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사 2015 2학기 중간고사.*카이로 선언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3년 11월 27일 연합국측의 루즈벨트 대통령, 처칠 영국수상, 장개석 중국총통이 이집트 카이로에서 회담을 갖고 대일본전 기본목적에 관해 합의한 결과로 채택한 공동 코뮤니케이며, 발표는 12월 1일에 했다. 이 선언은 연합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영토방침을 처음으로 공식성명한 것으로 한국의 독립이 국제적인 보장을 받았으며,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촉진하기 위해 계속 싸울 것을 천명했으며, 이 선언은 45년 포츠담선언에서 조항이 재 확인되었다.*포츠담선언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7월 26일, 독일의 베를린 교외에 있는 포츠담에서 열린 미국, 영국, 중국, 소련 4대국 수뇌회담의 결과 발표된 선언으로 일본에 항복을 권고하고 전후의 대일처리방침을 밝힌 전문 13개조의 선언으로 주요내용으로는 군국주의 배제, 카이로선언 실행, 일본군 무장해제, 일본의 무조건 항복 등을 규정하였으며, 카이로 선언에서 결정한 한국의 독립은 여기서 다시 한 번 확인 되었다.*가쓰라·태프트밀약1905년 7월 일본과 미국이 필리핀과 대한제국에 대한 서로의 지배를 인정한 협약으로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들의 승인아래 한반도의 식민화를 노골적으로 추진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모스크바3상회의1945년 12월,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 영국, 소련 3국의 외상회의로, 한국문제를 비롯한 이후 세계 여러 지역의 문제점에 대하여 협의한 회의로 여기서 한국에 대한 미국의 신탁통치가 전해져 한국에서 반탁과 찬탁운동으로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이는 결국 이념계열에 따라 반탁운동과 찬탁운동이 동시에 전개되어 내부혼란을 야기시키는 하나의 역사적인 원인으로 작용되었다.*미소공동위원회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의 합의에 의하여 설치된 한국문제 해결을 위한 미·소 양국 대표자 회의였다. 미소공동위원회는 ‘민주주의’라는 용어와 ‘민주주의제정당’에 관한 해석을 둘러싸고 일어난 논라이 가장 큰 문제였는데 음날인 10월2일 노동자, 시민, 학생이 합세하여 경찰서를 습격하면서 발생하였다. 이에 대구지역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나, 시위는 전국각지로 퍼졌고, 이 사건으로 인해 각지의 경찰서, 파출소, 면사무소가 파괴되고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으며, 공산당은 큰 타격을 입었고 잔존하던 지방의 인민위원회도 철저히 파괴 되었다.*제주4·3봉기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대해 반대하여 일어난 무장봉기로, 미군정 초기부터 지속되어온 인민위원회 및 대중들과 경찰, 우익단체간의 갈등이 무장봉기로 폭발하며 한라산을 근거지고 유격전으로 발전되어 49년까지 계속되었다. 봉기군중들은 미군즉시철수,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즉각돌아가라, 망국단독선거 반대 등의 슬로건을 내걸었고, 진압작전으로 토벌대는 초토화작전을 전개하여 유격대와 주민들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공격, 집단학살하여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고, 결국 세력이 약회되어 49명 중반 거의 소멸되었다. 이 사건으로 제주도에서는 5.10 총선을 치르지 못했으며 또한 제주도 파병을 거부한 좌익계 군인들을 중심으로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났다.*신전술조선공산당이 1946년 7월 채택한 새로운 전술을 이르는 명칭으로 , 즉 지금까지의 미군정에 대한 태도를 전면적으로 수정한 결과 나온 전술이다. 이는 대중투쟁을 통해 미군정의 정체를 보다 직접적으로 폭로, 비판한다는 노선으로서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은 그 일환으로 전개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의 결과적으로 지방인민위원회가 대부분 파괴되고 우익세력이 우위를 차지하는 세력관계의 변화를 초래, 실패로 끝났다. 이후 조선공산당은 남로당이라는 대중정당으로 변모하고 합법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하였다.*정읍발언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 1차가 결렬되고 좌우합작운동이 전개될 무렵, 이군정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이 국내에 보도되었다. 그 후, 지방여행에 나선 이승만은 1946년 6월3일,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이며 조선공산당은 이 사건과 관계가 없다.’라고 하였으나, 공산당본부를 강제수색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군정 당국은 공산당에 대해 강경책을 펴게 되었고, 이때부터 남한에서의 공산당활동은 약화되기 시작하였다.*건국준비위원회1945년 8월 초 일본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이 때 건국준비를 위한 민족의 대표기관과 정치세력 형성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여운형이 그에 동조함으로써 협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따라 8월15일 광복절날 ‘조선건국준비위원회’라는 최초의 건국준비단체가 발족되었다. 이후, 9월6일에는 약 1천명으로 구성된 전국인민대표자회의가 서울경기여고에서 소집되었고, ‘조선인민공화국 임시조직법안’이 통과되어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발표하였고, 건준위는 9월7일 해체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건준을 반대하던 우익진영의 비난과 이승만 주석취임 거절, 또 미군정청에서 10월 10일 조선인민공화국의 승인을 거절해버리자 자연해체 되었다.*건국치안대1945년 8월 16일, 해방직후의 정치적 공백상태의 혼란을 수습하고 치안확보와 개인의 생명, 재산보호를 위해 여운형이 조직한 임시경찰기구로 지역별, 직장별 치안대를 조직하고 주요자재, 기관, 수원지보호, 교통원활화 등에 힘썼으며 9월2일 건국준비위원회에 편입되었다.*조선인민공화국1945년 9월 6일, 건준조직이 중심이 되어 수립한 해방 후 최초의 공화국으로 미국진주를 이틀앞두고 1천여명의 민중대표들이 서울 경기여고에 모여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열고 선포하였다. 이들은 일본제국주의 법률의 완전폐기, 친일협력자 및 반역자의 토지몰수, 철도·통신·금융기관의 국유화 등을 내용으로 하는 정강과 27개조 시정방침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미군정을 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미군정만이 38도선 이남에서의 유일한 정부라고 선언하고, 남한 내의 모든 정당에게 강령과 간부명단 등록을 하게 하였으며, 인민공화국도 하나의 정당으로 등록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인민공화국은 이를 거부하였고 미군정에 의해 해체되고 말았다. 이로써 미군의 직접통치를 의 정책이 단독정부수립지지로 바뀌고 좌우합작운동이 성과를 거두지 못함에 따라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다가 48년 5월 해산되었다.*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1948년 8월 21일부터 6일간 해주에서 남한지역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위해 열린 회의로 6월에 열린 제2차 남북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함에 따라 남한지역은 각 시·도별로 5~7명을 대표로 뽑아 인민대표자대회를 열고 여기서 360명을 대의원으로 선출하게 되었다. 이로써 북한지역 212명, 남한지역 360명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각각 선출되어 9월2일부터 평양에서 제1차 최고인민회의가 열렸다. 최고인민회의는 헌법을 제정하고, 9월9일 수상 김일성, 부수상 박헌영·홍명희·김책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948년 9월 9일, 북한에 수립된 사회주의 국가의 정식명칭으로, 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한반도에는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에 각각 미·소 양군이 진주하게 되고, 소련군 점령하의 북한에서는 임시인민위원회가 조직되어 일련의 이 수행되었다. 48년 8월15일, 남한에서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북한에서도 최고인민회의 선거를 실시, 헌법을 채택하고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의 승일은 받았고, 남과 북에 각각 서로 적대적인 정부가 들어섬으로써 한반도는 분단국가가 되었고, 6.25전쟁을 거치면서 분단체제는 한층 굳어져갔다.*트루먼독트린1947년 3월,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의회에서 선언한 미국 대외정책의 새 원칙으로 공산주의 세력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자유와 독립의 유지에 노력하며,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제공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원칙은 미국 외교정책의 기초를 이루었다.*애치슨라인1950년 1월 미국의 국무장관인 애치슨이 발표한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극동방위선으로, 소련의 스탈린과 중공의 마오쩌둥의 공산화를 저지하기 위해 알류산열도-일본-오키나선이라기 보다 정치적인 목정이 더 큰 주장이었다.*발췌개헌6.25 전쟁 중인 1952년 7월 4일,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개정되고 7월7일 공포된 제1차개헌으로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에다 국무총리 요청에 의한 국무위원 임면, 국무위원에 대한 국회 불신임결의권을 덧붙여 절충한 것이다. 이 발췌개헌에 따라 8월 5일 대통령 직선제 선거를 실시, 이승만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당선되었다.*사사오입개헌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해 1945년 11월 29일 불법적으로 헌법개정안을 통과 시킨사건이며 우리나라 헌정사상 제2차 개헌이다. 초대 대통령에 한해 3선제한 조항을 철폐한다는 이 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이승만 정권은 을 조작하는 등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나, 11월27일 국회에서 표결에 붙인 결과 재적 203명중 가 135명으로 개헌정족수 136명에서 1명이 미달되어 부결이 선언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정권은 ‘국회의원 재적 203명의 2/3는 135.333... 인데, 0.333... 이라는 숫자는 1인의 인간이 될 수 없으므로 사사오입하면 203명의 2/3는 135명이 된다’는 억지주장으로 부결선언을 번복, 개혁안의 가결을 선포하였다.*3·15 부정선거제4대 정·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선거로 사상유례없는 부정선거로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제3대 정·부통령선거 결과를 분석한 자유당정권은 정당한 선거를 총해서는 전혀 승산이 없음을 알고 관권을 동원한 엄청난 부정선거의 계획을 세웠다. 당시 민주당의 대통령후보였던 조병옥이 신병치료차 미국에 건너간 틈을 타 5월중에 실시하기로 한 정·부통령선거를 2개월이나 앞당겨 3월15일 실시, 이 와중에 미국에서 조병옥이 급서하며 이승만의 4선은 확실시되었고, 부통령 입후보자 이기붕의 당선이 문제였다. 이 결과 3.15선거는 부정선거로 전락했고, 마산에서는 의분을 참지 못한 시민과 학생들이 일어나 시위를 벌였고 대다수 국민들을 선거결과를 수긍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민주당의 선거무효주장에 호응었다.
- 혁명운동.혁명운동은 청·불전쟁, 청·일전쟁의 패배와 톈진조약으로 혁명의 필요성을 느낀 손문 등이 1894년 청조를 타도하자는 취지로 하와이에서 흥중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면서 시작되었다. 다음 해, 홍콩에서도 흥중회를 만들어 기층 민중들을 동원해 광주성을 무장점령하려는 최초의 반청봉기를 계획했다. 하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간 후 손문은 망명길에 올랐고 런던의 청국공사관에 억류되었다가, 풀려난 후 영국에서 체류하면서 삼민주의 사상의 기초를 닦았다.손문은 1900년 이후, 중국과도 가깝고 청국유학생도 서양보다 많으며,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가 이미 되어있는 일본을 11번을 왕복하며 당시 무술정변으로 도망쳤던 강유위와 양계초와 합작을 하려고 했으나, 강유위의 반대로 합작이 실패하였다.진보적인 학생과 지식인들에게 청조타도의 정당성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된 것은 러시아에 대한 저항운동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의화단사건을 집안 후 만주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한 사건을 지키지 않고 청조에 새로운 요구조건을 제시해 이 지역을 자신의 세력권 아래에 두려고 했다. 이를 알게 된 일본의 청 유학생들이 러시아에 저항하기 위한 의용대를 결성하고 학생군을 조직했다. 이들은 많은 유학생들의 호응을 받았지만, 청 정부에서 러시아에 대한 저항을 구실로 혁명을 꾀한다고 하며 탄압을 하였다.이렇게 저항운동이 실패 한 뒤, 일본 유학생들에서는 본격적인 혁명운동의 기운이 싹을 텄고, 이 운동에 참여했던 학생들이 조직한 단체가 모태가 되어 국내의 반청혁명단체인 화흥회와 광복회, 과학보습소 등이 성립되었고, 종래의 반제국주의 선전이 반청혁명을 집중적으로 선전하는 것으로 바뀌었다.이 시기에는 「혁명군」이라는 책자가 급진적인 청년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이 글을 장병린이 「소보」라는 잡지에 실었다가 청정부에서 잡지를 폐쇄하고 투옥시켜 옥고를 치르게 하는 소보안이 발생하였다.- 혁명 활동의 전개와 동맹회.국내에서 혁명단체가 구성되던 1905년 당시, 해외망명 중이었던 손문은 일본에서 황흥과 송교인과 함께 혁명 활동을 통일하기 위한 시도를 하여 중국동맹회를 성립하였다.중국동맹회의 강령은 ‘오랑캐를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해 민국을 세우고 지권을 평등하게 한다.’이며, 손문을 총리로 추대하여 손문 주도하에 흥중회, 광복회, 화흥회를 통합해 통일적인 혁명단체를 조직하였으며 기관지인 「민보」를 창간해 혁명의 선전활동에 집중하였다.손문은 민족, 민권, 민생의 삼민주의라는 혁명의 지도적인 이론을 내세웠다. 민족은 청조를 타도하고 한족의 국가를 회복한다는 것이고, 민권은 전제지배의타도와 민주국가의 수립을 지향하는 것이었으며, 민생은 지권의 평등과 빈부격차가 없는 사회혁명을 이룩해 풍족하게 한다는 것이었다.하지만 민족주의에는 반제국주의 의식이 결여되어있고, 민권주의에는 구체성이 결여되어있으며, 민생주의에는 공상적인 형상이 다분하고 농촌의 토지문제에 대해서는 이해가 결여되는 등의 한계점을 가지고 있지만, 당시로서는 가장 체계적으로 정비된 혁명이론이었다.손문은 또 혁명을 전개해 나갈 3단계 혁명방안을 구상했는데, 군법통치기로 청조치하의 모든 폐단을 일소하고 건설사업을 하며, 이 시기는 최대 3년으로 잡고 그 이전에 달성이 되면 다음 단계인 약법에 따라 지방자치를 하였다. 이 시기는 6년을 한도로 하고 그 다음 시기는 헌법의 단계로 들어가게 되어있다. 하지만, 이는 비현실적이라는 한계점이 있지만, 혁명운동을 세밀하게 규정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중국동맹회가 설립된 후, 선전활동 이외에도 반청무장봉기를 하였는데, 모두 실패하고 손문은 베트남으로 추방되었다. 손문이 추방된 후 황흥이 봉기를 주도하고 비밀결사를 조직해 광주신군봉기, 황하강 봉기 등을 했지만 그 역시도 실패하였다. 그 이유로는 자금과 무기반입이 지연되었고, 계획이 누설되면서 청조 측에서 대비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황하강 봉기가 실패하면서 큰 타격을 입은 동맹회는 이전부터 총리임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행동을 하는 손문에 반발하며 있었던 내부분열이 심화되면서 중국동맹회는 공진회, 광복회, 동맹회중부총회로 나눠지게 되었다.- 보로운동.신정과 입헌이 한창 실시되고 있을 무렵, 중국 내에서는 혁명파와 입헌파가 있었는데, 이들은 비슷하지만 한가지의 다른 점이었던 중국을 무너뜨린다는 혁명파와 중국을 유지한다는 입헌파가 대립을 하고 있었다.한편 입헌파 신사층 중에는 신정의 일환으로 산업이 진흥되며 근대적인 상공업을 운영하게 된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자신의 경제적인 이익과 열강으로부터 이권을 회수한다는 국민주의적 대의명분을 위해 철도부설권과 광산채굴권 등을 회수하는 이권회수운동에 참여하였다. 이권회수운동으로 호남, 호북 등의 지역에 있는 철도부설권을 우선적으로 회수하였고 이후 이러한 성공을 본받아 기타지역에서도 철조부설권 회수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1909년, 서태후가 죽고 선통제가 제위에 올라 섭정을 맡게 된 순친왕은 철도국유화 명령을 내렸는데, 이에 대해 회사를 세워 운영을 하며 철도부설과 광산채굴에 대한 주식을 가지고 있던 신상들과 불만이 있던 군중들이 일으키게 된 운동을 보로운동이라고 한다.이러한 보로운동이 가장 격렬했던 지역은 사천성인데, 이들은 20여명이 사망하고 폭동이 일어났고, 정부의 지원으로 부안의 군인이 파견되며 폭동이 거세졌다. 이는 신해혁명의 초기인 무창기가 된다.무창기는 10월10일 발생한 사건인데, 이들은 무기고를 점령하고 무창성을 점령하였고, 10월11일 혁명소식이 북경에 도달해 정부에서 군대를 파견하고 진압을 시도한다. 하지만 당시 원세개가 파직된 상태로 군대 파견이 이루어지지 않아 정부에서 원세개를 불러들였으나 원세개가 거부했고, 원세개는 청정부에게 조건을 걸고 흠차대신이 되어 혁명을 정벌하게 된다.- 신해혁명.무창혁명이 발생하고 2달 이내 각 지역이 개별로 나뉘면서 혁명이 거세졌다. 이때 중국의 18개의 성이 참여하게 되면서 혁명군기는 18성기가 된다. 12월 말, 청정부와 혁명군이 정전협정을 내던 중 손문이 귀국하게 된다. 당시 임시기구였던 중화민국을 설치하게 되고 임시대총통으로 손문이 당선되게 된다. 하지만 입헌파는 여전히 손문을 경계하고 원세개를 추대한다.이에 손문이 원세개가 청조를 물러나게 하고 공화정을 선포한다면 그에게 총통 자리를 물려줄 것임을 약속한다. 1912년 2월 12일 청조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가 퇴위하게 되면서 손문은 약속대로 사직서를 제출하고 후임총통으로 원세개를 천거하게 된다. 손문은 사직서를 내며 임시정부 소재지를 남경으로 해야한다는 조건을 내걸었지만, 원세개가 거부하고 북경에서 취임식을 하게 된다. 당시 군권은 여전히 원세개가 장악하고 있었다. 이렇게 원세개가 총통직을 차지하게 되자 총통권을 견제하는 방향으로 임시약법이 제정되었다.
* 근대 중국과 서양 열강들과의 관계근대 이전, 청을 백련교의 난을 비롯한 빈번한 반란으로 점점 쇠퇴해갔고, 대외적으로는 서양열강들의 위협이 있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미국 등의 서양은 해양을 통해 동양을 진출하였고, 특히 영국은 해상권을 점령하고 인도를 식민지로 삼아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18세기 초반, 광동무역을 시작하였다.이렇게 서양 열강들은 해양을 통한 무역진출로 중국을 압박해 왔다. 이밖에 서구 열강들의 진출방법으로는 선교활동이 있다.당시, 서양의 대표적인 종교였던 천주교 선교활동으로 진출였는데 대표적으로 ‘예수의 파’가 있다. 16세기 말, 마태오가 중국 광동성으로 가 천주교도당을 세워 그곳을 거점으로 선교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마태오는 스스로를 유학자라고 칭하며 선교활동을 시작하였고, 북경으로 가 교화당 설립을 허가받고 5년도 안돼 북경교회신도가 200여명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예수의 파’의 뒤를 이어 아우크스회, 도미니크회, 프란시스코회 등의 천주교회들의 선교활동이 활발해졌으며 또, 이러한 선교사의 활동으로 인해 서양문물과 문화교류가 활발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유학도 서양에 전달되었다.이로써 근대 중국과 서양의 관계는 무역과 선교활동으로 시작되며 점점 침입해 오는 서양열강들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태평천국운동제1차 아편전쟁이후, 굴욕적인 조약을 맺은 것은 청조의 권위를 추락시켰고, 이것은 사회불안과 함께 향촌사회에서의 반란을 야기시켰으며 당시 지리적특성으로 치안문제가 심각하던 광동성과 광서성에서 태평천국운동이 시작되게 된다.태평천국운동은 과거시험에 몇차례 낙방하다가 만난 개신교 선교 팜플렛으로 자신의 꿈을 토대로 배상제교를 창시해 포교활동을 시작한 홍수전이 지도자가 되어 시작되었다.배상제교에서는 유교·불교·도교등 전통신앙을 부정하고 살인, 절도, 간음 부정과 아편흡식과 음주를 금지했다. 또한 효도와 정직의 실천을 주장하였다.본격적인 포교활동으로 배상제회를 조직한 것은 홍수전의 친구인 풍운산이었고 그는 객가들에는 남경을 점령하여 천경이라 이름 짓고 수도로 삼았다. 그리고 이렇게 권력기반이 마련되자 통치체제 구축을 본격화하여 1853년 가을에는 「천조전무제도」를 간행해 태평천국의 체제이념과 정책의 지향성을 보였다.이러한 태평천국운동이 실패하게 된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로는 지도층의 내부분열과 체제이념의 붕괴이다. 두 번째로는 전통체제의 옹호자인 신사층을 수용하지 못해 신사층의 반격으로 몰락하게 되었다는 것이며, 세 번째로는 서구열강의 계속되는 간섭으로 서구열강과 합세한 청의 군대가 태평천국의 몰락을 도왔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이념과 현실간의 갈등이다. 위에 말했듯 태평천국이 생각한 유토피아는 남경에 정착한 이후 실행할 수 없는 조건임을 알고 봉건지배체제와 비슷하게 변해버렸다는 것이다.태평천국운동은 중국근대사상 최초의 농민운동이자 근대적인 민족운동이라고 보며 태평천국운동이 제기한 문제로 인해 이후의 개혁운동이나 혁명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아편전쟁17세기 초 설립되어 동방무역의 독점권을 가졌던 영국의 동인도 회사는 18세기 초 중국이 시장으로 떠오르게 되며 중국의 광동무역을 시작하게 되었다.하지만, 광동무역체제는 영국무역확대에 큰 장애가 되었고, 거기에다 중국으로 수출하는 차의 수요는 점점 늘지만 면직물보다 더 좋은 비단을 쓰는 중국에서는 영국의 모직물이 사치품이기 때문에 수출을 증가시키기에는 한도가 있었다. 때문에 영국은 차 수입을 위한 은을 마련하게 위해 모직물이 아닌 다른 수출대체품으로 아편을 찾게 된다.아편은 양귀비 과의 식물의 열매에서 추출한 액즙을 고체화시켜 가공한 것에 이물질을 추가 하여 만든 마약의 일종이다. 영국은 인도의 뱅갈지역에서 아편을 재배하게 만들었고, 마약으로 가공된 아편은 중국의 항각상인을 통해 중국 내로 퍼지게 된다. 이 아편은 담배형식으로 말아서 피는 흡식마약이었는데, 당나라 때부터 시작 되었다가 18세기를 거치며 중국 전역의 모든 계층에게 퍼져나갔으며 관료나 병사들도 예외는 없었다. 그로 인해 중국의 두며 아편흡식자를 엄중히 처벌함으로써 아편을 엄금하자는 엄금론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 황제였던 도광제는 엄금론을 지지하였고, 엄금론자 중 하나인 임칙서를 광동으로 파견해 아편문제를 처리하도록 하였다.광동으로 임칙서가 파견되어 아편을 단속하던 도중 구룡에서 술에 취한 영국 상인이 임유회라는 중국 농민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임칙서가 사건을 파악하고 영국에 그를 인도할 것을 요구 했으나, 영국은 치외법권을 들먹이며 사건을 종결하려하며 그 상인을 인도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에 임칙서는 마카오에 있던 영국인들을 추방하며 식량공급을 중단하였고 영국과 단절하게 된다. 이로 인해 제1차 아편전쟁이 발발하게 되는 것이다.제1차 아편전쟁은 근대화된 영국의 우세한 군사력으로 승리를 하였고 홍콩할양과 배상금을 요구하는 천비가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양자강으로 진입해 상해를 함락시키고 남경의 함락이 기정사실화가 되자 청은 전쟁의지를 상실하며 남경조약을 맺음으로써 제1차 아편전쟁이 막을 내리게 된다.이렇게 아편전쟁의 패배로 청의 위신은 크게 실추되고, 사회에는 큰 타격을 주며 은이 유출되며 물가가 상승하고 전쟁보상금과 세금은 농민들의 부담이 되었으며 외국인을 배척하는 등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태평천국운동이라 볼 수 있다.이후, 1856년 영국이 중국의 배였던 애로호를 습격하는 사건으로 제2차 아편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제2차 아편전쟁은 영국뿐만이 아닌 미국, 프랑스, 러시아 총 4개국이 참전하여 청은 대패하고 톈진조약을 맺게 된다. 하지만 청이 톈진조약을 거부하였고 결국 영국에게 베이징마저 함락되며 톈진조약과 베이징조약을 모두 맺게된다. 당시 청의 수도였던 베이징이 함락되었다는 것은 중국인들에게 매우 큰 충격이었고, 황제를 포함한 많은 백성들이 피난을 가기 시작한다.이로써 아편전쟁은 끝이 났고, 그 결과로 중국의 전통체제가 붕괴되고 천자의 권위는 타국의 군주와 동등한 위치로 격하되었다.* 양무운동양무운동은 군사적자강과 경제적 부강을 목표로 ‘중체서용’을 내세우며 일어났던 자는 의견을 내세우며 시작되었다.양무운동은 변경의 위기 때, 바다를 먼저 막아야 한다는 해방의 주장을 펼친 이홍장을 중심으로 해방론이 있었고, 육지를 먼저 막아야한다는 좌종당의 육방론 사이에서 해군이 창설되었지만, 여러 문제를 안고 있던 해군은 청·일 전쟁에서 패배하고 말았다.양무운동은 관의 후원을 받으며, 관의 감독 하에 상인들이 자본을 모아 경영하는 ‘관독상판’의 운영방식이 대표적이었다. 하지만, 이들 기업은 결국 실패하게 되었고, 원인으로는 관의 간섭뿐만이 아닌, 생산성 저하와 자금난, 공황 등의 경제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양무운동 기간 중 세 차례에 걸쳐 발생한 대만사건, 청·불 전쟁, 청·일 전쟁에서 한 번도 군사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양무기업역시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결국, 청·일 전쟁에서 패배할 무렵 부국강병이라는 목표가 실패했음이 입증되었다. 이렇게 양무운동이 실패하게 된 요인으로는 관독상판제도의 모순과, 중체서용론적인 사상적 지향, 추진주체인 양무파의 한계와 서양자본주의 등이 있다.*변법운동1880년대 후반부터 서구의 정치제도 도입, 즉 제도적인 개혁을 주장한 변법론이 나왔다. 이는 대만사건과 청·불 전쟁에서의 굴욕적 타협으로 양무운동의 실패를 자각하였고, 또한 광독상판식 양무기업들이 부국강병에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인식들로 변법론이 생겨났고, 청·일 전쟁으로 변법론이 변법운동으로 구체화되는 계기가 되었다.이렇게 변법론을 운동으로 연결시킨 것은 강유의 등의 하급관리와 지식인들이었다. 강유위는 1880년대 후반부터 제도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상소를 황제와 고광들에게 올리기 시작하였고 1895년에 황제에게 전달되어 호평을 받았다.이러한 변법운동은 중앙보다 지방인 호남성에서 먼저 실천에 옮겨졌는데, 강유위의 제자였던 양계초가 호남성의 시무학당에 초빙되며 본격화되었다. 양무운동은 시무학당과 남학회의 일간지였던 「상보」가 중심이었다.중앙에서의 변법운동은 민권론과 평등론을 지향하지 않았고, 황제와 접근할 수 있게 된 시점에서 강유위는 서구식 의피하고 6명의 개혁파인물들은 처형당했다. 개혁은 100일 조금 넘긴 상태에서 좌절되어 변법운동을 백일개혁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변법운동이 실패하게 된 이유는 무술변법과정에서 반대파가 변법유신파보다 강했고, 위로부터의 개혁이지만 강력한 힘을 실시하지 못했으며, 강유위와 광서제가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조급했으며, 당시 중국은 청·일 전쟁 배상금으로 인해 재정악화의 상태였다.* 입헌운동정변으로 개혁조치가 실패로 돌아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의화단 사건이 발생했고, 이 사건을 통해 보수적인 서태후조차도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해 신식개혁정치 즉, 신정을 추진하였다. 신식교육제도로 학부를 창설하였고 이는 전통사회로의 해방에 첫 발자국으로 보인다.이렇게 청조가 신정을 추진하고 있던 중, 광서제와 서태후가 죽었고, 순친왕이 실권을 계승하였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러·일 전쟁이 일어나 일본이 승리를 거두었고, 아시아의 소국인 일본이 서구 열강인 러시아를 이긴 것은 일본이 입헌군주국이고 러시아가 전제 군주국이었기 때문이라고 본 중국의 관리, 신사층들이 입헌국으로의 정체개혁을 주장하는 입헌운동을 벌였고,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인 청조는 입헌을 준비하게 되었다.청조는 먼저 헌정보찰단으로 5명의 대신을 일본과 유럽등지로 파견하였고, 그들이 돌아온 1906년 1차 입헌을 선포하며 전국적으로 연합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1909년에는 자의국을 설치하였고 의회개설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입헌운동마저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이렇게 청정부의 입헌추진이 실패한 이유로는 첫 번째, 개혁을 이끌어 가는 중심기구도 서태후가 죽음이후에 순친왕의 움직임이 거의 없으며 개혁을 이끌어가려는 영도자가 없었고 두 번째, 불평등조약으로 인한 재정악화와 재정확보로 인한 농민들의 반발이 반입헌적인 폭동으로 번졌고 세 번째, 청의 왕족들은 이민족정부로 집권층내부에서 만주족이라는 이유로 반발을 했으며 네 번째, 소수의 만주왕족들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 하였기 때문에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버림은
기호=기표+기의의미작용기호를 만들 때와 기호를 풀이할 때 생김기표에 의미를 더하거나 빼내는 작용1. 기표를 ㅡ보고, 보고, 만지는 감각기관도 물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은 물질을 통해 일어나는 현상2. 기료와 기의가 결합하여 기호가 된 후에는 그 자신이 하나의 압축된 기표가 되어 인각된다표상↑기호외부세계→ 기표+기의←내부세계3. 의사소통의 과정│--------- 의사 ----------│발신자 -------------- 언어(기호) -------------- 수신자암호화 해석│----------------- 의사소통 ------------------│기호학은 원칙상 거짓을 말하는 학문이다표상성 - 기호가 현실체를 어느 정도 인간의 인식에 반영해 주느냐 하는 문제대상성 - 기호의 표상성을 다른 각도에서 하는말 (현실체에 관한 존재론을 말함)표상성(대표성)기표와 기의의 자의성을 지적 기표와 기의사이에는 자의성이 업다 -소쉬르자의성대상체를 표상할 때 기호가 드러내는 기의와 기표 간의 자의성은 시호생산에 무한한 융통성을 준다이러한 자의성은 논리를 거부하고 학습을 요구한다진위성1. 물체란 반드시 물질적 실체일 필요가 없다 관념적 물체이여도 상관없다2. 물ㅊ는 실존하는 물체와 허구적인상상물을 모두 포함할 수 있다.기호와 의미도상대상체와 유사한 기호상형문자지표대상체와 실존적 연결을 이루고 있는 기호지시대명사, IQ등의 것들상징임의로 만들어진 기호대상체와 기호 사이에 어떠한 연관없이 약속만으로 이루어진것 사회적 계약이 상징이 지니는 의미의 원칙도상 지표 상징은 같이 묶여있음단일의미 : 다중의미외시의미 : 함축의미틀 : 변용유사 : 차이기호의 범주언어기호 - 우리가 의식을 가지면서 제일 먼저 얻는 기호들
Ⅰ. 청령포(淸冷浦)영월 청령포는 어린 나이에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유배지로 서쪽은 육육봉의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고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섬과 같이 형성된 곳으로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고 전하는 노산대, 망향탑 돌무더기 등 슬픈 역사가 남아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1).단종의 유배1455년에 단종은 즉위 3년 만에 상왕으로 물러나게 된다. 사실 물러난 것 보다는 쫒겨났다는게 더 맞는 표현일 수 도 있겠다. 그 뒤, 사육신이라는 집현전 학사 출신인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무관 유응부 등은 단종의 복위를 꾀했다가 들켰다. 결국 세조는 그들을 끝내 죽였고, 한편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를 갔다. 단종의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에서도 여러 흔적들이 남아 있다고 한다. 뒤에 소개 할 내용이다. 소나무인데 단종이 유배되는 순간부터 지켜보았고 단종의 목소리와 울음소리를 들었다며 관음송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소나무, 단종이 자신의 어머니인 정순 왕후를 생각하여 하나하나 쌓았다는 망향탑, 아침, 저녁으로 올라가 한양 쪽을 바라보며 외로움을 달랬다는 노산대 등 모두 단종의 힘겨웠던 유배 생활을 짐작케 해 주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남아있다. 또 단종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들도 있는데 먼저 단종의 시신을 거둬 장사를 지낸 영월 호장 엄흥도, 또 단종이 죽자 평생 문 밖을 나가지 않은 원호, 이 외에도 이맹전, 김시습, 성담수, 조려, 남효온 등은 세조의 벼슬을 받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았다 해서 생육신이라 불린다.2). 청령포의 위치와 역사.구름도 울음보를 터뜨리는 소나기재. 영월읍으로 들어서려면 이 눈물 고개를 넘어야 한다. 12세의 나이로 왕이 되었으나, 작은아버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결국 심산 유곡 영월땅으로 유배되어 17세에 죽임을 당한, 이름도 애련하게 느껴지는 단종. 그를 위한 눈물인 것이다.멀리 잦아지는 능선이 장관인 소나기재를 넘으면 ‘단종애사’의 사연이 깃들인 마을, 충절의 고을 입구임을 예고하는 듯 홍살문이 나선다.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는 영월 읍내에서 남서쪽으로 약 3㎞ 떨어진 곳에 있다. 동남북 삼면이 남한강의 지류인 서강의 강줄기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은 66봉의 험한 산줄기 절벽으로 막혀 있어 유배지로는 더할 나위 없는 자연 조건을 갖추었으며, 나룻배가 아니고서는 드나들 방법이 없다. 청령포를 휘감는 강물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원을 그리며 굽이쳐 흐르고, 앞자락에 거느린 넓은 백사장은 치마를 단정히 두른 듯하다. 서쪽의 깊은 물가에 우뚝 솟아 있는 절벽 경치 또한 빼어나다.소나무들이 짙게 우거져 서늘한 그늘을 만들고 있는 청령포에는 단종이 죽고 나서도 한참 뒤인 영조 때에 세운 금표비와 단묘 유지비가 남아 단종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Ⅱ. 청령포 안의 문화유산.1). 관음송(觀音松)영월의 관음송은 영월의 청령포 안에서 자라고 있으며 나이는 6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 30m, 가슴높이 둘레 5.19m의 크기로 1.6m되는 높이에서 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 하나는 위로 하나는 서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자라고 있다. 청령포는 세조 2년(1456)에 왕위를 빼앗긴 단종이 유배되었던 곳으로 단종은 유배생활을 하면서 둘로 갈라진 이 나무의 줄기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관음송이라는 이름은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해서 ‘볼 관(觀)’자를, 단종의 슬픈 말소리를 들었다하여 ‘소리 음(音)’자를 따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무의 껍질이 검은색으로 변하여 나라의 변고를 알려 주었다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귀하게 여기고 있다. 영월의 관음송은 단종과 관련된 전설을 가지고 있는 등 역사적·학술적 자료로서의 보존가치가 인정되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2). 노산대(魯山待)강원도 영월, 청령포에 있는 노산대는 단종 이 왕에서 쫒겨나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청령포에 머무는 동안 아침, 저녁으로 올라 한양방향을 바라보며 그리워하고 억울해하며 시름에 잠기던 곳으로, 노산군이라는 이름을 따 노산대라고 불리게 된다.3). 망향대(望鄕待)청령포 뒷산 층암절벽 위에 있는 탑으로 단종대왕이 유배생활을 할 때 자신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근심 속에서도 한양에 두고 온 자신의 어머니인 정순왕후를 생각하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막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탑으로 단종이 남긴 유일한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