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론』 독후감 ? 냉혹한 현실 속에서 리더를 고민하다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언뜻 들어본 이름이었지만, 대학에 들어와 직접 읽어보기 전까지는 그 깊이를 전혀 알지 못했다. “마키아벨리즘”이라는 단어는 흔히 냉정하고 권모술수적인 이미지로 사용되지만, 정작 책을 읽으며 느낀 『군주론』의 진짜 메시지는 그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고, 어쩌면 인간과 사회에 대한 냉철한 통찰에 가까웠다.권력의 본질을 직시하다『군주론』은 군주가 어떻게 권력을 잡고, 유지하며, 강화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그런데 이 책은 단순한 ‘정치 전략서’가 아니다. 그 안에는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이해, 역사에 대한 통찰, 리더십에 대한 현실적인 조언이 담겨 있다. 특히 마키아벨리는 도덕과 윤리를 정치의 중심에 두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정치의 세계는 도덕과는 다른 논리로 움직인다”고 말한다. 처음엔 이 관점이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왔지만, 점차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리더는 항상 선하고 정의로울 수만은 없으며, 때론 냉혹한 판단이 필요한 순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은 “사랑받는 것보다 두려움 받는 것이 낫다”는 부분이다. 이 문장은 자칫 폭력적 권위를 정당화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마키아벨리는 단순히 ‘공포 정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이 변덕스럽고 이기적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리더가 지속적인 신뢰를 얻기란 매우 어렵다고 진단한다. 그러므로 리더는 ‘사랑받으려는 착한 의도’만으로는 통치할 수 없으며, 질서와 안정, 그리고 결과를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구절을 통해 나는 지금껏 당연하게 여겨온 ‘좋은 리더는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인식이 얼마나 단순했는지를 깨달았다.포르투나와 비르투, 그리고 나의 삶마키아벨리는 정치의 세계를 단순히 운(포르투나)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능력(비르투)을 강조했다. 그는 군주가 우연히 기회를 얻을 수는 있지만, 그 기회를 활용하는 것은 오직 준비된 자만이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개념은 나에게도 큰 울림을 주었다. 대학 생활 중 여러 선택의 기로에서 나는 종종 운이나 환경 탓을 하곤 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냉정하게 말한다. “운이 오기 전에도 준비하라.” 이 말은 정치나 군주의 삶뿐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나 같은 평범한 사람에게도 중요한 조언이었다. 결국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스스로의 능력을 단련하고 전략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삶을 바꾸는 길이라는 점을 되새기게 되었다.마키아벨리, 과연 냉혈한인가?많은 사람들이 마키아벨리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책을 끝까지 읽고 나니 그는 단순한 ‘권모술수의 대가’가 아니라, 이상주의적 환상에 빠지지 않고 현실을 직시한 관찰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비도덕적이기 위해 그런 주장을 한 것이 아니라, 현실 정치 속에서 생존하고 성취하기 위한 방식을 말한 것이다. 이상만을 추구하던 기존 정치철학자들과는 달리, 마키아벨리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토대로 리더십을 설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진정성이 느껴졌다.
Ⅰ. 서론조세희의 소설인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1970년대 이루어진 산업화의 결과로 발생된 경제적, 사회적 계급에 관하여 작성한 소설이다. 한국은 1962년 “제 1차 경제개발계획”의 실시로 경제적인 근대화와 공업화, 산업구조의 고도화가 추진되었다. 그를 통하여 1970년대에 본격적으로 산업화 시대로 진입하였고, 사회구조가 변모하였다.본 글은 조세희의 소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나타난 한국사회의 산업화로 인한 변화에 대해 알아보고, 서평을 작성하고자 한다.Ⅱ. 본론1. 1970년대 사회우리나라는 산업화 과정을 통하여 엄청난 사회 변동이 일어났다. 경제의 급성장, 근대적 산업체제의 확립, 대중문화의 확산, 도시의 확대, 물질주의 가치관의 확대 등이 변화하였고 경제성으로 인하여 계층의 차이가 생겨났다.도시 노동 계층의 성장은 불합리한 그들의 삶의 조건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고, 농촌 및 소외 지역에서는 지역 간 격차에 따른 갈등이 일어났다.그러나 1970년대는 통치 권력의 강화로 인하여 사회적 문제에 대하여 발언을 제한받았고, 그로 인하여 작가들은 현실의 문제들을 작품을 통하여 언급하게 되었다. 그들은 노동자의 삶을 통하여 산업사회의 아픔을 드러내었고, 한국 사회의 문제에 대한 문학화가 이루어졌다.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역시 소설을 통하여 노동자들의 삶을 중심으로 다루며 1970년대 산업화가 발생시킨 문제를 드러내었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작품의 독특한 표현 기법에 관한 연구도 다양하게 이루어졌으나, 본 글에서는 표현 기법보다는 작품에 나타난 1970년대 산업화가 가져온 부정적인 삶의 모습에 대하여 알아보겠다.2.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나타난 사회 문제[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는 당시 현실의 모습을 다양한 인물을 통하여 보여준다. 소외된 노동자를 난쟁이로 대변하였고 그의 현실 대응 방식은 곧 다음 세대인 자식들에게 투영되었으며 자식들의 성장과 주변인의 의식을 확대시켜서 새로운 인물들을 등장하게 한다.난쟁이 가족들은 그들이 겪는 불행의 이유를 신분의 계층성으로 인식하여 피해의식으로 노비 매매 문서 안에 갇혀 산다. 난쟁이 가족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지배와 피지배 논리에서 세습되어온 것이라는 무의식으로 인하여 그들이 모순된 사회 구조에 살고 있으면서도 신분 이동이나 상승을 꾀할 여지가 없다. 난쟁이 같은 동시대 사람들은 그들이 갇힌 구역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동시대 사람들 또한 난쟁이를 인식하지 못하며 그의 겉모습만 보고 난쟁이와 자신의 아픔을 동일시하지 못하며 그들끼리도 거리감을 조성한다.난쟁이 가족은 자신들의 삶을 터전을 잃고 “행복동”을 떠난다. 집 문제를 통하여 현실에 존재하는 구조적 모순과 그로 인하여 소외당하는 계층의 삶이 대변되는 것이다. 난쟁이 가족에게 집이란 단순하게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공간만이 아니라 못사는 사람들과 부당하게 짓눌리고 있는 사람들과 도시화에 쫓긴 사람들의 삶의 구조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회적인 상징의 기능을 한다.3.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사회 문제와 현대 사회- 영화 [기생충]을 통하여[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나타난 사회 계층 구조의 문제는 1970년대의 현실을 나타내지만 2019년 현재에 빗대어 보아도 전혀 무리가 없다. 우리나라의 산업화가 이루어진지 50년이 되었으나 산업화로 나타난 사회적 문제들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산업화로 인해 발생된 사회적 문제들은 국가적, 사회적, 개인적 차원에서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해왔으나 계층이 세습되며 부를 가진 자는 그를 더욱 늘리고 축적하여 더 큰 사회적, 경제적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목 차 TOC o "1-3" h z u Hyperlink l "_Toc6267887" 어린 왕자가 ‘만남’을 추구했던 이유 PAGEREF _Toc6267887 h 2 Hyperlink l "_Toc6267888" 동그라미, 시작과 끝이 없는 세계 PAGEREF _Toc6267888 h 3 Hyperlink l "_Toc6267889" 광활한 사막에서 우물을 찾는 것 PAGEREF _Toc6267889 h 3 Hyperlink l "_Toc6267890" 참고문헌 PAGEREF _Toc6267890 h 4개 요: 어린 왕자가 가지고 있는 아동성에 대하여 탐구하면서 『어린 왕자』를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점을 파악하고자 한다.어린 왕자가 ‘만남’을 추구했던 이유어린 왕자는 어떻게 됐을까? 결국 소행성 B612호로 무사히 돌아가서 장미를 다시 만났을까? 생텍쥐페리가 사막의 별을 보면서 어린 왕자를 추억하고 있는 조종사 회상을 통하여 어린 왕자라고 하는 존재를 소개한 이후에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전 세계 독자들은 아직도 어린 왕자를 추억하고 사랑하는 소년으로 자리하고 있다. 작품 속의 어린 왕자는 그 어디에서도 찾기 힘든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는 아동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인간은 본래 관계를 지향하고 있는 만남의 존재이고 만남을 통하여 실존적인 성장을 이루게 된다. 어린 왕자가 그토록 친구를 찾아 헤맸던 것과 같이 인간은 본래 주변 존재와 무리를 지으며 관계를 형성하고 싶어 한다.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은 단순하게 대인관계를 원만히 하고 사회생활에 있어 유리하게 하는 기술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만남이라는 것은 만남의 당사자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떠한 방향으로 삶을 전환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만남을 통하여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자신이 새로운 결단을 할 수 있도록 요구한다는 점에서 만남은 실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즉, 실존적 만남은 만남이 처음부터 어떠한 목적을 지니고 행하는 것이 아닌 계획과는 상관없이 ‘우연’으로 발생하게 되는 예측 불가능한 것이다.어린 왕자가 새로운 친구, 만남을 위해 여행을 다니나 여행 속에서 만나는 사람과는 원하는 관계를 형성하기 어렵다. 하지만 ‘우연’히 만난 여우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깊은 관계를 형성하고 작품 내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깨닫게 된다. 길들인 것에 대한 책임, 그리고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무한히 고독함 속에 있는 인간은 늘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원하고, 인격 대 인격으로 진정한 만남을 경험하는 것을 통하여 진정한 삶의 의미를 알게 된다. 어린 왕자 또한 너의 실존을 필요로 하였고, 이를 갈망하여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결국 우연히 만난 인격 대 인격의 만남을 통해 한층 더 성장하는 것이다.어린 왕자는 자신과 관계를 맺게 된 다양한 대상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상대에게 중요한 가치를 배우며 또한 전수하였고, 서로에게 실존적인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동그라미, 시작과 끝이 없는 세계생텍쥐페리가 서문에서 “그 사실을 기억하는 어른은 거의 없지만 한 때는 누구나 어린이였다.”라고 말하는 것이 이렇게 사무치는 대사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사막에 불시착하게 된 조종사가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것 또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 너무 잘 이해하는 어린 왕자를 마주하게 된 것, 어린 왕자가 떠난 뒤에도 그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린다는 건 어른이 된 이후에도 완전하게 지워버릴 수 없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내적인 아동기를 어린 왕자를 통하여 회복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어떤 성인이라고 할 지라도, 그 성인은 아동기를 거쳐서 성장하였고 아동기라는 그 시기는 비록 지나갔으나 우리 삶에서 완전하게 사라지는 건 아니다. 우리가 아동기를 시절을 기억하는 한 아동기는 계속되는 것이다.의자를 조금만 뒤로 물려 석양을 계속해서 바라보는 어린 왕자 행위에서 드러나게 되는 공간의 모습은 그 자체로 우리의 아동기를 연상하게 할 수 있다. 원은 시작과 끝, 출발점과 도착점을 어느 한 지점으로 특정할 수 없고, 그러므로 시작과 끝은 계속적으로 연결되고 상호 흡수되며 그 구분이 사라지게 되는데, 이러한 원이 가지고 있는 순환성은 완전성, 무한함, 영원성이라는 특징으로 이어지게 된다(정여주, 2006). 원형의 존재를 하고 있는 어린 왕자의 별은 결국 무한하고 영원한 순환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광활한 사막에서 우물을 찾는 것모험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 비록 실패할지도 모르겠지만 자기를 온전하게 던지는 모험은 내적 자아에 관한 스스로의 신뢰가 전제되지 않으면 시도되기 어렵다. 어린 왕자는 계속해서 이상한 어른들을 만나지만 어딘가 있을 지도 모르는 친구를 찾아서 다음 별로 가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이와 대조되게 조종사는 목이 말라서 곧 죽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광활한 사막에서 무턱대고 우물을 찾아 나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모험을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린 왕자는 목이 마르니 우물을 찾으러 가자고 조종사를 데리고서 우물을 찾는다. 멀고, 또 힘들고, 무서우나 어린 왕자는 다시 자신의 고향 별로 가기 위하여 스스로 뱀에게 물리는 모험을 하게 된다. 사막은 어디엔가 우물을 숨기고 있으며, 무거운 육체를 버리게 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은 강력한 원동력이 된다.우린 언제 이러한 모든 걸 잊게 되었을까. 누구나 언제는 마음에 품고 살았던 것을 모두 누르고 기억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아간다. 그래서 얼마 안 가 우물이 있는데도 찾기도 전에 포기하는 우를 범하고 만다.스스로 아동이 된다는 것은 지속적인 성장을 갈구한다는 의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어린 왕자는 우리에게 성장의 원동력으로 작용될 수 있을 것이다. 모자 안에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 있었듯, 나 스스로도 성인이라는 껍데기 안에 동심과 모험심을 품은 어린 아이를 늘 품고 살았으면 한다.참고문헌생텍쥐페리 저. 황현산 역. 어린왕자. 서울: 열린책들. 2015.정여주. 만다라와 미술치료. 서울: 학지사. 2006.
? i에서 I로옥분은 13살에 내선일체를 앞에 세우며 조국을 짓밟았던 일본 강요와 나라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없던 식민지 조국이 외면하여 ‘국가의 딸’이라고 하는 허울만 좋은 명분에 의하여 위안부가 됐다. 지옥과 같은 전쟁터에서 끔찍한 삶을 견디지 못하여 목을 매달고 죽으려고 했지만 정심에 의하여 구조된다. 위안부로 강제로 끌려간 소녀들은 서로 간의 자매애를 형성하게 된다.이후 정심과 자매애를 기반으로 하여 치욕의 세월을 이 악물고 견디면서 살아남은 옥분에게 ‘오늘’은 너무나 귀한 날이다. ‘나’라는 존재 가치를 증명하지도, 확신하지도 못했던 위안부 삶에서 벗어나 평범한 할머니로 삶을 보내는 시장에서 삶은 매일 매일이 너무 소중하다. 가족이 없기 때문에 동네일을 자신의 일처럼 살피면서 살아가는 옥분에게 시장은 가족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옥분은 시장의 많은 일을 살펴보고 개선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하루를 보낸다. 하지만 선의를 바탕으로 한 노력에 대해 시장 사람들과 구청 사람들은 불편하게 생각한다. 옥분의 과거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 리 없는 사람들에게 있어 옥분은 유난스러운 할머니, 그저 귀찮은 존재이다.주변의 많은 문제를 자신의 일처럼 살펴보고 이에 대하여 능동적으로 비판, 참여하는 인물로 살아가는 옥분에게 이 삶은 살아 있는 것이며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전에 위안부의 삶은 무기력한 국가에 의해 철저하게 타자화 된 삶으로 옥분의 선택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었다.하지만 옥분이 타자에서 주체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꼭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었다. 이는 위안부로서 자신의 삶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었다. 옥분은 영어로 증언을 시작하여 한국어로 변환하였다가 진실을 왜곡하고자 하는 일본인에게 일본어로 공박하는 것과 같은 다양한 언어를 구상한다. 이때 언어는 권력이 된다. 이전의 일본의 언어는 피식민자인 조선에게 강요되었고, 언어가 왜곡되고 변형되었다. 하지만 옥분은 그 왜곡에 저항한다. 영어는 공적 언어로 활용하고 한국어는 주체적인 언어이다. 일본어는 핍박당하고 왜곡 당했던 삶의 파편이다.옥분에게 일본어는 끔찍한 기억이다. 일본인에게 삶을 구걸하기 위하여 필요했던 언어, 자신의 목숨을 지켜내기 위하여 반드시 알아야 했던 언어, 살기 위해 철저하게 배운 언어라는 점에서 옥분은 이 언어를 뱉어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뻔뻔한 일본인, 즉 일본 제국과 마주치자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분노의 언어로 일본어를 토해낸다.i can speak?에서 옥분은 I can speak로 전환된다. 주체적인 삶은 ‘I’로 대표된다. 옥분은 과거에 무기력하게 머물지 않는다. 자신의 언어를 통하여 살아있는 주체성을 회복한다. 식민지 시대와 전쟁은 끝났지만 아직도 양국 정부의 무책임하며 부도덕한 태도 때문에 존엄성을 회복하지 못한 위안부 여성들은 아직도 조국의 땅을 정신적으로 밟지 못하고, 유령처럼 떠돌아다닌다. 하지만 I can speak를 통하여 실존하는 존재로 위안부가 지금-여기 살아있다는 것을 재현하여 그녀들의 삶을 주체화하였다.? 페미니즘의 새로운 전환할리우드 영화 라든가, 등 유명한 페미니즘 영화가 있다. 최근에는 마블에서 을 통해 본격적인 페미니즘 영화를 선보였다.하지만 아직까지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많은 여성을 대표하고 있다. 매체 속의 페미니즘을 주창하는 여성들은 너무 멋있으며, 파워풀하고, 능력 있으며, 아름답다. 여성들은 페미니즘 영화를 관람하면서 동시에 그들이 가진 사회적인 힘을 부러워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이러한 점이 기존 페미니즘 영화의 한계였다. 하지만 는 노년 여성, 시장통에 있는 여성을 불러 스크린 위에 세웠다. 이 영화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젊은 시절을 조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 실존하고 있는 노년의 여성의 삶을 주체적으로 하는 데에 집중한다.사실 이때동안 위안부를 소재로 하는 영화들 중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 또는 영화적인 완성도에 있어 만족할 만한 작품을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영화 는 역사 재현에 있어서 독보적인 관점을 보여주면서 영화의 긍정적인 힘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드디어 살아 숨 쉬는, 지금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주체적인 위안부상이 등장하여 과거 역사에만 고착되어왔던 소녀 또는 유령에서 화석화된 존재를 부숴버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들은 현재의 청년들과 소통하며,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희극적인 요소를 감미하여 위안부가 오늘날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실존적인 존재라는 것을 그려낸 것이다.
소설 『다섯째 아이』를 선택해 읽으려고 했던 것은 이 책이 고전이기 때문이었다. 고전만이 줄 수 있는 생각의 깊이, 분석하기에 용이한 풍부한 작품성,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인정받아온 도서의 가치가 나로 하여금 그러한 선택을 하도록 이끈 것 같다. 그러나 사실 책을 빌려 책 뒷표지의 작품 설명을 읽었을 때에는 읽고 싶다는 마음이 오히려 사그라들었다. 이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러하였을 것인데, 이 책이 전통주의적 가족에 대한 가치관을 호러기법을 통해 부정한다는 점에서 거부감이 들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이든지 자신의 가족이 화목하기를 바라고, 성품이 좋고 능력 있는 가족들을 바라고 우수하고 우애좋은 형제들을 바라니까 마치 가족 자체를 부정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골라 읽기로 결정한 건 글쓴이가 그러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라는 글쓴이의 인격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또한 전통적인 가족주의가 지닌 허상을 드러내는 방법을 통해 글쓴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내고, 또 부정적인 감정에 좌우되어 글쓴이의 말을 들을 기회를 나로부터 없애기보다는, 소설을 찬찬히 읽어봄으로써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새로운 지식을 얻으려는 작은 겸허함과 호기심이었다. 이것은 실로 하나의 용기였다.간단한 줄거리를 말하자면 이렇다. 해리엇이라는 여자와 데이비드라는 남자는 아이들을 많이 낳아 오순도순 화목한 가정에서 키우는 행복을 목표로 삼은 구식의 부부였다. 그들은 그 분명해 보이는 목표를 위해 일찍 결혼을 했고, 자신의 부모들에게 재정적 도움과 가사적 도움을 받는 무리를 하면서까지 자신들의 계획을 실천해나갔다. 생활고는 있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삶이었다. 벤이라는 이상한 유전자를 가진, 도깨비, 귀신, 외계인과 같은 단어가 어울리는, 인간성을 결여한 다섯째 아이가 태어나기까지는. 해리엇은 아이를 낳은 책임감과 타고난 모성애로 인해서 벤을 요양소로 버리는 선택을 철회하면서 가족들의 원망어린 눈총을 받으며 일말의 감정의 교류조차 불가능한 감성의 기능이 결여된 벤을 억지로 키운다. 그 결과, 그들의 가족기반적 삶은 벤으로 인해 파괴되어 아이들은 뿔뿔히 흩어지고 부부애도 상실되었으며, 친척들과의 교류도 사실상 끊어진다. 그리고 소설의 말미에서는, 신체적으로는 성인이 거의 다 된 벤이 그가 속한 불량배들과 어울려 사회의 어둡고 보살핌 없는, 버려진 지하세계에서 살다가 범죄집단과 연루되어 생을 마감하지 않을까 하는 해리엇의 추측이 나오며 소설은 끝나게 된다.소설에서 단연 주목할 등장인물은 다섯째 아이 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소설의 줄거리를 친구에게 설명해주었을 때, 친구로부터 놀랍게도(왜 놀라웠냐면 나는 소설을 읽는 내내 벤을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벤의 이야기를 들으며 ‘불쌍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서 나는 친구와 나의 감정이 다른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소설에서 벤의 ‘비인간성’을 날카롭고 정확하게, 그리고 몇 번씩이나 반복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이유는 벤을 어떠한 존재로 규정짓는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는 애포 소설에서 벤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벤이 인간이 가진 악한 본성의 화신으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우리의 사회 속에 있는 사회 부적응자로 해석해야할 것이라고 여겼다. 언뜻 책의 주제(전통적 가족주의가 하나에 허상에 불과)를 생각한다면 후자로만 생각해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앞서 말했듯이 소설은 벤의 비인간적 특성을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 개나 고양이를 죽이고 씨익 웃으며 쾌감을 느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비정상적 만족을 드러내는 데에 거리낌없는 악마적 성품, 다른 인격체들에 대한 배려나 존중, 관심은 어떤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괴물과도 다름없는 기형아적인 과시의 자아, 그리고 벤에게 가장 마음을 쏟는 해리엇이 내린, 벤에 대한 평가는 이러했다. ‘그 애는 인간이 아니지요. 안 그래요?’ 그럼에도 벤에게 가정 속에서 태어난 한 명의 ‘아이’라는 신분을 준 이유까지 고려해보면 악한 본성의 화신으로 보는 시각을 좀 더 다르게 풀이할 수 있다. 작가는 벤을 통해 반사회적 인간이 선택한 ‘악’이라는 인격에 대해 논하고 싶었던 것으로 말이다. 이것은 벤의 존재에 대한 두 가지 규정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것이다. 이쯤에서 볼 때, 다소 짚어가야 할 점이 생긴다. ‘악’이라는 것이 있다면 ‘선’이라는 것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소설의 인물들이 선택한 ‘선’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힌트가 있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해리엇은 ‘자신이 속한 사회가 신봉하고 지지하는 가치관으로 판단해 볼 때 그녀는 벤을 그 장소(요양시설이라는 이름을 가진 살인의 집)에서 데려오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회가 신봉하고 지지하는 가치관’은 앞서 말한 가족주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깊이 말해볼 수 있다면 나는 인본주의라고 말하고 싶다. 이 인본주의는 실상 해리엇이 자기 자신, 즉 죄인이라는 인식 정도는 있는 자기 자신을 옹호하기 위한 것일 뿐, 그러니 일종의 면죄부이지 벤에 대한 사랑이 아니다. 즉 벤을 위한 인본주의가 아니다. 그는 인간이 아닌 유전자이니까. 이 점은 소설의 중반부에서 소설은 ‘그녀(해리엇)가 벤에 대해 생각할 때 그건 사랑이나 온정의 마음에서가 아니었다’고 정확히 짚어주므로 확언할 수 있다. 결국, 아이러니하게도 소설은 가족전통주의의 허상을 드러내는 방식을 취하나 가족주의 자체를 거부하거나 또는 가족이 주는 안정감과 사회적 순기능을 부정하는 그러한 소설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다다라 소설이 다루고 있는 것이 가족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가족이 주는 평화와 안락함을 통해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다루고 있다는 해석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이는 다음에 의하면 더 분명해진다. ‘그가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 자신이나 아기가 아니라 행복 그 자체였’다고 말하는 지점에서 말이다. 소설의 인물에 의해서 선택된 선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본 후 알게 되는 건, 인간이 세운 ‘선’이라는 것은 ‘악’에 의해 무참히 깨질 수 있다는 소설의 예언의 진실적 면모이다. 이는 실로 무정하지만 부정할 수도 없는 명제가 된다. 그리고 필자는 이에 관해서는 더 깊이 이야기를 하자면 그렇다면 ‘악’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인간의 ‘선’이 아닌 다른 것이 있을 수 있는가 라는 점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가족을 통해서 개인이 행복해지려는 마음이 이기적인 것이라면, 진정으로 가족을 사랑하는 개인은 가족을 위해서 또는 더 크게 나아가 사회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철학 또는 가능한 이들은 신학적인 측면에서 다루어볼 수도 있음직하지만, 독후감이라는 감상문의 형식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생략하는 바임을 밝히겠다.해리엇의 행복을 목표로 한 이기심이 그릇된 것은 이기심에 그릇된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행복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악하다거나 이기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인간에게 있는 행복 추구의 원리는 당위적인 것이고 법적인 이유에서라기보다 그보다 먼저 삶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가 자연스럽게 바라고 원하는 것이 행복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행복의 종류와 질이 나뉘어져 있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개인이 선택한 수단의 옳고 그름이 분간되어야 하며, 숨겨진 동기가 있는지 있다면 어떠한 것인지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기준에서 볼 때 해리엇은 인간 관계로부터 오는 비교적 준수한 질의 행복을 골랐고, 가족이라는 수단을 선택했으나, 단 하나. 숨겨진 동기가 이기심이라는 것에 있었던 것이다. 해리엇은 말했다. ‘우린 벌 받는 거야. 그뿐이야. 잘난 척 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해야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행복해서.’ 여기에서 우리는 해리엇의 눈이 진실에 대대해서 가리워져 있는 것을 본다. 그녀는 숨겨진 동기를 간파하지 못해 ‘행복을 추구했기 때문에 벌을 받았다’는 비논리적인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그녀의 가리워진 눈이 오직 진실과 관계해서만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놀랍게도, 그녀는 행복을 추구한다고 했지만 실상 그렇지도 않았다. 그녀는 벤으로 인해 자신이 불행해질 것이라는 걸 알았고, 벤이 외계인과 같이 인간이 아닌 존재라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을 요양시설에서 데려오는 불행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분명히 그녀는 벤이 나아질 것이 아니라는 걸 예감하고 있었을텐데도. 그녀를 움직인 것은 벤에 대한 죄책이었고, 벤에 대한 사랑이 아니었다. 벤의 기이한 행동을 막기 위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요양시설로 보내겠다는 협박을 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벤의 눈이 이처럼 가리워진 것은 인간의 이기심 또는 욕심의, 인간이 가진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인간을 불행으로 몰고가는 그릇된 속성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