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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태체계모델
    생태체계모델1)정의생태체계라는 개념은 일반체계이론에 생태학적 이론을 결합시킨 것으로, 인간 혹은 환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환경의 상호작용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의 개체는 그 개체와 연결된 다양한 여러 요소들과 서로 체계적 상호작용을 가지며, 인간과 환경이 지속적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역동을 설명하고 나아가 환경이 인간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며 또 인간은 환경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설명해주는 것이다.2)등장배경전통적 방법론은 특정한 모델에 의거하여 클라이언트를 점수화하고 표출된 문제를 사정, 평가하므로 특정 방법의 틀에 의해서만 클라이언트 문제 현상을 규명하는 오류를 낳기도 했다.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통적 사회사업방법론이 갖고 있는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한 비판이 활발해져 전통적 모델의 결점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적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모색하는 과정에서 사회사업실천이론은 인간과 환경을 엄격히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비판하고, 인간과 환경의 교류작용에 초점을 두는 통합적 관점에 대한 요구인 양자 모두를 균형 있게 강조하고 모두에 초점을 맞추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 결과 인간과 환경의 교류작용이 통합적 관점에 대한 요구에 부합하는 이론적 관점의 연구가 활발히 일어났다.생태체계적 관점은 Germain이 처음으로 제안하여 개인과 환경을 동시에 문제의 원인으로 보고 양자를 동시에 개입의 대상으로 삼는 사회사업의 이론적 준거 틀로 도입되었다. 생태체계관점은 전통적 방법론과 달리, 개입하기 이전에 문제 현상을 사정하고 평가하는 구조와 준거 틀을 제공함으로써, 일반적이고 통합적인 관점을 실천가들에게 제공한다. 따라서 실천가들이 실천모델을 적용하기 이전에 문제 현상을 정확히 파악하여, 어떤 모델이 개입에 적합할 것인지를 판단, 선택하게 함으로써 사회복지실천모델을 보다 효과적으로 클라이언트 문제에 적용시키도록 돕는다.3)주요개념①체계 : 체계는 정리되고 서로 연결된, 기능적 전체를 형성하는 일련의 요소들을 의미하며 개인, 가족, 집단, 조직, 공동체 등을 사회체계로 보고 모든 사회체계는 역동적이며 다른 사회체계들과의 지속적으로 상호작용을 한다고 본다. 따라서 모든 사회체계의 행동은 하나의 체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상위체계들과 하위체계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된다. 체계란 대상과 그 대상의 속성 사이의 관계를 통합하는 대상체들이다. 그 대상체들은 체계의 구성요소가 되고, 그것의 속성은 대상의 특성이고, 관계는 그 체계를 함께 묶는 역할을 한다.②투입 : 체계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다른 체계로부터 받는 에너지, 정보, 의사소통을 의미한다. 개인 차원에서의 투입은 음식, 물, 정보, 감각 자극을 의미하고 조직차원에서의 투입은 돈, 직원, 물질을 의미한다.③변환과정 : 투입의 진행과정에 의한 것으로 투입된 것이 일정 과정을 거쳐 바뀌는 것을 말한다. 개인 수준에서의 변환 과정은 개인의 선택적 인식과 그 인식에 속한 의미를 말하고 집단 차원에서의 변환 과정은 각 구성원의 과업과 역할에 대한 기대 변화이다.④산출 : 다른 체계로 방출되는 에너지, 정보, 의사소통을 의미한다. 개인 차원에서의 산출은 보고서, 토론, 비언어적 의사소통이라는 결과를 의미할 수 있고, 조직 차원의 산출은 서비스나 성과물을 의미한다.⑤경계 : 모든 체계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인간체계를 다른 체계들로부터 분리하는 보호적 방벽으로 작용한다. 개인 차원에서 보면, 개인이 고정되거나 방어적 태도로 행동할 수 있고, 너무 감정에 이끌려 자제나 관리가 부족해지기도 한다. 개인의 신체적 경계는 ‘피부’라는 명확한 경계가 있지만 사회체계의 경계는 덜 명확하다. 사회체계의 경계는 개인의 ‘소속’으로 나뉜다. 모든 생물학적, 사회적 체계들은 개방체계이다. 경계는 침투성이 있고 경계를 넘어서 문제와 에너지, 정보의 상호교환이 가능하다. 그러나 체계마다 개방성의 정도는 다르다.⑥순환 : 유기체와 환경 사이의 상호적 관계를 강조하는 것으로 행동을 인과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으로부터 발생되는 것으로 이해한다.⑦평형성 : 자연적 체계가 환경의 도전에 반응하여 스스로를 창조하는 것을 의미한다.⑧공생 : 상호작용을 통하여 한쪽 혹은 상호유익을 얻는 두 종 간의 빈번한 상호작용을 말한다. 사례의 환경을 사정할 때, 사회복지사는 인간과 환경의 상호작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개념을 활용할 수 있으며, 개입 활동을 계획 할 때 상호부조와 편리공생을 최대화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⑨사회적 관계망 : 현실생활의 관계와 관심의 결과로서 개인이나 가정의 생활 공간에서 일어나는 자연적 관계체계를 말하는 것으로, 도구적 기능과 정서적 기능을 같이 가지고 있다.⑩시간 및 공간 : 사회적, 물리적 환경에서의 개인의 행동 특성을 용이하게 이해하도록 하는데, 이것은 하나의 단독 현상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적 환경과 물리적 환경 그리고 문화적 배경 속에서의 상호영향 관계를 통해 개인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단선적 인과론을 배척하고 상호교류적 관점을 견지하는 생태적 관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⑪적응 : 인간이 환경 혹은 다양한 체계와의 최적성을 이룸으로써 생존하거나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개인체계와 더 큰 사회체계 사이에 오가는 교류로서, 작은 체계가 더 큰 환경체계와 적절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을 의미하고 개인이 자신의 환경과 적절한 결합을 하는 과정을 말한다.⑫활동공간 : 특정한 종이 생태체계 안에서 생존하며 건강을 유지하고 재생산을 하기 위해 요구되는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요인을 일컫는다. 활동 공간은 종이 가장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특정한 장소나 환경과 같은 것으로 생각 할 수 있다.⑬수용능력 : 특정한 생태체계 안에서 살 수 있는 종의 최대치를 말한다. 대부분의 식물과 동물의 종은 좁은 활동 범위에 제한되어 있지만 인간은 상당히 적응적이며, 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한 기술과 도구를 사용하기도 한다.⑭피드백 : 어떤 기제의 활동을 조절하기 위해서 이전 단계에 획득된 것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는 것으로 피드백의 성향에 따라서 체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피드백과정의 재 강화와 조절은 체계의 안전성과 불안정성을 유도하므로 유지와 적응 능력 사이에서 체계의 역동적 균형 유지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개념이다.⑮환경 : 사회복지실천에서 환경이란 개인과 환경간의 상호작용의 결과이며 특정 지역과 사회적으로 규정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교류로 정의할 수 있다. 환경은 개인의 행동과 발달에 영향을 끼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환경에 대한 개인의 인식과 해석에 부여된 의미를 통해서이다. 따라서 사회복지 실천현장에서는 실제적 환경, 클라이언트가 인식하는 환경, 사회복지사가 인식하는 환경이 고려되어야 한다.최적성 : 인간과 환경 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적 관계를 말하는데 실제적으로 개인, 가족 또는 집단과 일을 할 때 최적성이라는 개념이 제시하는 중요한 점은 클라이언트가 그가 처한 환경 및 환경적 특성과 관련하여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이다.4)다른 이론과의 차이생태체계관점이 인간이 환경 속의 존재라는 것을 규정한 것은 맞으나 인간만이 갖는 특징을 보여주지 않았다. 예를 들면, 심리사회모델은 인간은 연령에 상관없이 성장하고, 학습하며 적응해 나가는 능력을 가진 존재로 규명한다. 과제중심모델은 인간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행동적 과업이 있고 이를 성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와 같이, 다른 모델들은 인간의 특징을 규명하고 있다.
    사회과학| 2015.10.01| 3페이지| 1,000원| 조회(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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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 근대 문화 골목, 대구에 남아있는 일본근대문화.
    일본 대중문화의 이해대구에 남아있는일본의 발자취- 대구 근대 골목 투어를 다녀와서 -과목명학과학번이름제출일Ⅰ. 서론1. 계기2. 스케줄Ⅱ. 본론1. 각 건물의 특징과 일본과의 관련성⑴ 화교협회(소학교)⑵ 진 골목⑶ 약령시 한의약 박물관ⅰ. 한의약 박물관ⅱ. 약령시의 1910년대ⅲ. 약령시의 1920년대ⅳ. 약령시의 1930년대ⅴ. 약령시의 1940년대ⅵ. 약령시의 195~60년대⑷ 이상화, 서상돈 주택ⅰ. 이상화ⅱ. 서상돈⑸ 3.1운동 만세 길Ⅲ. 결론Ⅳ. 출처Ⅰ. 서론1.계기나는 대구에 살고 있으면서도 대구에 근대 문화 골목이 있다는 것을 이 수업을 들으며 처음 알았다. 국채보상운동관이나 수성 못도 좋지만 가보지 못한 곳을 가는 것이 더욱 의미 있을 것 같아 과제를 하는 겸 구경도 할 겸 근대 문화 골목을 다녀오기로 하였다.2.스케줄대구 근대 문화 골목에 2014년 5월 9일 일본 대중문화의 이해 수업을 마치고 바로 다녀왔으며 아래 순서로 진행하였다.화교협회(소학교) : 4시 → 진 골목 : 4시 10분 → 약령시 한의학 박물관 : 4시 30분 → 제일교회 : 4시 50분 →이상화, 서상돈 고택 : 5시 → 계산 성당 : 5시 15분 → 3.1만세운동길 : 5시 25분 → 동산청라언덕 : 5시 30분그러나 제일교회, 계산성당 그리고 동산청라언덕은 일본과의 관련성보다는 조선시대의 종교박해와 관련성이 깊다는 판단 하에 조사에서 뺐다.Ⅱ. 본론각 건물의 특징과 일본과의 관련성⑴ 화교협회(소학교)대구 화교협회는 대구광역시 중구 종로2가에 있는 근대 건축물이다. 2006년 6월 19일 등록문화재 제 252호로 지정되었다.대구 지역에 화교가 이주 한 것은 사회 분위기에 있다. 대구는 17세기부터 경상도의 행정중심지일 뿐 아니라 조선의 상업 중심도시로 기능하고 있었는데, 여기에다 경부철도의 부설은 부산과 서울간의 시간적 공간적 거리를 좁혀 대구의 상업 발전 가능성을 전망하고 일본인도 대거 이주하였으며 화교도 이런 경위로 유입되었다.1929년에 지어진 대구화교협회는 당시 바뀌었다가 1960년 다시 대구화교협회로 바뀌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무렵 대구의 화교들이 경제적 호황을 누려 1940년 후반 서병국의 저택 일부를 매입,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현재에는 대구화교협회 사무실로 이용되고 있다.대구화교 소학교는 1943년에 설립되어 6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 화교협회 건녀편 2층 건물에 있다. 당시 화교의 학교 설립 필요성을 제기한 모문금이 모금운동을 벌이고 개인 명의로 기부하는 등 힘쓴 결과 화상공회 건물에서 마침내 개교하였다.대구화교협회는 다른 지역의 화교와 비교하여 대구 화교만의 독특한 경제활동으로 인해 많은 작품이 대구지역에 남아있으며, 이러한 작품은 현재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인식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대구화교협회 건물은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 하에 한국인의 자본과 중국인의 기술력, 그리고 서양 건축문화가 한데 어우러진 복합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다.⑵ 진 골목진 골목이란 긴 골목을 의미한다. 경상도에서는 ‘길다’를 ‘질다’로 발음하는데 이 때문에 ‘긴 골목’이 ‘진 골목’으로 불리게 되었다. 진 골목은 100미터 정도로 짧다. 1905년 대구읍성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을 정도로 역사는 길다.진 골목은 근대 초기 달성서씨 부자들이 사는 동네로 유명했다. 대고 최고의 부자였던 서병국을 비롯해 그의 형제들이 모여 살았다. 코오롱 창업자 이원만, 정치인 신도환, 금복주 창업자 김홍식도 진 골목에 살았다.이 골목을 통하면 당시 군사-행정로였던 종로를 통하지 않고도 감영/중영까지 갈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진 골목은 일제강점기 행정구역으로 경정(종로)-남정(남일동)-지정/상정(포정동)으로 이어졌다. 해방 이후에도 재력가들과 기업인들의 거주지로 각광받았다.이러한 부자 동네인 진 골목은 여성국채보상운동을 시작한 곳으로 유명하다. 1907년 대구군민대회에서 남자들이 나라 빚을 갚기 위해 금연을 결의하자 진 골목에 살던 일곱 분의 부인이 패물을 바쳤고 패물헌납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⑶ 약령나라 한방을 대표하는 브랜드이다. 이 박물관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약령시의 전통 한의약 문화를 보존·계승·발전시키고, 한약재 유통의 본 고장으로서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2층에는 한방 체험실을 3층에는 한방역사실을 두어 약령시의 한방에 대하여 잘 보여주고 있다.ⅱ)약령시의 1910년대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긴 이후 약령시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1910년 12월에 일제는 고전적 식민지 개발 이론에 딸 을 발포하고 우리나라를 그들의 원료 생산지 및 공업제품의 판매 시장으로 육성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1914년 9월에는 을 실시하였으나 이는 현대적 감각의 다양한 시장들이 개설, 운영되는 하였으나 이 또한 일제의 한국시장 지배를 관철하기위한 방법 중 하나였다. 이 시장 규칙으로 인하여 1914년 춘령시가 폐시되었고 추령시마저 개시가 어렵게 되자 당시 대구 상무사(현 대구상공회의소)의 책임자였던 서상돈의 주선으로 겨우 열게 되었다. 이 시기 약령시는 객사로부터 남성로로 옮겨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여서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은 시기였지만 1914년 약재 거래액은 68,000원에서 이후 차츰 안정을 되찾아 거래액도 1918년과 1919년에 가각 121,666원과 223,720으로 증가하였다.ⅲ)약령시의 1920년대1920년대 약령시는 위를 건강하게 하는 건위제 천일령신환 선전을 위해 세워 놓은 선전탑에 대구약령시의 영기가 붙어있을 만큼 발전하였다. 당시 약령시가 열릴 때 쯤이면 조합에서는 약전골목 입구인 동쪽과 서쪽 양편에 높다랗게 솔문을 만들고 전기까지 임시로 가설해서 밤이면 불야성을 이루었다. 요즈음처럼 현대화된 선전아치나 애드벌룬이 없었던 데다 당시는 모두가 1층집이었으므로 솔문과 선전탑은 멀리서 보아도 우뚝 솟아나 늠름하게 보였다.ⅳ)약령시의 1930년대1930년대가 되면 “대구 영바람 안 쐬면 약효가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유명해져 이북 원산이나 함흥 등지에서 생산된 약재라도 대구약령시에 나왔다가 다시에서 한약 거상으로 유명했다.ⅴ)약령시의 1940년대이렇게 유명해진 약령시도 1940년대가 되면 일제에 의해 문을 닫게 된다. 1940년 말 제 2차 세계대전에 접어들면서 대구에도 ‘경제통제협력회’ 라는 것이 생겨 모든 물건은 군수용이 최우선적으로 취급되었다. 일제는 약재 거래를 통제하기 위해 조선 생약통제회사를 만들어 사사로운 거래를 금지해 버렸고 이 때문에 대구 약령시도 1941년부터 더 이상 개시될 수 없었다. 300여년에 가까운 전통을 지닌 대구 약령시가 일제의 강압에 의해 문을 닫게 된 것이다.ⅵ)약령시의 195~60년대1950년대가 되어도 상황을 나아지지 않고 악화되어간다. 6.25전쟁과 3.8선에 의한 남북분단으로 약령시 개시는 고사하고 북한산과 만주, 중국 등지의 약재 물류가 반입되지 않아 가장 침체된 상황이었다. 이후 약령시는 현재의 약전골목을 중심으로 한약방이 상설되어 옛 명성을 이어왔고 1960년대가 되면 약령시부흥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약령시 부흥을 위한 노력을 다 하였다.⑷ 이상화, 서상돈 주택ⅰ) 이상화시인 이상화는 한국 근대 저항 시인의 대표적인 사람 중 하나이다.이상화는 1922년 파리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 동경의 아테네프랑세에서 2년간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다가 동경대지진을 겪고 귀국하였다. 그 후 1917년 대구에서 현진건, 백기만, 이상백과 《거화》를 프린트판으로 내면서 시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21세에는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를 만나 홍사용, 나도향, 박영희 등과 함께 ‘백조’ 동인이 되어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한 동시에 1919년 3.1운동 때에는 백기만 등과 함께 대구 학생봉기를 주도하기도 하였다. 또한, 김기진 등과 1925년 파스큘라라는 문학연구단체 조직에 가담하였으며, 그 해 8월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27년에는 의열단 이종암사건 이종암 사건 : 1922년 3월 중국 시찰차 들어오는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기위하여 상하이 세관부두에서 의열단 동료인 이종암, 오 실패하였다. 1937년 3월에는 장군인 형 이상정을 만나러 만경에 3개월간 갔다 와서 일본관헌에게 구금되었다가 11월 말경 석방되었다. 그 뒤 3년간 대구 교남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권투부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그의 나이 40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며 생을 보내다 암으로 사망하였다.그의 작품을 문학사적으로 평가하면, 어떤 외부적 금제로도 억누를 수 없는 개인의 존엄성과 자연적 충동의 가치를 역설한 이광수의 논리의 연장선상에 놓여있긴 하지만 동시에 그 한계를 뛰어넘은 시인으로, 방자한 낭만과 미숙성과 사회개혁과 일제에 대한 저항과 우월감에 가득한 계몽주의와 로맨틱한 혁명사상을 노래하고, 쓰고, 외쳤던 문학사적 의의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작품 중 특히 유명한 는 사회참여적인 색이 강한 작품이고 《개벽》지의 폐지가 될 만큼 치열한 반골기질의 표현이 주목된다.ⅱ ) 서상돈서상돈은 일제에 대항하여 근대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민족 자본을 융성했을 뿐만 아니라 국채보상운동, 민족실력양성 운동을 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민족 운동가이다.그의 집안은 증조부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 왔었고 종교 박해로 인해 많이 이사를 다녔다. 그가 9세 되던 1859년, 부친이 상주 청리에서 사망하자, 그는 모친과 동생 상정과 함께 외가인 대구 새방골 죽전으로 이사하였다. 이는 외조부인 의 보살핌과 경제적인 지원을 받기 위함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어느 상점 심부름꾼으로 고용되어 돈을 벌었고, 이는 그가 경제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18세 경 그는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부상이 되었고 어느덧 서상돈은 대구지역을 대표하는 유력한 경제인 중 하나가 되었다.그는 대구교회 로베르 신부를 중심으로 교회발전에도 힘썼고 이는 근대교육의 중요성을 일찍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1899년을 전후하여 대구 읍내에 학당을 설립하고 1908년 4월 1일에는 근대식 교육기관인 성립학교를 개교하였다. 게다가 여성교육에도 힘써 여학교도 설립하였다.한편 만민공동회에서 재무부 과장, 부장
    인문/어학| 2015.10.01| 9페이지| 2,000원| 조회(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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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폭풍의 언덕 평가A좋아요
    『폭풍의 언덕』서평『폭풍의 언덕』은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폭풍 치는 사랑과 그들의 파괴적인 열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하녀장 넬리, 넬리에게 이야기를 청해 듣는 세입자 록우드 그리고 이야기 안 속 크고 작은 개성 있는 인물들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히스클리프의 지독하고 파괴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은 사랑이 세속적인 조건을 떠나 순수함을 지킬 때 얼마나 강렬한지 보여주고, 물질적인 조건을 따지는 사랑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깨닫게 한다.런던의 부유한 신사인 록우드는 요크의 산골로 찾아와 ‘티티새 지나는 농원’이라고 불리는 저택과 토지를 임대한다. 그곳의 주인은 히스클리프이다. 록우드는 무뚝뚝한 주인 히스클리프, 아름다운 히스클리프 부인, 촌뜨기 헤어턴, 늙은 하인 조지프를 만나 예사롭지 않은 인상을 받은 후, 티티새 지나는 농원의 하녀장에게 히스클리프의 가족사를 청해 듣는다. 하녀장 넬리는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를 시작한다.폭풍의 언덕에는 힌들리,캐서린 그리고 그들의 아빠인 언쇼와 부인, 하인 조지프와 넬리 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언쇼가 사흘 동 안 출타한 후 집에 돌아왔을 때, 히스클리프를 데리고 왔다. 언쇼는 리버풀 길가에서 배를 곯고 있는 히스클리프를 보았고 잘 데도 없고 벙어리나 다름없어 보여 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아이 주인을 수소문 하였지만 주인을 찾을 수 없었고 결국 아이를 데리고 집에 데리고 온 것이다. 문제는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은 서로 가까이 지냈지만 힌들리는 히스클리프를 미워해서 히스클리프에 못된 짓을 많이하고 괴롭혔다는 것이다. 히스클리프는 힌들리의 못된 짓에도 참기만 하였고 언쇼는 이런 힌들리보다, 말썽만 부리고 말을 잘 듣지 않는 캐서린보다 히스클리프를 이상하게 많이 좋아했고 히스클리프의 말은 모두 믿었다. 이때부터 힌들리는 아버지는 자기를 박해하는 압제자이고 히스클리프는 부친의 애정과 자식의 특권을 빼앗은 찬탈자라고 생각했고, 이런 부당함을 곱씹으며 원한을 쌓아갔다.언쇼는 일찍부터 병이 있었고 결국 사망한다. 힌들리는 3년동안 집을 떠나 있었다가 아내를 만나 언쇼의 장례식날 돌아왔고 언쇼를 이어갔다. 힌들리와 아내는 히스클리프를 하인들 거처로 내쫓고, 교구 목사에게 공부 배우던 것을 그만두고 밖에서 일을 하게 했다. 처음에 히스클리프는 자신의 영락을 꿋꿋하게 견뎌냈다. 왜냐하면 캐서린이 자기가 배운 것을 히스클리프에게 가르쳐주거나 자기도 밭으로 나가서 함께 일하거나 놀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 잘 지내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에게 새로운 사건이 발생한다. 캐서린과 히스클리프가 티티새를 지나는 농원에 가게 되었는데 티티새를 지나는 농원에는 린턴 노인 내외와 아들인 에드거와 딸인 이사벨라가 살고 있었다. 캐서린과 히스클리프가 티티새를 지나는 농원에 몰래 들렸을 때 에드거와 이사벨라가 서로 개를 갖겠다고 싸우다가 개를 둘로 찢을 뻔 한 사건을 목격한다. 이를 본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은 비웃었고 이를 들은 에드거와 이사벨라는 린턴 내외에게 일렀고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은 도망쳤다. 그러나 그 집에 있던 불도그에게 캐서린이 물렸고 히스클리프는 도망쳐 돌아왔다. 캐서린은 린턴내외에게 붙잡혔지만 언쇼의 딸인 걸 안 부인은 캐서린을 챙겨주었고 캐서린은 티티새 지나는 농원에서 다섯 주를 머물게 되었다.티티새를 지나는 농원에서 다섯 주를 지내는 동안 캐서린과 에드거는 많이 친해졌고 이로 인해 에드거가 폭풍의 언덕에 놀러오는 경우가 갈수록 늘어났다. 이 과정에서 에드거와 캐서린의 사랑이 키워졌고 이에 반해 히스클리프의 고독은 커져만 갔다. 어느 날 에드거는 캐서린에게 청혼했고 캐서린은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캐서린은 에드거를 진심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에드거가 외적으로 잘생겼고, 젊고, 성격이 밝고, 돈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즉, 에드거의 물질적인 조건이 좋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스클리프가 아닌 에드거를 택한 이유는 에드거와 결혼하면 인근에서 가장 지체 높은 여자가 될 수 있지만 히스클리프와 결혼하면 자신도 천해진다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케서린이 넬리에게 전하는 과정에서 히스클리프가 몰래 엿듣게 되고 충격을 받은 히스클리프는 폭풍의 언덕을 떠나게 된다.히스클리프가 떠난 후 에드거와 케서린은 결혼을 했고 이 둘은 티티새를 지나는 농원에서 알콩달콩 행복하게 지내게 된다. 어느 날 히스클리프가 180도 변해 케서린을 되찾으려고 돌아왔다.그에게 그녀는 이미 찢긴 존재였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녀를 망가뜨린 현실에 복수하는 것 뿐이었다. 폭풍의 언덕에서 살게 되었는데, 그는 힌들러와 카드놀이를 하며 그의 재산을 노리기 시작했다. 결국 힌들러는 모든 재산을 그에게 뺏기고 만다. 한편 케서린은 히스클리프가 없어진 동안 히스클리프를 많이 그리워 했고 그가 돌아온 후로는 둘이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 과정에서 에드거의 동생인 이사벨라가 히스클리프의 겉모습을 보고 그에게 반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케서린은 그녀를 난감하고 부끄럽게 하기 위해 히스클리프에게 그녀가 지켜보는 앞에서 그녀가 그를 좋아한다고 비웃었다. 히스클리프는 이 사실에 대해 관심없는 척 하였지만 히스클리프는 복수를 위해 이사벨라에게 관심있는 척하고 사랑을 키워나가는 척 한다. 이를 계속 지켜보던 에드거는 화가나 히스클리프의 출입을 금지시켰고 케서린과 싸우게 되는데 이때부터 케서린은 병이 나기 시작했고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이 사이에 히스클리프는 이사벨라와 결혼을 하게 되어 이사벨라는 폭풍의 언덕으로 오게 되었으나 그의 진심을 깨닫고 바로 후회하며 폭풍같은 삶을 살게 된다.케서린의 병이 악화되어 죽게 된 후로 에드거는 그의 딸 ‘에드거 케서린’을, 이사벨라는 거처를 옮겨 아들 ‘히스클리프 린턴’을 키우며 살게 된다. 조금 후에 이사벨라는 죽고 그의 아들을 에드거가 키우려고 하였으나 히스클리프가 자신의 아들이라며 빼앗아 간다. 그는 린턴이 허약하다며 짜증을 부렸으나 린턴이 자신의 재산을 상속하고 에드거의 딸 케서린과 결혼하면 티티새를 지나는 농원까지 자신의 땅으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끝까지 키웠다.에드거 쪽에서는 케서린을 절대 폭풍의 언덕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막으려고 노력했으나 히스클리프의 방해로 케서린은 결국 폭풍의 언덕에 들어가 린턴을 만나게 되었고 그 이후로 편지를 나누며 사랑을 키운다.하지만 린턴은 그의 아빠인 히스클리프의 폭력과 협박으로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이였고 케서린도 히스클리프의 폭력과 협박을 받는다. 결국 둘은 결혼했고 케서린의 악몽같은 삶이 시작되었다. 이로써 히스클리프는 부모 잃은 천한 사람에서 출발하여 폭풍의 언덕과 티티새를 지나는 농원의 사람들을 모두 몰락시키고 자신의 것으로 만든 사람이 된 것이다.
    독후감/창작| 2015.10.01| 3페이지| 1,000원| 조회(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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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작품에 있는 일본인의 문화와 생활
    일본 대중문화의 이해일본의작품 속 일본문화-일본인의 생활에 대하여-ⅰ. 검도- ‘원피스’에서 반영된 일본의 검도 문화ⅱ. 궁도- ‘이누야샤’에서 반영된 일본의 궁도 문화ⅲ. 교육- ‘이누야샤’에서 반영된 일본의 교육 제도ⅳ. 술- ‘삼가 아뢰옵니다, 아버님’에서 반영된 일본의 술 문화ⅴ. 야쿠자- ‘의리없는 전쟁’에서 반영된 야쿠자ⅵ. 온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반영된 일본의 온천 문화ⅶ. 결론ⅷ. 참고 문헌, 참고 사이트ⅰ.검도원피스에 반영된 일본의 검도 문화 (유투브 동영상 5분44초)이 장면에서는 카쿠와 조로가 다투는 장면을 보여준다. 여기서 나는 조로가 자신의 특기인 검술을 쓰는 것을 보며 이것이 일본의 전통 무술을 반영한 것이라 보고 아래와 같이 조사하였다.검도는 칼로 몸을 지키고 적을 쓰러뜨리는 것이다. 7,8세기경부터 행해져 16세기경에 급속히 발전하여 여러 유파가 생겨났다. 17세기 이후 검도는 기술과 함께 정신을 가다듬는 데에 중점을 두고 불교, 유교 특히 선종의 영향에 의해 도덕적으로 수련되어 왔다.검술은 무사의 교양으로서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메이지유신이 되어 무사 계급의 소멸, 폐도령의 실시, 게다가 신설된 군대의 서양식 병제 채용 등의 영향도 있어 검술은 활동의 장소를 잃고 쇠퇴의 길을 들어섰다. 그 후 메이지 10년에 큐슈를 무대로 한 서남 전쟁에서의 발도대의 활약 등이 평가받아 경찰에서 검술, 격검을 훈련에 적극적으로 채택하거나 대학,고등 전문학교 등에서도 이것을 실시하는 곳이 증가해 검술에 대한 세상의 인식도 바뀌었다. 메이지 28년에는 무술의 통괄 단체로 일본 무덕회가 생기고 동44년에는 중학교 정 과목으로 채용되는 등 검술은 활기를 되찾으면서 다이소시대에 접어들게 된다.쇼와에 접어들어 검도는 전성기를 맞이하지만 1941년 제 2차 세계대전 돌입 이후는 여러 가지의 제약이 더해진다. 한층 더 전황이 악화된 1944년 이후는 일반 검도 시합, 연습은 거의 할 수 없게 되었다. 1945년 8월의 패전으로 점령 정책에 의시합을 벌이는데 각지의 참가자들은 전통의상을 차려입고 활 실력을 겨룬다. 1949년에 일본 궁도협회가 창설됨에 따라 궁도는 스포츠로써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일본의 활은 나무와 대나무를 접합해서 만든 것으로 길이가 약 2m 긴 것을 사용한다.궁도시합에서 각 선수들은 28~60m정도 떨어져 있는 과녁을 향해 활을 쏜다. 약 2.21m의 활은 나무와 대나무를 붙여서 만든다. 궁도의 활은 나무나 대나무를 모아 붙인 것으로 길이는 2m 정도이다. 대나무로 만든 화살을 사용하며 오른손으로 유가케라고 하는 장갑을 낀다. 궁도의 또 다른 형태로는 과녁을 가장 많이 맞히는 선수가 우승하는 경기가 있다. 양궁과의 차이점은 궁도가 자세에 중점을 둔다는 점이다.어떤 경기에서는 선수의 자세가 점수로 반영되기도 한다. 말을 타면서 활을 쏘는 야부사메는 가마쿠라시대에 생겨났는데 아직도 가마쿠라의 쓰루가오카 하치만구 신사에서 행해지고 있다. 박정의. 일본,일본인의 이해. 132쪽,133쪽ⅲ.교육이누야샤에 반영된 일본의 교육제도 (유투브 동영상 21분 17초)이 영상의 주요내용은 가영이가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기 위해 공부하고 시험을 치러가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고등학교를 가기 위한 시험은 치지 않는데 여기서는 ‘인생의 중대사‘라고 여기며 열심히 준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일본의 교육에 대해 조사하였다.19세기 전반까지의 봉건시대에도 백성들 사이에는 자주적인 교육열이 높았다.당시는 무사계급이 군사 담당과 더불어 행정 담당자로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필요한 교양, 도덕, 무도를 가르치는 한코가 각지에 설치되어 있었다. 서민들은 생활에 필요한 읽기, 쓰기, 주판을 가르치는 데라고야 라고 하는 작은 학교가 전국에 2만여 개나 지어져 있었다. 이 데라고야는 누구의 구속도 없이 학년도 결정되지 않은 자유로운 학교였다. 확실하지 않지만 40% 이상의 서민들이 여기서 배웠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메이지 시대에 이르러서 일본의 근대화와 더불어 정부는 서양의 학문을 도입하여 산업, 문화를 발달시키학교, 상업고등학교, 수산고등학교가 있다. 고등학교는 국립도 있으나 공립과 사립이다.대학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자가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입학한다. 대학은 기술 중심으로 넓게 지식을 익히는 곳이며 깊게 전문의 학예를 교수 연구하고 지적, 도덕적 응용능력을 발전시킨다. 즉 대학은 교육기관임과 동시에 그 자체는 학술연구기관으로서의 역할도 지니고 있다. 수업 기간은 일반학부는 4년이지만 의과나 치 의과는 6년이며 대학원은 수사과정 2년, 박사과정 3년이다. 또 대학원 과정을 5년으로 해서 박사과정 전기 2년, 후기 3년으로 하는 대학도 있다. 대학은 국, 공, 사립이 있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사립이 많다. 이 밖에 단기대학 2년, 고등전문학교 2년이 있다. 박정의. 일본,일본인의 이해, 지식과 교양 167쪽,168쪽ⅳ.술 문화삼가 아뢰옵니다, 아버님 에 반영된 일본의 술문화 (5화 53분 49초)위 장면에서는 술을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일본의 술 문화는 술 예절부터 술의 종류까지 우리나라와 다른 것이 많다.일본에서는 한손으로 따르고 계속 첨잔하는 것이 예의이다. 한국과 달리 술을 권할 때에는 한손으로 따라도 된다. 특히 맥주는 한손으로 따르는 사람이 많다. 또한 한손으로 받아도 실례가 되지 않는다. 특히 남자의 경우 오른손으로 컵을 들고 그냥 받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상대방의 잔에 술이 조금 남아 있을 때에 술을 따르는 것도 한국과는 크게 다른 점이다. 이야기에 열중하여 상대방의 잔을 빈 채로 오랫동안 놔두어서는 눈치 없는 사람으로 오해받기 쉽다. 첨자는 한국에서는 금기이지만 일본에서는 미덕인 것이다.또한 일본에서는 잔을 돌리는 법이 없다. 특히 운동부의 합숙소 등에서 친한 사이끼리 술을 마실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잔 돌리기란 없다. 초면일 경우 한국식에 따라 친근감의 표시로 자기가 마신 잔을 상대에게 권하면 대부분의 사람으로부터 ‘저는 못 마시기 때문에...‘란 말과 함께 슬그머니 거절 당하고 말 것이다. ‘모처럼 술을 권했는데 무례한 사람이다‘ 등으로 생각하지 나무 향과 술 향이 어우러져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맛을 낸다.소주는 일본어로 쇼츄라 한다. 한국처럼 스트레이트로 마시거나 혹은 멕소롱이나 오이를 넣어서 마시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개는 ‘사와’라는 탄산음료를 섞어서 마신다. 사와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어서, 레몬사와, 매실사와 등이 있다. 여성에게 특히 인기가 있다. 또한 우롱차를 섞어서 마시는 사람도 있다. 대개는 얼음을 넣어서 컵으로 마시곤 하는데 추울 때에는 뜨거운 물로 희석하여 마시기도 한다.위스키 값은 한국보다 싸므로 위스키 애호가가 많다. 제일 대중적인 방법은 미즈와리로 물과 얼음을 넣어 마시는 것이다. 요즘에는 항공사의 기내 서비스에서도 미즈와리라 부르면 통할 정도로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다. 한국에서처럼 포켓사이즈의 위스키병과 우유를 옆에 두고 스트레이트로 쭉 들이키며 마시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일본의 바나 술집에서는 위스키를 잔으로 얼마든지 주문할 수가 있다. 이 경우에는 미즈와리 싱글, 미즈와리 더블 로 주문한다. 그리고 병째 주문해 마시다가 남은 것은 일정 기한까지는 보관해 준다. 자기 이름을 병에 적어뒀다가 다음에 갔을 때에 마실 수 있다. 따라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해서 억지로 급히 다 마실 필요는 없다. 대개 약 3개월간은 보관해 준다.와인을 딱 한잔 마시고 싶을 때에는 글라스 와인으로 주문하면 된다. 인원수가 많을 때에는 보틀 이라 말하면 병째 가져다 줄 것이다. 서양에서는 고기에는 붉은 와인, 생선에는 백 와인을 마신다고는 하지만 일본에서는 그처럼 까다롭지는 않다. 자기에게 맞는 것을 주문하면 된다. 칵테일은 대부분이 한국과 이름이나 만드는 방법이 같다. 박정의, 일본,일본인의 이해, 지식과 교양, 85쪽 86쪽ⅴ.야쿠자의리 없는 전쟁에 반영된 일본의 야쿠자 (29초-야마모리 요시오 두목을 중심으로 조직을 결성한 설명 부분부터)의리 없는 전쟁은 비정한 야쿠자 세계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당시의 실제 사건들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야쿠자들의 활약상과 그들 와 도움을 받는 대신 오야분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받쳐야 한다. 야쿠자의 이러한 체계는 스승과 제자, 주인과 시종, 그리고 두목과 부하간의 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어 오야분은 고분에 대한 결정적인 권위를 행사할 수 있다. 때문에 야쿠자 집단 내에서 오야분과 고분의 관계는 대단한 힘과 단결을 조성했으며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주군과 무사와의 관계를 오야분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는 오야분과 고분의 관계로 표방할 수 있었다.야쿠자가 오늘날의 바쿠토, 데키야, 구렌타이라는 각기 성격이 다른 3대 집단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도 제 2차 세계대전 적후였다. 이 시기에는 구렌타이라는 청소년 폭력 집단이 생겨나 야쿠자에 가세하였다. 구렌타이는 마피아의 일본적인 형태라고 볼 수 있는 조직으로서 실업자나 망명자들이 그 조직을 이루었다. 그들은 주로 암시장 거래를 했으며 한국 노동를 억압하기 위한 폭력조직으로서 정부에게 고용되기도 했다. 야쿠자는 각 집단의 특성을 이어받아 누구누구 잇카라는 뜻으로 이름 뒤에 무슨 무슨 구미나 가이를 붙이면서 각각의 조직체를 형성 해 나갔다.오늘날 야쿠자들은 대략 7대 폭력 조직으로 구분된다. 그 중에서도 야마구치구미, 스미요시카이, 이나가와카이 등이 3대 전국 조직으로 일본에서는 이들 3대 조직을 3대 집안이라는 의미의 ‘고산케’라 부른다. 이 중에서도 가장 큰 조직은 야마구치구미로 경찰청에 따르면 1995년 말을 기준으로 전국 폭력단 조직원은 약 46,600명으로 야쿠자의 약 40%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 경찰은 1992년 폭력단원에 의한 불법 행위의 방지 등에 관한 법률로서 일명 폭력단 신법을 발효하였는데 전국의 폭력단 조직의 세력이 약화되어 가는 반면 이들 ‘고산케’조직은 중소 폭력단을 흡수하면서 그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야쿠자 전체의 연간 수입은 7조 엔에서 많을 때는 9조 엔을 넘나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폭력단원 한 명이 벌어들이는 금액으로 계산하면 1인당 연간 평균 7천 400만 엔의 매상을 올리는 셈이 다.
    생활/환경| 2015.10.01| 13페이지| 2,000원| 조회(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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