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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실주의와 장발장 (문학이야기, 토론)
    -사실주의-사실주의란 낭만주의의 전성기인 1830년대에 대두된 사조로 절박한 현실에 대한 깊은 관심과 현실 묘사를 위하여 등장한 문예사조이다. 이는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행동주의를 내포하고 있고 동시대의 생활상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진실되게 기록하는 것을 목적으로 객관적으로 묘사하고자하는 특성이 있다. 사실주의가 발생하는 데에 대한 바탕으로 프랑스 대혁명의 좌절과 1830년대의 극심한 사회 변화가 있다. 산업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여파로 부르주아들이 권력을 장악했고 자본의 지배가 더더욱 심해졌으며 부르주아들의 윤리가 생활의 전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시민들에게 시사적인 정보와 의견을 제공하는 저널리즘의 발달로 문예란을 통하여 게재한 소설은 왕정의 대중 교육과 저널리즘의 확산에 도움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19세기에는 정체 경제적인 변화 못지않게 과학적인 면에서도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였는데, 19세기의 100년동안의 발전은 과거의 발전에 비해 굉장히 높은 수준이었다. 이는 인간의 정신적인 측면까지 변화시켜 과학적 지식만이 유효하며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과학주의’를 불러일으킨다. 이에 따라 종교의 영향은 크게 줄었고 관찰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사실주의가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객관적이고 정확한 묘사를 강조하는 사실주의 작가의 서술은 결국 주관적인 입장에서 서술된 것인 표피적인 작업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문체나 서술 과정에서 작가의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음으로 독자들은 결국 '사실성'을 재현하는 작가의 주관이 들어간 작품을 읽게 되는 것이다.ㅇㅇㅇ 학우의 토론 주제사실주의의 발생 배경(사회적 상황)은 무엇일까?사실주의 문학은 1830년 7월 혁명 이후 프랑스의 중산 계급의 득세와 큰 관련이 있다. 영국의 경우도 1832년에 통과된 개정 선거법에 이은 중산 계급의 부상은 사실주의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고 이는 유럽 문화권의 사실주의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귀족 계급에 의해 억압된 삶을 살았던 중산층은 규모나 교육 수준, 시간적, 물질적 여유에 있어서 큰 성장을 보였고, 이런 정치, 경제적 현상은 이들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의 성장을 가져왔다. 이들은 기계적이고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나아가 더욱 넓은 관점을 가지게 된 것이다.낭만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사실주의가 낭만주의와 어떻게 다른가?사실주의는 낭만주의로부터 파생된 후, 낭만주의에 대한 반항을 통해 정립된 문학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주의와 낭만주의 모두 표현의 자유를 바탕으로 그들이 살고 있는 시대상을 표현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는 과거의 세계, 이국적인 세계를 동경하며 격정적이며 현실을 떠난 이상향을 쫓거나 이국적인 소재 등에 깊은 관심을 표현하였으며 시적이며 신화적인 주제를 취했다. 반면에 사실주의는 당대 사회적 현실의 객관적인 묘사를 바탕으로 묘사의 정확성을 강조하였고 현재성을 부각했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현실 모습과 현실의 경험을 중시하였다.사실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와 작품의 또 다른 예시가 무엇일까?미술 사조로써 사실주의는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나타난 유파를 일컫는 것으로서 쿠르베와 도미에, 밀레 등의 화가들이 지향했던 태도와 기법을 의미한다. 대표 화가로서 ‘쿠르베’의 대표작 ‘안녕하세요 쿠르베씨’는 사실주의 사상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대표작 중 하나로 그림의 소재가 다소 어울리지 않다는 평과 함께 꾸미지 않은 그대로를 나타낸다는 평을 나타낸다. 또한 화가 ‘도미에’의 ‘빨래하는 아낙네’ 또한 빨래를 끝내고 제방을 오르는 여인과 아이를 그린 그림으로, 높은 계단을 오르기 힘들어하는 아이의 모습과 명암, 배경 등을 통해 당시 도시의 노동자 계층의 여성과 고단한 삶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이 외의 ‘까미유 코로’의 ‘제노아 풍경’, ‘밀레’의 ‘이삭줍기’ 또한 있는 그대로 시대상을 그려낸 사실주의의 대표 작품들이다.사실주의 학이 프랑스를 시작으로 전개되었는데,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국, 러시아, 독일에서의 사실주의 문학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경험주의의 전통이 깊은 영국은 19세기에 디킨즈 새커리 등이 산업혁명을 가장 먼저 성취하여 근대 사회의 면모를 일찍이 갖추고 있었다. 19세기 후반에 토머스 하디는 사회의 밑바닥에 깔린 서민 생활의 비참함을 깊이 있게 묘사하였다. 19세기 영국 사실주의는 디킨즈와 새커리가 대표자로 부를 수 있는데, 디킨즈는 몰락해 가는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후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빚 때문에 투옥되는 바람에 고생을 하며 가난한 사람을 동정적으로 그리는 데 장기를 발휘하게 되는데, 그 작품으로 『데이비드 커퍼필드』 『두 도시 이야기』 『올리버 트위스트』 『막대한 유산』 등이 대표작이다. 대커리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고등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상류계급 사람들의 허영심을 풍자하고 위선을 비판했다. 『허영의 시장』이 그의 대표작이다. 이밖에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토마스 하디의 『테스』,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조지 엘리엇의 『사일러스 마아너』도 영국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작품이다.독일에서는 1830년 무렵에야 시민 계급 활동이 두드러지고 정치 참여를 위한 움직임도 구체화된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기계공업의 부흥이 시작되었는데, 이런 가운데 쿠츠코의 경향 소설, 헤벨의 사실주의 희곡 등이 발표된다. 이밖에 켈러, 라베, 마이어 등이 사회적 변동이 격해지는 독일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러시아의 사실주의는 프랑스의 사실주의를 계승한 데에서 시작된다. 유럽의 사실주의가 사회 현실의 묘사에 치중한 데 비해 러시아의 사실주의는 명석한 투시력과 영원한 환상을 지니고 있다. 대표적 작가로는 고골리의 『검찰관』, 『죽은 농노』가 있고 톨스토이의 『가난한 사람들』, 『이중인격』,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 등이 있다. 러시아가 사실주의 문학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봉건적인 차르 체제가 붕괴할 위험에 처했었고 서구 교육을 받은 인텔리겐치아들이 사회의 불만 세력으로 활동하고 있어 사회적 불안 요소가 컸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ㅇㅇㅇ 학우의 토론 주제자베르의 자살 원인은 무엇이고, 그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할까?자베르는 원칙주의자로서 죄수들은 변할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범죄자인 장발장을 잊지 않고 꾸준히 추격하는 인물이다. 자베르는 악한 범죄자인 장발장이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얻고도 죽이지 않는 모습을 보며 죽기 직전까지 자신의 신념에 철저했던 그가 평생 쫓던 장발장이 그가 생각해오던 악한 범죄자의 모습이 아님에 크게 혼란을 느낀다. 결국 그는 장발장이 누구며 어떤 사람인지 깨닫고 감옥에 가두지 않게 되고, 자신이 평생 가지고 있던 냉혹한 정의의 신념이 산산조각 나는 결과와 함께 결국 자살을 하게 된다. 그의 죽음은 결국 그의 신념이 사라지면서 그의 자아를 잃어버린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장발장의 가난은 신부님 개인에 의해서 구제된다. 가난은 어떤 방식으로 구제되어야 하는 걸까?가난의 원인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사회적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현재 사회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는 제도가 많다. 그러나 이들에게 경제적인 도움만을 제공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며 그들이 경제적인 발전을 얻을 수 있도록 지원해줄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신부님이 장발장에게 기회를 주며 용서를 한 것처럼 가난한 이들에게도 기회를 베풀어 그들이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뿐만 아니라 실패해도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어야 한다.사람은 변할 수 있는 존재일까?악마는 태어나는 걸까, 길러지는 걸까? 이에 대한 대답은 명확하지 않으나 악을 가진 채 태어나는 악마도 존재하고, 사회와 환경에 의해 길러진 악마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모두가 악한 사람이 되지 않는 것처럼 후자의 악마는 천성이 악한 것이며 모든 악마는 태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행동이나 습관 같은 것은 노력하면 변할 수 있으나, 태어날 때부터 지닌 천성은 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PAGE * MERGEFORMAT- 1 -
    인문/어학| 2020.09.03| 4페이지| 1,000원| 조회(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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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토론, 독후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ㅇㅇㅇ학우의 토론 주제자살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알베르트vs베르테르)자살이란 현실이나 마음의 고통을 끊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 행위이다. 알베르트는 자살이 미성숙한 사람의 행위라고 하였으나 베르테르는 자살 또한 육체적 고통이나 질병과 다르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자살을 바라보는 입장은 둘 중 누가 정답이라고 할 수 없다. 죽음에 대해서는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견해는 다르기에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이다. 작가 이외수는 자살을 ‘자신의 목숨이 자기 소유물임을 만천하에 행동으로 명확히 증명해 보이는 일이며 피조물로서의 경거망동한 행동으로 생명체로서의 절대 비극이다. 그러나 자살은 가장 강렬한 삶에의 갈망이다.’라고 밝혔다. 즉 자살은 고통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삶에 대한 갈망을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하는 것을 통해 세상이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일 수도 있다. 따라서 자살한 자들의 마음을 헤아리기에 우리는 아직 살아있기에 이러한 복잡한 감정에 따른 행위를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 없고 이를 동감하거나 비판하기에는 섣부르다고 생각한다.알베르트는 권총을 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알베르트는 베르테르가 로테를 사랑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뤄질 수 없는 사랑임에 베르테르가 괴로워함을 알았기에 먼 여행을 가며 권총을 빌리는 것에 대해 어느정도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누군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 할 때 말리는 것이 상책인데 알베르트는 이와 달리 권총을 내어주는 것은 알베르트도 어느정도 베르테르가 그와 로테의 사이를 방해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물론 죽음을 직접적으로 바라지는 않았을 수도 있지만 그를 말리지 않은 행동에서는 그는 결국 그가 정말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것이라는 것을 몰랐다고 스스로 위안할 것이며 그의 죽음에 그가 직접적으로 개입한 것이 아니기에 그와 관련 없는 일이라며 죄책감을 덜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로테가 알베르트와 약혼하지 않았다면 베르테르와 사랑이 이뤄졌을까?사람 간의 일은 알 수 없는 일이나, 분명 알베르트와 약혼하지 않았다면 로테와 베르테르는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베르테르가 죽음을 결심할 정도로 로테를 사랑했던 것은 알베르트와의 약혼이라는 장애물 때문에, 즉 자신이 가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이유 때문에 더 사랑이 깊어졌을 수도 있다. 인간이란 자신이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이 더 커지는 법이므로, 베르테르는 로테와 정상적인 관계가 정립된 적이 없기에 그녀와의 사랑을 더 열망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물론 베르테르와 로테의 사랑이 영원히 지속되었을지도 모르나 알베르트라는 사랑의 방해물이 없었다면 원래의 감정처럼 열렬한 사랑이란 감정을 품지 못했을 수도 있다.ㅇㅇㅇ 학우의 토론 주제베르테르가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당시 사회는 계급주의 사회로 귀족은 귀족대로, 평민은 평민대로 지켜야할 규범과 분수가 있다고 여겼다. 베르테르는 충분한 역량과 재능을 가지고도 신분에 의해 절망할 수밖에 없었고 베르테르는 이러한 사회에서 홀로 단절되고 점점 외톨이가 되어갔다. 뿐만 아니라 그가 짝사랑하던 로테와의 사랑도 이뤄질 수 없자 이러한 현실과 시대에 좌절하여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채 자살을 택하게 된 것이다. 이는 즉 베르테르가 로테와의 사랑이 이뤄지지 않은 것 때문에 생을 마감한 것도 있지만 더불어 시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결말로도 볼 수 있다. 지위에 맞게 살아야 하고 사랑조차 맘대로 하지 못하는 사회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결국 그 사회를 죽음을 통해 떠나버리는 그는 당시 시대에 환멸을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로테는 어떤 성격을 가진 인물인가?로테는 현실에 타협하려 애쓰지만 이기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알베르트와 약혼한 사이였고 베르테르의 마음을 알고있었으나 그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뿌리치지 않는다. 결국 그녀도 베르테르에게 심적으로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를 버릴 수 없는 것이다. 로테가 결국 알베르트와 헤어지지 않은 것은 현실의 변화가 두려워 현실에 타협한 것이나, 실은 베르테르와도 헤어지고 싶지 않아 애매모호한 행동으로 보여줬으며, 베르테르를 확실히 정리하거나 또는 알베르트와 파혼을 통한 관계 정리를 하지 않은 것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은 생각하지 않은 채 그녀의 감정만을 중시한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작품 속에서 낭만주의를 찾아볼 수 있는 부분은?작품 속에서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적 문제들이 깃들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작가 괴테는 인간 감정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자신의 작품에 감정의 해방과 자유 관념에 대한 사상을 곁들여 무미건조한 사고를 지적하였다. 베르테르가 C백작 댁에서 열린 만찬에 초대받는 장면에서 식사가 끝난 후 열린 파티에 참석한 귀족들은 말단 공무원인 베르테르가 파티 장소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불쾌해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당시의 사회가 여전히 신분을 중시하는 인습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줌으로써 엄격한 규칙으로 이뤄진 사회를 비판하는 것으로 낭만주의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베르테르는 충분한 역량과 재능을 가지고도 신분에 의해 좌절할 수밖에 없는 반면, 귀족들은 보잘것없는 능력과 재능을 가지고도 신분 덕에 자랑스레 부귀를 누리며 돌아다닌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괴테는 신분 계급의 모순점을 작품 속에 유려하게 녹여내고 있다. 그리고 베르테르는 자살하는 이들이 인간 천성의 한계에 의해 괴로움을 이겨내지 못한 결과라고 말하는 한편, 알베르트는 그들을 모조리 나약한 인간이라 칭하고 참고 견디는 능력이 부족하다며 비난한다. 이러한 장면을 통해 괴테는 인간의 감성을 인정하지 않고 도덕과 이성만을 중시하는 합리주의적 계몽주의의 메마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도 낭만주의적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독후감/창작| 2020.09.03| 3페이지| 1,500원| 조회(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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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문학이야기)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신고전주의란 로코코와 후기 바로크에 반발하며 동시에 고전 고대에 대한 관심의 회귀과 함께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나타난 건축, 조각, 회화, 공예의 각 장르에 걸쳐 서구 전체를 풍미한 예술 양식이다. 신고전주의는 고대(그리스, 로마)의 부활을 목표로 고대적인 모티브를 많이 사용하고 고고학적 정확성을 중시하며 합리주의적 미학에 바탕을 둔다. 신고전주의 예술은 형식의 정연한 통일과 조화, 표현의 명확성, 형식과 내용의 균형을 중요하게 여기며, 순수한 의미에서 질서, 균형, 절제, 논리, 정확성으로 되돌아가려는 사조이다. 고대에 대한 관심은 18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폼페이와 헤라클레네움, 파에스툼 등의 고대 건축의 발굴과 동방 여행에 의한 그리스 문화의 재발견 등이 계기가 되었으며, 프랑스 혁명 전후 고대에 대한 동경이 사회 전반을 풍미하였다. 신고전주의 작가들로는 산문 작가로 《걸리버 여행기》를 쓴 조나단 스위프트와 언론인이었던 조셉 애디슨과 리처드 스틸 등이 있다.반면 낭만주의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유럽과 그 문화권인 남북 아메리카에 전파된 예술사조 및 예술 운동이다. 독일과 영국에서 시작되어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확산된 이 운동은 어떠한 신념을 가진 단체가 주도한 것도 아니었으며 자신을 낭만주의자라고 규정한 작가도 없었다. 18세기에 주요 유럽 국가들은 17세기 프랑스에서 확립된 고전주의를 계승했으며 이성을 유일한 수단으로 삼은 계몽주의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18세기 중엽이 되면서 절대왕정의 이완 및 부르주아의 발흥과 함께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욕구가 분출됨과 동시에 계몽주의 그 자체에서도 이성에 의한 드러난 비합리성에 의해 당시까지 경시되었던 감각현상들에서 인간성의 진실을 찾으려고 하였고 이는 과거로 눈을 돌리고, 새로운 문화의 원천을 찾으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또한 이 무렵에 일어난 1789년의 프랑스혁명은 사람들의 마음에 환멸감을 일으켰는데, 계몽주의의 최고의 성과가 이성에 의한 비합리적인 정치체제의 타파였으나 혁명을 통하여 드러난 인간의 취약한 면을 보고는 절망하며 불신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세계와 예술에 대하여 고전주의의 원리들에 대립되는 이 시대의 특징적인 생각과 태도가 후일 낭만주의로 불리게 된 것이다. 문학에서의 낭만주의는 18세기 신고전주의의 엄격한 규칙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데서 출발한다. 낭만주의자들은 집단이 아니라 개인이 모든 경험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했으며, 전형적인 것보다 특수한 것, 일반적인 것보다 독창적인 것을 중시했고 삶과 존재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것을 지향했기 때문에 이성보다 감정을, 합리적 분석이나 전범의 모방보다는 영감과 상상력에 의존하려고 하였다. 또한 창조적 상상력에 의한 진리가 논리나 과학적 탐구에 의한 것보다 더 고귀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먼 과거나 미래의 이국적이고 환상적인 세계를 선호하기도 하였다. 낭만주의자들에게 자연의 세계와 아동기의 상태는 ‘영원한 진리’에 대한 계시의 중요한 원천이라 여겨 파괴되거나 때 묻지 않은 상태의 자연과 이에 가장 가까운 인간의 삶을 이상화 하였다. 정치적 성향을 보일 때는 반체제적이었고, 종교적으로는 대개 무신론자이거나 이단이었다. 낭만주의는 그리스, 로마의 전통과 기독교 사상의 속박에서 벗어나, 민간, 대중 속에 묻혀 있는 민요, 옛 이야기를 발굴하며 민족정신을 진작시키는 이념을 가졌다. 대표적 작가와 작품으로는 프랑스 작가 루소의 《에밀》, 《참회록》과 독일의 헤르더의 영향을 받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스콧의 《호상의 미인》 《아이반호》,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 《올리버 트위스트》가 있다.
    인문/어학| 2020.09.03| 2페이지| 1,000원| 조회(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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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로크 요약 (문학이야기)
    -바로크-‘바로크’라는 단어의 어원은 두 가지의 설이 존재하는데, 첫번째는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인 포르투갈어 ‘pérola barroca’이며 두번째는 스페인어로 ‘부정형’을 의미하는 보석 용어 ‘barroco’이다. 두 가지 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바는 기묘하고 비뚤어진 듯 한 불균형적인 형태를 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단어가 등장한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가르시아 다 오르타의 1563년 출판한 책이며 1711년 생시몽 공작의 회고록에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단어의 뜻은 일그러졌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진주는 아름다운 보석이나 일그러진 진주는 자세히 보았을 때 별 것 없다는 의미로, 르네상스를 진주에, 바로크는 일그러진 진주에 비유하여 이 시대의 예술을 비하하는 호칭이며, 이는 16세기 유럽을 지배한 고전주의 르네상스의 뒤를 이어 나타난 양식에 대한 모멸적인 표현으로 쓰이기 시작되었다. 18세기 중엽에는 이 단어에 `불규칙, 이상한, 불균형` 등의 비유적인 의미가 가해졌으며, 19세기 미술 비평가들이 장식적이고, 극적이고, 표현적인 17세기 회화와 건축 경향을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바로크라는 용어는 비로소 긍정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바로크 시대는 1600년경에 시작되어 1750년 요한 세바스티얀 바흐의 죽음에 이르는 150년간을 지칭한다. 이 시기는 르네상스의 찬란했던 문화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문명으로 들어서는 전환기이자 격동기로써, 바로크는 이 시대의 정신적, 사회적, 정치적 혼란을 대변해 주는 일종의 시대적 감성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 개혁 이후 이처럼 잔인했던 종교, 시민 전쟁은 바로크 감성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종교 전쟁은 죽음과 폭력을 지향하고, 병적이고 고뇌에 찬 듯한 바로크의 정신이 생겨나게 된 계기이다. 또한 같은 시기 전 유럽에 닥쳤던 기아와 전염병도 유럽의 인구를 현저하게 감소시켰을 뿐 아니라 죽음과 맞닥뜨린 비극적 현실 또한 바로크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종교개혁을 통해 종교만이 아니라 중앙집권적 군주제도 역시 그 권위를 상실하게 되면서, 정치적 권력 또한 분산되기에 이르렀고, 이 또한 바로크 예술이 다양성을 좋아하고, 여러 요소들이 흩어지는 효과를 추구하는 것은 시대적 배경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반종교개혁의 위세가 강해지면서 가톨릭교회의 위대함과 웅장함을 찬미하고 고양시키는 방법으로 가톨릭 교리의 우세를 만천하에 알리는 데 열을 올렸고, 자연스레 예술가들의 역할은 커지기 마련이었다. 로마 교황청은 가톨릭 교리의 우월함을 알릴 수 있는 예술 행위를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권장하기에 이르러 예술은 종교적인 선동의 도구가 되어 로마 가톨릭교회를 위해 싸우는 임무를 띠게 된 것이다. 16세기의 로마 교회의 내부는 대리석과 금으로 치장되었고, 여러 가지 색으로 채색된 그림과 조각상이 즐비한 예술품이 늘어났다. 또한 절대 군주의 등장과 민족 국가들의 통일은 민족 양식의 창출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그 이유는 수공업과 상업에 바탕을 둔 부르주아 계급의 성장으로 귀족과 맞먹을 정도의 부를 가진 이들이 화려하고 장식적인 바로크 예술 형태를 지지했으며, 이들의 경제적 부는 독립 도시들의 기초를 이루었으며, 상업적인 극장과 그에 맞는 음악 양식이 만들어지는 데 큰 역할을 하였는데 베니스, 함부르크와 같은 도시들은 상인들의 부가 집중된 곳으로서 이 시기 음악 극장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이었다.바로크 시대의 음악, 미술, 건축은 예술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각 시대를 표현하고 대변하기 위해 같은 구성과 형식 그리고 표현방법 속에서 변화되고 발전되어 왔다. 바로크 음악은 질서와 합리성을 강조하며 절대주의적인 왕권 아래서 성장하였고, 궁정 음악의 성격이 짙은 음악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또한 시민계급의 성장으로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음악도 중시되었으며, 교회음악과 세속음악이 동등한 위치를 차치하게 되며 근대음악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바로크 시대가 시작되면서 오페라가 나타났고, 다성음악이 발달하였으며 기악의 발전과 웅장하고 화려한 음악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음악가로는 바흐, 헨델, 비발디 등이 있다. 바로크의 미술의 대표적인 특징으로는 역동적인 형태를 포착하는 것과 빛과 어둠의 대비를 극대화시키는 데에 중점을 준다는 것이다. 바로크 미술의 특징은 부분들의 조화를 통한 균형을 강조하였다. 또한 르네상스와 바로크 미술 사이의 과도기였던 마니에리스모 미술 양식에서도 볼 수 있었던 자연의 관찰을 통한 세밀한 묘사는 이 시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대표적인 작가들로는 카라밧지오, 루벤스, 램브란트, 벨라스케스, 푸생, 반다이크 등이 있으며 조각가로는 이탈리아의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있다. 더불어 바로크의 건축의 특징으로는, 르네상스의 고전주의, 합리주의적 경향에 반대하여 17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발생하였다. 르네상스는 대상에 법칙을 추구하였으나, 바로크는 대상을 관찰하는 사람의 주관에 대한 관심을 추구하려 하였고 르네상스 양식이 자연주의적이고 고전주의적이라면, 바로크 양식은 격정적이고 화려하다. 바로크 건축 양식은 역동성과 거대한 규모의 기념성을 지니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가톨릭교회의 영광과 전제주의 왕정의 강력하고 절대적인 힘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바로크 건축 양식은 미술과 마찬가지로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극대화하면서 형태와 색을 도드라지게 하여 극적인 강렬함을 불러일으키는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음영의 대비, 투시 화법의 3차원적 효과, 척도의 변조, 화려한 장식 등의 수법을 이용하여 호화, 조각, 공예 등을 장식적으로 건축에 적용하여 화려하고 웅장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인문/어학| 2020.09.03| 2페이지| 1,000원| 조회(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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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문학이야기)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종교개혁은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당시 가톨릭의 부패와 심각한 타락상을 비판하는 내용의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시작된 기독교 내부의 대규모 개혁 운동을 일컫는 말이다. 종교 개혁의 배경이 된 교황들은 자신들이 천국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대리자라고 사람들을 현혹시켰다. 사제들 또한 방탕을 즐기며 가톨릭의 부패를 가져왔고 유럽 전역에 흑사병이 퍼지면서 죽음의 공포가 유럽을 뒤덮게 됨에 따라 시신 수습에 투입된 사제들마저 죽자 인력을 급하게 보충해야 했고, 돈을 주고 신부가 된 사람도 늘어났다. 이렇게 자격 미달인 사람들이 사제가 되니 가톨릭의 권위는 더 떨어지게 되었고,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을 지어야 했기 때문에 돈이 필요했던 교황청은 당시 죽음과 지옥을 두려워 했던 중세 사람들에게 죽은 사람들도 사해 줄 수 있다며 현혹하여 모든 죄를 사하여 주는 면죄부를 파는 데에 열을 올리게 된다. 이렇게 구원을 왜곡하여 갈취한 돈으로 교황과 사제들은 더욱 부유해졌고 성도들은 참된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성경에는 면죄부에 관한 이야기가 없었고 이는 전혀 성경적인 것이 아니었기에 돈과 권력을 탐한 교회는 무너지게 되었다. 종교개혁에 따라 발생한 것이 슈말칼덴 전쟁으로,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영국, 프랑스와 같이 중앙집권화된 세습 군주국이 아닌 7명으로 구성된 선제후들의 결정을 따라 황제가 선출되는 선출 군주국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은 종교 제후의 권한이 강력한 곳이었고, 성직 매매는 일상적으로 이루어질 정도로 부패가 만연하였다. 마르틴 루터는 이러한 교황청과 사제들의 탐욕에 분노하여 1517년 10월 교회의 잘못된 관행을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작성하였다. 루터의 분노는 95개 논제 중 50조 “만일 교황이 면죄부 판매 설교자들의 진상을 안다면 자기 양의 가족과 살과 뼈로써 성 베드로 교회당이 세워지는 것보다 차라리 이것을 불태워 재로 만드는 것을 좋아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을 가르쳐야 한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반박문은 곧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제국 곳곳에 퍼져나갔다. 교황의 권위도 맹렬히 비난하였기에 더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레오 10세는 루터를 파문하겠다고 위협하며 주장 철회를 요구하였으나 1521년 보름스 제국 회의에서 루터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 앞에서 교황과 공의회의 권위를 인정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고, 카를 5세는 루터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는 보름스 칙령에 서명하였다. 이때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루터를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겨 주었고 이후 1522년 기사전쟁, 1524년 농민반란을 거쳐 1529년 슈파이어에서 다시 한 번 제국 회의가 열렸는데, 이 회의에서 루터파 제후가 통치하는 지역에서 카톨릭 소수파는 종교의 자유가 부여되었지만, 카톨릭이 우세한 지역에서 루터파의 종교적 자유는 제한되는 결정이 내려졌다. 아울러, 루터파 진영은 1531년 슈말칼덴 동맹이라는 군사동맹체를 결성하여 카톨릭에 대항하였는데 슈말칼덴 전쟁에서 카를 5세는 작센 선제후의 사촌 모리츠에게 접근하여 작센 선제후 자리를 미끼로 사촌을 배반하게 만들었고 1547년 뮐베르크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며 제1차 슈말칼덴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이로써 카를 5세는 곧장 아우크스부르크 제국 회의를 소집하였고 모든 제후들에게 카톨릭 개종과 그가 작성한 루터파 이단 판정문에 서명을 요구하였다. 제후들은 카를 5세 힘에 눌려 모두 서명하였지만 마그데부르크가 서명을 거부하였고 모리츠가 사태 수습을 위해 마그데부르크에 파견되었으나 모리츠의 배신으로 제2차 슈말칼덴 전쟁이 발발하였고, 1552년 파사우에서 페르디난트와 협정을 맺고 제2차 슈말칼덴 전쟁은 종료되었다. 3년 뒤인 1555년 파사우 협정을 발전시킨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회의가 개최되어 루터파 개신교의 종교자유가 허락되게 되었다. 그가 1522년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어지낼 때 독일어로 번역한 신약성경과 12년 후 번역한 구약성경은 독일인의 민족의식을 최초로 형성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 종교개혁의 두 번째 불씨를 지핀 장 칼뱅의 교리는 영국에도 퍼져 1534년에는 영국의 헨리 8세가 스페인 공주 캐서린과의 혼인 무효를 인정해주지 않는 교황청에 반발하여 칼뱅파의 교리를 일부 빌려 영국 교회를 로마 치하에서 성공회로 독립시켜 영국 국교회로 국가교회화하는 1534년 수장령을 선포하였다.이에 따라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응하기 위하여 개혁 반대파인 교황청을 중심으로 하는 가톨릭 교회에서 벌였던 반종교개혁이 발생하게 되었다. 대응 종교 개혁은 교리 수호에 무뎌져 있던 로마 가톨릭교회가 개신교의 저항과 함께, 자신들의 문제점을 발견해 수선하고, 중앙 집권화가 한층 강화됐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의 결과는 처음에는 전반적으로 나쁜 영향을 미쳤으나 종국에는 유익한 편이었다. 30년 전쟁으로, 개신교도나 카톨릭교도 가운데 어느 한쪽이 완벽하게 승리하기 어렵다는 교훈을 주었고 이는 교리의 통일을 이루는 중세의 소원은 이루어질 수 없고, 인간이 스스로 교리를 생각하는 자유를 가지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시대에 이러한 신학 싸움을 원하지 않는 학자들은 세속 학문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는데, 이는 철학적, 과학적 진보를 가져온 시대이기도 하다.
    독후감/창작| 2020.09.03| 2페이지| 1,500원| 조회(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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