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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중문화의 탈신화화
    대중문화의 탈신화화바르트가 말하는 ‘탈신화화’는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비판’ 『문화이론과 문화철학』, 161p 두 번째 문단 참조, 일종의 허위의식을 비판하는 것을 말한다.의 현대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신화론(Mythologies)》의 서문에서 자신의 의도를 두 가지로 밝히고 있다. 하나는 대중문화의 언어활동에 대한 이데올로기 비판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비판하는 언어활동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이다.기호학자인 소쉬르는 ‘기표(記標)’와 ‘기의(記意)’라는 것이 기호의 근본을 이루는 두 성분이라고 보았다. 기표란, 기호의 지각이 가능하고 전달이 가능한 물질적인 부분을 말한다. 이것은 소리나 글자, 혹은 단어를 이루는 표기의 집합 등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외적 형식을 모두 포함한다. 그리고 기의란, 이 기표가 전달하고자하는 의미이다.소쉬르의 영향을 받은 바르트는 언어 중심의 기호학이 언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에도 적용된다고 보며, 이를 문화적 현상 전반에 걸쳐 확대 적용한 ‘문화의 기호학’을 구축하였다. 설명하자면, 그는 우리의 먹고 입는 방식, 서로 소통하고 교류하는 사회적 방식도 하나의 기호체계처럼 다룰 수 있다고 본 것이다.그런데 바르트가 말하고자하며 그의 논의대상이 되는 기호는, 그것을 통하여 무엇을 말하고 의사소통하려하는 의도가 담긴 인위적인 기호이다. 그는 문화현상, 특히 대중문화에 일차적인 기호학적 의미뿐만 아니라, 이차적이고 숨겨진 ‘신화적’ 그리스로마신화와 같은 것이 아니라, 암묵적으로 기호로 사용될 수 있는 사회의 모든 것들을 그 질료로 해서 무엇인가를 말하며(파롤을 이야기한다.) 담론화 된 어떤 것을 의미한다. 그 외에도 사진이나 영화, 스포츠나 공연 등 모든 것이 신화적 파롤의 질료로 사용될 수 있다.의미가 담겨있다고 보았습니다. 아래의 도식을 살펴보면서 이해하자면, 기표와 기의가 합쳐져서 그것이 기호가 되듯이, 1차적으로 생성된 기호들이 기표가 되고, 그 뒤에 가려진 이차적인 의미가 합쳐져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대중문화가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바르트는 이렇게 만들어지는 신화들이 자연스러운 외관으로 독자들에게 호소하고, 그 의미작용에 자연성을 보여줘 자신의 기의를 은폐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가 대표적으로 예를 드는 《Paris Match》의 흑인청년의 경례는 단순한 경례가 아니다. 그것은 ‘경례’라는 단순한 기호 속에, 프랑스의 모든 아들은 피부색과 인종의 구분 없이 프랑스 국기 아래 충심으로 봉사한다는 의미가 숨어있는 것이며, 이것은 그들의 식민주의에 대하여 비방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에게 충성하는 이 흑인 청년의 열정보다 더 훌륭한 것이 없다는 의도도 은폐되어있다. 이 외에도 우리 주변에 있는 흔한 일상적인 물건이나 관습들도 사회적인 용례에 의하여 이차적인 의미를 획득하여 하나의 신화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신화들은 이중적인 체계를 지니고 있으며, 그 이중적인 기능이 효과적으로 작용할수록 신화는 더욱더 정당화된다고 말한다.
    인문/어학| 2015.05.24| 2페이지| 1,000원| 조회(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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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작된 문화
    조작된 문화문화는 여러 가지 의미로 정의되지만, 그 정의들 중 가장 공통적인 것은 인간이 자연에서 벗어나거나(혹은 이용하여) 만들어낸 물질적, 정신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본인이 생각하는 문화도 이와 비슷하다. 사람이 자연에서 살아남으며 자연 발생적으로 생성되었으며, 후에 사회집단에서 그것이 계승되고 전승되어 전해 내려온 것이 바로 문화이다.그러나 고급문화나 그에 대비해 저급문화로 불리는 대중문화나 필자가 생각하는 올바른 문화에서 벗어난 것이다. 물론 ‘문화’라는 단어가 지니는 뜻들에 그들이 포함되는 것은 사실이다. 저 또한 그들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작금에 이르러 그들이 문화가 아니라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이 바른 것인지에 대하여 한번쯤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필자는 그들이 일종의 ‘조작’에 의해 탄생되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고급문화는 보통 ‘귀족의 문화적 전통을 이어받아 소수의 지식인이 생산하고 향유하는 문화’로 정의된다. 이 고급문화의 정의에서 주목할 단어는 ‘귀족’이라고 생각한다. 귀족들은 기본적으로 특권계층이다. 귀족들이 즐겼다고 하는 고급문화가 과연 사람들 사이에 신분이라는 것이 없었을 때에 존재하였을까? 사람들이 모두 평등한 사회에서의 문화는, 크게 말하면 자연적으로 발생한 생존방식이었을 것이고, 유희적인 것에 관련된 것도 숨바꼭질이나 술래잡기와 같이 다른 이들과 어울려 그저 주변의 것을 가지고 노는 것으로 그쳤으리라 생각된다.그러나 사람들 사이에서 사유재산이 발생하고 빈부격차가 생기기 시작하면서부터 서서히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높낮이, 즉 신분이 있다는 것으로 서서히 인식이 바뀌어갔을 것이다.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 때, 보통 자신을 과시하거나 구분하는 것을 좋아한다. 당시 선사시대의 사람들에게 신분의 높낮이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 중 하나는 ‘고인돌’이다. 그 크기에 따라 묻힌 사람의 신분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저는 이것이 초기의 귀족문화라고 생각한다. 이 외에도 당시의 권력자들은, 자신을 과시하기 위하여 장신구를 잔뜩 패용하고, 다른 평범한 이들과는 달리 청동기를 가지고 하늘에게 제사를 주관하였던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점점 시간이 흐르며 중앙 집권국가가 완성된 뒤, 사람들은 크게 왕을 필두로 나라를 다스리는 귀족집단과 지배당하는 평민집단으로 나뉜다. 종교집단은 각 국가에 따라 다른 위치를 차지하였으므로 얘기하지 않겠으나, 그들도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고 가진 것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유럽을 예로 들면 귀족집단은 그들만의 궁정문화를 만들어내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문화적인 삶을 누린다. 그러나 그에 비해 평민집단은 전혀 그렇지 못하고, 자신의 생활을 꾸려나가기에 급급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신분체계는 소위 부르주아 프랑스어 bourgeois라고 부르는 계층에 의하여 전복되었다. 귀족이라는 지배집단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 또한 일반 민중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간다. 그들은 자본가로 자리를 잡으며, 귀족의 문화를 일부 계승하여 자신들의 문화로 가꿔나갔다. 물론 소수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문화들이 향유된 건 사실이지만, 여러 면에서 살펴볼 때 그들보다는 자본가들이 귀족문화를 계승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라 생각한다.이들이 향유한 문화가 과연 자연적으로 발생하였을까? 필자는 이들이 자신과 다른 낮은 이들을 구분하고 스스로를 더욱 부각시키기 위하여 만든 것이 통칭 고급문화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문화를 살펴볼 때, 우리는 자신에게 쉽게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그들이 고급스럽다거나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그들이 말하는 초현실주의적인 작품들을 우리는 그들이 예술작품이라고 말하기에 우리가 보기에는 아니지만 인정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그럼에도 우리가 그들의 문화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것은 대중매체가 발달하면서 일반 민중들에게 퍼지며, 그를 통해 이미 익숙해지기도 하였고, 일종의 그들을 따라하고 싶은 마음, 혹은 부러움, 시기, 질투 등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가 그들의 조작된 문화에 이미 길들여져 버렸기 때문이 아닌가싶다.이에 반해 대중문화는 ‘대중이 형성하는 문화’를 의미하며 대중매체의 발달로 인하여 형성이 촉진되었다. 대중문화의 경우는 주로 향유하는 계층은 민중들이다. 대중매체를 통하여 사람들은 소수만이 향유할 수 있었던 고급문화와는 다르게 대다수가 그 문화의 혜택을 누릴 수가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대중문화 자체도 조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인문/어학| 2015.05.24| 2페이지| 1,000원| 조회(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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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살의 도덕성과 합리성
    자살의 도덕성과 합리성자살은 보통 자신의 죽음을 초래하는 행위라고 정의됩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2010년에 OECD국가 중 자살률 부문에서 1위를 할 정도로 심각한 사회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이유들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자살의 이유는 생활고, 사업실패, 가정불화, 고독, 질병으로 인한 고통 등등 이유는 수없이 많지만, 그것을 크게 보자면 ‘힘들기 때문’이라는 하나의 이유로 통합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자살은 하면 안되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자살을 도덕적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강합니다. 왜 자살을 도덕적으로 문제시하는 걸까요? 몇 가지 사례들을 통하여 첫 번째 문제인 자살의 도덕성에 대하여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우리나라는 조선시대부터 성리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공자가 증자에게 한 말을 편저하였다고 전해지는 ‘효경(孝經)’에서는 ‘몸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니 다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유교적 사회관을 기본 이념으로 삼은 조선에서, 자살은 당연히 죄악시 되어왔을 것입니다.서양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도 자살은 ‘죄’로 분류되어 왔습니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국가의 승인 없이 자살을 행한 사람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장례를 치룰 수 있는 자격을 박탈하고 도시 변두리에 비석 없이 매장하였습니다. 1670년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자살자의 몸을 길거리에 끌고 다니고 쓰레기더미에 던져버리는 법령을 제정하였습니다. 과거 미국에서도 1990년대까지 몇 개의 주는 자살을 범죄로 취급하였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유대교,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에서는 생명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고 여기고, 십계명에서도 살인하지 말라는 부분에서 자살은 자신을 죽이는 것이기 때문에 죄로 여김. 불교에서는 자살을 할 경우 지옥, 아귀도, 축생계로 정해진다고 간주될 정도로 큰 죄. 이슬람교에서 중요시 하는 것은 ‘알라’와의 계약인데, 자살은 그 계약을 저버리는 것이므로 죄악시함.같은 종교에서도 자살을 죄로 구분합니다.반면, 자살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문화권도 있습니다. 고대 ‘육사외도(六師外道)’중 하나인 자이나교 "태어난 이후부터 이 몸은 오롯이 자신의 것이며 이 신체의 자유를 박탈할 권리도 오롯이 자신에게 있다"는 자이나교의 핵심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임나 일본의 무사도 정신과 관련된 할복문화입니다.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거나 자신의 주군에게 충성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할복을 시행하였습니다. 사무라이 계급의 문화가 일반인들에게까지 퍼지고, 다른 일본의 문화들이 결합되어 자살이 매우 성행합니다.자살 행위가 죄이거나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것인가 하는 문제는 자살 당사자가 도덕적으로 자살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점이 전제되어야만 제기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이해하자면 당사자가 ‘죽음으로밖에 호소할 수 없다’라고 느끼는 상태라면,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공감한다면 우리는 자살이 도덕적으로 문제라 비난하지 않는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태권도 관장 2013.5 자살기사 1)이 자살기사는 몇 달 전부터 페이스북에서 많이 공유되었던 한 태권도관장의 자살에 관련된 기사입니다. 아마 몇 학우들께서는 이미 접해봤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자살사건을 두고 우리는 자살을 한 태권도 관장이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비난하지는 않습니다. 비난의 대상은 그를 자살이라는 선택을 하게 만든, 불공정한 대한민국 태권도계와 해당 경기의 심판이었습니다.(세 모녀 2014.3 자살기사 2)송파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많은 국민들에게 안타까움을 안겨주고, 우리나라 사회복지제도에 문제가 있다며, 법의 시행까지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들의 자살에 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쌍하고 안쓰럽다는 반응은 보이지만, 도덕적으로 비난하지 않습니다.이와 같은 사례들과는 달리, 우리는 이유가 있고 사람들이 공감하기에 충분한 자살은 인정하며, 당사자를 기리거나 후대에 기억합니다. 1905년 을사늑약 당시, 민영환은 그에 분개하며 자살을 하였습니다. 당시 을사늑약은 대한제국 국망(國亡)으로 이야기되었고, 그의 자살은 유교의 또 다른 가치인 ‘충(忠)’의 실현으로 비쳐져 지금까지 기록되고 있습니다. 외국에서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정신을 이야기 할 때, 대표적으로 ‘깔레의 시민’이야기를 합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몇 백년이 지난 후 동상으로 제작되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옵니다. 이러한 사례들에서 우리는 그들이 죄를 지었다는 생각보다는, ‘대단하다’라는 감정이 먼저 듭니다.그런데, 위에서 한 이야기들과는 다르게 자살을 한 사람이 우리 개인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거나 범죄자인 경우에는, 적어도 피해를 받은 당사자는 그들의 자살이 도덕적이지 않다고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죽음을 기뻐하며 그들이 잘 죽었다고 여깁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히틀러를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다.정리하자면, 저는 자살이 도덕적인가 그렇지 않은가의 판단을 내리는 것에 대하여 영향을 미치는 많은 이유들 중 세 가지를 찾았습니다. 첫 번째로, 문화권에 의하여 영향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자살사건으로 인하여 우리의 사회에 어떠한 파급이 미칠 것인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세 번째로는 자살 당사자가 그 사건이 일어난 후 구성원에게 어떠한 영향을 줬었는지 그들이 우리에게 피해를 입히고 자살을 하였거나, 깔레의 시민들처럼 그들의 죽음으로 타인이 도움을 받은 경우입니다.다음 문제인 자살의 합리성에 대하여 이야기 하자면, 자살이 합리적일 경우는 앞으로의 삶보다 자살이 더 나은 선택이며 최선일 가능성인 경우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만 자살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느끼는, 비합리적인 선택을 내리도록 영향을 끼치는 것들이 있습니다.한 가지는 어떤 심각한 감정으로 인한 침울한 상태로, 그것은 우리의 이성을 마치 족쇄를 매달 듯이 무겁게 하여 합리적인 판단을 어렵게 합니다. 스스로의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관찰하는 힘을 제한시키고, 앞으로 일어날 일의 확률성에 대한 판단력을 흐려지게 합니다. 감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 스스로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인문/어학| 2015.05.24| 3페이지| 1,000원| 조회(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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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계와 권력
    경계와 권력우리에게 있어서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무엇일까. 우리는 흔히 어떤 틀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면, 그 행위를 한 사람들을 비정상적이라고 여기거나 그것은 틀린 것이라고 하며 그 행위에 대한 것을 하지 말 것을 말한다. 의문점은 여기서 발생한다. 이것이 왜 틀린 것일까? 이게 왜 비정상적인 것이지?「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주인공은 미치지 않았음에도 정신병원에서 생활을 한다. 그 곳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보며, 옳고 그른 것이 뒤바뀐 것 같았다. 그 영화를 보면, 환자들에게 도움이 된 것은 그곳의 의사들이 처방해준 약이나 간호사들이 아니라, 그곳의 환자로 수용되었던 주인공이었다. 영화의 끝부분에서는 한 환자가 자해를 했는데, 그 병동의 책임자인 수간호사가 다른 환자들에게 일과로 돌아가라고 지시하고, 그곳의 환자 가운데 하나인, 소동 중에 탈출하려다 돌아온 주인공만이 그에 분노하여 대든다. 극중 인물들끼리 서로 해야 하는 행동이 뒤바뀐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영화를 살펴보면, 정신병원에 수감되어있던 환자들이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하고 분노하고 좋아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흔히 정상인들이 행동하는 것처럼 오락거리를 좋아하고, 어떤 환자는 주인공을 도우러 온 여자에게 고백하기도 하였으며, 다른 환자는 자신의 권리가 침해당하자 화를 냈다. 이들은 무엇 때문에 격리되어있는 것일까?이에 반하여, 정신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봐야하는 간호사들은 자신들이 정한 틀에서 환자들이 조금이라도 벗어난 행동을 하면 정색을 하며 그들을 나무란다. 또한 그들이 난동을 피우거나 말을 듣지 않으면 전기충격기를 사용하여 그들을 강제로 잠잠하게 만든다. 병원이라는 작은 공간 안에서, 그들은 군림자이며 계층을 나누고 경계를 구분하는 이들이다. 환자가 자신이 정상이라고 말하여도, 그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비정상이라고 말하며 그들에게 더욱 가혹한 처벌을 내린다. 이들 사이에 왜 이런 경계가 있는 것일까?우리의 사회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어떠한 경계로 인하여 조각조각면 정상과 비정상, 이성과 비이성, 우수와 열등과 같은 것들을 나누는 경계가 아닐까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사람들이 물질적·정신적 생활방식에 있어서 큰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은 그 경계의 안에서 자라나서 경계 안은 ‘우리’가 되고, 경계 밖은 ‘다른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아마 푸코도 자신의 경력 때문에 정신병이나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의 차이에 대한 많은 고민을 가지고 그를 해결하기 위하여 연구를 했을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가 수많은 정신병과 관련된 기록들을 살피며 연구하고 고민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정리한 책이 『정신병과 심리학』이라 생각된다. 그는 이 책의 5장에서 광기를 시대에 따라 어떻게 취급되었는가를 르네상스, 고전주의, 근대의 세 시기로 나눠 정리해놓으며, 그 시대에 따라 광기가 받는 대우가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시기들 사이에 이상과 광기를 구분하는 어떤 ‘경계’가 있으며, 그를 권력이 감시와 처벌을 통하여 유지한다고 말한다.사람들은 왜 광인들을 두려워하고 그들에게는 이성이 없다고 판단하며 내쳐버렸을까? 그들을 나누는 경계는 무엇인가? 푸코는 이 경계가 무엇이며, 어디에서 온 것인가에 대하여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 경계를 허묾으로서 그동안 동일자의 우세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던 ‘외부’에 대하여 다시 사고할 수 있고, 기존의 동일자에 대해서도 새로이 사고하게 만들려한다.그런데 과연 그의 방법은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그의 방법보다는, 동일자 내부의 균열을 드러내는 데리다의 방법이 훨씬 효과적으로 보인다. 물론 짧게는 수십년간, 길게는 몇 세기를 이어왔던 경계들을 단번에 허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 강력한 경계를 부수기 위하여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번 휜 것을 똑바로 세우려면 더 강한 힘을 반대쪽으로 가해야 원위치로 돌아가는 것처럼, 뭔가 커다란 충격이 가해져야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을까?다른 측면에서 그의 시대마다 경계가 달라질 수 있다는 주장을 이해해보자면, 그는 에피스테메(e것은 사고를 가능하게 해주고, 특정한 방식으로 사물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무의식적인 기초이다. 그는 위의 세 시대를 각각 유사성, 표상, 실체의 에피스테메로 요약할 수 있다고 말한다.특히 근대의 에피스테메는 고전주의 시대와는 달리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실체를 인정한다고 하며, 그 실체가 진화한다는 생각으로 인하여 ‘역사’라는 개념이 나타났다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개념이 근대의 산물이라고 말하며, 현재 ‘이성’으로 불리는 동일자가 사실은 역사적으로 상이하게 존재하였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동일자와 타자의 경계선이 결코 하나로 고정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이 근대의 산물이라는 것을 밝힘으로써, 근대철학의 지반을 그 역사성 속에서 볼 수 있도록 재배치한다.그런데 과연 푸코가 말하는 경계라는 것이 지식-권력에 의해서만 생성된 경계일까? 책의 내용에서 보면, 17세기 중반부터 부랑자들과 광인들을 구분없이 한 장소에 수용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것에는 어떠한 의학적인 성격도 없었지만, 프랑스대혁명 후의 강제수용부터는 의학적 성격의 조치로 바뀐다. 그리고 그를 주관하는 의사들에 의하여 광기는 통제하고 감시된다. 이러한 부분을 살펴볼 때, 푸코의 말처럼 광기와 이성을 구분하는 경계를 지은 사람들은 의사들은, 그들의 지식에서 그 힘(권력)이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런데 과연 의사들만이 그들을 사회에서 처음으로 그 경계를 구분하였던 것일까? 내 생각에는 ‘이성’이라는 개념이 생기고 나서부터 이미 사람들은 광인들을 ‘단순히 자신들과 다른 삶의 방식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사람이 아니라 ‘무엇인가 정상적인 우리들과는 틀린 사람’,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그 전부터 막연하게 존재하였던 인식이 서서히 구체화되고 굳어졌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본주의가 생성되며 정책이 수립되었다고 해도, 어떻게 얼마 전까지 같이 어울리며 생활하던 사람들을 갑자기 가둘 수 있단 말인가.물론 이 ‘이성’이라는 것도 지식-권력에 들어갈 수 있겠지만, 나하기 시작하였다고 생각한다. 광인들이 사회에서 정상인이라고 구분되는 사람들과 구분 없이 어울려서 살았겠지만, 그 과정에서도 크고 작은 말썽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같이 어울려 살아도, 광인이 아닌 사람들은 겉으로는 웃을지라도 속으로는 욕을 하는 등의 조금씩 꺼리는 것이 자리를 잡았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단지 그것이 ‘이성’이 발생하고 확연히 구분되기 시작하였으며, 후에 자신들과는 다르다고 사회에 해가 된다는 이유로 그들을 잡아가둘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리고 의사들은 그 보이지 않는 마음의 경계선위에 그들의 지식을 울타리로 세웠을 뿐이다. 나는 의사들이 그들의 지식-권력을 내세워 그들을 치료하려고 하지 않았더라도,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광인들을 조금씩 배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들이 격리되었으리라 생각한다.푸코는 경계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나도 이 말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여기에 사견을 덧붙이자면,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그것을 바라보는 각자의 관점에 따라 그 경계들은 다르게 보인다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맹인모상(盲人摸象, 장님 코끼리만지기)과 같이 우리가 전체적인 것을 알지 못할 때는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부분만 말한다. 또한, 사람들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막연한 공포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과연 사람들은 광인들과 어울려 살며 그들과 자신이 다른 것이 광기가 드러나는 정도의 차이라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우리는 사람이기에, 우리의 마음속으로 최소한 각자의 경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경계들 중 많은 사람이 비슷한 형태로 가진 것들 중에서 큰 편에 속하는 것들이 바로 이성과 광기를 나누는 경계일 뿐이다. 아마 광인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계를 넘나들며 그들을 불편하게 했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단지 그 경계가 각자 조금씩 다른 것을 서로 암묵적으로 합의하지 못하다가, 큰 획을 긋는 사건들(17세기 강제수용 등)로 인하여 그들을 구분 짓는 것근본에는 지식만 존재하는걸까? 그는 담론 안에는 권력이 있고, 담론은 권력과 그 행사를 정당화해준다고 한다. 반대로 지식도 자신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권력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며 ‘지식-권력’, 즉 지식과 권력에 뗄 수 없는 복합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나는 이 권력이라는 것이 온전히 지식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다름을 구분하는 것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지식인 것은 분명하다. 나와 저들을, 정상과 비정상을, 이성과 광기를 구분하려면, 적어도 먼저 한 측면을 알아야 할 것이고 보통 두 측면 모두를 바라봐야 그 경계를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물어볼 것은, 지식적인 측면이 존재하기 전에는 그들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가 몰랐는가에 대한 것이다. 위에서 말하였듯이, 사람들이 당연히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알기 전부터 선행하는 것은, 인지적인 것이다. 그것을 보거나 듣거나 생각하여야 알 것 아닌가. 그리고 우리의 감각기관들을 통하여 들어오는 정보들은, 같은 바람이 사람들마다 다른 온도를 느끼는 것처럼 프로타고라스의 인간만물척도설에 대한 이야기 중 하나.개인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측면이 많다. 또한 우리의 생각도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어서 그릇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부분들은 우리가 지식적으로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다. 모두 우리 스스로가 생활하며 깨우칠 수 있고, 자연스럽게 아는 것 들이다.다른 것을 이야기해보자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의 필요에 의하여 상대적으로 사회적 약자이며 소수인 광인들을 붙잡아 넣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의 원인은 지식적인 측면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본성들 중 하나인 이기적인 부분들과 때마침 자본주의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며 변화된 사회의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사회적인 동물임과 동시에 개인을 위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제들은 예전부터 논의되어왔고, 개인이 스스로를 위하여 얼마나 이기적일 수 있는지도 충분히 연구되어 있을 터이고,다.
    독후감/창작| 2015.05.24| 5페이지| 1,000원| 조회(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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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론주의가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을까
    피론주의가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을까?Sextus Empiricus는 『피론주의 개요』에서 피론주의의 내용을 집대성하였는데, 그 내용을 약술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로 아직 우리는 진리를 찾아내지 못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진리는 (파악될 수) 없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마지막 세 번째는 우리는 계속해서 진리를 찾는다. 이 세 가지로 정리되는 피론주의는 고르기아스의 강경한 회의주의보다는 보다는 우리에게 더 무난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그러나 이 피론의 주장도 자세히 살펴보면, 모순된 말로 보입니다. 첫 번째 명제는 이미 그들이 저렇게 주장하는 것이 진리가 아니라는, 일종의 자기모순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물론 극단적으로 ‘진리는 없다’라고 말한 고르기아스와는 달리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고 하였지만, 그들이 찾아내지 못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진리로 볼 수도 있기에 그들의 첫 번째 명제는 타당하지 못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두 번째와 세 번째 명제를 같이 말하자면, 자신들은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아직 찾기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계속 탐구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도 위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말한 명제가 진리가 아니라는 자기모순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명제들은 현대인들에게 당연시 여기는 단순한 과학적 진리들도 존재하기에, 이러한 피론의 주장은 우리들이 받아들이기엔 문제가 있습니다.게다가 피론주의자를 비롯한 회의주의자들은, 우리가 아직 진리를 찾아내지 못했다면 사태의 참된 본성과 관련하여 필연적으로 ‘판단중지(epoche)’가 요구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는 제가 보기엔 예전에는 모르겠지만 요즘의 상황에는 맞지 않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판단중지를 한다면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마음의 평정(Ataraxia)’을 얻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시대에 피론주의를 적용해보고자 한다면, 개인의 마음의 평정보다는 대다수의 사회구성원들의 심적 평정이 필요한 것으로 보입니다.물론 개인에게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사회 구성원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 사회 여러 방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문제들은 아직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했거나 개인에게 혼란을 준다는 이유로 개인들이 판단을 유보한다면, 그대로 계속 곪아갈 것입니다. 순망치한이라는 말처럼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하여 사회가 혼란하다면 구성원 개개인들도 영향을 받을 것이고, 그 병든 사회에서 왜 힘든지도 모른체 그에 적응하여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역으로 개개인들에게 문제가 있다면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여 혼란스러워 질 것입니다.
    인문/어학| 2015.05.24| 1페이지| 1,000원| 조회(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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