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의 세레나데(Serenade)-「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읽고-초록본 도서를 선정한 이유임과 함께하는 본 서평의 목적은, 「인간불평등기원론」이 가지는 핵심적인 골자인 ‘불평등’ 이 어떠한 연유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문화 혹은 문명을 인간이 창조한 모든 것이라고 규정한다면, 불평등은 문명의 처음부터 현재까지 인류와 함께하고 있다. 불평등은 근래에 와서야 문제의식과 함께 재발견되기도 한다. 가령, 존 스튜어트 밀의 저서인 「여성의 예속」에서 지적된 것이나 혹은 전근대까지의 계급제도처럼, 이전에는 불평등하다는 인식이 만연하지 않았던 것들이 오늘날에 와서는 불평등과 인권을 논함에 있어 중추적인 기제가 되어 많은 논의들을 야기한다. 어째서 우리는 불평등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된 것일까? 불평등함의 범주는 어디까지 확장이 되는 것일까? 우리가 평등을 외치면서도 불평등을 놓지 못하는 것은, 불평등함이나 평등함을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기 때문인 것일까?1. 들어가기본격적으로 장 자크 루소의 저서 「인간불평등기원론」 에 대한 해제와 서평을 기술하기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과정들이 있다. 그것인 본 서평에서 하지 않을 일과 할 일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먼저 필자가 하지 않을 일은, 루소의 다른 저서인 「사회계약론」이나 「에밀」 과 같은 다른 저작들을 끌고 들어와 루소의 모순성에 대해 지적하는 것이다. 저자가 남긴 저서는, 그것을 기록하기까지 그가 보내온 시간이며 담아낸 세계인데, 이 방대한 것들 중 논리적인 충돌이 있어 보이는 몇 가지만을 어설프게 지적하고, 그 외의 타당함 들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은 비겁함이다. 루소에게는 300년 전의 세상과 천재성이 있다. 필자에게는 그처럼 천재성이나 탁월함 같은 것은 없으나, 산처럼 쌓인 역사적 지성들의 담론과 비판들을 빌려올 환경이 있다. 또한 루소는 꽤 예리하게 미래를 생각했으나, 필자는 그가 추론한 미래를 과거로 두고 있다. 이러한 시간들의 차이가 안겨준 위세를 무기삼아 호가호위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반대로, 본 서평에서 충실하게 진행할 사항은 「인간불평등기원론」에 담긴 전반적인 내용들의 간략한 요약과 이에 대한 감상들이다. 루소는 민주주의, 공화주의, 사회주의 및 전체주의 등 다양한 정치철학의 근거들로 활용되었는데, 이는 그만큼의 많은 사람과 집단들이 그를 사랑했음에 대한 방증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의 견해와 논리에, 자신의 준거집단에 루소라는 거목이 힘을 보태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즉, 루소의 모호성과 루소에 관한 여러 가지 다양한 해석과 담론들은 그에게 바쳐지는 세레나데(Serenade)와도 같다.그러나 그들은, 마치 세레나데라는 어원처럼, 루소를 달빛이나 저녁노을에 비추어보기를 더 선호했을 것이다. 루소가 무엇을 보았는지 보다 루소가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했을 것이다. 정치나 정치철학이란 언제나 그렇다. 같은 것을 보더라도, 더 많은 것을 더 그럴듯하게 설명해야 한다. 그렇기에 필자는 본 서평에서 루소에 대한 사랑보다는 루소가 사랑한 것들을 조명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 그리고 루소가 사랑한 것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사랑을 담보하고 있는지에 더 많은 흥미를 느낀다.따라서, 본 도서를 선정한 이유임과 함께하는 본 서평의 목적은, 「인간불평등기원론」이 가지는 핵심적인 골자인 ‘불평등’ 이 어떠한 연유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문화 혹은 문명을 인간이 창조한 모든 것이라고 규정한다면, 불평등은 문명의 처음부터 현재까지 인류와 함께하고 있다. 불평등은 근래에 와서야 문제의식과 함께 재발견되기도 한다. 가령, 존 스튜어트 밀의 저서인 「여성의 예속」에서 지적된 것이나 혹은 전근대까지의 계급제도처럼, 이전에는 불평등하다는 인식이 만연하지 않았던 것들이 오늘날에 와서는 불평등과 인권을 논함에 있어 중추적인 기제가 되어 많은 논의들을 야기한다. 어째서 우리는 불평등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된 것일까? 불평등함의 범주는 어디까지 확장이 되는 것일까? 우리가 평등을 외치면서도 불평등을 놓지 못하는 것은, 불평등함이나 평등함을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기 때문인 것일까?2. 풀어내기ㄱ. 1절 자연상태와 평화로움에 대한 사랑‘인간은 튼튼한 신체를 가지는 존재이며, 상호 간에 평화로운 상태로 존재한다.’ 는 그의 문장에서 그가 자연상태와 평화로운 상태에 많은 관심과 의미를 두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이끌어 낼 수 있다. 사실 자연과 평화라는 양자는 그의 저서에서는 거의 동의어로서 사용되는 바, 이들을 굳이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수 있다. 어쩌면 자연상태라는 것은 루소에게 있어 하나의 노스텔지어(nostalgia)일지 모른다. 평화롭고 평등한 상태, 그리고 이에 대한 루소의 사랑은 아마도 이것이 부재한 전제군주정이나 부의 집중화에 대한 염증으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루소가 상정하는 자연상태는 사회가 구성되기 이전의 시대이다. 원시시대라고 오인하기 쉬운 부분인데, 그보다는 원시시대와 유사한 가상의 시대와 가깝다. 이 시대의 인간들은 다툼이나 투쟁, 혹은 소유에 대한 욕망을 소유하지 않는다. 자연의 인간은 그저 생존에 필요한 육체적인 욕구들로부터 벗어나지 않고 현재의 욕구충족에 만족한다. 즉, 이들은 어떠한 미래나 계획을 상정하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단순한 욕구만이 존재할 뿐, 어떠한 욕망을 가지거나 그것으로부터 종속되지 않는다. 앞서 기술했듯, 문화를 인간이 창조한 모든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이들은 완벽하게 문화 이전의 시대에 사는 이들이고, 또 그렇기에 가상의 시대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들에게는 욕망조차 창조되지 못했기 때문이다.바로 이 부분에서, 루소가 가진 자연상태에 대한 사랑이 상당부분 특이점을 가진다. 루소는 18세기를 살아간 문명인이고, 지식인이다. 현대만큼은 아니지만 많은 안락함과 안정들이 존재했을 시기이다. 보통의 인간들은 이상을 지향 할 때, 현재 자신의 처지에서 개선되는 상황들을 전제한다. 다시 말해, 자신이 누리고 있는 긍정적인 요소들은 유지한 채 부정적인 상황들이 개선되는 상태를 상정한다. 그러나 루소가 이상적이라고 주장한 자연상태는, 이러한 거의 모든 것들이 배제된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담론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가 문명자체에 염증을 느끼고 염세주의에 빠졌다고 받아들이는 것을 권장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불평등함이 만연한 상황을 사랑하지 않기에, 불평등의 요소들을 순차적으로 제거해나가다 보니 자연상태가 남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ㄴ. 2절 인간과 자유로움에 대한 사랑루소는 일반적으로, 보다 정확히는 고등교육과정 이전의 중등교육과정정도의 수준에서, 맹자(孟子)와 함께 성선설을 주창(主唱)한 이로 꼽히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정말 정확한 범주화인지는 한 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인류는 무엇인가를 명확히 정의하고 싶어 하는 욕심만큼이나 무엇인가를 그냥 포기해버리는 욕심 역시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나 헤겔의 정신, 그리고 본문에서 따로 다루지는 않겠으나 루소의 일반의지와 같은 어떠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적인 장치들의 등장과 활용은 전혀 생소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정확한 분류와 정의에 집착하기보다 포기하는 것은 굉장히 편하고 효율적인 방안 중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루소가 성선설을 주장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이 다 들어맞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만일 루소가 가정한 인간이 사회상태의 인간에서 출발했다면, 위의 명제에는 어떠한 오류가 지적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루소는 자연상태의 인간을 그 시발점으로 보았다. 그 곳의 인간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보다 정확하게는, 악할 필요가 없다. 독해지고 악해져야 할 상황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의 인간은 선하다기보다 그저 자연스러운 것에 가깝다. 루소가 인간을 도덕적인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조금 나중의 과정에 대해서이다. 그의 표현에 따르자면, ‘불행한 우연’들이 연이어 일어나 사회상태로 진입했을 때, 이들이 상실한 자연스러움을 복원하기 위해 도덕적이어야 했던 것이다.루소의 견해에 따라 자연상태의 인간이 선악이 없는 어떠한 디폴트(default) 상태라고 했을 때, 변화를 맞이한 인간이 가야 할 길은 도덕의 길이었다. 여기에서 인간에 대한 루소의 사랑이 상기될 수 있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위해에 있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여기서 이 위해는 인간 본성이 아닌 사회적인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위해에 대한 대응은(물론 사회계약이 제도적인 방안이다) 근원적으로는 도덕적인 교육이다. 홉스나 마키아밸리와는 대조적인 접근이다. 물론 루소도 일반의지라는, 강력한 주권자의 제도적 힘을 상정했지만, 선한 인간에 대한 가능성을 믿고 있다고 해석해 볼 여지가 충분하다. 그가 꿈꾼 것은 선한 인간을 길러내어 선순환을 이어지게 만드는 것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