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며] 리뷰- 죽음을 기다리는 삶 -1. ‘말하고 있다.’이 연극은 사실 나에게 굉장히 어려운 연극이었다. 연극 보는 것을 좋아하고 나름대로 책도 많이 읽어서 나 스스로 이해력과 사고력이 높은 수준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이처럼 이해가 어려운 연극은 처음이었다. 인과관계를 따지기도, 사건의 개연성을 따지기도, 기본적으로 등장인물을 해석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아직까지도 이 연극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렬하게 남아있는 연극의 잔상에 대해 이야기하며 내 나름대로의 해석을 풀어보고자 한다.연극은 신발을 벗으려 애쓰는 고고로부터 시작된다. 이 연극의 난해함은 바로 이 시작부터이다. 신발을 벗으려 애쓰며 ‘안 되겠는데!’라고 말하는 고고에게 디디는 ‘그럴지도 모르지.’라며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대화인지 머리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사의 대부분이 계속 이런 식이다. 사실 처음에는 이 두서없는 대사들에 의미 부여를 하고 이게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지, 앞으로 일어날 일의 복선은 아닐지 고민을 하며 연극을 감상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이들의 정신없는 대사에,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그들이 ‘말하고 있다’라는 것에만 집중하게 되었다.그들이 ‘말하고 있다’는 것에 집중하자 나는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첫 번째는, 말을 주고받는 템포에 쉼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짧은 몇 마디의 대사를 서로 물 흐르듯 주고받는 양상으로 극이 진행되었다. 마치 우리가 글을 쓸 때 사용하는 ‘의식의 흐름’기법을 보는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극에서 나타나는 그 둘의 행동은 사뭇 다르다. 고고는 본능에 충실했고 디디는 그런 고고를 타이르고 가르치려 했다. 여기서 나타난 두 번째 특징은, 고고와 디디의 역할 구분이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고고는 “그럼 이제 무엇을 하지?”라며 묻고, 디디는 “고도를 기다려야지.”라고 말해준다.역할 구분이 확실하며 의식의 흐름처럼 말을 주고받는 고고와 디디. 나는 이 둘이 마치 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인간은 복잡하고 이중적인 존재이다. 하나를 원하면서 또 반대의 것을 동시에 갈망하고, 자신 스스로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는 난해한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나는 고고와 디디를 한 사람이라고 묶어서 보는 것이 지극히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능을 충족시키고 싶어 하면서도 이성을 놓지 않는 것이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었다.그리고 고고와 디디에게서 나타난 또 하나의 특징은, 그들이 말을 하는 것은 보통 우리가 말을 할 때와는 다른 의미를 품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보통 본인의 의견을 주장하거나 상대방과 대화를 하기 위해 말을 하지만, 연극 속의 고고와 디디는 서로에게 의견을 전달하기 위해 말을 한다고 보기 어려웠다. 그저 ‘말을 위한 말’을 하고 있었다. 말이 끊겼을 때의 정적을 피하기 위해 소리를 만든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정적이 생겼을 때 그들의 태도는 말을 할 때와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말을 하던 그들은, 정적이 생기자 마치 마네킹이나 오래된 기계처럼 맥이 빠지는 모습이었다. 그들이 정적을 마주하며 맥 빠져하는 모습은 정적을 두려워 하는듯한 느낌까지 주었다.그러나 나는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정적을 달가워하지 않는 그들이 나 또한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정적은 곧 사색을 불러일으킨다. 정적 이후의 행동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지금의 내 처지, 내가 마주한 장애물, 앞으로의 내 미래에 대해 사유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내가 정적에 놓이게 된다면 앞으로의 취업과 그것을 위해 해야 하는 공부, 지금 나의 학점, 그 외에 또 준비해야하는 것들 등등 내 미래에 대한 깊은 사색으로 빠질 것이다. 사실 이것은 결코 유쾌한 일만은 아니다. 현실을 마주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본인이 처한 현실이 달갑지 않을수록 정적은 더욱 두려운 일이 될 것이다.2. 죽음과 함께하는 삶고고와 디디는 고도를 향해 끝없는 기다림을 지속해 왔다. 고도가 누구인지, 언제 올지, 온다는 것이 확실한 것인지도 모르면서 매일을 똑같이 기다려 온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정적은 다시 막막함과 거대한 기다림을 상기시키는 매개체가 된다. 기다림을 잠시라도 뒷전으로 미룰 수 있는 어떤 소란도 사라지면, 그들은 달갑지 않은 현실에 다시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숨 막힐지 생각하며 나는 정적을 두려워하는 고고와 디디가 불쌍하기까지 했다.그런데 과연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는 ‘고도’란 무엇인가. 그들은 끝없이 고도를 기다린다. 왜 기다리는지, 고도가 누구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저 매일 매일 고도만을 기다릴 뿐이다.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는,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고도. 나는 그것이 인생의 마지막 순간 즉,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삶을 갈망하는 인간이 죽음을 그토록 기다린다는 것은 모순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쩌면 삶이 주어진 그 순간부터 죽음을 항상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이 고고와 디디를 한 인간이라고 본다면, 그들이 매일 고도를 기다리는 것은 인간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생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매일 같은 일상을 살아가며 그 끝인 죽음을 향해 쳇바퀴를 굴리고 있는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1막과 2막의 중간에 등장하는 포조와 럭키. 그들은 또 다른 인간의 삶과 인생의 굴곡을 한꺼번에 상징하는 인물들이라고 볼 수 있다. 포조는 그 자체로 이중성을 보이는 인물이다. 굉장히 권위적이면서도 자신의 권위를 다른 사람에게 확인받지 못할까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나는 포조가 등장했을 때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단순히 극의 재미를 돋우는 인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단순하게 인간을 나타내는 인물로 보였기 때문이다.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적나라한 그 포조라는 인물이 바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인간적인 삶을 살고 있을까.-알베르 카뮈, 이방인 (민음사, 2011년)-‘나는 나의 삶을 살고 있는가?’ 이방인을 읽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나는 내 마음의 소리를 따라 살고 있는지 자신할 수 없었다. 흔히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 말한다. 인간은 집단, 사회를 이루며 상호 관계 속에서 사유하고 행동한다. 하지만 이 사회라는 공간이 과연 ‘나를 나로서’ 살아가게 할까? 우리의 일상은 누구의 목소리로, 누구의 시선으로 움직이는가. 인간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정말 ‘인간적인 삶’을 살고 있는 걸까.우리는 실제 나이 외에 사회적인 나이에 속해 있기도 하다. 20대 초반은 대학생, 20대 중반은 취업하는 나이, 30대는 결혼을 생각하는 나이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마치 그것이 나의 길인 듯이 정해진 수순을 밟기 위해 노력하며, 그 길에서 뒤처지거나 정해진 대로 가지 못하면 초조함과 불안감을 느낀다. 그런데 그런 인생이 정말로 ‘나’의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뫼르소는 삶에서 항상 사유하고 선택한다. 자신의 행동과 삶에 대해 결정권을 가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뫼르소처럼 삶에서 선택을 하는 일이 별로 없다. 사회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만들어진 길에 따를 뿐이지, 내 삶의 방향을 선택하지는 않는 것이다. 사회라는 틀에 맞추어 살고 있는 우리는 선택하는 삶이 아닌 순응하는 삶을 살고 있다.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닌 만들어진 삶을 사는 인생을 ‘나’의 인생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싶다.그런데 막상 나부터도 순응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목적 없이 남들이 다 간다는 이유로 대학교에 들어왔고, 대학 졸업 이후의 계획은 당연하다는 듯 취업 준비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대학교에 갈 수도, 취업을 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정말 나의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의 삶 또한 사회에서 정해진 틀에 맞추어진 당연한 것이었고, 그 길은 내 진정한 마음의 소리에 의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우리가 이렇게 선택이 아닌 순응하는 삶을 사는 이유는, 그것이 더 편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의 틀에 맞추어 산다면 남들에게서 비판을 받을 일도, 내가 사회에서 동떨어진 것이 아닐까 걱정하는 일도 없다. 또한 내 스스로의 길을 찾기 위해 고민하는 수고도 할 필요가 없다. 그저 정해진 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하지만 나는 선택을 하며 사는 뫼르소의 삶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타인의 목소리와 시선으로 움직이는 우리의 일상과는 달리 그의 삶은 온통 그 자신의 목소리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삶을 산다는 것은 바로 뫼르소와 같이 선택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사형 선고가 확정된 후의 어느 날 교도소의 사제가 뫼르소를 찾아와 그에게 전도하고자 한다. 하지만 뫼르소는 오히려 반항심이 들었고, 사제에게 덤벼들며 울분을 토하듯 사회로부터 외면 받았던 자신을 쏟아낸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다. 그는 이 세계와 닮아 있었다는 것을. 또한 그는 이 전에도, 그리고 그 순간에도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