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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란무엇인가 감상문 평가A+최고예요
    역사란 무엇인가서양의 경우 ‘역사’라는 용어는 그리스어 Historia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용어는 조사, 탐구라는 뜻을 가졌다. 고대 그리스 헤로도투스가 페르시아 전쟁사를 쓰면서 부르기 시작하였는데 이전까지는 신화의 세계를 다루었다. 이로 인해 헤로도투스 또한 신화적 관점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생각으로 그는 ‘탐구하여 알아낸다’는 뜻인 역사를 사용한 것이다. 16세기 역사는 ‘탐구하여 알아낸다’는 의미 외에도 ‘과거에 일어난 일’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어 오늘날 역사의 의미는 두 개의 의미를 동시에 가진다.동양에서의 역사의 단어는 서양과 비슷하게 바뀌었다. 역사는 한문으로 ‘歷史’라고 한다. 중국 고대와 중세에는 역사가 아닌 ‘사’라는 단어만이 쓰였다. ‘사’는 ‘바르게 기록하는 사람’을 가리키며 이러한 뜻에 따라 바르게 기록하기 위해서는 조사는 필수였다. 따라서 고대 중국에서는 무엇을 조사하여 기록하는 작업을 ‘사’라고 하였고 ‘사’자 앞에 ‘역’자를 붙여 ‘역사’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이후 ‘과거의 일을 기록하는 작업 ’의 의미와 더불어 ‘과거에 일어난 일’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역사가는 과거를 조사할 때 ‘사료’를 이용하는데 사료는 사실이나 사건에 대한 정보 혹은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료는 형태와 성격에 따라 각각 문자 사료와 비문자 사료, 1차 사료와 2차 사료로 나뉜다. 문자 사료는 말 그대로 문자로 기록된 문서나 문헌이며 비문자 사료는 유물과 유적, 그림이나 인간의 유해 등이 있다. 1차 사료는 직접 봤거나 경험한 것을 기록한 것 혹은 해당 시대의 유물이나 그림을 가리킨다. 2차 사료는 과거에서 전해진 기록이나 구전, 연구들을 근거로 편집한 것이다. 형태와 종류가 다양하지만 문헌 사료가 가장 중시된다. 그러나 비문자 사료를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며 최근에는 이러한 사료 또한 중시되고 있다.그렇다면 이러한 사료들은 항상 객관적일 수 있을까. 보통 2차 사료보다는 1차 사료의 신빙성을 더 높이 평가한다. 다른 기록을 통해 확인한 것이 아니라 직접 보았거나 체험했기 때문인데 과연 이런 특징만으로 1차 사료를 100% 신뢰할 수는 없는데 이에 대해 생각해볼 문제 세 가지가 있다. 먼저 기록자는 자기가 좋을 대로 해석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같은 사건이라도 자신의 이해나 입장에 따라 여러 가지 평가가 나온다는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두 번째로 생각해야 할 문제는 사료가 위조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사료 위조 사건은 상당수가 있으므로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세 번째로 생각해볼 문제는 사료가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1차 사료가 조작되는 것은 아니다. 기록자가 그럴 의도가 없었고 문서가 조작되지 않았다고 해도 그의 기억이 무조건 정확하지 못할 수 있다. 인간은 과거를 선택하여 기억하므로 좋은 기억만을 남기려고 한다. 이렇기에 일반적으로 과거의 일들은 좋게 평가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선택적으로 기억하는 것에 더해 왜곡하려고도 한다.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기억하는 것만 아니라 완전 조작을 하기도 한다.
    독후감/창작| 2019.04.28| 2페이지| 1,000원| 조회(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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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불교 - 지눌의 수행론
    고려불교의 이해 ? 지눌당시 고려는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으로 왕권이 약화되었고 선교의 심한 대립과 갈등이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당시 문제에 대한 고뇌와 이를 해결하려기 위해 닦음을 강조하였다. 힘이 줄어 힘들어진 불법을 안타깝게 여겨 이를 해결하고자 수심인들에게 바른 수행의 길을 가르치기로 하여 정인을 맺고 정혜와 행원을 닦으며 불지에 나서 불교 최고의 이상인 불타 정각의 지혜인 보리를 증득케 하려 했다.보조선은 몇 단계를 거쳐 완성되는데, 첫째로 새로운 사상의 모색기는 출가한 후부터 창녕군 청원사에 들어가기 전까지다. 출가 후 승과에 입선하기 전까지는 행적이 뚜렷하지 않아 그 사상 내용을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담선법회가 끝난 후 바로 정혜의 수행을 위한 결사를 했던 것을 보아 이미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했으며 많은 연구를 통해 상당한 이론을 갖추었고 바른 수행으로써 정혜쌍수와 선과 교의 근본적인 일치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둘째 사상의 확립기는 창녕군 청원사에 들어간 후 여러 곳을 거쳐 송광산 길상사로 옮길 때까지의 기간이다. 당시 사상확립과정에서 깨달음의 체험은 3단계를 통해 나타나는데 이종익은 이를 보고 "삼전기의 오증"이라 하여 1단계는 육조단경에서 심기일전, 2단계는 이통현 화엄에서 심기일전, 3단계는 대혜오록에서 심기일전으로 구분한다. 청원사에 머무는 동안 육조혜능의 「혜능」을 통해 진여자성의 본위를 증득함으로써 정혜쌍수의 기본원리를 발견하고 큰 전기를 이룩하였다. 하가산 보문사에 들어간 후 대장경 열람을 통해 선과 교의 일치관계에 대해 「화엄경 여래출현품」에서 비로소 의문을 풀고 이통현의 「화엄신론」에서 선의 수행이론과 교의 이론이 같음을 발견하여 원돈신해문의 기초를 닦는 두 번째 전기를 맞았다. 그 후 송산 거조사로 옮겨 더욱 자수불심에 전념하는데 이 동안에 그의 사상이 조계선종의 선지를 대표하는 계기가 마련된다.「정혜결사」의 저술, 반포를 통해 그의 사상이 여러 계통의 선 사상의 통일을 이루는 기반이 되었다. 이후 한국의이다. 지눌의 사상을 통해 외래사상의 주체적 수용의 자세를 알게 된다. 그는 고려 불교의 문제를 냉철하게 인식하고 해결하기 위해 깨달음과 닦음의 체계를 바로잡아 고려 불교를 수심·정법불교로 바로 세웠다. 이때 중국 사상을 주체적으로 비판, 검토하여 오직 진리에 부합되면 정통이고 비정통이고 말론하고 수용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을 통해 한국의 선은 중국적 전통을 벗어나 새로운 선풍을 확립할 수 있었다.지눌은 선·교일원적이면서도 회교지선전인 지도체계로서 인도하였다. 삼종법문을 열어 보였는데 첫 번째 성적등지문에서 성은 지혜요, 적은 텅 비고 쓸쓸함이다. 성적등지는 정혜쌍수며 돈오점수설에 의해 실천수행의 방법이다. 인간의 일진본심을 돈오한 후 정혜를 쌍수할 것을 권한다. 자신의 겉모습이라 할 수 있는 본심에 대한 돈오가 이론적 바탕이다. 점수를 중시하는 수행의 실천운동인 셈이다. 이때 성적등지는 선오후수의 후수에 해당한다. 또 법문 내용은 주로 절사문, 법집별행록절요 병입사기, 수심결 등에서 보이는데 정혜를 쌍수 등지 할 것을 서약한 결사내용을 등지문이라 한다. 정은 곧 혜의 몸이요, 혜는 곧 정의 작용이다. 곧 혜의 때에 정이 혜 속에 있으며 정의 때에 혜가 정속에 있다는 뜻은 정·혜가 함께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원돈신해문은 해오문으로 이통현의 화엄론의 영향을 받은 문으로서 화엄사상을 선에 수용한 것이다. 자기 마음의 무명분별이 곧 모든 불교의 부동명지임을 터득하여 의성수선하는 법이라고 한다. 즉 신해는 돈오에, 수선은 점수에 각각 해당시킬 수 있다. 원돈신해문은 수행의 방편문이 아닌 돈오의 방편문으로서 돈오점수문의 돈문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회교귀선으로 이끄는 본회를 알 수 있다. 세 번째 경절문은 깨달음의 지름길이다. 앞서 말한 두 개가 마음속의 지해나 대오를 가진 초입문이라면 경절문은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와 간화절의논을 통한 수행방법이며, 지해를 척결하여 깨달음을 얻게 하는 것이다.지눌은 이러한 체계에서 성적등지문은 자기마음과 부동명지가 융합하여 일체하고의 실천 내용은 첫째 수심결사이다. 세속적인 명리를 벗어나 마음을 닦으라고 강조한다. 마음이 곧 부처이며 모든 것은 마음을 만드는 것이다. 정혜경사라고 결사를 지은 것도 그러한 수심을 강조한 것이라 본다. 둘째는 자타를 초월한 실천운동이다. 자신과 타인에 국한되지 않은 대승적 제도 운동이 바로 결사다. 오로지 자신만의 수행과 고요함뿐만 아니라 자신과 타인을 겸제하는 보살의 실천행을 강조한다. 남을 도와야한다는 마음이 먼저 서야지 선정과 지혜를 닦는 일이 가능한 것이다. 셋째는 융회결사다.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며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며 마음과 말씀은 하나임을 가르쳤다, 그는 「화엄경」과 「화엄신론」을 통해 선교의 일치를 확인하고 실천자의 능력에 따라 다양한 길을 수용하고 원융할 수 있다고 보았다. 결사의 뜻만 함께한다면 선과 교, 유교와 도교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받아주었다. 넷째, 그는 특정한 스승은 없었으며 배우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스승으로 삼았다. 고려불교 퇴폐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계통이든 받아들여 참여했던 것이다. 다섯째, 중도를 기초로 하였다. 중도에 바탕하여 선교나 유교, 도교를 가리지 않고 결사에 참가하고자 하는 이는 이전에 참여하지 않았다한들 누구나 결사문 뒤에 그의 이름을 올리게 해주었다. 이를 통해 지눌의 운동은 당시 모든 종교와 사상, 사람을 초월하여 전폭적인 지지와 공감을 형성했음을 알 수 있다.지눌은 정혜쌍수를 수행의 기본으로 보았으나 당시 수심인들은 정혜를 잘못 이해하여 잘못된 수행을 했다고 보았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사를 한 것이다. 성적등지문은 정혜쌍수의 실천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또 그는 당시 교종과 선종 한쪽이 아닌 불교계 전반의 문제를 지적하고 경전공부만 신경 썼던 교학자들을 비판하였다. 교학자들은 궁극적 깨달음에만 집착하여 점차적이고 지속적인 수행을 중히 여기지 않았다.지눌은 정과 혜의 체계에서 수상정혜와 자성정혜를 제시했다. 이는 한 사람이 둘 다 닦으라는 것이 아니라 각자 근거에 맞는 것을 이는 해오와 증오로 다시 구분된다. 해오는 참된 가르침에서 내적 반성을 이루는 것이다. 해오 이후 점진적으로 수행을 통해 긴 시간 동안 잘못된 습성 속의 미혹함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오다. 해오의 과정에는 다섯 가지 심리적 효과가 있다. 불안정상태의 마음이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또렷한 각성상태를 초래한다. 또 마음 또는 주의의 통제능력이 향상된다. 자신의 내면적 갈등을 직면하여 자각과 통제능력이 향상된다. 선정에 드는 과정 중의 여러 가지 잡념에서 벗어나 마음을 평안히 할 수 있다. 어떤 현상이나 대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아 그에 대한 직관적 통찰을 가능케 한다. 마지막으로 인식주체와 인식객체에 대한 구분이 없어지며 외부세계와 내부세계의 경계가 사라진다. 이를 통해 아와 비아의 분별이 없는 주객합일 상태, 즉 공의 상태를 증험할 수 있다. 이러한 효과들을 통해 자신이 본래 완성된 존재라는 믿음은 자신의 현재 진면목을 새로이 인식시켜준다.깨침은 아는 것이며 닦음은 행하는 것이다. 본래 성품이 부처와 다를 것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 돈오다. 하지만 안 것을 실제로 행할 수 있는가는 닦음의 핵심이다. 깨친 즉시 행동이 일치하기는 어렵다고 지눌은 말한다. 그는 최초의 깨달음 후에도 수행을 계속 해야 한다고 하였다. 최초 깨달음은 반드시 지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후의 깨달음을 몸소 실천해야한다. 그러한 최초의 깨달음 후의 수행은 점수라 한다.점수의 구체적인 수행은 무엇인가? 지눌의 수행은 삼학을 갈고 닦을 것을 말하는데 계율로 잘못을 막고 악을 그치며 선정으로 이치를 맞추어 산란한 마음을 거두어 잡아 뜻으로 육욕을 뛰어넘는 것이며 지혜로서 법을 가리고 공을 관한다는 것이다. 특히 계율은 최상근기자라도 반드시 지켜야한다고 했다. 당시 지눌은 혼란한 불교 폐단을 막고자 결사의 길을 택했는데 지눌의 계초심학인문은 습정균혜하기 위한 중요한 방법이며 초심학인이 계향으로 훈습되고 장양되면 정혜는 자연스러운 학수일심 된다고 했다. 실제로 계는 정혜의 수행을 지원하며 계의 수행 때문이다. 바른 수행에서 돈오점수밖에 길이 없다고 한 것은 일반 대중들은 무지하여 그 도를 모르고 과거 습관을 없애는 것이 힘들기에 점수밖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돈오점수 중 하나만 하면 되는데 왜 두 개를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결합 그 이상의 선후관계를 문제시했다. 돈오 이후에 점수가 와야 하는데 진여를 얻는 것과 망심에서 벗어나는 것은 서로 다른 수행인 게 아니라 동일한 수행을 성취와 과업으로 구분한 것이다. 참선수행이나 경전공부뿐만 아니라 모든 수행은 점수인데 돈오는 이러한 수행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수행과 깨달음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지눌의 체계에서 돈오점수와 돈오돈수는 갈등이 없는데 이는 그가 돈오를 폭넓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종밀의 표현으로는 깨달음으로 닦으면 해오이며 닦음으로 깨달으면 증오이다. 이에 따르면 돈오점수의 깨달음은 해오이고 점수돈오에서의 깨달음은 해석에 따라 증오 또는 증오와 해오에 모두 통한다. 깨달음의 의미를 먼저 한정하고 그에 따라 돈오점수를 쓰는 것이 아닌 ‘오후수’의 깨달음을 돈수와 점수로 두 가지로 이해한다. 이에 돈수론자들은 지눌이 궁극적 깨달음이라는 한정적 의미를 잘못 사용하였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지눌에게는 단순히 ‘궁극적 깨달음’이라는 한정적 의미가 아닌 ‘이해에 의한 깨달음’으로써 해오와 섞어 사용했다. 따라서 돈수론자들의 비판은 지눌의 개념상의 세세한 구분을 존중하지 않고 용어 사용 문제를 제기했을 뿐 정당한 비판이 되지 못한다.지눌 사상이 현재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로 인간상실, 자기상실에 깊이 빠진 현대사회에서 지눌의 진정한 인간회복, 자기회복의 원음을 들어 근원적이고 본래적인 자기수행에 힘써야한다. 인류의 밝은 미래를 위해 잃어버린 나와 소외된 나를 회복하여 단절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되찾는 인본주의 사상을 확립하는 것이 현대가 풀어야 할 근원적인 문제라고 본다. 둘째는 외래사상과 외래문화의 무분별한 수용으로 가치관의 혼란 상태에 있기에 지눌의 주관적이면서 창의적인 외래사상 통하다.
    인문/어학| 2018.12.16| 10페이지| 2,000원| 조회(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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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의 역사와 문화 - 료안지
    일본의 역사와 문화 ? 료안지1. 선택이유료안지를 선택한 이유는 일본 문화재에 아는 게 없어서 뭘 해야 하나 고민하면서 이것저것 찾다가 발견한 참고문헌인 학술지 「한국과 일본 정원문화에 함축된 철학과 미의식」 때문이다. 학술지 제목이나 소개에 나온 정원문화의 철학과 미의식이 궁금해서 읽어보는 김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소개하고자 료안지로 선정했다.2. 창건배경 및 역사료안지 자리에는 10세기 말, 천황의 발원으로 건립된 사찰이 있었다. 12세기 중반 이곳에 후지와라 가문의 귀족이 산장과 사찰을 지었다. 무로마치 시대에 들어 장군을 보좌하는 호소카와 가쓰모토가 이 땅을 차지하여 1450년 기텐겐쇼 선사를 첫번째로 세워 료안지를 건립하였다. 가쓰모토는 기텐겐쇼 선종의 법리에 통달하여 깊이 귀의했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마치 북송 용안산 도설사의 종열선사와 재상 장상영의 깊은 관계와 비슷한 점에서 사찰 이름이 료안지로 지어졌다. 이러한 료안지는 1467년 교토를 중심으로 시작된 큰 전란으로 소실되었다. 불행하게도 가쓰모토는 그 전란 중 중심인물이었다. 가쓰모토가 죽은 후 가쓰모토의 아들이 사찰 재건에 나섰으며 석정은 그 때 만들어졌다고 전한다.3. 해당 문화유산소개에 대한 외형적 소개료안지 정원은 하얀 모래와 검은 돌들이 시각적으로 균형을 이루도록 배치하여 수묵산수화의 여백의 미를 보여준다. 담장과 툇마루 기둥, 정원의 사각 테두리는 화폭의 액자처럼 관람객의 시선을 주목시켜 외부는 차단되고 한적하면서도 고담한 선경을 보여준다. 이러한 료안지의 배치 때문에 관람객들은 툇마루에 앉아 개개의 사색에 잠겨 정원과의 물아일체가 된다.↑ 료안지 경내도↑ 방장 앞뜰의 가로 약 25미터, 세로 약 10미터의 아담한 공간에 만든 가레산스이 정원이다. ‘가레산스이’는 물을 사용하지 않고 돌이나 모래로 물을 표현하는 정원 양식이다. '인간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어느 각도에서든 15개의 돌 중 14개만 볼 수 있다고 한다. 위에서 보면 전부 볼 수 있다고 하지만 하늘에서 내려다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 정원은 걸으며 감상하는 정원이 아니라 방에 앉아 조용히 바라보기 위해 만들었다. 면적도 넓지 않고 산과 시냇물, 깊은 계곡을 간소하게 옮겨 만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禪)의 세계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가레산스이 정원 뒤로 가면 츠쿠바이가 있다. 츠쿠바이는 다실에 들어가기 전에 손과 입을 씻기 위한 물을 담아 두는 돌그릇이다. 동전 모양이며 입 구(口)자 모양으로 뚫려있는 구멍 중심으로 네 개의 한자가 적혀있는데 이 글자들은 뭔가 모자란 글자지만 입 구(口)자와 합치면 '吾唯足知'라는 문구가 된다. 이 문구는 ‘나는 오로지 만족함만을 알 뿐이다'란 뜻으로 역시 선(禪)의 가르침이다.4. 일본 역사에서 차지하는 의의일본은 15세기 이후 중국의 영향을 벗어나 독자적인 정원양식을 발전시켰다. 당시 일본의 정원은 선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료안지는 정원 속에 선종의 가르침을 함축하여 정원의 구성 원리 속에 넣은 것이다. 신중하게 선택된 돌 열다섯 개와 하얀 모래가 만들어낸 모양은 하나하나가 정교하고 추상적으로 계획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양은 정원을 보는 사람이 스스로 선(禪)의 경지를 자연스럽고 저절로 느낄 수 있도록 추상화하였다. 그러므로 료안지는 걸어 다니며 즐기는 정원이 아니라, 어느 곳이든 가만히 서서 사색과 감상을 하도록 만든 것이다. 즉, 료안지의 정원은 감상을 하게 하면서도 참선을 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5. 건축학적 가치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이유 등)당시 일본의 대표적 문화코드이자 일본 정원을 대표하는 상징인 선불교의 정신을 함축한 정원이며, 세계적으로 경관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물리적 형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물경보다는 그 안에 담겨 있는 정신적 의미를 추구하는 의경에 비중을 두고 있으며 정원에 담긴 철학이나 미의식을 추출하기 쉽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첫 번째 이유는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인 사례이기 때문이다.
    인문/어학| 2018.12.16| 4페이지| 1,000원| 조회(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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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로 본 중국사 - 중국 근대사의 중심 마오쩌둥(모택동)
    모택동역사를 좋아하는데 특히 그중에서도 근·현대사 부분을 좋아한다. 그러나 한국 근·현대사만 알지, 중국 근·현대사는 잘 모름에도 불구하고 중국사에서 근·현대사의 대표적인 인물을 고르라면 당연히 모택동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이름과 정치가라는 정도만 알지, 자세한 내용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모택동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자 선택하였다.모택동은 1893년 상담현 소산이라는 작은 농촌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교육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와 충돌 후 집을 나와 근대식 소학교에 입학했고 이후 호남사범학교에 입학하여 교육다운 교육을 받았다. 그는 튼튼한 육체가 강한 중국을 만든다는 신념에 따라 육체적 극기 훈련과 수영 등에도 열심히 하였다. 모택동은 교외활동에 관심이 많아 1911년 신해혁명 당시 잠시 혁명군으로 입대하나 곧 돌아왔다. 당시 중국 대도시에서는 사회활동을 하는 학생조직들이 활발했는데 모택동도 그 가운데 하나인 신민학회를 조직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 조직은 프랑스에 노동유학을 보내는 근공검학 운동을 하였다. 훗날 중국공산당 지도자들 가운데는 이런 경험을 한 인물들이 많았다. 그러나 모택동 자신은 해외유학을 경험하지 못했다. 모택동은 사범학교에서 맺은 인연으로 인생의 사회적 출발을 하였다. 1920년 호남의 정치적 변화로 급진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자 그들과의 친분으로 모교 부속 소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그곳에서 은사 양창제의 딸 양개혜와 결혼하고 아들 둘을 낳았다. 그러나 양개혜는 1930년 국민당 군벌에게 처형되고 장남은 한국전쟁에 참여했다가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 이는 당시 중국 공산주의자들에게는 흔한 일이었다. 그가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1920년 무렵이었다. 그가 그렇게 된 것은 그의 성향과 시대적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소학교 시절부터 정치개혁가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고 사범학교 시절에도 사회 문제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활동했다. 그는 실용적 학문보다는 군벌통치 아래의 중국 정치상황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의 개인적 기질에 더하여 시대적 분위기 또한 모택동이 혁명가의 길을 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청 왕조가 멸망할 당시 그는 18세였다. 모든 악의 근원으로 여겨졌던 만주족의 왕조가 멸망하고 동양 최초의 공화정이 수립되었지만 중국의 상황은 오히려 악화되었다. 공화정 아래 군벌들은 일보이나 서구 제국주의자들과 결탁하여 국가이익을 희생하고 자신의 권력 확대를 추구했다. 국가존망의 위기의식은 절박했으며 즉각적인 해결책이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1971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공산주의 혁명은 일부 중국인에게 중국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으로 다가왔다. 중국의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 가자는 서구식 문제해결 방법보다는 중국의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한다고 약속하는 공산주의에 모택동은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1918년 북경으로 간 모택동은 북경대학 도서관에서 일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중국에 마르크스주의를 소개한 이대교와 접촉하고 그가 이끄는 ‘마르크스주의 연구회’에 참여하여 공산주의사상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또한 훗날 중국공산당 창당 뒤 최초 서기가 된 진독수와도 접촉하고 영향을 받았다. 고향으로 돌아온 모택동은 중국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중국 인민의 참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고향에서 문필활동으로 모택동은 북경에도 알려졌다. 장사에서 학생들을 조직하여 호남의 독재군벌에 저항하는 파업을 주동했기 때문에 그는 상해와 북경을 오가는 불안한 생활을 하였다. 1921년 7월 상해에서 중국공산당이 창당되었다. 중국공산당 제1차 대회로 불리게 된 이 창당 모임에 모택동은 호남성을 대표하여 참여했다. 당시 중국 전역의 공산당원은 적은 수였으며, 공산당이 당시 군벌이 지배하던 중국의 현실 정치에 큰 의미를 가질 만한 큰 세력은 되지 못했다. 젊은 시절 그는 장사에서 문화서사라는 서점을 열어 급진주의 이념서적을 보급하였다. 문맹퇴치운동의 일환으로 자수대학을 세워 식자교육을 위해 활동하면서 그 교육을 공산주의 이념 전파를 위해 활용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모택동은 공산주의 이념을 보급하는 한편 학생과 노동자를 조직했다. 그가 정치적으로 처음 성장한 것은 1924년 중국공산당이 손문이 이끄는 국민당과 합작을 하면서부터다. 코민테른과 손문 사이에 이뤄진 국공합작 협상 결과에 따라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한 모택동은 국민당 중앙집행위원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뒤 모택동은 상해의 국민당 조직부 비서로 임명됨으로써 국민당 안에서 상당한 지위에 올랐다. 그는 국민당 우파였던 호한민이 관장하는 조직에 있었다. 1926년 장개석은 중산함사건을 일으켜 손문 사망 뒤의 국민당에서 새로운 세력으로 떠올랐다. 1927년 에서 모택동은 빈농들이 농촌에서 지주와 지배계층에 대항해 일으키는 반란을 찬양하면서 중국의 변화의 힘이 빈농들의 혁명적 열기에 있다고 주장했다. 농촌에서 농민들이 일으키는 폭력과 처형을 정당화하였다. 농민에 의한 폭력적 혁명은 모택동의 평생 과업이 되었다. 농민의 중요성을 인식한 최초의 중국 혁명가는 아니었지만 당시 중국공산단원들이 소련의 볼셰비키혁명을 전형으로 보아 도시 노동자를 조직하고 혁명의 첨병으로 삼고자 하는 목표에 주력하고 있었던 점과는 대조된다. 중국 인구 대부분이 농민이고 도시 노동자계층이 아주 미미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상황이었지만 당시 중국공산당원 대부분이 이 점에 주목하지 못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모택동이 농민에 주목하게 된 것은 그 자신이 농민 출신이라는 점 말고도 국민당 내부에서 농민과 노동자 조직은 공산당원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광동에서 농민을 훈련시키기 위한 기구인 농민강습소를 잠시 담당했던 경험도 작용했을 것이다. 빈농이 중심이 된 농민협회의 활동을 지지했다. 1927년 상해를 장악한 장개석은 그곳의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체포된 공산당원들을 처형했다. 이로써 손문이 출발시킨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합작은 더 이상 계속될 수 없었다. 공산당은 그해 가을 양자강 유역의 여러 도시들에서 무장반란을 일으켜 맞대응하였다. 추수봉기로 알려진 이 반란에서 공산당은 농촌지역과 광주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켰지만 크게 실패했다. 모택동 또한 이번 반란의 일환으로 고향 장사 부근에서 농촌 봉기를 조직했으나 실패하고 호남과 강서성의 경계지역인 정강산으로 도주했다. 장강산 근거지에서 모택동의 활동은 그 자신의 정치적 역정과 중국공산당의 발전에 다같이 중요한 단계였다. 이곳에서 중요한 통치 경험을 쌓았다. 모택동은 공산당을, 주덕은 군을 대표하는 인물 구도가 성립한 것도 이 장강산 시기부터이며 이 구도는 모택동의 사망시기까지 지속되었다. 모택동이 중공의 중심인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927년 추수폭동의 실패로 많은 공산당원들이 사망하여 잠재적 당권경쟁자들이 사라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산 세력이 농촌지역을 점령하고 근거지를 마련한 곳은 모택동의 정강산 지역이 유일한 것은 아니다. 이런 지역들은 1931년부터 소비에트구역으로 발전하는데, 모택동이 장악한 지역은 강서 소비에트로 알려져 있다.모택동은 이곳에서 처음 조직된 공산당의 군대, 즉 홍군에 대한 기본 원칙을 확립했다. 홍군은 무산계급을 위한 정치혁명을 집행하는 무장집단으로 규정하여 정치목적이 군대를 지배한다는 원칙을 확립하려했다. 공산당은 산악지역에서 국민당군과 전투하며 생존해 가는 군인 중심의 조직체로 바뀌었다. 군사에서 그의 큰 특징인 유격전 개념도 이곳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유격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홍군의 생존에 필수적인 농민들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공산당 세력의 성장에 중요한 농민들의 협조를 얻기 위한 노력을 펼쳤다. 토지혁명은 공산당의 재정·군사적 지원을 강화하였다. 농민 상위 두 계층인 지주와 부농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아 이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하위 3계층에게 재분배하는 토지혁명을 실행했다. 1943년 가을 모택동과 공산세력은 강서 소비에트에서 철수하여 장정이라는 대 후퇴를 시작했다. 장개석은 군사작전보다는 공산지역으로 소금 수출을 금지하는 조치로 공산군을 철수하게 하였다. 모택동과 중공세력의 최종 종착지인 삼서성에 도착한 것은 1935년 10월이었다. 이 장정에서 모택동의 정치역정에 결정적 구실을 하게 된다. 장정을 출발할 당시 확실한 목적지 없이 몇 차례의 회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서북으로 향하자는 결정만 내렸다. 이 과정을 모택동이 주도하고 당의 권력도 그에게 넘어갔다. 그의 당권장악은 중국공산당이 소련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독자적 목소리를 가지기 시작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이때 중국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한 공산주의자인 모택동이 중국공산당을 지배하는 새로운 전통이 공식화되었다.
    인문/어학| 2015.11.09| 3페이지| 1,000원| 조회(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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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근대사 - 조약으로 본 한국 근대사
    글로벌 한국사 ? 제국주의의 발호와 한국 근대사이 책을 고른 이유는 근대사를 좀 더 제대로 알고 싶기 때문에 골랐다. 한국사와 세계사를 아우른 새로운 역사라고 책을 소개해놨길래 이왕이면 세계사와 비교해서 제대로 파악하고 싶었다. 한중일 3국만 봐도 서로 다른 근대화 과정을 통해 제각기 다른 역사적 결과가 나타났다. 전근대까지 3국 중에서 가장 발전이 늦었던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했고 동양에서 유일하게 제국주의 국가가 되었다. 반면 쇄국 정책을 폈던 조선은 주체적인 근대화에 성공하지 못하고 불행하게도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중국은 일본보다 개항은 빨리 했지만 열강의 반식민지 국가가 되었다. 왜 이런 상이한 역사적 결과가 나타났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삼국의 역사를 동시에 공부해야 한다. 또한 제국주의 세계 체제 속에서 일본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국 근대사 또한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난 직후 청·일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가 정확히 10년 전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와 일본이 맺은 톈진 조약에서 양국의 군대가 동시에 철수하고 나중에 조선에 한쪽 나라가 군대를 파병하면 다른 한쪽도 같이 파병할 수 있음을 명시했다.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은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했고 이를 받아들여서 군대를 보냈다. 이를 본 일본은 톈진 조약에 따라 자기들도 군대를 보냈다. 동학 농민 운동을 진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각자 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도리어 조선에서 자기들끼리 전쟁을 벌였다. 또, 애초에 식민지의 근원인 제국주의가 탄생하게 된 배경 또한 유럽 국가의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이다. 이 혁명들은 인류의 역사를 완전히 바꾸었다. 자본주의가 싹트고 신분제 사회에서 민주주의 사회가 되었다. 이로써 근대사회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 성장은 대량생산에 무력을 동원한 세력 확장 즉, 제국주의가 등장했다. 이 과정에서 여러 나라를 식민지로 삼았는데 동아시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중국은 아편전쟁의 패배로 난징조약을 맺고 1842년 개방을 하였다. 일본은 1854년 미국에 의해 개항하였다. 조선만은 그 영향권에서 벗어났었으나 곧 일본에 의해 개방되었다. 이렇듯 한국사를 공부한다고 해서 한국사만 공부할 것이 아니라 세계사의 흐름을 파악하고 이해해야 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부터 조선이 다른 나라와 맺는 조약과 다른 나라들 사이의 조약에서 조선에 미치는 세계사 흐름 속의 한국사에 대해 파악하겠다.동양의 중심인 중국이 서양 열강에 의해 문호를 개방한 사실은 다른 나라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조선은 쇄국정책을 고수했고 흥선 대원군의 집권 이후 더욱 강하게 외세를 배격했다. 일본 또한 쇄국정책을 펼쳤으나 유일하게 네델란드와 교류하면서 네델란드를 통해 아편전쟁 이후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전해들은 일본은 이후 외국 선박이 나타나면 격퇴하라는 지침을 수정했다. 서양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결국 일본 또한 1858년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을 통해 개항하였다. 한편 조선을 개항시키기 위한 시도는 일찍부터 있었다. 1832년 영국이 가장 먼저 시도했고 1845년에도 통상을 요구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여러 나라의 무력시위 등이 있었으나 완강한 쇄국정책을 펼쳤다, 이때 조선을 개항시키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조선의 강한 반발이 아니라 서구 열강들은 조선보다는 다른 나라를 식민지화시키는데 관심을 더 기울였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은 서구 열강이 아닌 이웃 나라 일본에 의해 개항되었다. 1875년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강제로 개항시켰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자주적인 근대화에 성공했으나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서 여러 문제점이 나타났다. 일본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을 침략하려고 했던 것이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강제로 편입되었다. 근대화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조선은 불평등한 외교 관계에 의해 강요된 일방적 교역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강화도 조약 1조에서는 조선이 독립국임을 명시했기 때문에 겉으로는 조선의 주권을 인정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는 종주권을 주장하고 있는 청으로부터 조선을 떼어 내어 일본의 영향권 안에 두려는 의도였다, 조선을 속국이라고 여기면서 종주권을 주장하는 청과 조선을 방패삼아 제국주의 국가로 도약하려는 일본 사이의 대결이 불가피하게 다가오고 있음을 보여주는 조항이다. 강화도 조약에서 대표적인 불평등 조항은 치외법권과 해안 측량권이었다. 치외법권은 그 나라의 사법 독립성을 침해하는 조항이었다. 그리고 해안 측량권도 조선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할 수 있는 조항이었다. 이 조항의 표면적인 이유는 일본 선박의 안전한 항해 보장이었으나 실제로는 일본이 조선에 침입할 수 있는 안전한 항로를 미리 확보하려는 속셈이었다. 이후에 맺는 조·일 수호 조규 부록과 조·일 통상 장정 또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처럼 강화도 조약과 그 부속 조약으로 조선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강제로 편입되었다. 그 결과 자급자족적인 농업 중심의 경제 체제는 큰 타격을 받았고 그에 따라 봉건 질서 또한 더욱 심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조선 정부와 청은 일본과 조약을 맺은 후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서양 여러 나라와의 통상을 통해 제국주의 국가들의 상호 견제를 유도해서 중립을 유지하려고 했다. 「조선책략」이 그러한 생각의 대표적인 예이다. 유생들의 거센 반발이 있기는 했으나 1882년 들어 「조선책략」에서 나타난 연미·방로책은 현실화되었다. 청은 러시아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의 수교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정부도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연합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결국 조선은 1882년 서구 열강 가운데 최초로 미국과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도 우리에 불평등한 조약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법권의 독립을 부정하는 치외법권이 명시되었으며, 최혜국 대우가 최초로 명시되었다. 이는 아관 파천 이후 우리나라 이권이 여러 나라에게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한 나라에게 광산 채굴권을 주면 최혜국 조항 때문에 다른 나라에게도 똑같은 혜택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거중조정이라는 항목이 있었는데 이는 두 나라 중 하나가 어려움에 처하면 서로 도와준다는 조항이다. 그러나 이것은 외교적인 수사일 뿡 실제로는 지켜지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일제가 우리나라 외교권을 침탈해 간 1905년 을사조약 직전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미국이 필리핀을 차지하는 대신 조선을 일본에 팔아넘겼다. 조선은 미국과 조약을 맺은 후 잇달아 영국, 독일 등과도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프랑스와는 천주교 포교 문제가 걸려 있어서 1886년에 가서야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 이때부터 사실상 천주교가 조선에서 공식으로 인정된다. 서구 열강과의 조약 체결에서 주목되는 국가는 무엇보다도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조선과 청 정부에 의해 배척되었으나 1884년 들어 조선과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 서구 다른 국가와의 수교가 종주권을 주장하는 청나라의 알선으로 체결되었던 것에 반해 러시아는 독자적으로 다가와 수교했다. 청이 러시아와의 수교를 주선하지 않은 이유는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기에 러시아의 남하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결국 조약 체결 후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던 영국을 자극해 1885년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한다는 명분으로 거문도를 불법 점령했다. 이렇게 조선은 여러 나라와 조약을 체결하고 청과 일본의 조약 중에 조선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갑신정변 사후 처리 문제를 놓고 맺은 톈진 조약이다. 앞에 설명했듯이 청·일 전쟁이 발발하는 원인 중에 하나가 이 조약이다. 조선에 대한 침략 야욕을 불태우고 있던 일제는 마침내 1904년 러·일 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확고히 하고 나아가 조선을 이 전쟁의 군사 기지로 활용하려고 했다. 고종이 러·일 전쟁 직전에 중립을 선언했으나 일본은 러·일 전쟁 발발 2주 만에 군사 기지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한일 의정서 체결을 강요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한 조치들을 진행했다. 먼저 1904년 제1차 한·일 협약을 맺어 조선의 정치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조정하는 고문 정치를 실시했다. 이어서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이 조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당해서 사실상 국권을 빼앗기자 나라를 되찾기 위한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는데, 하나의 흐름은 애국 계몽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의병 투쟁이었다. 을사조약은 고종의 날인도 없이 이토 히로부미의 강요에 의해 체결된 조약으로 국제법상으로 보면 무효인 조약이다. 이런 까닭에 고종은 1907년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기 위해 이준, 이위종, 이상설을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파견했으나 열강은 이미 가쓰라·태프트 밀약, 영·일 동맹 등에 의해 일제의 조선 지배를 인정했기 때문에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도리어 일본은 이 사건을 문제 삼아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 7조약을 체결하여 군대까지 해산시켰다. 의병 투쟁이 한창이었던 당시에 이 사건으로 다시 정미의병이 일어났다. 이때는 해산 군인들까지 합류하여 의병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1909년에는 기유각서를 통해 사법권마저 가져갔으며, 결국 1910년 한·일 합병 조약을 강제하여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었다.
    독후감/창작| 2015.11.09| 3페이지| 1,000원| 조회(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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