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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고려거란전쟁 PT 대본
    고려거란전쟁 PT 대본
    [목차]1. 머리말2. 10세기 동북아시아 정세1) 만부교 사건2) 거란과 송의 관계3. 고려와 거란의 1차전쟁4. 고려와 거란의 2차전쟁5. 고려와 거란의 3차전쟁6. 전쟁 종결과 동북아시아 정세변화7. 맺음말8. 참고문헌1. 머리말고려의 대외관계라고 한다면 거란 혹은 원과의 관계를 떠올릴 것이다. 우리조의 주제에는 고려의 대외관계, 송과 거란, 여진 등이 있었기 때문에 고려 거란 전쟁이 가장 적합하고, 흥미가 생겨 주제로 선정하였다. 조사를 하는 동안 고려 거란 전쟁 속에는 많은 전투가 있어 굉장한 분량을 자랑하였다. 우리 조의 발표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최대한 많은 내용을 담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럼 10세기의 동북아시아 정세, 그리고 고려 거란 전쟁의 전개과정, 결과에 대해서 서술해보겠다.2. 10세기 동북아시아 정세북 중국에서는 거란의 추장 야율아보기가 만주 일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916년에 거란을 세웠다. 서방 경략을 일단락 지은 거란 태조는 발해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거란은 여러 부족과 귀부하지 않은 여진족까지도 귀부시켰지만, 발해만은 홀로 건재하면서 배후를 위협하고 있었다. 또한 거란은 발해를 ‘누대의 원수’로 인식하고 있었다. 발해는 요주를 공격하여 자사를 살해하고 주민을 빼앗아감으로써 거란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인접한 국가였던 발해와 거란은 마찰이 잦았고, 거란 태조는 서방 경략에 나선 군대를 회군시킨 925년 12월에 발해 정벌의 조서를 내렸다. 태조가 친정한 거란군은 발해의 부여성을 함락, 수도 홀한성을 포위하자 발해가 항복하여 발해는 926년에 멸망하였다.이후 거란 태종은 후당의 토벌을 천명하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종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후당의 군대를 격파하고 석경당을 후진의 황제로 추대하였다. 석경당은 그 대가로 지금의 하북성과 산서성 일대인 연운 16주를 거란에 할양하였다. 연운 16주를 할양받음으로써 거란은 중원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후진에 우월한 입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고려와 거란의 외98년(목종1)에 사망하였다. 서희는 고려 전기의 정치가이며 외교가이다. 서희는 960년(광종 11) 3월에 18세에 갑과(甲科)로 과거에 급제하였고 관계로 진출한 서희는 송에 사신으로 파견되었고, 예의바른 태도와 뛰어난 언변에 송 태조는 고려와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맺었다. 또한 조칙을 내려 광종에게 식읍을 더해주었으며, 서희에게는 검교병부상서라는 벼슬을 내렸다. 젊은 시절부터 서희의 외교적 역량이 탁월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경험을 통해 서희는 송과 거란이 대치하고 있는 동아시아 국제정세에 대한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고려로 돌아온 서희는 평원외랑(廣評員外?)·내의시랑(內議侍?)을 거치고, 983년(성종 2) 군정(軍政)의 책임을 맡은 병관어사(兵官御事)가 되었다. 이후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平章事)를 거쳐 태보(太保)·내사령(內史令)의 최고직에까지 이르렀다.고려가 거란과 단교한 상태에서 송과 친선관계를 유지하고 거란과 송이 맞대결을 하고 있던 동북아시아의 대치 형태는 거란 성종이 즉위 한 후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 시기의 거란은 대내 안정에 주력하여 그간의 내부 혼란을 정리한 후, 동방으로 진출하고자 하였다.거란은 장악하지 못한 고구려 고토에 산재한 부족과 국가들, 즉 요동 지역의 여진과 정안국, 그리고 고려를 정벌하기 위한 동방경략을 시작하였다. 거란은 고려를 정벌하기 위해 병사를 조직하여 원정을 단행하였으나 요동지역의 여진 정벌로 끝났다. 이것이 제 1차 여진정벌이다. 거란의 요동 침공과 고려의 압록강 관방 설치 시도로 요동 지역의 여진은 거란과 고려가 연합하여 침공했다고 여겨 송에 고려가 거란 침공에 가담하여 협공했다는 목계(木契)를 보냈다. 이듬해 송은 한국화를 보내 고려가 거란과 밀약하여 여진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면 송의 거란 원정에 군사 협조를 할 것을 종용하였다. 고려는 비록 송에 사대하는 관계이지만 송의 요구대로 거란 원정에 동참할 수 없었다. 이에 고려는 송에 사신을 보내 고려가 거란 침공에 가담했다는 것은 여진의 무고일 뿐고려 성종이 직접 서경에 행차하여 안북부까지 가고자 하였는데, 이는 전쟁을 총지휘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993년 10월 경, 봉산군에서 거란과 고려가 최초로 충돌하였다. 귀주에 인접한 봉산군은 귀주에서 정주에 이르는 교통로와 귀주에서 태주?박주에 이르는 교통로를 동시에 통제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봉산성 밖에 당도한 거란군은 요지에 병력을 배치한 후 사자를 파견하여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선봉군사 윤서안과 고려 군민들은 결사항전을 결의하고 거란군의 항복권유를 거부하는 의사를 전달하였다. 이후 고려군은 선전 분투하였으나 병력과 장비의 열세로 지휘관인 윤서안이 적에게 포로가 되는 일이 발생하였다.이 소식을 중군을 지휘하고 있던 서희에게 전해졌고, 휘하 군대를 이끌고 봉산군 10리 전방까지 전진하게 하였다. 봉산군에 도착한 서희는 그곳에서 소손녕에게 고려 침략 명분을 전해 들었다.“거란이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는데, 이제 너희 나라가 거란의 경계를 침범했으므로 이를 토벌하러 온 것이다. 거란이 온 천하를 통일했는데 아직까지 항복해 오지 않는 나라는 기필코 소탕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조속히 항복하라.”소손녕이 밝힌 거란의 고려 침략 명분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거란이 고구려에 대한 연고권을 갖고 있다는 것. 둘째, 거란이 주변 제국을 군사력으로 제압했으니 고려는 거란이 군사행동을 하기 전에 항복하라는 것이었다. 서희는 거란군이 전투보다는 강화를 원하고 있다고 간파하고 성종에게 알렸다. 성종은 서희의 말을 따라 강화사 이몽전을 거란 진영으로 보냈다. 그러나 이몽전이 거란군 진영에 도착하기 전에 “80만 군사가 당도했으니, 만약 강으로 나와 항복하지 않는다면 모조리 섬멸할 것이니 군신 모두가 속히 아군 앞에 와서 항복해야 한다.”는 글을 보냈다.이몽전이 침략 이유를 묻자 “너희 나라가 백성을 구휼하지 않으므로 하늘을 대신해 벌을 내리는 것이다. 만약 강화를 구하려거든 빨리 와서 항복해야만 한다.”고 하였다.소손녕은 이몽전에게 요구한 항 침략에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치 못함으로써 소손녕이 제시한 강화교섭에 응하지 못하자, 거란군은 기습 남진하여 고려군의 지휘부가 있는 안북부를 공격하려 하였다. 거란군은 이 지역으로의 남진을 회피하고 고려의 방어가 허술할 것으로 판단되는 태주?위주?연주 방면으로 군대를 진입시켜 고려군의 허를 찌르려고 하였다. 그러나 막상 군대를 진입시키자 그곳에 고려의 저항은 의외로 강력하였다. 거란군이 밀려 연주성까지 도달했고 연주성에서의 강력한 고려의 항전 태세와 배후의 기습차단 공격을 당하게 된 거란군은 막대한 병력과 장비의 손실만 입은 채 남진을 포기하고 봉산성 부근으로 군대를 퇴각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에도 거란군은 남진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이는 남진할 의욕을 상실케 만들었다. 그렇다고 봉산성에 장기 체류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거란군 지휘부는 안전한 귀환을 위해 고려와 강화교섭을 서두르게 되었다.고려 조정은 장영을 화통사로 삼아 거란군영에 파견하였다. 화통사 장영이 거란군 진영에 당도하자, 거란군 사령관 소손녕은 화통사의 직급을 대신급으로 격상할 것을 다음과 같이 요청하였다.“고려는 조정 대신을 우리 군진에 보내 소손녕과 면대해야 화의 진행이 가능할 것이다.”거란이 고려의 대신과 화의교섭을 하겠다는 것은 외형적으로 양국의 책임 있는 대표가 화의 교섭을 했다는 사실과 고려 침략을 통해 국제간의 위계질서를 확립했다는 사실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고려에서는 거란군 진영에 파견할 대신의 인선문제를 놓고 고심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중신들이 영토문제와 같은 중요한 문제를 잘못 처리했다가 여론의 집중 공격을 받을 소지가 많다는 사실과 신변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나서지 않았다. 중신들이 회담 대표를 회피하자 중군사 서희가 강화사를 자원하였다. 에는 당시 상황이 자세히 나타나 있다.소손녕: 귀국은 신라 땅에서 일어난 나라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의 영토인 고구려의 옛 땅을 침범하는가?서희: 무슨 소린가? 우리 고려야말로 옛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다. 그래압록강 요충인 보주 지역을 확보하여 압록강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장악함으로써 고려와 여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거란의 보주 지역 확보로 고려는 더 이상의 서북방 개척이 차단되었다. 또한 보주는 이후 거란 침입의 교두보 역할을 하게 되었다.거란은 1차전에서 최초 의도했던 전쟁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압록강 이동 지역에 대한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사대 관계 수립을 통해 고려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여 배후를 안정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압록강 요충인 보주 지역을 장악함으로써 고려와 여진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했고, 고려의 서북방 진출을 이 지역에서 차단할 수 있었다.반면, 고려는 압록강 이동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함으로써 압록강 인근까지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강동 6주에 성을 쌓고 그 이외의 지역에도 성을 쌓거나 개축하여 방비 태세를 강화함으로써 다중 종심 방어선이 형성되었다.그러나 고려는 압록강 연안으로 진출하면서 이 지역에 거주하던 여진과의 마찰이 불가피해졌고, 이 지역의 교역권을 장악하고 있던 거란과는 완충지대 없이 직접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2차전을 일으키게 한 배경이 되었다.4. 고려와 거란의 2차 전쟁고려는 사대 관계에서 새 국왕의 즉위는 반드시 통보하여 허락을 받아야 했는데 강조가 목종을 폐위, 시해하고 현종을 옹립하는 정변을 일으켰다. 이것이 거란 침입의 구실이 되었다.흥화진 전투에서 거란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고려에 침입하였으나 흥화진을 방어하던 도순검사 양규, 진사 정성, 부사 이수화가 성을 굳게 지켰다. 거란군은 우세한 전력으로 수차례에 걸쳐 공격했으나 성을 함락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흥화진을 탈환하지 못하고 우회해야 했던 거란군은 배후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총 병력의 절반인 20만 명을 잔류 시켜 원정 병력을 분산시켰다. 이에 반해 고려군은 흥화진을 고수함으로써 초기에 모든 제성들이 방비를 강화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통주전투는 삼수채전투와 통주성전렸다.
    인문/어학| 2024.05.30| 10페이지| 2,500원| 조회(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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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거란전쟁
    고려 거란 전쟁I NDEX 01 10 세기 동북아시아 정세 02 거란의 1 차 침입 04 거란의 3 차 침입 03 거란의 2 차 침입10 세기 동북아시아 정세10c 동북아시아 정세 거란의 건국 (916) - 거란의 추장 야율아보기가 여러 부족을 통합해 거란을 건국 발해의 멸망 (926) - 국경이 인접한 국가였던 발해와 거란은 마찰이 잦았고 , 태조가 친정한 거란군에 의해 발해가 멸망 후당 공멸 연운 16 주 확보 거란이 후당을 공멸하고 , 후진의 황제를 추대하면서 대가로 연운 16 주를 할양 받음연운 16 주고려와 거란의 관계 922 년 고려와 거란의 본격적 외교 시작 초기 고려와 거란의 외교관계는 우호적 , 일정 주기의 사신교환이 이루어짐 발해 멸망 이후 고려가 거란에 대해서 적대적 태도로 변화 만부교 사건 이후 고려는 거란과는 단교하고 , 중국과는 사대외교만부교 사건 . 고려사 권 2, 태조 25 년 10 월 二 十五年 冬十月 契丹遣使 , 來遣槖駝五十匹 . 王以契丹嘗與渤海連和 ,, 忽生疑貳 , 背盟殄滅 , 此甚無道 , 不足遠結爲隣 . 遂絶交聘流其使三十人于海島 , 繫槖駝萬夫橋下 , 皆餓死 거란이 사신을 보내 낙타 50 필을 선사했다 . 왕은 거란이 과거 발해와 화목하게 지내오다가 갑자기 의심을 일으켜 맹약을 어기고 멸망시켜 버린 것을 볼 때 이는 매우 무도한 나라로서 화친을 맺어 이웃으로 삼을 만한 나라가 못된다고 생각했다 . 그래서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그 사신 30 명을 섬으로 유배 보냈으며 낙타는 만부교 아래에 매어두어 다 굶어 죽게 했다 .거란과 송의 관계 송 건국 이후 거란과 외교적으로 화친관계를 맺음 이후 완충지대인 북한의 멸망으로 송과 거란이 직접적인 대치상황에 놓임거란의 1 차 침입서희 ( 徐熙 ) 자 : 염윤 ( 廉允 ), 시호 장위 ( 章威 ) 출생 , 사망 : 942( 태조 25)~998( 목종 1) 고려 전기의 정치가이며 외교가 서희는 960 년 ( 광종 11) 3 월에 갑과 ( 甲科 ) 로 과거에 급제 광평원외랑 ( 廣評員外郎 )· 내쳐 태보 ( 太保 )· 내사령 ( 內史令 ) 의 최고직에까지 이름고려 거란 1 차 전쟁의 서막봉산군 전투 993 년 10 월 경 , 봉산군에서 거란과 고려의 최초로 충돌 거란군이 봉산성에 당도하여 고려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 ⇒ 선봉군사 윤서안과 고려 군민들은 항복을 거부함 병력과 장비의 열세로 윤서안이 거란군의 포로가 됨 봉산군은 거란군에게 점령당함 중군사 서희를 봉산군에 투입하고 고려와 거란의 1 차 전쟁 이 끝날 때까지 봉산군에서 대치 ⇒ 항복을 요구하는 문서를 고려조정에 보냄고려의 전략 고려 성종은 감찰사헌 , 차예빈소경 이몽전을 거란 진영으로 보내어 강화를 요청 고려 조정에서는 항복론과 할지론이 대두 항복론 : 소손녕의 항복요구를 받아들이는 것 할지론 : 항복 대신에 서경 이북의 땅을 내주자는 것 성종이 할지론을 택해 , 서경의 창고를 개방하고 , 남은 식량을 강에 버리도록 명함 . 서희는 이에 반대하여 할지론을 비판하고 , 위험을 제기하였음 소손녕은 “80 만 군사가 당도했으니 , 만약 강으로 나와 항복하지 않는다면 모조리 섬멸할 것이니 군신 모두가 속히 아군 앞에 와서 항복해야 한다 .” 는 글을 보냈다 . 이몽전이 적의 진영으로 가서 침략 이유를 묻자 소손녕은 “ 너희 나라가 백성을 구휼하지 않으므로 하늘을 대신해 벌을 내리는 것이다 . 만약 강화를 구하려거든 빨리 와서 항복해야만 한다 .” 라고 말했다 . .고려의 전략 고려 성종은 감찰사헌 , 차예빈소경 이몽전을 거란 진영으로 보내어 강화를 요청 고려 조정에서는 항복론과 할지론이 대두 항복론 : 소손녕의 항복요구를 받아들이는 것 할지론 : 항복 대신에 서경 이북의 땅을 내주자는 것 성종이 할지론을 택해 , 서경의 창고를 개방하고 , 남은 식량을 강에 버리도록 명함 . 서희는 이에 반대하여 할지론을 비판하고 , 위험을 제기하였음 “식량이 넉넉하면 성을 지킬 수 있으며 , 전투에도 이길 수 있습니다 . 전쟁의 승부는 군대의 강약에 딸린 것이 아니라 , 적의 약점을 잘 살펴 기동하는 데 있으니 어찌 또한 삼각산 이북 또한 고구려의 옛 땅인데 끝없는 욕심으로 요구하기가 끝이 없으면 다 줄 것입니까 ? 하물며 땅을 떼어서 적을 주는 것은 만세의 치욕입니다 . 원컨대 어가를 도성으로 돌리시고 신 등으로 하여금 한 번 더불어 싸우게 한 연후에 의논하여도 늦지 않습니다 .”안융진 전투 소손녕의 요구에 대한 답변이 지연되자 군사행동을 개시하여 안융진을 공격 청천강을 건너온 거란군을 기습공격 거란군이 패하여 봉산군으로 퇴각 이후 소손녕은 고려 조정에 항복할 것을 재촉함 조정에서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서희를 보냄서희의 외교담판서희의 강화회담 이후 고려는 거란에게 사대할 것 거란은 압록강 이동 지역을 고려에 주어 양 국 사이의 통교를 방해하는 여진을 축출하고 성을 쌓을 것 강화회담에 따라 서희는 압록강 주변 여진족을 축출하고 장흥 , 귀화 , 곽주 , 귀주 , 안의진 , 홍화진 , 선주 , 맹주에 성을 쌓음 성을 쌓은 지역에 강동 6 주를 설치 , 행정구역으로 편입제 1 차전쟁의 성과와 영향 거란 고려와 사대관계 수립을 통해 고려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 압록강 요충인 보주 지역을 장악하여 고려와 여진에 대한 영향력 유지 고려의 서북방 진출의 차단이 가능했음 고려 압록강 이동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 , 강동 6 주 설치 강동 6 주 이외의 지역에도 성을 쌓거나 개축하여 방비 태세를 강화 거란과 완충지대가 없어 직접 국경을 마주함 ⇒ 2 차 전쟁의 배경거란의 2 차 침입거란의 2 차 침입 원인 1010 년 ( 현종 1) 11 월 강조가 목종을 시해한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성종의 직접 침입 과정 흥화진 전투 거란 성종이 40 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고려에 침입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 흥화진을 포위 , 공격 양규와 이수화의 방어로 실패 흥화진전투는 양규 등의 결사항전으로 거란군의 남하병력을 분산 시키고 그들의 후방을 교란하여 고려군의 반격 여건을 마련함2. 통주전투 통주전투는 삼수채전투 ( 三水砦戰鬪 ) 와 통주성전투 ( 通州城戰鬪 ) 로 구분 흥화진에서 군사를 통주로 옮겨주성을 우회하여 곽주성을 공략 곽주성은 거란군에게 점령되어 거란에게 청천강 이남으로 남진할 수 있 는 거점을 마련4. 거란군의 서경 진출 곽주를 점령한 거란군은 청천강을 건너 안북부를 공격 거란군의 선봉은 서경 인근까지 진출하여 중흥사 탑을 불태움 ⇒ 고려 국왕이 거란에 대한 입조를 조건으로 거란군에 강화 제 의 거란군은 숙주를 함락 ⇒ 거란에 잡힌 포로를 서경으로 보내 항복을 요구하였고 서경 부유수 원종석 등은 항복을 결정 , 표문 을 만듦 . 고려의 증원군이 서경성에 도착하여 성문을 열고 진입하여 거 란 사절을 습격하여 살해하고 항복을 약속하는 표문을 불태움5. 서경전투 고려의 강화 제의를 항복으로 여긴 거란 성종은 고려 측의 강화 제의를 수락 지체문이 거란군을 격파하였으나 , 역습을 당해 대패 6. 거란군의 개경 입성 거란군이 서경성을 우회하여 빠르게 개경으로 진출 ⇒ 피난 거란군은 개경에 입성하여 약탈과 방화를 저지름 고려는 거란 진영에 거란군이 철수하면 고려 국왕이 친조하겠다는 강화조건을 제시 강화조건을 받아들여 하공신 일행을 인질로 잡고 회군* 거란이 회군을 서두른 이유 거란 성종으로서 명분상의 목적을 달성 개경 진주 당시 거란군의 전투력이 한계에 도달 거란군의 전쟁 종결 시기가 도래하고 있었음 7. 고려군의 반격 거란군의 퇴로가 차단되어 지형적으로 험한 북계 동로로 회군 김숙흥이 보량과 함께 거란군을 공격하여 1 만 명을 격멸 양규가 거란군을 공격하여 2 천명을 격멸하고 포로 3 천명 구출거란의 결과 고려의 수도를 점령하고 고려 국왕의 친조 약속을 얻어냄 ⇒ 고려 국왕의 친조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거란이 얻는 실익은 없었음 고려의 결과 압록강 이남 지역 , 강동 6 주에 대한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함 거란 황제가 친정한 대군을 물리침으로써 거란과의 전쟁에 대한 자신감이 생김거란의 3 차 침입3 차 전쟁의 특징 원인 거란은 고려의 친조거부로 여러 차례 전투들을 통해 강동 6 주의 반환을 위해 다시 고려 원정을 시도 과정 삼교천 전투 압록강을 전투와 개경 방어 거란군은 고려군의 주력이 배치된 북계 서로를 피해 개경으로 진군 고려는 영주를 중심으로 북계 서로를 대비하던 군사를 움직여 남진에 대비 하순경 , 강감찬은 강민첨을 보내 거란군을 추격하여 큰 전과를 올림 병마판관 김종현에게 1 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가도록 하고 , 동북계의 군대 일부도 개경으로 이동시켜 개경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를 취함3. 금교역 전투와 거란군 퇴각 개경으로 압박하려는 거란군 VS 저지하려는 고려 고려군은 거란군의 남진에 대비하여 청야 전술을 실시하여 장기전에 대비 거란은 고려의 신속한 대비 , 장거리 기동에 따른 후방 위협 , 전투력 소모 , 보급상의 문제 , 겨울 추위 때문에 개경 공략이 어려워짐 소배압은 고려 진영에 사신을 보내 거란군이 회군할 것이라는 허위 사실을 알림 이를 파악한 고려군은 금교역 일대를 지날 때 습격하여 모두 격멸 강감찬이 연주와 위주 지역에서 퇴각하는 거란군에 대한 반격 ⇒ 승리4. 귀주 전투 귀주 일대는 사면이 산으로 둘러 쌓인 분지 형태 , 도로망이 좁고 험한 계곡이 형성 귀주를 지나가는 거란군을 강감찬이 맞아 싸웠으나 승패가 나지 않음 이후 패배하여 도망가는 거란군을 고려군이 추격 ⇒ 석천 ( 石川 ) 을 건너 반령에 이름 , 살아 돌아간 거란군이 불과 수천명3 차 전쟁의 평가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강동 6 주를 둘러싼 영토 분쟁의 종지부 거란은 적극적인 대외 팽창이 좌절되면서 쇠퇴의 길을 걷게 됨 고려는 1 차 전쟁에서 확보한 압록강 연안까지 영토를 확장전쟁 종결과 동북아시아 정세 변화 고려와 거란 사이에 사신이 왕래하면서 국교가 회복 고려는 요나라의 제안에 따라 요의 연호를 사용 고려는 거란에게 친조와 강동 6 주를 반환하지 않아도 되었음 거란은 고려 침략에 실패하여 요동에서의 지배권이 흔들리기 시작 고려 , 송 , 거란 3 국의 대등한 세력 균형 형성 고려는 거란과 여진족을 막기 위해 천리장성과 개경에 나성을 축조참고자료 인터넷 한국민족대백과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네이버 지식캐스
    인문/어학| 2013.12.30| 34페이지| 2,500원| 조회(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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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거티브 문화재 - 한국은행 본점
    Negative 문화재 - 한국은행 본점1. 머리말본문으로 들어가기 앞서 네거티브 문화재란 그 말대로 부정적인 문화재라는 뜻이다. 네거티브 문화재는 우리의 아픈 역사를 되새기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되며, 우리나라의 치욕적인 역사의 흔적이다. 이 네거티브 문화재를 놓고 철거를 하여 없애야 하는지, 보존해야 하는지로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네거티브 문화재의 대표적인 예는 철거된 조선총독부와 삼전도비가 대표적이다. 이 문화재들은 철거가 되거나 일부 훼손된 것들이다.개인적으로 네거티브 문화재를 부정적으로 보고 철거하고 없애는 것은 우리가 겪었던 역사를 부정하는 꼴인 것 같다. 사실, 그 문화재를 철거해도 관련된 역사는 기록 또는 여러 사료로 후대에 전해지고 있는데 말이다. 우리가 일제강점기를 겪은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시대의 역사를 배우고 깨우치며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네거티브 문화재를 훼손하지 않고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는 철거되어 이미 없어져버린 문화재를 조사하는 것보다 현재 보존되어 전해지는 문화재를 조사하는 것이 더 의미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철거되지 않고 보존되어 있는 문화재는 의외로 익숙한 것이 많다. 서대문형무소, 서울역, 한국은행 본점 등이 있다. 이 세 가지 문화재 전부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유적이자 문화재이다. 현재는 그 역할을 하지 않고 있지만 우리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박물관이나 역사관으로 탈바꿈하였다. 교수님께서 네거티브 문화재를 설명해주실 때, 생각나는 문화재는 예시로 보여주신 총독부나 삼전도비, 서울역 정도만 생각났는데 조사를 해보니 의외로 많은 네거티브 문화재가 있었고, 내가 잘 모르는 문화재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현재 우리나라의 경제의 심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한국은행을 조사하였다.2. 한국은행 본점의 역사19세기말 서양문물과 함께 외국돈이 유입되면서 화폐질서가 문란해지자 조선은 1883년 전환국을 설치하고 새로운 화폐를 발행하는 등 화폐제도」를 발표하고 중앙은행 설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조례에 의거하여 대한중앙은행이라는 주식회사 형태의 중앙은행 설립을 위한 조례와 정관을 정하고 심상훈을 총재, 이용익을 부총재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중앙은행 설립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우리나라의 경제 주권을 찬탈한 일본이 강제병합에 임박하여 다시 중앙은행 설립을 추진하였다. 이런 배경 아래에서 「한국은행조례」를 통해 구한국은행이 설립되었다. 임원전원이 일본인이었던 구한국은행은 당시까지 일본 제일은행이 맡아오던 발권 및 국고업무를 승계하였다.구한국은행은 일본이 한일 강제병합 후 1911년 3월 「조선은행법」을 제정 공포함에 따라 1911년 8월 15일 조선은행으로 변경되었다. 건물은 합병전인 1907년 11월 제일은행 경성지점으로 착공되어 1912년 1월 조선은행 본점으로 준공되었다. 그러나 구한국은행의 임직원을 그대로 유지한 채 설립일자가 구한국은행 설립일자로 소급되고 구한국은행의 행위는 조선은행의 행위로 모조되는 등 조선은행의 실체적 성격은 구한국은행과 동일하였다. 이는 한일 강제병합으로 ‘한국’이라는 용어 사용이 금지되고, 명목상의 감독권한이 대한제국 정부에서 조선총독부로 넘어간 것을 반영한 것이었다. 조선은행은 구한국은행과 마찬가지로 발권, 국고 등 중앙은행의 일부 기능과 예금 대출 등 일반은행 업무를 겸영하면서 일본의 대륙침략에 필요한 자금공급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태평양전쟁 중에는 조선은행이 일본국채 인수 및 군수산업 대출을 위해 은행권을 남발함으로써 광복 이후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유발되었다.광복 직후 우리나라는 경제 질서가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었고, 화재로 내부 일부가 소실되었다. 일본의 철수로 일본인에 의해 운영되던 주요 산업시설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은 데다 남북 분단으로 남북 간의 경제적 상호보완체제가 붕괴됨으로써 생산 활동이 원활하지 못하였다. 이에 비해 수요측면에서는 북한 피난민 및 해외 귀환동포의 유입, 전시 통제경제체제의 해체 등으 갖추지 못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재정면에서의 균형과 함께 통화신용 공급의 억제를 통한 인플레이션 수습이 시급해짐에 따라 통화신용에 대해 강력한 통제력을 가진 중앙은행을 조속히 설립해야할 필요성이 높아졌다.광복 이후의 경제적 혼란 속에서 조선은행은 군정법령 제 21호에 의거하여 발권 국고 대출 등 기존 업무를 그대로 인정을 받았으나 조직과 인력면에서는 변화를 겪었다. 즉, 1945년 9월 8일 서울에 진주한 미군이 조선은행의 일본인 총재 해임과 함께 일본 내의 조선은행 지점을 일괄 폐쇄한 데 이어 11월에는 일본인 간부를 전원 해임하고 한국인으로 간부진을 선임하였다. 기능면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광복 당시에는 조선은행권 이외에 일본은행권 대만은행권 및 일본군 군표 등이 화폐로 통용되고 있었다. 이 중에서 일본군 군표는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7일부로 유통이 금지되었으나 일본은행권과 대만은행권은 1946년 2월 21일에서야 유통이 정지됨으로써 조선은행은 광복 이후 6개월여 만에 38도선 이남지역에서 유일한 법화의 발행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아울러 조선의 외국무역 진흥과 외국환 금융제도 수립을 담당할 목적으로 1947년 6월 16일 미군정이 설립한 조선환금은행이 대한민국 정부로 이전된 이후 1949년 2월 대통령이 조선은행의 총재 및 임원에게 동 은행의 총재 및 임원을 겸임토록 함에 따라 조선은행이 사실상 유일한 외국환업무 취급기관이 되었다.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은행건물인 한국은행본점은 한일 합방을 전후해서 일제의 입김이 커짐에 따라 점차 서구의 각종 건축양식이 가미된 모자이크식의 경향을 띠게 된다. 당시 일본건축가들은 연륜이 짧았기 때문에 자기모델보다 서구의 양식들을 섞어 절충식으로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은행본점은 이런 절충주의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건물이다. 그 예로 원통형 탑을 세우고, 탑 위에는 돔을 얹어놓았으며 1층에는 아치형 창틀을 두는 서양식 건축형식과 철골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현대 고층빌딩처럼 세워지기도 하였다. 사적 배경으로 철거하자는 주장이 빗발쳤다. 그러나 이 건물은 1981년 한국금융의 산실이란 점을 인정받아 사적 280호로 지정되었다. 그 이유는 한국건축사에서뿐만 아니라 경제사의 중심지라는 점을 감안하여 길이 보존되어야 한다는 것이 중심적인 의견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1987년 12월 이 건물의 후면에 한국은행 신관이 준공되면서, 1989년부터 한국은행 본점은 원형 복원되어 현재 화폐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3. 나의 의견 및 생각한국은행 본점을 직접 가봤다면 더욱 자세하게 내 의견을 밝힐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직접 가볼 수 없었기 때문에 인터넷 블로그의 글과 사진자료를 통해 간접방문을 할 수 있었다. 사진으로 보았을 때도 건물이 서양식 건물이라는 느낌이 강했고, 그 규모도 커서 당시 일제의 영향력을 알 수 있을 정도이다. 조사에 의하면 한국은행 본점은 일제강점기 당시 종로에 위치하고 있었고, 그 주변은 많은 일본인들이 살고 있었으며, 시청과 총독부를 연결하는 곳에 있었다고 한다. 또한 금융가로 유명하였고, 주변에는 대형백화점이 들어서 있을 정도로 번화가였다고 한다. 한국은행 본점의 건물을 여러 각도로 찍은 사진과 과거와 현재의 사진을 비교하여 살펴보았는데 현재에도 도로 앞에 자리 잡고 있는데 전혀 이질감이 없고 오히려 멋스러움이 느껴졌다.한국은행 본점에 대한 내 생각에 대해서 총독부를 비교하여 밝히면 좋을 것 같다. 조선총독부 같은 경우, 건물자체가 경복궁 안으로 들어와 있어 부정적 평가를 받았으나 문화적 가치가 컸다. 결국은 철거가 되어 지금은 독립기념관에 조선총독부 건물의 첨탑과 같은 일부분만 남아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조선총독부의 건물양식은 당대에는 세계적인 걸작 중 하나로 꼽힐 정도였고, 오랫동안 과거 한국의 중앙청 건물로 사용된 역사적 건물이었다. 여기서 한국은행 본점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한국은행 본점을 포함한 (구) 서울시청, 서울역 등은 경복궁과 같은 중요 문화재 근처에 지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만약 이 문화재들이 우리을 것이다. 총독부는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국민을 괴롭힌 원수 같은 존재였다. 을사조약을 체결하면서부터 무단통치, 문화통치, 민족말살정책으로 우리나라 국민의 재산을 빼앗고 심지어 일본의 사람으로 바꾸기 위해 교육과 세뇌를 서슴없이 하였다. 그런 역할을 주도적으로 하였던 총독부를 철거하자는 데에는 반대하는 사람은 극소수였을 것이다. 그에 반해 한국은행 본점은 비록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에 의해 운영되어 일본의 전쟁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으나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화폐의 발권, 국고를 관리하고 중앙은행으로써의 역할을 하고, 예금 대출 등 일반은행 업무 또한 겸영하였다. 광복 이후에도 임원진만 한국인으로 바꾸고 계속 우리나라의 중앙은행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이런 이유로 철거 논란이 있었으나 그만큼 우리나라에 경제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컸기 때문에 복구까지 하면서 철거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하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 그만큼 한국은행 본점은 우리나라의 경제를 쥐고 있는 심장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현재에는 새로운 건물을 지어 은행 업무를 하지 않고 있는 건물이지만 화폐박물관으로 변화시켜 대중들에게 개방하였다.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면 학교과제를 하기위하여 방문한 사람도 많지만 자녀들에게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를 보여주고 배우게 해주기 위해 방문한 사람도 꽤 있었다. 한국은행만이 이런 변화를 꽤한 것은 아니다 처음 앞에서도 예시로 제시한 것들 중에 서울역 또한 건물을 철거하지 않고, 여러 전시회를 개최하여 많은 사람들을 방문하게 하고 있다. 서대문형무소는 한국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방문해 보았을 것이다. 서대문형무소는 총독부와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의 독립투사들을 고문하고 압박하여 결국 죽음에 이를 때까지 괴롭히던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관으로 변화시켜 많은 사람들에게 아픈 역사를 알려주고 다른 곳보다도 독립투사들이 보여준 애국심을 일깨워주는 곳이다. 서대문형무소, 서울역과 함께 한국은행 본점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보다.
    인문/어학| 2013.12.30| 4페이지| 3,000원| 조회(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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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강점기 경제수탈정책
    1910~1920 경제수탈정책INDEX 1910~1920 년대의 정치 토지조사사업 회사령 산미증식계획1910~1920 년대의 정치 11910 년 한일 합병 일본의 을사조약 (1905) 으로 통감정치를 실시 1910 년 6 월 일본은 ‘ 병합 후의 대한 통치방침 ’ 을 결정 7 월 12 일 조선통감으로 데라우치를 임명하여 본격적 합방공작 진행 8 월 16 일 총리대신 이완용과 농공상대신 조중응을 합병조약의 구체안 밀의 22 일 형식적인 어전회의를 거치게 한 후 조인을 완료 ⇒ 경술국치 합방에 공이 큰 이완용 등 친일매국노는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음1910 년 한일 합병 1910 년 8 월 22 일 한일합병조약 조인서 원본1910 년 - 헌병경찰제 합병 이후 헌병경찰은 행정기구에서 독립 , 총독 직속기관으로 자리잡음 헌병사령관이 경무총감 , 각 도의 헌병대장이 경찰부장 겸임 주로 도시에 배치한 헌병은 농촌 지방까지 헌병분견소 , 파출소를 설치 ⇒ 순사 주재소 , 순사파출소까지 두어 헌병 , 순사를 배치하지 않은 곳이 없었음 헌병경찰의 업무 : 의병 토벌 , 검사 사무 대리 , 범죄 즉결 처분 , 민사소송 조정 , 산림 감시 , 징세사무 협조 , 검열 사업 , 보건 업무 , 일본어 보급 , 노동자 단속 범죄즉결례 (1910.12), 경찰범 처벌규칙 (1912.3), 조선형사령 (1912.3) 헌병경찰은 조선인에게 벌금 , 태형 , 구류를 맘대로 할 수 있었음1910 년 – 교육정책 반일 성향의 『 황성신문 』, 『 대한매일신보 』, 『 서북학회월보 』 등의 신문 · 잡지 · 서적 등을 폐간하거나 발매 금지 · 압수 처분 1911 년 조선교육령 공포 : “ 조선인을 천황에게 충량한 신민으로 양성하고 , 일본 국민다운 품성을 함양하는 것 ” 일본인 교사를 채용하여 일본어와 일본역사 · 지리 등을 가르침 식민교육정책에 따라 사립학교를 대대적으로 정비 ‘ 국가치안 유지 ’ 라는 이름으로 사립학교를 설립 , 교원채용 · 교과과정 · 교과서 · 수업내용 등을 통제 · 감독 19 정책 교육기회 확대 선전 학교 설립 일면일학교 →초등교육 , 기술교육에 집중 ⇒ 우민화 정책 ( 식민지 노예육성 ) 3.1 운동 이후 무단통치 → 문화정치1920 년 - 문화정치 사이토 총독이 구상한 친일파 육성대책 1. 일본에게 절대 충성을 다하는 자로써 관리를 강화한다 . 2. 신명을 바칠 친일적 인물을 물색하고 이들을 귀족 · 양반 · 유생 · 부호 · 실업가 · 교육가 · 종교가들에게 침투시켜 친일단체를 만든다 . 3. 각종 종교단체에 친일파로 하여금 최고 지도자가 되게 하고 일본인을 고문으로 앉혀 어용화한다 . 4. 친일적 민간인에게 편의와 완조를 제공하고 수재교육의 이름하에 친일 지식인을 대량 양성한다 . 5. 양반유생으로 직업이 없는 자에게 생활방도를 마련해주고 이들을 선전과 민정정찰에 이용한다 . 6. 조선인 부호에게는 노동쟁의 · 소작쟁의를 통해 노동자 · 농민과의 대립을 인식시키고 , 일본자본을 도입하여 그것과의 연계를 맺어 매판화시켜 일본 측에 끌어들인다 . 7. 농민을 통제 · 조종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유지가 이끄는 친일단체를 만들어 국유림의 일부를 불하해주는 한편 입회권 ( 수목채취권 ) 을 주어 회유 · 이용한다 . 친일여론 조성 , 친일단체 조직 ⇒ 독립운동가의 적발과 정보수집 , 독립운동에 대한 파괴활 동 , 대외선전 , 독립운동가의 포섭∙변절∙설득 등에 이용 대지주계급과 예속자본가들의 친일단체 – 대정친목회 , 유민회 유생들의 친일단체 – 대동사문회 , 유도진흥회 농민운동 약화 어용단체 – 조선인 소작회상조회 지주우위정책 – 조선민족 편가르기 지주∙자산가계급 보호 ⇒ 개량주의자 , 친일파 양성 사회주의운동∙소작농민∙노동자에 대한 대규모 탄압 강화토지조사사업 2토지조사사업 - 배경 근대적 토지소유 제도를 확립하겠다는 명분으로 토지 소유권을 재조사 1910 년 1 월 토지조사 계획서 작성 , 3 월 토지조사국 설립 1912 년 8 월 토지조사법 공포 1918 년까지 토지조사사업 실시토지조사사업 - 목적 일본자본의 토지 점유에 적합본령에 의한다 .” 제 4 조 “토지의 소유자는 조선 총독이 정하는 기간 내에 주소 ․ 성명 또는 명칭 , 소유지의 소재 ․ 지목 ․ 자번호 ․ 사표 ․ 등급 ․ 지적 ․ 결수를 임시토지국장에게 신고해야 한다 . 단 국유지의 경우는 보관 관청이 임시토지조사국장에게 통보해야 한다 .” 제 6 조 “ 토지의 조사 및 측량을 할 때 , 조사 및 측량 지역 내의 2 인 이상의 지주로 총대를 선정하고 조사 및 측량에 관한 사무에 종사할 수 있다 .”토지조사사업 - 내용 ●‘ 신고주의’에 입각하여 토지소유자가 작성한 토지신고서를 임시토지조사국에 제출 ●배포 및 수집은 지주총대가 맡아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신고자를 토지소유자로 인정 ●지정한 기간 30~90 일 이내 신고하지 않은 토지 모두 국유화 ●토지신고서를 통한 신고와 사정을 거친 후 토지대장을 작성 ⇒토지에 관한 제반 권리를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토지등기제도를 확립토지조사사업 - 결과 ①한국의 전통적인 토지 권리 체제가 부정 → 경작권 , 개간권 소멸 ⇒농민의 토지에 대한 권리 박탈 , 영세소작인 · 화전민 · 자유노동자로 전락 ②진전 등의 토지권리가 대지주나 일본인 지주들에게 유리하게 부여 →대지주나 일본인 지주들에게 진전의 토지소유권을 인정 ③많은 국유지가 만들어짐 →농민 소유지 중 일부 조선총독부가 침탈하여 국유지로 편입 ⇒ 동양척식주식회사 , 일본인 회사 , 지주에게 헐값에 팔림토지조사사업 - 결과 ①한국의 전통적인 토지 권리 체제가 부정 → 경작권 , 개간권 소멸 ⇒농민의 토지에 대한 권리 박탈 , 영세소작인 · 화전민 · 자유노동자로 전락 ②진전 등의 토지권리가 대지주나 일본인 지주들에게 유리하게 부여 →대지주나 일본인 지주들에게 진전의 토지소유권을 인정 ③많은 국유지가 만들어짐 →농민 소유지 중 일부 조선총독부가 침탈하여 국유지로 편입 ⇒ 동양척식주식회사 , 일본인 회사 , 지주에게 헐값에 팔림토지조사사업 - 결과 ④일본인 토지 소유 증가 →일본인 논밭 직접 구입 , 미개간지 혹은 분쟁지 등 헐값신고를 하여 그 허가를 받은 사람 또한 같다 .회사령 제 17 조 . 1) 구 한국정부의 면허를 받아 본령 시행시에 사업을 경영하는 회사는 본령에 의하여 설립된 것으로 간주한다 . 2) 전항의 회사가 상법에서 정하는 회사 종류의 어느 것에도 적합하지 아니한 것은 가장 유사한 회사에 관한 규정을 준용한다 . 제 18 조 . 본령 시행전 상법에 의하여 조선에서 설립된 회사는 본령에 의하여 설립된 것으로 간주한다 . 제 19 조 . 1) 조선 외에서 설립한 회사의 본점 또는 지점이 본령 시행시에 조선에 존재하는 것은 본령에 의하여 설립한 것으로 간주한다 . 2) 외국에서 설립한 회사가 본령 시행시에 조선에 본점 또는 지점이 있는 것은 당시에 한하여 종전의 예에 의한다 .회사령 조선에 들어온 일본자본은 국가자본의 형태로 투자하거나 중소자본의 형태로 침투 일본자본은 자국의 상품을 수입하여 중간이윤을 노림 항만 · 철도 · 통신 등 사회간접자본과 금융 · 상업 · 교통 등의 유통 부문에 투자 제조업 부문은 주로 정미업 · 농산물 가공업 · 양조업 · 방직업 등 원료 약탈과 일본상품을 판매하는 데 필요한 약간의 가공업 에 한정 1919 년 민족별 자본 구성은 조선인 기업이 11.6%, 일본인 기업이 78.4%, 조일 합동기업이 8.9% ⇒ 조선인 자본이 엄청난 열세회사령 제 1 기 (1911.1~1914.12) 한인기업에 대한 철저한 설립 억제 경영에 대한 규제 , 해산명령의 남발 ⇒ 한인기업을 공권력으로 암 살한 시기 , 회사령의 입법취 지가 발휘된 시기 제 2 기 (1915.1~1918 상반기 ) 회사령 시행규칙 중 일부를 변경 ⇒ 회사령 운용상의 절차를 간소화 일본의 조정과 민간의 빗발치는 비판에 대처하기 위한 약간의 완화책회사령 제 3 기 (1918 하반기 ~1920.3) 일본 상법과 회사령과의 관련을 명백화 1918 년에 들어 일본자본의 조선 투입이 더욱 가속화 한인에 대한 회사설립허가 상대적 완화 한인거대지주층의 기업부문에 대거 진출을 개시 1920 년 4 월 소동 ’ 발생 일본의 중산층 몰락 , 농산물 가격 폭등 , 도시 실업자 급증 , 파업과 쟁의 빈번 , 사회불안 , 정부에 대한 불신 1910 년대에 이미 토지조사사업을 끝내 식량공급을 할 수 있도록 제반조건을 마련 일본에 부족한 쌀을 조선에서 증산하여 해결하기 위해 산미증식계획을 추진 일본은 해마다 6, 70 만 명씩 급증하는 인구로 인해 매년 평균 200 만 석의 쌀이 부족한 형편이다 . 이미 1918 년에 쌀 부족으로 인해 두려울 만한 소란을 경험한 예에 비추어 보아도 , 식량 문제는 가장 중요한 국가의 문제이다 . 다행히 조선의 수리 시설을 개선하면 1 천만 석의 쌀을 증산할 수 있고 , 미간지를 개척하면 1 천만 석을 추가로 증산할 수 있다 . 또한 만주 지역을 개발하면 2 천 만 석의 쌀을 얻을 수 있다 . 따라서 조선과 만주를 일본의 식량 공급지로 만드는 일을 신속히 추진하여야 한다 . 1918 년 , 1919 년에 쌀 수입 대금으로 거액을 지출하였는데 , 이 자금을 조선의 천수답에 관개 시설을 하는 데 돌린다면 해마다 5 백만 석의 쌀을 증산할 수 있다 . 이 경우 사업 자금은 대부분 인부 임금으로 지출되어 지방 경제가 활성화되고 , 최종적으로 상품 구입 자금이 되어 시장으로 모이게 되므로 자금은 다시 일본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 박경식 , [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지배 ]산미증식계획 - 배경 산미증식계획을 시행하기 전 1922 년 총독부 ‘조선산미증식계획요령’ 첫째 , 조선의 수요 증가에 대비한다 . 둘째 , 농가경제 성장으로 반도경제 향상을 꾀한다 . 셋째 , 제국의 식량문제 해결에 이바지하는 데 있다 .산미증식계획 - 과정 일본 품종의 벼를 개량하여 빠르게 보급 수리시설을 전국으로 확충 다수확 품종에 필요한 비료와 수리 시설 건설 자금은 조선식산은행과 금융조합에서 공급 수리조합 설치 , 토지개량사업 추진 비싼 수리조합비의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반대운동을 일으키게 됨 증산된 쌀의 대부분은 주로 목포 ,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가져감산미증식계ow}
    인문/어학| 2013.12.30| 39페이지| 3,000원| 조회(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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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이북명의 질소비료공장
    이북명의 질소비료공장
    사료로 본 한국역사의 과제로 이 책을 접한 것이지만 그 많은 목록 중에 질소비료공장이 눈에 들어왔다. 현재 경영학과를 복수전공하고 있기 때문이라서 인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의 식민지 노동현실과 노동운동에 대한 주제에 이끌렸고, [질소비료공장]이라는 제목을 보고는 ‘그 시대의 공장모습은 어땠을까?’라는 의문점이 들었다. 그렇기에 질소비료공장이라는 책을 사서 읽게 되었는데 운이 좋게도 [공장신문]도 한 책으로 묶여 있어서 같이 읽을 수 있었다. [공장신문]은 그저 노동환경에 불만을 느끼고 공장신문을 만들자! 해서 만들어 냈다는 내용이었다. [질소비료공장]은 노동운동까지 가는 과정은 물론이고 노동환경에 대해서도 세세하게 내용에 담겨있었다. 그리고 [공장신문]에 비해 [질소비료공장]의 노동운동은 굉장히 적극적이었다고 할 수 있고, 체계적인 면이 있었다.[질소비료공장]은 이북명이 쓴 것이며, 그는 1908년 함남 함흥에서 태어났다. [질소비료공장]은 이북명이 함흥고보를 졸업한 후 흥남비료공장에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또한 이 소설은 1932년 조선일보에 연재되다나 일제 당국의 검열 때문에 연재가 중단되었다. 1935년, 이 작품은 일본 잡지에 초진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어 실렸으나 애초에 원고를 잃어버린 이북명은 북한에서 초진을 대본으로 다시 우리말로 고쳐 써서 발표했다.[질소비료공장]은 문길이라는 인물의 관점으로 소설이 쓰여졌다. 줄거리를 적어보자면 질소비료공장은 유안(황산암모늄)을 만들어 내는 공장이었는데 무시무시한 음향과 암모니아 가스의 독한 구린내로 꽉 차있었으며, 기계소리는 굉장히 크고 이미 운전견습공의 왼쪽 팔을 잘라먹었다는 기계가 있는 공장이었다. 노동자들은 냄새를 막기 위해서 두툼하고 큼직한 마스크를 걸어보지만 악취는 겹겹으로 무어서 만든 마스크를 꿰뚫고 속속들이 폐부에까지 스며들만큼 냄새가 심했다. 되레 호흡이 더 곤란함을 느껴서 노동자들은 마스크를 벗어 팽개치고 만다. 노동자들은 만일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가 이 공장에서 노동하는 인간의 생이 부족한 돈을 받으며 공장에 다니고 있다. 또한 그는 공장의 고약한 냄새와 몸을 혹사시켜 폐에 병을 가지고 있으며 항상 기침을 해댄다.문길은 철식, 상호 등과 친한데 철식은 친목회 사건으로 불려갔고 유안친목회는 공장 윗사람들에게 발각되어 무산된 상황이었다. 철식이가 석방되고 상호, 문길이, 용수 외의 다섯명이 모였고, 유안친목회를 다시 만들자는 의견이 나온다. 문길이는 이 의견에 일단 참여하기로 했으나 뚜렷한 동기가 없었다. 또한 이 자리에서 창호의 입에서 멀지 않아 대량 해고가 있을 거라는 정보와, 해고를 위한 신체검사가 봄에 있다는 정보도 얻게 된다. 문길은 자신의 병도 병이지만 아내의 산월이 임박하여 해고를 당하면 어쩌나 걱정한다. 이로써 문길의 불안감은 더더욱 커지며 친목회를 다시 조직하자는 제의에 문길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동기가 된다.이후에 그 정보대로 대량 해고를 위한 춘기 신체검사를 시작하는데 그 의사는 이전에 문길이 몸이 아파서 찾아갔던 의사였다. 진찰을 했을 때는 정상이라고 진단 내렸었다. 하지만 의사는 몸 상태를 진단하기 위한 질문을 던질 때마다 문길은 괜찮다고 아무이상 없다고 우기지만 의사는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다고 진단한다. 결국 멀지 않아 날벼락 같은 해고통지서를 받는다. 문길이가 해고 된 것을 본 주위의 노동자들은 이 같은 공장의 결정에 반발심이 커지게 되고 유안 친목회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임을 예고했다.유안친목회를 이를 계기로 계속해서 회의를 하고, 위원을 뽑고, 삐라를 뿌리는 등의 활동을 펼친다. 하지만 유안친목회의 활동이 꼬리가 잡히면서 철식이의 불찰로 친목회와 관련된 사람들이 잡혀간다. 문길 또한 잡혀가서 열이틀만에 석방이 되었다. 그 전에는 외상을 해서라도 가계가 어떻게든 꾸려졌었는데 문길이가 몸져눕자 외상거래를 해놓은 가게와도 외상이 끊기고 집안사정이 심각한 상황이 되었다. 유안친목회와 공장의 노동자들이 서로 기금을 모아 도와주긴 했지만 몸이 나아지기는 커녕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가족들과 동료들이 있는, 노동자들은 를 목청껏 불렀다. 일본 경관이 증원부대까지 데려와 노동자들을 진압하지만 진압은 커녕 오히려 발버둥치며 계속 노래를 불렀다. 문길의 상여가 땅에 묻히면서 이 소설의 내용이 마무리 된다.단편소설을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이정도면 꽤 단편소설 중에서도 길다고 생각했다. 이 소설이 긴 축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만큼 줄거리도 많고 풍부하다고 볼 수 있겠다. 표현력도 세세해서 그 시대의 노동환경을 알기에는 충분했다. 이는 위에 쓴 것처럼 이 작품의 소설가인 이북명이 질소비료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 출신 소설가’이기 때문인 것 같다.1930년대 조선은 일본이 식민지 파쇼 통치를 실시했을 때였다. 10년대, 20년대보다 더욱 가혹해진 일제의 조선탄압정책은 세계의 경제공황위기에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즉, 물화의 공급이 수요를 훨씬 웃돌게 되자 재고가 늘어나고, 물품생산의 중단이 발생하면서 실업자가 증가하는 등 경제공황의 위기는 일본에게 큰 타격을 준 것이다. 이에 일본은 상품 판매 시장의 확대와 정복야욕을 위한 만주침략전쟁을 계획하고, 자신들의 계획을 위해 지리적으로 유리한 조선을 대륙침략의 발판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은 30년대 이전보다 조선에서의 착취를 보다 강제적으로 집행하고, 인적?물적 자원을 가혹하게 동원하는 한편, 조선 민중의 민족해방운동을 가차없이 탄압하였다. 이 당시 일본은 만주사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리적으로 연결지점이 될 수 있는 조건, 특히 북한에 도로망을 확립하고, 이곳을 통해 군수물자를 운송전달하고 쌀 등의 군량미도 전달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것이 곧, 병참기지화 정책과 북선개척 등 당시 일제가 주장하고 시해한 여러 정책들의 목적이었다. 또한 조선인들을 강제로 징용시키고 북쪽에는 군수 시설을 위한 공업화를 추진한다.이러한 정책은 조선의 농민들과 노동자 계층의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일제가 회유책이랍시고 내놓은 자작농창정으로 식민지 지주제가 강화되면서 소작농민들이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가로막히게 되인들이 했던 방식을 그대로 모방하면서, 식민지 체제하에서 신분을 상승시키고 부를 이룩했다. 중?소 지주들이 몰락함으로써 농민 계급이 대지주와 소작농민으로 양극화되었던 것은 일제하의 계층분화의 주요한 특징이며, 이러한 이농자들의 증가와 함께 일전의 정책적인 군수공업화로 인하여 도시 노동자 계층의 수가 급증하게 되었다. 이렇게 농촌을 떠날 수 밖에 없던 이농자들의 수가 증가하고, 일제의 군수공업화로 인하여 도시 노동자계층의 수가 급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노동자들도 인플레이션하의 물가폭등으로 인해 임금이 폭락하고 장시간 노동과 값싼 임금, 일용노동제 등으로 최소한의 생계마저 유지하기 어려운 비참한 현실을 겪어야만 했다. 이런 일제의 반봉건적?식민지적 착취와 억압은 더욱 거센 반일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일제에 대한 분노와 미움은 비단 농민?노동자들에게만 생성되었던 것이 아니라 친일 반동지주와 예속자본가 같은, 일제와 결탁한 일부 세력을 제외한 조선 민족 모두의 일반적인 감정이었다. 이처럼 1930년대는 일본의 강압적인 탄압에 의해 우리 민족이 기본적인 생존권을 위협받았던 시대이며, 이와 아울러 민족의 반일감정 또한 거세게 일어났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30년대는 중?일전쟁이 일어났고, 조선어학과를 폐지하고, 창씨개명이 있었기에 외적 상황으로 인해 조선은 쇠퇴의 기미가 보였다. 이 시대의 독립운동이라고 해봤자 국내에서는 최소한의 범위에서 민족어를 지키는 일을 했다.일본은 우리의 생존권뿐만 아니라 사상의 문제까지 개입하여 강압적인 탄압정책을 폈으며, 이러한 1930년대의 시대적 상황은 우리의 문학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당시 모든 사람들이 조국의 독립과 근대화를 기원하곤 했으며 모더니즘 경향이 나타나기도 했다. 1930년대 시인들은 생명에 대해 연구하기도 하고 언어의 리듬에 연구하기도 했다. 또한 이 당시에 일본의 탄압이 더욱 심했는데, 한글로 글을 못 쓰게 하고, 작품을 검열했다. 그렇기에 이 시대의 많은 문인들이 절필했다. 여기서 모더니즘이란 사상,중단이 된 적절한 예가 된다.1920년대에 합법적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임금인상, 노동 조건 개선요구등 생존권 투쟁등을 벌였으나, 1930년대에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맞서 사회주의자와 연계하여 일제와 자본주의 타도를 위한 혁명적 노동운동이 전개되었다. 1930년대에는 사회주의와 관련지어 정치적 투쟁(항일운동)으로까지 확대된다. 하지만 위에 쓴 것을 보면 알 듯이 1930년대 들어서면 일제가 노동운동을 압박하는 바람에 운동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1945년에는 조선 내의 총인구 약 2500만명의 약 12%에 해당하는 백성이 노동자로 들어갔다. 그러나 한국인 노동자들은 일본 군국주의 침략 전쟁의 ‘생산도구’로 착취되고 탄압받았다. 이 당시 노동환경은 일본인 노동자에 비해서 극심한 수탈과 노동시간의 확대 등으로 생존을 하기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나 쥐꼬리만한 임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돈을 주었다.노동문제는 과거나 현재나 다름없는 사회문제인 것 같다. 1900년대 조선은 일제의 침략에 의해서 노동문제가 대두되었다고 한다면 현재 한국의 기업 내에서 자체적으로 흘러가는 상황이 노동문제에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비정규직 문제나 아직도 노동환경에 대해서 문제가 많은 편이다.이 책을 읽고 1930년대에 대해서 조사를 해봤는데 1910년대와 1920년대에는 사건이나 사고도 많았고 일제의 침략과 탄압에 대해 자세하게 나온 자료가 수두룩한데 1930년대는 시대적 상황에 대해 자세하게 나와 있는 자료가 별로 없었다. 그렇기에 자료에 간단히 나와 있는 일제가 군수사업을 실행했다는 것과 일제의 탄압이 제일 심했던 시기라고 하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이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나 노동현실에 대해서 알기 힘들었다. 아마 자료가 많지 않은 이유는 일제의 탄압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에 누구도 어떤 자료를 남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다. 그래서 책을 통해서 노동현실과 그 당시 시대상황을 파악해서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공장신문]이나 [질소비료공장]의 노동현실
    독후감/창작| 2013.11.24| 4페이지| 2,000원| 조회(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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