지도 않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과정 가운데 생긴 긴장을 해소하는 게 아니라 관리해야 한다고 믿는다.뒤죽박죽인 상태를 받아들인다는 개념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겠으나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줄 사람이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해주신 일이다. 그렇다면 교회도 그래야 한다.저자는 이에 행 15:29절을 언급하며 교회에 동참하는 기준을 2가지로 줄여서 말한다. “음식을 가려 먹으라, 부도덕한 삶을 삼가라”? 교회에서 우리가 해야 할 몫1) 실제적 교육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마 7:24, 26)예수님은 청중들의 반응을 목적으로 가르치셨다. 삶의 변화가 목적이었다. 예수님이 원하신 것은 정보에 대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살아 있어 활동하는 믿음, 옳은 일을 행하는 믿음이었다. 사람들을 움직여 행동하게 하는 실제적 교육은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키우시는 데 사용하시는 주된 방법 중 하나다. 회중의 믿음을 자라게 하려면 설교와 교육의 목적이 삶의 변화에 있어야 한다. 비신자들은 메시지 끝에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이것이다.’라고 확실하게 말해주는 강사들에게 마음이 끌린다. 사람들은 무엇이 진리인가보다 무엇이 내게 통하는 가에 훨씬 관심이 많다. 문화란 바람과 같다. 문화를 막을 수 없고, 혐오해서도 안 된다. 다만 그것을 활용하라.2) 개인적 훈련사역을 얼마나 했든 관계없이 결코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1세기의 유대인들은 경건 생활의 부분은 기도와 암송으로 제한되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헌금과 금식을 더해주셨다. 예수님은 응답을 ‘갚으신다.’라는 단어로 표현하셨다(마 6:6). 헌금에 관해서 ‘우선적, 점진적, 비율적’의 중요성을 대놓고 강조한다. 우선적이라 함은 헌금이 첫째, 저축이 둘째, 생활은 나머지로 한다는 것이고, 비율적은 퍼센트를 정해서 꾸준히 드리는 것이고, 점진적은 해마다 퍼센트를 높여 액수를 늘리라는 도전이다. 교육부의 경우에는 유초등부 학부모님들에게 부모 카드를 보낸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점은 당장 성경을 믿지 않더라도 우선 읽을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기도 또한 마찬가지로 기도문을 보낼 수 있다. 기도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아이들에게 있어 인쇄된 기도가 마중물로써 필요한 것이다.3) 직접적 사역준비되지 않았다고 느껴지는 사역 환경에 뛰어드는 일만큼 우리의 믿음을 넓혀주고 키워주는 것은 별로 없다. 오병이어사건(마 14)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구해오라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들고 온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가져오라고 하신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부족하더라도 그것을 내게로 가져오라. 내가 일하겠다. 어떻게 하는지 봐라” 우리에게 있는 그것을 기꺼이 하나님께 내어드리기만 한다면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임마누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직접적인 사역은 우리를 두렵게 하면서 동시에 성장시킨다.4) 섭리적 관계1-3번까지는 우리의 직접적인 선택이었으나 이제부터는 그것이 우리를 선택하게 된다.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관계의 요소가 빠진 이야기가 없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하나님이 그분의 섭리로 그들은 자신의 삶 속으로 인도하셨다는 확신이 있다. 이에 2가지 요인이 섭리적 관계를 만들어 낸다. 하나는 상대방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방 안에서 하나님을 볼 때다.이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섭리적 관계가 발생하기 쉬운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우리가 섭리적 관계를 만들 수는 없지만, 분명히 접촉점을 마련해줄 수는 있다.섭리라는 단어가운데 저절로 될 거라고 가정하지 말자. 우리가 촉진해야 한다(히 19:24-25).5) 중추적 환경환경이 믿음에 미치는 영향은 양면적이다. 중추적 사건 때문에 믿음의 향배가 갈리는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인가? 바로 사건에 대한 해석이다. 그렇다면 사건에 대한 해석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2가지로 귀결된다.
성공하는 소그룹리더의 8가지 습관데이브 얼리1. 꿈 : 건강하고, 성장하며, 배가하는 그룹을 인도하는 꿈을 꾸어라1) 꿈은 잠재력을 높인다2) 꿈은 성취를 도와준다3) 꿈은 방향에 집중하고 에너지를 공급한다4) 꿈은 그룹의 가치를 높인다5) 꿈은 미래를 긍정적으로 내다본다? 하버드대 졸업생의 연구결과 5%는 나머니 95% 보다 많은 일을 성취했다는 데 이 5%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대학에 다니는 동안 자신들의 목표를 글로 기록해 두었다는 것이다. 나머지 95%도 공통점이 있었는데 바로 목표를 글로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많은 그룹들이 배가를 위한 계획을 세운 후에 배가하는 데 필요한 계기가 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2. 기도 : 매일 멤버들을 위해 기도하라1) 기도는 시간을 절약해 준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 없이는 몇 달 또는 몇 년을 일해도 달성할 수 없는 일들을 하나님이 단기간에 하시도록 만든다. 기도는 아주 효과적인 시간 절약기다.2) 기도는 모든 것을 더 좋게 만든다3) 기도는 꼭 필요한 통찰력을 준다4) 기도는 가장 훌륭한 영적 무기다5) 기도의 시간 분량 장소를 장하라6) 기도제목과 응답을 디록해 둘 곳을 정하라 ? 아무리 흐린 잉크라도 가장 훌륭한 기억력보다 낫다.7) 당신의 예비 리더와 현재 그룹에서 분가될 미래의 그룹들을 위해 기도하라 ? 예비 리더들을 찾아서 키우지 않으면 당신의 그룹이 배가할 수 없다는 사실.3. 초청 : 매주 새로운 사람들을 모임에 초청하라1) 당신의 그룹에 게스트들이 없다면 성장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2) 초청은 소그룹 인원이 줄어든 것을 막는다3) 수적인 성장은 흥분과 사기를 북돋운다4) 먼저 기도해야 한다5) 여섯번을 만나야 각인된다 ? 너무 빨리 포기하지 않는다.6) 영혼을 위한 세번의 승리① 그들을 당신 편으로 이끈다② 그들을 당신의 그룹이나 교회로 오게 만든다③ 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한다4. 연락 : 정기적으로 멤버들과 접촉하라1) 접촉은 그룹의 성장을 돕는다 ? 접촉의 원칙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앗다. 친구들에게 연락을 하면 오고, 연락을 하지 않으면 안 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연락을 하면 그들이 온다2) 그들이 원하는 기도를 해주라 ?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때 내가 기도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고 무엇을 위해 기도하기 원하는지 묻는다.3) 접촉이 필요한 가장 중요한 시간① 소그룹을 처음 방문한 직후② 처음 몇 주 동안은 매주③ 결석한 후④ 어떤사람이 자신의 어려움을 이야기한 후⑤ 그룹 안에서 갈등이 있은 직후5. 준비 : 그룹 모임을 준비하라1) 빌은 그때그때 직감에 따른다. 댄과 더그는 화요일 모임을 준비하기 위해 월요일 밤마다 만났다.2) 준비는 사탄이 끼어들어 어지럽힐 수 있는 기회를 줄여준다.3) 준비는 신뢰를 쌓는다4) 오늘 준비하는 것이 내일 성공하는 비결이다.6. 멘토링 : 예비 리더의 멘토가 되라1)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 바울 -> 디모데 -> 충성된 삶들 -> 또 다른 사람들2) 예수님과 바울의 본을 따르는 것이다.3) 절대로 혼자서 사역하지 말라. 계속해서 새로운 리더들을 찾으라. 멘토링에 실패하는 것은 배가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4) 목표를 정하지 못하면 배가시밀 확률은 50%, 리더가 목표를 정할 경우 배가 확률은 75% 로 증가7. 친교 : 멤버들 간의 친교 활동을 계획하라1) 사교적 모임은 흥분과 관심, 참여도를 높인다.2) 성경의 예 : 서로 존경하라 롬12:10,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라 엡5:19, 서로 마음을 같이 하라 롬12:16, 서로 복종하라 엡 5:21, 서로 비판하지 말라 롬14:13,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라 골3:13, 서로 받으라 롬15:7, 서로 가르치며 권면하라 골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