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로 보는 세상자기 자신에게 애착하는 일, 즉 자기애를 뜻하는 나르시시즘. 이 단어의 어원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사랑에 빠진 나르키소스가 물에 빠져 죽고 수선화로 다시 피게 된 그리스 신화이다.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는 일은 나쁘다고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정말 좋은 현상이다. 자신감, 자존감, 용기 등 긍정적인 에너지를 일으키니 말이다. 하지만 소설 속 가희가 ‘모든 나르시시즘은 파멸의 길로 간다’ 고 말한 것처럼, 과한 자기애는 신화 속 나르키소스처럼 자신을 파괴시키는 일로 연결될 수 있다. 이라는 이 소설의 제목은 자신을 한 번 돌아볼 것을 권유하고 있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에 빠질 것이 아니라, 거울에 비춰진 모습만 볼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을 말이다.소설 속 주인공인 ‘나’는 거울에 빠진 나르시시스트이며, 가희는 그를 비추는 거울이고, ‘나’의 아내 성현은 거울에선 보이지 않는 존재로 표현되고 있다. 나는 거울이란 소재를 중심으로 둘러싸여져있는 세 인물들이 너무도 불쌍했다. 가장 불쌍하게 느껴진 사람은 바로 ‘나’이다. 자신을 사랑하고 거울 속 모습만 믿어온 게 죄라면 ‘나’의 죄였다. 가희를 통해 알게 되어 지금의 아내인 성현은 어릴 적 강간을 당했었고, 가희와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충격적인 비밀을 안고 있었다. 그녀가 ‘나’에게 보여준 모습은 다 전략이었고 거짓이었다. 가희 역시 불쌍하긴 마찬가지다. ‘나’와 성현을 둘 다 사랑하고 사랑도 나눴지만, 그 누구도 자신의 사람은 되지 못하였다. 뒤에서 ‘몰래’ 하는 사랑밖에 할 수 없었던 가희. 어쩌면 차의 트렁크 문을 닫은 가희의 행동은 백설 공주가 아니라 마녀처럼 모두를 파멸로 이끄는 행동은 아니었을까. 또, ‘나’에게 자신의 마음과 과거를 숨기려는 성현. 세 사람은 진흙탕과 같은 운명인 것 같다.소설의 마지막 ‘나’의 독백이 인상 깊다. ‘내 거울은 나를 속였다. 진정한 거울은 나와 함께 이 트렁크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다. 아니다. 모든 거울은 거짓이다. 굴절이다. 왜곡이다. 아니, 투명하다. 아무것도 반사하지 않는다. 거울은 없다.’ ‘나’를 속인 거울은 트렁크에 갇혀 삶의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진실을 고백한 가희, 자신의 과거와 마음을 숨긴 성현 둘 다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가희의 고백으로 ‘나’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고, 자신이 보고 믿고 있던 현실이 모두 거짓임에 배신감을 느낀다. 나르시시스트인 ‘나’의 입장에서 봤을 때, 거울의 의미는 자신을 가다듬고 사랑에 빠지게 하는 소재라고 생각했다. 나르키소스가 자신을 보았던 호수와 같은 의미로 ‘나’에게 거울도 그런 의미로 이해했다. 하지만 가희와의 대화가 지속되면서 ‘나’에게 거울은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이고, 자신이 보는 세상이라고 느껴졌다. 자신이 믿고 있던 것들이 무너짐을 느낀 ‘나’는 ‘거울이 없다’라는 말을 통해 자신이 생각해왔던 세상은 존재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가희가 말한 나르시시스트의 파멸이란 이런 ‘나’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추상적이거나, 현실적이거나모든 사람들에겐 꿈이 있다. 직업에 대한 꿈뿐만 아니라, 후에 어떤 삶을 살지 혹은 어떤 성격의 사람이 될지에 대한 것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소박하다면 소박한 꿈부터, 거창하다면 거창한 꿈까지. 그렇게 사람들은 자신 속에 꿈을 키워가며 산다. 돈을 벌고 사람들을 만나고 책을 읽고 이 모든 것은 어쩌면 각자의 꿈으로 가는 길일 것이다. 하지만 그 꿈이란 것은 현실과 어느 정도의 타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꿈은 거창하더라도 좋지만, 현실과 너무 먼 추상적인 꿈은 오히려 자신을 해할 수 있다. 목표는 높은데 현실은 그에 따르지 못해 좌절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람들이 선망하는 삶은 다른 사람들의 꿈이지 나의 꿈이 아닌 것 역시 알아야 한다.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등 욕심이 많았던 나는 아직까지 많은 꿈을 꾸고 있다. 나의 꿈이 곧 원동력이 되어 이루기 위해서 달려가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소설을 읽을 때에도 꿈에 초점을 두어 읽게 되었다. 은 꿈에 대해 주인공 ‘나’와 ‘나’의 가족들이 갈등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나’는 집을 떠나는 것이 곧 ‘해결’이라고 생각한다. 일곱 식구로 이루어진 ‘나’의 가족은 어머니와 여동생이 하는 제품 직공으로만 먹고 살고 있다. 대학생인 여동생 지숙은 낮에 공부를 하고 오면 바로 앉아서 재봉틀을 붙들기 바쁘다. 아버지는 체면을 중요시 여겨 집에서 큰 소리만 치고 있다. 이런 ‘나’의 가족들은 미국 유학이라는 꿈을 꾸고 있다. 미국 유학은 곧 성공의 지름길이며 꼭 다녀와야 하는 필수 코스가 되어 버렸다. 동생들 역시 미국 유학의 꿈에 열을 올리고 영어 공부를 하며 미국에 대한 기사는 다 스크랩 해 놓으며 외우고 있다. 하지만 ‘나’는 당장 먹고 살기 바쁜 현실인데 미국 유학을 꿈꾸고 있는 ‘나’의 가족들을 한심하게 생각한다. 이런 ‘나’에 대한 가족들의 태도는 냉소하고 오히려 ‘나’를 한심하게 여기고 있는 상황이다. 아버지에게 혼나거나 맞을 때면 ‘나’는 자연스럽게 집을 떠나 광순의 방으로 간다. 광순은 대학교에 다니며 늙은 아버지와 동생들을 몸을 파는 일로 먹여 살리고 있다. ‘나’는 광순에게 왠지 모를 위로와 안정을 느끼는데, 광순은 ‘나’에게 항상 말도 없이 자신이 번 돈을 주곤 한다. 여느 때처럼 광순의 집 앞에서 돈을 받고 집에 오는 길에 ‘나’는 정체 모를 남자들에게 맞는 장면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나는 소설을 읽는 내내 답답했고 슬펐다. 이유는 주인공들이 지나치게 현실적이거나, 지나치게 추상적이라는 것이다. 밥을 굶더라도 미국에 가고야 말겠다는 가족들, 그런 가족들이 한심한 ‘나’와 몸을 팔면서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하는 광순. 서로 극과 극을 바라보고 있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참혹하기까지 했다. 우선, 가족들은 너무도 추상적이다. 미국으로 가는 것이 곧 성공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 시대 사람들의 미국에 대한 판타지가 이 정도였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가족들에게 미국은 꿈, 동경을 넘어 맹신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에게도 그럴 듯한, 현실적인 꿈이나 미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현실적인 성격으로 가족들이 한심해 보이는 것일 뿐, 집을 떠나면 광순이의 방에 있기 마련이다. 위자료랍시고 몸을 팔아 번 돈을 받는 것이 정상적으로 보일 리가 없다. 따지고 보면, ‘나’ 역시 무기력하고 대책이 없는 것이다. ‘나’는 미국에 환상을 가지며 사는 가족들을 한심하게 보지만, 자신도 한심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는 환상으로 가득 찬 가족들을 떠나는 것이 해결이라고 말하지만, 집을 나가도 막상 아무것도 없을 ‘나’야말로 미해결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