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Bronze개인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3
검색어 입력폼
  • 완도 소개(유적지, 축제 중심)
    완도(莞島) 호남 남부지역동쪽은 바다 건너 고흥군·여천군, 서쪽은 해남군, 북쪽은 강진군·장흥군과 마주하며, 남쪽은 제주, 남해에 면한다. 한국 6대 도서 중의 하나로 해상교통의 중심지이다. 완도군은 소백산맥의 지맥인 해안산맥의 말단부가 침강하여 203개의 도서를 형성하였다. 그 중에 무인도가 143개이고 유인도는 60개이다. 839km의 긴 해안선에서는 김·미역·톳·다시마 등 각종 수산물이 풍부하고 섬 어디에서나 사계절 푸른 숲과 맑은 물, 기암괴석과 하얀 모래가 가득한 해수욕장을 만날 수 있다.호남 남부지역 완도의 문화유적01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 묘당도는 고금도에 딸린 섬으로 그거리는 20리 안팎이다. 정유재란의 마지막 해 인 1598년 2월 17일 충무공 이순신이 수군 8천여명을 거느리고 고하도로 부터 이곳에 옮겨 진을 쳤고, 그해 7월 16일에는 명의 원병으로 진린 장군이 5천명의 수군을 이 끌고 고금도에 도착, 연합전선을 펴 왜적의 침략을 막아냈던 유적입 니다. 사적 제11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특히 이곳은 해수로의 요새지로서 이충무 공이 고금도에 진을 옮긴 뒤부터는 장흥, 고흥에 출몰하 여 살육과 약탈을 일삼던 왜군이 순천방면으로 도주해 버림으로 전투는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공은 이 때 우선 본영을 건설한다든지 난민들을 거두는데 더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02 청해진 유적지 장도 천해진 유적은 장보고 대사 관련 유적지로 완도 장도를 중심으로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적소 탕과 해상무역을 통한 해양상업제국을 건설한 장소로 사적 제30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청해진의 중요시설물이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되 며 멀리 북-서쪽은 강진만 과 해남의 길목이고, 동-서로는 고금, 약산도를 경유 득량만과 고흥반도 로 그리 고 남쪽으로는 청산도를 지나 대양으로 중국과 일본으로 이어지는 해상교통의 요충지 였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유물발굴조사를 통하여 목책 열, 판축기법의 토성, 우물터, 해무리 청자편 등 장보고의 해상활동 근거지로서 청해진의 실체를 규명하는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다. 이후 2001년 부터 정비-복원사업을 통해 판축토성과 내성문, 외성문, 우물, 굴립주 등이 복원 정비 되었으며 남서쪽 해변에는 방어와 접안시설로 추정되는 목책이 남아있다.03 보길도 윤선도원림 명승 제34호로 지정되었다. 보길도는 완도에서 남쪽으로 32㎞, 해남반도의 남단에서는 12㎞ 떨어진 외딴섬이다. 1637년(인조 15) 2월 윤선도가 51세 때 처음으로 보길도를 찾아 입구에 세연정과 연못을 축조하였는데, 물과 바위와 소나무·대나무 등을 이용한 조원공간으로 지금까지 부용동원림 중에서도 가장 잘 남아 있는 유적이다. 세연정에서 부용리 쪽으로 약 1.5㎞쯤 들어가면 낙서재 건너편 산비탈에 동천석실이 있다. 이곳은 1,000여평의 공간으로 석문·석담·석천·석폭·석대·희황교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동천석실에서 남쪽으로 약간 내려오면 부용리에 인접한 평지가 나타나는데, 이 일대에 낙서재와 무민당·곡수당을 짓고 세상의 명리를 떠나 꾸밈없는 생활을 영위하였다. 윤선도는 1637년부터 85세로 죽을 때까지 일곱 차례나 보길도에 왔다갔다 하면서 13년 동안을 머물렀다. 이곳에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40수와 32편의 한시를 남겼다.호남 남부지역 완도의 관광명소01 장보고 기념관 장보고 기념관은 1200년 전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동북아 해상무역을 주도하였던 장보고 대사의 위대한 업적을 재조명하고 해양개척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2008년 개관하였습니다.02 금당 8경 금당 8경은 기암괴석으로 수만년간 파도와 풍우로 인하여 신비로운 형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외에 코끼리 바위, 각으로 형성된 부채바위 ,꽃섬 용머리, 흔들바위등이 있으며 관광지로 미개발된 아름다운 곳이 많은 신비의 섬입니다.03 완도 청해포구 촬영장 완도 청해포구 촬영장은 드라마 해신 이후 대왕세종, 이산, 주몽, 대조영, 태왕사신기, 추노, 근초고왕, 바람의 나라, 영화 명량등이 촬영되는 곳으로 생생한 드라마 촬영의 현장을 관람할 수 있으며 교육과 체험의 공간으로 풍부한 볼거리와 교육자료가 전시되어있는 곳입니다.호남 남부지역 완도의 4계절 별미01 완도 전복과 멸치 미네랄 함량이 높고 비타민이 풍부하며, 저지방 고단백 식품으로 단백질을 창고라 불리운다. 어린이, 임산부, 노약자 및 원기 회복을 요하는 환자에게 옛날부터 최고의 건강식품 및 강장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완도 멸치의 맛은 청정바다에서 시작됩니다. 서해안의 한류와 남해안의 난류가 합쳐지는 플랑크톤이 풍부한 청정바다에서 나는 바다의 칼슘창고 완도 멸치-완도바다의 싱싱함이 살아있는 천연의 멸치를 건조하여 맛이 진하고, 칼슘과 미네랄이 풍부하 멸치중의 멸치라 불리웁니다.02 완도 톳과 광어 미네랄이 풍부하고 칼로리가 전혀없는 다이어트 바다식품, 완도 톳 - 알칼리성 자연식품 톳의 소비가 제일 높은 일본의 톳 수요 50% 이상을 차지하며, 자연식품으로 인기가 좋은 완도 톳은 철분, 나트륨, 칼륨, 아연 등의 영양분이 다량 함유되어 건강에 좋은 자연식품입니다. 완도 광어는 국내에서 최고의 품질을 인정받고 있듯이 엘라스틴, 콜라겐의 두 성분으로 이루어진 결체조직으로 고기는 끓이면 부드러워지고 소화가 잘되며 저자방, 고단백, 저칼로리로 환자 및 노약자의 영양식으로 좋습니다. 특히 콜라겐 성분으로 주름제거 및 피부미용에 좋습니다.03 전복 영양밥과 염소수육 진한 사골육수로 지어낸 영양밥에 쫄깃한 전복을 올려 만든 음식으로 더위에 지친 몸을 달래주는 영양식이다. 약산의 삼지구엽초는 조선시대 궁중 진상품중의 하나였다. 그 약초 덕분인지 약산에서 방목해 키우는 흑염소는 남도 최고의 보양식으로 꼽힌다. 약초먹고 자란 흑염소라는 믿음 때문이다. 맛도 뛰어 난데 염소특유의 노린내가 전혀 안나고 살점도 한 결 더 부드럽다04 간재미찜 - 간재미 회무침 단백질, 칼슘등 영양이 풍부하고 연골어류에 많은 콜라겐은 관절염, 류머티스, 신경통을 예방하는 효능이 뛰어나다. 일이 잘안풀리고 꼬일때 신경은 날카로워 지고 입은 까칠해 진다. 입맛을 잃어버렸으니 기력이 떨어지고 힘도 없을때 먹 으면 좋다. 또한 신경성으로 잠을 못자거나 스트레스가 많은 직장인에게도 매우 좋은 음식이다.05 서대찜 서대는 남해안 중서부 지방의 명물로 이 지방에선 서대가 엎드려 있는 개펄도 맛있다 라고 할 만큼 맛좋은 생선으로 여겨져 회나 조림, 구이, 찜, 찌개감으로 연중 요긴하게 쓰인다. 따라서 제사상에 서대찜이 오르지 않으면 서운하게 생각 하는 생선이다. 고혈압 예방, 즉 칼륨, 인이 풍부한 서대는 혈압을 낮춰주는 효능이 있어 성인병 예방에 효과적이다.호남 남부지역 완도의 문화축제01 장보고 축제 완도의 대표적인 문화관광축제로 한국 최초로 바다를 개척 했던 장보고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청해진의 옛영광 을 재현함으로써 진취적인 해양경영사를 재정 립하고 관광 완도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해양문화축제이다. 장보고 가 이룩한 해상 무역항로 탐방과 학술회의, 해상출정식 등의 행사를 통해 완도의 지역적·역사적 특색을 엿볼 수 있다. 전야제 행사를 비롯 장보고대사 견당매물사 출정식, 청산도 멸치휘리뱃소리 시연, 장보고배 국제노젓기대회, 군민체육 대회 따위의 다채로운 행사가 열린다. 그 가운데서도 장보고 대사 견당매물사 출정식은 200여 명의 인원이 참여해 견당 매물사 출정식을 재현한다.02 청산도 슬로우걷기 축제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로 지정된 완도군 청산도에서 매해 청산도 슬로우걷기 축제 를 개최한다. 남해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유채와 청보리 물결이 한 폭의 그림이 되는 매년 4월에 진행되는 청산도 슬로우걷기 축제 는 올해로 제7회를 맞이한다. 청산도의 청정자연, 문화, 역사를 온 몸으로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청산도 슬로 우걷기 축제 가 4월 1일부터 30일까지 진행된다. 축제를 즐기며 바쁜 일상을 덜어내고 삶의 행복을 충전하는 시간을 선사한다. 슬로우길은 청산도 11개의 코스로 이루어져 있으며 11개 코스마다 길이름이 정해져 있다. 청산도 내에 있는 각종 풍경과 역사를 느낄 수 있습니다.Thank you{nameOfApplication=Show}
    농/수산학| 2016.01.17| 20페이지| 2,000원| 조회(217)
    미리보기
  • 동서양의 화약기술
    13 세기 화약발명이 이후 전술변화에 미친 영향 학번 학과 이름동 , 서양의 화약기술 중국의 화약기술 우리나라의 화약기술 일본의 화약기술 서양의 화약기술 동 - 서양의 화약 발명에 따른 전술변화 중국 , 일본 , 우리나라의 전술 변화 서양의 전술변화동서양의 화약기술중국의 화약기술 인류 최초의 화약 : 황 , 초석 , 목탄 등을 배합한 조성물 . 화약의 발상지나 발명 과정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견차 이가 있지만 대체로 중국의 연단술에서 파생되었다고 보고 있다 . 갈홍 포박자 가장 중요한 것이 화약의 발명과 연관성이 있는 화법연단이다 . 화법연단은 물 없이 가열을 하는 방법으로 위진시대의 도교학자 갈홍의 책 『 포박자 』 에 기록되어있는 내용이다 . 하지만 연달술사들의 노력은 불로장생의 약의 만드는 데 쏠려있어 화약의 발명에 이르기까지는 ‘ 우연적인 요소’가 필요했다 . 이 우연은 연단술사들이 질산칼륨과 유황 그리고 숯이라는 세 가지 물질을 혼합하면서 일어났다 . 그들은 이 세 가지 물질이 한 데 모이면 폭발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 이를 병을 치료하는 약물로 여겨 불이 붙는 약 이라는 의미로 화약 이라 이름 붙였다 .송의 이방 등 태평광기 에는 후한의 순제 (125-144 년 ) 때에 있었던 설화 . 단약을 만드는 어떤 방사의 집에 두자춘이 방문했으나 마침 방사가 볼일이 있어서 외출 중이었다 . 그래서 두자춘이 단약로 옆에서 잠시 졸고 있었는데 단약로에서 큰 불이 일어나 화염이 지붕까지 미치면서 집이 불타버렸다고 했다 . 618 년 손사막이 저술한 복화유황법 “ 질산칼륨과 유황 그리고 숯을 혼합하여 불을 붙이면 강력한 화학반응이 일어난다 ” 808 년 청허자의 연홍신진지보집성 같은 양의 초석과 황의 혼합물에 부자를 가한 다음에 가열했더니 발화하면서 연소했다 . ( 복화반법 )784 년 최초로 화약무기 사용 . 당에 반란을 일으킨 이희열의 군대 ( 그저 말을 놀래키는 정도의 역할을 했을 뿐 , 실질적인 살상력은 없었다 ) 904 년 당이 예장을 공격할 때 비써서 용사문을 불태움 975 년 송의 조송이 화포와 화전을 사용하여 남당을 멸망시킴 최초로 등장한 화기 : 화염방사기인 화창 송나라 (960~1279 년 ): 처음으로 탄환을 발사하는 화기인 돌화창 발명 , 독가스탄 , 연막탄 등 용도에 맞춰 화약을 응용함 . 여진족의 금나라 (1115~1234 년 ) : 진천뢰라 부르는 현재의 수류탄과 같은 작열탄 개발 , 비화창이라 부르는 화창과 함께 널리 보급 . 몽고족인 원나라 (1260~1368 년 ) : 금과 송나라의 기술을 기초로 하여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는 금속으로 된 관 형태의 통에 화약과 탄환을 채워서 발사하는 투사성 화기를 발명 .우리나라의 화약기술 최무선 ( 崔茂宣 ) 고려말의 무인이며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위하여 화약연구에 착수 무역항 벽란도에서 중국의 강남지방에서 온 이원 ( 李元 ) 에 게 흙으로부터 초석을 추출하는 방법을 배우고 화약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 화통도감 설치 대장군포·이장군포·삼장군포· 육화 · 석포 ·화포· 신포 ·화전·화포· 화통(火㷁) 등의 총포류를 개발하고 , 화전· 철령전 · 피령전 등의 발사용 화기, 기타 질려포 · 철탄자 · 천산오룡전 ·유화·주화· 촉천화 등 각종 화기를 제조하였다 . 진포대 첩일 본 의 화약기술 예로부터 조선과 명나라에게 화약제조기술을 얻으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 . 1543 년에 명나라로 가던 포르투갈 배가 태풍을 만나 규수지방에 표류 , 두 정의 화승총과 흑색화약을 제작하는 비법을 일본에 알려준다 . 도검 제작자들에게 명해 그 화기 작동 방식과 총신을 복제하도록 함 . 초기의 조총은 사수가 한 번 총알을 장전하고 , 조준하고 , 발사할 시간에 궁수가 15 대의 화살을 쏠 수 있었다 . 유효 사거리도 80 ~ 100 미터에 불과했으며 , 갑옷에 맞은 총알이 도로 튕기는 일도 있었다 . 습기가 차거나 비가 오면 화약이 눅눅해져 화승이 무용지물이 되었다 . 이후 일본인들은 조총의 단점을 보완하여 전국시대와 임진왜란에 걸쳐 사용하였다 . 에도 시대 (160868 년 ) : 17 세기부터 일본은 쇄국 정책을 고수하며 서방세계와의 소통을 스스로 단절시켰다 . 일반적인 통설과 달리 , 쇄국은 일본의 ‘총의 포기’로 이어지지 않았다 . 에도 시대에는 총이 사용되어야만 할 대규모 무력 충돌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총기의 사용이 줄어들었고 기존의 총기는 대부분 창고에 있게 되었다 .서양의 화약기술 기원전 424 년에 스파르타가 델리움의 그리스 요새를 공격할 때 각종 수지와 황 , 아마같은 섬유등을 혼합한 가연물이 든 단지를 던져 성벽과 그 내부를 공격 667 년 ‘ 그리스의 불 ’ : 소이제로서 비잔티움 제국의 군대서 사용하던 화기 “ 순수한 황 , 주석 , 사르코콜라 ( 페르시아 고무 ), 역청 , 녹인 초석 , 석유 , 송진을 준비한다 . 이것들을 끓인 다음 밧줄 에 스며들게 해서 불을 붙인다 . 이 불은 소변 , 식초 , 모래로만 끌 수 있다 .”화약무기는 몽골이 아바스 왕조를 멸망시킨 1258 년을 전후해서 아랍지역으로 전래되게 된다 . 13 세기 말 나타나는 관형화기나 ,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가 만든 대형 동제대포가 유물로 남아있기에 그렇게 판단할 수 있다 . 이후 유럽으로 전래됨 . 유럽의 로저 베이컨 : 전설로만 전해지던 희랍의 불을 재현하는 초석 , 황 , 목탄의 세가지 성분을 적절히 배합 , 종래의 발화제나 희랍의 불보다 연소성능이 뛰어난 화약을 만들어냈다 . 베이컨이 만들었다는 화약은 흑색화약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는 데 목탄 가루가 배합되어 있어서 혼합물의 색이 검었기 때문이다 . 15 세기에 소금에 절인 화약의 제조법 발견 , 화약무기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 분말화약이 사용되면서 총신 내의 압력문제를 해결 , 보다 즉각적이고 균일한 형태의 폭발력도 얻을 수 있었다 .동서양의 화약기술발명에 따른 전술변화중국의 전술변화 지순삼년동포 , 화창 , 진천뢰 , 호준포 , 공융포 , 신총차포 ( 천자 , 지자 , 원자 세 종류가 있다 ) 등장 포신을 보호할 목적으로 무겁게 만들어져 있어 포차에 탑재하더라도 이동않아 기동성이 상당히 떨어졌었다 . 이 결점을 개량하기 위해 포신을 보호하는 테를 만들어 압력을 많이 받는 부분만 두껍게 하는 방법이 사용되었다 . 명나라때 군대의 중심 장비로써 불량기사용 , 포가 모포와 자포로 구성되어 있으며 , 탄환을 발사하는 포신 ( 모포 ) 과 탄환 및 화약을 채워넣는 부분 ( 자포 ) 이 분리되어 있다는 점 , 다음 탄환을 발사하기 위해서는 모포의 포신 속을 청소하고 자포를 교환하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에 조작이 간단하였다 . 이런 이유로 당시의 다른 대포와 비교할 때 다음 탄환과의 발사간격이 상당히 짧은 것이 불랑기의 최대 장점이었다 . 또한 탄환으로 어떤 것을 사용하더라도 자포에 미리 탄환을 장전해놓는 방식이기 때문에 일정한 발사간격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일 본 의 전술변화 종자도총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각종 테크닉을 개발 사무라이가 아닌 하급 무사들이나 농부 출신의 징집병들에게 효과적으로 장비시킬 수 있다는 것 연속 사격술을 개발 : 긴 장전시간을 보완 . 구경이 더 큰 총을 개발 : 살상력을 증가 시켰다 . 칠기로 보호 상자 : 비가 올 때도 총을 쏠 수 있도록 만들었다 . 끈으로 각도를 고정시켜 밤에도 정밀하게 사격할 수 있게 만듬 . 전국시대 장군 노부나가 : 다른 무장이 위협용이나 저격용으로 사용했던 조 총 를 1 선에 집중배치한 것 , 집중사격이 가능하도록 편성 , 아시가루의 창의 길이를 3 間半 (6.3m) 으로 했던 것 노부나가의 전법 : 제 1 선의 철포부대의 일제사격으로 적군의 기를 걱은 다음 , 2 선의 장창부대가 돌격해 적을 제압우리나라의 전술변화 고려 말 최무선의 화약 재조술 원나라 이원에게 얻음 . 화통도감 설치 : 1374 년에서 1376 년 사이 최초의 국내 화약 생산이 시작 , 고려 말 ~ 조선 초 : 극심한 왜구의 출몰 , 상대가 주로 왜구였기 때문에 수군중심의 중화기발달 . 대장군포 , 이장군포 , 삼장군포 , 육화석포 , 화포 등을 사용 : 폭발하면서 내는힘을 이용하여 화살 - 탄환 등의 발날려 보내는 유통식 화포로서 적의 성루 , 성문 , 성벽 , 전함 등을 타격하고 파괴하는 데 쓰였다 . 진포대첩 : 1380 년에 최무선이 100 여척의 수군을 이끌고 진포에서 500 척의 왜구를 무찌른 전투 . 화포를 사용한 세계최초의 함포해전 . 조선초 : 왜구와 여진족의 침입 , 중화기 보다는 소화기중심의 발달 임진왜란 : 육군과 수군에 골고루 화기가 보급됨 , 하지만 개인화기보급이 아닌 전술화기 ( 포 - 화차 ) 였음 .( 지차총통 , 현자총통 , 비격진천뢰 , 승자총통 , 화차 )서양의 전술변화 개인화기가 장창을 대체하는 식의 무기발달상 변화가 일어났고 , 이로 인해 종래 무력의 주축을 이루던 소규모 봉건기사군이 쇠퇴하고 엄청난 숫자로 증가한 보병이 군 병력의 주축이 되었다 . 개인화기로 무장한 병사들은 독립부대가 아닌 밀집 투창부대 속에 편제된 상태로 운용되었다 . 16 세기의 전장에서도 이는 보조무기에 머물렀고 , 여전히 창과 활이 가장 치명적인 주무기로 활용되었다 . 스페인은 기후가 건조하고 토양이 척박한 탓에 기사용 말을 사육하기가 부적합하여 상대적으로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기사 계급의 발전이 미약하였다 . 스페인 보병군이 사용한 기본무기는 장창과 방패였지만 , 아퀘부스라는 화승총을 혼용하면서 그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스페인 보병군의 기본대형은 테르시오라는 방 진 이었다 . 이는 장창병을 양쪽에 그리고 소총병을 중앙에 배치하는 정방형 대형의 병력운용 단위였다 . 적 기마병의 돌격을 야전축성과 창병을 이용하여 저지하고 화승총으로 적의 예봉을 꺾은 다음에 재차 창병 공격으로 적을 궤멸시키는 방식인 이 전술을 사용하면 , 무엇보다도 창병을 이용하여 재장전 시 적에게 노출될 수밖에 없는 소총수들을 보호할 수 있었다 . 초기에는 소총병과 창병의 비율이 1:6 정도였으나 , 후기로 가면서 소총병의 비율이 점차로 높아졌다 . 이는 곧 유럽 각지로 전파되어 병력운용에 관한 일종의 기본모형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감사합니다{nameOfApplicatw}
    인문/어학| 2016.01.17| 19페이지| 3,000원| 조회(227)
    미리보기
  • 나주학생 항일운동 기념관 방문 보고서 평가A좋아요
    나의 민주화운동 답사기우리 전라도 지역은 예로부터 의향으로 잘 알려져 온 지역이다.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고경명과 김덕령장군을 비롯한 많은 의병들이 왜군의 침략에서 나라를 구하고자 일어났으며 일제강점기 때에는 이름 모를 많은 의병들이 일어났으나 일제의 의병 대토벌 작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잃었다. 물론 현대에 와서 독재정부에 항거하는 5.18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으나 이번에는 일제강점기 때 3대 독립운동중 하나인 광주학생 항일운동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을 방문하게 되었다.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은 총 2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있으며 제 1전시실에서는 일제강점기 속 우리나라와 민족항쟁의 땅 나주를 소개하고 있으며 제 2전시실에서는 나주학생독립운동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었다.처음 기념관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생활한복을 입으신 아주머니께서 나를 반겨주셨다.2층에 있는 제 1전시실부터 관람하기 전에 8분가량의 영상을 보았다. 영상의 내용은 일제의 수탈을 포함한 만행과 나주역사건을 시작으로 일어난 광주학생 항일운동이었다. 짧은 영상을 보고 들어간 전시실 입구에는 우리나라 36년간의 일제강점기를 정리해놓은 연표가 자리하고 있었다. 1910년도부터 1919년 3.1운동까지의 무단통치 시기, 3.1운동 이후부터 1931년까지의 문화통치시기, 마지막으로 1932년부터 1945년까지의 병참기지화 및 전시동원시기 즉 민족말살통치시기 이렇게 3부분으로 나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그 다음은 일제강점기 나주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일제는 1910년부터 조선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여 막대한 국유지를 창출하고 세원을 확장하였으며 일본인들의 토지 매매를 뒷받침하는 제도적 장치를 완비하였다. 그리고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세워 조선의 경제력을 장악하였다. 많은 우리나라의 농민들은 땅을 잃어버리고 소작농이 되었으며 1920년대에 들어 산미증식계획을 시작하였다. 시간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 러일전쟁 직후부터 수많은 일본인 지주와 농업회사들이 었다. 특히 나주평야와 호남평야(김제, 옥구)는 그들의 진출이 집중된 곳이었다. 또한 이곳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용이하게 실어가기 위하에 이리에서 목포까지 호남선 철도를 1914년에 공사3년 만에 개통하였으며 또 전주에서 군산까지의 도로를 1908년 10월에 개통하였다. 이러한 도로와 철도를 통해 매년 수십만, 수백만 섬의 쌀이 일본으로 실려 갔다.호남지역을 수탈하는 식민지의 거점으로는 1902년부터 일본인이 들어와 상주하기 시작한 영산포가 있었는데 대읍으로써 전통적인 질서가 잡힌 나주와 인접해 있고 수운의 요지에 있으면서도 개발되지 않았던 영산포에 진출하는 것이 보다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나주와 영산포는 3.4km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일본인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나주읍내에도 일부가 진출하여 상권을 장악해갔다. 일본인들은 나주읍내로 진출하기 위해 신작로를 낸다는 구실을 앞세워 1910년 나주읍성을 철거하였다. 영산포에는 영산포일본인회, 영산포 헌병부대, 일본신사, 광주농공은행 영산포지점 등 여러 식민기구가 설치되었다.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영산포의 시가지가 나주의 시가지보다 커지는 역전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나주에서도 많은 항일의병활동이 있었는데 일본은 1985년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을미개혁을 통해 조선을 차지하고자 하였다. 1895년 11월 15일 내려진 단발령을 단초로 뜻있는 유림들의 지휘 아래 전국에서 항일의병이 일어난다. 나주에서도 관찰사를 대리한 참서관 안종수 등이 단발령을 무자비하게 실시하면서 유림들을 중심으로 의병이 일어나 나주성을 장악하였다. 외세 척결과 같은 주장을 내세우며 나주를 지키던 의병진은 관군이 들어오자 순순히 성을 열어주었다. 결국 의병의 주창자 김창균, 정석진 등이 압송, 처형되면서 의병봉기는 일단락되었다. 을미의병을 계기로 관찰부가 나주에서 광주로 옮겨졌으나 나주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나주인들은 다시금 항일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나주지역에서 활동했던 주요 의병장은 박민수한편으로는 정말 용기 있는 사람이 많았다는 생각에 자랑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나주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도 알려지지 않은 많은 의병들이 독립을 위해 희생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다음은 나주의 3.1운동에 대해서 보았다. 나주지역은 1895년과 1906년 이후의 항일 의병으로 지역 주민들이 큰 희생을 치렀다. 이 때문에 1919년 3.1운동기에는 다른 지역에 비하여 만세시위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는 한말 항일의병이 거세었던 전남지방의 일반적인 추세였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1895년 단발령 의병 사건의 주역이었던 김창곤의 아들 김철은 서울의 3.1운동을 참관한 후 광주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결심하여 김강, 최병준, 송흥진과 함께 광주에서의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협의하였다. 그리고 독립선언문과 격문, 태극기 등을 인쇄하여 1919년 3월10일 광주 장터에서 시민과 학생 1000여명의 군중을 규합하여 대대적인 독립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나주에서도 3월15일부터 다음날까지 수백 명의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후에도 몇차례에 걸친 만세시위가 미리 탄로나 중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27일부터 다시면을 비롯한 노안, 문평, 공산, 동강 등 여러 면에서 전개된 산상 봉화시위와 4월 3일의 영산포 만세시위 등을 통해 만세 시위는 계속 이어져 갔다.3.1운동의 영향으로 나주에서는 여러 민족운동이 일어났다. 먼저 청년운동은 1920년 1월 나주수양구락부를 나주청년수양회로 개칭하고 야학부를 설치해 영어, 일어, 조선지리, 역사, 상업부기 등을 가르치며 토론회와 강연회를 개최하면서 시작되었고, 1922년 나주청년회관의 준공과 함께 나주청년회로 개명되면서 본격화되었다. 하지만 초창기 나주청년회는 유지들로 구성되어 민족 운동적 성격을 갖기는 어려웠고, 활동도 저조하였다. 나주 청년회는 1922년 나주청년회관의 준공과 함께 집행위원진이 소장층 청년 운동가들로 바뀜으로써 혁신적인 청년운동 단체로 변모하였다. 특히 이 시기 효종단이라는 사상단체가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던 이항발의 지도와 박, 회관 건축, 야학 활동과 연극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야학은 주로 농민과 노동자, 그리고 부인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는데, 일부 사회 운동가들은 야학을 이용해 사회주의 의식을 전파하였다. 또 1929년 11.3 학생독립운동 사건당시 나주청년동맹 회원들이 학생들을 지도하여 나주에서 시위를 일으켰다. 나주청년동맹은 1930년 9월 집행위원장이 모 사건으로 체포되어 경성으로 압송된 후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못한 가운데 1931년 해체되었다.청년운동은 여성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1927년 경 나주여자청년회가 창립되었다. 여자청년회는 여성들의 계몽운동과 경북 지방의 기근을 구원하기 위한 의연금 모금 운동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부녀야학을 설치하고자 했으나 역량부족으로 성공하지는 못하였다.나주지역의 노농운동은 1924년 나주노농공영회가 만들어지면서 시작되었다. 나주노농공영회는 나주청년회에서 경영하던 노동야학을 인수하여 경영했으며 나신면 석현리에 있는 일본인 스즈키의 양잠 노동자의 파업 중재, 농민들의 소작쟁의, 궁삼면 토지회수투쟁의 지원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나주지역의 노농운동의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궁삼면민들의 토지회수투쟁과 다시면 수리조합반 대투쟁, 임금 문제를 둘러싼 나주 인쇄공 파업 등이 있다.신간회 나주지회 김창용 위원장과 박준삼, 양장주 위원 등은 주민들로부터 약 7천원의 자본금을 모아 나주협동상회를 창설하여 나주 읍내의 상권을 되찾고자 하였다. 당시 나주읍내의 상권은 거의 일본상인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협동상회는 일본인 상점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운영을 계속했으나 일본 경찰의 지속적인 억압 속에서 결국 10년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이러한 민족운동의 연속으로 일어난 것이 바로 학생운동이다. 11.3학생 독립운동은 10월 30일 나주역 충돌사건이 발단이 되어 광주에서의 충돌과 시위, 그리고 전국적인 학생들의 시위와 맹휴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나주역 충돌 사건의 진상은 무엇인가. 당시 현장에 있던 광주여고보생 이광춘의 증언과 다른 자료쳤다. 한국인 남학생 박준채와 이순태 등 광주고보생 3~4명은 여학생들보다 몇 걸음 앞서 개찰구를 빠져 나갔는데, 뒤에서 여학생들의 비명소리가 나자 뒤를 돌아보고 격분하게 되었다. 박준채는 광주중하생 후쿠다 등을 불러, “너희들은 명색이 중학생이면서 여학생을 희롱하느냐”고 힐문하자, 후쿠다가 “조선인 주제에” 라고 되받았다. 박준채를 더욱 화나게 한 것은 바로 이 말이었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박준채는 후쿠다의 면상을 주먹으로 쳤고, 출찰구에 서있던 일본인 순사 모리다가 쫓아와 박준채를 나무라면서 뺨을 때렸다. 그 현장은 나주역 건물 안이었다. 박준채와 조선인 학생들은 왜 조선인 학생만 나무라느냐, 그리고 왜 뺨을 때리느냐고 따지고 들었다고 한다. 그런 사이 일본인 학생들은 재빨리 현장을 빠져 나간 것으로 보인다.11월 3일은 일제의 소위 4대 국경일 중 하나인 명치절이자 공교롭게도 음력으로 10월 3일이어서 우리의 개천절이기도 했다. 침략 원흉인 명치 국왕의 생일과 우리의 개천절이 겹친 날이었으니, 망국의 한이 더욱 뼈에 사무칠 수밖에 없었다. 이날 일제는 광주에서 전남산 누에고치 6만석 돌파 경축 대회를 열어 경제 착취정책의 성공을 기념하였다. 일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학생들을 소집하여 명치절 경축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식이 끝나고 학생들이 귀가하는 과정에서 양측학생들의 충돌이 빚어졌다.3차에 걸친 충돌 이후 일단 학교로 돌아간 광주고보생들은 다시 강당에 모여 선후책을 논의 했다. 이 회의에서 학생들은 광주중학교 습격을 주장하는 강경론이 우세하였다. 특히 나주출신 오쾌일은 연단에 올라가 “오늘의 대승리를 신천지의 동포들에게 알리고 일제 타도의 의지를 천명하기 위해 시위를 전개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목봉, 죽도등으로 무장하고 다시 시내로 쏟아져 나와 교가와 운동가를 부르면서 시위를 전개했다. 이 시위에는 광주농업학교, 광주사범학교, 광주여고보 학생들도 동참하였다. 이날 시위는 3.1운동 이후 처음 있었던 대규모 시위였으며, 학생
    인문/어학| 2016.01.17| 5페이지| 1,500원| 조회(147)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1
1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0
  • A좋아요
    1
  • B괜찮아요
    0
  • C아쉬워요
    0
  • D별로예요
    0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4월 24일 금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7:57 오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