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조의 불교와 석굴중국의 불교인도불교가 서역에 전해지면서 경전이 서역어로 번역되자 거기서 서역불교가 성립되었으며, 그것이 다시 중국으로 전해져서 중국불교가 이루어졌다. 불교가 본격적으로 중국에 정착하게 된 것은 서역과 관련이 깊은 유목민들이 화북을 지배한 오호십육국 시대부터였다.남북조 시대에 불교가 성행하게 된 것은 난세의 지속과 민중의 아픔이라는 시대상황과 관련이 있다. 또한, 국가의 지배자가 통치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불교의 주술적 기능을 이용하려 할 때 필연적으로 대사찰, 대석불을 조영하고 대법회를 개최하였고 이를 위해서는 국가의 지배자나 권력자의 보호와 지원이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는 중국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 일본, 그 밖에 동아시아 각국에서 불교가 발달하게 되는 비슷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남북조 시대의 상황(서기 420-589년)‘동진십육국’과 ‘남북조’시기는 중국사에서도 가장 복잡한 시기이다. 정치적으로 남방에는 한족이 지배하고, 북방에는 소수 이민족이 권력층을 이루어 다수의 한족을 지배하는 형태를 갖고 있었다.이 시대는 두 세번의 불교박해사건이 일어나기는 하였지만 역대 왕조가 거의 불교에 대해 보호정책을 폈기 때문에 동진시대를 이어 불교는 대단한 발전을 이루었고, 중국의 민중 사이에 확고한 기초를 다졌다. 일반적으로 남북조는 동진시대에 이어서 불교연구시대 혹은 불교전파시대라고도 불리는데, 수·당시대의 불교종파시대에 대한 준비이기도 하였다. 더구나 이 시대의 불교는 남북의 지리적 관계로 인해 사상이 서로 달랐다.남조의 불교한나라 때 중국으로 들어온 불교는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르러 크게 발전했다. 남조의 불교는 귀족사회의 고답적인 사상의 논의에 의하여 교학이 발전했다는 것과 법사의 형성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남조는 도교의 영향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북조와 같이 도교와 불교의 대립이 심하지 않았다.* 양 무제의 불교양 무제(464-549)는 천감(天監) 원년(502) 4월 8일 황제에 즉위하였으며 549년까지 거의 반세기동안 양나라를 통치했다며, 일상생활은 거의 출가자와 같은 엄격한 계율주의로 일관하였다. 무제는 동태사를 비롯하여 많은 절을 지었으며 이들 절에 가서 자주 법회를 열었다.양무제는 무엇보다도 불교가 유·도 양가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양무제는 유교는 윤리도덕을 지키게 하며, 도교는 지나치게 득실을 따지지 않게 하고, 불교는 극락세계로 이끌어 주고 있으며, 그 근원은 모두 같다는 ‘삼교동원(三敎同原)’설을 제창하였고, 공자 노자 석가를 삼성(三聖)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양무제의 입장은 후대에 ‘삼교일치’의 원형으로서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세속적 권력의 유지를 위한 통치술의 일환으로 불교를 이용하였다는 비판을 받게 하는 빌미를 주었다.무제의 불교정책과 봉불행위는 이후 남북조 및 수·당 등 중국의 여러 황제 및 고대 한국과 일본의 왕권에 미친 영향이 자못 컸다. 무제의 불교정책은 각 나라마다, 각 왕조마다 선택적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이런 차이야말로 각 왕조 불교정책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무제 불교정책의 이해는 양나라 이후 동아시아 왕권에 의해 시행되는 불교정책의 특징을 고찰하는데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북조의 불교(1)북위 불교북위불교는 크게 융성하였는데, 특히 교단의 발전이 눈부셨다. 동진시대에 이어 크게 발전하게 된 북위 불교의 세력은 강남 불교보다 훨씬 우위에 있었다. 북위의 도무제를 비롯하여 명원제, 효문제와 선무제 등 역대의 황제들은 모두 정치적 필요와 개인적 신앙으로 불교를 중시하였다. 태무제에 이르러 폐불사건이 일어나게 되니 이것은 소위 불교도의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이라고 하는 중국 불교사상 네 차례에 걸친 폐불사건 가운데 그 첫 번째에 해당한다. 이 사건은 태무제의 북방통일사업에 이은 내정혁신에 따른 것으로 도·불 이교의 세력다툼, 북방민족과 한민족과의 투쟁, 국가 재정상의 문제, 교단의 타락이 그 원인이 되고 있다.그도 즉위 초에는 불교를 신앙했지만 최호와 그와 결탁한 도사 구겸지의 영향으로 점차 도교를 신앙하게 된다. 438년, 태무제는봉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유교 중심문화를 건설하고자 기도한 것이다. 한편 태무제는 당시 승니의 타락과 교단의 부패가 피폐하는 것을 보고 불교교단의 대정리를 단행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태무제와 이를 권유한 최호와는 다소 그 목적이 달랐다. 태무제에 의한 법난으로 북위의 불교는 일시적으로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태무제가 붕어하고 문성제가 즉위하자 곧바로 부흥의 조칙을 내렸으며 명승 담요(曇曜) 등의 활약으로 불교는 재차 부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즉 폐불이 오히려 불교부흥의 자극제가 되어 불교전파가 가속화될 수 있었다.(2)북주의 폐불서위를 이은 북주는 무제 때에 이르러 중국 불교사상 두 번째 폐불 사건이 일어났다. 먼저 이 사건은 그 원인에서 볼 때, 무제의 정치적 개혁에 희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거기에는 국가 재정상의 문제, 도·불 이교의 대립, 교단의 타락, 고답적인 불교에 대한 불만 등이 발단이 되고 있다.당시 불교의 사원과 승려의 수가 날로 증가하여 국고의 수입이 점차 감소하여 국가경제가 위협을 받을 상황이었다. 무제는 불교의 탄압을 위하여 여론을 조성하고자 일곱 차례에 걸쳐 문무백관과 승려, 도사를 소집해 儒佛道 삼교의 선후를 논하게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매번 불교는 도교와의 논쟁에서 이겨 빌미를 찾을 수 없게 되자 무제는 건덕 3년(574) 5월, 불·도 양교를 금지하고, 경전과 불상을 모두 없애며, 승려와 도사를 모두 환속하고, 사원과 도관의 재산을 몰수하여 王公에게 하사하라는 조칙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무제의 본뜻은 불교탄압에 있었기 때문에 그 피해의 대부분은 당연히 불교에서 입었다. 이 불·도 폐지와 함께 곧바로 통도관(通道觀)을 설치하여 도교와 불교의 우수한 인재 120명을 뽑아서 통도관학사라 이름붙이고 명맥만을 잇게 하였다. 하지만 이름에서 나타났듯이 이 기관은 완전히 도교적인 성격이 강하였고, 불·도 이교에서 학사를 뽑는다고 하더라도 거의 도사가 중용되었고 불교 쪽에서는 한두 사람이 참가했을 따름이었다.남북조 시대의 불 불교문화가 융성해지기 시작하였다. 불교의 전파와 더불어 불교미술도 함께 전래되었다. 한 멸망 후 무덤에 금옥을 매장하지 말라는 위의 조조와 조비의 명령으로 말미암아 ‘벽옥’으로서의 벽은 무덤에서 점점 그 자취를 감추었으며 벽의 상징성을 대신한 것이 보주였다. 보주는 마니보주라 불리며 부처의 사리 등 많은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어 불교예술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보주문이 유행하기 시작하는 것은 6세기 중반 이후이다. 남북조시대의 보주문은 한 대에 그려졌던 벽 도상을 계승한 것으로 연화좌 위의 보주, 보주화, 그리고 공중 부유형 보주문 등 그 형태와 표현되는 위치 등에서 공통적인 특징을 보여준다.남북조 교단의 차이불법과 왕법과의 문제에 대해서 강북은 일치하는 경향을 보인 반면 강남은 대립의 관계였다. 북위 때 승관이며 도인통인 법과는 태조 도무제를 “그는 현세의 여래이다.”고 하면서 사문은 모두 천자에게 공경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또 북주 무제의 폐불 때 폐불 단행을 유도한 위원숭은 “북주 주인은 바로 여래이다.”라고 하였으며, 임도림이 북주 무제에게 올린 불교부흥의 상소에도 ‘제왕은 곧 여래이며, 왕공은 곧 보살이다.’라고 발한 것은 분명하게 국가와 불교의 일치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 같은 점들은 절대적 전제 군주 하에서는 당연한 귀결인 것이며, 북방 호족국가에서 볼 수 있는 불교신앙의 한 측면이다.한편 강남 한민족의 귀족 정치 하에서는 그와 같은 일치는 찾아볼 수 없다. 불법과 왕법의 대립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여기서는 항상 왕에 대한 불경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남조에서는 어디까지나 출가본분을 주장하여 방외의 선비로서 왕법의 밖에 불법을 두고자한 것이다. 승니의 범죄도 거의 불교계율에 근거했다.이와 같이 남북조에서는 승니의 국가의식에 대한 견해가 서로 달랐으나 양쪽 다 불교를 국가적인 종교로 삼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한 것만은 견해를 같이 하고 있다.북방불교는 강남의 귀족불교나 산림불교보다 더 일반화되고, 사회화되어왔다. 물론 이러들이 여기에 모였다. 계를 지키고 경을 독송하며 교리를 논의 하는 등 진지한 모임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귀족계급이 지식층으로서 즐기는 여유롭고 한가한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이 같은 일은 당시 불교교단의 일면이며 불교발전의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다.남북조 불교가 후대에 끼친 영향남북조의 불교는 위에서 말했듯이 대단한 발전을 이루었으며 사원과 승니의 수는 중국불교사에서 가장 많았다. 하지만 그 내용은 아직 서역불교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즉 사상적으로 통일된 것이 아니라 어수선한 그대로 보급된 것이었다. 남북조의 불교는 수나라 시대의 불교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 북주 폐불 이후 수나라의 불교 부흥사업은 남북불교를 통합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나아가 남북조시대의 수입 불교가 중국불교로서 새롭게 조직되어진다. 북주의 폐불은 불교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수·당 불교가 융성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도 할 수 있다.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불교는 거대한 사회세력으로 성장하였으며 수나라에 의해 분열의 시대가 끝이 나고 중국 대륙이 통일 되면서 전과는 다른 불교사가 전개되었다.남조의 석굴남조의 시기는 통치 집단의 내부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혼란했던 시기지만 빈번하게 왕조가 교체되면서도 각 왕조의 통치자는 시종일관 불교를 후원하였다. 남조의 불교는 위진현학과 하나로 융합되면서 청담현허, 강경논학이 성행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강남지역의 불사는 주로 규모가 큰 사탑을 흥건하는 데 주력하였다. 문헌기록에 의하면, 남조에는 제왕이 직접 건설한 사원이 아주 많았다 한다. 예를 들면 송문제가 건립한 천축사, 보은사, 효무제의 약왕사, 신안사, 제 무제의 제안사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양 무제의 불교 신봉이 가장 열렬하여 가장 많은 사원이 세워졌으며, 건립된 불사 역시 더할 나위 없이 장엄하고 화려했다. 당시 도읍지인 건강에는 “500여개의 불교사원이 웅장하고 화려하였다”라 하였다. 당시 사원에 안치된 불상은 흙에 모시를 섞은 것, 금, 동을 이용한있다.
남북조의 불교와 석굴인도불교 중국불교 서역 불교 번역 오호십육국북조 남조 남방 : 한족 북방 : 소수 이민족 불교연구시대 불교전파시대 지리적 관계로 남방과 북방의 사상이 다름 .한나라 때 중국으로 들어온 불교가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르러 크게 발전 귀족사회의 고답적인 사상의 논의에 의하여 교학이 발전 법사 ( 法社 ) 의 형성 도교의 영향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도교와 불교의 대립이 심하지 않았음 . 남조의 불교양무제 : 502 년부터 549 년까지 황제로 즉위 즉위한 지 3 년 (504 년 ) 에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선포 황제보살 , 구세보살 , 보살천자로 존칭 격한 계율주의 동태사를 비롯한 많은 절 건립 양무제의 불교불교가 유 · 도 양가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보았음 삼교동원 ( 三敎同原 ) 설을 제창 삼교일치의 원형으로 평가 받기도 하지만 , 권력 유지를 위한 통치술로 이용하였다는 비판을 받기도 함 양무제의 불교북위 불교는 크게 융성하였는데 , 특히 교단의 발전이 눈부셨음 동진 시대에 이어 크게 발전한 북위 불교의 세력은 강남불교보다 훨씬 우위 에 있었다 . 북위의 불교삼무일종 ( 三武一宗 ) 의 법난 가운데 하나 원인 : ① 도 , 불 이교의 세력다툼 ② 북방민족과 한민족과의 투쟁 ③ 국가 재정상의 문제 ④ 교단의 타락 최호와 구겸지의 건의를 받아들여 50 세 이하의 모든 사문의 환속 조칙을 내림 . 태무제의 폐불사건최호 : 궁극적으로 유교 중심 문화를 건설하고자 하였음 태무제 : 승니의 타락과 교단의 부패를 보고 불교교단의 대정리를 단행하고자 하였음 태무제의 폐불사건 태무제와 이를 권유한 최호는 폐불의 목적이 다소 달랐음을 알 수 있다 .태무제의 법난으로 북위의 불교는 일시적인 타격을 입었다 . 그러나 태무제가 붕어하고 문성제가 즉위하자 곧바로 부흥의 조칙이 내려졌으며 불교는 재차 부흥기를 맞이하였다 . 태무제의 폐불사건 즉 , 폐불이 오히려 불교부흥의 자극제가 된 셈이다 .서위를 이은 북주는 무제 때 이르러 두 번째 폐불사건이 일어났다 . 원인 : ① 국가 재정상의 문제 , ② 도 , 불 이교의 대립 ③ 교단의 타락 ④ 고답적인 불교에 대한 불만 북주의 폐불불교 탄압을 위해 선후 논쟁을 시행 불 , 도교를 금지 → 대부분 불교가 피해입음 통도관 설치 , 통도관학사 선발 BUT 도교적 성격의 기관이었기 때문에 불교는 거의 참가 북주의 폐불 빌미를 찾을 수 없었음왕법과 불법 강북 강남 왕법과 불법의 일치여부교단의 발전 강북 강남 특징 강남의 귀족불교나 산림불교보다 더 일반화 , 사회화 귀족적 , 지식적 , 고답적인 풍조 가 많이 가미사원과 승니의 수가 중국 불교사에서 가장 많았음 하지만 서역 불교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기 때문에 중국화 되지 못하였음 사상적으로 통일된 것 BUT 서방문화를 중국화하려는 의지 가 나타나 있음 남북조의 불교문화북주 폐불 이후 수나라의 불교 부흥 사업은 남북불교를 통합 시켰을 뿐 아니라 남북조 시대의 수입불교가 중국불교로서 새롭게 조직 되어짐 북주의 폐불은 불교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수 , 당 불교가 융성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 볼 수 있음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불교는 거대한 사회세력으로 성장하였고 수나라에 의해 중국 대륙이 통일되면서 전과는 다른 불교사가 전개되었음 후대에 끼친 영향남조의 시기는 빈번하게 왕조가 교체되면서도 각 왕조의 통치자는 시종일관 불교를 후원 남조의 불교는 위진현학과 하나로 융합되면서 청담현허 , 강경논학이 성행 강남지역의 불사는 주로 규모가 큰 사탑을 흥건하는 데 주력 남조에는 제왕이 직접 건설한 사원이 아주 많았음 남조의 석굴석굴을 파서 불상을 만드는 것은 더욱 희소 현재 알려진 남조 석굴로는 건강 섭산攝山 ( 지금의 난징南京 시샤산栖霞山 ) 과 산시剡溪의 석청산石城山 두 곳이 있음 남조의 석굴윈강 불사의 원류는 간다라 미술양식과 인도의 아잔타 석굴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음 그런데 서방의 영향을 받기 전에 중국 본래의 전통 , 특히 북위 탁발족의 웅비하는 기상이 그 속에 담겨져 있으며 , 그 위에 간다라 아잔타를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요소가 가미되었음 후에 인도와 서방의 색채가 없어지고 새로 중국 고유의 불상예술이 창안 북조의 석굴불교가 한 대 중국에 전래된 이후 국가가 주관하고 경영한 대규모의 조영공사에 의해 개착된 최초의 국가적 석굴 윈강 석굴{nameOfApplication=Sh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