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를 보고.대자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나라 캐나다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국토를 가졌지만, 놀랍게도 우리나라보다 인구가 적다. 특히 광활한 대지를 가진 캐나다에서 캐나다의 영혼을 품은 로키산맥이 있는 곳은 바로 캐나다 서부이다.모든 산악인들의 꿈인 이 로키산맥을 가기 위해선 밴프라는 곳에서 첫 관문을 통과해야 된다. 북미까지 넓게 뻗은 로키산맥은 캐나다에서는 ‘캐나디언 로키산맥’이라고 부른다. 백령도에서 마라도까지가 550km인데, 이 캐나디언 로키산맥은 1,500km나 되니 그 규모를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세계의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듯, 이 캐나디언 로키산맥의 모든 길은 밴프에서 시작된다.캐나다 최초의 국립공원인 밴프는 인구 8천여 명의 작은 마을이다. 로키산맥을 보기위해 한 해 500만 명의 관광객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밴프에서는 로키가 자랑하는 모든 것들을 볼 수가 있다. 특히 영화촬영지로 알려진 곳도 많다. 보우폭포에서 마릴린 멀로 주연 영화인 ‘돌아오지 않는 강’을 찍었다. 여기서 알려진 재미있는 일화로는 마릴린 멀로가 이 보우폭포에서 영화를 찍다가 돌에 걸려 넘어져서 발을 다치는 바람에 근처 페어먼트 호텔에서 약 3개월 동안 머물었다고 한다. 그 바람에 촬영진들은 그녀가 회복될 때까지 산과 같은 다른 것들을 찍어야 했다.가벼운 로키트래킹을 즐기기 위해서는 이 ‘존스톤 협곡’을 따라가는 것이 좋다. 이 협곡은 마지막 빙하기 이후 8천 년에 걸쳐 형성되었다. 빙하가 8천 년 전부터 흘러내리면서 어떤 곳은 100m까지 파이는 계곡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 존스톤 협곡을 걷다보면 곰들의 주식인 버펄로 딸기가 있다. 그리고 이 협곡의 백미는 폭포와의 만남이다. 모두 7개의 폭포를 만날 수 있는데, 그 소리가 전방 4km까지 들린다고 한다.그 뒤 국립공원에 위치한 자연유황온천인 ‘어퍼 핫 스프링스’라는 곳으로 건너간다. 이곳에서는 트래킹의 피로를 풀어주는 휴식장소이며, 1984년에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사실 로키의 중심이라는 밴프가 유명해 진 것은 바로 이 온천 때문이라고도 한다.세계 10대 절경이라는 레이크 루이스 호수, 거대한 빙하의 침식작용이 빗어낸 절경이라고도 한다. 계절에 따라, 시간에 따라 수십 가지의 빛으로 변한다는 레이크 루이스 호수의 원래 이름은 레이크 에메랄드 이였다. 하지만 19세기 말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넷째 딸 루이스공주가 다녀간 후, 레이크 루이스 호수로 개명하게 되었다. 그리고 호수 근처에는 샤토 레이크 루이스 호텔이 있다. 이 호텔의 가장 큰 특징은 객실 모두 ‘레이크 루이스 호수’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누구도 호수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또한 이곳이 유명해진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스위스인 등반 가이드 때문이다. 스위스에서 로키로 온 사람들은 이곳의 높은 산들을 등반하며 찍은 사진들을 고향으로 보냈고, 그것을 본 사람들이 이곳에 관심을 갖고 이곳으로 여행을 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스위스 가이드를 따라서 CPR(캐나다 태평양 철도회사)의 기차를 타고 빙하나 산을 오르기도 하고 레이크 루이스의 여러 곳을 여행하기도 했다.
MBC 를 보고.독일편은 독일의 축제를 다루다 보니 이전의 영상들보다 훨씬 더 재미있었다. 독일의 ‘아우토반(독일의 고속도로)’은 15000km를 달하는 길이로 독일 대부분 지방을 아우른다. 이 아우토반을 힘차게 달리다보면 독일의 주요 농업지인‘바이에른 주’가 나온다. 이 바이에른 주는 당시 화려했던 유물과 전통들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고, 전통적으로 농축 산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많은 편이다. 바로 이 곳, 바이에른 주의 뮌헨에서 세계 3대 축제 중 하나인 ‘옥토버페스트’가 열린다.먼저 축제가 열리는 이 뮌헨은 독일 남부의 중심도시이며 베를린과 함부르크에 이어 독일의 제 3 도시이다. 뮌헨의 인구는 120만 명이며 연합국 독일 남부의 수도이기도 하다. 뮌헨에는 축제 말고도 볼거리들이 많다. 특히 뮌헨시청에는 고딕양식의 인형시계탑이 있다. 매일 오전 11시와 오후 5시에 인형들이 나와 10분간 춤을 추는데, 이 춤을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있다. 그리고 슈바빙은 뮌헨의 매우 흥미로운 곳 중 하나로 19,20세기 예술가들이 많이 살았고, 그들이 오가던 카페들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밤 문화로 유명한 도시이기도 하다.그리고 뮌헨은 세계에서 제일가는 술의 도시, 맥주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독일인들에게 맥주는 일상이다. 일상 풍경에 항상 맥주가 있고 식탁의례의 첫 순서도 맥주요, 열광과 흥분의 청량제도 맥주요, 기쁨과 슬픔 희로애락의 갈피에도 언제나 맥주가 있다. 독일인들의 맥주사랑은 이 ‘옥토버페스트’축제로 절정을 맞는다. 이 나라에서는 다른 나라에서 빵이 식량이듯 맥주도 하나의 식량이며 보편적인 음식인 것이다. 축제에서는 각 지역별, 회사별 맥주들이 이용되는데, 여기서 한 맥주공장에서는 축제에 사용될 맥주는 오로지 한 가지 맥주, 즉 ‘축제 맥주’라 불리는 맥주를 만들어 제공한다. 이 맥주에는 다른 맥주와 달리 13.5% 탄산과 16% 알콜이 포함되어 있어 따로 3개월 전부터 미리 만들어 진다. 이 맥주는 만든 뒤 먹을 수 있을 때까지 3개월 정도가 걸리기 때문이다. 또한 이 옥토버페스트가 열리기 위해 1년간의 준비기간이 필요하다. 세계 3대 축제인 만큼 약 1500개의 맥주 회사들이 참가신청서를 받아내고 그 중 700개의 회사를 걸러내며 축제의 질을 높이고, 매년 새로운 포스터와 기념품을 만들어 관광객을 끌어모은다.이렇게 모든 준비가 끝이 나면 180년 전통을 가진 뮌헨의 맥주 축제 ‘옥토버페스트’가 매년 9월 셋째 주 토요일부터 10월 첫째 주 일요일까지 16일간 열리게 된다. 매년 6~7백만 명의 관람객들이 찾아온다. 매년 관람객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여서 미화관리가 어려울 것만도 한데, 그들의 축제는 준비가 철저한 만큼 독일 환경청으로부터 깨끗한 축제상을 받았다. 그들의 맥주축제 속에는 각 종 큰 천막들이 세워져 그 속을 가득 채운 인파들이 있다. 여기서 정신없이 서빙을 하고 있는 전통복장을 입은 종업원들의 신속 정확한 배달은 혀를 내두른다. 여기에 맥주에 취해, 밴드 음악에 취해 흥에 겨운 인파들까지 정신없지만 축제 분위기만큼은 최고조에 이른다. 남녀요소 상관없이 전 세계인들은 어깨동무를 하며 춤을 추고 우연히 서로 마음이 맞아 같이 앉아서 맥주를 마시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이 축제기간 동안 소비되는 맥주는 400만 잔 이상이나 되고, 닭은 65만 마리, 소시지 110만 개가 소비된다고 한다.
EBS 특별다큐 를 보고.유럽 서부에 자리 잡고 있던 프랑스는 300년 전 루이 14세의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 시기를 통제했고 나폴레옹의 군사력을 통해 전 유럽대륙을 지배했다. 19세기 그들이 지배한 식민지는 영국 다음으로 많았다. 바로 이곳에서 근대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계몽운동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은 어떤 힘으로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서 자신들만의 모습을 그려왔던 것일까?프랑스 문서보관소에는 루이 16세의 일기장이 있다. 그의 일기장 중 ‘1789년 7월 14일, 화요일, 별일 없음.’이라고 적혀져 있던 이 평범해 보이던 그 날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날이었다. 이 날은 무장한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공격했다. 감옥에는 겨우 7명이 수감되어 있었지만 시민들은 그들을 위해 하루 종일 투쟁했다. 이 감옥은 프랑스 왕권 독재의 상징이었고, 이를 공격한다는 것은 독재 통치에 맞선다는 의미였다. 이는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었다. 결국 다음날 루이 16세가 눈을 떴을 땐 권력이 왕권에서 국민의회로 넘어갔다. 국민의회에서는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한 후 20일 만에 모든 봉건 특권을 폐지했다. 이는 120년 전 국왕 루이 14세가 세운 절대 왕정의 사형선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1661년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가 왕위에 오르며, 반세기 동안 권력을 독점했고, 나라의 전성기를 만들었다. 특히 베르사유 궁전은 루이 14세 때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루이 14세는 “짐이 바로 국가다”라는 말을 내뱉는데, 이는 3가지 뜻을 담고 있다. 왕이 나라를 대표하고, 왕이 나라를 통치하며, 왕이 곧 국가 정신의 구체적 산물이란 것이다. 프랑스는 당시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 상당한 우위에 있었고, 군주독재를 바탕으로 한 강력한 국가 체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농촌경제를 기반으로 한 경제발전을 가져올 수 있었다. 또한 동시에 수많은 요새와 성벽을 쌓아서 전쟁을 일으키기에 좋은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유럽의 통치를 위해 루이 14세는 집권 54년 동안 무려 31년이문제가 됐다. 그 당시 프랑스 사회는 성직자, 귀족, 평민 이 3가지 신분으로 나뉘어 있었고, 그 신분들 간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왜냐하면 성직자와 귀족은 우월한 조건으로 세금을 내지 않고 특권을 누릴 수 있었지만, 제 3신분은 단지 일할 의무만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세금까지 납부해야했다. 이렇듯 제 1, 2신분과 제 3신분 간의 모순은 분명했다. 루이 14세 시대는 전쟁으로 인해 세금이 끊임없이 올랐고, 이는 신분간의 모순을 더욱 악화시켰으며, 점차 군주제의 단점을 부각시켰다. 프랑스 한 학자의 말에 의하면 루이 14세의 통치 아래 프랑스는 나라의 불합리한 행동을 막을 수 있는 그 어떤 기구 및 제도도 없었다. 그러므로 루이 14세의 집권 말기에 왕권의 쇠태뿐만 아니라 절대 권력을 둘러싼 전반적인 시스템도 함께 쇠태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는 군주독재도 군주 본인과 함께 지쳐있었던 것이다.1774년, 루이 16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의 성격은 온화하고, 내성적이며, 우유부단했다. 그가 왕위에 오른 후 14년이 되던 해 프랑스엔 자연재해가 찾아왔다. 농업재해가 이어지고, 1789년은 18세기 중 빵 값이 제일 비싼 한해로 기록됐다. 시민들은 겨우 굶주림을 달랠 수 있었고, 농민들은 늘어나는 세금을 감당해야 됬다. 이렇듯 막대한 세금이 시민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전쟁은 계속됬다. 루이 16세는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권신분의 납세정책을 시도하게 되는데, 그 결과 많은 불만을 불러왔다. 이로 인해 국왕은 전 국민의 적이 된다.1789년 5월 5일, 루이 16세는 경제위기를 해결하고자 175년간 중단했던 3부 회의를 소집한다. 이는 1306년 필리프 4세에 의해 시작된 신분제 의회로 이후 성직자, 귀족, 평민의 대표들로 구성된 국민의회로 정형화 된다. 그러나 3개 신분 대표들의 요구는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이에 분노한 대표들은 국민의회를 설립했고, 헌법제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강제로 국민의회를 해체하고, 대규모의 군대를 파리로 집결행됐다. 국민은 국왕을 내몰았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국가발전사항을 설계하기 시작한다.프랑스 문서보관소에는 200년 전 프랑스 혁명 당시의 인권선언문이 보관되어 있다. 이 문서는 역사학자들에게 새로운 제도의 탄생 증명서로 불러오고 있다. 이 인권선언문의 첫 단락에는 “‘국민의회를 구성한 국민의 대표자들은 인권에 대한 무지와 소홀, 또는 경멸이 공공의 재난과 정부 부패의 유일한 원인’이라고 믿는다.”라고 시작된다. 1789년 8월 26일,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인권선언문)이 국민의회에서 정식으로 채택된다. 17조로 된 선언문은 누구나 태어나서부터 평등하며, 재산권은 신성한 것으로 절대 침범할 수 없다고 적혀져 있다. 이 인권선언은 구시대의 왕권과 특권은 근본적으로 부정했으며, 인권과 법질서를 새로운 사회질서의 기반으로 설립했다. 또한 자유, 평등, 박애 3대 사상으로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그렇게 인권선언은 프랑스의 문화유산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루이 14세 당시 국왕의 독재 권력이 강했을 때, 민주와 평등의 사상이 싹트고 있었다. 그리고 예술의 도시 파리는 이 루이 14세 때 탄생했다. 예술에 대한 그의 사랑, 관심, 투자는 이 도시에 영혼으로 남겨졌다. 당시 무용학원, 음악학원, 희극원, 건축학원, 과학학원 등이 이 루이 14세가 직접 설립한 것이다. 이 시기 프랑스는 모든 예술 분야에서 고전주의 최고봉에 서있었으며, 막대한 문화영향력을 과시했다. 유럽의 궁정과 귀족들은 불어를 쓴다는 걸 자랑으로 여겼고, 모든 외교 협약을 불어로 작성했다. 당시 군주독재정권체제와 문화예술 발전은 전혀 대립이 없었으며, 서로 잘 조화되었다.또한 이 시기에는 프랑스의 살롱문화가 발전되어왔다. 커피숍은 대혁명시기 사람들의 모임장소가 되는 동시에 시민들이 자신의 소견을 드러내는 자리가 되었고, 프랑스의 계몽사상은 커피숍에서 펼쳐지는 강연과 함께 전파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낡은 세계를 변화시키기를 갈망하고 있었다.종교의 반문명주의를 비판해온 볼“나의 심장은 여기 있으나, 나의 정신은 곳곳에 있다.”라는 명언을 남긴 사람이다. 그는 뉴턴이야 말로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는 “우리가 존중하고 받들어야 할 사람은 폭력으로 사람을 노예화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의 영향으로 우리의 두뇌를 지배하는 사람, 우주를 왜곡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주를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계몽사상은 장기적인 국가발전의 기본 바탕이었다. 특히 18세기말, 유럽은 중대한 역할을 하게 된다. 곧 계몽사상이 지식과 천부인권사상을 전파시켰기에 국가, 권력, 종교생활에 대한 국민들의 생각이 변해갔던 것이다. 이처럼 계몽사상가들은 중세 유럽의 신학 자물쇠를 부수고 과학과 이성의 문을 열었다. 그 중 가장 근본적인 것은 마르크스의 “자기가 사람임을 깨닫는 것이다.”이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 대혁명의 내재적 동기가 된다.볼테르가 낡은 제도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였다면 그와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난 루소는 상상 속에 새로운 제도를 그렸다. 루소사상의 핵심내용은 사회계약 사상이다. 그는 국민은 혁명의 권리가 있고 새로운 사회계약을 창조할 의무가 있으며, 이런 사회계약은 자본 혹은 국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공동의지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했다. 이로써 루소는 혁명의 의지가 절대 권력을 가진 국왕과 종교의 의지를 초월한다고 주장함으로서 국민들에게 혁명의 권리를 부여하였다.1789년 볼테르와 루소가 죽은 지 11년 만에 프랑스 대혁명이 폭발한다. 그리고 1792년 9월 22일, 프랑스 제 1공화국이 탄생하게 된다. 군주도 군주제화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바로 루이 16세가 혁명광장에서 참수된 것이다. 혁명에 대한 프랑스국민의 열정은 불이 붙었으나. 혁명의 불씨가 옮길까 두려워한 다른 군주국가들이 반프랑스 동맹을 선포하고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결국 일부 작은 사건들이 극단화를 조장했고, 이로 인해 프랑스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전쟁을 하게 된다. 이 전쟁은 혁명을 극단으로 내몰았고, 당시 형세는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는 자들은 모두 단두대에 올라야했다. 당시 전국적으로 4만 명의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그들은 4년 전 선포했던 인권선언의 정의, 타인을 해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잊고 있는 듯 했다. 이는 곧 혁명의 행동은 혁명의 이상을 등지고 달리는 일이였다.루이 16세가 사형 후 12년 만에 프랑스는 또 다른 황제를 맞이한다. 바로 나폴레옹 황제이다. 그는 국민들이 직접 선발한 황제로 프랑스 제 1제국의 황제가 된다. 이렇게 프랑스인이 나폴레옹 정부를 옹호한 이유는 나폴레옹이 사회를 통제하는 능력 있는 대표자로 강력한 국가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로써 나폴레옹은 유럽을 통치할 유일한 희망으로 떠오르게 된다. 또한 그가 프랑스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주고 전 유럽을 정복할 것이라고 믿었다. 10여년간의 혁명, 공포와 혼란을 겪은 사람들은 사회 안정을 간정히 원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인에게 질서와 권위의 회복이라는 희망을 주었다.그보다 중요한 건 제위에 등극한 나폴레옹이 민법전을 선포하고 법에 1789년 혁명원칙에 충성할 것을 맹세한 사실이다. 이는 곧 인권, 자유, 평등을 존중한다는 것이었다. 1804년에 통과된 프랑스의 민법전의 초안 작성은 나폴레옹이 직접 명령한 것이다. 훗날 사람들은 이 민법전을 나폴레옹 법전이라고 불렀다. 200년이 지난 오늘 이 법전은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주었다. 나폴레옹이 정복한 곳에 이 사상을 선정했기 때문이다. 1811년 반프랑스동맹의 연이은 실패로 유럽은 프랑스의 수중에 들어온다.나폴레옹은 이탈리아 국왕, 라인연방의 보호자, 스위스 연방의 중재자 등의 지위를 겸임했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스페인, 포르투갈, 나폴리, 네덜란드, 베스트팔렌 국왕이 됬다. 폴란드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도 패했다. 이로써 나폴레옹은 루이 14세 이후 프랑스를 전성기로 이끌었다. 또한 루이 14세와 다른 점이라면 그는 전 유럽에 프랑스 대혁명 정신을 전파한 것이다. 이로써 나폴레옹은 유럽 정복 후 직접 혹은 간접적.
KBS 스페셜 를 보고.역대 최고의 밴드라고 떠오르는 ‘비틀즈’의 고향은 영국 리버풀이다. 산업혁명의 시대 교역의 중심지였던 리버풀은 한때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멋진 도시였으나, 산업이 기울기 시작하더니 항구가 축소되기 시작하면서 큰 배들이 사라지고 가난한 도시가 되버리고 만다. 이는 리버풀만이 아니다. 맨체스터, 버밍햄 등 산업혁명이 일어난 영국의 주요도시들이 같은 처지가 됬다. 거기다 영국 산업의 핵심인 자동차산업이 1960년대 이후 매각과 합병이 되고, 영국자동자의 마지막 등불인 MG로버가 중국에 매각되면서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결국 리버풀에는 빈 집들과 철거를 기다리는 빈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황량한 리버풀에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바로 ‘비틀즈’ 때문이다. ‘매지컬 미스터리 투어’라는 이름으로 연간 150만명의 관광객들이 비틀즈의 행적을 쫓으며, 그들의 삶을 느끼기 위해 이 리버풀로 온다. 리버풀 시내의 캐번클럽 역시 예전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며, 무대 위에는 비틀즈의 옷을 입고, 사운드를 흉내내며 비틀즈로 생활을 꾸려가는 한 밴드만이 그곳에 있다. 하지만 이 곳에서는 국적도 인종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비틀즈에 대한 열망을 그대로 표현하며 비틀즈의 음악과 문화를 그대로 느낀다. 또한 ‘캐번 비틀즈 컴퍼니’, ‘비틀즈 축제’등이 열리게 되면서 비틀즈는 사람들에게 사라지지 않은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게 된다. 그렇게 비틀즈 산업의 시작으로 리버풀은 음악의 수도, 문화의 수도라는 명칭을 얻어내는 동시에 유럽연합의 5조억원을 투자를 얻어냈다.그 다음 런던, 런던에는 사소한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웨스트엔드가 있다. 이 곳은 세계 공연의 메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뮤지컬들의 대부분이 이 웨스트엔드에서 만들어졌다. 이런 웨스트엔드에는 40여개의 상업극장이 있으며, 이 중 반 정도가 뮤지컬을 공연하는 극장이다. 이 극장들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만큼 고풍스럽기보단 낡고 허름하지만 여기서는 세계적인 공연들이 쏟아져 나온다. 특히 ‘로얄 헤이마켓 극장’은 185년의 역사를 지닌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이 극장은 영국왕실의 소유로 왕실의 보호를 받는 1등급 극장이며, 원형을 해치는 보수공사는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이런 보호법 때문에 좌석은 비좁지만, 옛날 것을 유지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그 모습이 아름답기도 하다. 또한 뮤지컬하면 브로드웨이가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원조는 이 웨스트엔드이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하나의 작품을 오랫동안 방영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오페라의 유령도 1980년대 시작한 것인데 지금까지 방영되는 뮤지컬계의 신화이다. 이외에 캣츠, 레미자라블, 미스 사이공 등 우리가 알만한 뮤지컬들은 전 세계에서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놀라운 것은 한 명의 제작자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바로 ‘카메론 메킨토시’이다. 그는 전 세계 뮤지컬 시장을 움직이는 손이며, 불황에 허덕이던 브로드웨이를 활성화시킨 장본인이다. 당시 불황으로 허덕이던 브로드웨이는 새로운 작품이 없었던 반면, 영국은 10년 동안 새 작품들을 제작해 나왔다. 여기서 ‘미스 사이공’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 뮤지컬은 여러모로 화제가 되었고, 뮤지컬 시장에서 작품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또한 웨스트엔드에서는 새롭게 집약된 뮤지컬들이 선보여지기 시작한다. 바로 메튜본의 ‘백조의 호수’인데, 백조의 춤이라는 고전적인 틀에 백조의 야성적이라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작품을 완성하게 된다. 추가로 일반적인 발레의 토슈즈를 벗어 던지고, 맨발로 무대를 장악한 점에서 매튜본의 창의성과 파격적인 뮤지컬에 감탄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웨스트엔드의 뮤지컬들은 단순히 뮤지컬 문화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고, 경제적인 영향도 창출해 낸다. 바로 늦게까지 방영하는 뮤지컬에 극장주변에 상업중인 인력거꾼이나 레스토랑들이 큰 수익을 내고 있기 떄문이다. 그로 인해 런던 국민의 5명 중 1명 이상이 문화와 관련된 일을 한다. 지금도 런던의 문화를 즐기기 위해 전 세계 사람들이 이 곳을 찾는다. 그러므로 영국의 관광산업은 전성기를 맞고 있다.그리고 런던 근교 옥스퍼트시에는 해리포터의 촬영장소가 있다. 역사가 700년이 넘는 크라이스트 교회는 원래부터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요즘 사람들에겐 해리포터 촬영지로 더 유명세를 얻고 있다. 여기뿐만 아니라 영국 전역에서 해리포터와 관련성을 내세운다. 이렇게 해리포터와 같은 황금알을 낳은 문화산업이 계속해서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이는 ‘엘담 스토리텔링 클럽’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 곳은 정부에서 운영하는 이야기클럽으로 3만개가 넘는다.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상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영국인에게 이야기는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리고 런던 소호 거리는 유명한 서점이 하나 있다. 요즘 인터넷서점이 활발하지만, 런던의 서점은 불황을 모르고 성업중에 있다.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은 소설책일 만큼 영국은 이야기의 나라이다.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등 세계를 휩쓴 소설책들이 바로 이 영국에서 만들어진 책들이다. 그런데 최근 새로운 강자가 나타났는데 바로 섀도맨서이다. G.P. 테일러 작가가 살고 있는 스카보로라는 어촌마을은 섀도맨서의 배경이 된 마을이다. 테일러 작가는 여기서 세인트 메리 교회의 목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처음에 작가가 되려고 시작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재미로 시작했다. 이를 통해 영국인들의 대단한 점은 성공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일단 한 번 해본다는 것이다. 또한 영국인들은 어디에서나 이야기를 흡수하고 항상 모여서 이야기를 꾸며내고 이를 들려준다. 이렇게 테일러 작가는 이야기를 흡수하고, 자신의 상상력을 더해 섀도맨서를 만들어 냈다. 그가 이렇게 까지 성공한 것은 이 섀도맨서라는 작품에 문화와 역사, 영국의 삶을 잘 반영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