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는 생각믿을 수 없는 이야기, 그리고 그것을 계획하기내가 늙는다니, 아니 벌써 늙고 있다니 믿을 수 없다. 방년 24세. 나중에 늙으면 이렇게, 저렇게 되고 싶다는 추상적인 생각이야 가끔 멋들어지게 늙은 헐리웃 배우나 인자한 동네 할아버지를 보면 하기는 했다. 근사한 전원주택에서 볕이나 쬐고 있는 평화로운 나날을 기대하면서. 그 ‘나중’이라는 말이 올해가 가고 내년이 가더라도 언제까지고 나중으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체로 평온과 무한한 희망이 함께 거기에 있었다.25세부터 보통 노화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내게는 이제 한 달 남았다. 산술적으로 계산하는 것은 우스운 이야기지만 상징이라는 것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나는 그 동안 늙는 것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 사실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계획이라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이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생각만큼 단순한 것도 아니다. 무지의 영역이 무궁무진하고, 나의 생각은 한 없이 초라하다. 어떤 것에 대해, 하다못해 겨울방학계획이라도 하려 치면 예상치 못한 난관이나 기회가 찾아와 계획을 흐지부지하게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핑계라면 핑계지만 그래서 계획을 잘 안 한다. 계획하지 않고 그 때 그 때 하고 싶다고 생각난 일들을 하는 것이 무언가 운명에 맡긴 듯한 나의 자연스러운 인생인 것 같아 멋지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 결과 내게 남은 것은 약간의 성과와 그 보다 조금 더 많은 후회다.계획이라는 것이 그저 계획으로만 남는 것은 아니다. 계획한 대로 모든 것을 다 해내겠다는 의지 같은 것이 아니다. 미리 생각해보고 검토해보는 것, 말하자면 예습 같은 것이다. 앞으로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든 일어나지 않든 중요한 일이다. 내게 앞으로 빼놓을 수 없는 사실, 늙는다는 것. 그것은 생각하기 싫은 일이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와는 별개로 내 마음은 언제까지고 어린 아이로, 철없는 막내로 남아있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철없는 인생내 인생의 좌우명이나 모토와도 같은 것이다. 철없는 인생이란, 그 때 그 때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사는 삶을 말한다. 물론 거기에는 약간의 철칙 같은 것이 있다. 남부끄럽지 않을 것, 스스로에게 떳떳할 것, 남의 행복을 해치지 않을 것. 나는 그 동안 계획 없이 살아왔지만 나름대로의 짧은 목표는 항상 있었다. 따로 적어놓고 매일 매일 되새긴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양심이라는 형태로 나의 행동을 제어해왔다. 몇 살까지는 돈을 얼마 모으고, 언제 어디로 취직하고, 적당한 여자를 만나서 언제 결혼해야지 와 같은 뚜렷한 목표는 아니었다.내 인생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군인 신분일 때였다. 지금 보니 군대라는 곳은 생각할 시간이 아주 많다는 측면에서는 괜찮은 구석도 있었던 것 같다. 내 인생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아무래도 소설이었던 것 같았고, 그 중에서도 무라카미 하루키나 에쿠니 가오리와 같은 일본작가의 소설이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문득 그 생각이 들었을 때 일본어를 공부해서 원어로 책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그 길로 일본어 독학용 책을 샀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세 달쯤 지났을까, 책이 더듬더듬 읽혀졌다. 목표설정이란 나에게 특히 의미를 가진다. 다른 더 큰 목표를 하나 세워야 공부를 계속하게 된다. 그래서 일본어 자격증을 땄다.자격증을 따고 나니 다른 세상이 보였다. 교환학생을 갈수도, 혼자여행을 갈수도, 여행가이드를 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것은 충동에서 저지른 행동의 결과물이었다. 무엇이든 하기만 하면 내 젊은 인생에서 분명 남는 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에 나는 하고 싶은 일과 내게 도움이 되는 일 사이에서 접점이 보이면 그것이 무엇이든 시도했다. 그것은 대체로 해보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것이었다.그 과정에서 부모님과의 마찰이 있었다. 남들 공부하는데 밖을 정체모를 것을 하면서 싸돌아다닌다는 것이었다. 내가 진정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야할지 나조차 갈피를 못 잡는 상황에서 남들이 다 하는 것을 따라 가는 일은 꽤나 안정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철없는 인생을 살고 싶어 하는 철없는 20대였고, 결국은 부모님도 나를 이해해주셨다. 그 이해는 건강한 것이어서, 나를 있는 그대로 믿고 지켜봐주기로 결정하신 것 같다.마음을 따라 겉돌아 온 결과 나는 남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을 많이 해본, 철없는 마인드의 성숙한 풋내기가 되었다. 2년 남짓의 휴학 생활 동안 나는 한 때는 배우였고, 한 때는 라이프가드였으며, 한 때는 작가였다. 샐러리맨이기도 했고, 한낱 알바에 불과하기도 했고, 풍류를 아는 제주소년이기도 했다. 그 모든 경험들은 뿌리가 되어 뻗어 나가 나에게 자양분을 제공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무엇보다, 나는 그 과정들과 현재의 내 모습 모두에 만족하고 있으며, 누구보다 행복했다. 보다 더 즐길 수 있었는데 조금 게으르게 논 것이 내게 남은 후회라면 후회다.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앞서 이야기 했지만, 나에게 미래의 것들은 너무나 모호한 것이어서 쉽게 예측할 수가 없다. 직접 해보기 전에는 알지 못하는 것들이 태반이다. 막연하게나마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나는 아마도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 같다는 것, 그리고 그것만을 직업으로 삼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돈 버는 일과 직업을 갖는 것은 다르다. 그리고 내 직업은 글 쓰는 사람인 동시에 다른 무언가를 하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여러 방향이 있을 수 있다. 선생님인 동시에 소설가, 또는 여행가인 동시에 여행 작가, 영화감독인 동시에 영화비평가 등이 그것이다.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일 수 있겠는데, 그건 생각보다 쉽게 해결된다. 열심히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이뤄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열심히 노력하는 과정에서 분명 새로운 길도 보일 것이고 내게 맞는 다른 길이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가능성을 믿는다. 물론 그것은 내 열정을 다한 삶을 산다는 전제하에서 가능한 것이다.현재 2학년 1학기과정을 듣고 있지만 대학원을 염두에 두고 있다. 산업심리와 인지심리를 두고 저울질해보고 있다. 1학년 때에 진즉 심리학의 재미를 알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곧 일본학교에 교환학생을 갈 것이고, 돌아와서는 미국 학교로 교환학생을 가기 위한 준비를 할 생각이지만, 그것은 일본에 가 있을 때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생각이므로 현실에 충실하기로 한다. 사실은 내 인생에 새로운 전환기가 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번 일본행은 내 마음 가는대로 살기로 한 것의 가장 뚜렷한 성과인 동시에 가장 기대되며 예측하기 어려운 행보다.대학원을 졸업하기 전까지 내 이름으로 된 소설을 어느 문예에라도 등단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지금도 쓰고는 있지만 언제 끝이 날지 장담할 수 없다. 아직은 소설이라기보다 캐릭터들이 살만한 공간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그 곳에서 여러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재미있다. 소설을 쓰거나 영화를 비평하는 일은 내 일생에 걸쳐 계속해서 이뤄질 것이다.30대를 전후로 대학원을 졸업하게 될 것인데,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도 하기 어렵다. 여건과 능력이 뒷받침된다면 박사과정을 밟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적당한 곳에 취직을 해버릴지도 모른다. 현재 IT회사에서 기획파트를 맡아 일한지 1년 정도 되었는데 가장 많이 느낀 것은 내게 기업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미를 좇아 나를 위한 일을 하는 와중에 경제적인 보상도 적당히 받을 수 있기를 꿈꾸고 있다. 그 전까지 일본소설을 번역하거나 여행가이드를 하면서 생활비를 번다.
철없는 인생 살기-조지 베일런트의 [행복의 지도]를 읽고내 행복의 원천나는 행복하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불행한 인생이라고 여겨본 적이 없다. 불행하지 않음이 곧 행복이 되는 것이 아님 역시 잘 안다. 딱히 불행하지 않으니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운이 좋았고, 주변 사람들은 나를 잘 이해해 주었으며,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적어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자고 다짐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무엇보다 걱정을 잘 하지 않는 타고난 성격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불행한 삶을 살면 어쩌나 하는 불안과 걱정 같은 건 나 이외에 수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으니까 굳이 나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하고 싶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라 가는 일에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뒤돌아보고 후회하지 않을 책임감 역시 필요하다. 내 친구들은 대체로 이러한 의견에 동조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봐도 이른 나이지만(지금도 어린 나이임을 인정한다), 학창시절 늘 하던 고민이 있다. “언제까지 철없이 살 수 있을까”가 그것이었다. ‘철없다’라는 것에는 많은 뜻이 내포되어 있지만, 나와 내 친구들 사이에 철없음이란 단지 어리고 단순한 것만은 아니었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우리의 못남에 대해 주눅 들지 않고 가슴이 시키는 일을 좇아 갈 용기, 그것은 우리들의 영원한 목표이기도 했다.불행의 시작나이가 들고 아는 사람이 많아지고, 현실감이 커져갈수록 가슴이 시키는 일이란 것이 정말 말 그대로 철없던 생각이지는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현실이 시키는 일을 묵묵히 자기 일처럼 해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경외감마저 든다. 재미없는 일을 그저 받아들이는 사람들. 하고 싶은 일이 없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을 할뿐일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인생의 틀거리 안에 갇히는 것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마땅한 일을 해내는 것은 현실 안에 포함될 수밖에 없는 우리네 인생을 이해했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나는 그 동안 현실이 시키는 일을 제대로 해오지 않았다. 취업전선에 뛰어들 생각일랑 애초부터 없었다. 덕분에 영어성적도 없고 공모전에서 수상한 적도 없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 원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행복에 대해 자만했다. 순간의 행복만 바라본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그 동안 느꼈던 행복이라는 것이 순간의 도피에서 오는 알량한 희열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두려워졌다. 나는 그 동안 현실세계에 포함되지 않기 위해 도망갈 길을 모색해왔으나 아직도 여전히 모노레일 위에 서 있다. 다음 기차가 오면 타야만 할지도 모른다. 혹은, 치이게 될지도 모른다.사람들은 ‘더 늦어지기 전에’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보편적으로 ‘이 때에는 이것을 해야 하는 시기’라고 하는 인생의 시기모델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평범한 삶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기성세대들의 염원의 측면도 잘 반영되어 있다. 대학에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결혼해서 며느리나 사위를, 손주를 보는 일련의 과정들 중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되면 불쌍한 사람이라 낙인찍히고 만다.내 졸업 예정 연도는 비교적 늦다. 27세에서 28세 정도다. 지금 생각 같아선 대학원에도 가고 싶으니 사회로 진출하는 시기는 보다 더 늦어질 것이다. 그 후에도 나는 당분간 취직할 마음이 없다. 평범한 직장생활을 할 만큼 책임 있게 행동하지 못한다. 거기에는 대부분의 회사에서 하는 일은 나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는 이기적이고 부정적인 시선이 포함되어 있다. 남을 위해서 하는 일은 내 성격에 맞지 않다. 나는 나를 위한 일을 하고 싶다. 내가 재밌어서 하는 일. 그게 아니고서는 내 일생을 바칠 만큼의 직장을 절대 구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그렇게 된다면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진다. 현실에 등떠밀려 적당한 직장을 구한다면 그것은 내 인생목표에 위배되는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란 것은 글을 쓰는 일이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관찰하는 것 등인데, 생활을 영위할 만큼의 금전적 보상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하고 싶은 일을 하려 노력하지 않을 것도 같다. 대학에 졸업하고 글에 대한 집착도 사라지고 취직에 대한 열망 역시 아직 갖춰지지 않았다면 그 시기는 바로 이도 저도 아닌 불행한 삶의 기반이 닦이는 순간이 되고 말 것이다.행복할 자격지금부터 좋아하는 일을 따라갈 행동력을 길러야만 한다. 너무나 막연하고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막막한 일일지라도 한 번 행동에 옮기면 상황과 시야는 변한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행동에 옮기지 않는 것은 내가 그다지 좋아하는 일이 아니거나 무능한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면 행복할 자격도 어쩌면 없어질지 모른다. 좋아하는 일을 그대로 행할 수 있는 용기, 좋아하는 일을 위해 다른 항로를 포기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 내가 선택한 철없는 인생의 여정을 떠날 배의 이름이다.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행복을 위한 노력을 안 한다. 다른 사람들의 행복 기준에 자기를 맞추고 자신의 모양을 바꿔버린다. 틀에 맞지 않아 갑갑하고 쑤시더라도 남에게 인정받으면 그것이 행복인줄 안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마치 내가 지금 굉장히 노력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착각을 부른다. 내가 무슨 일을 할 때 가장 행복한지 스스로를 잘 아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생각해보니 다행히 내 행복은 다른 사람의 행복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내 행복에만 전념해도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내 주위 사람들은 나를 위해 걱정해주기는 하지만 강요하지 않고 나를 믿어준다. 내버려둔다고 표현해도 좋을 것 같다. 덕분에 나는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다. 언제까지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도 나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음을 알리는 삶을 살고 싶다.이름들신이수, 최아름 감독의 단편영화 ‘이름들’을 본 적이 있다. 주인공은 시인으로 등단한 작가인데, 가난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산다는 자부심이 있다. 그런데 그 자부심이란 것에는 무게가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산다고 해서 바로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의 누나는 평범한 회사원인데, 주인공을 참 부러워한다. 살고 싶은 인생을 선택해서 사는 것 같아 보이는 거다. 그런 둘을 카메라는 안쓰러운 듯이 보듬으며 따라간다. 누나가 상사에게 꾸중 듣는 것을 멀리하여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는 것과 함께 맺어주는 데서 큰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불을 가지고 무언가 만들면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람이 사는데 보다 가치 있거나 가치 없는 삶은 없다. 우리는 각자가 하나의 이름을 가지는 공평한 삶을 살아가고 있고, 그것은 누구의 것도 아닌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도장으로 발자취를 남기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이름을 가졌건 각자의 이름을 가진 하나의 인생을 산다.그러나 우리는 이름들을 어떤 명함 틀에 넣고 점수 매긴다. 행복한가 불행한가의 여부는 어떤 삶을 살아가려고 마음을 먹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일이다. 하지만 쓸 데 없는 삶이란 없다. 누군가의 삶을 평가할 수도 없다. 스스로 돌이켜보며 후회할 수는 있을지언정 남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이름들에 배신하는 일이다. 보편적인 행복의 틀 안에 어떤 이름을 넣어보고 그것이 부합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인생에 불행의 색깔을 칠해버린다. 돈이 많다거나 우월하게 잘생겼다거나 아내가 굉장히 예쁘다면 그 사람은 자연히 행복한 사람일 거라 치부해버린다.
생각에 관한 생각에 관한 생각Thinking Fast and Slow이 소설 같은 책의 원제다. ‘사람의 생각에 관한 영역’이 사실은 우리가 알던 것과는 많이 다른 것이어서 이해시키기 위해 소설처럼 각색했나 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소설작가가 아니고서야 자신도 인간이면서 인간의 능력에 대해 이토록 무참히 객관적인 시선으로 견지할 수 없다. 그러나 대니얼 카네만이 책 전반에 걸쳐 이야기하듯, 급히 드는 생각은 대체로 옳은 판단이 아니다. 무지의 영역일 때 더욱 그렇다.생각에 관한 생각이라니. 바꿔 쓴 제목이 멋지다. 일전에 나는 코이케 류노스케라는 일본 승려가 쓴 책 [생각 버리기 연습]을 읽은 적이 있다. ‘생각’이라는 단어 자체가 가지는 숭고함이 있어 우리는 언제나 깊게 생각한다고 치부하며, 스스로 고상한 척 내 생각은 대단한 것인 양 하루 종일 생각에 빠져 산다는 사실에 으스대곤 한다. 그러나 생각과 잡념은 다르다. 머리는 심장이 뛰고 있는 것처럼 항상 제 멋대로 움직이고 있다. 잠시 생각에 취해 따라가다 보면 십중팔구 엉뚱한 길에 있는 나를 만날 수 있다. 그것에 대해 류노스케는 생각하는 척 하지 말고 현재에 집중하라는 뜻으로 글을 쓴 것이다. 밥 먹을 때는 밥에 집중하여 그 맛에 대해 심취하고, 거리를 걸을 때는 나무의 비뚤어진 올곧음에 경탄하고, 가끔은 우리가 언제나 어떠한 소리들에 휩싸여 있음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어지러운 세상을 살 때 우리는 가던 길을 잃고 스스로를 놓쳐버리기 쉽다. 그리고 세상은 어지럽지 않았던 적이 없다.생각의 법칙류노스케가 말하는 버려야 할 생각, 그것이 대체로 대니얼 카네만이 말하는 시스템1이다. 직관에 의존한 빠르고 편한 생각. 여기서 대부분의 실수가 나온다. 우리는 합리적인 척 하는 자동화로봇이다. 시스템1은 빠르고 쉽게 여러 가지 정보를 함께 처리할 수 있게 하며 상황을 즉각적으로 판단한다. 무수히 널려있는 정보들을 모두 느리고 신중한 시스템2로 처리하다가는 유용한 정보를 제대로 식별하지 못하게 될 것이며, 여러 위험들로부터 쉬이 노출될 것이 자명하다. 이는 분명히 우리 조상들의 생존에 이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 씨앗으로부터 나온 나 역시 시스템1을 가진 로봇이다. 다만 주변로봇들보다 조금 더 사람인 척, 합리적인 척 한다. 아마도 그것은 심리학에 대한 소속감과 약간의 자부심의 발현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 역시 시스템1에 기반을 둔 것이다.시스템 2는 시스템 1의 실수를 최소화한다. 최근에 지인에게서 칭찬을 하나 들었다. 똑똑하다고, 난놈이라고, 넌 또래와는 이야기 통하지도 않을 거라는 듣기 좋은 말이었다. 나의 느낌과 직관은 그 칭찬에 만족하고 동감한다. 나는 그것을 분명히 느낀다. 가슴 속(그것 역시 아마도 착각)에서 기쁨의 주머니 하나가 톡 하고 터진다. 이내 시스템2가 당도하고 역시 꽤나 빠른 속도로 터진 알갱이들을 주워 담는다. 내가 1학년 2학기 과정을 듣고 있는 겨우 2학년 학부생일 뿐이며 1학년 1학기과정만 두 번 수강한 풋내기이고, 그 외 공부에 관심을 쏟지 않은 게으름뱅이임을 깨닫도록 만든다. 노력하는 것 하나 없이 듣기 좋으라고 한 칭찬에 표정관리 하나 제대로 못하는 놈. 부끄러움과 자책의 주머니가 터지고 가슴이 약간 아려온다. 나는 앞으로 얼간이가 되지 않기 위해 얼마나 더 조심해야 하는 것일까. 아직은 얼간이가 아니라는 자신 역시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다다르고 나서야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책을 읽기 전에는 위의 칭찬처럼 달콤한 말에 대해, 조금 더 현명한 사람이라면 기쁨의 주머니를 일찍 터뜨리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성격적인 것이라 내가 겸손한 사람이었다면 스스로에게 채찍질하며 마음속에 고요를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비관적인 사람은 터질 수 있는 행복의 주머니 역시 조금 더 적을 것이다.그러나 생각의 회로에서는 무조건적으로 시스템1이 우선한다. 그 사람이 아무리 겸손하고 예의바르고 비관적이고 심지어 사고를 하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무리 학습하고 훈련한다더라도 한 번 들었던 직관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다음에 내가 똑같은 칭찬을 듣더라도 나는 틀림없이 짧은 순간 희열을 느끼고는 처지가 달라지지 않았음에 자책하는 수순을 밟을 것이다. 나의 모든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줄 수 있는 이른바 현자나 성인군자가 되더라도 시스템1의 처리를 의도적으로 없애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러한 달콤한 칭찬에도 반성하고 겸손하도록 시스템2를 시스템1에게서 떼어놓지 않는 것, 시스템 2의 수행 속도를 빠르게 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시스템1이 시스템2에 우선하는 것은 생각회로의 법칙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시스템2 키우기다행인 것은, 시스템2가 훈련을 통해 견고해지고 향상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야구방망이와 공의 가격을 합하면 1달러 10센트, 방망이는 공보다 1달러 비싸다”고 하는 문제에서 나는 공이 5센트이고 방망이가 1달러 5센트임을 빠른 속도로 알아차렸다. 직관적이라고 할 만큼 빠른 속도였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거기엔 약간의 훈련이 작용했다. 인간의 직관이 무섭도록 형편없음을 책을 통해 이미 지각하고 있었던 데서 기인한 것이다. 즉, 이 문제가 미끼를 던지고 있는 직관적인 답이라 하는 것은 내 머릿속에서 직관적으로 제일 먼저 튀어나오는 답일 확률이 높고, 제일 먼저 나오는 답은 정답이 아닐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그러한 일반적인 오류의 과정을 피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과정은 꽤나 빠른 속도로 전개되었고 정답은 일치했다. 그 결과 나는 또 한 번 자부심의 주머니 하나를 터뜨려버렸지만 이내 주워 담아 곱게 묶어 놓았고, 매사에 조심하라는 어른들의 말씀 역시 한 번 되새겨보는 기회를 가졌다.사람들의 일반적인 오류를 알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일반적인 오류라는 것은 나에게만은 절대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 따위의 것이 아니다. “나는 아닐 거야”라는 착각은 상당히 위험하다. 합리적인 사람이 비합리에 대해 걱정하고, 비합리적인 사람은 자신을 합리화한다. 잊지 말자. 나의 시스템1은 시스템 2를 앞선다.선입견을 없앨 수 있을까그러니 말하자면 시스템1은 선입견 같은 것이다. 먼저(先)드는(入)생각(見)을 떨쳐버리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고, 나에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이 드는 영역의 일이다. 예를 들어 ‘시발점’이라고 하는 단어를 듣거나 말할 때, 나는 언제나 놀란다. 글을 수정하려 다시 보는 순간에조차 또 한 번 놀랄 것이다. 나와 모두는 그것이 욕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단어를 처음 접할 때의 느낌은 어느 특정 욕설을 들을 때와 같았고, 이 단어는 그에 해당하는 욕을 들을 때의 상황 또는 뉘앙스와 너무나 쉽게 오버랩 되어 어감이 단어자체가 가지는 의미를 뛰어넘어버린다. 만약 그 단어가 누군가가 말하는 문장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면, 이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뒤의 몇 단어 정도는 제대로 처리할 수 없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그것은 내게 있어 정말 자동적이다. “시발점”을 듣는 동시에 무언가 사고회로가 반짝 “여기보세요” 하고 소리친다. 거길 봐도 별게 없음을 안다. 외면하고 보던 것을 계속 보는데, “보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고 주의를 쏟는 것 역시 기존의 작업을 방해한다. 결과적으로 그 단어에 관심을 쏟든 쏟지 않든, 원치 않게 주의가 분산된다. 시스템1을 막기 위해 시스템2가 투입되었지만 시스템2가 시스템1에 앞서거나 저지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잠들지 못하는 나라1. 서론 : 수면의 필요성과 현재 한국 사회 수면의 실태1) 수면은 신체의 보호 및 회복, 학습과 기억, 감정조절, 성장 등의 중요한 기능을 담당 하고 있다.2) 많은 한국 사람들이 정상적인 수면시간을 박탈당하고 있다.2. 본론1) : 수면에 대한 인식과 원인(1) 한국사회는 잠을 적게 자는 것이 미덕인 양 취급하고 있으며, 오히려 수면시간을 게으름의 척도로 여기고 있다.(2) 한국인의 수면양이 줄어든 것은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경제적 성장을 꾀하는 과정에서 ‘개조’라는 방식으로 삶의 패턴을 강요받아 왔기 때문인데, 지금의 한국 사회는 그것을 습관처럼 이어나가고 있다.2) 문제점과 해결방안(3) 부족한 수면은 행복한 삶이라는 여유를 잃게 할 뿐만 아니라 사고 발생률을 높이고 업무의 효율을 떨어뜨리는 등 많은 문제점을 수반한다.(4) 정부는 공익 캠페인을 벌이거나 시에스타를 도입하는 등의 정책적 시도로 사회에 만연한 ‘불면만능주의’를 타파하여 개인이 스스로의 적정수면시간을 파악하여 지킬 수 있게끔 유도한다.3. 결론 : 수면에 대한 태도 전환의 필요성 환기1) 꼭 필요한 적정량의 수면을 바쁘다는 핑계로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2) 개인의 풍요를 돌볼 만한 사회적 기반이 마련되었으므로 과도한 업무나 경쟁적 구도의 불필요성을 인지하여 사회의 전반적 생활 패턴을 개선해 나갈 수 있도록 한다.잠들지 못하는 나라주제 : 현대 한국사회의 문제점과 해결방향사람이면 누구나 잠을 잔다. 수면이 필요 없는 사람은 없다. 각자의 일주기 리듬에 따라 수면의 시간에는 개인차가 있을 수 있지만, 정상적인 삶을 위해 충분한 수면은 반드시 필요하다. 식욕과 성욕 등 인간의 기본적 욕구들 사이에 수면욕이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에 이견을 낼 사람은 없다. 잠을 자야하는 이유는 다양한데, “잠을 자야 키가 큰다”는 흔히 하는 말보다 잠은 더 많은 기능들을 담당하고 있다.수면은 학습과 기억을 강화시키고 집중력을 높이며, 감정을 조절해주고 배고픔과 비만을 조절하며, 신체의 보호 및 회복 기능과 면역시스템을 공고히 하며 치명적 사고의 위험을 줄인다. 충분하게 잠을 자면 원기를 회복하고 더 좋은 기분을 오래 유지하며, 잠을 적게 잔 사람들 보다 효율적이고 정확하게 일을 수행한다. 적절한 양의 수면이 없으면 위와 같은 기능을 잃을 뿐 아니라 하루의 전반이 피폐해지고 침체됨을 느낄 수 있다. 한국인의 권장 적정 수면시간은 7~8시간인데, 성인 평균 수면양은 6시간 15분이며 이는 OECD 국가 중 가장 짧은 것이다, 고교생의 경우 5시간 27분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2013 아동 청소년 인권실태조사 통계). 초등생은 최소 9시간의 수면시간이 필요한데, 한국 초등생의 평균 수면시간은 8시간 남짓이다.잠이 부족하면 수면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생산성을 떨어뜨리며, 어떤 사고를 저지를 위험성이 높아진다. 또한 공부를 어렵게 만들고 실수를 늘리며 피로를 초래한다. 교통사고에서 수면부족은 비단 졸음운전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1991년과 1992년 캐나다의 교통사고 통계자료를 보면, 서머타임제가 시작되어 한 시간 잠을 적게 자게 된 월요일의 사고 건수가 그 전의 월요일에 비해 7%가 증가했고 서머타임제가 해제된 후에는 사고가 7%감소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한국인의 수면 부족이 보이는 가장 큰 문제는, 잠이 부족한 분위기를 사회적으로 조장하고 있어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잠의 필요성은 인지하고 있으나 스스로를 채찍질하기도 하고 타인을 구박하기도 한다. 피곤하다고 해서 마음 편히 잠을 더 잘 수 없도록 구조화 되어 있다. 즉, 잠을 많이 자는 것이 개인의 게으름 문제이며, 깨어 있는 시간이 마치 부지런함의 척도인 것처럼 여긴다는 것이다.한국사회에서 잠이 적은 것은 자랑거리다. 자신이 잠을 줄여가며 열심히 해왔다는 영웅담을 주위에서 흔히 들어볼 수 있다. TV에서 연예인들이나 산업역군들이 하루에 세네시간 자며 성공을 위해 매진해왔다는 이야기를 하면 탄복하며 경청하는데, 이는 권장량을 밑돌거나 적정시간을 자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게으르다고 옥죄게 만든다. 잠이 부족하다는 것은 알지만 사회적인 분위기가 잠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한국인의 수면양이 줄어든 것은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경제적 성장을 꾀하는 과정에서 ‘개조’라는 방식으로 삶의 패턴을 강요받아 왔기 때문인데, 자원이 부족한 한국 사회 구조상 경쟁력이 중요하다는 분위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그것을 습관처럼 이어나가고 있다. 수면시간은 가장 적으나 근로시간은 연간 2357시간으로 OECD 국가 중 압도적인 1위다.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분위기를 개인적인 노력에서부터 바꾸기란 쉽지 않다. 오랜 관습과 사고방식이 짧은 순간에 바뀔 수는 없다. 위로부터의 개혁이 필요하다. 공익캠페인을 벌이거나 정책적으로 수면을 권장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여 우리사회에 만연한 ‘불면만능주의’로부터 벗어나 개인이 스스로의 적정수면시간을 지킬 수 있게끔 유도해야 한다.라틴 아메리카와 유럽 일부 국가에서는 ‘시에스타’라는 낮잠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산업화 이전부터 있었던 풍습이지만 아직도 이를 따라 시에스타 시간동안에는 관공서도 문을 닫는다. 최근에는 스페인 등에서 경제난의 이유로 꼽혀 폐지가 거론되기도 하지만 이는 스페인 문화 본연의 느긋한 문화에 기인한 것으로 시에스타의 효과가 없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일본이나 독일과 같은 일명 부지런한 나라에서는 오히려 도입을 고려하고 있다. 짧은 수면과 긴 근로시간, 학업시간으로 미루어 볼 때, 시에스타는 한국에 가장 어울리는 정책이 아닌가 싶다. 부족한 잠을 낮잠으로 보충하여 업무와 학업의 효율성을 높이고 수면부족으로 인한 오류와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다.
잃어버린 낙원 찾기영화명 : 휘청이는 바퀴 - 얀 르 퀠렉(Yann Le Quellec)우리는 나름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배워왔다. 각자의 길이라는 것이 분명히 있고 우리는 그것을 찾아내야 한다고, 그게 바로 존재의 이유라며 때로는 꿈꾸기를 강요당하기도 한다. 개인에게 주어진 삶의 목적이 있으니까, 사명감을 띠고 그것을 찾아 이뤄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많은 사람들이 모른 채로 삶을 다하고, 소수의 사람이 그 자신의 길을 성공적으로 마치는 것을 보며 나 혹은 우리의 아이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보다. 정작 아이에게 잘하는 것이 뭐냐고 물을 때 기대하는 대답이 ‘공부’면서, 이미 지정해둔 모범적인 삶에서 벗어나면 질타부터 하면서 다른 무언가를 바란다. 시작부터 바퀴가 휘청거리고 있다.삶의 목적에 대해 말하기에 영화는 꽤나 장난스럽다. 우스꽝스러울 만큼 의도적으로 모든 것을 대비시키고 있다. 영화관과 시골, 집배원과 챔피언, 런닝과 턱받이, 편지와 팻말, 말과 정장과 선글라스, 윗동네와 아랫동네, 우직함과 뺀질거림, 홍보와 산천, 사람과 자연, 파랑과 다채로운 원색, 그리고 핸들과 지평선까지. 상충하는 것들의 모임이 영화 전체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결국, 이 모든 대비는 조화로 귀결된다.삶의 목적을 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시 오지 않을 인생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것일 수도, 혹은 목적을 정한 쪽이 대체로 성공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목적이 어찌됐건 무슨 옷을 입고 무슨 목적으로 살았건, 사람들 모두는 각자의 인생이라는 하나의 영화를 산다. 자전거를 타고 산을 오르는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챔피언이든 집배원이든 간에 우리는 같은 지평선을 바라보며 같은 목적지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그래서 멀리 보려 노력한다는 찰리 채플린의 말이 떠오르게 만든다. 자전거 대회 챔피언과 자전거 타는 메신저 두 남자는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왔지만 똑같이 자전거를 타며 같은 길을 살아왔고, 핸들보다는 지평선을 보라는 같은 말을 뱉는다. 지평선을 두고 줄지어 함께 달리는 마지막 엔딩장면은 줌아웃하며 멀리서 보여줌으로써 챔피언과 집배원이 사실은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려는 듯 하다.도시를 덮친 공포편지를 전하던 집배원이 다시금 글자를 운반하는 일을 맡게 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그러나 이번엔 조금 다르다. 편지가 아닌 '도시를 덮친 공포'를 알리는 샌드위치 보드를 메고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영화관 개관의 홍보를 위해 7개의 단어들이 문장을 이뤄 나란히 산천을 달리는데 도대체 '도시를 덮친 공포'라는 메시지는 무슨 뜻이며 왜 산을 달려야만 하는지 관객뿐만 아니라 달리고 있는 단어들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이 임무 이해 못하겠다며 대열을 이탈하려는 젊은 단어들에게 앙드레는 오히려 요령 피우지 말라며 닦달한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낮은 기어로 바꾸지도 말고, 지그재그로 가지도 말고 남자답게 오르라는 말은 그가 살아온 인생을 대변하는 듯 하다. 앙드레에게는 주어진 임무를 수행해내려는 의무감이 그의 삶 전반에 걸쳐 성격으로서 자리매김했고, 바로 그 점이 촌장이 그를 적임자라고 여긴 이유인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이유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자신의 삶의 목적이기도 하다.그러나 그의 동료 단어들은 흥미가 떨어지자 새로운 것을 찾는다. 서로에게서 호감을 구하고 개울을 만나선 헐벗고 헤엄도 친다. 관객에게는 자연스러워 보이는 행보다. 그들이 하는 일 자체가 처음부터 효과를 짐작할 수 없는, 쓸데 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과정이라도 즐겁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앙드레는 오히려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질타를 퍼붓다가, 도리어 광대 짓을 품위 있게 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는 충격에 휩싸인다. 광대였던 적이 없는 그다. 누구보다 진지하게 맡은 일을 해왔다. 같은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같은 무리들이 자신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느낀 것이다. 그와 비슷한 우직한 성향의 젊은 친구 베르나르가 놀고 있는 무리에 합류하지 않는 것을 보며 걱정하게 되기도 한다. 어쩌면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며 살지는 않았나 반성하는 것이다. 바로 앞의 핸들만 보지 말고 지평선을 보라고 말한 자신이 정작 그 동안 주위는 둘러보지 않고 삶을 즐기지 못해왔던 것은 아닌지 생각에 잠긴다.극단적인 비가 내리고 모두가 비를 피한다. 사이클 챔피언도 등장했고, 느낌표도 도착했다. 주요인물들이 처음으로 모인 자리다. 비를 피해 앉아 있는 모습이 가지각색이다. 껴안고 있기도 하고 핸들 고치려 몰두해 있기도 하다. 아직도 침울해 있는 앙드레에게 챔피언이 자신의 노란 모자를 건넨다. 즐겁게 달리라는 말과 함께. 앙드레 역시 또 다른 모습의 챔피언임을, 자신의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해내는 것 역시 소중한 일임을 말하고 있다. 누구에게도 명령 받지 않은 챔피언도, 명을 받아 달리는 집배원도 사실은 같은 길을 가고 있으며, 결국은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곧이어 비가 그치고 처음으로 평화로운 글자들의 행렬이 완성된다. 끝없이 펼쳐진 도로를 그들은 계속해서 달릴 것이다. '도시를 덮친 공포!'라는 글자들은 끝내 도시를 향하지도, 공포를 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영화관은 성공적으로 개관했다. 영화관에 관객이 아무도 오지 않으면 영화관이 관객을 찾아간다는 대사처럼 '도시를 덮친 공포!'라는 이름의 영화가 관객을 찾아 기나긴 여정을 떠난 것인지도 모른다.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서다소 황당한 전개와 신선한 이미지들로 40분 가량의 영화를 시네마스코프에 담아냈다. 경쾌하기도, 허무하기도 한 내용과 결말이지만 영화관이 내 앞에 찾아온 듯 새롭고 반갑다. 우리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가끔은 황당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며, 화합을 꾀하기도, 비를 피하기도 하며 인생을 산다. 상이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수단으로 같은 길을 가는 것을 보여주며 인간의 삶을 소개하고 있다. 다른 듯 잘난 듯 으스대며 살기도 하고 다른 색깔들로 사는 것 같지만 결국은 모두가 인생이라는 영화의 주인공들인데 심각해지지 말고 멀리 보고 즐기며 살자는 말을 코미디로 가볍게 꾸며놨다.촌장과 그의 수하 산쵸의 마지막 말이 결국 영화가 하고 싶었던 말인 것 같다. 잃어버린 낙원이 어디에 있냐는 산쵸의 질문에 촌장은 걱정 말라며 언젠가 꼭 찾을 거라고 답하는 데서 영화는 끝이 난다. 우리는 흔히 가졌던 적이 있거나, 가지는 방법을 아는 것이 사라졌을 때 잃어버렸다고 표현한다. 우리는 낙원이 어디에 있는지 지금 당장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낙원이 어딘가 있다는 것을 틀림없이 알고 있다. 안다는 것, 그리고 찾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당장 핸들 조종하는 것조차 급해 앞을 내다보는 것 조차 힘들지라도, 이미 익숙해져 허무에 빠졌더라도, 의미나 목적 찾기에 혈안이 되어 정작 진짜 삶을 놓치고 있더라도, 삶의 즐거움을 찾으려는 의지, 낙원을 찾아내겠다는 의지가 있는 한 우리의 영화는 언제까지고 코미디일 수 있으며 우리는 삶의 경쾌함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인생의 주인공이다.PAGE * ARABIC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