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학기/생산운영관리담당교수명: 이범희 교수님 / 제출일: 2012년 10월 13일Mass Customization 생산방법에 대한 사례와 미래의 생산 방법의 발전 방향에 대한 연구디지털미디어학과 60111489 조아영Ⅰ. 서론1.Mass Customization이란?소비자의 입장에서 우리는 저렴한 가격에 스스로의 취향에 맞는 니즈를 충족시키길 원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 기업들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고객의 니즈를 충족시킬 수 있는 상품·서비스를 생산해내려 한다. 그것이 결국은 기업의 궁극적 목표인 이윤창출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산업혁명 이전, 모든 제조업은 수공업이었다. 산업혁명 이후에 대량생산 시스템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맞춤 생산은 대량생산으로 전환되었다. 대량 생산 시스템은 낮은 가격과 빠른 납기를 무기로 소비자에게 침투하였으며, 분화되어있고 이질적이었던 시장에 대기업이 등장하며 표준화를 무기로 하나의 산업으로 통합하기 시작했다. 대량생산이 일반화되며 소비자들은 많은 혜택을 누리게 되었지만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맞춤화된’ 상품을 포기해야하는 희생도 따랐다. 즉, 저가의 상품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맞춤화를 포기하여야 하고, 차별화 된 상품을 원하면 소비자는 더 높은 비용을 지불해야 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 따라 당연히 기업은 고객 맞춤화와 저렴한 생산비용을 모두 만족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시작했고 그에 나타난 것이 ‘Mass Customization’이라는 개념이다.‘Mass customization’은 대량 생산(Mass Production)과 고객화(Customization)라는 두 이질적인 단어의 합성어로, 대량생산의 장점인 낮은 가격대 창출과 주문생산의 장점인 고객지향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Mass Customization은(이하 MC) 개별 고객의 다양한 요구와 기대를 충족시키면서도 값싸게 대량생산할 수 있는 경영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MC방식이 탄생하기 전 사람들은 고객맞춤화와 생산 효율성이 양팔 저울에 놓인 관계라고 담 중의 하나인 재고문제와 이에 따른 보관문제에서까지 벗어나게 하는 중요한 생산방식 중 하나가 되었다.2.Mass Customization 사례 선정과 그 이유MC는 이제까지 수많은 기업에서 시행해왔으며 그에 따라 많은 성공, 실패 사례들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성공 사례는 델컴퓨터(Dell Computer Corporation)와 BMW, 미국의 대표적인 출판사인 맥그로힐(McGraw-Hill Inc.) 등이 있는데, 필자가 이번에 다룰 MC의 사례는 ‘아모레퍼시픽’과 ‘아디다스 코리아’ 그리고 ‘에넥스’다. 이 세 기업을 선정한 이유는 MC에 성공한(혹은 현재는 중단했지만 결과적으로 어느 정도 성과를 보였던) 국내 기업 사례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현재 MC에 성공한 가장 대표적인 사례들은 거의 외국사례가 대다수이다. 그 때문에 필자는 잘 알려진 외국 MC사례보다 성과는 조금 덜하더라도 국내의 MC사례들에 대해 알아보았다.Ⅱ.본론1.국내 최초의 화장품 대량 맞춤화, 아모레퍼시픽(AMOREPACIFIC)아모레퍼시픽은 1945년 설립된 ㈜태평양의 화장품·생활용품·식품 사업부문이 분할되어 나온 화장품 제조업체이다. 2011년 매출은 25000억 원에 달하고 국내외의 직원 수는 거의 구천 여명에 가깝다. 우리가 흔히 아는 화장품 브랜드인 설화수, 헤라, 아이오페, 라네즈, 에뛰드, 이니스프리 등이 모두 아모레퍼시픽에 속하며, 국내시장 점유율 38%로, 명실상부한 국내 화장품 업계 1위 업체이다. 이러한 아모레퍼시픽에서 2004년 5월, 맞춤 화장품 ‘아모레퍼시픽 커스텀 블렌드 메이크업(AMORE Pacific Custom Blend Makeup)’을 태평양 플래그쉽 스토어인 ‘디 아모레 갤러리(the amore gallery)’ 2층에 있는 ‘아모레퍼시픽 메이크업 랩(AMOREPACIFIC make up laboratory)에서 출시하였다. 아모레퍼시픽은 기초 화장품에서 색조 화장품에 이르는 제품을 유명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1대1 카운슬링을 통해 개별 고객춤화에 적합한 제품으로 주목 받았다. 아모레퍼시픽은 당시 ‘맞춤 화장품’을 통해 까다로운 고객의 니즈를 만족시켜 화장품 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경쟁사들 사이에서 브랜드 입지를 확고히 하고자 했다.국내에서는 최초였지만, 맞춤 화장품은 이미 해외에서는 몇 번 시도되었던 개념으로, 일본의 슈에무라가 도쿄의 비너스 포트에 슈에무라 팩토리 매장을 2000년 초반 신설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미국의 에스티 로더도 PX라는 브랜드로 피부에 맞는 파운데이션과 고객에게 어울리는 색조 화장품을 직접 제조해 제공하며, 그 밖에 몇몇 업체가 맞춤 화장품을 제공하고 있다. 아모레퍼시픽의 경우 반제품에서 맞춤 제작하는 협력형(collaborative) 맞춤화를 시도하였는데, 즉 기초 제품의 경우에는 소비자의 피부 상태를 면밀히 조사해 가장 어울리는 기초 화장품을 추천하는 형태였고, 색조 제품의 경우 수십 가지 색상을 나열해 소비자가 원하는 비율로 섞어 제공했다. 다섯 명의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맞춤 카운슬링을 제공함으로써 고객은 맞춤화 서비스를 받게 되지만, 그 재료는 대량생산 되었으므로 대량생산의 강점인 원가와 생산속도를 가질 수 있는 MC가 이루어졌던 것이다.안타깝게도 아모레퍼시픽의 맞춤 화장품 프로젝트인 ‘아모레 커스텀 블렌드 메이크업’은 2007년 약 2000여명의 회원을 보유한 채 서비스 중지된다. 회원의 대다수는 패션리더들과 연예인들이었으며, 애초에 수익성이 목적이라기보다는 아모레가 가진 맞춤화 기술력과 고객 만족 서비스 제공 능력을 알리려 시작한 것이었으므로 그 후 높은 유지비용을 감수하면서 까지 계속 지속해야 할 이유가 아모레에게는 없었다. 비록 수익성은 없었지만 본디 이유였던 고객에게의 독특한 경험 제공과 홍보는 효과적이었다.(이것이 필자가 맞춤 화장품 서비스가 현재 중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사례’에 분류한 이유이다.) 즉, 충성도가 높고 화장품에 관심이 높은 고객을 회원으로 유치하는 효과를 보았고, 맞춤 생산이 가능한 아모레퍼시픽의 기술력 또한 증명할용품 및 의류 제조업체이다. 누구든 친근하게 들어보았을 이 브랜드는 미국의 스포츠웨어 제조업체인 나이키를 뒤를 잇는 세계 2위의 업체이며, 1948년 설립되었다. 아디다스의 한국지점인 아디다스 코리아는 1982년 설립되었으며 2010년 184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대량 맞춤화를 통한 가치창출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스포츠화 기업들은 앞 다투어 대량 맞춤화 전략을 도입하였는데 아디다스는 2002년, 대량맞춤 브랜드인 miAdidas를 런칭하였고, 2004년 8월에 아디다스 코리아에도 그 발을 디뎠다. 그 경쟁업체인 나이키의 경우, 온라인 웹사이트를 통해 기존 신발에 소비자가 직접 색을 입히고 개인 문구를 넣을 수 있게 하였다. 또한 개인화된 신발을 3D화면으로 실시간 확인할 수 있게 하여 소비자에게 자신이 주문한 운동화가 어떻게 생길 것인지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주문은 온라인으로만 가능하며 4주간 생산기간 및 배달기간을 가진다. 이렇듯 나이키의 대량 맞춤화 전략이 디자인 위주라면 뉴발란스는 착화감에 중심을 두었다. 온라인 사전 예약을 통해 소비자들이 선택한 오프라인 매장으로 소비자들을 불러들이고, 그들의 발 사이즈와 골격, 운동할 때의 발목 움직임 등을 첨단 기계로 측정한다. 그리고 맞춤 시스템이 권장하는, 사전 준비된 신발들 중 소비자가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선택하고 구매하게 하는 형식이다. 오프라인 매장에서 바로 구입이 가능케 하여 나이키와는 다르게 빠른 속도도 갖추었다.마이아디다스의 경우, 디자인, 착화감, 성능의 옵션을 모두 채택하여 앞선 두 브랜드와 차별의 두었다. 먼저 소비자는 온라인 사전 예약을 통해 선택된 오프라인 매장에서 정밀한 발 볼 넓이와 길이를 측정하게 되고, 풋 스캔(Foot scan)을 통해 과학적으로 운동 할 때 소비자의 발에 가해지는 압력과 분포도를 분석하여 최대 성능을 발휘할 수 있는 적합한 신발 모델을 가늠하게 된다. 이 단계에서 깔창, 바닥 등의 착화감과 성능에 관련 된 내부 제품을 소비자와 도우미가 의논해 선택한다. 그리고 맞춤 운동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적다. 그러나 이 맞춤 제품에 관심이 높은 고객들은 대다수 그 분야의 지식이 매우 많은 소비자들이고, 그들은 대부분 그 분야의 오피니언 리더로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한다. 이러한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자체가 매출 이상의 높은 가치가 있다. 앞서 이야기한 아모레퍼시픽의 경우처럼, 마이아디다스 또한 수익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기술력 과시와 마케팅 수단에 좀 더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언젠가 맞춤화 시장이 대중화 될지도 모를 미래를 위한 시장 선점의 기능도 있다. 이러한 순수 이익 창출이 아닌 좀 더 넓은 의미의 이익 창출 측면에서 보았을 때, (물론 여러 가지 문제점과 의문점이 제기되고 있기는 하지만) 마이아디다스는 나름대로 성공적인 MC를 적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3.주부들을 위한 맞춤화, 에넥스(ENEX)에넥스(전 서일공업사)는 1971년 4월에 설립된 목재가구 제조업체로, 주로 부엌 가구와 붙박이장, 인테리어 등의 사업을 한다. 내로라하는 디자인상들을 수상하고 10년 연속 가구업계 최초 품질경쟁력 우수기업에 선정되기도 한 훌륭한 국내 기업 중 하나이다.에넥스의 여러 사업 분야 중 MC가 도입된 분야는 ‘부엌 가구’인데, 최근 컬러 입체형 부엌설계 프로그램에 시뮬레이션 기능을 추가한 그래픽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수납공간, 부엌형태, 색상, 예상 가격대 등에 맞춰 제품을 설계하고, 미리 입력된 243개의 모델을 소개한다. 또한 프로그램은 화면 속에서 수납 문을 열고 닫거나 내부 기능을 작동하는 등 가상현실 체험을 제공하며, 원하는 설계를 입력하면 1분 30초 만에 도면이 출력되기도 한다. 즉 주방을 직접 이용하는 주부들의 관점에서 디자인 되며, 주부들 개개인의 편의와 개성, 취향, 작업 동선 등을 고려해 주부들이 원하는 부엌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다.주부들은 프로그램으로 직접 주방을 설계하여보는 것뿐만 아니라 에넥스의 상담 팀에 문의를 하여 그 크기나 예산, 개조 방법, 개조 기간 등에 대한 궁
2011년 2학기/예술과 사회담당교수명: 김소영 교수님/제출일: 2011년 11월 16일Noviembre, 예술과 돈의 사이에서전공자유학부 60111489 조아영예술과 돈은 어떤 관계일까. 나는 평소 예술의 상업성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왜냐하면, 과거에도 현재에도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돈이 필요하고, 돈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돈을 위해 예술을 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예술은 돈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실만으로도 예술은 충분히 근본적으로 상업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본주의인 현대사회에서 예술의 상업성은 당연시 되어왔다. 우리는 작품의 가치를 가격으로 매기고,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큰 공연장을 세우고, 홍보를 하고,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관련된 상품도 판다. 우리는 어느 전시회를 가나 그 전시회와 관련된 상품들을 파는 샵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예술의 상업화가 너무나 당연시되고 어떻게 보면 예술의 ‘순수성’을 잃은 요즘, 이 영화 한 편은 나에게 물음을 던졌다. 과연 예술의 상업화는 어쩔 수 없는 일인가? 예술은 돈과 관련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인가?내가 영화를 보며 가장 기억에 남았던 부분은 다른 부분이 아니라 바로 맨 초반, 주인공 알프레드가 자신의 친구에게 자신의 꿈을 밝히는 부분이었다. 그저 그러려니 지나갈 수 있는 부분이었는데 내 기억에 크게 남았다. 그 이유는 알프레드의 순수한 예술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돈을 받지 않는 거리 극단을 만드는 것이 꿈이라던 그. 솔직히 말해보자면, 그 장면을 보며 나는 그를 비웃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해냈고, 그들의 신념을 지켜나갔다. 그들은 때로 갈등했고, 때로는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지만 결국은 꿈을 이뤘다.이 장면 다음으로 기억에 남는 장면은 알프레드가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버는 장면이었다. 그들이 돈을 받고 공연을 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연극도 할 수 있고 불법으로 거리를 점령하여 체포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뿌리치고 그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자신의 예술을 돈과 관련되지 않게, 오로지 예술로서만 존재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슬프기도 했다. 순수한 예술을 위해 그들은 따로 생계를 위한 일을 해야 했다. 그리고 결국 후에는 돈을 받고 연극을 하게 된다. 극단 멤버들 간의 의견 대립으로 결국 연극은 실패하고 원래의 거리 극단으로 돌아가지만, 그것은 그들의 예술에 대한 순수성을 헤치고 갈등을 불러일으킨 원인이 되었다.
2011년 2학기/세계화와 사회변화담당교수명: 정도생 교수님/제출일: 2011년 11월 29일미국의 E/E전략이란?전공자유학부 60111489 조아영미국은 냉전이후 여러 가지 대외정책의 변화를 겪게 된다. 그 중 하나가 win-win 정책과, 개입과 확대(engagement of enlargement), 즉 E/E전략이다.1994년 7월. 미국의 백악관은 ‘국가안보 전략(A National Security of Engagement and Enlargement)을 발표했다. 이것은 그 이전 오랜 세월동안 국제 정치에 영향을 미쳐온 ‘냉전’이라는 하나의 구조가 마침내 붕괴되고 새로운 국제 질서가 필요한 그 당시 미국의 정책 변화를 제시하는 문서이다. 오랜 시간 지속되어온 냉전이 끝나고 이른바 ‘탈냉전’이라는 새로운 국제 질서가 세워지면서, 미국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방지할 필요가 없어졌고, 또한 소련을 견제 할 필요도 없어졌다. 즉, 미국이 가지고 있던 냉전 때의 막대한 군사력은 그 필요성이 사라진 것이다. 이 문건에서는 그러한 군사적 필요성이 사라진 당시 미국의 국가안보가 어떻게 규정 될 것인지, 어떤 방향으로 변화되어 질 것인지를 말한다. 이 E/E전략의 목표로는, 먼저 군사력으로 미국 안보보호, 미국의 경제 활성화, 해외에서의 민주주의 촉진이 있으며, 그에 따른 세부 전략으로는 WIN-WIN전략과 자유무역지대 확산, 일본과 무역관계 개선, 미국의 지속가능한 발전 등이 있다.냉전 구조가 붕괴된 당시, 미국은 더 이상 냉전 시대의 대외정책들, 즉 막대한 군사적 개입을 요하는 ‘봉쇄정책’이나 해외에서 철수하는 ‘고립주의’에 따를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미국이 선택한 길이 바로 ‘개입 전략(engagement)’이다. 즉 미국이 냉전에서 승리를 선언한 후 완전히 철수하지 않고, 일정규모를 유지하며 여러 지역 안보 문제에 직간접적, 지속적으로 관여하는 전략이다. 이로써 미국은 적은 비용으로, 탈냉전 시대에도 여전히 미국이 국제 정치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과거 보호주의 보다는, 해외 시장의 적극적 개방과 참여를 통해 경제적 번영을 추구하도록 한다.제목에서 보듯, 개입 전략 이외에 ‘확대 전략(enlargement)'도 있다. 확대 전략은, 민주주의를 전 세계적으로 확대시킨다는 의미이다. 냉전 당시, 소련과의 대결 때문에 제 3세계의 독재 정권을 지원했던 정책이 이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미국은 민주주의 확산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것이다. 이로서 미국은 비동맹국가 및 구적성국가들(러시아, 중국, 베트남 등)을 국제사회로 순치시키고 미국의 국익과 상충하지 않은 체제로 변화시키며 미국의 삶의 방식, 즉 민주주의를 말 그대로 ’확대‘시켰다.이 전략은 군사적 안보 외에 경제적 번영, 민주주의의 확산이라는 목표를 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건의 제목은 ‘미국의 국가안보전략’인데, 아마 그 이유는 미국의 안보가 오로지 군사력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며, 무역에 의한 경제적 번영이나 민주주의의 확산이 미국의 안보 증진에 큰 영향을 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즉 국가안보와 경제적 번영, 민주주의 확산은 같은 것은 아니지만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이 문건의 궁극적 목표인 국가안보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2011년 2학기글쓰기서평‘배움의 터전’이 향하는 곳-『문화의 발견』,「학교, 배움의 인연으로 자아를 빚는 그릇」,「캠퍼스, 낭만과 불안 사이」를 읽고-전공자유학부 1학년 60111489조 아 영담당교수명 : 최규수 교수님제출일 : 2011년10월 17일목 차Ⅰ. 서론Ⅱ. 구성적 측면에 대한 분석1. 도입부의 인용2. 주석의 위치Ⅲ. 내용적 측면에 대한 분석1. 두 글에서 이야기하는 ‘거대화’의 의미2. 학교와 캠퍼스의 이미지 비교3. 아쉬운 점Ⅳ. 이상적인 배움의 터전, 그리고 현실; 대안학교를 중심으로Ⅴ. 결론참고문헌Ⅰ. 서론평범한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우리는 누구나 학교에 간다. 그리고 의무교육인 중학교까지, 최소 9년에서 최대 12년을 학교에서 보내며, 그 12년만으로도 모자라 대학, 그리고 대학원까지 가는 사람들도 많다. (엄밀히 말했을 때 대학교와 대학원도 학교지만, 이 글에서의 모든 ‘학교’는 문맥상 초·중·고등학교만을 의미함을 밝힌다.) 결국,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청춘’의 대부분을 우리는 학교, 그리고 대학에서 보내게 된다. 그리고 청춘은 우리가 가장 많이 변화하고, 외부의 영향을 많이 받는 시기이다. 즉, 학교와 대학은 우리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와 대학을 ‘학문을 가르치는 장소’ 뿐만이 아닌 여러 의미로 ‘배움의 터전’에 비유하기도 한다.그러나 그렇게나 중요한 학교가 정말로 제 기능을 다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스럽다. 필자 또한 평범한 과정을 밟아 대학에 진학했기 때문에 그런 점에 대해 더 잘 알고 있고, 대다수의 사람들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단지, 우리는 외면하고 포기 한 것 뿐 이다. 무언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매일 계속되는 ‘학교’와의 나날에 지쳐서. 결국엔 잊어버린 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주변의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그런 의미에서 「학교, 배움의 인연으로 자아를 빚는 그릇」(이하 「학교」)과 「캠퍼스, 낭만과 불안 사이」(이하 「캠퍼스」을 펼쳤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부분은 바로 제목과 그 아래의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 나오는 짧은 인용문이었다. 글의 분위기와 전반적인 방향을 잡아주는 역할로, 「학교」의 시작에는 영화 ‘모나리자 스마일’의 개학식 장면에 나오는 대사를 인용했다. 멋들어지고, 왠지 모를 엄숙함까지 느껴지는 이 짧은 대사는 글의 도입부부터 사람들의 흥미를 잡아끈다. 제목만 보고 그저 학교에 관련된 글이겠거니 생각하는 독자들에게, 글쓴이는 우리나라와 차이를 보이는 영화 속의 개학식 풍경으로 약간의 신선함을 맛보여줌과 동시에 물음을 던진다. 이렇게 멋진 개학식도 있는데, 우리나라의 학교 행사는 어떤가? 왜 그럴까? 뭐가 문제일까? 그리고 글쓴이는 자연스럽게 독자를 글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캠퍼스」의 앞에도 노래가사가 인용되었다. 하지만 독자들은 약간의 이질감을 느낀다. 글의 제목은 「캠퍼스, 낭만과 불안 사이」. 그런데 노래 가사에는 낭만도, 불안도 없다. 세월이 가고, 젊음도 간다는 이야기. 내용이나 말투로 봐서는 이건 낭만이나 불안과는 조금 거리가 먼, 체념에 가까운 느낌이다. 제목과는 전혀 다른 가사에 독자들은 의아할 수밖에 없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런 제목에, 이런 어울리지 않는 가사를 붙였나 호기심도 조금 일기 시작한다. 독자들은 글을 읽게 되고, 곧 그 가사가 현대의 캠퍼스가 아닌, 1970년대 유신독재로 꽁꽁 숨어있던 소극적이고 음울한 시절의 캠퍼스에 대한 가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독자들은 글 속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글쓴이가 의도한 진짜 주제인 낭만과 불안 사이, 즉 현대의 캠퍼스에 대한 내용에 도달한다.이처럼 글의 시작 부분에 위치한 세, 네 줄의 짧은 인용문은 독자들의 관심을 끌고, 쉽게 글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런 영화의 대사나 노랫말을 보고, 때로 독자들은 그 영화나 음악을 찾아보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활동들은 결국 그 글에 대한 더 깊은 이해로 이어지게 된다. 짧은 인용문 하나로 일석이조의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주석 내용이 길어지고 그 높낮이가 아주 정확하지는 않다. 그러다보니 그 페이지의 글을 다 읽고 주석을 읽으면 대충 어느 부분에 대한 설명인지 짐작은 할 수 있지만, 종종 정확히 어느 부분을 설명해 주는 것인지 헷갈린다. 개인적으로 옆에 주석을 다는 것은 좋았지만, 주석 번호를 매겨 주었더라면 더 쉽게 글을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Ⅲ. 내용적 측면에 대한 분석1. 두 글에서 이야기하는 ‘거대화’의 의미「학교」와 「캠퍼스」두 글에서 글쓴이가 지적하는 문제는 얼핏 봤을 때 비슷해 보인다. 바로 학교와 캠퍼스의 거대화다. 단, 두 글에서 ‘거대화’의 의미는 조금 다르다. 「학교」에서 글쓴이가 지적하는 것은 장소적 의미의 ‘거대화’가 아니라 학교의 전체적인 규모, 즉 학교 조직의 거대화를 말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큰 규모의 학교 형태는 필연적으로 비대한 조직을 만들어 내고, 비대한 조직은 결국 관료적 통제로 이어진다. 그 사이에서 교사들은 소외되고 아이들은 추상화된 시스템의 업무 처리 대상으로 함몰된다. 글쓴이는 이상적인 학교 규모를 ‘학생들 사이에 다양한 상호작용이 일어날 정도로 크고, 모든 학생과 교사들이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크기라고 제시한다.반면 「캠퍼스」에서 말하는 거대화는 장소적 의미의 거대화에 더 가깝다. 한가롭고 자연친화적이던 예전의 캠퍼스는 사라지고, 높은 콘크리트 건물들이 캠퍼스를 메우고 있다. 대학들의 치열한 경쟁 사이에서 무자비한 난개발이 캠퍼스를 헤집고 있는 것이다. 빠르게 거대해지는 캠퍼스 속에서 재학생들조차 설 자리가 없어졌다. 교수와 학생들의 사이는 점점 멀어지고, 접촉면은 사라지고 있다. 글쓴이는 캠퍼스가 배움과 성장의 생태계를 담보하는 그릇이 되어야 하며, 그를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을 꾀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이처럼 글쓴이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두 장소를, 비슷하면서도 상반되는 문제로 각각 지적한다. 마침 두 글이 함께 실려 있는 단행본, 『문화의 발견』에서 두 글의 야 하는 학교라는 장소가 일반인들에게 그러한 장소로 인식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반면 캠퍼스는 어떤가. 학교와 똑같이 학문을 가르치는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캠퍼스의 이미지는 낭만적이고 로맨틱하게 그려진다. 실상은 무거운 등록금과 공부, 취직에 대한 걱정으로 점철되어져 있다는 걸 알면서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캠퍼스, 하면 밝고 아름다운 모습부터 떠올린다는 것이다. 아마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대학을 고등학교까지의 입시 전쟁이 끝난 후 느끼는 해방감, 자유 등을 만끽하는 곳으로 인식하기 때문일 것이다.글쓴이는 이 부분에서 대다수 사람들에게 익숙한 영화 제목이나 생각들로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또한 사람들의 이런 모순적인 생각을 지적하면서, 학교의 현실과 희망을 보여주고, 캠퍼스의 부정적인 변화에 대한 자신의 안타까움을 독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전한다.3. 아쉬운 점훌륭한 글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아쉬움은 남는다. 「학교」에서는 학교라는 장소의 겉과 속을 잘 지적해 주었다. 비대해진 학교 조직을 비판하며 전체 규모의 축소를 주장했고, 남한산초등학교와 이우학교의 예를 들며 친환경적이고 효율적인 학교 디자인까지 이야기했다. 그러나 애매모호한 결론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이 글의 마지막 문단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학교의 미래에 희망은 있다. 여러 새로운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고로 곧 학교는 새롭게 태어나게 될 것이다’ 이제까지 대체적으로 비판적인 시각으로 학교를 바라보던 글쓴이의 태도가 갑자기 무한히 긍정적으로 변했다. 마치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좋은 쪽으로 변해 갈 것이라고 들리기도 한다. 글쓴이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독자는 당황스러워진다. 차라리 강경하게, 학교는 이렇게 변해가야 하고,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는 식으로 자신의 주장을 한 번 더 강조해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캠퍼스」에서도 비슷한 느낌이 있다. 즉, 글쓴이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이 조금 왔다 갔다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처음 글쓴이는 과거와 현재 캠퍼스의 분위기르치는 학교”를 말한다. 앞에서 잠깐 학교 디자인 문제로 언급했던 이우학교와, 글쓴이의 다른 책에서 ‘실제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진로선택의 긍정적 실례’로 언급된 꿈틀 학교. 이 두 학교가 모두 대안학교다. 이러한 부분에서, 우리는 글쓴이가 대안학교를 비교적 이상적인 학교 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글쓴이가 생각하는 이상적 학교인 대안학교를 둘러보고, 그 속에서 글쓴이가 주장하는 바람직한 학교와 캠퍼스의 실제적인 모습을 찾아보며 현실의 학교와 비교해보려 한다.글쓴이는 「학교」에서 대안학교의 디자인을 언급했었다. 또한 「캠퍼스」에서는 녹지를 없애고 무작정 높은 건물만 세우는 대학의 난개발을 비판하며 친환경적 캠퍼스를 중요시 했다. 그래서 대안학교가 외적으로 일반 학교들과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았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신기한 점을 발견했다. 대안학교 중 하나인, ‘이우학교’ 홈페이지의 학교 소개란에 ‘설계와 건축’란 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학교가 ‘오시는 길’정도만 표시해놓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설계와 디자인을 얼마나 중요시 하는지 알 수 있다.홈페이지에서 제시한 학교 설계의 원칙은 대충 이러하다. 주어진 자연환경을 최대한 보존 할 것, 자연에너지 사용, 비집중적인 건축방식, 친환경적 건축방식, 장애인 통합 교육을 고려한 시설, 생태 학습장으로서의 학교. 6가지의 원칙 중 4가지가 환경에 관한 내용이다. 무자비하게 산을 깎고, 온통 회색 콘크리트로 벽을 쌓은 일반 학교와는 확연히 다르다. 마구잡이식 난개발을 서슴지 않는 요즘의 캠퍼스와도 다른 방향이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도 빼놓지 않고 있다. 보통은 특수학교가 아니고서야 장애인을 위한 설비는 거의 갖추지 않는다. 캠퍼스는 일반 학교보다는 낫지만, 역시 배려가 부족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비집중적 건축이라는 사항도 눈에 띈다. 학교와 본관, 학생회관, 도서관 등의 건물을 용도에 따라 각각 건축하고, 그 건물들마저 2~3층의 저층식 소규모 건물로 짓는다는 사실이 새롭.
2011년 2학기예술과 사회중간고사 대체 과제파블로 피카소, 예술과 사회의 사이전공자유학부 1학년 60111489조 아 영담당교수명 : 김소영 교수님제출일 : 10월 26일목 차Ⅰ. 서론Ⅱ. 파블로 피카소, 그는 누구인가?Ⅲ. 피카소를 통해 보는 예술과 사회의 관계1. 전쟁과 평화 속에 피어난 예술2. 예술과 사회가 서로에게 주는 영향Ⅳ.결론참고문헌Ⅰ. 서론우리는 ‘예술’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무엇을 떠올릴까? 어떤 사람은 웅장한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떠올릴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밤을 새워 읽었던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어떤 사람은 신비한 미소의 모나리자를 떠올릴 지도 모른다. 또는 가족들과 보았던 호두까기 인형 발레공연을, ‘memory’를 인상 깊게 들은 뮤지컬 캣츠를, 눈물 흘리며 보았던 영화 한편을. 이처럼 우리는 ‘예술’이라는 단어에 무수한 것을 떠올린다. 오래전에 비해 중산층이 증가하고 전체적으로 풍요로워진 우리 사회에서, 이제 예술은 특권층이 누리는 사치가 아닌 누구나 즐기고 관심가질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 된 것이다.그런 요즘,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예술가, 작품들이 있다. 음악이라고는 아이돌 노래밖에 모르고, 그림이라면 자기들이 그린 낙서밖에 모르는 초등학교 저학년 꼬맹이들도 알고 있는 사람, 작품 말이다. 예를 들어 모차르트나 바흐, 쇼팽, 레오나르도 다빈치, 고흐, 모나리자, 해바라기 같은. 그리고 그런 이름들 사이에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입체파를 창시한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다. 제헌절이 7월 17일이라는 사실을 모를지언정 피카소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피카소의 작품은 몰라도 피카소가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는 다들 안다. 눈, 코, 입이 삐뚤어지고 기하학적으로 비틀린 이상한 그림.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이상한 그림을 보면 ‘피카소 그림 같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이처럼 피카소는 그 특유의 느낌과 개성이 강렬한 화가이며, 20세기 미술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자타공인 천재이는 그 화려한 여성 편력으로도 유명하다. 공식적으로 여덟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불륜 등 비공식 관계까지 있었다고 한다. 조영남은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열린 피카소 전에 갔다가 수십 점의 여인상 중간에 붙여놓은 피카소의 여인 관계에 대한 커다란 도표를 보고 놀랐다고 한다. 도표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 했을 정도라니 실제로는 어떠했을 지 상상이 안 될 정도다. 여성 편력으로 유명한 만큼, 그는 만나는 여성에 따라 그림이 달라지기도 했을 정도로 여성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여자 문제도 복잡한데, 그가 살아있는 동안의 정세도 그리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세계 1, 2차 대전이 일어나고, 그의 고향인 스페인에서는 내란이 일어났으며, 우리나라에서는 6·25 전쟁이 일어났을 시기. 전 세계가 전쟁으로 들썩였던 시기에 살아서인지 그는 전쟁과 평화에 관심이 많았으며, 열렬한 프랑스 공산당 당원이기도 했다. 그의 이런 사회적·정치적 견해들은 그의 수많은 작품들에 남아있다.아무튼, 이렇게 오랜 세월을 파란만장하게 살아온 피카소의 생애를 A4용지 몇 장에 다 서술하기는 힘든 일이다. 그는 수많은 업적을 남긴 위대한 예술가였고, 확고한 견해를 가진 정치가였고, 수많은 여인을 사랑한 한 남자였다. 그래서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만한 큰 줄기만을 따라서 피카소의 한 조각을 살펴보려 한다.1881년,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해안의 말라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탄생에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다. 그가 태어났을 때, 갓난아기였던 피카소가 울지 않자 그를 받은 산파들은 그가 사산아인 줄 알고 산모에게만 힘을 쏟았다. 그러던 도중 아기가 담배 연기에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고서야 아기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이렇게 보통 사람들과 탄생부터 조금 남달랐던 그는 화가 겸 미술교사였던 아버지 밑에서 어릴 적부터 미술에 뛰어난 재능과 흥미를 보였다. 바르셀로나 미술 학교에서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열아홉 살 되던 해에 절친한 친구 카를로스 카사헤마스와 함께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정도 깊이를 주면서도 여러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시점을 통합한다. 네 명의 여자는 서 있고, 오른쪽 아래의 여자만이 등을 돌린 채 앉아있다. 몸들은 해체되어 날카로운 각도로 잘려나가고, 손발은 거대하고 가슴은 잘려나가거나 없다. 양감 표현을 위한 기법이 없어 평면적이지만 기본 데생이 완벽해서 여체의 형태가 어색하지 않다. 이목구비는 캐리커처처럼 간결한 선으로 그리고, 그 모양도 정면, 측면에 관계없이 제멋대로다. 다섯 여자의 얼굴은 각기 다른 세 가지 방법으로 그려졌는데, 중간의 두 여자는 고대 이베리아 조각의 영향임에 분명하다. 옆모습을 보이는 왼쪽 여자는 코트디부아르 부족 가면의 양식과 비슷하며, 고대 이집트 벽화처럼 얼굴은 측면이지만 눈은 정면을 보고 있다. 오른쪽 두 여자의 얼굴은 괴상하고 흉측하다. 이 두 얼굴은 또 다른 고대 전통인 아프리카 탈 조각의 영향을 받은 듯 보인다. 탈 같은 두 얼굴처럼, 얼굴 형태를 각진 평면으로 만드는 것은 피카소의 형태 재구성에 중요한 부분이며, 모든 형태의 기하학적 축소를 말하던 세잔의 영향이 크다. 인간이 취할 수 없는 뒤틀린 자세로 앉아있는 오른쪽 인물은 뒤돌아 앉아있는데도 얼굴 정면이 보인다. 더 기괴한 점은 왼쪽 눈은 정면을 바라보지만, 오른쪽 눈은 3/4각도로 옆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짐승의 가죽을 평평하게 베어내어 펼쳐놓은 느낌이며, 이는 이미지에 동시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두 개의 다른 시점이 한 이미지로 결합됨을 보여준다.그 당시 미술보다 너무 앞서 나갔던 탓일까, 피카소의 절친한 친구들조차 에 거부감을 보였고, 결국 후대에 그 어느 작품보다 높게 평가받게 되는 은 거의 10년 가까이 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작품은 인정받았고, 이 작품이 그 후 피카소를 대표하는 경향인 입체파의 디딤돌이 되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을 그린 이후, 피카소는 조르주 브라크와 만나 함께 입체파를 형성한다. 초반에 그들의 그림은 ‘모든 것을 형과 입방체로 축소시키고 있다’는 비평을 듣기도 했지 이 분노에 찬 그림은 파시즘, 전체주의, 그리고 일반인을 상대로 한 전략적 군력 사용에 대한 상징적 반항이다. 나치의 폭격이나 내전의 구체적 과정에 대하여 직접적인 모습을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정형적이지 않은 인물과 대상의 표현이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런 분위기는 각 요소들의 조형적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거의 흑백 톤 컬러만을 사용한 점 때문에 더욱 극대화 되어 보인다.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크게 4가지다. 첫 번째는 그림의 중심에 있는 말이다. 이 말은 여러 각도로 분석되었는데, ‘1937년 스페인의 현실’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의견이 가장 보편적이다. 창에 찔린 말이, 파시스트 프랑코 장군이 기득권자 보수 우익 세력을 등에 없고 일으킨 내란에 희생당하는 조국 스페인 그 자체라는 의견이다. 그러나 하늘을 향해 입이 크게 열린 말의 단말마적인 절규는 죽음 직전 패배의 의미가 아닌 항복할 수 없다는 최후의 외침을 의미한다. 즉, 공화파 정부가 최후로 장악하고 있던 마드리드에 프랑코 군대를 통과시키지 않겠다는 결의의 다짐인 것이다.두 번째는 왼쪽의 황소이다. 이 황소는 피카소가 평소 즐겨 그리던 투우의 황소나, 미노타우루스와는 다르다. 성나고 돌격하는, 잔학하고 폭력적인 황소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서의 황소는 조금 멍청한 표정으로 뒤쪽의 아비규환을 외면한 채 앞을 응시하고 있다. 황소의 눈길은 뒤쪽의 상황을 만들어 낸, 게르니카를 폭격하고 하늘 저 너머로 사라져버린 독일군의 비행기 꼬리, 혹은 그 굉음을 바라보는 것 같다. 적은 그림 속에 나타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 적이 전 인류 공통의 적이며, 선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악 자체이므로 그림 속에 몰아넣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각종 정보를 이용해 교묘한 선전·선동의 심리전으로 적의 존재에 대해 진실하고 명확하게 규명할 기회가 사라져가는 비인도적인 현대전의 예언적 성찰일 수도 있다.세 번째는 네 명의 여인들이다. 그녀들의 표정은 각각 슬픔·고통·경악·공포로 가득 차 있다. 만Picasso, , 1945.세 번째 그림은 이다. 제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 후 그려진 이 그림은 나치 독일의 유태인 수용소의 참상을 소재로 하고 있다. 물병이 놓여 있는 탁자 아래 절단되고 묶인 채 부패하는 인간들이 겹쳐져 누워 있는 모습이다. 피카소의 작품 중 가장 절망적인 작품으로도 꼽힌다. 그림뿐만이 아니라 그 색감 또한 절망적인 분위기에 한 역할을 한다. 화면 전체를 희고 검은 톤으로 그려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와 비슷하다. 또한 원자폭탄의 버섯구름을 예고하는 듯 한 형태를 통해 전쟁터의 묵시록적 풍경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의 비극적인 전조들과 명철한 상응을 이루는 작품이기도 하다.마지막 그림은 과 다. 발로리스 성당의 천장화인 두 그림은, 성당에 그려져 있긴 하지만 피카소 자신이 무신론자에 공산주의자였으므로 종교적 의미는 전혀 없다. 즉, 피카소는 ‘성당을 위한 장식’이 아니라 ‘평화의 전당을 위한 장식’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들은 한국전쟁 시기와 유사하게 1950년 시작돼 3년에 걸쳐 완성 되었는데, 당시 피카소가 한국전쟁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전쟁'의 하얀 방패에는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와 당시 피카소의 연인이던 프랑수아 질로의 얼굴이 오버랩 되어 그려져 있고 '평화'에는 한국을 상징하는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다. 박물관의 안내 팸플릿에는 "이 시기의 피카소는 특별히 한국의 평화를 염원했다"고 적혀있기도 하다.Pablo Ruiz Picasso, (아래)과 (위), 1952.의 중심에는 어느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영구차 행렬이 있고, 살육과 파괴를 일삼는 전쟁광들의 실루엣과, 평화를 지키는 전사를 왼쪽에 세웠다. 수레를 탄 전쟁주의자는 뿔이 달린 악마의 가면을 쓰고 피 묻은 칼을 지니고 있으며, 등에 해골들을 지고 독충을 무기로 쓰고 있다. 책이 불타는 모습도 있는데, 그것은 문명의 파괴를 뜻한다. 전사의 방패에 그려진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며, 그의 앞발에 그려진 밀밭은, 인간이 주식으로 하는 식물조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