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 前漢 후기의 상황과 왕망의 개혁 -과 목 :담당교수 :제출일자 :학 과 :학 번 :이 름 :-目 次-Ⅰ. 서론Ⅱ. 前漢 후기의 상황1. 前漢 후기의 사회위기2. 前漢 후기의 외척정권3. 왕망집단의 형성Ⅲ. 왕망의 개혁과 문제점 : 대내정책1. 관제와 지명의 제정2. 화폐제도의 개혁3. 토지·노비제도의 개혁4. 五均과 六管制度Ⅳ. 왕망의 개혁과 문제점 : 대외정책Ⅴ. 왕망의 개혁평가Ⅵ. 결론Ⅶ. 참고문헌Ⅰ. 서론王莽의 新왕조는 불과 15년 동안 존속한 단명의 왕조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역사상 최초로 禪讓에 의한 ‘왕조찬탈’과 復古정치를 표방하여 화폐제도, 토지와 노비제도, 五均과 六管제도, 관제와 지명의 변경 등 다방면에 걸친 무수히 많은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중국역사에서 오래도록 그 이름이 기억되고 있다. 왕망의 왕조찬탈이 가능했었던 것은 前漢말의 시대적 상황과 결코 무관할 수 없었을 것이며 그가 행하였던 개혁들이 실패하여 후세에 오르내리게 된 이유 또한 여러 가지 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왕망정권이 강성했던 漢제국을 무너뜨리고 출현할 수 있었던 배경과 함께 그가 단행했던 개혁의 종류와 실패원인, 그의 정권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Ⅱ. 前漢 후기의 상황1. 前漢 후기의 사회위기前漢 후기에는 멀게는 무제의 대원정, 가깝게는 황실의 사치, 대토지 소유와 가혹한 국가부담 등에 의해서 소농민층이 몰락하여 사회경제가 파탄의 상태에 이르렀다. 경제적으로는 대부분이 무제의 대원정에 의한 국가재정의 소진에 따른 영향이다. 문제에서 경제로 이어지는 황노정치에 의해 전한 초기에는 국가재정이 풍부해졌지만 경제의 뒤를 이은 무제가 대원정을 함으로써 풍부했던 국가재정을 소진하였을 뿐 아니라 이후의 국가경제에까지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사회적으로는 무제 이후 호족들의 토지겸병과 재산 축적은 농민들을 압박하여 계속된 농민봉기 발생과 유민의 수가 증가하였습니다. 소제의 뒤를 이은 선제가 통치를 하면서 잠시 안정되는 듯 했으나 원제ㆍ성제를 거치면서 대토다. 이로 인해 농민들은 노비가 되어 호족 대지주에 예속하든가, 타향으로 도망하든가 하는 방법으로 조세의 부담에서 도피할 수 없었다. 한편 元帝 이후부터 유학을 배워 관료계로 진출한 관료들의 대토지 소유도 이어졌다. 원제로부터 哀帝시기까지 40여 년 간에 귀족과 관료, 富商들의 토지겸병은 심각해져 호족의 광폭함은 멸망한 秦代보다도 가혹했다고 한다. 이 같은 대토지 소유는 사회문제로 대두되어 애제 때 대사마 사단이 토지소유 제한의 한전법을 주장한 것도 이와 같은 분위기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 한전법은 제후왕과 열후 및 관리의 반대로 실패하였고 사회적 불안은 더욱 고조 되었다.사회경제적 위기와 아울러 정치적 측면으로는 황실 관료 계통이 국정을 장악하여 내조가 외조의 권력을 뛰어넘음으로써 궁정 내의 정무 혼란과 국정 혼란, 제실재정과 국가재정의 혼동이 일어났다. 사상의 측면에서 董仲舒이래로 한제국의 통치를 위협하는 災異說과 禪讓思想이 대두하였다. 전한후기에는 萬世一系를 부정하는 선양사상이 크게 유행하여 왕망의 찬탈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사회적ㆍ학문적 분위기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元帝의 天子七廟制의 도입과 成帝의 郊祭 도입을 계기로 정치현실과 經學의 이념이 통하게 되었다. 이건은 외면적으로 경학이 현실정치에 승리를 거두고, 정치를 자신의 색으로 도색 한 것이지만, 경학은 이후 활력을 잃고 현실에 대한 비판력을 상실했다. 그리고 哀帝시기부터 讖緯思想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 경학은 그것을 규제할 수가 없었다. 한말의 유학은 음양을 조화시키고, 재난을 물리치며 백성을 안정시킬 성인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왕망은 이러한 상황에 나타났다. 그가 불우했을 때 보여준 덕행과 정치 집행과정에서의 겸양은 그를 성인으로서 인정하기에 충분했고 일반 백성들도 符命을 믿고 혁명을 인정했다. 이 부명에 의한 혁명의 성취에서 당시의 시대사상, 특히 참위설의 성행을 엿볼 수 있다.2. 前漢 후기의 외척정권前漢 대에는 한고조 劉邦 사후 呂氏, 藿氏, 王氏의 외척이 득세하였다. 특히 척정치가 성했던 成帝기이다. 왕씨정권 내에서 초기 왕망의 정치적 위치는 주목받지 못했지만 왕망은 탁월한 정치적 수완으로 유력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王根의 뒤를 이어 보정직에 올랐다. 이때부터 시작된 왕망의 집권은 단순히 왕씨 외척정권의 계승이라는 차원을 벗어나 새로운 왕조의 개창이라고 하는 격변의 시대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왕망의 정치적 성장은 그의 개인적 성향이나 역량에 기인한 것이지만, 그 과정에는 그를 지지하고 정치적 행동을 같이 했던 이른바 왕망의 정치집단이 있었다. 이들은 왕망의 집권과정을 통하여 꾸준히 결집 되었으며, 왕망은 이들을 적절히 이용하여 찬위에 성공할 수 있었다. 왕망은 諷이라는 정치적 술수를 사용하여 자신을 표면에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의사를 심복들로 하여금 이루도록 하였는데, 왕망의 심복들은 개개인이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고위 관료 직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왕망의 사상이 실현될 수 있도록 태황태후를 설득하거나 위협했고, 때로는 反 왕망파 관료들을 들추어내어 파면하는 일도 있었다. 이들은 왕망의 찬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왕망의 집권기간 동안 이루어졌던 정치적 개혁에도 일익을 담당하는 등 혁명적 세력으로서의 성격을 보인다. 이러한 왕망집단의 형성은 바로 정치적 조직력을 소유할 수 있었던 왕망 자신의 정치적 성장에 의한 것이었고, 그 계기는 왕망의 보정 직 계승에 있었던 것이다.Ⅲ. 왕망의 개혁과 문제점 : 대내정책1. 관제와 지명의 제정왕망의 길지 않은 통치기간 중에서 화폐개혁 못지않게 실패한 것이 官制개혁이다. 그는 즉위 원년에 중앙정부를 구성하고 여러 기관을 설치하고 기존의 지명을 대거 변경하였다. 왕망의 관제개혁의 특징은 첫째, 관작을 받은 자가 너무 많았고, 둘째, 옛 명칭을 많이 사용하였다. 셋째, 관직과 지명의 개명이 지나치게 번잡하다. 심지어 郡명이 5회나 변경되었다가 본래의 명칭으로 복원된 것도 있었고, 『한서』「지리지」에 보이는 縣명은 거의가 개명되어 많은 혼란이 있었다. 따라서 사민은 변경된 대대적인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왕망의 화폐개혁은 매회 약간씩 목적은 다르지만 일관된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고액의 명목화폐 발행에 의한 화폐 팽창책을 통해 재정확보를 시도한 것이다. 1차 개혁은 왕망의 周制 구현의지와 함께 전한말의 재정악화와 五銖錢의 盜鑄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2차 개혁은 왕망이 찬위한 원년에 단행되었는데, 오수전 등을 폐지하고 별도로 小錢을 주조해 이전의 大錢과 함께 통용시켰다. 이것은 화폐개혁을 통해 新왕조의 성립을 천하에 알리고 화폐에서 劉漢王朝의 흔적을 없애려는 의례적 조치에 불과한 것으로, 민중의 오수전 선호, 잦은 화폐개혁에 대한 불신 등으로 실패했다. 3차 개혁은 匈奴와의 전쟁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단행된 것으로 발행한 화폐의 종류가 많고, 화폐의 교환비율이 복잡하여 화폐유통에서 혼란을 초래했다. 4ㆍ5차 개혁은 과거의 화폐개혁이 잘못되었다는 것과 오수전의 위력을 인식했기 때문에 형태상으로 과거의 오수전으로 회귀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왕망의 화폐 정책이 실패한 원인은 첫째, 고액화폐를 발행함으로써 화폐 유통질서를 악화시키고 인플레와 화폐신용절하를 조장했고, 둘째, 화폐개혁은 중농억상 정책의 명목 하에 진행된 것으로, 상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침해받았기 때문에 이에 저항했고 그들은 화폐개혁으로 받은 피해를 보상받기 위해서라도 盜鑄를 감행했다. 셋째는 빈번한 화폐개혁과 신구화폐의 교체 시 구폐를 폐기하여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구화폐의 대량 보유자에 치명적 손실을 끼쳤고, 넷째 황폐정책의 집행 시 상인 출신을 기용했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악영향을 끼친 화폐개혁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집행과정에서 각종 폐단을 야기했다. 이러한 다양한 이유에서 실패한 왕망의 화폐개혁은 왕망정권의 명망을 가속화시킨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3. 토지·노비제도의 개혁왕망은 찬위 원년(A.D 9)에 토지제도와 노비제도에 일대 대개혁을 단행했다. 그 목적은 토지의 겸병억제와 농민의 노예전락 방지 그리고 이를 통한 의 매매가 계속된다면, 왕전을 지급받은 농민들이 파산해 재차 노비로 전락하고 대토지소유가 번질 가능성이 있으므로 왕전제와 사속제는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사속제에는 노비의 자손에 대한 신분규정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해방될 수 없었고, 사실상 노비제의 합법성을 인정한 것이다. 노비제가 불법이 아닌 상황 하에서, 파산농민이 노비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으므로 노비정책은 시행 3년 만에 폐지되었다.4. 五均과 六管制度오균 제도는 중요도시에 五均司市師라는 기구를 설치한 다음, 상공업을 국가기관이 철저히 관리하는 제도로, 대상인과 중소상인ㆍ농민들에게 고리로 자금을 빌려주고 착취하는 고리대 업자를 억압하여 농민 및 중소상공업자를 보호하고자 한 것이다. 이 제도는 武帝가 실시한 平準法을 발전시킨 것이다. 육관제도는 정부가 소금, 철, 술, 화폐 주조 등을 국가가 전담함으로서 국유독점체제를 완성하는 제도를 말하는 것으로 이 조치는 왕망이 직접 창출한 제도가 아니라, 과거의 방법과 경험을 흡수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이제도는 대상인의 폭리를 금지하고 빈약한 백성들의 파산을 막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었으므로 소농민ㆍ소상인의 보호를 의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왕전제와 동일한 지향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오균과 육관제도는 왕전ㆍ사속제 보다 저항이 적었기 때문에 10여 년 동안 시행되어 富商ㆍ지주들의 농단을 막음과 동시에 물가안정ㆍ재정획득의 효과를 얻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도 폐단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균ㆍ육관을 감독하기 위해 洛陽ㆍ臨淄등의 부상을 군마다 명사로 임명했는데, 이들이 오히려 폐단을 야기했다. 또 육관령 재추진시의 盜賊출현은 이 제도가 왕망정권 후기에 농민반란의 원인이었음을 보여준다.Ⅳ. 왕망의 개혁과 문제점 : 대외정책왕망이 大司馬로 있을 때 한제국과 匈奴와의 관계는 비교적 원만하였으나 왕망은 즉위 후 천하질서를 재편하고, 이민족에게 新왕조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서 소수민족의 왕에게 에게 漢印을 회수하고 新印을 주었다. 이 때 왕망은 이들을 왕 대다.
[중간고사]1. 다음중 수정란의 발달과정이 순서에 맞는 것은 ?① 상실배-배반포기-2세포기-8세포기② 2세포기-8세포기-배반포기-상실배③ 2세포기-8세포기-상실배-배반포기④ 상실배-2세포기-8세포기-배반포기2. 건강한 정상 남성의 경우 정자를 만드는데 소요되는 시일은 ?① 약 7~10일② 약 64~70일③ 약 10~15일④ 시도 때도 없이 바로 만들어짐3. 시험관아기에서 수정 후 보편적인 배아이식의 시기는 ?① 1일배양 후② 3일배양 후③ 6일배양 후④ 10일배양 후 10일배양 후 10일배양 후 10일배양 후4. 다음 중 설명이 틀린 것은 ?① 처녀막은 성교네 의하지 않고 운동이나 탐폰등에 의해 저절로 파열되기도 한다② 자위행위는 청소년기에 시작 된다③ 코가 큰 남자와 음경의 크기는 관련이 없다④ 대머리와 정력과는 관련성이 없다5. 자궁의 설명중에서 틀린 것은 ?①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이 일어나는 곳② 처녀인 경우 길이 7~8 cm③ 두께 2~3 cm④ 자궁체부와 자궁경부로 구성6. 성의역사중 고대 그리스의 특징이 아닌 것은 ?① 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임② 자위행위는 오난이즘으로 규정③ 아름다운 누드조각, 예술품의 탄생④ Lesbianism등장7. 임신시기에 따른 신체의 변화 및 태아의 성장과정에 대한 설명중 틀린 것은 ?① 3개월-태아의 손톱과 발톱이 형성되고, 외음부가 분화되어 성 감별이 가능하게 됨② 4개월-임신 16주가 되면 태아 두둔의 길이가 12cm, 태아의 체중은 100g 정도가 됨③ 5개월-대부분의 임산부는 이시기에 태동을 느낄 수 있게 됨④ 6개월-피하 지방조직이 축적되어 살이 찌며 얼굴의 주름이 사라짐8. 18세기 말에서 19세기의 특징이 아닌 것은 ?① 산업혁명과 빅토리아의 시대② 성의 엄격한 억제와 논란의 시대③ 남성콘돔출현④ 나체화 예술등장9. 아기는 어디에서 와 ? 라는 질문에 엄마 뱃속에서 자란다고 말해줘야 하는 연령은 ?① 2~3세② 3~4세③ 4~5세④ 5~6세10. 다음중 여성의 성반응주기 중 맞는 것은 ?① 성흥분기-유방, 음순의 부풀어 오름② 평탄기-질점액의 분비량이 많아짐③ 오르가즘기-짧고 폭발적이며 15초간 계속됨④ 쇠퇴기-질이 부풀어 오름11. 총자궁외 임신의 90%를 차지하고 총임신의 1/80을 차지하는 이 임신은 무엇 인가 ?① 자궁관임신② 복강임신③ 난소임신④ 자궁목부임신12. 묽은 알카리성 액체로 정액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액은 ?① 치구② 전립선액③ 쿠퍼선액④ 정낭액13. 여자를 유혹하여 밀통하는 방법과 관능을 자극하는 기법을 다루어 포르노의 고전이라 부르는 오이디푸스가 지은 이책의 이름은 무엇인가 ?① 성의 방법과 관능② 사랑의 마술③ 카마스투라④ 사랑의 예술14. 고환분화를 결정하는 또 다른 물질로써 Y염섹체의 유전자의 산물인 이것은 무엇인가 ?① 성염색질② XY염색체③ TFM④ 조직적합성 H-Y항원15. 임신기간중 유산하기 쉬운 기간은 언제인가 ?① 임신 12주 이전② 임신 12~16주 이전③ 임신 16~18주 이전④ 임신 18~20주 이전16. 태아의 출생전 발생시기 3단계중 전배자기의 시기는 ?① 수정후 2주까지② 수정후 3주까지③ 수정후 4주까지④ 수정후 5주까지17. 난소의 설명중에서 틀린 것은 ?① 약 10 cm② 자궁양쪽에 위치③ 여성호르몬 생산④ 일생동안 약 400여개의 난자만 배란됨18. 태아가 여성일 때 핵내의 강한 염색성을 보이는 물질을 보유한 세포가 많은데 이를 무엇이라 하는가 ?① 성염색질② XY염색체③ TFM④ TDF19. 남성으로 분화된 태아기의 고환에서 분비되는 두 호르몬은 무엇 인가 ?① 안드로겐-테스토스테론② 테스토스테론-뮬러관억제인자③ GnRH-테스토스테론④ 테스토스테론-인히빈20. 다음중 법적으로 허용하는 낙태의 사유로 맞는 것은 ?① 미혼여성이기 때문② 경제적 어려움③ 임신중 약물사용④ 자녀 나이 터울 조절 위해[기말고사]1. 동성애나 동성애자에 대한 비이성적인 막연한 두려움, 억압, 그리고 혐오를 가지고 대하는 것을 무엇이라 하는가?① 호모섹스자② 호모포비아③ 호모리젝터④ 호모호러2. 여성은 무증상인 경우가 많고 질분비 많아지며 배뇨시 통증이 있고 최근 20년간 발병율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성병은 무엇인가 ?① 매독② 임질③ 연성하감④ 허피스3. 다음중 대표적인 성병예방법이 아닌 것은 ?① 성병에 대한 지식을 습득한다② 자주성기를 관찰하는 습관을 기른다③ 콘돔은 되도록 2개를 착용한다④ 신중히 검진하고 치료해야한다4. 격막의 설명중 틀린 것은 ?① 한번 사용한 것은 반복 사용 금지② 생리기간에는 사용할 수 없음③ 성교후 최소 6시간 이후에 빼내야 함④ 값이 싸고 부작용이 없음5. 자연피임법중 월경주기가 좀 불규칙하거나 감기가 걸렸을때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① 경부점액법② 기초체온법③ 리듬조절법④ 월경주기법6. 다음중 대표적인 응급피임법이 아닌 것은 ?① 복합성 피임약② 질세정법③ 자궁내삽입장치④ 유산제7. 남성이나 여성의 신체를 지니고 태어났지만 자신이 반대 성의 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는 무엇 인가 ?① 게이② 호모③ 트랜스④ 트랙퀸8. 남성에게서 발생하는 비임균성 요도염의 절반은 이 세균에 의해 일어난다. 이 세균의 이름은 ?① 듀크레이② LGV③ 트레포네마④ 클라미디아9. 다음중 난관결찰법에 대한 설명중 맞지 않는 것은 ?① 수술후 복원수술의 성공률이 낮음② 생리가 불규칙 할 수 있음③ 시술부위에 염증이 생기는 경우도 있음④ 자궁외임신의 가능성 있음10. 다음중 강간의 정의중 올바른 것은 ?① 야만성과 자기만족이 결합된 개념② 공격성이 강한 개념③ 음란성이 강한 개념④ 공격성과 음란성이 결합된 복합적 개념11. 자궁내삽입장치(loop)의 설명 중 틀린 것은 ?① 구리루프는 영구적임② 월경때 빠질 수 있음③ 불규칙한 하혈이 있을 수 있음④ 자궁외 임신 가능성 있음12. 동일시에서 생물학적 성의 차이에 의미를 갖게 되는 시기는?
- 졸업 논문 -르네상스 문화 예술에 대한 메디치가문의 역할지도교수 :학 과 :학 번 :이 름 :-目 次-Ⅰ. 서 론Ⅱ. 로렌조 데 메디치의 등장1. 신의 축복을 받은 로렌조 데 메디치2. 예술가 로렌조 데 메디치3. 후원자로서의 로렌조 데 메디치4. 수집가로서의 로렌조 데 메디치5. 정치가로서의 로렌조 데 메디치6. 사업가로서의 로렌조 데 메디치7. 메디치의 위기의 시작과 로렌조의 죽음Ⅲ. 예술의 도시 피렌체1. 피렌체의 경제2. 피렌체의 정치3. 피렌체예술의 탄생4. 피렌체의 학문과 오락5. 예술가로서의 피렌체인의 기질6. 피렌체와 메디치 가문7. 메디치와 피렌체의 유산Ⅳ. 메디치가와 르네상스 예술1. 코시모 데 메디치와 르네상스 예술2. 로렌조 데 메디치와 르네상스 예술3. 레오 10세와 르네상스 예술Ⅴ. 예술후원의 가치와 현실의 이익1. 코시모 데 메디치 후원목적2. 피에로와 로렌조 데 메디치의 후원목적3. 레오 10세의 후원목적 : 라파엘로의 Ⅵ. 결론Ⅶ. 참고문헌Ⅰ. 서 론대학교 교과과정에서 처음 르네상스라는 단어를 접하게 되었던 필자에게 르네상스는 부활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라 알게 되었다. 과연 어떤 종류의 부활이란 말인가 하는 궁금증을 가진 필자는 암흑시대라고도 불리던 중세의 종교와 신분적 억압에서 벗어나 보고 싶고,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의 분출. 바로 그것이 나중에 후세인들이 르네상스라고 부르게 된 정신운동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교과서나 대중매체를 통한다거나 혹은 직접 방문한다던가 하는 방법으로 현대인들은 과거 그 시대의 찬란한 문명과 접할 수 있다. 르네상스라는 시대의 도약의 문을 연 이탈리아의 수많은 도시 중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남겨진 곳은 천재들의 도시이자 꽃의 도시라 불리던 피렌체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피렌체가 중심지로서 나설 수 있었을까? 그 까닭을 정확하게 논하고자 한다면 우선 근대의 목전 15세기에 들어서자 피렌체에는 천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선 자들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시를 바이올린 음의 배경으로 낭송하는 것을 즐겼으며 축제의 무도회 곡을 작사하기도 했다. 로렌조의 시는 놀랄 만큼 열정적이고 다양했다 평가되는데 현재까지 계속 출판되고 있으며 기쁨과 사랑과 영혼의 내용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 중 그의 대표적 작품인 바쿠스의 노래라는 이 작품은 대중적일뿐 아니라 르네상스 전성기의 피렌체를 충실하게 반영한듯한 느낌이다. 바쿠스의 노래의 앞 구절은 이러하다.“젊음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젊음이 곧 끝나고 사라질 것이니 행복하고 싶으면 그 순간을 붙잡아라. 내일은 안 올 수도 있으니”그밖에 그의 시구는 종교적인 정서나 육체의 욕망에 따라 때로는 슬프기도 하고 때로는 기운이나 희망이 넘치기도 했으며 종종 환멸에 가득 차기도 했다. 그는 종교에 헌신적인 시를 쓰기도 했지만 때로는 신성 모독적인 풍자시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시에는 토스카나의 아름다운 경치와 희로애락에 대한 감정이 생생하고 강렬하게 표현되었던 걸로 보아 자국에 대한 애착이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자국 애착을 증명하는 요소는 한 가지가 더 있다. 학문을 중시하던 로렌조는 그리스 철학자와 라틴 시인들에 대한 학자들의 열정에는 공감했지만 이탈리아어를 경멸하고 근대의 토스카나 시인들의 업적을 무시하는 인문주의자들에게는 관대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시를 쓸 때 라틴어보다는 단테나 보카치오를 본보기로 삼고자 했으며 어렸을 때 말하기 위해 배우고 쓰던 자국의 언어를 선호했다. 토스카나 지방에 헌신적이었던 그는 시인들이 이탈리아어의 완벽한 사용법을 위해 노력하고 단테가 상류층이 아닌 하류층의 위치한 자들의 시인에 불과하다는 니콜로 니콜리의 말을 듣고 격분한 적도 있다는 걸로 보아 로렌조 데 메디치가 얼마나 자국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에 대해 알 수 있다.3. 후원자로서의 로렌조 데 메디치1) 학문적 후원현대까지 출판되는 작품들을 남길 만큼 뛰어난 문인이었던 로렌조 데 메디치는 당연 학문적 지성을 중시하고 그리스어 또한 유년시절의 교육으로 인해 능통했도자였지만 공식적 지위를 가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늘에서 조정하는 실권자였으나 겉으로는 공식적인 기관을 통한 것처럼 보여야했고 또 자유가 지속되고 있는 것처럼 보여야 했기 때문에 비밀리에 이루어야 하는 것이 많았다. 이러한 것들 때문에 그는 인문학자이자 후원자이자 시인과도 같은 긍정적 면모뿐 아닌 그늘에서 조정하는 면과도 같은 부정적 면모 또한 지니게 되었다. 그 때문인지 많은 역사가들은 그를 조부나 부친보다 파악하기 어려운 인물이라 평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들과는 다른 핸디캡이 존재하고 있었다. 로렌조 데 메디치는 자신의 조부와 아버지처럼 시뇨리아가 된 적이 없었고 공식적으로는 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앞서 밝혔듯 그는 약관의 나이에 집안이 장이 되었고 시뇨리아는 45세 이상이어야 했으니 43세의 나이에 사망하기까지 22년 동안 실권을 쥐고 있었던 그의 권한은 비공식적이어야 한다는 제약이 따랐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시뇨리아의 자리를 손에 넣지는 못했지만 정계와 재계의 많은 거물들과 다양한 인맥을 형성시키면서 비공식적 시뇨리아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6. 사업가로서의 로렌조 데 메디치하지만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로렌조가 아들에게 이러한 글을 보낸 적이 있다.그 시기의 회계장부에서 보다시피 1434년부터 1471년까지 우리는 많은 돈을 썼다. 666,775fl 이라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돈이 건축과 자선, 세금 등으로 지출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중 일부만이라도 자기 주머니에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하겠지만 내 생각에는 그 돈이 국가를 이리 빛나게 하였으니 잘 쓴 것 같다, 나는 만족한다.그가 쓴 편지내용대로 로렌조는 피렌체에서는 뛰어난 정치가이자 후원자이며 수집가이고 시인이었기에 피렌체를 예술의 메카로 만들었다. 하지만 메디치 은행은 쇠퇴 일로였다. 누구에게나 단점이 존재하듯 로렌조는 능력 있는 정치가이자 예술의 후원자였지만 사업가는 아니었다. 그는 지점 경영자에게 너무 큰 권한을 주었고 총지배인에게 지나치게 의존했기에한 공화정이 초기에 설립되어 있었고 그에 자부심 또한 대단했다. 하지만 의장이던 콜루초 살루타티(1331~1406)의 사망 후 이러한 공화정의 이상이 퇴색되고 베네치아로 망명 중이던 코시모 데 메디치가 귀환하면서 공화정의 그의 손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의 배후에서 조정하는 역할을 맡았고 15세기에 들어서면서 공화정의 의장이란 무의미한 것으로 변질되게 되었으며 코시모와 피에로를 넘어 로렌조의 등장으로 의해 피렌체는 메디치 왕정체제를 이룩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메디치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네트워크가 토스카나와 나폴리를 비롯한 유럽전체에 퍼지면서 피렌체의 정치는 성숙되어져가며 예술의 황금기가 시작된다.3. 피렌체예술의 탄생르네상스 예술은 정치적 혼란 속에서 탄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시모 데 메디치의 경우 그는 이탈리아 안의 열강들이 서로 싸우는 시대에 세력균형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고자 했다. 그에 뜻은 그러했다고 하나 르네상스를 포함한 모든 변화의 바람은 격동기에 태어나는 법이다. 피렌체를 예로 들면 격동기는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전반으로 세상이 차분해지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후반부터였고 15세기 중엽부터 반세기 동안은 확실히 정치적 성숙에 따른 사회 안정을 만끽한 시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르네상스 역시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결국 내분이 끊어지지 않던 피렌체가 겨우 국내 화합을 이룩한 1434년은 메디치가의 코시모가 참주정을 확립한 해이다. 이 참주정이 기능을 발휘한 60년 동안 즉 15세기 후반에 피렌체의 르네상스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 당시 활약한 피렌체 출신의 예술가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기도 지겨울 만큼 많은 이들이 배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언덕위에 올라서면 한눈에 내려다보일 만큼 좁은 피렌체 시내에서 한 세기에 한명 태어나기도 어려운 천재들이 서로 기량을 뽐내며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예술의 축제가 60년이나 이어지게 된 것이다. 다. 베네치아의 경우는 피렌체파 예술가들이 성공을 거둔 뒤에야 거두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전문화가 이루어지면서 효율성을 중시하게 되었다. 하지만 초기의 예술의 형태는 전문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마련이다. 새로운 발상은 반드시 기존의 테두리에서 벗어났을 때 태어나는 법이니 말이다. 비판 정신이 강한 피렌체 사람인만큼 기존의 테두리를 제거해버리는 것에 대한 저항감도 다른 지방의 이탈리아인보다 훨씬 약했을 것이다. 메디치 가문은 이러한 기질 속에서 도약하기 시작한 것이다.6. 피렌체와 메디치 가문이러한 피렌체인들이 쌓아놓은 모든 것들과 함께 메디치가문은 성장했다. 코시모와 피에로를 넘어가면서 피렌체는 완벽하게 메디치가의 지배 아래 놓아지게 되었고, 로렌조 데 메디치가 등장하면서 피렌체는 빛나게 되었다. 보통 한 개인의 역량에만 의지하는 국가의 생명은 짧은 법이다. 재능이 아무리 뛰어난다 한들 그 사람이 죽으면 만사가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선임 지도자의 재능이 승계되는 예는 대단히 드물다. 허나 로렌조 데 메디치는 그 드문 경우에 속한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피렌체는 그의 지배 아래서 일찍이 없었던 광채가 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피렌체인들이 아름다움과 화려함을 사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그들이 기대한 것보다 훨씬 멋진 형태로 그들에게 안겼다. 이것이 최대의 효과를 가져 오게 된 것은 로렌조 역시 같은 것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일 마니피코라는 이름 그대로 그 역시나 화려함을 누구보다 즐기고 있었고 피렌체인들은 로렌조 데 메디치 속에 자신들과 동질의 피가 흐르는 것을 느끼고 그것을 최고의 감각과 최대한의 화려함으로 제공해 주는 로렌조를 자랑으로 생각하고 사랑했던 것이다. 베로키오, 폴라이올로 공방 등은 외국에까지 알려지게 되었고 필리포리피, 보티첼리, 기를란다이오는 건필을 마음껏 휘둘렀다. 로렌조는 볼로냐와 파도바 두 유명 대학에 대항하여 피사 대학에 유능한 교수를 끌어 모았다. 자신의 손으로 아예 대학 하나의한다.
- 졸업 논문 -유럽의 마녀사냥에 대한 고찰- 시기와 유형을 중심으로 -지도교수 :학 과 :학 번 :이 름 :-目 次-Ⅰ. 서 론Ⅱ. 마녀사냥의 원인과 배경1. 마법에 대한 믿음의 전통2. 법체계의 변화3. 사회적 변화Ⅲ. 마녀재판의 시작과 전개1. 체포와 수사2. 소송절차3. 고문4. 형량과 집행Ⅳ. 시대적 유형1. 1300년 ~ 1330년2. 1330년 ~ 1375년3. 1375년 ~ 1435년4. 1435년 ~ 1580년5. 1580년 ~ 1650년Ⅴ. 지리적 유형1. 서부 및 중서부 유럽2. 영국과 그 외 식민지3. 스칸디나비아반도4. 중동부유럽과 동부유럽5. 남부유럽Ⅵ. 결론Ⅶ. 참고문헌Ⅰ. 서 론주술이나 마술을 사용하는 '마녀'의 역사는 인류와 함께 매우 오래되었으며, 또한 어느 문화권에서나 볼 수 있다. 우리는 현재에도 동화속이나 조각이나 그림을 통해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데 『맥베스』에서 나오는 주인공들이나 헨젤과 그레텔에서 나오는 인물들, 바로 그것이 마녀인 것이다. 제일 먼저 ‘마녀’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가 생각이 난다. 어려서 둘리의 만화를 보던 중 둘리가 타임머신으로 중세시대 어느 어두운 마을로 뚝 떨어진다. 저 멀리서 동네 사람들과 신부 복장을 한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어디론가 달려갔는데, 이에 둘리도 따라가 보니 마을의 외딴 곳에서 사는 어느 노파를 마녀라 하면서 죽이라고 소리치는 장면이다. 아마 다들 기억하리라 믿는다. 우리는 흔히 마녀에 대해 ‘검은색 뾰족 모자를 쓰고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는 할망구’라고 생각하기 쉽다. 남성 보다는 여성의 비중이 더 크고, 선한 모습보다는 악한모습의 것으로 말이다. 정말 ‘마녀’라는 존재가 실재 했었을까? 서양의 역사 속에서는 마녀라는 것이 처음부터 재판에 붙여지고 가혹한 형벌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마녀라는 것은 주술을 행하는 여자를 말하는 정도였다. 그들은 단지 격리되어 있었고 접촉하기 어려운 외부인들로 간주되었기에 유해하다기보다는 민중의 실생활 속에서 득이 되는 경우가 오히려 많은 구분은 마법에 대한 관념과 태도의 계층적인 차이를 설명하는데 유용할 수 있기 때문에 제시한 것이다. 또한 당시의 마법에 대한 믿음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절대로 빠져서는 안 될 부분이 교회 즉 기독교라는 종교와 성직자들의 태도일 것이다. 실제로 13세기가 되기 전까지 기독교의 공식적인 입장은 마법의 실재에 대하여 부정하였다. 즉 사탄은 존재하지만 그의 힘을 빌어 마법을 행한다는 것은 거짓이며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13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악마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눈에 띄게 증가하였고 그 주제에 대한 이론적인 정교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마법을 행한다는 사람들에 대한교회의 태도도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4세기에 들어서면 서부터 교회도 마법의 실재를 믿게 되었고 더욱더 중요하게는 마법을 행하는 사람을 악마의 동반자로, 즉 사악한 이교도로 간주하게 되었던 것이다.이렇듯 사회의 거의 모든 구성원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마법의 실재를 믿거나 그것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러한 사실의 전제 없이는 그토록 열정적으로, 그리고 그토록 오랫동안 마녀사냥이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이다. 특히 마녀를 재판하고 처형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계층이 마법의 실재를 믿었다는 사실은 강조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어떤 학자들의 주장처럼 사회의 지배계층이 자신들은 마법을 전혀 믿지 않으면서 단지 사회통제를 위하여 대중들에게 널리 퍼져있는 마법에 대한 믿음과 관념을 이용한 것이라는 식의 설명은 전혀 타당한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현대의 시각으로 볼 때 미신적이고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마법이 그 당시로서는 사람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질 만큼 ‘합리적’이고 그럴듯해 보이는 것이었다는 사실도 아울러 기억해야 할 것이다.2. 법체계의 변화마녀 사냥이 발생 할 수 있는 원인 중 또 하나 필수적인 것으로서는 법체계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우선 중세 말에는 마법과 마녀에 대한 관념이 변화한 기독교를 중심으로 무성해진 마녀에 다. 즉 이제 마녀는 악마와 결탁하여 남자의 경우엔 영혼을, 여자의 경우엔 육체를 바치고 악마로부터 사악한 힘을 전수 받는 것이다. 마술과 마술을 행하는 마녀라는 개념에 악마라는 요소를 가미하는 것은 10세기까지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 같은 변화를 성공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1484년에 제정한 일련의 조서로부터 비롯되게 된다. 1486년에 발간된 『마녀의 망치(Malleus Maleficarum)』라는 책으로써 이 책은 교황의 인가 하에 유럽 전역으로 펴지게 되면서 마녀사냥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게 되어, 마녀재판은 신학과 교리에 정통한 이단 심판과과 성직자에 의해 반사회적인 주제로, 악마와 결탁한 공동의 적으로 단죄하는 과정이 되었다. 따라서 이들 재판의 진행자들은 궁극적으로 피고를 마녀로 몰아 처벌할 수 있는 결정적 근거인 ”악마와 결탁했다“는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다양하고도 혹독한 수단들을 동원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마녀는 점차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절대적 확신을 가지게 되면서 마녀의 본질을 논하는 허다한 서적이 간행되고, 저명한 법률가가 악마에게 혼을 파는 계약도 일어나고 있었다. 이로써 마녀의 실재에 대한 믿음은 말할 것도 없고 마녀를 적발, 추궁하는 것은 관리와 주민의 신성한 의무이기조차 하였다. 이것이 전에 없던 마녀의 박해시대가 열린 큰 배경이 되었고, 마녀를 처벌하는 재판이 강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16세기 중엽부터 17세기 말 사이에 극성을 부렸던 마녀재판, 그러면 이글에서 마녀재판이 처음 어떻게 시작하였고 어떠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는지 알아보자.1. 체포와 수사마녀는 먼저 풍문에 의해 적발되었다. 즉 재판의 초기단계는 우선 피고가 누군가를 저주하는 따위의 마술을 썼고, 그 마술에 의해 누군가가 마법에 걸렸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또한 피고의 자백이외에도 피고를 마녀로 단죄할 수 있는 증거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가장 보편적으로, 악마가 변신했다고 믿어진 작은 동물을 데리고 다녔다거나, 혹은 다른 연구 방법이 설정되어야 한다.첫째로는, 유럽 전역에 걸쳐 시대별로 발생한 마녀 사냥에 대한 일반적인 패턴이 설정되어야 한다. 이 패턴을 설정함으로 약 삼백년 동안 발생한 마녀 사냥의 강도가 왜 기복이 있었는지 원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여러 국가와 지역의 마녀 재판의 역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특정 지역에서의 마녀 사냥의 강도가 시기적으로 어떻게 변화했는지도 고려되어야 한다. 따라서 나는 마녀 사냥의 시대적 유형을 크게 4가지로 나누어 보고자 한다.1. 1300년 ~ 1330년이 시기는 일종의 마녀 사냥의 개념 정립시기라고도 할 수 있는 시기로 정치적 마법사에 대한 재판이 주를 이루었다.2. 1330년 ~ 1375년이 시기에서는 상당히 많은 마법 관련 재판이 있었지만 악마 숭배에 대한 혐의는 없었으므로 일반적인 마녀술 재판이라고는 볼 수 없는 시기이다.3. 1375년 ~ 1435년1375년부터 1435년의 이 시기에는 재판이 증가하고,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악마 숭배의 혐의가 보편화되었다. 이는 심문에 의한 재판의 도입으로 촉진되었고, 이러한 발전은 마법에 대한 혐의에 악마 숭배 혐의가 점진적으로 결합된 것을 보여주었다.4. 1435년 ~ 1580년이 시기에는 전반적으로 소강상태를 유지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실제로 감소하기도 하였다. 당시 사람도 이러한 감소를 감지했는데 이것은 마르틴 루터의 이야기를 들으면 알 수 있었다. 1516년 그의 어린 시절에 많은 마녀와 마법사가 있었지만, 그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더 듣지 못한다고 술회했던 것이다. 일부 개별적이고 소규모의 사냥이 상당히 증가하기도 하여, 마녀술에 관한 법이 제정되고, 지식인들이 마녀술에 대한 의구심과 법적 제도의 불확실성을 극복하기도 하였지만 전반적으로 잠잠했던 시기이다.5. 1580년 ~ 1650년이 시기는 15세기와 16세기 초의 상당히 제한되고 소강된 상태를 지나 광범위하고 강도가 높은 사냥이 일어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1435년을 기점으로, 유럽의 마녀술을 다고 볼 수도 있다. 이 지역은 유럽에서 종교적으로 가장 혼란스러운 곳이었고, 이단의 온상이며,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여러 개의 종파를 갖고 있고, 종교적으로 분열된 지역이 많았다. 이렇게 상반되는 종교를 믿는 자들이 가까이 살게 됨으로써 서로 상대방을 악마의 종으로 간주하게 되었고, 종교적 대립이 격렬하게 일어나면서 마녀 사냥의 기반이 되었던 불안감을 조성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냥 초기에는 프랑스의 동부 지방, 16세기 말에는 독일과 프랑스 남부, 16세기 말과 17세기에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곳에서 마녀 사냥이 활발히 일어났다.1) 신성로마제국마녀 사냥이 이 지역에 집중된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으로 신성 로마제국이 매우 느슨한 연방으로 제국이 힘이 미약했기 때문이다. 제국의 정치적 세력의 다양성과 분권화는 사법적인 권한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비교적 작은 정치 단위에 까지 사법적인 자치권을 주게 되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로 독일 남서부의 작은 가톨릭 영지였던 엘반겐 주교구는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았으며, 항소하는 것을 금지했는데, 엘반겐이 독일 역사상 가장 강도 높은 마녀사냥이 일어난 지역이었다. 실제로 1611년부터 1618년, 이 7년 사이에 무려 400명을 처형했다. 마녀 재판의 분포도를 보면, 사법 단위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마녀 사냥의 강도가 작고, 크기가 작으면 그 강도가 커진다는 것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2) 스위스 연방스위스 연방은 종교적, 문화적, 그리고 언어적으로 다양했고, 각 주는 법적으로 자치를 누렸다. 그리하여 마녀 사냥의 유형은 다양했고, 마녀 사냥이 매우 극심했다. 이와 같은 예들로 보아, 작은 지역일수록 마녀술에 대한 재판 결과 더 많은 희생자가 나오고 마녀 사냥이 더 극심했음을 알 수 있다.3) 네덜란드 연방이러한 모델을 따르지 않은 유일한 지역은 네덜란드의 연방 주들인데, 이 지역은 유럽에서 마녀 재판을 종결시킨 최초의 지역이었다. 이는 아마 이 지역이 유럽의 다른 지역보다 도시화다.
- 졸업 논문 -서양인의 눈을 통해 본 동양?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중심으로 -지도교수 :학 과 :학 번 :이 름 :- 目 次 -Ⅰ. 서 론Ⅱ.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1. 마르코 폴로2. 마르코 폴로의 여행 경로3. 이방인의 시각으로 본 동양4. 황금의 나라 일본5. 『동방견문록』을 통해 본 원나라Ⅲ. 동시대의 여행자들1. 이븐바투타2. 최부3. 야율초재Ⅳ. 결 론Ⅴ. 참고문헌Ⅰ. 서 론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하지만 동방견문록이라는 책 제목은 알지만 그 내용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만큼 우리에게 동방견문록은 가까우면서도 먼 책이다. 동방견문록은 마르크 폴로가 동방을 여행하면서 적은 기행문 형식의 책이다. 이 책의 원제목은 『Description of the World』으로 세계의 서술이라고 한다. 원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책의 내용은 동방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요즘은 교통이 발달해서 세계 어느 나라든 쉽게 갈 수 있지만 비행기는커녕 제대로 된 항해 기술도 없었던 그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마르코 폴로의 여행은 목숨을 건 대단한 여정이었다. 본고에서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중심으로 서양인의 눈을 통해서 본 동양은 어떠하며, 마르크 폴로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다른 여행자들의 동양에 대한 생각과 이부의 『표해록』과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비교해서 알아보고자 한다.Ⅱ.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1. 마르코 폴로마르코 폴로는 1254년 베니스의 달마티아 쿠르촐라 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의 부친인 니콜로는 당시 어린 마르코를 놔두고 1260년경 친동생 마페오와 함께 상업적인 목적으로 해외로 떠났었다고 한다. 부자가 상봉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15년 뒤인 1269년, 폴로 형제가 쿠빌라이 카안 의 특명을 받고 지중해 연안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이 15년간 마르코의 공백에 대해서는 현재 정확한 사료적 증거는 실증하고 있지 않고 있지만, 부친과 숙부가 모두 해외에 나 수 있다. 그가 사망하기 직전에 작성된 유언장에는 도나타(Donata) 라는 이름의 부인과 판티나(Fantina), 벨렐라(Bellela), 모레타(Moreta) 라는 세 딸이 등장한다. 그가 죽기 직전인 1324년 1월 8일 공증인이 참가한 가운데 만들어진 이 유언장에 의하면 그는 결코 ‘백만장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유산 총액은 영국 파운드로 환산 시 불가 3,000파운드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망 시 그가 소지했던 물품의 목록을 기록한 13667의 한 사본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데, 이에 의하면 상당량의 의복, 덮개, 금실로 짠 비단, 귀중품 등이 있어 자신이 여러 차례 책에서 기록한 것을 연상케 하며, 그가 떠날 때 쿠빌라이가 주었다는 금패와 불교도들의 염주, 몽골 기병들이 착용하던 은제벨트, 귀한 보석과 금으로 장식된 여성용 모자 등도 기재되어 있어, 그가 동방에서 갖고 온 물건들 중의 일부를 끝까지 소지했음을 알 수 있다.1324년 1월 8일 유언장 작성을 마친 이 여행가는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생전의 소망대로 베니스시내에 있는 산 로렌조 (San Lorenzo) 교회에 있던 부친의 무덤 옆에 묻힌 것으로 추정되지만, 후일 교회가 개축되면서 그의 무덤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2. 마르코 폴로의 여행 경로베네치아 상인 니콜로 폴로와 마페오 폴로 형제는, 육로를 통해 몽골 제국의 영토를 가로질러 중국까지 여행했다. 1260년 콘스탄티노플을 출발하여 1269년 베네치아로 돌아온 그들의 여정은 이러했다. 지중해를 건넌 뒤 흑해를 동쪽으로 항해하여 킵차크한국(남부 러시아의 몽골 왕조)에 도착해 1년 간 머무른 뒤, 다시 동쪽으로 출발해 부하라(오늘날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주의 주도)에 도착해 3년을 머물렀고, 쿠빌라이칸의 조정을 방문하고 육로를 거쳐 3년 만에 지중해 동부 연안 항구 도시 아크레에 도착해 지중해를 건너 베네치아로 돌아왔다.폴로 형제는 1271년 다시 중국을 향해 출발했다. 이번에는 니콜로 폴로의 아니라 세계 그 자체였다.그가 고향인 베니스사람들에게 자신의 견문을 이야기 할 때, 걸핏하면 ‘백만’ 을 운운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에게 반 조롱의 의미로 ‘밀리오네’ (Milione), 백만이라는 별명으로 그를 부르곤 했지만, 그의 이 같은 허장성세의 이면에는 그가 목도한 놀라운 세계에 대한 경이와 찬탄이 있음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직접 보았던 세계, 특히 쿠빌라이 제국의 광대한 영역, 무한한 재화, 거대한 도시들의 실태를 소개할 때 끊임없이 베니스나 유럽의 상황에 비추어 이야기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제국에서 널리 통용되던 지폐의 제작과 그 종류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베니스 화폐 1베잔트의 무게에도 미치지 못하는 지폐가 10베잔트의 가치로 사용되는 것을 보고 대카안의 ‘완벽한 연금술’ 이라고 찬탄해 마지않았다. 또한 물자의 풍부함에 대하여 말하면서, 베니스 은화 1그로트의 가치를 꿩 3마리나 생강 40~80 파운드, 혹은 거위 두 마리와 오리 두 마리, 아니면 고급 도자기 세 점 을 살 수 있을 정도라고 회상했다.특히 그가 ‘하늘의 도시’ 라고 부른 항주(杭州)는 수많은 운하가 가로 지르고 그 위에 1만 2,000개의 다리가 놓여 있어 물위의 도시 베니스를 연상 시켰는지 그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에 대해서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160만 가구 가 사는 거대 도시 항주 시내 도처에 자리 잡은 광장에는 온갖 상점들이 가득 들어서 있고, 그 사이를 연결하는 포장도로에는 사람을 실은 마차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3,000개소의 목욕탕과 1만2,000개소의 점포로 들어찬 도심의 번화함 못지않게 그 서쪽에 있는 서호(西湖)에는 매일같이 호화로운 연회와 오락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붐볐다고 한다. 그의 눈에 비친 항주는 그야말로 몽골제국의 정화이자 도시와 문명생활의 극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폴로가 목격한 이러한 몽골제국은 삭막한 초원에서 흥기한지 불과 반세기밖에 되지 않았다. 1240년대와 1250년대에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을 보면 누구나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게 된다. ‘도대체 감옥에 갇힌 사람이 기억을 더듬어서 이렇게 상세하고 치밀한 기록을 남길 수 있을까?’ 17년 이라는 장기 체류에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지 3년밖에 되지 않았다고는 하나, 도시와 도시 사이의 거리나 방향, 각지의 특산물, 길이나 무게의 정확한 수치, 특히 캄발룩 (대도) 이나 킨사이 (항주)의 궁전과 도시 구조에 대한 설명 등 은 아무리 사진기와 같은 기억력의 소유자라고 해도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본문에서 대카안의 궁전인 캄발룩에 대해서 묘사한 점을 보면 더욱 그렇다.감옥에 갇힌 마르코 폴로가 고향의 아버지에게 여행 시에 적은 비망록을 보내 달라고 해서 그것을 이용했다는 주장이 사실이냐의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적어도 그러한 것이 없었다면 마르코 폴로의 기록이 보여주는 상세함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우리는 마르크폴로의 글 속에서 그가 그와 같은 ‘기록’ 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힌트를 찾아낼 수 있다. 대카안이 보낸 사신들은 귀환 후 파견된 임무 자체에 대해서만 보고했지만, 마르코 폴로는 ‘낯선 나라의 풍습과 관행과 신기한 것들’ 에 대해 ‘대카안에게 다시 설명할 수 있도록 모든 신기한 것과 이상한 것들에 주의를 기울였다’ 고 했고, 항주에 관한 부분에서는 ‘그곳의 모든 정황을 주목하고 이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아래에서 간략하게 서술되듯이 그의 노트에 그것들을 기록했다’ 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그는 이 도시 근처에서 남쪽 방향으로 거대한 궁전(캄발룩) 을 갖고 있는데 그 생김새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묘사해 주겠다... 먼저 사각형의 성벽이 있는데 한면의 길이는 1마일, 즉 전체 둘레가 4마일이 된다. 그것은 매우 두껍고 10보 정도의 높이이며... (중략) 또 모서리에 있는 누각과 같은 것들이 성벽의 면을 따라 모두 여덟 개가 있는데, 이 여덟 개의 누각들은 대카안의 장비들로 가득 차 있다..그러나 마르코 폴로의 글 속에는 여러 사람들의 의아심을 불러일으킬 만그의 나이 21살 때였다. 애당초 그는 이슬람 신도들이 지켜야 할 믿음의 다섯 기둥 가운데 하나인 메카 성지순례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집트를 돌아서 아라비아 반도로 들어간 그는 마침내 감격에 찬 순례를 마쳤지만 그대로 고향에 돌아가지 않았다. 메카에서 바그다드로 귀향하는 이라크 순례단에 합류하면서 인류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편력의 여정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중세의 세계적 여행가이며 탐험가인 이븐바투타는 모로코 출신으로 그의 본명은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이다. 1304년 2월 24일 독실한 이슬람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전통적인 이슬람 교육을 받아 독실한 무슬림으로 성장하면서 모든 사물의 가치 기준을 철두철미하게 꾸란에 근거한 이슬람 교리와 규범에 근거하여 관찰하고 판단했다. 그는 여행 중에 메카를 네 번이나 순례하였고 위험과 위기에 봉착했을 때는 꾸란 113장을 10만 번이나 암송할 정도였다. 나이 21세가 되던 해 그의 오랜 꿈이었던 메카 성지 순례와 동방의 이슬람 문명 탐구를 목적으로 출발한 여행은 점차 그에게 미지의 세계에 대한 무한한 열정과 탐구심을 불러일으켰다. 아시아 · 아프리카 · 유럽 3개 대륙에 걸쳐 숱한 죽을 고비를 기적적으로 넘기면서 장장 10만km를 30년 동안 종횡무진 여행하였다. 아프리카 대륙의 중부 내륙 지역을 여행하고 있을 때 아부 아난 군주가 특사를 급파하여 그를 수도 파스로 소환한 후 여행기를 집필하도록 하였다. 집필에 몰두한 결과 2년도 채 못 되는 1355년 12월 9일에 『이븐바투타의 여행기』라는 이름으로 집필을 완료하면서 불후의 탐험 기록을 남기고 1368년 그가 태어난 모로코에서 세상을 떠났다.한 시대에 걸쳐 3개 대륙의 다종다양한 인간의 생활상을 동서남북 종횡으로 엮은 이븐바투타의 여행기는 인류가 공유할 귀중한 유산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중세 인문지리학에 관한 소중한 자료로서 그 가치가 높다. 그때까지 이 여행기처럼 중세 동서양의 서로 다른 생활상과 지리적 환경을 포괄적으로 기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