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대왕 감상평감독 : 해리 훅원작 : 윌리엄 골딩배우 : 발세이저 게티, 크리스 퍼, 다누엘 피폴리상영시간 : 90분제작연도 : 1990년윌리엄 골딩의 1954년작 동명 소설 ‘파리 대왕’을 80년대 상황에 맞게 개작한 영화이다.Ⅰ. 줄거리핵전쟁으로부터 안전한 장소로 옮겨가기 위해 25명의 어린 사관생도들을 태우고 가던 비행기가 추락사고로 바다에 떨어지고, 부상당한 기장과 어린 사관생도들 랄프, 피기, 로저 등은 무인도에 상륙한다. 무인도엔 갇힌 이들은 랄프와 피기의 지휘로 먹을 것과 지낼 곳을 마련하고, 조종사를 보살피고, 구조를 위해 신호불을 피운다. 그리고 질서유지를 위하여 대표를 선출하고, 필요에 따라 회의를 소집하기도 하며, 소라 고동을 가진 자에게만 발언권을 인정하는 등 규칙을 만들어 문명 상태를 유지하려는 활동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런 질서나 무작정 구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사냥을 배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잭의 사냥꾼집단’의 반기에 무인도의 질서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이들 사이에 섬에 확인되지 않은 괴물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아이들은 안전을 위해 ‘잭의 사냥꾼집단’에 하나, 둘씩 들어가고, 문명사회에는 랄프와 피기만 남게 된다. 이성을 잃고 점점 더 광기어린 모습으로 변해가는 ‘잭의 사냥꾼집단’은 피기와 한 소년을 살해하고 만다. 그리고 그들이 죽음을 당하자 랄프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된다. 사냥꾼 집단을 피해 도망치던 중 극적으로 구조함에 의해 구조되고, 소년들 모두가 눈물을 흘리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Ⅱ. 영화의 해석1. 무인도로의 불시착과 갈등영화는 소년들의 무인도 불시착으로부터 시작한다.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무인도에 불시착한 상황은 어떠한 상황인가. 어떠한 구속도 존재하지 않는, 초기 인류가 이 땅에 새로운 제반 질서를 수립할 수 있었던 것과도 비슷한 상황 즉, 가장 원시적인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무인도에 불시착한 이들 중에는 어른이 없다. 기장이 있지만 그는 의식불명의 상태이다. 이러한 설정은 어린아이가 상징하는 순수함, 이성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인간의 본성을 나타내어 생존 본능 내지는 인간의 야만성이라는 원초적 갈등이 더 크게 부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설정을 통해서 인간이 벌거벗은 상태 즉, 가장 본질적인 모습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소년들은 어른들이 없이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식량을 구하고 그들의 지도자를 뽑는다. 즉, 소년들은 문명의 혜택이 존재하지 않는 무인도에서 소위 그들만의 사회를 구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소년들은 랄프를 그들의 지도자로 선택한다. 그리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소라’라는 도구를 이용한다. 소라 소리를 통해 회의를 소집하고 회의과정에서는 소라를 가진 자만이 발언권을 가진다는 문명적이고 이성적이며 민주적인 규칙을 정한다. 이 장면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인간이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이며 스스로 규칙을 정해 질서 있게 살아가는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한다.랄프를 중심으로 한 집단은 과거 그들이 속해 있던 ‘문명’이라는 틀 속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가치관들을 이성적으로 고수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랄프의 두뇌라고 할 수 있는 피기는 사리와 분별력을 겸비한 지각 있는 인간의 전형으로 그려진다. 뚱뚱하고 겁이 많지만 정확한 판단과 사고능력으로 랄프에게 조언을 해준다. 피기는 절대 틀리거나, 이치에 어긋나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피기는 이성에 집착한 나머지 융통성이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완벽할 순 없는 인간의 문명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그러나 사회는 언제나 갈등을 내포한다. 세계라는 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전쟁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국가라는 사회 속에서 생겨나는 갈등은 내전, 혁명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소년들의 작은 사회인 무인도에서도 갈등은 일어났다. 이는 구조신호를 위해 피웠던 불이 바람에 의해 산 전체에 퍼지면서 큰 불로 진화하는 장면에서 암시하고 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이론에서 불은 만물의 근원이고, ‘투쟁은 만물의 아버지’라고 주장한다. 즉, 이 불을 통해서 무인도에서 일어날 갈등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갈등은 문명과 대비되는 야만을 상징하는 잭의 불만으로 시작된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피기를 돼지라고 놀리며 그가 제시한 민주적인 방식을 어린아이들의 유치한 장난으로 여긴다. 잭의 불만은 갈등으로 치닫고 결국 ‘사냥꾼’이라는 집단을 만들어 문명사회에서 이탈하게 된다. 사냥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다. 즉,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버리고 그에 대비되는 이른바 ‘야만의 집단’을 만든 것이다. 앞서 소년들은 나름의 규칙을 만들어 질서 있게 생활하는 모습을 그려 인간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로 표현했지만 결국 인간의 본능을 따르게 되어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그들 두 집단의 갈등과 대립 구조로 진행된다.2. 가치랄프의 문명사회에 속해있던 나머지 사관생도소년들은 랄프의 문명사회식 지도 방식에 싫증과 불편함을 느끼고 이 사회에서 이탈해 사냥을 중시하는 소년 잭을 더 따르게 된다. 즉, 이성을 버리고 야만적인 본능을 선택하는 것이다. 결국 소년들의 집단은 둘로 나뉘게 되고 그들은 각각 섬 생활에 적응하는 다른 생활 방식을 택하게 된다.잭이 이끄는 집단은 그들의 예전 사회의 모든 가치관에서 벗어나 섬의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원시적인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생활 방식을 취하게 된다. 이 잭의 사냥꾼사회는 이전의 사회 체제 즉, 가장 옳다고,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되었던 체제들은 그것이 절대적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문명인들이 경악할 수도 있는 생활 방식을 선택한 잭의 집단은 그들 스스로 법을 만들며 생존을 위해 평소에 역겹다고 생각하던 돼지를 직접 사냥하여 먹는다. 또한 얼굴에 페인팅을 하거나 돼지 사냥을 위한 노래와 춤을 만드는 등의 그들만의 ‘의식’을 만든다.‘존재’ 또는 ‘가치’ 등의 형이상학적 개념들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각각 다른 형이하학적 형상을 나타낸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잭의 집단이 절대적 가치였던 이성을 버리고 사회적 환경의 변화에 의해 상식 밖의 일들을 행하는 모습은 그들이 삶에 변화에 따라 새로운 인식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즉, 절대적인 가치는 없으며 시대와 환경에 따라 계속해서 변화해가는 것이다. 이는 랄프와 잭의 두 사회에서 어느 곳을 선택할까 갈팡질팡하는 나머지 소년들의 모습을 통해 더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무인도에 오기 전에 믿고 있던 이성과 질서라는 절대적인 가치가 무인도라는 극한의 상황에 처하게 되면서 사냥이 절대적인 가치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 나머지 아이들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사고(思考)하지 않는 현재 시대의 대중들을 잘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3. 공포잭의 집단이 돼지머리를 동굴 앞에 거는 장면이 있다. 한 소년이 동굴을 발견하고는 그 안에 있던 조종사를 괴물로 오인하게 되고, 소년은 이 사실을 다른 모든 소년들에게 알리고 잭의 집단에 속해 있는 소년들 모두가 동굴 속의 사람을 괴물로 오인하여 동굴 앞에 제물로 돼지머리를 바치는 장면이다. 소년들은 확인되지 않은 존재에 공포감을 느끼게 된다. 괴물은 불시착한 비행기 조종사임에도 불구하고 소년들은 공포를 느껴 실체를 보고자 하는 시도를 포기한다.후반부에 랄프가 잭의 사냥꾼 집단에 속한 한 소년을 설득하려는 장면이 있다. 소년은 랄프의 설득에 고민을 하지만 결국 잭의 집단에 남게 된다. 왜 잭의 집단에 남겠다고 한 것일까. 나는 잭이 갖고 있는 ‘무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잭의 집단의 구성원들도 집단이 자행하는 행위들이 잔인하고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알지만 무력에 대한 두려움이 진실을 포기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잭은 보이지 않고, 확인되지 않은 공포의 존재를 이용하여 집단의 결속력을 강화시켰다. 결국 공포는 진실을 알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를 꺾어버릴 수 있는 강력한 무기인 것이다. 이 세상엔 공포 뒤에 가려진 진실이 많다고 표현하고자 하는 것 같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두려움을 이용해 막강한 권력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만물의 진실과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능인 공포심을 극복해내야 한다는 의도가 아닐까 생각된다.4. 무력과 이성랄프의 집단과 잭의 집단은 서로 양보하지 않은 채 드리워진 팽팽한 긴장감으로 무인도에 분계선이 그려지게 된다. 그리고 랄프의 집단의 구성원들은 점점 더 잭의 집단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들이 처한 상황이 인간으로 하여금 이성적인 사고보다는 생존에 기반을 둔 무력을 사용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 두 사회는 잭의 선두공격으로 부딪히게 된다. 잭이 물리적인 무기를 들고 랄프의 캠프를 공격하면서 피기의 안경을 부수려고 한다. 그리고 랄프는 이에 맞서서 무형적인 무기인 논리와 이성을 갖고 잭에게 대항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물리적인 무기를 들고 있는 잭의 집단이 승리하게 되고, 피기의 안경은 맥없이 부서지고 만다. 랄프와 피기는 이에 맞서 유형적인 무기인 논리와 이성을 갖고 잭의 집단을 설득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피기는 잭의 집단에서 굴린 돌에 맞고 사망하게 된다.문명의 상징인 피기의 안경은 무력 앞에서 힘없이 부서지고 만다. 그리고 안경이 부서진 피기는 바보같이 울어댄다. 총과 칼을 앞세운 군대에 힘없이 무너지는 지성인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성과 합리적인 사고의 상징인 피기가 잭의 집단의 돌을 맞고 사망함으로써 문명사회는 막을 내린다.5. 어른의 등장과 눈물문명사회에 랄프 혼자만이 남겨지게 된다. 그리고 그는 혼자서 잭의 집단과 맞서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랄프 혼자서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잭의 집단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랄프가 막다른 곳인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그리고 그 위를 올려다보니 군복차림의 어른 장교가 허리를 손으로 잡은 채 서있는 모습을 본다. 장교는 쫓기고 있는 랄프와 그를 뒤쫓고 있는 원시인 차림을 한 사냥꾼 집단을 보고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라고 묻는다. 그리고 그 물음에 답하지 않는 소년들은 모두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스기하라 야스오, 『헌법의 역사』, 이론과 실천, 1999Ⅰ. 들어가며Ⅱ. 본문Ⅲ. 나가면서Ⅰ. 들어가며인간의 역사 속에서 살아온 과정을 보면 동ㆍ서양을 막론하고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생활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그들만의 규칙을 생성하게 되었고 조금씩 발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규칙은 고대와 중세를 거처 서양의 르네상스가 시작 된 근세시대에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비록 시대의 사상에 구속되어 제한적이기는 했지만 인류의 역사를 각 단계를 거쳐 오면서 크고 작은 사건을 거치게 되면서 규칙, 즉 그들의 만의 법이 정해지기 시작했다. 이는 헌법의 태동기라고 할 수 있다.예컨대, 봉건사회의 경우 왕과 그들에게 권력을 부여받은 봉건사회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영주와 그들의 영역 안에 있는 농노로 구분 지을 수 있다. 이와 같은 봉건사회에서는 왕과 영주 등 특별한 계급에게 권력이 한정되어 있었으며 농노는 자신에게 주워진 토지에서 경작하고 일부는 자신이 일부는 영주에게 바치고 살고 있었으며 행동의 자유는 있을 수 있으나 자신의 직업을 정한다거나 국가 운영에 있어 자신의 의사를 반영하는 것 등과 같은 실질적 자유는 인정되지 않았다. 이러한 시대에서 복종에 대한 거부는 범죄에 해당되었다.이러한 규범들은 고대 원시사회로부터 지금까지 그 형태를 달리하여 이어져 왔다. 하지만 이러한 불합리한 규범들이 현재의 법의 기초가 되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규범, 즉 기존의 법에 일종의 사건이후 새로운 룰을 새겨 나가면서 다시 올 사건에 대비하고 발전해 왔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의미에서 법이란 역사의 각 단계에서 사람들이 생활경험을 비판하여 총괄한 것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이러한 법 중에서도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헌법’이다. 헌법은 정치와 사회의 근본을 정하는‘법 중의 법’,‘기본법’,‘근본법’이다. 헌법을 기초로 해서 다른 법들이 파생되었고 또 인류가 법을 만든 목적의 최우선은 인권의 보호라 할 수 있는데 이는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본론에서는 이러한 인 근대 입헌주의 시민헌법과 더불어 정치와 사회의 근본을 헌법에 정하고 그 헌법에 따라 정치를 해야 한다는 입헌주의가 시작된다. 입헌주의를 밑으로부터 지탱하고 있는 것은 자유와 평등에 대한 욕구 및 부자유와 차별을 강요하는 권력과 그 담당자들에 대한 불신이었다. 구체제하의 부르주아 계급을 포함하여 제3신분은 비특권신분으로서 직업선택의 자유도 거주이전의 자유도 보장받지 못하고 오로지 지배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부르주아 계급이 요구하는 자본주의는 일정한 자유와 평등 및 법생활의 예측 가능과 안정성 확보를 필수불가결로 하였다. 자유와 평등에 대한 욕구 및 권력과 그 담당자에 대한 불신은 부르주아 계급의 생활에 내재하여 있었고, 그와 같은 욕구와 불만이 그들의 입헌주의를 지탱하였다. 몽테스키외의 말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정치적 자유는 권력이 남용되지 않을 때만 보장되며, 국가를 제한할 때에 보장된다. 그러나 권력담당자들이 권력을 남용하기 마련이라는 경험은 영원히 입증되는 바이다. 권력이 남용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권력이 권력을 억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법의 정신)또 하나의 중요한 특색은 인권 보장의 목적성과 정치(권력)의 수단성이다. 근대 입헌주의 시민법하에서는 인권 보장이 목적이며, 정치(권력)는 인권 보장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정치와 권력 그리고 그 담당자는 인권 보장을 위한 수단이고, 그 목적을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권력담당자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행사하고 정치를 하는 것은 배제하고자 한다. 「1789년 인권선언」은 제2조에서“(국가를 비롯하여)모든 정치적 결합의 목적은 자연적 시효에 의해서도 소멸하지 않는 인간의 권리를 보전하는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두 번째는, 독일. 일본과 같은 후발자본주의 국가에서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만들어 낸 헌법인데, 이를‘외견 입헌주의 시민헌법’이라고 한다. 이는 근대 시민혁명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근대 시민혁명이라는 역사적 흐름을 저지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독일국 헌법」은 제정은 되었으나 결국 시행되지는 못했다. ‘아래로부터의 근대화’에 실패한 것이었다. 이는 1850년 「프로이센 헌법」이 출현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독일에서 성립된 시민헌법은 계급관계나 지배관계의 혁명적 전환의 결과가 아니라, 자본주의 전개에 필요한 질서를 보장하면서도 가능한 한 구체제를 온존시키려는 타협의 결과였다. 그런 탓에 1850년「프로이센 헌법」이 보장한 것은 입법권도 침해할 수 없는 불가침의 인권이 아니라, 법률에 의하면 얼마든지 제한할 수 있는 법률에 유보된 인권이었다. 또한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변하였다고는 하지만 군주주권 원리가 유지되었다. 그에 따라 외견적인 권력분립이 이루어졌을 뿐이다. 군주는 행정권을 담당하는 데 그치지 않고, 법률발안권과 법률재가권, 의회를 개폐하고 해산?정회시킬 권한, 그리고 칙령 형식으로 정치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하였다. 게다가 법원은 군주의 이름으로 재판을 하는 등 군주에게 통치권이 집중되었다. 근대 입헌주의 시민헌법의 핵심 요소인 국민주권, 권력분립, 인권보장이 빠졌다는 의미에서 독일에서 성립된 헌법을 외견 입헌주의 시민헌법이라 한다. 외견이라는 것은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근대 입헌주의 시민헌법이 인권보장과 권력남용을 방지하는 것을 과제로 하는 시민헌법이었다면, 외견 입헌주의 시민헌법은 헌법의 이름은 빌려 쓰고 있으나 알맹이는 빠진 시민헌법이었다. 이 헌법의 특색은 다음과 같다.군주주권을 전제로 하였던 탓에 ‘헌법에 의한 정치’, 즉 입헌주의의 의미는 ‘국민주권’을 취한 프랑스와는 전혀 달랐다. 전통적인 군주주권론에 의하면 국왕은 통치권의 소유자이므로, 국왕과 국왕이 이끄는 정부는 헌법상의 명확한 수권이 없더라도 헌법에서 명시적으로 금지 또는 제한하고 있지 않은 것은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헌법은 수권규범이 아니라 제한규범에 지나지 않았다.일본의‘근대화’도‘위로부터’이루어진 것이었다. 1869년에는 판적봉환(版籍奉還)이 이루어졌고, 187나 소극적이었다. 그들은 근대 입헌주의 시민헌법보다 더 충실한 인권보장과‘인민에 의한 인민의 정치’를 철저히 요구하였다.근대 시민혁명기에는 근대화 즉 자본주의화와 입헌주의화를 지향하여 의회를 중심으로 결집한 부르주아 계급과는 별도로 의회 밖에서 민중의 해방을 지향한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독자성 풍부한 행동을 전개하였다. 영국에서도 청교도혁명기의 ‘수평파(Levellers)'등의 사상과 운동이 있었다. 그러나 부르주아 계급과는 다른 민중헌법사상이 체계성을 갖추고 나타났던 것은 프랑스혁명 때였다. ’상퀼로트(les sans-culottes)운동‘과 ’농민혁명‘이 그것이다. 프랑스혁명기에는 과도적이기는 하였으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봉건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부르주아계급과 민중이 일치된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봉건체제 타도 후의 정치와 사회에 대해서는 의견이 같지 않았다. 물론 당시의 민중 생활을 보면 민중 일반이 부르주아 계급과 다른 이해를 자각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민중의 자각적인 부분이 이를 의식하고 민중해방을 위한 헌법사상과 인권선언을 공표하고, 민중운동을 조직하고 프랑스혁명에 무시할 수 없는 많은 영향을 끼쳤다. 상퀼로트운동의 이론적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의 바를레(J-F. Varlet)의 문서들과 ‘바뵈프(Babeuf)음모’등은 이를 구체적으로 시사하고 있다.바를레는 상퀼로트 운동이 고양되었던 1792년 여름부터 다음해 여름까지 이론적 지도자로서 활약하였다. 그는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문서를 발표하였다. 하나는, 「국민공회의 인민 수임자에 대한 명령적 위임안」(이하 ‘명령적 위임안)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상태에서의 인간 권리의 엄숙한 선언」(이하 ‘엄숙 선언’)이다. 1792년 8월 10일의 ‘제2혁명’(민중봉기로 의회가 왕권 정지와 보통선거에 의한 국민공회 소집을 결정한다.)으로 군주제의 1791년 헌법체제가 붕괴되었다. 같은 해 9월 21일, 신헌법 제정을 위한 국민공회가 간접선거이기는 하지만 남자보통선거 보면 근대 입헌주의 시민헌법이야말로 시민헌법의 전형임을 알 수 있다. 민중의 헌법 구상은 근대 입헌주의 시민헌법을 비판하면서 운용 과정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사회주의 헌법의 모태가 되기도 하였다.- 1871년 파리코뮌과 헌법사상1871년 파리코뮌은 역사상 처음 출현한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한 민중권력이다. 파리코뮌은 근대 시민헌법의 어두운 측면을 극복하고자 인권보장과 민주주의 및 군축. 평화문제에 대한 새로운 구상을 내세움으로써 근대 입헌주의 시민헌법을 한 단계 뛰어넘으려고 시도하였다.파리코뮌이 사실상 성립한 것은 1871년 3월 18일이며, 3월 28일에는 코뮌의 성립을 정식으로 선언하였다. 같은 해 5월 28일에 베르사유 정부군에게 진압되었으므로 약 2개월 남직 존속한 셈이다. 3월 18일은 정부가 베르사유로 도망하고 국민위병중앙회가 파리의 지배권을 확립한 날로서, ‘코뮌 혁명’또는‘파리 봉기일’로 불린다. 3월 26일에는 코뮌 의회 의원선거가 치러졌고, 이에 근거하여 코뮌 의회는 3월 28일 파리코뮌을 정식으로 선언하였다. 3월 18일 이후는 코뮌이 파리를 사실상 지배한 셈이고, 28일부터는 코뮌이 파리를 정식으로 지배하였다. 당시의 프랑스는 프로이센을 주축으로 하는 독일과의 전쟁에 졌기 때문에 프로이센이 독일을 점령한 상태였다. 코뮌은 파리에 대한 사실상의 지배를 시작한 3월 18일 이후 새로운 국가와 헌법에 관한 구상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그 골자는 새로운 혁명정권으로서의 코뮌을 성립시키고 나면, 인권 보장의 폭을 넓히고 새로운 정치권력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3월 27일의 ‘20구(區) 공화주의 중앙위원회’의 선언과 4월 19일의 ‘프랑스 인민에 대한 선언’이 대표적인 문서이다. ‘20구 공화주의 중앙위원회’는 파리 각 구의 공공집회에서 선출된 감시위원들의 대표자로 구성된 위원회였으며, 3월 27일의 ‘선언’은 정식으로 성립될 코뮌의 기본 구조와 기본 정책을 예고하는 강령적 성격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4월 19일의 ‘프랑스 인민에이다.
강원택, 『헌법 개정의 정치』, 인간사랑, 2010Ⅰ 서론Ⅱ 본론1. 헌법 개정 뒤돌아보기2. 헌법 개정의 정치학3. 헌법 개정의 몇 가지 쟁점Ⅲ 결론Ⅰ. 서론최근 들어 정치권을 중심으로 다시 개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대통령 직선제로 대표되는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으면서 그간의 시행착오를 토대로 보다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정치 질서를 모색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동안 논의의 방향은 대체로 현행 헌법의 문제점으로부터 출발하여 개정의 필요성이나 정당성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즉 현행 헌법상의 문제를 교정하겠다는 대증적 처방에 머물렀다. 이 책은 정치권에서 제기되는 대증적 처방 중심의 접근법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헌법 개정이 갖는 정치적 의미와 바람직한 개정 절차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어느 한 분야의 학문적 시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닌 정치학자, 헌법학자, 역사학자 등이 모두 참여하여 다양한 분야의 학문적 시각에 대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또한 헌법 개정이 현실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중요한 정치 행위라는 점을 감안하여, 여야 정치인, 언론인, 시민운동가 등 모두 12명과 개헌을 주제로 토론하는 과정을 거치고 서술하였다. 즉 단순히 이론적 논의로 그치는 것이 아닌 헌법 개정이 실현되기 위해 요구되는 개헌 정치의 현실 정치적 의미도 살펴보고자 했다.Ⅱ. 본론1. 헌법 개정 뒤돌아보기(1) 1987년 헌법의 역사화와 시대적 소명 -조지형 (사학과 교수)저자는 87년 헌법 개정의 역사화를 통해 이 헌법의 의미를 새기고 앞으로의 헌법 개정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헌법의 역사화를 통해 이를 역사의 귀감으로 삼고 앞으로의 방향을 열고자 하였다. 헌법 개정의 역사화의 중요성의 근거로 18세기 영국의 저명한 법학자 윌리엄 블랙스톤의 제정법 해석에서 찾았다. 해당 법률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해당 법률의 ‘정신과 이성’ 즉 법률제정자의 입법취지라는 것이다. 헌법은 역사적 존재이다. 들의 정치적 요구를 누그러뜨리고 정국의 주도권만을 회수하기 위해 내각제 개헌을 신속하게 처리하였다. 과도정부의 신속한 일 처리에 있어서 정치권의 심층적인 토론이나 학계 및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이 수렴되지 못하였고 과도정부 입장에서는 4.19 혁명세력의 정치적 요구를 수용하여 개혁할 만한 리더쉽과 정치적 야심이 없었음으로 하루 빨리 개헌을 단행하여 다음 신정부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려 하는데 있다.이와 같은 이유로 볼 때 헌법 개헌은 결국 정치권의 이해관계가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도 개헌 논의가 많지만 국회에서 본격적인 개헌 발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도 각 정당이나 정파의 다수가 아직 개헌의 절박성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향후 개헌에 있어서 다양한 정치적 가치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특히 제도상의 잠재적인 문제점에 대비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에 대해 심층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서술하였다.2. 헌법 개정의 정치학(1) 헌법 개정의 바람직한 절차와 과정 -강원택이글의 저자는 헌법 개정에 있어서 개정의 내용 못지않게 중요한 점은 개헌의 절차의 과정이라고 한다. 헌법 개정은 국가 통치구조의 근간을 변혁하려는 큰 작업이기에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은 개정방향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내는 일이다. 즉 개헌은 정치적 이혜관계에서 비롯되는게 아닌 정치적 신뢰에 기초한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헌법 개정의 절차와 과정을 중시하는 이유는 우리 헌정사에서 개헌이 순탄하게 이루워졌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 헌법의 탄생에 있어서도 당시 48년 5월 총선을 통해 구성된 국회는 내각책임제를 선호하였고 헌법의 초안 역시 내각책임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지만 이승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면서 결국 대통령중심제로 바뀌게 되었다. 그 이후의 개헌도 역시 ‘정상적인’ 절차를 거치기보다는 ‘일탈적인’ 형태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헌법 개정의 목적에서 볼 때도 그간의 헌법 개정은 크게 두 가지 경우로 구분해 볼 수 있다있을까? 오늘날 제기되는 헌법 개정 필요성에 대한 주장은 87년 헌법에 대한 3가지 상이한 비판에서 비롯되고 있다. 첫째는 5년 단임제의 대통령 직선제, 둘째는 대통령의 권한을 분산시키기 위한 헌법개정, 셋째는 87년 헌법의 개정 과정이 충분한 사회적 토론과 논의로 이루어지는게 아닌 정치 엘리트간의 협상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데 있다. 앞의 제도적 주장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개헌의 과정과 절차에 있어 소수의 정치엘리트에 의해서가 아닌 국민 다수가 함께 참여하고 그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확산시켜 나가는 것이다. 헌법 개정을 둘러싼 국민과 정치권의 시각에 대해서 각각 살펴보면 국민적 차원에서는 정치권을 중심으로 새로운 통치구조나 헌법조항의 개정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확산시키고 정치권 차원에서는 정치권 내부에서의 공감대 형성이 중요하다. 하지만 절박함이 없는 평시에 개헌을 추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일도 쉽지 않고 정치권에서 주요 행위자 간의 합의 도출도 쉽지 않다. 그렇다면 절박함이 없는 격변의 시기가 아니라면 개헌은 불가능한지 어떤 경우에 헌법 개정이 실현 가능한지 몇 가지 방안을 보자면 첫 째로 대통령 선거를 개헌에 대한 국민적 합의 도출의 기회로 삼는 것 둘째로 한 번에 모든 것을 다 바꾸는 것이 아닌 합의 도출이 가장 쉽고 정치적 부담도 적은 사안부터 헌법 조항을 개정해 나가자는 것 셋째로 개정의 시기의 적정함과 국민과 정치권으로부터 동의와 신뢰를 구하여 불확실성을 줄이고 의도의 진정성을 높이는데 있다. 이에 저자는 과거의 개헌과는 틀리게 오늘날의 개헌은 국민 대다수가 공유하는 절박함이나 시급함은 존재하지 않고 또한 개정 후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합의에 도달하기 쉽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헌법 개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개헌의 목적과 방향에 대한 대다수 국민의 공감을 형성하는 것을 첫 걸음으로 현행 통치체제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으로 이루어진 대증적인 처방보다는 헌법 개정이라는 정치 구조의 근본적 변화가 수반할 수밖에 없도의 민주성과 합리성 제고’를 주제로 사법제도의 구성과 운영에 관한 골격을 개선하는 방안을 제안하고 ⁴‘변화된 헌법현실의 반영’ 이라는 주제로 세계화, 다민족 및 다문화 시대의 진전, 국가 균형발전 요구, 지방자치제의 보완, 경제조항의 합리화를 위한 헌법규정의 정비를 제안하고 있다. 여기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 가지만 인과관계론적 검토를 해보자면 기본권 영역에 있어서 이다. 현실화되어 있는 기본권의 형식적 헌법화와 인과관계적 효과를 보았을 때 헌법의 유권해석을 통해 실질적으로 보장되어 온 기본권을 명시적으로 헌법화한다고 하여 실질적으로 효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다. 그렇다고 그 의미를 폄하할 수만은 없고 명시되지 않은 기본권들을 명시함으로써 이들 권리의 적극적 보장을 위한 입법의무가 강화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개선효과는 사회 인식수준이 높아져서 입법과정을 통해 법률적 보장을 강화하는 방안으로도 충분히 달성될 수 있다. 그리하여 개선 효과는 크지 않다고 본다. 또한 기본권 보호영역 확대의 효과도 그리 크지 않고 이도 법률의 정비를 통해 충분히 확대할 수 있다. 즉 헌법 개정으로 인한 기본권 신장의 효과는 크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 헌법의 경우와 같이 자연권적인 기본권 보장체계를 두면서도 헌법 제37조 제2항에서 유보조항을 두어 모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법률로 제한할 수 있도록 하는 체제에서는 입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국민의 기본권이 보다 보장될 수도 아닐 수도 있으므로 개헌을 통한 기본권 보장의 효과는 크지 않다는 것이다. 나머지 개헌안중 사법제도 개헌안을 제외한 나머지의 제안들의 개정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이렇게 저자는 원인과 효과 간에 인과관계적 상관관계를 살피고 다른 대안을 통해 문제해결의 가능성을 상호 비교함으로써 개헌안을 평가하고 합리화 하였다.(3) 개헌 논의의 정치사회학과 정상화 방안 모색 -박성우이글의 저자는 헌법 개정의 의의와 진정한 방법에 대해 서술하였다. 현재 헌법 개정의 문제점을 보자면 개헌의심단계에서 모두 폐기 될 것이다. 이로 인해 헌법규범과 헌법현실의 격차는 계속 벌어지고 이로 인한 사회갈등이 심화될 가능성은 분명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먼저 개헌 논의를 주체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평가하지 말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각각의 개헌 논의를 평가할 필요가 있다. 개헌 논의의 객관적인 검토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객관적인 검토가 전문가 수준에서 머무는 것이 아닌 국민 전체로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개헌 논의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개헌의 가능성만 보고 가능한 범위에서 개헌을 시도하자는 태도보다는 비록 개헌이 지연되거나 성사되지 않더라도 즉 정치적인 목적이 성사되지 않더라도 이를 통해 국민의 의사를 확인하고 국민이 납득하고 합의하는데 의의를 두어야 할 것이다.개헌논의의 진전을 위해 고려되어야 할 두 번째는 정치의 사법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이는 정치문제로 간주되어 오던 국정현안을 사법권력이 법의 논리체계에 의존하여 해결하려는 경향을 의미한다. 노무현 정부 때의 신행정수도이전 위헌판결과 탄핵소추가 사례이다. 이는 정치적으로 해결되어야할 사안이 사법부가 개입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의회 권력이나 정부의 권력이 사법부를 자신들의 지위를 강화하려는 수단으로써 사용되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두 가지 방향을 제시하자면 하나는 국민의 대표인 의회 구성원들의 위상을 제고하는 방향과 또 하나는 사법부 특히 헌법재판소의 정치적 편향을 완화하고 삼권분리의 본래의 취지를 복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안을 실현하기 위해선 개헌 논의가 활성화 되어야 한다. 이때 개헌 논의는 하나의 정치적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고 자유롭게 의사를 개진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형식적으로 개헌 논의는 개헌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실질적인 목적은 헌법규범과 헌법현실의 격차를 줄이고 우리 사회의 변화된 현실에 맞는 제도와 규범을 정립하는 것이 개헌의 목적일 것이다. 저자는 여기서 목적대로 실효성을 거두기 위해선 개헌의 성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국한다.
이영록, 『우리 헌법의 탄생』, 서해역사문고, 2006Ⅰ. 들어가며Ⅱ. 본론1. 제헌을 향한 투쟁2. 제헌국회의 성립3. 헌법 초기의 역사4. 진통 속의 출범한 헌법기초위원회Ⅲ. 앞으로의 우리헌법Ⅰ. 들어가며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에서도 헌법개정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 고쳐야 한다면 어떠한 방향으로 고쳐야 할 것인가. 헌법은 저자의 말처럼 정치 세력들간의 타협과 투쟁의 역사 속에서 탄생한 법적 산물이다. 이런 점을 중점에 두고 우리나라의 헌정사에서 개정의 방향을 찾고자 하여 이 책을 읽게 되었다.Ⅱ. 본론1.제헌을 향한 투쟁일본 식민지 시절 제헌이라는 생각은 욕심으로 치부될 만큼, 국가적인 기반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작은 불씨지만 제헌을 향한 투쟁을 시작하였다.미국의 원폭투하로 일본은 항복하면서 우리나라는 준비도 없는 갑작스러운 광복을 맞이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광복이 모두에게 희망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김구는 탄식을 내질렀다. 조금은 덜 험난한 건국 과정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지만 우리의 손으로 해방을 쟁취했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기다렸던 광복이었기에 가만히 넋 놓을 순 없었다. 혼란으로 인하여 주도권 투쟁은 발생할 것이 분명했지만 이후 김구는 포츠담 선언과 카이로 선언을 통해 적절한 과정에 따라 한국을 자유독립국가로 발전을 노력 하였다. 하지만 우리가 ‘적절한 과정’을 정하는 주체가 될 수 있는 없었다. 그 우려는 현실로 다가왔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논의된 신탁통치안에 의해 미국과 소련이 남한과 북한을 각각 분할 점령하게 된 것이다. 임시정부의 수립을 돕기 위함이라는 목적 때문에 합리적일 수도 있는 구상이었지만 한창 고조되어 있는 민족주의 감정에 비추어 볼 때 참을 수 없는 수모였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안은 사실상 남한과 북한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의 최전선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1) 혼란의 계속미소공동위원회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됨으로 미국은 소련과의 교섭을 포기하고 이 문제를 UN에 넘겼다. UN은 그해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소련이나 북한이 거부함으로서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 당시 좌파는 물론, 중간파와 심지어 김구의 한독당 같은 민족주의적 우파조차도 단독정부수립에 완강히 반대했다. 그러나 이미 확정된 여론을 돌리기 어려웠고 이로서 해방으로 인한 통일국가 수립의 꿈은 무산되고, 분단이 최종 확정되었다.해방 이후 3년은 국가의 성격과 이념, 체제를 결정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그 결정을 하는데 우파와 좌파의 대립과 투쟁은 극에 달해 있었다. 새로 수립해야 할 정치체제가 민주주의여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좌, 우파를 막론하고 의문이 없었다. 하지만, 각자가 지향한 민주주의의 내용이 달랐다. 우파가 지향한 민주주의의 형태는 전통적인 자유민주주의인데 반해, 좌파에서 지향한 것은 인민민주주의였다. 이런 대립 속에서 결국 우파의 승리가 되었고 우리 정치체제가 자유민주체제로 결정되었다. 이로서 헌법의 가장 핵심적인 토대가 결정되었다. 이 후 정치체제의 문제보다 더 첨예한 대립을 이루었던 농지개혁의 문제도 우파의 승리와 함께 자연스럽게 유상매입·유상분배의 방침으로 굳어졌다. 또한 과거청산의 문제가 본격적인 헌법 제정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쟁점으로서 뜨거움이 식어 버림으로서 제헌 작업을 무산시킬 만큼 타협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들은 제거 되었다. 이로서 우파의 단정 노선이 승리하게 된 것이다.2. 제헌국회의 성립저자는 제헌국회의 성립을 폭동과 소요속의 시작된 단독 선거라고 말하고 있다.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는 우리나라 최초의 보통선거이다.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마치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는 외신기자의 보도에서 볼 수 있듯이 그 당시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보통선거가 실시된 것은 민주주의라는 꽃을 피우기 위한 첫 걸음이었다는 것에서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남한만의 총선거를 방해하려는 좌파의 공세가 전국적으로 개시 되었지만 우려와는 다르게 선거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선거가 치러지지 못한 북제주군의 2명을 제외한 198명의 당선자 중 85명이 무소속 당선자였다는 점에서 기존 정당에 대한 민중의 신망이 높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당시 가장 큰 세력으로 부상한 것은 한민당이었다. 비록 공식적적인 당선자는 29명이었지만 총 당선자 중에 7~80명은 친한민당계 인사들이었다. 비록 과반수는 아니더라도 제1당의 위치는 굳힐 수 있었다. 이로서 우파의 우위가 공식화 된 것이다.이처럼 대정당이 생겨남에 따라 군소정당의 난립을 방지하기 위해 소선거구제와 다수대표제가 채택되었다. 미군정 측이 제시안 초안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다양한 정치·사회세력이 참여하여 진정한 대표성을 갖추는 것이 헌법을 제정해야 할 의회의 생명이었다 하지만 자유로운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은 채 선거가 실시되었과 좌파와 중간파가 대거 불참함으로서 5. 10 총선거를 통해 구성된 제헌국회는 실질적인 대표성에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 점에서 제헌국회는 약한 정당성을 가지고 출발하게 되었다.3. 헌법 초기의 역사와누구 하나 헌법을 제대로 공부해 본 적 없는 당시 상황에서 3년간의 짧은 공부만으로도 유진오는 헌법학의 대가로 불리게 되었고 법전기초위원회의 분과인 헌법분과위원회의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헌법 초안 작성의 임무가 유진오에게 맡겨졌다. 헌법안 초안을 작성을 완성·제출한 뒤 유진오는 법전기초위원회의로부터 행정연구회 회원들과 헌법안 작성에 착수하게 되었다. 행정연구회 측은 유진오의 이름을 빌리고 유진오 측은 자신의 구상을 제한 국회에서 관철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후 행정연구회와 유진오의 공동안이 만들어졌다.1948년 5월 31일 대한민국 최초로 선출된 의원들만으로 구성된 ‘제헌국회’가 개원한다. 제헌국회는 향후 대한민국의 모든 법적 기초를 스스로 창출해야하는 막대한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처음 헌법을 제정하는 단계에서 헌법 이전에 헌법 제정을 위한 일정한 절차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가령 헌법을 다수결로 의결할 것인가, 아니면 3분의 2 이상의 찬성에 의해 의결할 것인가이다. 우리 제헌국회는 헌법의 가결을 과반수로 처리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헌법이 갖는 통합적 중요성을 감안하지 못한 이 의결정족수는 이후 국회 본회의에서 헌법안을 심의할 때 문제가 다시 제기될 것은 분명했다.4. 진통 속의 출범한 헌법기초위원회1948년 5월 헌법 제정을 위한 기초위원회 구상이 담겨 있는 국회임시준칙이 통과 되었다. 암시준칙에 따라 임시 국회의장과 부의장이 선출되었다. 국회의장으로 이승만이 선출된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부의장 두 명에 신익희와 김동원이 당선됨으로써 반대파와의 다툼이 불거졌다. 이로 인해 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할 위원들을 추천할 10명의 전형위원의 선출방법에 대해 많은 다툼이 있었고 재투표까지 실시한 가운데 도별 선출방식이 채택되었다. 여기서 선출된 전형위원이 추천한 30인 그대로가 기초위원으로 확정되었다. 기초위원이 확정되자마자 바로 그날 전문위원들이 선임이 이루어졌다. 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하고 짧은 시간 안에 모든 것이 이루어 질 수 있었던 것은 유진오와 행정연구회가 공동으로 작성한 헌법안의 채택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후 예상치 못한 돌발변수들이 발생함에 따라 세 번의 상정일 연기를 통해 기초위원회는 헌법안을 확정할 수 있었다.헌법의 세부적 확정에서 기초위원들의 고정관념을 넘어서지 못하고 치안을 위해 인권이 위축되었다. 또한 고문 금지 규정이 삭제되었다. 권력구조에 있어서는 신속히 국론을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견에 의해 단원제가 채택되었다. 그리고 직접 선거는 정부 수립을 지연시킬 수 있다는 이유에서 간선제가 채택하였다. 그리고 대통령의 임기가 5년으로 되었고 정부형태는 내각책임제가 채택되었다. 사법제도에 관한 헌법구상에서 두 가지 쟁점에 대한 논의가 치열했지만 결국 절충점을 찾게 되었다.헌법기초위원회에서 제2독회 조문별 심의가 완료되고 마지막 제3독회에서 헌법안 전체에 대한 표결을 거쳐 본회의에 상정하는 일만 남겨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마지막 단계에서 헌법기초위원회는 예상하지 못한 회오리에 휩쓸리게 된다. 이승만이 헌법기초위원회에 대통령제로 정부형태를 변경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대통령제가 채택되지 않으면 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민간에 남아 국민운동이나 하겠다는 것이다. 당시 이승만은 취약했던 제헌국회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인물로서 그 제헌국회를 떠받치는 유일한 축이었다. 이에 정치지도자들은 이승만을 설득시키려 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모두가 난감해 하던 차에 김준연이 법안을 수정하고 유진오가 검토함에 수정된 헌법안이 헌법기초위원회에 의해 가결되었다. 하지만 이 안에는 대통령제적 요소와 내각책임제적 요소가 섞여 있었다. 어떤 요소를 더 중요하게 보느냐에 따라 정부형태를 해석하는 틀이 달라질 소지가 생긴 것이다. 이에 대통령제론자인 이승만의 압력에 의해 내각책임제적 요소는 거의 무의미한 부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