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 이야기를 읽고』벌레에게 진정한 용서는 존재하지 않는다.진정한 용서는 아직까지 나의 인생에서 겪어본 경험이 아니다. 학교나 종교에서 용서는 언제나 지녀할 덕목으로 교육받고 강요당하지만 진정한 용서를 내가 직접 실천한 적은 내 기억 상에 없다. ‘너를 용서할게’, ‘너의 잘못을 잊을게’라는 단순한 두 문장이 용서를 말한다면 그것은 말의 가벼움에 지나치지 않는다. 용서는 마음으로 이루어져야한다는 논리가 매우 진부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용서를 위해 반드시 지켜 져야할 필수사항이다. 그러나 진정한 용서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만큼의 필수사항이 아니다. 진정한 용서는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경험이며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강요한다고 실천되는 행동이 아니라 개인의 의지에서 파생되어야 할 덕목이다.이러한 논리와 주장의 근거를 보여주는 사람이 아람이의 엄마이다. 아람이의 엄마는 김 집사에 의해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용서의 길로 강요된다. 김 집사는 자신의 행동을 인도라고 일컫지만 그의 행동은 인도가 아닌 하느님의 말로 포장한 강요임을 결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 집사가 말하는 용서의 범위는 하느님 즉 신이 인간에게 요구한 고귀한 하지만 인간에겐 사실적으로 불가능한 수준까지 아우른다. 다소 극단적인 생각일 수 있지만, 그가 말한 용서에 따르면 왼쪽 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을 내노라 했듯이 아람이의 엄마가 김도섭에게 다른 아이까지 내주어야 하며 원수를 사랑하라는 뜻에 따라 김도섭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 인간을 구원해준다는 그 특수한 종교라는 공간 안에서 아람이 엄마는 모순적으로 망가질 때로 망가진 자신의 몸둥아리를 더욱 희생하여 자신의 위안이 아닌 하느님에 대한 복종을 위해 김집사가 강요하는 용서를 시도한다. 그러나 신의 존재가 아닌 인간의 존재인 아람이의 엄마에게 그 용서는 자신이 넘을 수 없는 가시넝쿨이었으며 그 가시 넝쿨로 아람이 엄마는 자신이 벌레임을 처절하게 스스로 증명하였다.인간을 구원해준다는 종교가 아람이 엄마에게는 구원이 아닌 인간은 벌레에 지날 뿐이라는 한계를 증명해준 분노가 들끓는 공간이지만 소설은 우리에게 혼란을 안겨주기 위해 작정을 한 듯 김도섭에게 종교는 초자연적인 힘을 빌린 신과 영접한 공간으로 매우 신성하다. 자신이 운영하던 학원에 다니던 어린 여자애를 죽인 벌레인 그가 하느님이라는 그 단어 안에서 누구보다 평온한 삶으로 생을 끝마친다. 하느님의 인도아래에서 사형수이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평온한 모습에다가, 사형 후 장기기증까지 약속한다. 그가 이렇게 평온할 수 있었던 것은 아직 용서라는 진정한 의미를 깨우친 못한 나와 다르게 그가 용서를 깨우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용서를 하는 입장이 아닌 용서를 받는 입장이기에 용서를 깨우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아람이의 엄마는 자신의 위안이 아닌 하느님에 뜻에 따라 김도섭을 용서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김도섭은 자신의 죄를 하느님이 용서해주신다는 그 믿음에 따라 자신의 위안을 얻을 수 있었으며 그러니 용서를 깨우치지 않을 수 없었고 하느님의 뜻 아래에서 은신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여망이 있다면 저로 하여 아직도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영혼에도 주님의 사랑과 구원이 함께 임해 주셨으면 하는 기원뿐입니다.” 라는 그의 말은 자신의 입장만을 생각한 그의 이기심으로 살인보다 더한 나머지 선한 사람들의 분노를 들끓게 한다. 잘못을 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법이라는 제도를 통한 불행한 삶을 살아야 하지만 김도섭은 영리하게 인간의 것이 아닌 신의 말을 택해 자기 잘못이 용서된다는 믿음 안에서 평온을 찾았다.이야기가 전개되는 동안 벌레라는 단어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용서’와 ‘벌레’를 관련시키는 나의 사고과정은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용서를 강요하는 자, 용서를 해야하는 자, 용서를 받아야하는 자를 인간의 눈으로 판단했을 때 보기만 해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 김도섭만이 벌레라고 당연하게 생각되지만, 이 소설에서 김 집사, 아람 엄마, 김도섭 모두 벌레이다.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라고 아람이 엄마의 울부짖음을 무시한 채 김집사는 하느님의 역사만을 고집하며 용서를 강요한다.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 큰 마음, 선행의 의미로 인도해야 했지만 그는 전도에만 입각해 자신과 다르지 않은 존재에게 고통만을 안겨준 벌레였다. 김 집사의 강요에 용서의 길로 거의 접어들었지만 용서의 한계에 부딪히고 자신을 포기한 아람이의 엄마도 인간의 눈에게는 불쌍하고 선하고 선한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그녀도 벌레라는 이름표를 뗄 수 없다. 김도섭은 인간의 눈에도 벌레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타인의 위안이 아닌 자신의 방어막, 이기심에 사용하는 가장 극악한 범죄를 범한 벌레이다. 세 명의 각기 이유 다른 벌레가 얽히고설킨 이 소설은 제목처럼 벌레 이야기 이며 벌레들의 꿈틀거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