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이방인들을 찾아서- 조해진의 『로기완을 만났다』을 읽고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힌 현대사회에서, 이제는 더 이상 민족과 국가가 내포했던 ‘소속’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오늘날 사람들은 마음만 먹으면 쉽게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으며, 심지어 스스로의 국적을 바꾸는 일 또한 비일비재하다. 이에 따라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특정한 국가와 문화의 테두리가 차지하는 부분은 극히 적다. 예를 들어 아침 식사로 밥 대신 빵을 먹는 한국인은 그 사람의 개인적인 선호에 따라 행동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한국인이라면 밥을 먹어야지!”란 말은 누구에게나 구시대적으로 들린다. 사회의 이러한 변화에 따라 좁은 국내를 벗어나 국외로 시선을 돌리는 작품들이 최근 다수 등장했다. 해외여행을 하면서 느낀 바를 적어 내려간 가벼운 에세이, 외국의 시골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민담을 소재로 새롭게 해석한 동화 등 독자들이 문학을 통해서 접할 수 있는 또 다른 세상의 이야기들은 무궁무진하다.그 중 주목할 만한 변화는 디아스포라에 대한 담론에 관한 것이다. 디아스포라 서사는 비자발적이고 강제적으로 모국을 떠나야만 하는 존재인 디아스포라의 모습을 그린다. 그들이 고국에 정착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가장 주된 이유는 바로 오늘날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 ‘자본’이다. 현대 사회의 비주류들에게는 돈이 없다는 특징이 공통적으로 뒤따른다. 태어나면서부터 돈이 없었기 때문에, 아니 돈을 벌 기회조차도 다른 사람과 공평하게 부여받지 못한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디아스포라들은 필연적으로 아프다. 대표적인 디아스포라인 탈북자의 삶을 그린 작품들은 자본의 여부가 사람들 사이에서 얼마나 폭력적인 구획으로 작용할 수 있는 지를 보여준다. 탈북자는 가난하고 위험한 국가, 북한에서 태어났다는 낙인 때문에 북한에서 벗어나서도 각종 차별에 시달린다. 그들은 언제나 ‘이방인’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선 안의 사람들이 그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기술의 발전에 따라 국가 간의 물리적인 경계는 모호해졌다지만 오랫동안 지속된 타민족에 대한 배타성은 아직도 강력하게 사람들의 생각 속에 자리 잡고 있다.기본 여행소설에서의 여행자가 얼마간의 휴식을 위해 지금 위치를 벗어나 일정 시간이 되면 다시 기존의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과 달리, 디아스포라 서사에서의 인물들은 어느 한 곳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공간 사이의 공간을 계속 맴돈다. 여기서 디아스포라는 기존 사회와 자의 아닌 불화를 겪고 스스로의 존재감을 현실에서 찾지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공간적인 이동을 꾀한다. 예를 들어 이주 노동자는 정치·경제적으로 낙후된 고국을 개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기 때문에 선진국으로 이동하고 탈북자들은 조국의 폐쇄적인 테두리를 넘어 탈출한다. 최근 한국 문학에서는 다양한 이유로 정착하지 못하는 떠돌이의 삶을 포착해서 그들의 타자성을 독자들에게 각인시키는 서사가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디아스포라에 주목하는가? 이 시대의 작가들은 지식인의 입장에서 그들의 불행한 삶을 조명함으로써 문학의 새로운 담론을 이어나가고 싶은 것일까? 독자들은 우리와는 너무 다른 삶을 살았던 이방인들의 색다른 이야기를 소비하는 것일 뿐일까? 아마도 그것은 아닐 것이다. 이 글에서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조해진의 작품을 통해 디아스포라를 다루는 문학담론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윤리적 주체의 자격을 갖는 것인 지 나름의 확신을 갖고 이야기하고자 한다.조해진의 『로기완을 만났다』(2011) 제 31회 신동엽문학상 수상 작품.는 방송작가인 ‘나’가 우연히 탈북인 ‘L’의 글을 읽고 L의 24일 간의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한국에서 ‘나’는 연인 재이와의 이별, 윤주의 수술 실패, 방송 프로그램 구성작가로서의 회의 등 끊임없이 문제에 시달렸다. 도피하듯이 사표를 내고 한국을 떠났지만 한국이 아닌 다른 어떤 곳에서도 뚜렷한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소설은 ‘처음에 그는, 그저 이니셜 L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첫 머리를 시작하고 있지만 작품의 마지막에서는 ‘살아있고, 살아야 하며, 결국엔 살아남게 될 하나의 고유한 인생, 절대적인 존재, 숨 쉬는 사람’이라고 로기완을 표현한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나'는 처음에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탈북청년 L을 그저 특이한 기사의 주인공으로만 생각하고 도피의 핑계거리로 삼았지만 이후 한국을 떠나 그의 삶을 뒤따라가면서 어느 정도 그의 고통에 공감하게 된다. 또한 어떠한 접점이 없던 그와 유대를 느끼는 것을 넘어서 ‘나’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고 끝내는 스스로의 문제도 해결하는 데 성공한다.한국을 떠나 로기완이 머물렀던 브뤼쎌에 도착한 ‘나’는 이국의 풍경을 감상하며 L이 과거에 이곳에서 느꼈을 모진 풍파들을 멀찍이 떨어져서 상상해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난 삶과 한 데 묶어 계속 되새긴다. 그리고 3년 전 최소한의 의사소통도 불가능했을 L이 브뤼쎌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불합리에 대해 진심으로 분노한다. 이것이 반복되자 더 이상 ‘나’는 ‘나’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이라는 특수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으로 과거의 L과 공존한다. 탈북자가 이국에서 겪은 상실감과 슬픔은 남한에서 평범하게 살았던 ‘내’가 온전하게 공감할 수 없는 차원의 감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는 로기완의 삶을 추적하는 여행을 통해 진정한 성장의 주체가 된다. L을 물심양면으로 돕던 한인 ‘박’도 마찬가지이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고, 아내의 편안한 죽음을 위해 안락사를 선택한 이후 의사를 그만둔 박과 윤주의 수술 시기를 놓치게 했다는 죄책감에 도피한 ‘나’는 성별과 나이, 국경의 차이를 넘어서 묘한 동질감을 형성한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먼저 말하지 않았지만, 점차 서로에 대해 알 수 있게 된다. 그들이 가진 아픔의 본질은 결국 하나이므로.일기의 마지막 스무 페이지를 읽으며 ‘나’는 비로소 웃는다. 로가 ‘라이카’와 미래를 위해 어렵게 얻은 난민의 지위를 버리는 용기를 낸 것처럼, ‘나’도 이제까지의 고통에서 최선을 다해 벗어난다. 윤주에게 사과를 전하고 사랑하는 연인에게는 곧 돌아갈 것을 다짐한다. 박에게는 오랫동안 듣고 싶었을 아내의 한 마디를 대신 전한다. 로를 쫓는 짧은 여정을 통해 ‘나’는 스스로의 고통을 극복하는 것을 넘어서 타인에게 위로의 한 마디를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이로써 ‘나’는 피곤했던 지난 날, 스스로를 소모했던 삶에서 벗어나 지금까지와 다른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박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이 남긴 아픈 그림자를 과거의 것으로 남겨두고, 앞으로의 시간을 살아갈 것이다. 불법 체류자인 로의 곁에는 신분증 대신 연인이 있으며, 열일곱살 윤주는 자신의 달라진 외모 이전에 다른 사람의 슬픔을 먼저 배려하는 사람으로 성숙했다. 로기완, ‘나’, 박, 윤주 모두 그동안의 시간에서 타자였지만, 아프기만 한 현재에 머물러 있지 않고 타자와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시간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즉, 이 소설의 인물들은 스스로 적극성을 발휘하는 인물들이다.
20대는 정말 차별에 찬성하는가?Ⅰ. 들어가며흔히 20대를 이야기할 땐 부당한 사회구조의 ‘피해자’ 이미지를 떠올린다. 하지만 의 저자는 주로 본인의 제자인 젊은 학생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20대를 ‘가해자’로 전제한다. 저자는 책을 통해 청춘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자기계발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학력위계주의의 부정적 면모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에 대해 독자에게 말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20대의 실업 문제를 사회문제가 아닌 개인의 자기계발 부족 문제로 간주하는 현 젊은이들을 비판하며, 동시에 실질적인 해결책은 없이 20대에게 노력을 강요하는 기존의 자기계발서들을 문제시한다. 또 학력위계주의의 피해자로만 알려졌던 20대들이 스스로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스스로 인정하고 심화시킴으로써 가해자로 변해 가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책의 논리에 잘못된 점이 있다고 생각했고, 우리의 경험과 근거자료를 바탕으로 저자의 주장의 모순점을 밝히고자 한다.첫 번째로, 저자는 몇 명의 사례를 바탕으로 20대 전체의 문제를 지적하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또한 저자가 예시로 든 사람들은 모두 미성숙한 20대 취업준비생이나 대학생이었다. 하지만 자기계발서의 허와 실에 대해서 제대로 조사하려면 자기계발서를 읽으면서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학생들이 아닌, 자기계발서를 읽고 취업에 성공한 취업자들도 함께 연구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취업준비생을 대상으로 자기계발의 실태를 비판하는 것은 대표성을 띠지 못한다.두 번째로, 저자는 20대가 학력위계주의를 내면화하고 이러한 체계를 더욱 공고히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비판하면서 ‘과잠’에 대한 한 학생의 경험담과 학생들 간 수학 능력의 격차가 거의 없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하지만 이 또한 섣부른 일반화의 결과이며, 근거의 정당성도 다소 부족하다. 20대 대학생 전반의 특성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면 더 많은 표본집단을 확보하여 조사를 진행했어야 한다.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점은, 과연 이런 현서 충실하게 살아가는 20대와 그런 20대를 현혹하는 자기계발서를 꾸짖고 있기만 하다. 또한 저자 스스로도 맺음말에서 인정했듯이 이 책 또한 어떠한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Ⅱ. 본론1. 누가 진정한 자기계발을 하고 있는가?저자는 20대 대학생들에게 있어 자기계발이란 취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의 자기계발은 ‘가시적인 성과를 달성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저학년 때는 그렇지 않더라도 4학년 취업준비생이 된 후에는 소위 '취업용 자기계발'에 열중할 수 있다는 저자의 논리에는 일부 공감한다. 장기적으로 계속되고 있는 청년실업 문제는 졸업을 늦추고 스펙 쌓기에 열광하는 대학생들의 수를 늘리는 데 일조했다. 학업스트레스, 취업,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대학생들의 여가활동마저도 그 자체의 즐거움이나 자유로움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취업을 위한 수단이 되도록 만든다. 이 같은 현실에 비추어 저자는 20대의 자기계발이 취업 준비만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비판하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몇 가지 이유에서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1) 자기계발 열풍에 휩싸인 한국 사회저자는 20대가 취업 준비를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비판한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이 시대만의 모습인가? 그리고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어느 시대나 각 계층이 사회적 역할을 통해 공익과 개인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져 왔다. 다만 과거에 비해 현대에서 달라진 것은, 경쟁이 이전보다 좀 더 치열해지고 개인이 ‘가치 있다’고 느끼는 것이 더욱 다양해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다양성이 증대된 사회에서 같은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같은 방법으로 치열하게 경쟁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잘못된 것으로 비추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그들만의 것도 아니며, 그들의 잘못은 더더욱 아니다.직장인들도 자기계발을 장려하는 회사의 압력 때문에, 혹은 경력 관리 차원에서 자기계발을 한다. 지식 사회에서 근겨지며 그렇지 못하면 낙오될 것이라는 부정적 관념이 팽배해 있다. 그러다 보니 현대인들의 자기계발은 도구적이며 단편적 지식 습득에만 치중되어 있다. 또한 ‘20대'라는 주제의 도서 판매량 순위에 자기계발 관련 서적이 높은 순위를 차지한다는 것을 저자는 문제 삼았지만 30대, 40대, 심지어 10대로 검색해도 자기계발서적은 순위에 올라 있다. 즉, 자기계발은 20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2) 취업만을 바라보고 살기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저자는 20대의 현실에선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취업을 위해 ‘해야 할 것 몇 가지’를 하는 것이 곧 자기계발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주장을 20대 전체에게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저자가 책에서 예시로 든 고학년 학생들 이외에 저학년 생들은 그가 말하는 대학생의 행태로부터 자유롭다. 대학에 갓 입학한 1,2학년들은 취업과 관련된 활동을 한다기보다는 자신이 관심이 있던 분야의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동아리나 외부 활동을 통해 입시로 미뤄왔던 활동들을 하면서 저자가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자기 계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20대들의 자기 계발은 취업 준비이다.”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그리고 취업을 목적으로 자기계발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그들이 자기계발의 일종으로 대외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대부분의 대외활동은 단지 이력서에 한 줄을 추가하기 위해 참여하는 사람들의 불성실한 태도 때문에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해외탐방이나 봉사와 같은 대외활동의 경우에는 스펙의 일환으로 참가하기보다는 정말 그 활동에 관심이 있어 지원하고 준비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러한 대학생들의 활동을 모두 취업준비를 위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가치중립적인 연구 태도가 아니다.2. 정말 20대들이 학력위계주의를 고착화하는가?저자는 우리나라의 학력위계질서가 자신과 경쟁하는 타인을 끌어내리는 도구로 작용하며, 이러한 현상은 20대의 이기적 잣대를 구축한다고 보았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학을 준비하는 모든 학생들에게 기회가 진실로 공정하게 주어졌는가? 저자의 대답은 ‘아니오’이다. 부모의 경제적 능력, 교육과의 접근성, 선천적인 체력 등의 요인으로 학생들 간 기회는 모두 다르게 주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공정하지 못한 경쟁의 결과로 나타나는 기존의 학력위계주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점에서 저자는 20대들의 행태를 비판한다. 우리 또한 학력이 무조건 공정하지만은 않은 결과이며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저자의 비판 방향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1) “따뜻하고 편해서 입어요.”저자는 대학생들이 ‘과잠’을 입음으로써 학력위계주의를 더욱 공고히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과잠 뒤의 학교 이름에서 그 학교에 대한 동경을 느끼기도 하고, 자신의 학교에 대한 열등감,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한다고 말하는 서강대 학생의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것은 일반화의 오류이다. 대학생이 과잠에 대해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지난 12년 surveymonkey에서 진행된 설문조사에 따르면, 과잠을 입는 가장 큰 이유로 설문에 응답한 87명 중 47.8%가 ‘옷 자체가 편하고 따뜻하기 때문에’를, 23.9%가 ‘학교와 과에 대한 자부심’을 꼽았다. 과잠을 주로 입는 장소도 ‘자교 및 자교 대학가’가 92.5%, ‘자택에서 가까운 곳’이 32.8%로 과잠을 입는 행위가 누군가에게 학벌을 자랑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소속감을 느끼기 위함이거나 편하기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다.우리는 여성학 시간에 이라는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지나친 일반화로 인한 편견이나 선입견보다 명확한 경험이 더 객관적인 정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러한 여성학적 관점으로 위 사건을 다시 해석하면, 과잠이 학력위계주의를 공고히 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비판은 학력에 대한 열등감을 가진 학생과 그를 관찰한 저자의 편견과 선입견으로 인한 일반화라는 생각이 든다. 이보다는 다수의 하지만 수능 점수나 어학 성적에 따라 갈 수 있는 대학이 철저히 서열화 되어있는 한국 사회에서 대학 서열에 따라 개인의 학업능력을 평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저자는 서열이 다른 대학에서 ‘같은 책’으로 공부하는 학생들의 수준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대학 간 수준 차이를 논하는 학생들은 실질적인 수학능력의 차이보다 수업태도나 인성을 그 근거로 이야기한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대학 간 수준 차이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여러 학교에 출강하시는 교수님들 중에는 각 대학 학생들의 수준과 분위기 차이에 대해 언급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다. 이들이 느낀 차이는 수업의 질에 그대로 직결되며, 각 대학의 학생들은 같은 교수, 같은 과목이라도 다른 수업을 받게 될 수 있다. 이러한 차이를 느끼는 것은 비단 교수님 뿐만은 아니다. 지방에 위치한 대학에서 한 학기를 보내고 반수한 우리 조 조원의 경험에 따르면, 지방대 영어교육과 전공수업에서 사용한 교재와 우리 학교 1학년 필수교양수업 교재가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지방대에서는 A+를 받았지만 우리 학교에서는 더 낮은 성적을 받았다고 한다. 이 조원은 이미 배웠던 책으로 공부했기에 책에 대한 이해도는 더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성적은 떨어졌고, 이것은 지방대 학생들보다 본교 학생들의 수준이 더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부득이하게 한 조원의 개인적 경험을 통해 이야기했지만, 객관적으로 대학생들을 평가하는 취업시장에서도 학력에 따라 개인의 역량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3) 누가 학력위계주의를 공고히 하는가?저자는 대학생들이 스스로 차별을 내재화하고 학력위계주의를 공고히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러한 경향은 20대가 아닌 기성세대에서 더욱 심하다. 기업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기성세대들은 고학벌 지원자를 선호하며 ‘학벌=능력’이라는 생각으로 지원자들을 학벌에 따라 구분해 선발하기도 한다. 이러한 고학벌자에 대한 선호는 취업시장 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나타난다. 한 조원은 학교가 어디냐는 어른들의 질문에옳다.
zionism이란?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엔 국가를 건설하려는 혹은 회복시키려는 유대 민족 운동이스라엔 우선주의, 이스라엘 민족주의아브라함이 여호와로부터 약속 받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유대인들은 모세의 인도로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와 이미 거주하고 있던 팔레스타인인(아랍인)들과 공존하기 시작예수의 등장과 유일신 유대교의 대립19세기 말, 시오니즘의 태동 "시온으로 돌아가자"
대명사에서 볼 수 있는 경어법의 양상한국어는 전체적으로 대명사의 쓰임이 활발하지 못하는 특징이 있는데, 3인칭의 경우 앞 문장의 명사를 대명사로 받아야 하는 규칙이 한국어에는 없음대신 대명사보다는 명사로 된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더 일반적선행 명사를 자유롭게 받지 못하는 한계가 여전히 존재ex. '어머님'이라는 선 행사를 '그분'으로 받는 일은 허용되지 않는다-> 일상 대화에서 가까운 사람을 '그분'으로 지칭하는 일은 아주 드물다.한국어의 경어법은 호칭에서 더욱 세분되는 양상면식이 있고 이름(김민호)도 아는, 그리고 어떤 회사에서 과장직을 맡고 있는 청자로 하고, 이 사람을 부르려고 한다면 김민호는 등급에 따라 다양한 호칭으로 불릴 수 있다.
시 분석part 1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목마 : '쇠'와 반대로 자연의 이미지 전쟁 등의 현대문명의 폭력성은 시에서 주로 쇠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 순수성을 의미가을 : 조락(凋落)의 이미지,허무감과 상실감의 이미지방울소리 : 허무함을 드러내는 요소목마가 주인(숙녀)를 버리고 떠난 상황→전쟁 속에서 주체성과 순수성을 잃어버린 우리들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