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위광御威光 : 에도막부기 일본의 지배원리우리가 전근대 일본에 대해 떠올리는 이미지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사무라이, 칼, 막부, 할복 등, 문文보다는 무武에 가까운 인상들의 단어들의 나열일 것이다. 가마쿠라 막부까지 거슬러 가지 않더라도 오닌의 난 이래 일본은 천황에게도, 쇼군에게도 통제되지 않는 전란의 시대였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센고쿠 시대라고도 불리는 이 시기, 각지의 다이묘들은 끝없는 폭력과 무력으로써 지배를 관철해나갔다. 그 무력을 바탕으로 노부나가가 무로마치 막부를 몰락시켰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를 통일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새로운 막부를 개창한 것이다.세키가하라 이후 일본 열도에서 전란의 시기가 종식되고, 도쿠가와는 에도에서 새로운 치세를 시작한다. 그 치세는 분명 압도적인 무력으로 다른 이들을 굴복시켜 내딛은 새로운 시대였다. 그러나 평화로운 새 시대, 더 이상 싸움을 통해 무武의 우위를 증명할 기회를 잃어버린 이들은 무엇을 통해 통치할 것인가? 그들은 이미 권력의 정당화를 위하여 전국시대 권력의 한 축이었던 종교를 배제하였고, 신이나 종교와 같은 초월적 존재에 대한 호소를 통한 지배의 정당화를 포기했다. 또한 동아시아 세계의 다른 국가들과 달리 지배를 납득시킬 유교적 정통성의 원리를 탐구한 것도 아니었다. 와타나베 히로시 교수는 어위광御威光이라고 하는 개념으로 그 지배의 원리를 설명한다. 일본어에서 경어로 사용되는 접두사인 고御 가 붙은 고이코-御威光라는 단어는, 보통 위엄이나 위세, 권세 정도로 번역되어 사용된다. 와타나베 교수가 제시하는 개념의 어위광이란 과연 무엇인가.“3백년 동안 천하의 번들이 어위광이란 글자를 두려워하여 그 습관이 철두철미하게 배어들었다.” 어위광을 설명해주는 명료한 한 문장이라 할 수 있다. 어위광은 말그대로 위엄과 위세 그 자체였다. 힘과 격식, 의례, 복식, 언어까지 눈에 보이는 것부터 보이지 않는 것 까지 모든 것을 다른이들과 구별되는 위세로 쌓아올려 만든 이미지인 것이다. 그리고 참근교대?勤交代를 위시한 제도 역시 다른 번주들 위에서 군림하는 쇼군의 위엄을 보여주는 어위광의 주요한 장치 중 하나였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연극적인 이미지 창출 이외에 권력과 지배에 대한 어떠한 정당화 과정도 거치지 않았던 이들은, 페리제독과 쿠로후네로 대표되는 서양 제국주의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그저 쉽게 붕괴해버리게 된다.
3층 서기실의 암호 : 노예해방의 길로미리보기 방지를 위해 첫 페이지를 공란처리합니다이 책과 나이 책을 처음 마주할 때는 18년 5월, 의무소방대원으로서 일선 119 안전센터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분위기는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종전선언이니 하며 평화에 대한 꿈으로 가득 부풀어 있었으며 동기들 역시 ‘우리도 군생활 줄어드는 것 아닌가’하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나 역시 그러한 일말의 기대를 가졌음은 물론이었다.그리고 그런 와중에, ‘3층 서기실의 암호’의 출간소식은 내게 큰 기대를 갖게 했다. 지난 2016년 주영 북한 대사관 공사신분으로서의 탈북 이후 “통일된 대한민국 만세!”라는 발언으로 화제가 되었던 그가 전해주는 북한 이야기에는 너무나도 흥미가 동했던 것이다. TV 방송이나 신문기사로 자잘하게 접했던 그의 지식과 식견에 동했던 차에, 북한의 외교와 정확한 실상을 보여주는 책이라니 꼭 읽어야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출간과 거의 동시에 구입하여 읽게되었다.3층 서기실의 암호이 책은 북한 외교관이 직접 들려주는 북한 막후 외교의 내막의 1부, 태영호 전 공사의 개인사와 가족사의 2부로 구성되어있다. 1부 ‘평양의 심장부’는 북유럽과 서유럽을 오가며 북한 정권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외교관의 직무상 에피소드 정도이다. 핵 개발로 향하던 북한, 고난의 행군기의 북한, 햇볕정책기의 북한 외교, 그리고 김정은으로의 권력 이양 과정에서의 에피소드가 파트별로 잘 정리되어있다. 덴마크로부터 무상으로 페타치즈를 받아 운송비까지 받아낸 일화라던가 고이즈미 정권과의 외교사 등 때로는 대단하다고 무릎을 치게도, 때로는 짜증나게도 하며 북한 정권의 ‘벼랑끝 외교’의 일면목을 보여준다. 또한 비이성적이라 생각했던 북한이 얼마나 냉철하게 국제정세를 분석하여 움직이는지, 특히 영국을 통한 미국의 간접적 견제나 북한인권 문제를 쳐내버리고 새로운 화제를 만들어내는 우리가 알지못했던 북한의 외교 생태를 가감없이 파헤쳐준다. 일반적인 개인사 정도의 소소한 이야기는 평소 북한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크게 새로울 것이 없다 생각 할 수도 있으나 이 책의 알맹이는 첫째, 공사 출신이 직접 보여주는 북한 외교현장 일선의 날것 그대로의 모습에 있다. 우리가 ‘도대체 왜 저러지?’ 싶을 정도의 벼랑끝 외교부터 이해할 수 없는 비이성적 판단과 극단적 언사에 대한 이해를 도와준다고 할까.두 번째 알맹이는 마지막 9장, 북한 사회에 대한 태 전 공사의 분석과 진단이다. 태영호씨는 북한 사회를 ‘현대판 노예사회’, ‘퇴행적 봉건사회’라고 칭한다. 하위계층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외교관들마저 자식을 인질로 두어야 하는 비정한 짐승 우리 같은 곳에서, 그들의 태양이자 지도자의 심기를 조금이라도 거스르면 그 자리에서 ‘교화’되고 숙청되는 수라와 같은 곳에서 왜 탈출 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도 끓어오르는 가슴을 억누르고 담담히 써내려가고 있다. 북한은 왜 ‘노예제 사회’인가? 위대하신 지도자 단 한 사람 이외에는 모두가 인간 이하의 그 무언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북한에서도 최근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그러한 변화는 인위적으로 막을 수 없는 것이라 증언한다. 바로 인터넷과 시장경제, 종교의 힘이다. 이 때문에 지도자를 향한 북한 주민들과 상위 엘리트 계층의 충성심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책을 읽으며 내가 알지못했던 북한의 외교 이면에 감탄을 하기도, 지도자를 중심으로 비이성적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체제를 비웃기도하며 가볍게 책을 넘기다가 2부를 읽으며 때로는 분노, 슬픔, 그리고 탄식을 보이게 되었다. 북한이라는 있어서는 안될 체제가 어찌 저렇게 유지되고 있는가. 움짝달싹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감시와 밀고, 가혹한 처벌이 그 사회를 유지한다지만 역시 그러한 체제에서는 혁명은 물론 어떠한 움직임도 보일 수 없는가. 최소한 희망이라도 없는가. 최근 ‘자유조선’이라는 단체의 활동으로 외부에서의 희망은 보이지만 혁명은 안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법이다. 과연 노예들은 스스로 해방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인가.사람이 먼저다‘사람이 먼저다’ 문재인 대통령의 선거 슬로건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의 범위가 대체 어디까지인지가 의문스럽다. 지구상에 숨쉬고 있는 보편적 인간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대한민국 국민을 이야기 하는 것인지. 인권운동가도 아니고 대통령의 슬로건이면 아마 후자가 아닐까 싶다. 다만 군사분계선 이북에서 인간 이하의 삶을 살며 고통받고있는 그들은 누구인가. 헌법상 해석에서도 우리나라 ‘국민’으로 인정받는 그들의 삶은 그 누가 책임 질 것인가. 현 정부에선 북한 인권에 관련된 이슈를 애써 무시하는 것이 현실이다. ‘평화’와 ‘통일’ 이라는 대승적 목표를 위함이라 변명 할 수는 있겠으나 북한에 질질 끌려다니다 결국 남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 해 보았으면 한다. 남북관계 진전을 위해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희생시킬 셈인가?
세계질서, 힘과 가치의 양축냉전기 미국 외교정책의 전권을 가졌던 인물. 데탕트의 주역으로서 전 지구적 평화를 가져오기도 하고, 먼로 독트린 하에 남미 독재자를 옹호하며 수백만을 죽이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던 부정적으로 평가하던, 현대 미국의 일류 초강대국 지위에 기여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미국 외교에 큰 족적을 남긴 뛰어난 외교관이기도 하였으나, 인류 역사의 흐름을 현실주의적 관점을 통해 설명했던 위대한 이론가이기도 하다.헨리 키신저가 강조하는 것은 ‘세계질서’이다. 서로 같은 규율로 아젠다를 나누는 장, 그러한 판도를 만들어 나가는 국가가 세계질서를 이끌어 나간다고 주장한다. 유사이래 국제질서의 중요한 판도였던 유럽과 중동, 아시아, 그리고 미국으로 이 4개 지역에서 전개되는 세계질서의 전개과정을 그려낸다. 개별 국가 사이의 외교가 아닌 각 권역의 복잡한 외교적 질서를 다룬다. 이 책의 제목이 국제질서(International order)가 아닌 세계질서(World order)인 까닭은 거기에 있는 것이다.유사이래 인류는 무질서함 속에서 살아왔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아나키 상태에서 사회와 국가라는 질서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국가를 주체로 하는 국제사회라고 하는 세계에는 과연 질서가 있는가. ‘세계질서’란 존재한 적이 있었던가. 헨리 키신저는 17세기 유럽,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비롯된 질서로부터 세계질서의 실마리를 찾아낸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국제질서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 선구자로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17세기 유럽, 개신교를 믿던 보헤미아의 귀족들은 신성로마제국으로 대표되는 합스부르크 왕가와 교황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해 반란을 일으켜, 30년 전쟁이 발발했다. 종교적 갈등으로 시작한 전쟁이었으나 보헤미아 지역의 영토에 야심을 품고있던 덴마크와 스웨덴이 참전하며 30년에 걸친 대규모 국제전이 되었다. 이 시기의 30년은 혼란의 절정이었다. 마침내 프랑스가 참전하여 신성로마제국에 칼을 뽑으며 유럽의 동맹관계는 엉망이 되고말았다.혼란은 베스트팔렌에서 종결되었다. 베스트팔렌에서 체결된 조약은 여러방면에서 새로운 것이었다. 이제까지의 승전국이 패전국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해서 체결된 조약이 아닌, 이해관계국이 참석한 외교 회의를 토대로 성립된 조약이라는 것이다. 또한 귀족영지 형태의 세력이 무수하게 존재하던 보헤미아 지역에 주권국가 개념의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졌다는 것 역시 이전까지 없었던 새로운 국제질서의 시작이었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며 유럽은 종교가 아니라, 세력균형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구축했다.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근대국가 체제 하에서 이러한 세력균형은 몇 차례나 깨지고 회복되기를 반복한다. 나폴레옹 전쟁과 빈체제가 대표적인 예시로, 헨리 키신저는 자신의 박사논문이었던 ‘회복된 세계’에서 이를 다루었다.
구소련 지역 한민족의 디아스포라에 관한 연구: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을 중심으로I. 한민족의 디아스포라디아스포라는 특정 민족이 자의적이든지 타의적이든지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1950년대 중반부터 보편화되어, 상당수의 집단이 다른 특정 지역으로 쫓겨나 장기적으로 정착하게 되는 데에도 디아스포라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한국 역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 상당한 규모의 디아스포라를 경험했다. 1860년대부터 조선 말기의 혼란을 피해 많은 수의 이주민들이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정착했으며 한일합방(1910)이후에는 단순한 경제적 동기가 아닌 독립운동, 또는 정치적 동기를 가지고 해외로 이주하는 수가 늘어났는데, 조선 총독부 통계에 의하면 1920년대 연평균 대략 1만명이 국외 이주를 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1930년대 일본의 전시동원체제가 가속된 이후로는 일본의 해외 침략 등에 동원되어 강제 이주자의 수가 크게 늘어, 해방 당시의 통계를 보면 공식적인 통계로 파악되는 수만 일본에 약 110만, 만주 일대에 120만 명이 이주 한 것으로 드러난다.일본과 만주 이외 약 50만 명의 조선인들이 러시아를 비롯해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거주하였으며, 이들을 고려인이라 부른다. 그 외에 사할린 등지에 한인 사회가 형성되어 있는데, 한때 일본 열도의 본토로 취급받던 사할린은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하면서 소련에 넘겨진 땅이다. 이 곳의 고려인들은 일제강점기 당시 기준으로 같은 나라인 일본으로 징용당해 일하러 갔다가 전쟁이 종결되고 주권이 소련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버려진 것이다. 사할린 섬의 한인들은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전역에서 일본의 전시동원체제 당시 강제징용으로 탄광이나 노역장에 끌려간 희생자들이었다. 그 때문에 연해주나 중앙아시아 등지의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들의 정체성은 큰 차이가 있다. 사할린 한인들은 재일 한국인들과 비슷한 케이스라 할 수 있었으나 그들과도 냉전체제에서의 분단과 무관심 때문에 독자적인 정체성으로 발전해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다음과 같다. 조선인이라고 하면 대한민국에서 이질감을 갖고, 한국인이라고 하면 북한에서 큰 반발감을 갖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러시아어로 우리 민족과 땅, 국가 전반을 가리키는 단어가 '고려'에서 유래한 '까례야(Корея)'기 때문이다. 중국어와 일본어에선 '朝鮮'이, 영어에선 'Korea'가 이에 해당한다. 원래 고려인들도 일본이나 중국 등 각 나라의 동포들처럼 자신들을 ‘조선인’이라고 칭했지만 자신들을 고려인이라고 공식적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88년 서울 올림픽 직전인 1988년 6월 전소고려인협회가 결성되면서부터였다.그들은 ‘조선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닌 소련인이다. 또한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 역시 수 세기를 흐르며 이미 남, 북의 모국과는 다른 이질적인 소련의 특성을 띄고 있으며, 어느쪽에도 속하지 않는 자신들만의 독자적 특성을 가져왔으니 그 어느 쪽도 아닌 '고려인'이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결국 고려인이라는 호칭은 한민족의 분열이 낳은 비극적인 역사의 산물인 것이다. 한국이 남한으로, 조선이 북한으로 정착한 것도 한국전쟁 이후 50여년 정도 밖에 안 된다. 마찬가지로 일본과 중국이 한반도를 조선반도라고 부르는 것은 역사적으로 '조선'이 한민족을 지칭하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일단 우리 역시 조선시대 500여 년 동안 소수민족 없는 통일왕조의 조선인이었으며 식민지 통치기는 물론 해방, 분단 이후의 대한민국에서도 '조선'이 여전히 쓰인다. 아울러 조선족의 ‘조선’ 역시 단지 Korean이란 뜻이다. 정착지가 중국이냐 러시아냐 지역의 차이일 뿐 결국 같은 이름이라 할 수 있다.2.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이주과정1) 조선인의 연해주 정착과 추방본래 고려인들이 정착하던 곳은 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 접경지역이었다. 19세기 후반으로부터 함경도 등지의 주민들이 압록강을 넘어 흑룡강 지역으로 넘어가고, 두만강을 넘어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점차 조선인들의 인구가 증가하게 되었다. 1910년 다. 이 당시 소련의 국제적 환경은 점차 날카로워지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었으며, 일제는 만주를 침략 한 뒤 소-만 접경지역에 관동군 수십개 사단을 배치해놓고 침략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정세 하에서 스탈린은 극동지역 한인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당시 소비에트 연방 수뇌부에서 문제로 생각 한 것은 고려인들의 내통, 또는 일본인 간첩의 침투 문제로, 이에 따라 1934년부터 극동지역 한인들 사이에서도 '일제첩자'과 '이민의 공적'을 잡아내는 숙청운동이 시작되었다. 러시아 극동 지역 한인들은 소련의 소수 민족 중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1920~30년대의 조선은 일본의 통치 하에 있었다. 이들은 19세기 중기 이후부터 빈곤한 농민들이 개척지를 찾아 월경하여 이주하면서 서서히 형성되었다. 이들의 이주는 1920년대, 일제의 강점이 심화되며 두드러졌다. 1917년 ~ 1926년에는 고려인들이 거의 17만 명으로 3배로 늘어났고,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 농촌 인구의 25%를 넘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소련의 대 소수민족 정책으로서 모스크바에서 논의된 바로는 러시아 동부의 고려인 단체에 대한 고려인 자치령이 있었으나, 토지경쟁을 우려한 토착 러시아인의 반대와 당시 일본에 대한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최종적으로 거부되어, 결과적으로 정반대의 정책이 등장하였다. 한편, 중앙 정부는 비공개 계획을 승인하였다. 이는 소련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혐의가 있는 하바롭스크 북부의 약 8만명의 고려인의 절반을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주 정책은 재정적, 정치적인 수많은 사유로 1930년 이전까지는 시행되지 않았으나, 1930년을 시작으로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충성심이 입증되지 않은 고려인들은 북쪽 지방으로 강제로 이주되었다. 초기에는 작은 숫자였으나 이것이 구소련의 첫 번째 인종 청소로 여겨지기도 한다. 소련당국은 1935년부터 3년간 3천여명의 고려인을 일본의 첩자라는 혐의로 총살하기도 했다. 갑작스런 대규모 이주는 일본의 침략 명분이 될 수 있다는 우려로 연한 축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 정보 불충분, 서류 분실, 경제적인 문제 등으로 인해 많은 고려인들이 국적 취득 신청을 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과거 소련 지역에 현재 전체 고려인의 12%에 해당하는 약 5만의 무국적 고려인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교육을 비롯한 기본적인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이러한 불이익은 그 자손들에게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무국적자의 자녀는 무국적자가 되며, 이 경우 혼인 후 배우자의 국적을 획득하는 방법이 있다. 다만, 이런 형태로 한국에 거주하게 될 경우엔 무비자로 입국하게 되는데, 무비자 상태로는 경제활동에 제한을 받게 된다. 우크라이나 정부에서는 한국 대사관의 신분 증명이 확보된 상태라면 자국 내 무국적 고려인의 국적 회복을 지원해줄 수 있음을 언급하였다.5. 소련 붕괴 이후의 고려인중앙아시아 각국이 독립한 이후에 나타난 가장 큰 문제는 이슬람의 발흥과 민족주의의 대두이다. 이 두 가지 요인으로 중앙아시아 지역이 독립하였고, 이후 각 지역의 분쟁으로 수만 명의 고려인이 난민이 되었다. 강제 이주되어서 수십년 이상 살아온 삶의 터전에서 고려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받게되었다. 또 다른 미래를 기약하지도 못한 채, 고려인들은 완전히 고립되어 연해주로 재이주하는 등 중앙아시아나 러시아 전역으로 흩어지면서 민족정체성을 유지하는데에 치명적인 상황이 되었다.6. 고려인의 정체성고려인의 정체성을 특정하기는 어렵다. 개개인마다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최근의 젊은세대의 경우는 한국어를 구사할 수 없지만 자신의 민족이 고려인이라는 자각 정도는 하고 있다. 대다수 고려인들의 경우 러시아 문화에 완벽히 동화되었기 때문에 모국어는 러시아어이다. 그들의 이름 역시 거의 러시아식 이름을 사용한다. 따라서 정체성 면에서 보자면 러시아인에 더욱 가깝다. 그러나 문제는 1991년 소련이 해체된 이후 각 연방 구성원이 독립하면서 더 이상 러시아어를 공용어로 쓰지 않는 점이다. 때문에 소련시절 관공서나 공공기노인들, 다른 곳에서 희망을 찾아보려는 젊은 고려인들 가운데 이런 경향이 있다고 한다. 고려인 젊은이들은 한국을 '할아버지의 나라' 정도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한국어는커녕 고려말도 제대로 못 하는 젊은이들이 대다수이다.III. 사할린 한인1. 배경1) 일제의 사할린 징용19세기에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간 조선인 중 일부가 러시아 영토인 사할린 섬 북부로 넘어간 경우가 있었다. 또한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에게 승리한 일본이 전리품으로서 사할린 섬 남부 절반을 차지하고 여기에 가라후토 청을 세우자 일본에 거주하고있던 조선인 중 일부가 사할린에 정착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인원은 극소수였다. 그러나 이후 1930년대 말부터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일제의 본격적인 전시동원체제가 시작되면서 문제가 심화된다.일제는 당시 관동군에 자국민인 일본인은 물론, 조선인까지 징집해 닥치는 대로 끌어넣자 노동력 부족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사할린 지역의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일본 정부가 직접 식민지 지역 조선인들을 대거 사할린 섬으로 강제 징발, 징용하여 본격적인 사할린 한인의 역사가 시작된다. 일본은 이들을 사할린의 탄광, 군수공장 등에서 혹사시켰다.이러한 한인 노무자 강제 징발은 1939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태평양 전쟁의 격화가 심화되면서 물자와 인력이 부족해지자 3단계의 징발 형태가 나타난다. 초기(1939년 9월 ~ 1942년 2월)에는 일반적인 모집으로, 신문 공고나 광고등을 통해 노동자를 모집하는 형태였다. 그러다 태평양 전쟁이 일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1942년 2월 ~ 1944년 9월) 관헌을 통한 조직적인 모집형태로 전환되었으며, 패망을 눈앞에 두게되자(1944년 9월 ~ 광복까지) 관헌은 물론 군·경을 동원한 조직적인 강제징용, 즉 사람사냥이 자행되었다.한편 사할린에서 물자 운반이 난관을 빚자 조선인 징용 노무자 1만명을 다시 일본 본토로 또 강제로 끌고 가서 혹사시키는 이중징용이 발생했다.2) 소련의 사할린 탈환1945년 8월 9일, 소련군의 8월다.
헨리 키신저와 세력균형Ⅰ. 서론이 글은 ‘세계질서’라는 책에 관한 필자의 감상이다. 헨리 키신저는 ‘세계질서’라는 책을 썼다. 그는 국제정치학자이며 현실주의 계보를 따른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 밑에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세계질서’라는 책을 보면서, 필자는 이 사람이 미국의 국무장관으로서 재임 중일 때 외교정책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세계질서’라는 책의 내용은 ‘베스트팔렌 체제’에서부터 이야기를 하지만, 많은 분량으로 인해 필자가 느낀 부분만 서술하고자 한다. 이에 관한 키워드는 ‘현실주의·세력균형·베트남전쟁’이다.Ⅱ. 베트남전쟁과 세력균형오늘날 국제관계의 질서는 400년 전에 서유럽에서 구상된 ‘베스트팔렌 체제’이다. 그 당시에는 대부분 다른 나라들은 알지 못했던 체제였다. ‘베스트팔렌 평화 조약’은 서로의 국내 문제에 간섭하지 않고 전반적인 세력 균형을 통해 서로의 야심을 억제하는 독립적인 국가들로 이루어진 체계에 의존했다. 그 대신에 각 국가에는 자국 영토에 관한 주권의 속성이 부여되었다. 각 국가는 이웃 국가들의 국내 문제 제도와 종교적 소명을 현실로 받아들였고, 그들의 존재에 도전하지 않으려 했다.‘세력 균형’은 이때부터 등장한 개념이다. 키신저의 ‘세계질서’라는 책을 보면 여러 내용이 있지만, 필자에게 가장 와닿은 개념은 ‘세력 균형’이었다. 키신저는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국제관계와 세계질서를 바라본다. 그는 예전에 “미국에게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오직 국익만이 존재할 뿐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를 고려해서 필자는 베트남전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이해했다.헨리 키신저와 베트남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선 다른 저서도 이해해야 한다. 헨리 키신저의 박사 논문은 ‘회복된 세계’라는 저서이다. 빈체제를 다루고 있다. 나폴레옹 전쟁 후 유럽의 질서가 어떻게 회복되었는지 연구했다. 여기서 강대국이 5개가 있으면 세력균형이 이루어진 것을 발견했다. 당시 영국·프랑스·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러시아·프러시아가 있었다. 키신저는 세계가 5개의 강대국으로 구성이 되면, 세력균형이 이루어진다고 이해한 것 같다.이 원리를 베트남전에 적용한 것이다. 원래 미국은 도미노 이론을 믿고 있었다. 아이젠하워와 덜레스 국무장관이 주장한 것이며 미국 외교의 근간이 되기도 했다. 내용은 ‘한 나라가 공산화되는 것을 내버려 두면 다른 나라도 공산화가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안보에 있어서 불안한 요소로 다가왔고 베트남전에 개입하게 된 배경이었다.키신저가 보았을 때, 미국은 전쟁을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좌파적 성향을 가진 수카르노 정권이 쿠데타로 무너지고, 우파적 정권인 수하르토가 들어선다. 이는 미국의 외교정책의 노선을 바꾸게 계기였다. ‘아시아 민족주의’는 ‘공산주의’ 이념보다도 강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세계를 5개의 강대국으로 만드는 과정을 거친다. 미국·소련·유럽·중국·일본이라는 5개 국가다.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미국은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가 책임져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미군 50만명이 베트남에서 철수한다. 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하면서 중국은 베트남 인근에 있던 군대를 중·소 국경 쪽에 배치시킨다. 소련은 유럽 근처에 있던 군대를 중국 국경에 군대를 배치한다. 소련과 중국의 다툼을 이용해서 중국을 소련으로부터 떼어내게 했다. 필자는 이 점이 인상이 깊었다. 전 세계의 군대를 체스판 기물을 옮기듯이 움직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