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은 새로운 현장은 어디인가인문학의 새로운 현장은 어디인가? 지금까지 인류학은 어디서부터 어디로 연구 범위를 확장해 왔는가? 초기 인류학은 타국이나 오지를 다니며 다른 인종,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탐구해 왔다. 그렇다면 인류학은 이제 더 먼 곳, 더 낯선 곳으로 갈 것인가? 앞으로의 인류학의 방향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자.인류학은 지금껏 다양한 방향으로 발전 해 왔다. 지난 번 쪽 글의 두 부족처럼 새롭고 신기한 인간 생활의 형태와 부족의 형태를 가능하게 해 준 것이 바로 인류학의 덕이라 할 수 있다. 문화 인류학은 그러나 앞으로 ‘더 멀리, 더 넓게‘가 아닌,’더 깊이’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문화 인류학을 통해 다른 문화, 우리와 좀 더 많이 다른 문화에 대해 알아 본 것은 호기심이 원천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화, 인류학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보다 수 없이 많이 발전하였고, 우리는 남이 아닌 우리에 대한 인류학을 공부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더 깊이 보는 인류학이란 한 나라의 인류학을 깊숙이 공부하는 것이다. 나 자신의 문화를 이해해야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 문화가 야만스럽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 어느 산골에서도 같은 문화가 자행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자신의 문화를 잘 이해하는 것은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더욱 도움을 주기 때문에, 문화 인류학이 나아갈 방향은 세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들이라고 생각한다. 문화 변천에 발맞추지 못하던 이유, 문화생활로부터 도태되고 문화에 도덕 현상이 따라오지 못하는 아노미현상 역시도 자국의 문화를 충분히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타국의 문물을 거리낌 없이 삼켜버린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현상이 문화와 현실의 괴리를 만들어 수 없는 사회 문제를 일으켰다. 되 돌이켜 땅을 치고 후회해도 소용없으니, 이제라도 늦지 않게 인류학이 모는 배는 인류학이라는 선장이 키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넘실대는 바다에서 선장이 자신을 모른다면 누가 어떻게 중심을 잡을 수 있단 말인가? 중심을 잡는 방법은 간단하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자신의 위치가 무엇인지 즉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종의 기원 이후 문화 인류학, 언어 인류학 등으로 나뉜 인류학은 인류학이 생긴 이유를 먼저 찾고 자신을 돌아볼 필요성이 있다.
롯데갤러리 '젊은 롯데의 비밀'( Secrets of Young Lotte)지난 10월 14일 금요일 젊은 롯데의 비밀(Secrets of Young Lotte)을 관람하고 왔다. 윈저 조 이니스(Windsor Joe Innis, 이하 이니스)는 2000년도부터 제주도 서귀포에 자리를 잡고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만큼 그의 이름은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어서 타 작가들의 전시보다는 익숙하였고, 또 그의 작품은 재미있게 읽었던 작품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는 점 역시 나의 흥미를 끌었다. 또 젊은 롯데의 비밀이라는 전시회의 제목이 나에게 다가왔던 것 같다. 여자라면 한번쯤은 공감했을만한 말인 비밀은 여자를 여자답게 만든다. (A Secret Makes a Woman Woman) 라는 명언이 생각나는 주제였다. 이제부터 전시회의 성격과 그를 드러내는 전시회의 분위기에 대해서 언급하려고 한다.롯데갤러리의 전체적 분위기 중 첫 번째로 이야기 할 것은 바로 조명이다. 갤러리 내의 분위기 전체를 좌지우지한다고 볼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조명, 그러나 롯데 갤러리는 그다지 작품과 전시회의 성격에 맞지 않는 듯 보였다. 윈저 조 이니스의 작품의 큰 특징은 2층 갤러리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책자에도 나와 있듯이 첫 번째는 우아하면서도 정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빛과 색의 인상에 의존해 인물의 감정과 느낌을 그리는 것이다. 그러나 1층 갤러리의 조명은 다소 따뜻한 분위기를 연상하는 주황색 조명은 다른 전시회에서는 몰라도 이니스의 작품 갤러리에서는 다소 부적합 하다고 느껴졌다. 주로 주황색 조명은 활발함, 유쾌함, 따뜻함을 대표하는 색깔이라는 인식이 대표적이어서 이니스의 작품과는 반대되는 성격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번 전시회의 모델인 ‘롯데(Rotte, 로테)’는 상류층의 여성이며 배경으로 풀밭, 바다 등 초록색, 파란색, 남색 등 어두운 색을 선택한 작품이 적지 않은 만큼 조명선택이 부적절 하다고 볼 수 있다. 어정쩡한 조명이 작품을 살리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어린 시절부터 베르테르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느끼는 성년기까지 롯데의 성장 과정을 그린 이번 전시회의 성격상 어느 한 쪽에 치우쳐 보지 않도록 중성적인 느낌의 조명을 사용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롯데 갤러리의 조명은 다소 따뜻한 느낌이 있어 작품 본연의 느낌을 살리지 못하며 독자의 상상력, 감정이입 등에 개입하여 작가의 의도를 해치고 있다. 그러나 제 2의 조명이라 불릴 만큼 중요한 타일의 선택은 비교적 좋았다고 볼 수 있다. 바닥의 타일이 조명을 적절히 반사하고 있고 또한 너무 단단하지 아니하여 구두소리 등을 줄여 앞에 언급했던 조명의 단점을 다소 보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타일의 조명 반사 정도 역시 너무 강하거나 약하지 않아 갤러리의 조명이 좋지 않다는 점만 제외 한다면 작품의 어느 한 쪽에 그림자가 지거나 치우치지 않도록 하고 있는 점이 좋았던 것 같다. 전에 갔었던 다른 갤러리에서는 조명의 위치가 부적합하여 가까이 다가가면 작품에 그림자가 졌었다. 그에 비하면 훌륭하다. 조명을 잘 못 설치하거나 타일을 잘 못 선택한다면 있을 법 했던 일-작품에 다가섰을 때 그림자가 지거나 명암이 드리워져 작품의 몰입도를 반감시키는 것-을 감소시키는 점은 좋았다고 생각한다.두 번째는 바로 전시회의 위치 및 구조이다. 롯데갤러리는 롯데백화점 본관 12층에 위치하는 만큼 접근성도 용이하고 명동과 가깝다는 이점이 있어 쇼핑을 하거나 하다가 가볍게 들를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또한 가벼운 마음으로 관람하기 위해 말 그대로 ‘잠시 들른’ 관람객들을 위하여 안내 책자 등이 풍부하다는 것 역시도 장점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작품에 대해, 또는 작가에 대해 검색 등의 조사를 하거나 사전 지식을 가지고 오는 경우보다는 우연히 들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전의 양면처럼 장점에는 단점이 따른다. 그건 바로 작품에 대한 애정이나 관심이 적어 관람객들이 소란스럽거나 산만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롯데 갤러리의 경우 롯데 백화점을 이용하는 고객에게 ‘서비스’한다는 차원으로 무료 전시회를 열거나 관람료가 저렴한 경우가 많아 특히 ‘젊은 롯데의 비밀’처럼 관람료가 무료인 경우는 특히 그렇다. 물론 1층에는 안내원이 한 명 있어서 그나마 조용한 편이지만 2층으로 올라가면 안내원도 없고 마치 수유역 내의 사진 전시처럼 북적거리고 조금 소란하여서 작품 내에 집중하기가 조금 어렵다.또한 1층 내에는 작품 수가 대략 8점 내외로 적은 편이어서 작품 하나하나에 집중하기는 좋지만 이번 전시회처럼 작품마다 내포하고 있는 뜻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주제를 나타내는 흡사 옴니버스(omnibus)식 구성을 취하고 있는 ‘젊은 롯데의 비밀’ 전시회에는 1층과 2층이 분리되어 있는 구조는 적합하지 않으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주인공인 롯데(로테)의 생애와 성장 구조, 내적 갈등 등이 작품 내에 드러나 있는 이번 전시회는 작가의 의도가 나의 생각과 일치한다면, 작가도 나와 같이 생각했다면 다른 갤러리에서 전시되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로테를 굳이 ‘롯데’로 표기한 것을 보면 롯데와의 긴밀한 관계가 있어 다른 갤러리에 전시 될 수는 없었을 수도 있다. 이니스가 국내에 거주하고 있다는 점을 미루어 보아 아예 근거 없는 말은 아닐 것이다.위치 및 구조에서 또 하나의 단점은 백화점 내에 있다는 것의 영향을 받는다. 백화점 내의 갤러리의 특성상 엘리베이터 등의 이용 불편이 있다. 특히 롯데 백화점 본점 내에 위치하여 평일에도 사람이 많아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기 힘들며, 엘리베이터의 위치를 복잡하게 해 놓는 백화점의 특성상 순수하게 전시회 관람을 위해 찾아온 관람객들에게 불편을 야기할 수 있다. 실제로 롯데 백화점 본점은 마치 건물 여러 개를 털어서 쓰는 듯 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복잡하다. 본관, 별관 등이 따로 있고 지하철도와도 연결되어 있어 자칫 길을 잘못 들면 넓고 사람이 많고 조명이 뜨거워 더운 백화점 안을 헤매야 한다. 이 곳에 자주 오는 사람이 아니라면 충분히 불만을 표할만한 점이다. 또한 롯데 갤러리는12층에 위치하고 있어 비교적 백화점에서 발달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기도 힘들어 관람을 시작하기 전에 지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문화상대주의와 현지조사의 연관성에 대하여문화상대주의와 현지조사는 어떠한 연관점이 있을까? 문화상대주의란 세계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다. 두산백과, 검색어 “문화상대주의”아프리카 일부 지역의 할례 역시도 문화상대주의로 인정해야할까? 그렇지 않다면 그 기준은 무엇일까? 현지조사가 그 기준의 정의를 내려주는 해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의문들에서부터 이 글은 출발한다.아프리카대륙 중 일부 국가의 할례문화, 우리나라의 개고기 섭취 등 세계에는 많은 문화가 있다. 우리는 어디까지를 ‘문화’로 인정할 수 있을까? 보통의 문화상대주의는 인권의 침해하지 않는 선까지를 인정한다. 그렇다면 ‘인권을 침해하지 않는 선’은 누가 정하는가? 자국민이 정하는가 아니면 기타 국가 연합 기관에서 정하는가? 이것의 해답은 ‘문화인류학’에서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화 인류학자들은 현지 조사를 통하여 그 기준을 보다 객관화 하고자 한다. 물론 현지조사에서도 개인 또는 집단의 의견과 그들이 문화가 반영되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현지조사의 경우 조사 범위가 좁아 객관성을 확보하기에는 분명 어려운 점이 있으나, 인구, 기후 등과 같은 수치가 아닌 ‘문화’라는 것을 조사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현지조사의 필요성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어떠한 문화가 악습이 아닌 ‘문화’로서의 정당성을 얻으려면 현지조사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우리는 현지조사와 문화상대주의의 연관성에 대해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가 개고기를 먹는 이유가 과거의 어떤 문화와 연관되어 있는지를 현지 조사를 통해 알 수 있고, 그 현지조사를 통하여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 ‘문화’에 대한 당위성을 얻고 납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현지조사란 이처럼 문화가 문화일 수 있게 하는 정당성을 부여한다. 왜냐하면 현지조사는 사회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모습을 현실성 있게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문화를 아는 것은 책과 서적 등 실내조사 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그것을 문화로써 ‘이해’하는 것은 반드시 현지조사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떠한 문화가 왜 생겨났는지를 아는 것은 쉽지만 왜, 어떠한 경위로 생겨났으며 현재 그 문화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와 같은 것은 현지조사의 방법 중 일부인 면접법 또는 설문지법에 의해 보다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파악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현지조사는 극단적 문화상대주의와 자문화중심주의 등으로부터 진정한 문화상대주의를 구별할 수 있는 하나의 지표를 내려준다. 자국민의 인식을 보다 정확히, 그리고 그 문화의 수준에 맞추어 조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문화인류학은 문화의 정당성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 반드시 현지조사를 동반하고 수많은 연구를 거친다. 문화이냐 아니냐는 매우 상대적이기 때문에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나, 문화인류학자들은 현지조사가 그 어려움을 상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며 반드시 필요한 방법이자 도구로써 현지조사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신화는 우리가 눈치 채지도 못 할 만큼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우리가 늘 향유하는 예술에서 특히 더 그렇다. 신화는 영화, 연극, 무용 등은 물론 드라마, 음악 등 우리의 생활 전반에 걸쳐 우리 가까이에 있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나 엘렉트라 콤플렉스, 피그말리온 효과 등은 심리학 용어로도 많이 쓰여 이른바 상식 용어라고 불리기도 하는 만큼 신화가 미치는 파급력은 점점 더 커져가고 있다. 이 서평에서 논할 것 역시 바로 심리학 용어이기도 하며 상식이기도 한 용어들 중 하나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라는 말이 나온 시초이기도 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신화에 관한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란 남성이 부친을 증오하고 모친에 대해서 품는 무의식적인 성적 애착 [출처] 오이디푸스콤플렉스 [Oedipus complex ] | 네이버 백과사전이라고 나와 있다. 단순히 심리학 용어 사전 등을 읽다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해 몰라서 검색해 보았다면 그 뜻 정도야 쉽게 알 수 있겠지만, 이 단어가 탄생하게 된 배경, 이 단어에 얽힌 소설을 모른다면 예술 속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사전적 의미만으로 발견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현대 예술 속에서는 옛날 연극, 영화처럼 제목에 다루고자 하는 바를 직접적으로 표기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추세이니 만큼, 은유적으로 작품 내에 은근히 비유되어 있는 신화도 많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예술의 세계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신화를 소재로 한 소설이나 희곡 등을 읽어보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서평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같은 주제를 내포하고 있는 영화와 또 다른 소설과의 비교이다.첫째로 설명할 것은 바로 2007년 개봉한 데이비드 맥킨지(David Mackenzie)의 『할람 포(Hallam Foe)』라는 영화 속에 내제된 오이디푸스 이야기에 관한 것이다. 이 영화는 이전에 등장한 다른 연극이나 책 등보다 훨씬 최근에 관객들 앞에 놓인 만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 은유적으로 깔아 놓는 경향이 있다. 할람 포의 대략의 줄거리는 이렇다. 18세 소년인 할람은 어머니를 잃고 새엄마인 배리티를 맞게 된다. 새엄마는 할람에게 ‘아버지를 유혹해 결혼한 여우같은 비서’로 비춰지며, 그녀가 자신의 엄마를 살해했다고 믿는 등 영화에서 초기에 보여주는 그는 이상하리만치 그녀에게 적대적이며 망원경으로 옆집을 훔쳐보는 등 알 수 없는 괴상한 소년이다. 그는 새엄마인 배리티를 적대시하지만 알 수 없는 성욕으로 그녀와 성교하게 된다. 여기서 첫 번째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이 영화의 바탕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할람이 새엄마를 사랑한 것은 아니고, 물론 새엄마와 혈연지간도 아니지만 구체적으로 지적하지 않았을 뿐 은유적으로 아들과 새어머니의 에로스 식의 사랑을 나타낸다. 그 후 할람은 충격으로 애든 버러로 충동적으로 떠나게 되고, 그 곳에서 자신의 친엄마와 똑 닮은 호텔리어 케이트를 만나게 된다. 단지 어머니에 대한 갈망으로 케이트를 쫓아다니게 된 할람은 점점 케이트를 이성으로 여기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는데, 여기서도 역시 두 번째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감독이 의도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도 감독인 데이비드 맥킨지는 직접적으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흡사하게 ‘친어머니(신화 속에서는 이오카스테)’와 ‘아들(오이디푸스)’간의 사랑, 즉 친족 간의 사랑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다만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아버지의 아내라는 점에서 이오카스테와 공통점이 있는 배리티 또는 어머니와 똑같이 생긴 여성인 케이트를 등장시켜 ‘이오카스테’를 대표시킴으로써 이 영화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두 번째로 예를 들 예술의 장르는 바로 소설인데, 2010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Mario Vargas Llosa)의 작품인 『새엄마 찬양(Elogio de la madrastra)』이다. 여기서는 아들인 알폰소(폰치토)와 새엄마인 루크레시아, 그리고 아버지인 리고베르토가 중심인물들로 등장한다. 알폰소는 새엄마인 루크레시아를 의도적으로 꼬드겨 성적인 관계를 가지며 이 사실을 아버지인 리고베르토에게 일러바쳐 루크레시아와 리고베르토를 이혼시킨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다소 다른 작품과는 다르게 외설적으로 비꼬아져 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관한 내용은 바로 내면을 이해할 것도 없이 의붓아들은 알폰소와 새엄마인 루크레시아 간의 성교이다. 대부분의 문학 작품에서는 진짜 친엄마로 이오카스테를 대표시키기보다 새엄마를 등장시켜 이오카스테를 대표하게끔 하는 경향이 많다. 또 루크레시아가 이오카스테를 대표 한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루크레시아는 한 순간 아들과 잠자리를 가진 ‘더러운 여인’이라는 오명을 쓰고 마을에서 쫓겨나다 시피 떠나며, 이 부분에서 루크레시아가 이오카스테에 비유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질적으로 오이디푸스의 신화에서 이오카스테에게는 어떠한 잘못도 없다. 신탁에 의해 아이를 빼앗겼고, 여론에 따라 스핑크스를 물리친 사람을 남편으로 맞았을 뿐인데도 목을 매달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을 이 소설에서는 마을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오카스테를 의미하는 루크레시아는 새엄마로써 소설에 나타난다. 두 번째로 이면에 등장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바로 알폰소와 친엄마와의 관계이다. 제대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소설의 내용 속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저자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이에 대한 힌트를 에필로그인 하녀인 후스티니아나와 알폰소의 대화에 숨겨놓았다고 생각한다. 에필로그에서는 루크레시아 부인이 떠난 후 알폰소와 후스티니아나와의 대화가 나오고, 여기서 알폰소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에 대해서가 대략적으로 드러난다. 물론 알폰소는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하지만, 후스티니아나가 마지막에 말하는 대사에서 함축적으로 친엄마와 알폰소와의 관계 역시 범상치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엘로이사 부인 때문에 그 모든 일을 한 거지? 왜 누구도 네 엄마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게 하는 거야? 왜 루크레시아 부인이 이 집에서 네 엄마 자리를 차지하는 걸 참지 못했던 거니?”(232)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새엄마 찬양, 송병선 옮김, 문학 동네, 2010년, 2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