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끄기의 기술 내 인생의 가장 큰 도전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기‘신경끄기의 기술’이 책의 제목을 처음 봤을 때는 이 책이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자잘한 이벤트들에 대하여 간단하게 신경을 덜 쓰이게 해주는, 쉽고 간단한 호흡법 같은 의식 전환 방법이나 심리학적 트릭을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핑크팬더가 그려져 있는 이 책의 가벼운 표지와는 달리 책은 삶의 본질, 삶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삶의 올바른 의미와 이를 위해 감수해야 하는 것들까지 폭넓은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이 책은 ‘신경을 끈다’의 개념 자체를 재정의한다. 우리가 말하는 신경끄기란 나에 대한 모든 도전, 개인적 모욕, 갖가지 의견 충돌에 관하여 관심을 두지 않고, 문제를 회피하는 것에 가까운 행위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 책이 말하는 ‘신경 끄기’란, 나의 인생에 진짜 중요한 의미를 찾고, 그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오는 ‘삶에서 가장 무섭고 어려운 도전을 내려다보며 아무렇지 않게 행동에 나서는 것’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즉 마크 맨슨이 말하는 신경 끄기란‘아무것에도 신경을 쓰지 않음’이 아니라 ‘목표에 따르는 역경에 신경을 쓰지 않음’을 말한다.이러한 ‘신경 끄기’의 개념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첫 번째로 삶은 역 경과 고난, 즉 신경 쓰이는 것으로 가득차 있다. 심지어 인간은 고난이 없다면 문제를 스스로 만들어서 그 문제에 신경을 쓰고는 한다. 즉 인간의 삶에서 문제는 계속되며 바뀌거나 나아질 뿐 문제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는다.이렇게 인간의 삶은 끊임없이 문제가 지속되며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나는 항상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responsibility)을 지며 살아가야 한다. 이러한 문제는 내가 선택할 수 없는, 타고난 문제일 수도 있고, 내가 선택한 결과에 따라 발생한 문제일 수도 있다. 다만 어떠한 경우든 나는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역시 오롯이 나의 몫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끊임없이 발생하는 문제와, 그 문제에 대해 선택을 하는 것은 ‘나’이며 그 책임은 모두 나의 몫이라는 것에서 이 책은 시작된다.인생에서 문제는 끊임없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행복은 어디에 있는 걸까? 모든 문제가 해결되면 행복해지는 걸까? 인생에서 문제는 끊임없이 발생한다고 했으니 모든 문제의 해결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행복은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즉 행복은 어떤 장소나 생각, 직업 속에 숨어있다가 나를 맞이하는 것이 아닌, 끊임없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오는 것들이며 이는 인생이라는 긴 시간 동안 만들어가는 제조 과정에 놓여 있는 미완성품과 같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이렇게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이 인생이라면, 행복을 위한 핵심은내가 좋아하는 문제, 내가 즐겨 풀 수 있는 문제를 찾는 것이 중요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 질문에 관하여 책은 우리의 생각의 틀을 뒤집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항상 스스로 질문을 한다. 나의 삶의 목적은 뭘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 걸까. 어떤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까. 그 행복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지만 책이 말하는 것처럼 인생이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이라면 우리는 스스로 다른 질문을 해야 한다. 당신은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가? 나는 어떠한 고통을 참을 수 있는가?이 질문에 대해서 대답하기 위해서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다른 말로는 나의 삶의 목적을 찾는 과정이 필요하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알고, 내 마음이 진짜 원하는 - ‘추구할만한 가치’를 설정해야만 나는 그 목적을 위해 무엇인가를 포기하고, 스스로 고통을 참으며 그 목적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내 삶의 진정한 가치를 찾았을 때 비로소 진정한 ‘신경 끄기’인‘목표에 따르는 역경에 신경을 쓰지 않음’을 실천할 수 있다. 이렇게 사람은 ‘더 나은 가치’를 우선하게 되었을 때 ‘더 나은 문제’에 부딪히게 되고, 이러한 문제들을 다뤄야 삶이 더 나아질 수 있게 된다.이 책은 이렇게 현실을 직시하고, 더 나은 가치를 찾고, 그 가치를 위해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태도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나에게 발생한 문제를 단순히 회피해 버리는 ‘부정하기’, 이 문제가 나에게만 발생한 특수한 상황이라는 ‘피해의식’, 발전의 기회를 놓치는 ‘나는 다 안다는 태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무한 긍정’등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부정적인 태도가 된다.반대로 마크 맨슨이 이야기하는 삶의 태도는 다음과 같다. 먼저 우리는 인생이 문제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만 특별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다음으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가치, 그러면서도 진정으로 의미 있는 가치를 찾았다면 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문제를 받아들이고 행동하는것의 중요함에 관해 책은 이야기하고 있다. 즉 의미 있는 가치를 찾고, 그 가치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견딜 수 있는 문제들을 만나고, 그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 전체가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것이다.이 책은 삶의 본질에는 어느 정도 고통이 있으며 이를 고통을 해결해 가는 과정 자체를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전해준다. 특히 우리가 소위 ‘성공한 삶’을 살든, 아니면 ‘어려운 삶’을 살든 그 사람의 가치에 따라 매 순간이 괴로울 수도, 행복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나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나는 이 책이 ‘특별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마라, 가치 있는 것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인생이다.’라는 단순한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진정한 신경 끄기’를 통해 한 걸음 더 발전할 수 있고, 이러한 태도 끝에는 우리의 빛나는 순간이 있을 수도 있다. 또는 이러한 노력이 역설적으로 우리를 ‘특별한 사람’이 되도록 도와줄수도 있겠다.이책을 읽으며 오늘 나를 괴롭히는 사소한 생각들이 과연 나를 위한 생각인지, 나를 둘러싸고 있는 남을 위한 생각인지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 이 책을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 고민하는 수많은 사람, 모든 사람의 기분을 맞추고 싶은 착한 사람들이 꼭 읽어보시길 권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불안한 사람들 - 너무 바쁘고, 너무 피곤하고, 약간은 귀찮은 당신에게이 책은 약간의 불쾌함으로 시작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야기의 시작부는 내 취향이 아니라고 해야 할까? 강도 사건 이후에 이 사건과 연관된 사람들과의 면담 및 조사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이상한 사람들과 끊임없는 말꼬투리 잡기로 시작한다. 둘 다 경찰임에도 불구하고 답답한 아빠와 모진 말을 내뱉는 아들. 부동산의 홍보문구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부동산 업자. 서로 이해하기는커녕 폭발 직전인 동성 커플. 아는 척하는 남편과 수동적으로 따르기만 하는 아내. 세상에서 본인만 똑똑하고 나머지 모두는 바보라고 생각하는 은행 중역까지. 어디서 이런 사람들만 모아놨나 싶은 인질들과의 소모적인 이야기만이 반복된다. 도대체 흥미진진한 인질극과 강도사건에 대해서는 언제 제대로 이야기해줄지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마치 벽을 바라보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답답함이 반복되는 와중에 이 유쾌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참으며 책장을 계속 넘기다 보면 묘한 기시감이 든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마주친 적이 있다! 이렇게 한 공간에서 모두를 한꺼번에 만난 적은 없을지라도 각각의 주인공들은 우리 주위에 드물지 않게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알 수 없는 논리를 내세우는 사람, 답답한 직장 상사, 가부장적인 어른과 수동적인 가족들. 그리고 본인의 명석함만을 믿고 타인의 생각을 무시하는 사람들까지. 이렇게 어디선가 만나본 듯한 불편한 사람들에 대한 기시감과,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고 헛소리만 늘어놓는듯한 답답함이 이 책의 초반부 불편함의 원인이었음을 깨닫게 될 즈음부터 이 소설은 좀 다른 각도의 이야기들을 들려주기 시작한다.우리는 사회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에게 ‘대체 저 사람은 왜 그럴까?’라는 비슷한 궁금증을 가져 본적이 있다. 대체 어떤 연유로 저런 성격과 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지 궁금했지만 직접 물어볼 수는 없어서 그냥 넘어간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주인공 각자의 이야기와 서로의 관계를 보여주며 어느새 흡인력을 가진, 은행강도 사건과 관계 없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소설을 넘길수록 왜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다가갈 수 없는지, 동성 커플은 왜 서로 으르렁거리면서도 같이 집을 보러 왔는지, 그리고 왜 고집쟁이 남편과 수동적인 아내가 같이 집을 보러 다니는지에 대하여 소설은 주인공들의 입을 통하여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빠져들 때 즈음 독자는 주인공들에 대하여 소설의 초반부와 전혀 감정을 가지게 된다. 각 캐릭터에 거부감과 불편함은 연민과 이해로 바뀌게 되고 그 사람의 삶을 이해하고 모든 주인공의 행복을 빌어주는 본인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이 바보 같은 사건을 일으킨 은행강도에게조차도 모든 사건이 잘 해결되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게 되는 결말을 바라는 나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된다.이 소설은 멀리서 보면 은행강도가 벌이는 인질극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한 걸음만 가까이 가서 이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이 책은 ‘서로에 대한 이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으며, 불쾌함으로 시작하여 감동으로 끝나는, 전형적이지만 에너지 있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책을 우리로 하여금 불편함을 넘어 감동에 이르게 하는 것일까? 나는 ‘불안한 사람들’이 주는 감동은 미치도록 빠른 현대사회에서 멸종되어 가고 있는 ‘이해’라는 과정에서 오는 무언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으로 대표되는 ‘빠름’의 시대에 살고 있다. 유튜브의 영상은 영상 재생 5초 안에 결론이 나와야 하며, 인스타그램에 한 게시물에 눈이 머무는 시간은 채 1초가 될지 알 수 없다. 우리는 그 짧은 시간에 영상과 SNS의 주인공에 대한 평가를 마쳤으며, 자극적인 이야기만을 소비한 채 살아가고 있다. 이 빠른 ‘속도’는 ‘이해’라는 사유를 동반하는 과정이라기보다 ‘소비’라고 불리는 피상적인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빠름’의 감성은 인간관계와 생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10줄이 넘는 긴 문장은 읽을 생각도 없다. 누구와 이야기하더라도 ‘그래서 결론이 뭔데’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이러한 우리에게 타인은 ‘읽기 싫은 책’이며 결말이 끝에 있는 대하드라마이다. 그런 우리에게 ‘불안한 사람들’의 쓸데없는 대화와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는 불편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봐도 불안한 사람들의 초반부에 내가 느꼈던 불쾌함은 읽기 싫은 사람들에 대해 불편함과 동시에 빠름에 중독되어 버린 나의 불편함이 함께 있었던 것 같다.
나 자신과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대한 모든 것죽음의 에티켓- 충분히 사랑하는가어떤 책은 책을 덮자마자 바로 첫장을 다시 펼친다. 감동과 여운이 사라지기 전에 다시 한번 읽고 싶은 책이 있는 것이다. 반대로 이 책 ‘죽음의 에티켓’은 감히 책을 다시 읽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니 더 나아가 한 장 한 장 읽어 가기에 너무 괴로워서 중간에 덮고 싶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끝까지 읽게 되는건 나도 모르게 드는 공감과 한줄 한줄 들어가 있는 너무나 생생한 묘사의 힘이 컸다.죽음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애써 외면하고 있는 이야기다. 나이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가깝게는 할머니나 할아버지, 그리고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우리의 부모, 그리고 한번도 생각 해본적 없는 나와 주변인들 까지. 누구나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종합검진의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의 죽음에 대한 외면을 잘 보여주는 단면인 것이다. 우리는 사실 죽음이 가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어떻게든 그 이야기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외면하려고 노력 하며 살아가고 있다.모든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당신의 죽음이 이와 같다면, 그 반대로 열심히, 열정적으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다수의 텍스트와 미디어에서는 죽음을 소재로 삶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온전히 ‘죽음’에 대해서만 이야기 한다. 당신이 죽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부터 당신이 사라진 이후의 남겨진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 까지. 그러나 이렇게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도 감정적인 동요를 요구하진 않는다. 끝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쉽게 빠지기 쉬운, 눈물을 자극하는 이야기를 피하고 때로는 의사처럼 객관적인 사실만을, 공무원처럼 서류로 남는 죽음을, 그리고 기자의 눈을 통해 담담하게 죽음에 대하여 천천히 풀어낸다. 이렇게 담담하고 차분하게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만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가까워질수록 삶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는것은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고, 또 죽음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수학자가 세상을 수학을 통해 바라보고, 언어학자가 세상을 언어로 보듯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삶’의 관점을 통해 죽음을 바라보게 된다. 결국 책속의 공무원이 품고 있는 이야기처럼 죽는 날을 제외하곤 모두 살아있는 날이기 때문이다.이 책은 독일에서 쓰여졌다. 그래서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죽음과 장례식에 관해서도 서구 문화의 내용을 따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의 장례 문화와 서구의 장례 문화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가 여러 매체를 통해 경험한 서구의 장례는 고인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고인이 좋아했던 음악과 고인을 기억하는 사람이 모여 고인을 추억하는 것이다. 고인을 기억하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기억과, 그리고 그 사람이 나에게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스스로 정리해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렇게 망자에 대한 추모는 반대로 나에게 그 사람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고, 그로 인해 떠난 사람과의 관계를 정리할 수 있는 또다른 죽음의 간접 체험이 된다. 어떤 장례가 이상적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고인에 대한 추억을 기억 하는 것도 분명히 또 다른 의미 될 수 있을 것이다.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 책은 철저하게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죽음을 통해 얻는 삶의 교훈과 삶의 자세, 태도 같은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지 않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독자는 삶을 생각하게 된다. 결국은 진부하지만 내일 세상이 멸망 한다면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를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을 살지 못하고 내일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 내일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오늘을 포기하는 것이다. 심지어 내일의 ‘더 나은 삶’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말이다. 내일 성공하기 위해 오늘 포기하고, 내 주의의 사람들을 포기한다. 꼭 성공이 아니더라도 존중과 귀찮음이라는 미묘한 감정에 갖혀서 타인에게 손을 내밀기를 포기하고 언제 다가올지 알 수 없는 먼 미래를 기약하고 있다. 엄마 아빠를 사랑하지만 오늘은 피곤하니 내일 연락하기로 한다. 내 옆의 사람들과 진정한 감정의 교류를 나누고 싶지만 그 사람의 기분을 몰라서, 또는 타인의 삶에 간섭하는게 아닌가 하는 우려로 거리를 두게 된다. 우리는 죽음의 순간이 가까워 졌을 때 이렇게 흘려 보냈던 오늘이 아쉬워 지진 않을까. 책을 읽어갈수록 우리는 좀 더 기뻐하고, 좀 더 슬퍼하고, 좀 더 가까워져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생각은 괴로운 일은 하지 말고 하고싶은 일만 하라고 하는 단편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죽음의 주체로서 어떻게 살아야 죽음을 앞에 뒀을 때 가장 아쉬워하지 않을지, 내가 타인에게 어떤 존재로 기억되고 싶은지에 대해서, 즉 나의 삶에 대해 크게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라플라스의 마녀 서평 ? 이과생의 판타지라플라스의 마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라플라스의 악마[Lapalce’s demon]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라플라스[Laplace]는 프랑스의 수학자로 천체역학과 관련하여 매우 뛰어난 업적을 이뤘으며 수학, 물리학의 많은 분야에 걸쳐 활약했던 학자이다. 특히 수학적 결정론의 관점에서 우주의 모든 원자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알 수 있다면 이를 이용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현상을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 하였으며 후대의 사람들이 이러한 예측이 가능한 미지의 존재에 대하여 ‘라플라스의 악마’라고 이름 붙이게 되었다. 이러한 라플라스의 악마는 공학도라면, 또한 이과생이라면 한번쯤 꿈꿔 볼만한 판타지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과거와 미래에 대한 예측을 ‘초능력’이라는 비과학적인 현상으로 넘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변수들의 계산을 통해 설명 하는 것은 흔히 말하는 ‘공돌이’들의 판타지인 것이다. 이렇듯 예전부터 내려온 [라플라스의 악마]는 과학도들에게는 가능성을 떠나 매력적인 판타지의 주인공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라플라스의 마녀’는 이러한 공학도들의 히어로이자, 또한 미래에 대한 예측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현대에 어울리는 매력적인 판타지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워 이야기를 진행한다.라플라스의 마녀는 매력적인 주인공을 전면에 내보이고, 과학적 예측을 기반으로 하는 살인 트릭을 배치하여 독자들을 강하게 끌어 들이지만 소설의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현대 사회와 그 안에 매몰되어 있는 개인들의 문제를 끄집어내는데 초점을 맞춘다. 결국 소설은 ‘나’라는 인물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또 그 비춰지는 모습에 대한 집착이 어떠한 파국을 가져오는지 보여준다. 현대는 무엇보다 ‘남들에게 비춰지는 나’가 중요해진 시대이다. 과거에도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정의 과정에서 ‘타인의 시선’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사회가 발전하고 다양한 온,오프라인의 인간관계가 발전하면서 ‘나’에 대한 정의가 타인과의 관계나 보여지는 모습에 의하여 정의 되는 경우가 더 많아진 것이다. 특히 수많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와, 1인 미디어가 강화되면서 이러한 경향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카카오톡, 블로그 등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나에 대한 노출은 타인으로 하여금 ‘나’를 평가하게 하고 그러한 평가가 곧 나의 본질로 연결되어 버리는 시대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멋진 곳, 좋은 음식, 색다른 경험의 현장에서 ‘인증샷’을 찍고 곧바로 SNS에 업로드 하는 모습은 이제 일상적인 모습이 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얼마나 타인에 의한 평가, 또는 비춰지는 모습에 대하여 중요하게 생각하는지에 대하여 단적으로 보여준다. 라플라스의 마녀도 결국 타인에게 비춰지는 나에 대한 집착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영화 감독인 한 개인이 완벽한, 그리고 비운의 천재로 보이고 싶다는 욕망이 가져온 파국의 과정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타인에 시선에 관하여 한 번 더 생각해 보도록 하는 것이다. 심지어 범인의 몰락 과정에서도 주인공은 범인에게 어떠한 신체적, 정신적 제재를 가하는 것이 아닌 사회적 평판을 볼모로 범인을 옭아 멘다. 또한 그 평가에 구속된 범인은 자살을 선택하게 되는데 이는 마지막 까지 ‘타인에 의한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개인을, 그리고 대중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겠다.라플라스의 마녀는 이러한 근원적인 ‘나’에 대한 자존감과 타인의 시선에 대한 집착과 같은 주제의식을 제외하고도 여러 소재나 이야기 전개 과정이 매력적인 이야기 이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미래에 대한 예측일 것이다. 불확실성이 큰 동시에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예측은 정말 매력적인 소재이다. 수년간 미래보고서, 미래 예측 관련 서적들이 베스트셀러를 차지하고 현명한 식견을 갖춘 지식인들이 저명해지는 모습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미래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미래에 대한 궁금증을 [라플라스의 악마]라는 가상의 존재를 통해 대리 만족 시켜주는 동시에 블로그를 이용한 범인의 이미지 메이킹, 추리 과정 등은 작가가 오늘의 사회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예리한 관찰력을 가지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다만 신선하고 흥미로운 소재와 현대인들의 문제점을 잘 보여주는 중반부까지에 비하여 후반으로 갈수록 1인칭 시점에서 사건 설명이 많아지고 과도한 영화적 설정이 많아지면서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드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미야 잡화점에서 보여준 힐링이라는 주제, 라플라스의 마녀에서 보여준 예측과 SNS에 관련한 소재 포착의 측면은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의 예리한 통찰력을 잘 드러냈다고 할 만하다.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서평예술도 과학도 아닌 건축으로서의 건축사회가 발전하고 인터넷과 티비와 같은 매체들이 발달함에 따라 여러 분야에 걸쳐 다양한 전문가들이 각각의 영역에 대한 정의와 해석을 내어 놓는다. 과거 유명했던 티비 광고처럼 침대는 가구가 아닌 과학이라는 평가부터 스포츠를 과학으로서 정의하거나 자동차를 예술로 정의하는 것과 같은 새로운 정의와 해석이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정의는 대상에 대한 신선한 해석의 측면에서는 장점을 가지지만 자칫 새로운 해석에만 몰입될 경우 본질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스포츠는 과학이라는 정의에 대하여 과학적인 스포츠를 위해 선수에게 컴퓨터로 지시를 내린다면 과연 재미있을까? 예술품으로서의 자동차를 표현하기 위하여 자동차를 꽃으로 꾸며 앞을 보이지 않게 한다면 어떨까? 앞서와 같은 비약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과도하게 해석된 새로운 정의로 인하여 원래의 취지에서 벗어난 결과물을 종종 마주하곤 한다. 디자인적인 아름다움을 위하여 과도하게 작게 인쇄된 설명서와 주의사항, 너무나 단순화 되어 버려서 용도를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버튼들이 그 예이다. 이와 같은 과도한 정의와, 독창적인 영역의 측면을 표현하기 위하여 저자는 건축을 다양한 인문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되, 건축은 건축이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한다.예술과 과학으로서의 건축도시는 사람이 모여 사는 단순한 공간을 넘어서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가 되었다. 도시는 몇몇의 주택이 한 공간에 모여 있는 단순한 공간을 넘어섰다. 사람의 주거 구역이 있고 소비와 생산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존재한다. 그 사이를 도로가 가로 지르고 있으며 사람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하여 사람들은 각 구역을 오가며 삶을 살아간다. 이렇게 거대한 유기체가 된 도시는 과학을 바탕으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예술적인 측면이 동시에 존재하여야 한다. 제한된 공간에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건물은 높아져야 하지만 동시에 그 건물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미적인 만족인 만족감을 주고, 많은 건물들 사이의 조화를 통해 스카이라인과 같은 조화의 측면도 고려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술과 과학이 특정한 방향으로 치우쳐 질 때 우리는 불편감을 느낀다. 호주 해변 조경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오페라 하우스 근처에 100층이 넘는 고층 건물이 있다면 어떨까? 현대의 건축 기술 측면에서는 바닷가에 초고층 건물이 불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건물이 들어설 경우 시드니의 아름다운 해변 풍경은 지금과 같은 미적 완성감을 느끼기 어렵게 될 것이다. 반대로 도시에 미적 아름다움을 추구하여 공간 효율성과 같은 실용적 측면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부족한 공간과 전문적이지 못한 시설의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과학과 예술은 건축을 지탱하고 있는 주요 요소이며 각 분야는 상호 보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특별한 영역이다.건축과 인간, 그리고 자연건축은 과학과 예술이 조화를 이룬 예술품이다. 그러나 우리는 건축을 단순히 과학과 기술의 조합만으로 볼 수는 없다. 건축은 결국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건축은 조각과는 달리 바라만 보는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그 안에 들어가 살아가고 생활하는, 인간과의 관계에 의해 완성되는 사물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건축은 다른 무엇보다 인간을 잘 이해하고 사람을 위해 완성되어야 한다. 자동차 도로로 둘러싸여 있는 우리나라의 공원들이 잘 이용되지 않는 이유, 그리고 높은 콘크리트 벽에 갇혀 사람들이 걷지 않는 길들은 인간과 건축의 관계에서 ‘사람’이 없어지고 ‘건축’만 남은 예이다. 낮은 건물들과 연결 통로로서 역할을 하는 가로수 길과, 연인과 걷고 싶은 덕수궁 돌담길을 살펴보면 사람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얼마나 건축물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동시에 건축물은 건축물이 위치하는 자연과의 조화 역시 빼 놓을 수 없다. 우리나라는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자로 잰 듯 한 건축물을 찍어내듯 만들어 왔다. 그 결과 나라의 어느 곳에 가더라도 그 곳의 자연과는 관계없이 복사한 듯 일정한 건물들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산업 시대를 넘어 현대에 들어오면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자연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자연은 정복하고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공존해야 하는 대상이다. 도시도 인간과 건축, 자연과 공존하는 거대한 유기체로서 자연을 파괴하고 극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협력하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경사진 땅은 경사를 이용한 건축이 필요하고 물이 흐르는 곳에는 물의 흐름을 방해자 않는 건축이 이루어질 때 건축은 더 그 가치를 발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저자는 이야기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