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든 콜필드를 통해 보는 현대 사회에서 순수의 위치어린 시절에 나는 책 읽기 좋아하는 꼬마였다. 더 커서는 만화책도 즐겨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만화방 주인이 되고 싶었다. 이런 나에게 부모님은 아직 내가 어리고 순수해서 그런 꿈을 꾸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커가면서 나도 돈을 많이 벌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안정적인 직업들을 꿈으로 나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 콜필드는 어린 시절 나의 꿈, 나의 순수함을 다시 생각나게 했다.홀든 콜필드는 미국이라는 거대한 자본주의 사회 아래에서 순수를 잃어버린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도는 청소년이다. 그는 어른이 되기 전의 순수를 간직한 인물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 순수 그 자체를 상징하기도 한다. 때문에 홀든이 고등학교에서 연거푸 퇴학당하며 학교와 사회에 부적응하는 모습을 단순히 청소년기의 방황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가 순수함을 지키고자 하는 인물 혹은 순수함이 버틸 수 있는 곳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홀든은 위선적인 모든 것들에 혐오감을 느끼는 인물이다. 예를 들어, 그는 사람들이 인사치레로 하는 말들에 역겨움을 느낀다. ‘행운을 빕니다’나 안톨리니 선생님의 부인이 ‘어머니는 잘 계시니?’하는 말들과 같은 것들에 염증을 느끼며 그것이 모두 위선이고 가짜라고 여긴다. 그리고 그는 예술에 있어서도 위선이 있다고 여기는데 특히 영화에 대해서 홀든은 심한 환멸을 느낀다. 당시에 혁신적인 바람을 몰고 온 영상매체인 영화가 홀든이 보기에 소설이나 시 같은 순수문학과는 다른 위선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형 D.B의 소설을 좋아하고 그의 글솜씨를 인정하면서도 그가 할리우드에 가서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것과 같은 일에 부정적인 태토를 취한다. 심지어는 홀든은 오두막에 형이 묵고 싶다면 무조건 순수 문학인 소설만 써야 한다고도 말한다. 이렇게 위선적인 것에 환멸을 느끼면서 그는 순수한 것들에 대해 더더욱 집착하게 된다. 그는 어린아이들을 좋아하는데, 특히 그의 여동생 피비와 앨리를 좋아한다. 그 중 앨리는 어린 나이에 죽은 인물로서 오히려 홀든에게는 더더욱 이상향같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피비같은 경우에는 결국 커서 어른이 되겠지만 앨리는 순수한 어린이로 죽어 영원히 그 모습으로 홀든에게 기억되기 때문이다. 또 피비의 경우에는 그가 거의 가장 좋아하는 인물로 피비의 순수함이 변할까 홀든은 염려한다. 피비의 학교에 낙서된 저속한 욕설같은 것에 심한 분노를 느끼는 부분과 피비가 회전목마를 타는 모습을 보며 좋아하는 마지막 부분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그는 피비 뿐만 아니라 순수 자체를 지키고 싶어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자 한다. 호밀밭(사회)에서 떨어지는 것(순수를 상실하는 것)으로부터 아이들을 지켜내는 인물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다.
폭풍의 언덕을 통해 본 죽음의 의미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죽음’에 대한 통념은 끝,두려움,절망과 같은 비극적인 의미가 강할 것이다. 대부분은 죽음을 기피하려 하고 죽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발버둥을 친다. 하지만 이러한 통념을 넘어서는 죽음이 ‘폭풍의 언덕’에는 존재한다. 단 한 사람, 히스클리프라는 인물에게 죽음의 의미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죽음의 모습과는 다르다.죽음의 어두움은 폭풍의 언덕을 중심으로 저변에 짙게 깔려있다. 또 자매들과 자신 역시 빨리 생을 거둔 작가 에밀리 브론테의 집안 내력의 영향인지, 폭풍의 언덕에서는 주요 인물들이 대부분 죽어나간다. 우선은 히스클리프를 폭풍의 언덕으로 이끈 캐서린의 아버지 언쇼의 죽음을 시작으로 힌들러, 그리고 그의 부인,에드거의부모님,에드거,이사벨라,이사벨라와 히스클리프의 아들 그리고 캐서린도 죽음에 이른다. 그리고 모든 폭풍의 중심에 서 있는 히스클리프마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언뜻 보기에 폭풍의 언덕에서의 죽음의 모양새들 역시 보통 사람들의 통념처럼 비극적이고 처참해 보인다. 또 사실 캐서린의 죽음까지는 그렇게 생각된다. 하지만 히스클리프의 죽음을 생각할 때, 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처럼 보인다.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는 만나자마자 이상할 정도로 서로에게 끌린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 혹은 친구를 넘어서는 영혼의 짝,흔히 말하는 소울 메이트이다. 처음 폭풍의 언덕에 발을 들인 히스클리프가 가장 믿고 의지했던 것은 자신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쏟아주던 캐서린의 아버지 언쇼가 아니라 캐서린이였다. 그리고 캐서린 역시 히스클리프와 둘도 없는 단짝이 된다. 또 어린애답지 않은 괴팍함과 포악함, 심하게 장난스러운 성격 등 그들은 단순히 친구사이를 넘어서서 어딘가 닮아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캐서린이 넬리에게 자신이 에드거와 결혼할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히스클리프에 대한 언급을 하는데 그 때 캐서린은 ‘그 애는 나보더 더 나 자신이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말한다. 또 ‘우리 영혼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그 애와 내 영혼은 같아.’라고도 한다. 영혼의 짝이면서 동시에 서로를 그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히스클리프 역시 마찬가지이다. 캐서린의 죽음이후 히스클리프는 반은 살고 반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모두들 캐서린의 유령을 두려워할 때 그는 창문을 열고 캐서린에게 제발 들어와 달라고 간청한다. 영혼의 반쪽 없이 살아가는 히스클리프에게 캐서린의 유령은 무서운 존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창 밖에서 떠도는 캐서린의 유령을 따라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히스클리프는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면서 넬리에게 ‘난 이미 내 천국에 거의 도달했어. 남들이 말하는 천국은 내겐 아무 의미도 없고 가고 싶지도 않아’라고 말한다. 그리고 히스클리프는 시체는 웃고 있었다. 그를 웃게만들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은 캐서린 뿐이다. 히스클리프는 분명히 캐서린을 만났고 캐서린을 따라간 것이다. 그리고 캐서린과 함께하는 것이 히스클리프에게는 천국이 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인물이 자살을 하는 결말이 우리가 보기에는 비극적인 결말일 수 있다. 하지만 히스클리프의 입장에서 이것이 과연 비극적 결말일지는 의문이 든다. 히스클리프는 유령이지만 결국 캐서린을 만나고, 자살을 통한 죽음은 히스클리프 자신과 캐서린을 이어주는 매개체였다. 히스클리프에게 있어 죽음은 절망과 끝이 아니라 캐서린과의 만남을 위한 시작인 것이다. 또한 그들이 함께 있음을 암시하듯 히스클리프의 죽음 이후 사람들은 곳곳에서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목격담을 전해왔다.
주홍글씨의 가장 큰 희생양: 칠링워드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의 아들은 납치당해 살해당한다. 전도연은 괴로움에 종교를 가지고 교회를 다니면서 범인을 용서하기로 마음 먹는다. 하지만 범인에게 용서를 말하러 간 감옥에서 범인은 이미 자신은 ‘당신’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용서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일을 소설 ‘주홍글씨’에서 헤스터 프린과 딤스데일 목사가 전 남편 칠링워드에게 취하는 태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헤스터 프린과 목사는 불륜을 저질러 그 사이에 아이까지 갖는 죄를 저질렀다. 헤스터와 목사는 공동체에 헌신하는 모습으로 그 대가를 치르려고 한다. 그리고 사회는 그들, 특히 헤스터에게 용서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그녀는 결국 adultery의 a가 아니라 angel의 a를 얻게 된다. 그리고 끝내 그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칠링워드를 악인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헤스터와 딤스데일 목사는 복수심을 가지는 일을 자신들이 저지른 죄보다 훨씬 크나큰 죄라고 말한다. 또 헤스터와 딤스데일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용서받는 수단으로 사회에 봉사하는 것과 참회의 마음을 가지는 것만으로 한다. 그들은 단 한 번도 칠링워드에게 잘못을 빈 적이 없다. 심지어 처음 헤스터가 처형대 위에서 벌을 받고 감옥에서 칠링워드가 자신과 펄을 치료해줄 때도 미안한 태도를 취하기는커녕 칠링워드를 경계하기만 한다. 나중에는 자신들 때문에 상처입어 복수심에 사로잡혀 악마 같은 모습을 가지게 된 칠링워드가 목사에게 복수하려는 것을 비난한다. 목사 역시 그 사실을 알고는 자신이 불륜을 저질러 상처를 준 칠링워드를 두고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원수라 부르며 저주한다.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 누군가 불륜을 저질렀다면 용서를 구해야할 사람은 자신의 불륜으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일 것이다. 자신의 행위에 사죄하며 사회에 봉사하는 것은 논외의 일이다. 하지만 헤스터와 목사는 자신들이 일차적으로 용서를 구해야할 사람을 악마로 여기고 작가 역시 소설 내내 헤스터와 목사를 선한 인물처럼, 칠링워드를 가장 큰 죄를 저지른 악인으로 묘사한다. 그들에게 자신들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할 대상에 칠링워드는 없고 오직 하나님만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가 역시 하나님이 판단하실 일에 칠링워드가 복수심을 갖고 용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비판적으로 그린다.하지만 칠링워드가 용서하지 않고 설령 그가 용서할 마음을 갖지 못한다 해도 그것이 죄가 될 수는 없다. 살인자와 성폭행 범, 불륜을 저지른 이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헤스터와 목사는 하나님이라는 실체가 없는 것에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칠링워드에게 용서를 구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만 용서를 구한다. 이것은 마치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이 자신이 용서하지 않아도 하나님께 용서를 받으면 죄가 사해진다는 살인범의 논리이다. 이는 기독교적인 생각을 가진 이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주홍글씨가 쓰인 때는 기독교적인 사상이 널리 퍼진 때였고 그들은 고해성사를 통해서 그들의 죄를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피의자가 있고 피해자가 있는 상황에서 용서를 제 3자인 실체 없는 존재에게 구하는 것이 정당한 일인지 의문이 든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악인으로 묘사된 칠링워드는 결국 자신의 재산을 펄과 헤스터에게 남기고 죽음을 맞는다. 아내가 바람이 나서 아이를 가지고 그 피해와 상처로 인해 파탄난 정신, 그리고 죽으면서 바람으로 인해 태어난 아이와 헤스터에게 재산까지 남기는 이 사람을 그 누가 감히 악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유리동물원을 통해 본 4가지 허상인간이란 꿈을 좇는 존재들이다. 꿈이 없는 인생은 죽은 인생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 꿈이 허황되어 간다면 우리는 그것을 더 이상 꿈이라 하지 않고, 허상 혹은 환상이라고 말한다. 유리 동물원에서는 극의 이름부터가 허상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 극에 등장하는 로라, 아만다, 톰, 짐 오코너라는 주요 인물들은 각각 자신들의 유리동물원, 즉 허상을 가지고 있다.우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대표적인 인물인 로라는 작은 유리 인형들로 동물원을 만든다. 유리로 만들어 손대면 깨질 것 같이 연약한 인형들로 꾸며진 동물원은 로라가 만든 세계이자 로라 그 자신을 상징하기도 한다. 특히 유니콘 인형은 로라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보통 말들과는 다르게 뿔이 있는 특이한 말인 유니콘은 로라와 닮은 점이 많다. 예를 들어, 로라는 짐 오코너로부터 푸른 장미라는 별칭을 얻었는데, 일반적인 장미는 붉은 색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푸른 장미는 독특함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소설에서 로라를 묘사할 때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녔다고도 하고, 짐 오코너 역시 그녀에게 남들과는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 로라는 남들과 달리 절름발이인데, 이 사실이 그녀를 자신이 만든 유리 동물원에 갇히게 한 요인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스스로를 남들과 분리시킨 그녀는 타고 난 소심함과 수줍음으로 점점 고립되어 결국엔 유리 동물원이라는 자신이 만든 세계에 몰두하게 된다. 연약하고 자기 의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형들의 세계, 특히 그 안에 뿔을 단 유니콘에 자신을 투영하면서 허구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 다음으로는 아만다 역시 허상에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만다는 무책임한 아버지와는 다르게 두 자식들을 책임지고 보살피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아버지 없이 아이들을 키우며 가난한 삶을 사는 자신의 인생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꾸만 과거를 돌아보는 인물이다. 처음 장면에서부터 그녀는 자신을 찾아왔던 열일곱 명의 신사에 대한 회상을 한다. 과거의 아름답고, 인기도 많았던 자신의 모습과 그리고 부자로 살 수 있었던 아까운 기회들을 계속해서 추억하며 실상 과거의 허상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과거에 사로잡혀 산다는 것은 현재에 대한 불만족, 혹은 과거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후회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아이들의 아버지와 결혼한 것에 대한 후회가 그녀를 자꾸 과거로 이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녀는 로라에게 소개해줄 신사를 찾으면서 꼭 술을 마시지 않는 남자를 원한다고 말한다. 그녀의 남편이 술을 많이 마셨기 때문이다. 자신의 딸만은 술 먹는 남자를 만나게 하지 않겠다는 말에서 그녀가 자신의 결혼을 실수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딸만은 그 실수를 저지르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재에 대한 불만족과 자신의 선택에 대한 후회가 계속 그녀를 과거의 허상에 묶여 살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아들인 톰 역시 자신이 속한 집, 가족, 직장에 살고 있지 않고 다른 것을 좇고 있는 존재이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고, 그 역시도 세계를 유랑하며 살고 싶은 허상에 사로잡혀 산다. 그래서 그는 항상 그가 사는 현실에서 늘 다른 세계를 꿈꾼다. 그리고 결국 가족들을 버리고 세계를 유랑하고 다니게 된다. 이 극의 인물 들 중 유일하게 자신이 좇던 허상을 실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짐 오코너는 이들 윙필드 가족과는 다르게 가장 현실 속에 사는 인물처럼 보인다. 실제로 재주가 능하기도 하고 호감형에 운동도 잘하고 말도 잘해서 학창시절에는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역시 톰과 다를 것 없는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됐고, 이러한 현실 속에서 더 큰일을 하겠다고 야간대학을 다니게 된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가 경제 공황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지식, 돈, 권력에 대한 희망 속에 사는 그의 꿈 역시도 허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심청전은 마담뺑덕에 어떻게 적용되었는가?얼굴에 탐욕이 가득한 못된 아줌마. 심청전에 등장하는 뺑덕 어멈에 대한 인상은 이게 다였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심청전을 읽으며 뺑덕어멈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이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심청전의 주인공은 ‘심청’이고 뺑덕어멈은 단지 심청의 착한 성심을 돋보이게 할 악역일 뿐이다. 하지만 심청전에서 철저히 주변인이던 뺑덕어멈에게 ‘마담 뺑덕’이라는 그럴싸한 타이틀을 붙여 이야기의 중심으로 끌고 들어온 영화가 나왔다. 심청전에서는 심청이 주인공인 것처럼, 마담 뺑덕에서는 뺑덕이 주인공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고전설화들은 자주 영화화 되거나 다시 소설화되어왔다. 예를 들어 황석영의 바리데기, 공포영화 장화 홍련, 마담 뺑덕처럼 주변 캐릭터를 주인공화 한 방자전 등 익숙한 플롯에 새로운 이야기와 구성을 더하는 작품들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만했다. 하지만 자칫 원작에 얽매여 본이야기를 제대로 풀지 못하거나 혹은 플롯을 따왔음에도 새로운 이야기에 잘 녹아들지 못해서 그 플롯이 이야기에 억지로 욱여넣어진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마담 뺑덕은 이제까지 시도해오지 않았던 뺑덕이라는 인물을 재조명하는 신선한 소재, 스타배우 정우성과 주목받는 신인배우 이 솜을 기용해 사람들의 기대를 받았지만 좋은 평을 받지는 못했다. 시도는 좋았으나 개연성과 끝마무리가 부실했던 탓이다. 좋은 소재였지만 소재 활용을 잘 하지 못하고 사실상 이야기에 심청전이라는 플롯이 꼭 필요했을까 라는 의문도 들게 했다.그래도 마담 뺑덕과 원래의 심청전의 플롯이 다시 영화에 재창조되고 변했는지는 충분히 비교분석 할 가치가 있다. 우선 캐릭터 설정을 비교하자면, 학규는 심청전에서와는 다르게 상당히 능력이 있는 인물로 나온다. 문학 교수일 뿐만 아니라 후에 도박과 술에 빠지기는 하지만 그 때에도 베스트셀러를 집필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심청전에서 심봉사는 그저 어미없이 자라는 심청이를 다섯 살까지 젖동냥으로 키우는 일밖에 하지 못한다. 다섯이 넘은 심청이는 이미 눈이 먼 아버지를 위해 동냥을 다니기 시작한다. 게다가 심봉사는 공양미 삼백석을 얻을 능력도 없으면서 덜컥 약속만 해버리고 뒤처리는 심청이가 하는 등 무능한 아버지로 그려진다. 그래도 심봉사가 뺑덕어멈에게 빠져 재산을 탕진하는 등 유혹에 쉽사리 넘어가는 면모는 마담뺑덕의 학규에게서도 찾을 수 있으므로 어느 정도의 성격적 부분을 따 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다음 인물인 덕이는 뺑덕이라는 이름 대신 덕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다. 뺑덕의 덕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마담 뺑덕의 덕이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던 뺑덕어멈과는 다른 인물이다. 극의 초반에서 덕이는 그냥 평범하고 순수한 시골처녀일 뿐이다. 그렇게 순수한 인물을 복수의 화신으로 변화시킨 것은 심학규이다. 심청전에서 뺑덕어멈이 평면적 인물, 즉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악인인 것에 반해 마담 뺑덕에서는 순수한 인물이 악인이 되는 입체적인 인물로 그리면서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사랑과 복수라는 테마를 설정하게 되는 것이다. 즉 뺑덕어멈이라는 악인으로 알려진 인물이 과연 처음부터 악인이었을까? 라는 생각에서 출발해 그렇다면 악인이 아니었던 뺑덕의 이야기와 어째서 악인이 되었을까 라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게 되고 그 결과 주변인이던 뺑덕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끌어와 새로운 시도를 하게 한 것이다. 이것이 이 영화와 심청전의 주요한 차이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초반의 순수하던 덕이는 다른 시골 처녀들과 다르게 남다른 욕망을 가슴속에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서울에서 온 잘생긴 교수님을 통해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욕망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심청전의 뺑덕어멈과의 성격적인 공통점 역시 존재한다는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심청전에서도 그러했듯이 유혹과 욕망에 휘둘리는 인물로 묘사되는 심봉사, 뺑덕어멈의 성격적 특성을 마담뺑덕의 학규와 덕이에게 끌고 들어와 욕망이라는 작품의 또 다른 주제를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청이는 개인적으로 마담 뺑덕에서 가장 아쉬운 인물이다. 원작에서는 주인공이기 때문에 심청전이라는 플롯을 이끄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음에도 마담 뺑덕에서는 하는 역할이 별로 없다. 마담 뺑덕에서의 심청은 우선 원작의 심청과는 다르게 효성이 지극하진 않다. 심성이 고운 편도 아니다. 후에 덕이에게 잔인한 복수를 하기도 한다. 심청전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효였던 만큼 꽤 반전이 있는 인물인 것 같아 보이지만 그냥 효심이 덜한 인물이라는 것이 다여서 학규나 덕이만큼 매력이 있게 그려지진 않는다. 그냥 심청전이라는 플롯을 따왔으니 존재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심청이라는 인물을 설정을 좀 더 해서 잘 이용했다면 심청전이라는 플롯을 영화에 더 자연스럽게 녹여냈을 수 있었을 것 같기도 하다.다음으로 줄거리에 대한 비교를 할 수 있는데, 우선 큰 줄거리에서는 공통적이다. 학규는 덕이와 사랑에 빠지고 후에 복수를 하러 온 덕이에 의해 서서히 파멸로 이르게 된다. 심청전에서도 심청이가 떠난 후 공양미에 눈이 멀어 접근한 뺑덕어멈에 의해 심봉사는 점점 타락하게 된다. 그리고 심봉사가 청이가 태어나기도 이전부터 장남이었던 것과는 조금 차이점이 있지만 학규 역시 눈이 멀게 된다. 학규는 덕이를 만나고 그 후에도 방탕한 생활을 하는 등 욕망에 눈이 먼 생활을 하다가 그것 때문에 정말로 눈이 멀어 버린다. 욕망에 눈이 멀어 장님이 되어 사리분간을 하지 못한다. 게다가 한 때 사랑을 나누었던 덕이마저 알아보지 못한다. 아무리 눈이 멀었다지만 목소리마저 바뀐 것은 아닌데 너무 쉽게 속아 넘어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실 이 부분에서 개연성이 많이 떨어졌다. 욕망에 눈이 먼 학규가 신체적으로도 장님이 된다는 것을 상징하려 한 것 같기는 하나, 모호한 이유로 눈이 먼다는 설정부터 매끄러워 보이지 않았다. 심청전이라는 플롯을 가져왔기 때문에 학규의 눈을 억지로 멀게 한 것처럼 보였다. 영화에서는 물론 현실에선 일어날 수 없는 이야기를 다루는 경우가 많지만, 개연성은 또 다른 문제다. 예를 들어, 영화 해리포터에서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작가가 치밀하게 구성한 설정 속에서 우리는 일종의 약속을 하고 그 약속 내에서 작가가 개연성 있는 이야기를 그리면 그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담뺑덕에서는 해리포터보다도 전기성이 훨씬 덜한 소재를 가지고 더 치밀한 이야기를 그려내진 못한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공통점은 마담 뺑덕에서의 청이와 심청전의 청이가 아버지의 눈을 띄우는데 자신의 몸을 판다는 것이다. 마담 뺑덕에서의 청이는 덕이의 계략으로 도박에 빠진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몸을 팔게 된다. 이는 심청전에서 심봉사가 공양미 삼백석을 대신에 인당수에 몸을 던진 것과 비슷하다. 또 몸을 팔다가 운 좋게 부자인 일본인 할아버지를 잡은 청이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덕이의 눈을 아버지에게 이식해서 결국 눈을 뜨게 만들어준다. 이는 심청전에서 심청이 왕비가 되어 아버지와 재회한 뒤, 그 기쁨으로 심봉사가 기적적으로 눈을 떴다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하지만 청이의 경우는 더 현실적이고 잔인하다. 여왕이 아니라 부자 할아버지의 애인이고 기쁨으로 눈을 뜨게 한 것이 아니라 복수를 하기 위해 덕이의 눈을 학규에게 이식하는 등 심청전의 착한 효녀심청과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도 역시 창녀가 된 청이가 갑자기 부자 할아버지를 만나서 덕이와의 위치가 전복된다는 이야기 역시 개연성이 떨어져보였다.그리고 이야기 내에서는 공통점 외에 차이점도 존재했다. 우선 캐릭터에 있어서 마담뺑덕에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원작에서는 존재만이 언급됐던 심봉사의 부인, 그리고 뺑덕의 엄마이다. 이 인물들은 사실 스토리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기보다는 각각 학규의 소중한 사람, 덕이의 소중한 사람이다. 하지만 덕이의 어머니는 학규 때문에 저지른 실수로 불이 나서 죽고, 학규의 부인도 자살하고 만다. 둘 다 소중한 사람들을 잃고 학규는 내리막으로 가게 되고 덕이에게는 복수의 시작을 하게되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스토리 면에서 원작에는 뺑덕어멈, 심봉사, 청이가 한 자리에 모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마담뺑덕 내에서는 셋이 모임으로 하여 후반부의 극이 절정으로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또한 원작과 다르게 덕이는 끝까지 나쁘지는 못했다 복수를 실컷 하면서도, 결국 학규의 곁을 떠나지 못한다. 복수로 자신과 학규를 다 불태우고 나니 사랑과 연민이라는 잔재가 남은 듯하다. 원작에서의 뺑덕어멈은 심봉사에게 뽑아낼 수 있는 것을 다 취한 후에는 또 다른 봉사를 만나 홀랑 도망가 버리고 심봉사는 버려지게 된다. 확실히 고전 소설에서의 평면적인 인물이던 뺑덕어멈과는 다르게 덕이는 사랑, 복수, 연민 등의 감정으로 다양하게 변화하는 입체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이렇게 학규의 곁에 머물던 덕이에게 청이가 복수를 하러 돌아온다. 원작에서는 효녀 심청은 누군가에게 원한을 품고 복수를 할 위인도 되지 못한다. 하지만 마담 뺑덕의 잔인하게 복수를 하게되고 덕이는 도리어 눈을 잃게 된다. 그리고 덕이와 학규는 또 다시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는 결말을 남기고 마담뺑덕은 끝이 난다. 원작과는 판이하게 다른 결말이다. 그리고 역시 가장 큰 차이점은 주제에서 드러나는데, 우선 마담뺑덕에서는 인간이 욕망에 얼마나 쉽게 빠질 수 있는 나약한 존재인지, 그 욕망으로 얼마나 인간이 타락해갈 수 있는지, 인간의 본성은 과연 선한 것인지 아니면 악한 것인가, 악인은 만들어 지는 것인지 등등 다양한 물음들을 던질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심청전은 단지 효녀심청의 효심을 본 받자는 유교적인 이념만이 주제의 다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