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를 중심으로 본 실체와 주체스피노자는 1632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비교적 종교의 자유가 있던 네덜란드에서 부모님을 따라 자연스레 유대교를 따랐던 스피노자는 자신의 공부를 점차 늘려감에 따라 유대교의 교리에 회의를 느끼고 자신만의 새로운 이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인격을 가진 신 같은 것은 없으며, 만물 곧 세계와 우주 전체가 신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자신의 이론으로 인해 스피노자는 파문에 이어 수차례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 게다가 당시의 유럽은, 갈릴레오 갈릴레이, 코페르니쿠스 등의 과학자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긴 했지만, 여전히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 교리가 지배하고 있던 세상이었다. 이런 세상에서 스피노자의 주장은 충격적일 정도로 진보적임과 동시에 기존 체제를 부수려는 그의 의지가 드러난다.데카르트가 그의 사유를 가지고 철학을 시작하는 것과는 달리, 스피노자는 신을 가지고 그의 철학을 시작한다. 에티카 1부 정의3에서 실체란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하여 생각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곧 본질이 존재를 포함하며 본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며, 자기원인을 가진 존재가 실체라는 말이 된다. 또한 실체는 그것의 개념을 형성하기 위하여 다른 것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은 실체는 그 자체로 존재해야 하며 존재하기 위해 다른 것에 의존하는 것은 실체라고 할 수 없다. 여기서 데카르트가 주장한 정신과 물체는 실체라고 할 수 없다. 데카르트는 존재하기 위해서는 신의 협력을 제외하고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들, 정신과 물질을 두 개의 실체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어서 에티카 1부 정의6에서는 신을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즉 무한한 속성으로 이루어진 실체라고 한다. 신은 자신의 모든 양태를 갖고 있기 때문에 자기원인을 갖고 있다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신은 유일한 실체가 된다. 그렇다면 정신과 물체는 어떻게 되는가? 에티카 1부 정의5에서 양태는 실체의 변용으로 본다 하였다. 이어서 에티카 2부 정의1에서 물체는 신이 연장된 사물로 고찰되는 신의 본질을 어떤 일정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양태라고 한다. 즉, 물체는 신의 무한한 속성의 일부에서 연장이라는 속성을 받아 생겨난 양태로 보는 것이다. 정신도 마찬가지로 사유라는 속성을 가진 양태이다. 세계의 만물은 신이 가진 속성의 한 양태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피조물은 신이 자신의 속성을 드러내는 방식에 따라 만들어지며, 따라서 신의 일부이다. 에티카 1부 공리1에서 나오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자신 안에 존재하거나 아니면 다른 것 안에 존재한다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그렇다면 신이라는 한 실체가 어떻게 그렇게 다른 정신과 물체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 혹은 신이 가진 무한한 실체 중에 왜 하필 정신과 물체뿐인가? 실체를 사유라는 속성의 측면에서 고려할 때 우리는 정신을 느끼게 되고 이번에는 연장이라는 속성의 측면에서 고려할 때 우리는 연장을 가진 물체를 보게 되는 것이다. 또한 에티카 2부 공리5에 나와 있듯이 물체와 사유의 양태 이외의 어떤 개물에 대해서도 우리는 감각하지 않는다. 신의 속성은 무한하지만 인간의 지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정신과 물체뿐 이라는 것이다. 에티카 2부 공리4에서는 우리는 우리의 신체가 다양한 방식으로 자극받는 것을 느낀다고 한다. 즉, 자극받을 때문 우리의 신체가 있다는 것을 사유하며 마주치지 않는 순간에는 정신과 실체가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신과 물질은 신을 중심으로 평행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심신평행론’이라 한다.또한 스피노자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에티카 1부 정의7에 오직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존재하며 자기 자신에 따라서만 행동하게끔 결정되는 것은 자유롭다고 한다. 이는 곧 자기원인을 가진 것만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정의7에 이어서, 다른 것에 의하여 특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작용하도록 결정되는 것은 필연적이라거나 강제되었다고 한다는 것은 양태, 모든 만물에게는 자유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양태는 다른 것 안에 있으면서 다른 것에 의하여 생각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유의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되나? 우리는 분명히 무언가를 원한다는 의지를 사유할 수 있다. 하지만 의지란 그저 사유의 한 종류일 뿐, 실제로 그런 능력을 발휘 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신의 양태, 즉 자연의 일부로서 나무에 매달린 사과가 중력의 작용으로 땅에 떨어지듯이 그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인간을 만물의 영장에서 단순히 자연의 일부분으로 끌어내렸다.상술한 스피노자의 주장을 바탕으로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의 경우를 살펴보자. 우선 데카르트는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의심을 하고 불확실한 것들을 의심하여 없애나갔다. 데카르트는 감각이 무언가에 의해서 조작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감각을 믿지 않았다. 마치 매트릭스 안에 들어가 있는 인간의 경우처럼 모든 감각은 가짜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단 한 가지 의심할 수 없는 것은 데카르트가 의심한다는 사실이다. 의심한다는 것은 의심하는 주체가 필요하며 그것은 곧 의심하는 나의 ‘존재’를 확실하게 한다. 이러한 생각에서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명제를 이끌어낸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몇 가지 역설이 생긴다. 의심한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더 이상의 사유는 없어지며 그렇다면 존재는 어떻게 되는가? 혹은 잠들었을 때나 기절했을 때처럼 생각을 하지 못할 때는 어떻게 되는가? 데카르트는 여기에서 신을 요청한다. 의심한다는 것은 자신의 불완전성을 인정한다는 것이며, 그 불완전한 나를 보증해줄 완전한 것이 필요하며 그것을 신으로 놓았다. 신이 나를 보증해주므로 나의 정신은 온전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정신이 인식하는 물체 또한 온전히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데카르트의 실체는 신에게 의지하지만 다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는 두 가지, 정신과 물질로 보며, 정신과 물질을 철저히 분리시켜 심신이원론을 주장했다. 또한 정신과 물질을 분리함으로써 자연의 필연성에서부터 인간의 자유의지를 확보하였다.라이프니츠는 자연을 단순한 실체들이 배열을 이뤄 복합적인 것이 된 것으로 보았다. 그 단순한 실체는 바로 모나드이다. 마치 과학에서의 원자, 분자 개념과 비슷해 보이지만 모나드에는 물질이 없다. 물질이 있다면 그 물질이 아무리 작더라도 분할 가능하며 그것은 실체의 정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모나드를 미분의 개념에서 본다면 한 선이 길이가 길던 작던 상관없이 그것은 무한히 많은 점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다. 때문에 그 선을 미분하면 모든 곳에 속도, 크기, 방향등의 성질을 지는 무수히 많은 점들이 있는데 그것을 모나드로 본다. 모나드는 자기 안에서 무한하기 때문에 자기원인을 갖고 있으며, 그 자체로 존재한고 영원불멸한다. 또한 모나드에는 창이 없다. 창이 없다는 것은 모나드들이 서로 상호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상호작용을 하여 다른 모나드가 한 모나드의 내부에 간섭할 수 있다면 그 모나드의 본질이 바뀔 수 있으며, 한 실체가 다른 실체에 의존한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폐쇄성 때문에 우리는 모나드 내부를 알 수 없으며 오로지 현상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모나드 내부는 그 자신만 알 수 있으며 모나드 내부의 고유한 성질은 그 어떤 것에도 방해를 받지 않고 완전한 자율성을 가진다. 단지 다른 모나드들과 부딪히며 그것의 벡터에만 영향을 받을 뿐이다. 모든 사건은 이러한 벡터들로 인해 움직이는 모나드들이 마주치는 상호작용이다. 이러한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순간 모나드 내부의 잠재성이 현실태가 되어 나타나며 ‘사건’을 일으킨다. 하지만 벡터는 기본적으로 모나드 내부의 욕구에 의해 형성된다. 지각은 모나드가 뭔가를 알게 하는 것이며 욕구는 모나드가 한 지각에서 다른 지각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이며, 모나드 내부의 어떤 힘, 잠재성을 외부로 발산하게 하는 힘이다. 때문에 곡선(사건)을 미분하면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부분, 즉 기울기(모나드)가 나오고 그것으로 벡터로 표현되는 속도, 방향들의 성질을 알 수 있는 것이며, 모나드는 사건의 원인이 된다. 그렇다면 제각기 다른 욕구대로 움직이는 모나드들이 어떻게 질서를 갖추며 세상을 이루는가? 라이프니츠는 여기서 신을 끌어들인다. 아까 모나드는 모든 사건의 원인이라고 상술하였다. 하지만 사건의 수는 무한히 많고 우리의 지성으로는 그 모든 사건에 대해서 충분한 이유와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이유와 근거가 없어 보이는 우연한 사건에 있어서도 단지 우리가 알지 못할 뿐이지 신의 무한한 지성으로 본다면 무언가 이유와 근거가 있다. 신은 이렇게 모든 사건들의 원리가 되며 모나드들이 그렇게 움직이도록 배치한다. 말하자면, 모든 모나드의 모든 것을 미리 정해놓았고, 모나드들은 그렇게 행동하도록 예정되어있고, 그 예정대로의 행동들이 조화를 이루도록 신이 배치하였다는 것이다. 때문에 라이프니츠는 모나드들은 마치 자신의 선택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단지 예정을 알지 못하고 예정대로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