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조선인민 민주주의공화국 설립과정-김일성 중심의 권력투쟁을 중심으로1.해방 이후 북조선 정치기구의 설립1-1. 소련의 간접통치와 자치적인 인민위원회 수립1-2. 조선 인민 민주주의 공화국의 설립2. 권력 구축 경쟁2-1. 김일성의 생애2-2.해방 직후 다양한 정치세력의 공존2-3. 한국전쟁과 김일성의 권력 장악 과정2-3-1. 연안파의 좌절2-3-2. 소련파의 독주견제2-3-3. 남로당의 몰락3. 한국전쟁 이후 권력 정비 과정4. 북한 지배이데올로기의 생성1.해방 이후 북조선 정치기구의 설립1-1. 소련의 간접통치와 자치적 인민위원회 수립남한에서 미군정이 자리 잡은 한편, 북한 지역에서는 소련군이 미국과는 다소 다른 방식으로 군정을 실시한다. 미국의 히로시마 원폭 투하 직후 재빨리 대일전에 참전한 소련군은 1945년 8월 11일 처음으로 함경북도 웅기에 상륙하고, 일본군과의 치열한 교전 끝에 22일 일본군의 공식적인 항복을 받는다. 38도선 이북을 점령한 소련은 조선인들의 자치 능력을 인정하여 행정권을 인민위원회에 이양한다.조선 사람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여러분 수중에 있다. 여러분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달렸다...조선 인민은 반드시 스스로 자기 행복을 창조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붉은 군대 사령부는 모든 조선 기업소들의 재산을 보호하며 그 기업소들의 정상적 작업을 보장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원조할 것이다... 해방된 조선 인민 만세! (치스차코프의 포고문)이렇게 소련은 미국과는 다르게 간접통치 방식을 취하였다. 각 지역에 세워진 다양한 건국 준비 조직을 좌우 합작의 인민위원회로 편성하고 행정권을 이양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친일 세력 척결이나 토지 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북한에서는 당에 의한 지배 체제 구축과 정부 수립 과정이 각종 개혁과 함께 추진되었다. 1945년 10월, 북한 지역의 공산주의자들이 모여 38도선 이북 지역을 관할하는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을 설치하는데(10.10) 이때 김일성 등 항일 수립.남한에서 5·10 총선거가 단독으로 실시되자 북한에서는 2차 남북 현상을 추진하지만, 결국 진정한 의미의 남북 통일 전선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 정권의 선전 수단으로 이용되었을 뿐이었다.남한의 정부 수립 직후인 8월 25일 북한도 총선거를 실시하여 남한의 국회의원과 같은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한다. 수상에 김일성, 부수상에 박헌영, 홍명희, 김책 등을 선출하고 9월 9일 정부수립을 선포하여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출범한다. 이로써 한반도에 이념과 체제를 전혀 달리하는 두 개의 분단정부, 두 개의 분단국가가 들어선다.2. 권력 구축 경쟁2-1. 김일성의 생애김일성의 출생, 유년기1912년 4월 15일 현재의 평양시 만경대의 평범한 농부의 가정에서 3남중 장남으로 태어나 1994년 7월 8일 사망했다. 본명은 김성주이며, 아버지는 김형직, 어머니는 강반석이다. 마버지 김형직은 이 지방에서 대대로 살아온 농민의 아들이었으며, 어머니 강반석은 용산면 하리 칠곡의 하리교회 장로의 딸이었다. 부모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적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은 숭실 중학을 졸업하고 서당 교사가 되어 교편을 잡았으며, 1917년 3월 비밀 정치 결사인 조선국민회 결성에 참가한다. 1918년 2월 체포되었다가 출혹해 가족들을 데리고 만주로 옮겨간다. 아버지 김형직이 무송에서 한의사로 자리잡아 김일성이 1926년 무송 제1소학교를 졸업한 뒤 만주 화성의숙에 입학하나 아버지의 갑작스런 별세로 학업을 중단한다. 어머니의 권유로 1927년 길림의 육문중학교에 다시 입학하나 이곳에서 조선 소년회 회장이 되어 공산주의 운동, 반일 시위를 벌이다 체포되면서 1929년 5월 학교를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 이것으로 그의 정규교육이 끝난다.(와다 하루키1992)김일성은 본명인 김성주에서 김일성으로 바꾸었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의문을 제기하는데, 북한 쪽 연구는 김일성이 1930년 8월부터 10월 사이 김일성 주위 사람들이 김일성에게 조선인민을 어둠속에서 해방의 동북인민혁명군의 정치위원이 된다. 동북인민 혁명군은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했고 나중에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 제 2로군 제6사 사장이 된다.이때부터 김일성은 장백산 일대에 진지를 설치하고 조선 진공작전을 펼치면서 동북항일연군에서 위치를 굳혔다. 일제의 항일연군 괴멸작전 때문에 김일성은 1939년 100여일에 걸친 고난의 행군을 벌여 토벌대를 뿌리쳤다. 그러나 계속되는 일제의 대대적인 토벌로 결국 1940년말 러시아로 옮겨간다.따라서 김일성은 10대 후반인 1930년부터 1940년 러시아로 들어갈 때 까지 만주에서 생활하며 무장투쟁을 벌였고 특히 만주와 한국 국경지대의 항일운동의 중심이 있었다.2-2. 해방 직후 다양한 정치세력의 공존해방 직후 북한에는 이후 북한 사회를 이끌어갈 잠재적 가능성을 가진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존재하였다. 하지만 해방 공간에서 북한의 국가건설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빨치산 그룹이 여타 경쟁 세력을 제거하거나 중립화시켜 ‘단일적 지도력’을 확립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당시 북한에는 확실히 구분될 수 있는 네 개의 정치그룹이 서로 권력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경쟁하고 있었다. 북한 내에서 독립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을 했던 국내파, 연안에서 중국공산당과 독립운동을 펼쳤던 연안파, 소련거주 조선인들로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한 후 북한에 들어온 소련파, 그리고 동북항일연군 출신 조선인들인 빨치산파가 그것이다.갑산파빨치산파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하던 항일유격대. 국내에서 조국광복회의 활동을 전개한 공산주의 세력김일성, 김책, 최용건, 박금철(북조선공산당-북조선로동당)연안파중국공산당과 더불어 연안지방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한 조선독립동맹계열, 민족주의 성향김두봉, 무정, 최창익(조선의용군)소련파소련 내의 고려인 출신으로 소련 당국이 북한 통치를 위해 정책적으로 양성하여 귀국시킨 인물허가이, 박창옥국내파남로당계광복 후 국내에 재건된 조선 공산당 세력. 광범위한 대중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으나 서울을 중심으로 남한 활동에 주력하다보니, 북한에서의 영향력을 갑산심으로 한 순수 우익 민족주의 세력은 가장 빨리 제거 되었다.그런데 소련이 북한을 점령하면서 소련의 지지를 받고 있던 김일성이 정치적 1인자로 부상하게 되었고 소련파가 소련의 행정실무를 담당했으며, 연안파도 일제시대의 항일 무장투쟁의 공로로 북한 내 상당한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수적으로 우세한 남로당파를 쉽게 배제할 수도 없었다. 한편 조만식을 중심으로하는 민족주의 진영은 사실상 정치 경쟁에서 물러나게 된다. 따라서 해방 직후 북한의 정치는 갑산파, 연안파, 소련파, 남로당계 등 공산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집단 정치 체제로 형성된다.이들 파벌들은 각자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고, 정파 간의 교류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상대방을 불신한다. 국내파는 연안파와 소련파를 자신들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망명자들에 불과하다고 냉소적으로 바라봤고, 빨치산파는 소련파를 사이비 조선일들로 간주하며 배척했으며, 소련파는 빨치산파를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걱ㄴ설을 주도할 만한 경제, 행정 경험이 전무하다고 무시했을 정도였다. 이런 각 정파간 상호 불신감은 국가 건설하는 과정에서 점차 긴장과 갈등으로 심화되었다. 당시 북한에서 이러한 정치적 불안은 결국 해결돼야만 하는 것이었고, 그 즈음에 한국 전쟁이 발발한다.2-3. 한국전쟁과 김일성의 권력 장악 과정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고, 전쟁 초기 북한은 대대적인 공습으로 한반도를 거의 점령했다. 그러나 유엔군의 참전과 예상했던 남한 내 지하 사회주의 세력의 동조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압록강까지 패퇴하는 수난을 겪는다. 예상치 못한 패퇴와 중공군의 개입, 작전지휘권의 상실은 최고권력을 획득하고자 했던 김일성에게 치명적인 것이었다. 특히 작전지휘권이 중공인민군에게 양도된 것은 당시 중국공산당에 기반을 두었던 연안파에게 기울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였다.2-3-1. 연안파의 좌절전쟁 패주시 무정은 평양방위사령관의 직책을 맡아 평양 사수를 명령 받는다. 그러나 그는 평양을 버리고 만주로 도주하였무적으로 동참한다. 허가이는 당조직을 손실시켰다는 죄명으로 좌천되었다가 1953년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자살했다고 발표되었다.허가이는 소련의 통제를 상징하는 인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김일성이 공개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지만, 패전으로 중국의 영향력이 강화되고 소련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기 때문에 이런 비판이 가능했다. 이렇게 스탈린의 대리인이었던 허가이가 숙청된다.주목할 점은, 김일성과 허가이의 이와같은 대립이 단순한 헤게모니 싸움이 아니라 당 노선을 둘러 싼 대립이었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농민을 비롯한 교육수준이나 출신성분이 낮은 계층도 모두 수용하는 ‘대중 정당’을 지향했으며, 허가이는 소련식의 ‘엘리트정당’을 구상했다. 이와 같은 당 노선 운영 차이는 김일성이 조선로동당 대중화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충돌하게 되는 것이다.2-3-3. 남로당의 몰락박헌영, 이승엽 등 남로당계열의 토착 공산주의자들은 남북한에 걸쳐 해방 전부터 활동한 지연과 동조세력, 당의 정통을 지니고 있다는 점, 그리고 박헌영의 개인적인 능력까지 김일성의 가장 두려운 정적이었다.전쟁은 김일성의 독단적인 의지에 의해서만 결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소련과 중공의 동의하에 이루어졌고 늘 박헌영이 동석하였다. 박헌영과 남로당은 전쟁이 벌어지면 남한 내 공산당의 지하세력이 동조할 것이라고 주장하여 적극적으로 전쟁을 주도하였다.결국 김일성은 박헌영이 미국과 접선했다는 점, 한국전쟁때 남한땅에서 50여만명의 당원이 지하에서 전시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는 점, 당의 분열을 초래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는다.1953년 전원회의에서 북로당, 남로당계열 세력이 ‘반당적 반국가적 파괴암해분자, 종파분자들’ 혹은 ‘반국가, 반혁명 간첩죄’로 체포되고, 이후 형식적이고 긴 재판과정을 거쳐 박헌영을 축출해낸다.결국 한국전쟁은 김일성 위주의 단일 권력을 확립하는 데 좋은 구실을 주었다. 당시까지도 김일성이 소련의 지목을 받았다 할지라도 권력장악에 충분한 것은 아난다.
사회학개론 합리성의 비합리적 토대합리성의 비합리적 토대사회는 흔히 계약의 산물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다. 합리적인 개인들이 그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극대화하기 위해 계약을 맺고 형성한 것이 사회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즉 사회라는 계약을 준수하기 위한 전제계약이 또한 존재한다. 다양한 것들이 될 수 있는데 크게는 사회적 규약, 즉 법률에서부터 작게는 종이 각서까지, 그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한 많은 장치들을 사용된다. 이러한 많은 장치들은 계약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일반의 암묵적인 계약을 맺는 역할을 한다.합리적인 개인들이 필요에 의해 맺었다고 하는 사회계약은 그 계약을 위해, 불합리적이라고 생각하리만치 많은 계약들을 맺게 한다. 계약을 통해 기대되는 이익보다 계약을 위한 비용이 더 많이 드는 상황이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암묵적인 계약이 잘 맺어진 사회를 이룬 개인들이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처음 사회를 만든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보다는 사회 기반의 암묵적인 계약들이 잘 인식되고 지켜졌을 때 비로소 개인들이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배경이 만들어 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그렇다면 여기서 암묵적인 계약은 바로 사회가 됨을 알 수 있다. 사회가 전제되었을 때, 개인의 실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개인은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계약을 위해 암묵적인 계약(사회)을 만들어 내고, 복잡하기 그지없는 하위의 계약들을 견뎌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들의 합인 사회는 결국 계약을 위한 계약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하겠다.그렇다면 합리적인 개인들이 계약에 대한 신뢰를 보장 받지 못하는 경우에 어떤 행동을 할까. 사례 1의 경우, 상대방과의 신뢰가 결여되어 있을 때 개인의 선택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이때 각 개인이 최대의 이익을 최대로 추구한다면, 부인을 고집하여야겠지만, 여기서 문제는 상대방 또한 부인하리라는 신뢰가 구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예측 불가능한 상대방의 행동은 내게 커다란은 황당하게 느껴지는데, 옳고 그름을 떠나 그들에게 판단을 내리는 하나의 큰 틀이 바로 사냥을 통한 시합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그들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냥이고 생사가 결정되는 것 역시 사냥이다. 그것 이외-하이에나와 수컷, 암컷 모두 있는지- 에 대해서 고민할 여력이 없으며 다른 것을 고민하기 시작할 때에는 그야말로 하나의 패러다임이 탄생하는 것으로 까지 볼 수 있다. 이것이 그들 사회만의 합리성인 것이다. 또한 잡은 수확물을 함께 나눔으로써 분쟁이 끝났음을 인정하도록 하고 통합을 제시하는 모습에서 그 시합의 목적이 공동체의 통합에 있음을 확인시켜준다.이것은 마치 선거와 모습이 닮았다고 할 수 있는데, 사회의 여러 갈등을 조정하고 통합하기 위해 각 후보는 공약들을 제시한다. 이 공약들을 둘러싸고 실천가능여부나 이익 등을 둘러싸고 말이 많지만 결국 승패는 선거를 통해 결정난다. 공약들의 진위여부, 이익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법원과 같은 판단기구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개인의 선택에 맡겨지는 것이다. 이 경우 공약이 형편없다 하더라도 투표자들이 후보자를 선호한다면 공약은 사실상 선거에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결국 더 많은 투표자들을 어떻게 유혹하는가 하는 문제가 된다. 최종적으로 많은 지지를 얻어 승리한 당선자는 사회통합의 길, 상생의 길을 제시한다. 그 길로 하여금 이전의 지지자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통합하려 애쓰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통합을 기치로 더 많은 지지자들을 모으는 것에 힘쓴다.그러나 선거로 대표되는 민주정치 역시 허점은 있다고 루소는 말한다. 그는 소수의 의견을 반영하지 못하는 다수결 보다는 추첨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이 평등한 조건에서 모든 이가 그 결과에 대해 이의를 제기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현재 의사결정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는 다수결은 그것이 의사결정방법으로 적합하다고 사람들이 ‘만장일치로 찬성’했다고 가정하였으며, 이 ‘만장일치’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수결을 존중하게 하는 효력을 갖는다. 그러나 다수결 않는다. 우연을 만장일치나 운의 이름으로, 혹은 신의 의지로 설명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을 설득 시킬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과거로 회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이성이 빠진 추첨은 일견 합리적이기는 하나, 인간의 비합리적인 열정이 빠짐으로써 ‘의사결정’도구로서의 의미를 갖기 힘들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의 바람직한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비합리적인 열정과 욕망이 필요하다는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다.앞선 몇가지 사례들은 나로 하여금 여지껏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일들의 기저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합리성이라는 것이 한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영향력을 미치지만, 그것이 성립하지 못하는 범위의 사람들도 존재함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알게 모르게 무엇인가에 대해 강요 받고, 또한 강요하고 있다.스타의 탄생우리 집은 이렇다 할 종교를 갖고 있지 않다. 아빠는 가끔 큰일이 있을 때 절에 가셔서 꽤 큰돈을 들여 기와불사를 하시고, 엄마는 절에 구경 가실 때 향을 피우고 절을 하신다. 내 동생이 태어날 적에는 외할머니가 동네 큰 스님에게서 이름과 팔자를 받아 적어오셨고, 내 이름은 매주 교회에서 한글과 성경공부를 겸하시는 친할머니가 지어주셨다고 한다. 나는 절에 갈 때면 부처님께 절을 하고, 어렸을 적엔 친구 따라 달란트 시장하는 교회에 갔다가 전도하시는 분들에게 된통 (설교)당한 기억이 있으며, 성당을 다녀보라는 아빠의 권유에 따라 ‘다녀볼까’ 하고 생각해본다.과거, 사회라는 것이 존재하기도 더욱 이전의 오랜 시간 동안 절대 지배자로 군림했던 ‘왕’인 ‘종교’는 오늘날의 인간들의 사회 안에서 신의 섭리도, 그 구성원리도 아닌 개인 선택의 문제로 전락하였다. 기호에 따른 선택사항이 된 것이다.“신은 죽었다”는 유명한 말은 현대사회에서 신이 차지하는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동안 신에게 부여되었던 절대적이며 맹목적인 믿음과 그에 따른 권력이, 이제 인간에게로 이동할 것이라는것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종교는 현대사회 구성원리로 작용하기에 벅차다. 그러한 기능을 일부 갖추고 있긴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 그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과거에 비해 현격히 줄어들었으며, 그 내용 역시 복잡한 사회상을 단편적으로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각 종교는 생존방법으로서, 더욱 더 많은 사람 일반에게 적용할 수 있는- 교리라기보다-도덕원리를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한다. 자신만의 독특한 교리를 강조하기보다 첨단기술에 의해 억압 받는 인간 가치를 수호하도록 보임으로써 많은 사람에게 지지를 얻고, 또한 마치 종교가 인간 생명의 마지막 보루로 그 순수성을 확인시키는 것이다.분명한 것은, 신이 전과 같은 위세를 잃었다고는 하나, 많은 추종자들은 그들의 신을 우리들의 신으로 만들기 위한 도전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신에 대한 변하지 않는 충성심을 보이는 신도들이 있는가 하면, 도무지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어 변할 줄 모르는 신에게 의문을 품고, 신이 없는 삶을 택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신을 버린 이들에게 과연 신이란 정말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신이 죽었다고 의심되는 그 순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를 대체할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로에게 무관심해 보이는 이들은 사실 자신들의 관심을, 열정을, 사랑을 쏟을만한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고 있다. 찾는 것이 여의치 않는 경우 탐색하여 발굴해 내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일정조건을 충족한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을 만나게 되면, 사람들은 즉시 친구들에게 소개하고, 함께 즐기며, 그 기쁨이 커지게 된다.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이 기쁨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찬양모임을 꾸리고, 이후 더욱 많은 찬양할 만한 내용물들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거대한 물적, 심적 찬양이 ‘자본’과 만남으로써 비로소 ‘스타’가 탄생되는 것이다.사람들은 신을 추종할 때와 같이, 자신들의 믿음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 믿음이야말로 변하지 않는 것이며, 이것을 증명하간성 혹은 고결함을 추앙하는 것일까. 아니, 아마도 스타의 화려한 외양에 필연적으로 따를 것이라 예상되는 부(부수적으로 명예)를 찬양할 것이다. 우리는 스타에게 평범함을 요구하지 않는다. ‘돈’ 주고 봐도 아깝지 않을 특별함을 보여주길 원한다. 그것이 곧 상품성이다.이러한 상품이라는 태생적인 한계는 스타가 한시적이고 소모적이도록 만든다. 그들의 스타성을 대중이 관심 갖는 방향으로 요리조리 잘 설정한 스타는 연명 할 수 있을테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대중은 곧 다른 누군가를 찾아 떠날 것이다, 돈과 함께.그런데 요즘은 사람들이 스타를 추앙하는 기간이 더욱 짧아지고, 스타라 일컬어 지는 사람도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말 그대로 ‘반짝’ 하는 일회성 스타들이 많아진 것이다. 많은 혁명들이 그랬듯, 개인이 스타가 되는 이러한 변화는 기술과 함께 이루어 졌다. ‘인터넷’ 이라는 기술은 과거 TV와 라디오, 몇몇 신문이 정보독과점 현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이제는 한 블로거가 올린 화제거리를 신문들이 보도하는 형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표현하는데 더욱 거리낌 없어졌으며, 또한 자신의 입맛에 맞는 다양한 스타를 더욱 쉽게 그리고 빨리 찬양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반짝 스타의 경향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패리스 힐튼처럼, 가십이든 무엇이든 사람들 관심을 살 수 있는 화제를 몰고 다니는 사람들이 더욱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스타가 되는 시기에는 아무래도 과거 신과 신도들과 같은 수직적인 모습을 띠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신비주의를 떠나서, 대중에 노출이 적게 될수록 그 관심만 적어질 뿐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6 사랑과 소유결혼에 있어 사랑이 먼저인가, ‘조건’이 먼저인가.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가장 ‘핫’한 이슈가 아닐 수 없다. 아니, 이로 인해 울고 웃는 남녀를 헤아리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많은 문학작품들은 우리의 이러한 고민이 비단 한 시대의 것만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전통시대에는 결혼이 개인뿐 아니.
현대 한국 정치의 분석 ;절반의 인민주권 E.E.Schattschneider목차1. 갈등의 정치학2. 이익 집단 정치 모델3. 정치체제의 한계- 낮은 투표율4. 현대사회 변화의 양상# 갈등의 정치학자유로운 사회에서 정치의 기본적 양상은 바로 갈등이다. 모든 정치적 활동은 갈등에서 기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갈등은 소수의 적극적인 개인과 이를 지켜보는 다수의 구경꾼이 참여한 가운데 벌어지는데, 적극적 소수와 방관적 다수 중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다름 아닌 다수의 구경꾼이다. 왜냐하면 갈등의 전염성이란 매우 강력해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방관자들을 갈등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어들이며, 이렇게 모인 구경꾼의 규모에 따라 힘의 균형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에 따라 시작과 다른 결말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인간사회에서의 갈등의 해결 과정, 즉 정치인 것이다. 따라서 정치라는 것은 이 발생한 갈등이 확산되는 것(갈등의 범위)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 대중과 갈등의 관계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먼저 갈등의 범위를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크게 갈등의 사사화와 사회화로 나눌 수 있다. 사사화는 갈등을 사적인 것으로 치부하여, 이것이 공론화 되는 것을 막아 자체적으로 해결하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주로 억압적인 체제하에서 나타나며 이의 제기가 드러나지 않아 만장일치의 모습을 보인다. 갈등을 은폐함으로서 외형적인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다. 두 번째, 갈등의 사회화는 사적이라고 치부되었던 갈등을 공론화하여 공적 권위 혹은 대중(다수의 구경꾼)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것을 뜻한다. 갈등에 개입하는 외부자는 주로 정부가 되는데, 정부는 자신의 공적권위를 이용하여 사회화의 범위를 조절한다. 즉 정부는 본질적으로 ‘갈등의 규모?범위’를 조절하는 사회의 거대한 도구인 것이다.갈등의 규모?범위의 변화는 많은 변화를 낳는다. 위에서 언급한 갈등의 사화화와 사회화 사이에서 어렵게 살아남은 새로운 양식의 갈등은 새로운 다수파와 권력분포를 생성한다. 리하는 것이 바로 정치인 것이다. 정치는 갈등 사이에 우선순위를 부여하여 사회질서를 지키고, 때로는 조장?이용하기도 하며, 억압하기도 한다. 이때, 갈등 간 경쟁 속에서 더욱 강력할 것으로 예상되는 갈등의 부상을 확실하게 막기 위해, 이미 존재하는 약한 정도의 갈등을 과장하거나 발생시키기도 한다. 이 ‘갈등의 대체’는 가장 파괴적인 정치 전략이다. 하나의 갈등을 전혀 다른 갈등으로 대체하면서 기존의 모든 갈등 구도를 뒤바꿔 놓는다. 많은 균열 중에서도 지역주의는 갈등의 전체적인 질서를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로 효과적이다. 많은 경험에서도 알 수 있듯, 지역 갈등에 함몰되어 정작 중요한 다른 이슈들을 깨닫지 못할 때 정치는 무기력하다. 이런 갈등 속에서 야당은 지역균열을 강화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하기 힘들고, 집권당의 지위는 더욱 확고해진다. 이러한 연유에서 정치의 전국화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정치가 지역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전국화 될 경우 집권 정당의 교체가 비교적 쉽게 가능해지며, 이에 따라 선거와 정치 조직의 중요성이 크게 증대 되고, 책임 소재가 분명해진다.어떤 정치체제에서든 언제나 종속적 지위에 있는 갈등의 수는 많을 수밖에 없다. 이 종속된 수많은 균열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이러한 정치의 방향을 변화시키려는 시도는 진공상태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정렬도 모든 이익을 동일하게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 정치체제를 역동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당이 이용하려는 균열 역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투쟁의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균열의 개발은 권력쟁취의 수단이기 때문에, 중요 균열에 대한 자신들의 정의를 다른 정당보다 우위에 두어야만 하며, 이에 성공한 정당이 정부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이익 집단 정치 모델현대 민주 정치에서 다양한 이익집단이 정치에 참여하여 다양한 계층의 시민을 대변하게 되었고, 따라서 이익집단이 공동체 전체를 자동적으로 대표한다는 이론은 옳지 못하다. 기본적으로 이익집단은 기업 및 상층 정치체제라는 주장과는 달리, 그들은 보편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협소하고 배타적인 이익을 추구한다. 이 때문에 일반 즉 공공의 이익 동원에 성공하기 어려우며 나아가 일반 여론에 부정적인 효과를 미칠 수 있다. 또한 정당 정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특수 이익집단의 영향력 행사범위는 제한되어 있다. 정당은 상대방 정당과 경쟁하지만 특정 이익단체와 경쟁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정당은 선거를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 조직으로서 이익집단과는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 따라서 이익집단 정치를 정당정치로 치환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겠다.# 정치체제의 한계- 낮은 투표율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우는 투표. 그러나 투표율이 보장되지 못한 상황에서 무엇이 민주주의를 대변할 수 있을까. 현대 정치에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광범위한 투표불참은 흔히 인민의 무지, 무관심, 무기력 탓으로 돌려지곤 하는데, 이것으로 설명하기엔 부족할 뿐 아니라 불합리하다. 이는 부유한 계층의 전형적인 변명이며, 동시에 하급계층의 배제를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광범위한 투표불참은 단순 무관심을 넘어 시민의 상당수가 자발적으로 정치체제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우려할 만 하다. 그들이 무관심 한 것이 아니라 이들의 요구를 반영한 대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혹은 대안을 억압 당하였기 때문에 ‘(자발적인)기권’을 택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참정권은 거부된 것이 아니라 박탈 혹은 배제 당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투표에 불참한 사람들이 주로 하급 계층이라는 점에서 또한 의미를 지닌다. 투표/불참의 정치적 차이가 곧 사회?경제적 차이와 직결되는 것이다.사회가 이들을 외면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기존 체제에 참여하길 거부하는, 혹은 체제가 자신에게 적대적이라고 확신하는 이들 불참자들은 즉 체제 전복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들을 체제 안으로 편입시킬 수 있는 다른 종류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할 경우 장기적으로 그들은 민주주의의 질병으로 남을 것이다. 또한 이 위대함은 사회 하층계급의 요구나 경험을 이해하고 이를 하나로 잘 통합한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불참자들 즉 소외계층을 배제하는 과정이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이며 아무런 성찰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체제가 과연 아직까지도 도덕적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우리나라 역시 최근 낮은 투표율로 많은 사람들의 우려를 낳고 있다. 교육은 더욱 확대되고, 투표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지만 대중의 성원을 돌려놓기에 역부족인 것처럼 보인다. 나는 여지껏 낮은 투표율의 원인이 정치에의 불신 혹은 -많은 신문들이 비판해 왔듯이- 젊은 세대의 무관심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 해석이야말로 탁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고 기득권층에 속할수록 높아지는 투표율은 동시에 낮은 투표율을 설명하고 있다. 이미 이 사회의 주류로 편입하기에 어렵다고 느끼는 많은 사람들은 참여의 동기를 잃어버렸다. 특히 경제적인 요소로 결정되는 계층의 차이는 더욱 커질 것이다. 이는 머지 않아 교육의 차이로, 또다시 경제적 격차를 벌어질 것이다.결국 비주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나라는 현재 70%정도의 투표율이지만, 미국의 경우 대통령 선거에 겨우 60%의 투표율을 보인다고 한다.- 이 책의 설명대로 60:40의 참여와 불참여를 보인다고 했을때, 대통령이 50%의 지지를 얻었다면, 그 대통령은 결국 전체의 30의 지지만을 얻게 된다. 이는 불참여 40보다 10 작은 수치로 30:30:40의 웃을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된다. 소수로 시작한 이들은 사회의 격차가 커짐에 따라 그 규모 역시 커지고, 결국에는 가장 큰 세력으로 대두하게 되는 것이다. 수치적으로 과장되었을지 모를 이와 같은 이야기가 결코 허무맹랑하게 만은 느껴지지 않는 것이 바로 지금 우리 사회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불도저와 같은 개발에의 의지는, 개발 이외의 것, 이웃 혹은 분배와 같은 가치들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 주변 선진 국가들의 어두운 면을 방지하려사람들을 돌보지 않는 정책을 모두가 방관하다가 이제서야 나눔의 정치를 꿈꾸고 있다. 한국은 이런 일본을 보고 느끼는 바가 없는가. 아마도 우리의 정권은 보고 있으면서도 아웅하고 있는 듯하다. 이 정권 들어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이야기가 번번히 들리고 있는데, 다른 것은 차치하고, 국가의 발전을 경제 발전과 동일시하는 인식 자체가 위험해보여 두렵다. 양심 없는 이성은 그 얼마나 야만적인가 하는 것을 역사에서 배우고 왔으면 한다.# 현대사회 변화의 양상오늘날의 가장 첨예한 균열은 더이상 왕(대통령)과 의회간의 대립이 아니다. 새로운 갈등은 정부 전체와 정부 밖에 있는 세력간의 투쟁으로 나타난다. 오늘날의 정부는 그 자체도 권력을 얻기 위해 경쟁하며, 그 경쟁자로 떠오른 것이 바로 강력한 기업이다. 우리가 정부의 경쟁자로 기업을 떠올리기 어렵다면 그것은 우리가 정부와 기업의 경쟁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이 둘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상호 의존적이며 서로 분리될 수 없지만, 한편 기업의 거대한 조직과 방대한 자원 때문에 권력을 두고 투쟁하는 관계에 이르게 된다. 사회가 정부와 기업이라는 두 커다란 기둥에 의해 운영되는 것이다. 이를 이원적 체제라 하겠다.그러나 이 두 기둥, 즉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조합은 긴장을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두 권력이 매우 다른 원리를 통해 조직되기 때문이다. 정치 체제는 대체로 평등주의 적이며 법과 전통을 강조하고,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 반면, 경제 체제는 배타적이다. 높은 수준의 불평등과 권력의 집중화를 야기하며, 독단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거대 기업이 부상하면서 정치?경제 권력의 분립이 또다시 모호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모호한 경쟁적 권력관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균열을 만들어내고, 정부와 기업 모두 이에 발맞추어 변화하도록 하였다. 이들의 권력을 향한 경쟁은 역동적이면서 동시에 높은 성장을 기록해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민주주의의 기능은 대중에게 경제 권력에.
북한의 엘리트 체제북한의 유일당 체제: 조선노동당공산국가들의 집권당인 공산당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생각하는 정당의 당과 다르다. 민주사회의 정당들은 복수정당들이 통치권 획득을 위해 국민지지투표를 치르지만, 레닌주의의 핵심개념인 공산당의 역할은 프롤레티리아 계급을 대표하는 유일 일당체제로서 다른 정당들로부터 도전받지 않는 권력 핵심기구를 뜻한다.북한은 조선노동당 이외에도 조선 사회민주당, 천도교 청우당 등 다른 당조직이 존재하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유일정당체제가 아닌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공산국가의 특징 때문에, 이들 다른 정당들은 중앙의 조선노동당을 보조하는 역할에 그친다고 말할 수 있다.이렇게 닫힌 엘리트 구조에서 지배계층을 분석하는 것은 곧 그 구조적 성격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따라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 속한 중앙위원들 개개인이 어떤 배경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조사해 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모두 주지하고 있다시피 북한은 김일성 수령을 중심으로 김정일 영도자가 이끄는 일인 지배체제에 가깝다. 이러한 의미에서 40여년간 중앙위원회에서 그 권력의 중심으로 활동했던 인물들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다.다음은 1946년 8월에 열린 1차 당대회에서부터 1980년 10월의 6차 당대회까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과 총비서, 부위원장, 비서 등을 나타낸 표이다.표 1 조선노동당 중앙위원장, 총비서, 부위원장, 비서당대회1차2차3차4차5차6차김두봉위원장위원장김일부위원장(2)비서(2)김일성부위원장(1)부위원장(1)위원장위원장총비서총비서김정일비서(1)김영남비서(3)김영주비서(3)김중린비서(6)비서(2)김창만부위원장(5)부위원장(4)박금철부위원장(3)부위원장(3)박정애부위원장(2)최용건부위원장(1)부위원장(1)비서(1)황장엽비서(8)40년 조선노동당 역사에서 이 직책을 수행한 인물들은 겨우 25명이며, 이것은 북한 권력 핵심에서 살아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여준다. 조선신민당의 당수로 북한 건설에 함께한 김두봉은 중린 뿐이다.그리고 다음은 조선 노동당 중앙위 위원장, 부위원장, 비서 연임자들의 명단이다.표 2 조선노동당 중앙위 위원장, 부위원장, 비서연임자숙청설** 박금철, 정일룡, 김동규, 이효순사망자* 최용건, 김창만, 김일, 김두봉, 주영하, 한익수, 김동규연임연임자수연임자6회1김일성5회04회03회1최용건*2회5김창만*, 김중린, 김일*, 김두봉*, 박금철**1회18정일룡**, 주영하*, 한익수*, 홍시학, 황장엽, 현무광, 김정일, 김환, 김동규*, 김영주, 김영남, 오진우, 박정애, 박수동, 양형섭, 이효순, 연형묵, 윤기복위에서 보듯 2회 연임자의 대부분이 숙청 당하거나 사망했고, 3회 연임자인 최용건 역시 사망하고 4, 5회 연임자는 없다. 오직 김일성만이 1차 당대회에서 6차 당대회까지 권련을 지켜온 유일한 생존자이며 아무도 3회 이상 중요권력을 차지하지 못했다. 김일성은 45년이라는 세계 최장기 집권기간 동안 가장 기민하게 자신의 권력을 유지해 온 것이다. 김일성이 이렇게 장기간에 걸쳐 자신의 권력을 끈질기게 성장시킨 것을 보았을 때, 해방 이후 여러 치열한 정치세력의 다툼 속에서도 다른 사람이 아닌 그가 주도권을 잡은 것이 단순히 소련의 비호나 행운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조선노동당 중앙위원그렇다면 이제 조금 더 넓은 범위에서 북한 엘리트에 대해 살펴보겠다. 이제까지 조선노동당 전당대회는 총 여섯차례 개최되었다. 1차 당대회는 1946년 8월, 2차 당대회는 1948년 3월, 3차 당대회는 한국전쟁을 이유로 1956년 4월에 열렸다. 4차는 1961년 9월, 5차는 1970년 11월, 6차는 1980년 10월에 각각 열렸다.각 당 대회 당시 중앙위원의 인원을 살펴보면 1차는 42명, 2차는 66명, 3차는 70명, 4차는 83명, 5차는 118명, 6차는 144명으로, 1차에서 6차까지 당대회에 참여한 총 중앙위원 수는 523명이다. 참가인원이 점차 늘어 1980년 6차 당대회에 이르면 1차 당대회보다 약 4배 가량 증가한 것을 알 , 황해도 순이다. 최고인민위원회의 대의원 출신지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또 2차 당대회에서는 남한 출신이 약간 모습을 드러내다가 6차 당중앙위원회에 이르면 거의 자취를 감추고 있다. 남한의 출신지역별로 보면 경북, 경남, 경기 순이다.6차 당중앙위원의 경우, 총 144명 가운데 출신지 자료가 있는 위원은 56명(39%)이며 그 가운데 44명(78%)이 북한 출신이고, 11명(20%)이 만주·소련출신, 1명(2%)이 남한출신으로 판명되었다. 소련·만주출신은 거의 항일유격대 출신이거나 그 2세들인 것이 특징이다.당 중앙위원 교육별 특성1차에서 6차까지 총 523명 중앙위원 가운데 그들의 교육에 대해 알 수 있는 사람은 175명이다. 소련유학 출신이 압도적이고 그 가운데서도 모스크바 대학이 다른 소련 지역 이수자를 합친 숫자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유력하다. 다음으로는 일본 유학, 중국 유학 등이고 국내는 중앙당학교, 김일성대, 군관학교 등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교육 배경을 알 수 있는 중앙위원이 총 인원의 약 30%정도에 불과하므로 그 특징을 강조하는 것은 위험해 보인다.6차 당대회 중앙당위원 중에서 모스크바 유학파로 알려진 7명은 김영남, 김희련, 서관희, 원동구, 이찬선, 정준기, 허담 등이다. 이밖에 소련 유학파로는 계웅태, 김일, 양형섭, 윤기복, 이원범, 전창철, 천세봉, 황장엽 등이다.당 중앙위원 소속별 분류당중앙위원 가운데 군부 출신은 1차 3명(총 42명 중 10%)에서 6차에서는 37명(총 144명 중 45%)에 이를 정도로 꾸준히 증가했다. 또한 정무원 역시 6차 대회까지 총 523명 가운데 246명을 차지하면서 가장 유력한 출신 소속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북한의 병영국가화 경향을 보여준다. 이렇게 군 핵심간부의 직접적 정치 참여는 서구 사회에서 민간정치와 군부를 확실히 구분하는 것과 상반된다. 뿐만 아니라 당 중앙위원이 정무원이나 군부의 요직을 모두 차지하고 있는 것은 공산주의의 특징 중 하나인 중복적 자리 점유를 잘 보여주고 있지식계급출신이 상대적으로 다수임을 알 수 있다. 항일유격대 다음으로 외교관이 47명, 독립운동가 29명, 관리직 18명, 교수 16명, 교육 14명이며, 이에 반해 노동자가 8명이었다. 예를 들면 6차 당대회에서 직업배경이 밝혀진 66명 가운데 유격대를 포함한 운동출신이 31명이고, 그 외 관리직, 교육계, 외교관, 언론인 등은 35명을 차지했다. 역시 가장 많은 유격대 출신 25명 다음으로는 외교관이 19명의 비중을 보였다.당 중앙위원 파벌분류파벌분류는 사실 규정하기 상당히 까다로운 개념이고 또 실제로도 파벌이 분명히 파악된 인물도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숫자이지만 그 변화를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다.1차1946.8.2차1948.33차1956.44차1961.95차1970.116차1980.10합계김일성621%1223%1227%2477%1878%1694%88소련파621%1325%818%13%14%16%30남로파621%918%920%310%313%30연안파1138%1325%1431%26%40김일성파 기술관료48%24%13%14%자료유2964%5177%4564%3137%2319%177%37.5%총 합4*************5231차 당대회를 살펴보면, 해방 직후 연안파 인사들이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나머지는 거의 대등한 세력을 보이고 있다. 2차에 이르면 남로파를 제외하고 연안, 소련, 김일성파가 상대적으로 우세함을 보인다. 이것은 북한의 당시 정세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1948년 3월은 남북한이 단정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남한 총선거(48.5.10)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일성파 독자적인 세력으로만은 대외적 상황을 조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따라서 소련파나 연안파와 같은 소련과 중국이라는 두 거대국을 배후로 삼고있는 해외파들이 좀더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그 와중에 23%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김일성파의 약진이 오히려 주목할 만한 것으로 생각된다.4차 당대회에 이르면 김일성파가 우위최광, 최용진, 최인덕, 황순희 등으로 거의 일제시대에 항일 게릴라 활동을 한 사람들이다.당 중앙위원 성별 특징당 중앙위원 가운데 여성위원의 절대수를 살펴보면 1차당대회 때는 2명(42명), 2차에 3명, 3차에 3명, 4차에 3명, 5차에 8명, 6차에 4명이다. 5차에 7%까지 증가했던 것을 제외하곤 주로 4%에서 5%선을 계속 유지하는 전형적인 명목주의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1차 당 중앙위원이었던 박정애朴正愛, 허정숙許貞淑은 2차, 3차, 6차에 계속 뽑힌다. 특히 박정애는 정치권력의 핵심 중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노동당 중앙위 정치국, 정치 위원회, 조직위원회, 상임위원회에서 유일한 여자라는 점에서 한때 서열 3,4위까지 부상했던 인물이다.6차 당대회의 여성4명은 김일성인 처인 김성애, 정경희, 허정숙, 황순희黃順姬인데, 황순희는 일제시대에 김일성 유격대에서 재봉 및 간호원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있다. 또 정경희 경우 당중앙위 연락부장, 정치국 후보위원으로까지 부상한 주요인물이며, 허정숙 역시 1차, 2차, 3차, 6차에 피선된 4선 의원이다.제 3차 당대표회의(2010. 9. 28.)제 3차 당대효 회의는 1980년 제 6차 당대회 이후 30년만에 열리고, 1966년 제 2차 대표자회의 이후 44년 만에 개최된 매우 의미있는 회의였다. 북한은 1980년 이후 30년동안 열리지 못한 당대회 대신 당 대표자회를 선택하였다. 이런 선택은 당대회 개최를 위한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지만 후계체제 조기구축을 위한 조선노동당의 정상화가 절실했기 때문이다.이번 당 대표자회를 통해 후계자로 공식 선언된 김정은은 9월 27일 대장 칭호를 부여받고 다음날 개막된 당 대표자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당중앙 군사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았다. 이렇게 후계체제 구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번 당대표자회를 통해 우리는 최근 북한 엘리트 계층의 변화상을 예측해 볼 수 있다.이번 당 대표자회는 당 중앙위원회 위원 및 후보위원 선거를 통해 김같다.
Online Social Networks Seeking for New Way of CommunicationWhen World Wide Web was first introduced to the world, no one imagined it would appear to accelerate stronger social ties connecting millions of people over the world. Apparently, Internet has became the most extraordinary tool for human interaction(Cheshive, 2011). Especially online social networks(OSNs) strengthen human interaction by providing places to gather and being a bridge between online individuals. Individuals seek answers to questions, share private information and maintain professional and personal relationships. Addition to being a bridge of individuals, online social networks also have shown new ways for creating new communities based on trusted relationship. It can facilitate new kind of communication within small work groups and diminish the traditional hierarchical channels in organization(US Fed News, 2006). As online social networks spread widely, we are facing to new communication which pursues horizontal rir daily life. Posting what I’ve done today on Facebook is much easier than texting every friends or calling every family members. People can easily keep in touch without physical meetings. Especially for people who are out of country, Facebook is the most effective tool to stay in touch with their friends and family. David, the English teacher living in South Korea, often posts pictures and comments about his daily happenings so that people can know how he is doing there and also can share his experience altogether. This simple and smart tool helps to maintain relationships with ‘one click’ even when they are not able to meet each other. Moreover, on cyber walls, people are also likely to express their opinion about more serious - politics, environment, international- issues which are easy to be overlooked in daily dialogue. Anyone can bring any question into his own wall, drag people to the debate and draw some ideas. In this process, people can get some clues about his critical stanhe cause of privacy problems even though various parties could have been involved with. Commercial agents such as marketers or insurance companies can easily collect and store OSN’s users data. In the job market, personnel management also could use online information to gain insights of the psychology of potential or current employees. Reports of harassment such as cyberbullying, rumors have been frequently presented. According to a Deakin University study, some women reported ex-boyfriends continuing to post photos as if they were still together. These things could bring negative consequences such as cyber fraud or identity theft. Then why people are still enthusiastic about Facebook knowing all these potential risks? One study, titled ‘why we disclose’, tries to explain reasons for this phenomenon. One explanation is the pleasure of self-presentation. In facebook, people can easily make and ‘project a certain image of themselves’ only with few photos. It makes you satisfied by puttin those functional features such as privacy settings are related to technological problems. It should be designed to more protective way so that the users can trust in the OSNs providers. Definitely, OSNs are the attractive tools for people who want to be in the better light than real life and to be more engaged in the community.When the internet first came out, early predictions thought that it would destroy community by confining the individual to impersonal communication. However, as the U.S. scholar Shalini Venturelli, associate professor in the school of international service at American University states that “the internet is now used by ordinary people to complete their daily tasks, debate important issues through various forums and communicate with their families and friends”, now the internet’s usage becomes unbelievably social. More importantly, she points out new possibilities for “people-to-people, citizen-to-citizen relations” in belief that the online networks can actually From this perspective, she defines the online social networks as not just the transformation of channels but another form of communication with the huge flow of globalization.Since the internet becomes inevitable to everyday life, online social networks are also working out as connections between isolated individuals who are eroded in online space. Among these online individuals, social networks might be doing some experiments for another form of communication which is horizontal and extended to daily life. As the internet changed everything in our life style, this new experiment could be the butterfly to take a dramatic turn in human interaction history.Work CitedDong-Hee, Shin, “Analysis of online social networks: a cross-national study”, Online Information Review 34. 3 (2010): 473-495.Krasnova, Hanna; Spiekermann, Sarah; Koroleva, Ksenia; Hildebrand, Thomas, “Online social networks: why we disclose”, Journal of Information Technology, suppl. Special Issue on Social Networking 25. 2/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