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의 조선 정복 장기화의 이유『조선열전』을 중심으로Ⅰ. 머리말Ⅱ. 왕험성의 지형Ⅲ. 한 군대의 내분Ⅳ. 고조선의 위력Ⅴ. 맺음말Ⅰ. 머리말본고의 주제는 논문에서 언급된 “‥유독 고조선과의 전쟁이 의외로 길어지자…”와 “과연 그 당시에 고조선의 힘이 강했다고 할 수 있을까?” 이 두 문장에서 시작한다.이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확인해야 하는 것은 정말 조선과의 전쟁이 길었냐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한에 평정당한 다른 국가들의 예를 살펴보고 조선과 비교해 이를 알아보고자 한다. 아래 내용은 남월열전과 동월열전의 (해석본) 내용이다.① 한천추의 군사가 반우에서 사십리 쯤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 월나라는 군대를 이끌고 한천추 등을 공격하여 마침내 전멸시켰다.② 새벽녘에 성안에 있던 군사가 모두 북파장군에게 항복했다. … 청오왕 조광은 월나라 왕과 같은 성인데 한나라 군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남월의 게양 현령 정과 자진하여 한나라에 귀속하기로 하였다. 남월 계림의 군감 거옹은 구월과 낙월 두 나라를 설득하여 한나라에 귀속하게 했으므로 모두 후가 되었다. 과선장군과 하려장군의 군사와 치의후가 출동시킨 야랑의 군사가 내려오기도 전에 남월이 평정되었다.③ 원정 6년 … 이때 한나라는 대농령 장성과 산주후였던 유치를 주둔군의 장군으로 삼았지만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오히려 안정한 곳으로 물러났다.④ 그리하여 드디어 여선을 죽인 뒤 부하들을 인솔하여 황해장군에게 항복했다. … 동월 장수 다군은 한나라 군사가 쳐들어오자 자기 군대를 버리고 항복했으므로 무석후에 봉해졌다.이를 풀어보면 3월 한천추의 공격이 실패한 이후(①) 가을에 10만 명의 대군을 동원해 남월을 공격하였다. 몇 개월 뒤 원정 6년 봄에 남월을 멸망시킨 한은 군대의 일부를 서남으로 돌려 이곳에서 만이를 평정하고 장가군을 설치하였으며 곧이어 다른 서남이의 여러 지역도 모두 항복해 와 군현을 설치했다.(②) 남월 침략에 참여했던 군대의 나머지는 곧 동월의 침략을 위해 그 경계에 머물고 있다가, 원정 6년 . 세 번째, 고조선이 강했기 때문이다. 이 3가지 이유를 중점으로 본론 내용을 구성하고, 마지막으로 이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다.Ⅱ. 왕험성의 지형討右渠. 右渠?兵距?.사기 조선열전에 보면 “우거는 군대를 징발하여 험준한 지역을 가지고 막았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를 바탕으로 한나라가 고조선을 정복하는데 긴 시간이 걸렸던 이유 첫 번째로 왕험성의 지형에 대해 이야기하겠다.그러나 고조선의 중심지(왕험성)의 위치는 한국고대사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이며, 아직까지도 정확한 답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각 학설들을 소개하고 한계점을 논하기에는 본고의 큰 주제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현재 가장 유력한 학설로 보이는 것을 중심으로 왕험성의 지형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① 위만은 패수를 건너 진의 옛 비어 있는 지역을 점거하고, 변방을 오가며 점차 진번과 조선의 만이와 옛 연과 제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그들의 왕이 되어 왕험을 도읍으로 삼았다. 『사기』 「조선열전」② 고려는 본래 조선 땅이다. 한 무제가 현을 두어 낙랑군에 예속시켰다. (한나라) 때에는 매우 미약하였고 후한 이후에 누대에 걸쳐 모두 중국의 봉작을 수여받았다. 도읍은 평양성인데, 옛 조선국의 왕험성이다. 『통전』 권185 변방③ (평양)성은 패수의 북쪽에 위치하며, 그 강은 서쪽으로 흘러 옛 낙랑군 조선현, 즉 한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의 치소를 지나 서북쪽으로 흐른다. 『수경주』④ 평양성은 옛날 한나라의 낙랑군이다. 『신당서』먼저 위 ①~④번은 ‘왕험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자료들이다. 정리하면, 기원전 198년에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왕험성에 도읍을 정하였다.(①) 기원전 108년에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 무제는 왕험성에 낙랑군 조선현을 설치하였고 대동강(고구려 시기 패수)의 서쪽에 낙랑군이 있다.(③) 고구려 도읍인 평양성은 한나라의 낙랑군, 고조선의 왕험성과 위치가 같다.(②,④)낙랑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③에서 ‘패수의 서쪽’에 위치함을 밝히고이 또한 ③번 자료와 마찬가지로 낙랑군이 대동강유역에 위치함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이러한 근거에 의해 왕험성은 대동강 유역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중심지가 기원전 300년 무렵에 평양으로 내려왔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적인 견해인데, 어쨌든지 위만 조선의 왕험성은 평양, 즉 대동강 유역에 위치했다는 것이다.위 사진은 대동강과 청천강 사이의 일대를 보여주는 것으로, 평양성, 낙랑군, 왕험성이 존재했을 위치로 생각되어진다.왼쪽 사진은 대동강 서쪽 일대를 보여주는 것이고, 오른쪽 사진은 그보다 조금 위에로 대동강의 서쪽이면서도 청천강 이남으로 보이는 장소이다. 두 사진 모두 수많은 산들이 즐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 사진은 위 사진(대동강 유역 지도)들의 지형을 DEM 지도로 보여주는 것이다. 많은 산들이 즐비해 있는 것과는 달리 생각보다 지형이 험난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대동강 유역에는 평양평야가 펼쳐져 있기도 하다.이로써 대동강 일대를 왕험성으로 볼 경우 그 지형은 그다지 험준하지 않았으며, 그에 따라 한나라가 고조선을 공격하는데 긴 시간이 걸렸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왕험성의 위치가 불확실하다는 점과 당시의 전쟁 수행 방식 등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무조건적으로 지형적인 부분은 조선 정복의 장기화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또한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Ⅲ. 한 군대의 내분朝鮮當下久矣, 不下者有狀.사기 조선열전에서 공손수가 당도하자 좌장군이 “조선은 오래 전에 공략했어야 하는데 공략하지 못한 데는 사정이 있습니다”라 말했다. 여기서 ‘사정’이라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 한 좌장군과 누선장군이 서로 합의하지 못하는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한나라가 고조선을 정복하는데 긴 시간이 걸렸던 이유 두 번째로 내분에 대해 이야기하겠다.한나라는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 좌장군과 누선장군 두 명의 장군을 보냈다. 누선장군은 제에서 출발해 발해를 건너 조선을 향했고, 좌장군은 요동을 나와 조선을 향했다평화적으로 항복을 받고자 했고, 좌장군은 무력으로 조선을 굴복시키고자 했다. 이런 까닭에 좌장군은 수 차례 누선장군과 함께 싸울 것을 약속해봐야 돌아오는 것은 누선장군의 회피였다. 이에 좌장군도 조선에 화친을 요구했지만, 이미 조선 내의 여론은 누선에게 긍정적이었다.결국 두 장군은 합의를 보지 못한 채 애매한 관계를 지속했고, 좌장군은 누선장군이 역모의 꾀를 내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까지 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자는 공손수를 보내 이 상황을 타개할 것을 명했다.공손수가 도착하자 좌장군은 그에게 “朝鮮當下久矣, 不下者有狀.”라 하며, 누선장군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부터 시작해 의심되었던 모든 부분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이를 들은 공손수는 좌장군과 함께 누선장군을 체포하였고, 이로써 처음으로 군대가 통합되게 되었다.통합된 군대는 다시 조선을 공격에 조선 내의 재상들은 왕을 죽이고 항복할 것을 꾀했고 원봉 3년 여름 이를 실행에 옮겼다. 이로써 한나라는 조선을 평정하여 진정한 통일 제국을 건설하게 되었다.조선의 정복은 한의 여러 신하들의 목숨을 앗았으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누선장군이 체포되고 좌장군과 누선장군의 군대가 통합되자 조선은 쉽게 정복되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한나라 군대 내의 내부분열이 조선정복을 방해하는 요소였다고 볼 수 있겠다.전쟁을 하는데 있어서 분열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첫 번째, 내부분열은 적이 외부에 있는 것만이 아닌 내부에도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즉, 적이 둘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 군사력이 분산된다는 것이다. 내부의 적에게도 신경을 써야하기 때문에 외부의 적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한다는 점과 같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힘을 합치지 못한다는 점에서 군사력이 분산된다고 볼 수도 있다. 세 번째, 권력의 분산은 상대의 항복을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조선열전 속 조선의 상황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한나라 군대를 통합한 이후에 조선 내의 대신들이 우거를 죽이고 항복할 것을 결의했는데, 이는 측하는 것밖에 할 수 없다. 따라서 이 부분의 내용은 그를 중심으로 설명하겠다.① 위만은 군대의 위세와 재물을 얻어 가까운 작은 읍들을 침략하여 항복받았고, 진번과 임둔이 모두 와서 복속하여 그 땅이 사방 수천 리에 이르렀다.② 누선장군은 제나라 군사 7000명을 이끌고 먼저 왕검에 이르렀다. 우거가 성을 지키고 있다가 누선장군의 군사가 적은 것을 염탐하여 알고, 곧바로 성을 나와 누선을 공격하니 그 군대는 패하여 달아났다.③ 좌장군은 조선의 패수 서쪽 군대를 공격했으나 무찌르고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①번은 위만조선이 영토를 확대하고 있는 모습이고 ②,③번은 조선열전에서 조선군이 한나라군에 승리를 기록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②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②번을 보면 누선장군은 군사 7000명을 끌고 왔음에도 우거의 군대에 패하였다. 여기서 군사 7000명이 그 당시에도 적은 수가 아님었음을 남월열전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남월열전에서 여가를 치기 위해 장삼에게 2000명을 주어 사신으로 보내고자 했을 때, 장삼은 천자에게 병력의 위세를 보이기에는 2000명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이에 천자는 장삼을 그만두게 하고, 용사 200명만 주면 된다는 한천추에게 2000명을 끌고 가도록 했다. 이와 대조되게 조선을 공격하기 위해서 처음부터 7000명의 군사를 데려갔다는 것은 조선이 그만큼 정복하기 쉬운 국가는 아니었음을 인지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고조선이 강력한 국가였음을 보여주는 것은 전쟁 혹은 군사 이외에 ‘국가체제’ 부분이 있다.① 위략에 이르기를 옛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는 주나라가 쇠약해지자, 연나라 스스로 높여 왕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역공하여 주 왕실을 받드려고 하였는데, 대부 예란 인물이 간언하므로 중지하였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② 위만도 망명하여 1000여 명의 무리를 모아 머리를 상투 모양으로 틀고 만이의 차림새로 동쪽으로 달아나 요새를 벗어났다.③ 측된다.
1. 고대 중국사상-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들을 의미한다. (cf.동물들을 어떻게 하면 잘 잡을 것인가)- 당대에 공통적으로 공감을 느꼈던 중요한 문제들이 전해지고 각색이 되어 나중에는 기록으로 남겨지는 것이 원시종교와 신화이다.1) 원시종교와 신화- 세계 각지에서 인간과는 다른 절대자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어느 곳이나 원시종교나 신화가 발전하고 있다.- 과거 사람들은 인간들이 어찌할 수 없는 자연력과 천체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공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절대자를 상정하고 그 절대자에게 도움을 구하고 절대자의 분노를 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처럼 초기 원시종교는 과거 사람들이 자연을 두려워함과 동시에 공경하는 마음을 갖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특정 자연물을 인간과 같은 영혼이 존재한다고 이해하고 그런 영혼, 정령을 숭배하는 종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다음은 과거 사람들이 숭배했던 것이다.(1) 자연숭배 : 천체(해, 달 등), 자연력(바람, 비, 천둥 등), 자연물(바다, 하천, 산 등) 등. 자연의 힘에 따른 자연신격화.(2) 정령, 귀혼 숭배 : 영혼관념이 발전하면서 형성. 다신 숭배. 유추와 비유를 통하여 자연물 의인화.(3) 토템숭배 : 자신의 종족과 특별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는 자연물, 동식물 숭배.- 인디언들 사이에서 특정동물을 신성시하고 특정동물과 자신의 조상과의 긴밀한 유대를 설명해주는 이야기가 전승되고, 이러한 현상이 세계각지에 만연하다하여 ‘토테미즘’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특별한 동식물들을 토템으로, 자기집단으로 연계시키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한 집단이 다른 집단과 자기집단을 구분하여 자기집단의 일체감, 정체성을 확인하는 현실적인 필요 때문이었다.- 토템숭배는 단순히 자연물을 숭배하는 것과는 다른, 자신들이 상징물들을 만들어내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데까지 이른다. 다시 말해, 용이나 봉황처럼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동물들을 만들어 내어 그 집단에서 있는 신화적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고, 단편적이고 비체계적으로 전승되었다. 이에 따라 서구에서는 중국이 신화가 없는 나라라고 기술한다. 그러나 중국의 신화가 단편적이고 비체계적인 이유가 있는데 이는 유교의 영향 때문이다. 공자는 괴력난심이라 하여, 괴이하고 아주 이상한 힘(괴력), 혼란을 일으키는 것들, 인간과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신적인 존재에 대해서 논하는 것을 꺼려하였다. 즉, 절대적인 신에 다가가는 것을 포기하고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시각에서 인간과 사물을 이해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유교가 점차 확대됨에 따라 유교적지식인 관료들은 신화를 허황된 이야기로 치부하여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 내버려 두었기 때문이다.2) 상. 서주시기 사상의 맹아- 최초의 고대국가인 하나라. 하나라로 추종되는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지만 문자적인 기록은 미흡하기 때문에 그 실체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최초의 고대국가의 실체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상나라이다. 상나라는 청동기 문명을 발전시킨 나라로, 청동기 기술을 이용하여 다른 집단을 무력을 침략하고 자신의 세력을 확대했으며 거대한 성벽을 쌓았던 나라이다.(1) 상대의 상제신앙과 문화 (BC 17-11세기)- 상제는 지고의 절대자, 만물의 주제자, 씨족의 보호신이지만 인간과 같은 감정을 가진 인격적인 존재이다. 그래서 상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른 부족들을 통합하고 권력을 늘리면서 상제의 은공을 잊어버린다면 상제가 분노한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상대 사람들에게 상제를 기쁘게 하고, 노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예로 상제를 기쁘게 하기 위한 또는 상제 뜻을 헤아리기 위한 제사가 국사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 결과 상나라에서는 제사가 일상화가 되었다. 그리고 이 제사들을 통하여 알게 된 ‘상제가 우리에게 바라는 뜻이 무엇이다‘를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한 것이 ’갑골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기록을 하는 과정에서 문자시스템이 발전했다. 뿐만 아니라 제사에 사용종법제를 확립시켰다. 그와 동시에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천명사상을 이용한다. 이에 주나라에서는 상제라는 말보다는, ‘천’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사실 상제와 천은 같은 의미이고, 우주와 세상의 모든 것을 주재하는 최고의 신이라는 의미이다.- 천 : 천은 공평하고 합리적인 존재이다. 즉, 상나라 지배층들이 백성들을 돌보지 않고 수탈을 일삼아 방탕한 생활을 하지만 제사만 잘 드린다하여 이들을 보호해주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천명 : 따라서 천명이란, 인간세계를 자신의 뜻에 맞게 통치하고 이끌어나갈 지도자에게 그 권력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천명은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바뀔 수 있는 것으로, 정치의 잘잘못에 따라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천명사상은 주나라가 쿠데타를 정당화시키고 백성들의 민슴을 수습하기 위한 방책으로 이용한 이데올로기라고도 볼 수 있다.- 백이숙제 : 상나라 말기, 상나라 00국 제후의 아들들이 백이와 숙제였다. 제후가 나이가 들어, 자신의 자리를 아들에게 주기로 하는데, 막내인 숙제가 능력이 있는 것 같아 자리를 물려주려고 하자 숙제는 형이 있는데 자신이 받을 수 없다고 거절을 한다. 이에 백이가 자신은 아버지의 뜻과 맞지 않으므로 자기가 물려받을 수 없다며 00국을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주 무왕이 쿠데타를 일으켜 상을 멸망시키는 것을 목격하고 어찌 백성을 돕고, 돌보며 덕치를 한다고 하는 왕이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느냐고 비판을 하면서 이러한 불의한 나라에서 나는 곡식을 먹고 구차한 삶을 살 수 없다 하여 산으로 들어가서 굶어죽었다. → 이는 주나라 초기에, 상나라의 부패로 혁명이 불가피했다고 하여도 의리, 원칙, 절개를 지키고자했던 지식인들은 이것(혁명)을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을 상세하게 보여준다.2. 고대 중국사상 형성의 배경: 춘추전국시대의 사회변동, 기원전 8~3세기1) 정치적 격변- 포사의 일화와 주의 동천 : 서주 말, 유왕이 폭정을 일삼았다. 이때 포사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얼굴은 예쁘다.- 군명분과 윤리의 의미 상실, 전쟁방식의 변화 :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하면서 명분과 윤리의 의미가 상실되게 된다. 그리고 실력을 강화하기 위한 현실적인 수단이 방식이 중시되기 시작한다. 특히 힘의 원천을 ‘군사력’이라고 여기고 군사력을 증강시키기 위하여 노력한다. 이에 따라 전쟁이 격화가 되고 전쟁무기로 사용되는 전차제작이 크게 늘어나 이 당시에 수천 개의 전차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전차전이 보편화되고 너도나도 전차를 보유하게 되자 다른 전쟁방식을 몰색하게 되는데 이것이 보병전과 기병전이다.- 변법, 군주집권체제 : 이처럼 전쟁방식의 변화와 함께 행정제도까지도 군사력 강화에 기여하게 된다. 그를 변법이라 한다. 잦은 전쟁의 결과 제후들을 통제하고 군주집권체제가 발달하게 된다.- 전국 7웅체제 :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7개의 영역국가가 존재하던 전국시대가 열리게 된다.2) 사회. 경제적 발전- 경제 발전 : 춘추시대에는 철기이용, 우경, 실경 등으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었으며 동시에 수공업과 상업이 발달했다.- 씨족 공동체가 해체되고 신분질서가 재편성 되었다.- 도시가 발달했다.3) 사인의 시대- 구귀족의 몰락 : 구 귀족이 몰락하고 새로운 지배층인 사인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여러 개의 제후국들이 강력국들에게 통합되는 과정에서, 약소국들의 제후들이 몰락하고 약소국들의 귀족들의 신분적 특권을 상실하게 된다. 그리고 사인들은 군주집권체제를 강화하고 이를 위하여 관료체제 정비를 하고자 한다.- 학문과 지식의 확산 : (공자가 등장하기 이전) 본래 문자의 사용은 귀족들 집단 내에서만 이용되었는데 제후국들이 통합되는 과정에서 몰락된 귀족들이 자신의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가진 지식이 확산되게 되었다.- 공자학단의 대두 : 이 과정에서 공자가 등장하고 공자학단이 대두되게 된다.- 천명에 대한 회의와 인간중심적 사고의 발전 :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천명’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백성들을 사랑하고 옳게 살게 하려는 사람을 복주. 일시적으로 권력자의 인정을 받아 관직에 오르기는 하였지만 그 자리에 오래 있지 않았다. 오히려 공자는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삶을 산 사람이다.- 성격 : 사소한 것에 원칙을 지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학문을 중시했다. 싸움도 잘하였다.2) 고전의 정리와 학습- 학문방법 : 공자는 전해져 내려오는 것을 부지런히 익히고 그리고 나서 새로운 것을 익히고자 하였다. (온고지신) 지금까지 남겨져오고 전해져오는 것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전해져 오는 것이라고 믿고 인정하고 그러한 옛것을 즐기고 공부했다. (신이호고)- “나는 결코 태어나면서부터 그것을 아는 천재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옛것을 좋아해서 부지런히 그것을 구하는 사람이었다.”- “배울 때 생각하지 않으면 허망하고 생각만하되 배우려하지 않으면 위태롭다.”- “옛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공부를 했다, 그런데 지금 배운다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한다.” 저는 자기 자신을 발전시키고자하는 그런 공부를 했는데, 지금 다른 사람들은 보이려고 인정받으려고 겉만 꾸미려고 한다.- “널리 배우고, 덕은 두터히 한다. 뜻을 굳건히 하고, 절박한 마음을 갖고 질문을 하고 마음을 담아서 질문을 하고 가까이에서 생각을 하고 자기 주위에서의 문제와 연결시켜서 생각하고 그러면서 살고자 해야 한다. 그 중에 인이 있기 마련이다.”- “자왈, 벼슬살이를 하면서 끊임없이 감당해서 잘 해내서, 여유가 생기면 그러면 좀더 자리를 찾아 보면서 적극적으로 안목을 넓히려고 해야한다. 배우는 사람이 배워가다가 어느 경지에 오르고 자신감이 생기면 나만 알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고 나라발전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벼슬살이를 해야 한다.”- 학문과 정치의 일체화 : 공자는 이러한 학문과정에서 인간과 세계의 형상은 어떻게 바람직한 것은 무엇인가를 그려내었다.3) 인간에 대한 이해- 비슷한 본성 : 인간은 기본적으로 바탕은 비슷한 존재이다. 즉, 본성은 서로 비슷하다. 그런데 배워서 익힌 습관에 의해서 사람과 다.
묵가와 법가1. 묵가(墨家)사상- 유가와 공통점 : 묵가사상은 노장사상과는 달리 유가사상이 지향했던 그런 목표(도덕성)을 인정하고 결국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울려서 살아가야 함을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자기만 부와 권력을 누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배려하면서 함께 잘 살 수 있는 질서 있고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어가야 된다는 목표에 공감한다.- 묵가 사상 : 묵가는 다른 어느 집단보다도 평등의 가치를 중시하고 강조하는 사상가 집단이라 할 수 있다. 하층민의 관점에서 평등사회를 구현할 수 있는 그런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실제로 그런 이념에 기초한 강력한 공동체를 만든다.- 전쟁에 대한 묵가 : 묵가는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만들어져야, 재산도 없고 의지할 가족도 없는 서민들, 가난한 사람들, 노동자들이 살만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에 동의했다. 물론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은 혼자서는 힘들지만 함께(상동) 대의를 위해 힘을 뭉쳐 강력한 세력을 만들어 우리가 원하는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전쟁에서 승리한 나라도 전쟁으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음을 설득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강국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직접 공격의 위협에 직면한 약자를 도와주는 전쟁에 참여함으로 해서 침략 전쟁이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자고 이야기했다. 그러면 궁극적으로 전쟁이 종식되는 세계가 올 것이라고 보았다. 이에 따라 현실적으로는 방어전쟁을 실시하고, 다른 나라가 침략할 때 그 묵가 집단이 집단적으로 침략 받은 조그마한 나라에 원조요청을 받아서 가서 성을 지켜주는 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활약으로 인하여 과연 묵가를 평화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는데,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반전평화주의와 무저항주의는 같은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1) 묵적(墨翟)과 묵가집단(1) 묵적의 시대- B.C. 480-390, 479-381?- 饑者不食 寒者不衣 勞者不息 : 굶주 용병 : 묵가집단은 전쟁 청부업집단(용병집단) 것이었기 때문에 늘 군대 조직처럼 전쟁을 대비하는 그런 태세를 갖추어야만 했다. 그래서 늘 전시체제를 염두에 두고 지도자(거자)가 군대와 같이 밑 부하에 대한 통수권을 확실하게 쥐고 있었다. 다시 말해, ‘거자’가 집단에 대해서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기 위하여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정치적으로 보면 강력한 독재체제였던 것이다. 이를 보고 ‘거자체제’라곧 한다.- 묵가 집단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모든 사람이 똑같이 대접받아야 된다고 주장하면서도 강력한 지도자의 지휘와 명령에 일사분란하게 따라야 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상하관계로 이루어진 위계질서를 중시한 것이 아니라 지도자가 생각한 문제의식에 공감하고 통제와 지휘를 따라야 그 운동을 전개해서 민중이 주인이 되는 그런 사회를 확대시키고 궁극적으로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목적을 위한 어떤 수단으로서 독재체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문제의 소지를 내포하고 있다.2) 사상의 특징- 전국시대에 묵자의 영향력은 강력했었다. 한비자의 책에 “一世之顯學 儒墨也, 孔墨之徒 滿天下”, 한시대의 뛰어난 학문은 유가와 묵가이고, 공자와 묵자의 무리가 온천하에 차있다고 언급했다.(1) 유가 비판- 차등애(差等愛) 비판 : 묵가는 유가의 질서 있고 조화로운 사회의 목표는 옳으며, 모든 사람들이 사람답게 대접받고 인정받는 사회를 실현해야 한다. 그런데 유가에서는 우리 아버지, 우리 이웃, 내 친척을 우선 챙기는 것을 주장함에 따라 결국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와의 전쟁을 정당화하며, 우리 아버지가 잘못한 것을 감추는 것을 오히려 잘했다고 한다. 그런데 묵가 입장에서는 이러한 방식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그런 살만한 사회를 만들 수 없다고 보았다. 그에 따라 묵가는 너와 나를 가르면서(구분하면서) 내 주위부터 사랑하는 차등애를 비판하고, 아울러서 서로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사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兼相愛와 交相利)- 天下 필요가 있는가.(節用) 모든 면에서의 지나침을 배격하고 피하자.(辭過)- 去無用之費 聖王之道 天下之大利也 : 무용한 비용을(실체적인 효용성이 없는데 사용되는 비용) 제거하는 것이 성왕의 도고 천하에게 큰 이익이 되는 것이다. 어쨌든 사치스러운 활동, 문화 활동을 배격하면서 근검한 생산 활동을 중시해야 한다.(4) 非命과 天志- 운명의 부정 : 묵가는 운명이라는 것은 난폭한 왕이 만들어낸다고 보았다. 가난하게 태어났다면 그건 너의 운명이고, 왕은 천명을 받고 태어났으므로 권력을 휘두르고 화려한 생활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이 운명이다. 이처럼 주어진 환경과 처지를 받아들어야 한다는 그런 운명론은 포악한 왕들이 통치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낸다고 보았다. 이에 묵가는 그런 운명이라는 없으며 인간의 노력에 의해 자기의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적극적인 노력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살만한 사회, 즉 옳은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천의 개념 도입 배경 : 묵자와 묵자 사망 후 그를 계승한 자들은 묵자의 뜻을 이해하고 함께 공유하며 스스로 노력하며 살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인간이기 때문에 현실에 안주하고 쉬고 싶어 했다. 처음에는 묵자나 몇몇 헌신적인 존경받는 지도자들은 이게 옳은 일이라 생각하고 쉬고 싶고 타협하고 싶다는 유혹에도 계속 그렇게 나아가려 했지만, 이를 따르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러면서 어떻게 그러한 유혹을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가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저 옳은 일이니까 해야 된다는 것으로 안 된다고 느끼고 천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게 되었다.- 천의 도입 : 절대적인 존재가 있고, 그 절대적인 존재의 의지는 이 세상 모두가 소중한 존재이므로 그들이 먹고 사는 문제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이 하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그러한 일을 추구하는 것이 필요함을 주장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천의 존재를 다시 내세우게 된 것이히 필요한 것을 해결해 주어야 한다. 즉 백성의 이익에 기여하는 것이 표준이 되어야 한다.- 유가나 도가는 개념의 규정에 대해 논리적인 사고 전개 방식이 그다지 중시되지 않고 있는데, 묵가에서는 그런 측면이 예외적으로 부각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효, 의에 대해서 막연하게 부모님을 사랑하고 그렇게 대하는 것이 효라 생각하는 반면, 묵가에서는 ‘이익은 사람이 구하게 되면 기뻐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라 규정하고, 효라는 것은 부모님을 이롭게 하고 기쁘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고, 의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식으로의 개념규정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에서 묵가가 지식인 계층 민중의 결합체임을 알 수 있다.3) 후기 묵가의 향방(1) 타학파의 비판- 묵가는 스스로 인간의 본성의 악한 부분 대문에 논리적으로만 설득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나름대로 개념 규정을 하고 사상을 논리화를 시켰지만, 결국 궁극적 한계에 직면해 천이라는 점을 도입했다. 그 시대의 사상의 발전 과정에서는 ‘인격적인 천’에 대한 믿음이 크게 약화되고 있는 단계였기 때문에 이러한 묵가의 사상은 다른 파들에 의하여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가르침이라고 공격받았다.- 墨子蔽於用 而不知文 : 묵자는 실용에 가려서 문화의 중요성, 꾸밈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다. 절박한 상황에서 먹고 살게 해주는 것이 필요하지만, 진정으로 사람답게 살게 하기 위해서는 그 다음 단계인 꾸미고, 마음을 안정시키고, 기쁘게 하고, 풍요롭게 하는 문화 활동이 소중한 것인데, 그런 문화 활동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다.- 無父無君의 가르침 : 묵가의 사상은 현상의 질서를 부정하고 파괴하므로 무정부주의 상황을 조장하는 가르침이라 비판하기도 했다.(2) 시대의 변화와 묵가집단의 동요- 전쟁이 만연하던 시기에는 전쟁청부업에 대한 필요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이 집단이 활동할 수 있는 재정을 화보할 수 있었고 세력을 확대 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전국 말기에 전쟁청부업의 수요가 사라지게 수 있는 내용들이 중심이 되고 있다.(3) 현실론- 법가는 당위성, 즉 마땅히 그래야 한다에 구애되지 않고, 보이는 현실에 초점을 두고 실제적인 변화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를 위하여 법가는 정치와 도덕을 구분하고 도덕을 중시하는 유교의 한계를 통렬히 비판했다. 유교는 혈연관계에서 중시되어야 될 효와 같은 도덕을 확장시켜 사회문제를 해결시키려고 하는데 이는 현실로 나아가지 못하며, 도덕의 사적인 성격은 국가의 공공성에 상반된다고 주장했다. 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혈연관계 윤리보다는 국가 운영을 위한 법이 중시되어야 하는데, 공자는 아버지가 잘못을 해도 아버지를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숨겨주는 것이 아들로서의 올바른 도리라고 한다. 이런 도덕은 국가의 공공성에 상반된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법은 정치 행정의 객관적인 기준으로서 제시되어야 되는 것이고, 이 법에 위배되는 것은 철저하게 그 법에 근거해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법가는 철저하게 도덕과 분리되는 정책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그 과정에서 군주 권력의 절대성을 강조했다.(4) 군권의 절대화- 국가권력과 군주를 일체화 시키면서 군주가 법을 제정해서 현실적으로 나라를 이끌어나가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君主雖不肖 臣不敢言 : 군주는 비록 불초할지라도 ? 부족한 부분이 있을지라도 ? 신하가 감히 그것을 지적하고 비판해서는 안 된다. 군주는 인간으로서가 아니고 국가 권력을 이끄는 구심점, 상징이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의 바탕에는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라는 인간관이 자리잡고 있다.(5) 인간관 : 악한 본성과 이기적 인간성(自私.自利)- 군주의 절대화를 주장하는 의견 바탕에는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하는 인간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사와 한비자는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의 제자이고, 한비자는 법가 사상을 집대성한 자이다. 순자는 인간의 본성은 악하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욕구에 이끌리는 존재라고 했다. 그래서 허기질 때 우선 자기의 배를 채우고자 하고, 맛있는 것을 먼저 먹 문제
노자와 장자- 노장사상 : 장자 사상은 노자와 결합시켜 흔히 노장사상이라 지칭한다. 즉, 노장사상의 한 부분으로서 다루어진다. 노장사상은 도를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추구해야 될 가치로 생각하는 ‘도가사상’이다. 공자, 맹자, 순자, 유교의 변용·재해석(유가 사상)은 중국과 동아시아 세계에 있어서 주류 당론, 지배이데올로기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주류 당론과 지배이데올로기를 정면에서 비판하면서 그것이 아우르지 못하는 부분에 초점을 맞춰 주류 당론의 문제를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 도가 사상이다.- 유가 : 유가사상은 자기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열정적으로 노력을 해야 된다고 말한다.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소중한 사명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자기의 목숨을 중히 여기면서 자기를 완성시켜 나가야 한다. 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만들기 위해 자기가 깨달은 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된다. 이에 따라 개혁가로서의 사명도 때에 따라서는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유가는 사명감, 꿈, 목표를 가지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달려가는 적극적인 삶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길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이러한 사람을 대표하는 것이 공자이다.- 도가 : 이에 반해 도가는 그런 공자를 어리석은 사람, 잘난 체 하는 사람, 안 될 줄 알면서도 어리석은 노력을 하는 사람으로 냉정하게 조롱하듯이 바라보는 숨어사는 은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맹자만 방관자의 입장을 자기들의 처신과 태도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발전시켜가는 과정에서 심도 있는 이념으로 정립되게 된 것이 노자와 장자 사상이다. 바라보는 시각이나 방향성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노자사상 : 도가 사상의 근원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1) 노자(老子)(1) 老子 :- 어르신이라는 뜻. 평균 수명이 30~40년밖에 안 되는 그때에 천운을 타고나 60~70년을 살던 사람, 그래서 세상의 여러 가지 경험을 해 본 지혜로운 사람을 노자 또는 어르신이라 일컫는다.- 에 따르면 ... 노자는서 언급이 나오고 있다. 이런 점 때문에 노자의 인물에 대해서 서로 말이 다르다.(2) 노자의 실체에 대한 의견- 노자의 실체를 인정하는 측에서 가장 중요하는 것이 사기의 기록(공자가 노자에게 예에 대해서 물었다는 그 기록)인데, 그 내용에 따라 공자보다 도덕경의 저자라고 알려진 노자가 선배였었다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사기의 내용에는 공자가 노자에게 교훈을 청했고, 노자는 공자에게 교만함과 탐욕스러움과 같은 것을 질책했다고 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유가보다도 더 빨리 시작했어야한다.- 그러한 노자의 실체를 부정하는 이들은 그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공자보다 훨씬 뒤인 기원전 3-4세기에 여러 명의 은자적 전통을 중시하는 학자들의 인생 경험을 집약한 결과물을 모아 놓은 집단 창작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 노자 주석서에서는 쉽게 사기의 기록에 근거해 노자라는 실존을 전제하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도덕경의 저자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단정을 내릴 수 없다.2) 노자의 사상 : 도덕경(道德經)(1) 도덕경- 노자로 불리는 사람의 저작으로 알려진 것이 『노자』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서는 도와 덕을 중시하고 있기 때문에 『도덕경』이라도 부른다. 도덕경은 5천여자 ? 논어의 1/3 - 밖에 되지 않는다. 논어보다 더 짧고 대기만성 등의 격언과 같은 말이 많이 담겨 있다.- 도덕경 저자에 대한 의견 : ① 도덕경을 일반적으로 노자라고 불리는 어떤 특정한 개인의 저작으로 이해하고, 사기에도 그러한 이해를 받아들이면서 노자에 대해 설명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른 주장도 있음을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과연 노자라는 인물이 실존했는가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다. ② 어떤 학자는 도덕경의 저작으로서 노자의 실체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주장하며, 도덕경은 특정한 개인의 저작이 아닌 지혜로운 어른이라 불린 은자적인 전통을 대변하는 여러 사람들의 인생경험을 집약한 격언 같은 것을 모아놓은 것이라 한다. 즉, 다수의 저작, 집단 창작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의 세계에 관심을 두고 바로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대단하다고 생각한 것들이 얼마나 유한하고 한계가 있는 것인지 부각시키고자 한 것이다.-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 아무것도 없는 것이 천지의 시작이고 유는 만물의 어머니인 근원을 일으키는 것이다. 천하 만물이 유에서 시작이 되지만 유는 무에서 근원한 것이다. 따라서 현상 이면의 무의 세계가 더 중요하다. (무 ? 유 ? 만물)- 道常無爲. 聖人常無心. 聖人欲不欲 : 도는 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성인은 항상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없애고자 한다. → 유가에서 의식적인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 마지막 단계에서 무엇인가를 종합한 순자가 인의의 중요성을 역설했는데, 이를 정면에서 비판한 것이다.- 無己, 無功, 無名; 無爲自然;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공을 추구하지 않고, 이름을 남기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고 그 흐름을 따라간다. 도를 추구함에 있어서는 손을 비우는 것이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 도를 행하는 것이다. → 도를 체현한 현상의 사물로서 물에게서 배우는 것을 강조한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 최고의 선은 물과 같은 것이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고 다투지 않는다. 또, 사람들이 싫으하는 낮은 곳으로 흘러가다. 그런 까닭에 거의 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 도의 속성을 표현하고 있다.- 和(其)光 同(其)塵 : 밝은 빛을 약화시키고 더러운 흙과 같아지고자 한다. 자기의 잘난 것을 드러내고자하는데, 그게 어리석은 것이다. 드러내고 자랑하면 다른 사람이 대단하다 할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이 결국은 교만함을 보고 미워하게 되고 시기·질투의 대상이 되므로 그것은 결코 지혜로운 것이다. 잘났더라도 감추는 것, 그 빛을 감추고 그 진흙 속에 함께 자기 몸의 진흙을 붙이고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이다.- 三寶:혈안이 되어 있는데, 이것이 세상의 평화를 깨치는 상서롭지 못한 것들이라 주장한다.- 도덕경에서 천명하는 입장은 “어린이의 소박, 천진한 모습이 도에 가까운 것”이다. 지혜, 장식, 인위, 지식, 문명으로 인간의 타고난 본성을 꾸미고, 가리고 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다. 결국 그런 것이 사람과 사람과의 갈등을 조장하고, 전쟁을 일으키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음을 주장한다.- 성격 : 노자사상의 기본적인 성격은 처세론적 성격이 강하지만 근원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근거로 해서 현실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2) 도덕경 사상의 핵심 ② 역설과 만물전변의 논리- 현상과 모든 질서의 근원에 있는 원리를 ‘도’라 규정하고 있는데, 이러한 도의 뜻을 강조하는데. 도라는 것은 자연의 질서· 원리를 본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근원의 세계, 그러면서 무와 부정의 비판적인 사고에 중요성을 역설하며 역설과 만물전변의 논리를 강조하게 된다.- 反(返)者道之動, 弱者道之用 : 갔다가 돌아오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다. 약한 것이 도의 수단이다. (도가 사용하는 것이다.)- 柔勝剛 弱勝强; 人之生也柔弱, 其死也堅强 부드러운 것이 딱딱한 것을 이기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고 태풍이 불 때 휘어지지 않는 나무는 쓰러져 있지만, 약하고 부드러운 버드나무는 꺾이지 않고 버틴다. 강한 것이 약한 것에 이기지 못하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부드러움과 약한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람이 태어나서, 아주 어린 애는 부드럽고 아주 연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사람이 성장하고 죽을 때가 가면 몸이 점점 굳어지고 딱딱해지게 된다. 견고하고 강하게 되는 게 좋은 것이 아니다.- 曲則全 枉則直 窪則盈 弊則新... : 굽어져야 온전하게 펼 수가 있고, 휘어져야 똑바로 갈 수 있고, 파인 곳이 있어야 키울 수가 있고, 낡아져야 새롭게 할 수 있다.(3) 정치적 이상 ① 소국과민- ‘소국과민(小國寡民) : 작은 나라, 적은 백성의 국가를 이상적 세계로 설정하고 설정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약육강식이 일상화되고 있는 그런 현실 속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가진 것이 없는 일반 서민들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근원적으로 어떻게 전란을 종식시키고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하는 문제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개인으로서 자기의 목숨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한 지혜를 찾아내고, 그래서 어쨌든 낮추고, 숨고, 감추고 하면서 목숨을 보존하는데 도움이 되는 처세술이다. 유가적인 관점에서는 용기 없는 사람, 비겁한 사람, 은둔자로 비난받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런 비난에 개의할 필요가 없다. 세상을 규율하는 근본적인 질서에 합하는 것이 그런 태도이기 때문이다. 정치론에서 보다 더 깊이 있는 철학이 발전한다.(4) 정치적 이상 ② 목적지향의 제왕통치술- 후에 이것이 고도의 통치 기술로서 등장을 하기도 한다. 나를 쉽게 잘 다스리기 위한 지배자의 입장에서의 정치 기술로서 노자의 사상이 이용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 : 성인의 통치는 백성의 마음을 비우고, 그 배를 채워주고, 그 뜻을 약하게 하고, 체격을 건강하게 해주는 것이다.- 常使民無知無欲 使夫智者不敢爲也, 爲無爲 則無不治 : 백성들로 하여금 지식과 욕망을 추구하는 마음을 내려놓게 하고, 지혜롭다 할 수 있는 지식인들로 하여금 감히 자기가 앞장서서 무언가를 하겠다고 나서지 못하게 해서 무위를 실천한다면 나라가 풍요로워지게 되고 평화를 유지하고 전란이 종식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것이 최고의 통치술이 될 수 있다.- 民之難治 以其智多; 不尙賢 使民不爭 :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그들이 꾀가 많기 때문이다. 그 나름대로 욕심을 추구하기 위해 법망을 피해가려고 애쓰기 때문에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다. 현명한 것을 숭상하지 않으면 백성으로 하여금 다투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 백성의 정치적 관심을 배제시킴으로서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쉽게 사회를 안정시킬 수 있다는 측면이 정치론으로서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다른 말로 우민화의 논리가 적용다.
인재양성책으로서 규장각의 이해Ⅰ. 머리말Ⅱ. 규장각의 설치와 목적Ⅲ. 규장각과 정조의 인재양성책Ⅳ. 맺음말Ⅰ. 머리말18세기 후반의, 정조의 시대를 조선시대의 르네상스 혹은 조선시대의 문예부흥기로 일컫는다. 이 당시에 음악, 미술 등 문예 부분에서 많은 발전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규장각을 통한 문화 사업이 문예부흥의 그 주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규장각의 수많은 자료의 대부분이 정조 시대를 정점으로 수집 간행되었고, 이렇게 수집 및 간행된 자료들이 조선의 문예 부흥의 기반이 된 것이다.규장각은 1776년 정조 원년에 설치되었다. 규장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조의 즉위 과정을 볼 필요가 있다. 정조의 즉위는 절대 순탄치 않았다.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것을 두 눈으로 바로보아야 했고,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들, 즉 노론벽파는 정조의 목숨마저 위협했다. 노론벽파는 정조가 세손시절에 대리청청을 할 때도 그를 반대했고, 이후 정조의 즉위마저도 완강히 반대했다. 이러한 사실들을 미루어 볼 때 정조는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힘겹게 왕위에 즉위했으며, 즉위할 당시 자신과 척을 지고 있는 노론벽파들을 누를 만큼 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세력의 불균형 속에서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규장각의 설치를 명령했다.정조는 왜 한시 빨리 자신의 세력을 키워 목숨을 보존해야 하는 상황에서 왜 규장각을 설치했을까? 과연 정조는 단순히 문예 부흥을 목적으로만 규장각을 설치했을까? 정조는 규장각을 통해 문예 부흥은 물론, 이곳에서 자신의 정치 세력을 키워나갔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규장각은 정조의 정치이념을 실현시키기 위해 준비하는 곳이었다. 정조는 이곳에서 함께 정치 제도에 대해 논의하고 그 제도를 지지해줄 자신의 최측근 세력들을 키워냈다. 이처럼 정조의 정책의 가장 큰 기반이 되는 것은 규장각이므로 정조를 이해하기 위하여 ‘규장각’을 빼놓는 것은 불가능하다.따라서 본고는 정조의 정치기구로서 규장각에 초점을 맞추고 그 나온 것으로, 천지와 사해가 하나의 덩어리를 이룬 상태를 일컫는다. 이는 국왕과 신하 모두 어질고 덕망을 지녔으며 현명할 때에만 달성될 수 있었다.이어서 정조는 종부시에 있던 숙종 친필의 규장각 현판을 새 건물로 옮겨 달았는데, 이는 현판이 만들어진 해(1694)가 영조가 태어난 해와 일치한다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정조의 이러한 조치는 왕실의 정통성이 숙종에서 영조를 거쳐 자신에게 계승됨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제 규장각에는 숙종의 ‘규장각’ 현판과 정조의 ‘주합루’ 현판이 걸리게 되었다.규장각 주변에 서고가 추가로 건설되었다. 먼저 규장각 서남쪽에 봉모당이 건설되었는데, 규장각에 정조의 물품이 들어가면서 규장각에 있던 선대 국왕의 물품이 봉모당으로 옮겨졌다. 또 규장각 남쪽에는 개유와와 열고관을 세워 중국본 서적을 보관했고, 서쪽에는 이안각을 세워 규장각과 봉모당에 보관된 물품들을 포쇄하는 장소로 이용했다. 규장각 서북쪽에는 조선본 서적을 보관하는 서고가 세워졌다.1772년(정조 1) 12월, 정조는 국립 출판소에 해당한 교서관을 규장각에 통합시키고 교서관을 규장각의 외각으로 만들었다. 규장각의 당상관이 교서관의 제조를, 규장각 낭청이 교서관의 교리를 겸하면서 규장각에서 서적 출판을 주관해야 한다는 서명응의 주장을 받아들여 교서관 소속 관리를 모두 규장각에서 관장하게 되었다.2. 규장각의 목적오늘날 규장각은 정조대에 설립되었는데 사실 규장각의 건립을 처음 제안한 것은 세조대였다. 바로 세조대의 학자인 양성지가 그를 제안했다. 1463년(세조 9)에 양성지는 송나라 황제들이 어제를 보관하는 건물을 별도로 두어 관리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조선 국왕의 어제를 보관할 건물로서 규장각 설치를 건의했다. 양성지는 그와 함께 규장각의 제도도 이야기했는데, 경복궁 인지당 동쪽의 별실에 국왕의 어제를 보관하고 ‘규장각’이라 이름하고 직제로는 대제학, 제학, 직제학 등의 관원을 두자고 했다. 양성지의 건의를 받아들인 세조는 인자당 옆에 별실을 짓는 것은 규장각의 경비가 과도해 재정상 곤란을 가져온다는 것.넷째. 언로가 막혀있다는 것 등이다.결국 “이 규장각은 곧 전하의 사각(私閣)이 되는 것이요 나라 안의 공공(共公)의 각(閣)이 아닌 것이며, 이 신하는 곧 전하의 사신(私臣)인 것이요 조정에 있는 인신(隣臣)이 아닌 것입니다.”라고 비판한 것이다.정조는 이택징의 상소문에 대해 규장각을 세운 목적에 대한 교서를 내려 자신의 뜻을 다소 솔직하게 표현함으로서 신하들의 이해를 구했다. 여기서 정조가 말하길, 규장각을 설치한 이유를 외면적으로는 세조와 숙종의 정책 계승한 것이라 했다. 그러나 동시에 내면적으로 본의는 따로 있다고 밝혔다.먼저, 규장각 설치의 외면적 목적은 ‘법고창신(法古創新:전통을 본받아 새 것을 창출한다)’의 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 규장각의 가장 중요한 업무가 역대 왕들의 글이나 책 등을 정리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개혁정치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었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정책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실시했다.내면적 목적으로는 세손(世孫)으로 있을 당시 척리(戚里 : 친척)와 환시(宦侍 : 내시)들에게 수많은 역모를 당하면서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는 점과 승정원(承政院)이나 홍문관(弘文館) 등 근시기관(近侍機關)들에게 정말로 믿을 만한 우수한 인재들이 없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정조는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며 힘겹게 왕위에 올랐고 그런 까닭에 그의 정치적 위치는 매우 위태로웠으며 기득권층인 노론세력은 언제든지 그를 끌어내릴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그 세력들을 견제하고 왕권에 대한 위협을 누르기 위해 정치적 역량을 총집결시켰다. 즉, 규장각 설치는 지금 현 상황을 타개하고 자신의 정치세력을 키워야 한다는 그런 그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정조는 인재 등용에 대해 척리는 절대 등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자신이 믿고 교유할 수 있는 정치세력은 오직 “조정의 사대부” 또는 “정신(廷臣)”들이라고 강조했다. 여기서 정조가 믿고 의지하려는 사대부와 정신은 그저 일반관료를 말하는 것이 아로 임명하여 임시로 일을 보도록 했다. 이는 마땅한 인물이 없을 때 경험이 많은 전임자 활용하기 위함이다.대교 아래에 잡직이 있었는데, 잡직은 2명의 각감, 2명의 사권, 4명의 검서관, 2명의 영첨, 1명의 검율, 8명의 사자관, 6명의 감서, 10명의 화원이 속해 있었다. 잡직이란 문과 합격자들이 들어가는 동반정직과 구별되는 별도의 관직체계로서 서얼이나 중인들이 들어가는 자리이며, 6에서 9품까지의 품계가 따로 있었다.이속은 잡직보다 더 낮은 사람들이다. 여기에는 10명의 서리, 2명의 서사리, 6명의 겸리, 2명의 정서조보리, 4명의 각동, 2명의 직, 2명의 대청직, 15명의 사령, 4명의 인배, 4명의 간배, 2명의 조라치, 2명의 방직, 2명의 수공, 7명의 군사, 6명의 구종이 있다.이처럼 규장각을 관리하는 직제는 크게 3가지이며, 총 110여 명이 규장각을 관리할 정도로 규장각의 규모 및 역할이 매우 컸을 것으로 보인다.Ⅲ. 규장각과 정조의 인재양성책1. 규장각 각신규장각이 정조의 정치이념을 실현시키는 역할을 함에 따라, 규장각 각신들은 정조의 최측근이자 정조의 정치를 뒷받침해주는 세력이었다. 각신은 총 6명으로 제학, 직제학, 직각, 대교로 나뉜다.제학은 규장각의 최고 수장인데, ≪규장각지≫에 따르면 2명으로 종3품에서 종1품에 이르는 관원이 겸직했다. 이렇게 제학을 2명을 둔 것은 당색이 서로 다른 사람을 등용하여 탕평의 실효를 거두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2명의 제학은 당색이 서로 다른 경우가 많았다. 최초로 제학으로 임명된 이는 이조 판서 황경원과 형조 판서 이복원이었다. 황경원은 노론 낙론계 유학자로서 학문이 높고 특히 고문에 능했으며, 정조 즉위 후 홍인한과 정후겸 등 역적을 소탕한 일을 정당화하는 ≪명의록≫ 찬집을 건의하여 정조의 신임을 얻었다. 이어 정조가 추진한 ≪송사≫ 개찬 사업에 참여해 정조 4년 ≪송사전≫의 서문을 쓰기도 했다. 이복원은 “당색을 멀리하라”는 것이 부친의 가르침이었다면서 정조에게 탕평의 인사 정책을 건직각은 1명으로서 당하관으로 종 6품에서 정3품에 이르는 품계를 가지고 있었다. 지각은 규장각일지인 ≪내각일력≫을 대교가 작성하면 이를 수정하는 일을 맡았다. 직각에는 젊고 장례가 유명한 신하가 임명되었는데 최초의 직각은 이병모가 맡았다. 직각에 임명된 이들은 초계문신으로 발탁된 이들이 대부분을 이루었다.대교는 1명으로서 참외관으로 정9품에서 정7품에 이르는 품계를 가지고 있었다. 대교는 원칙적으로 한림을 거친 사람과, ≪승정원일기≫ 작성자인 주서, 그리고 세자시강원의 설서를 거친 관원 가운데서 뽑았다. 그 이유가 대교의 주임무가 규장각 일기인 ≪내각일력≫을 작성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대교가 작성한 일력은 그날 입직하는 직각이 수정하고, 검서관이 편사하도록 했다. 최초의 대교는 누가 임명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규장각 대교는 대개 20대에서 30대 초반에 이르는 젊은 관료로서 초계문신으로 선발되어 정조의 각별한 총애와 재교육을 밭으며 성장해간 인물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정조 만년에는 직제학이나 제학의 지위에 올라 규장각을 이끌어간 인물이 다수 등장했다.규장각신의 명단을 보면 체제공이 원년에 제학직에 제수된 것 외에는 남인이나 북인에서 임명된 사람이 한 명도 없으며, 대부분이 노론과 소론의 경화사족 출신들이다. 경화사족이란 서울과 서울 근교에 거주하면서 일정한 학문적 공감대를 가지고 학계의 변화를 주도하던 지식인 그룹을 가리킨다. 이는 정조시대에 농업생산이 크게 증대하고 유통경제가 활발해지는 가운데 서울 등의 도시가 발달함에 따라 경(京)?향(鄕)이 분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학문정보 수집에 장점을 가졌던 이들 경화사족은 선진화된 청나라와 서구문명에 자극 받아 조선문화의 미비점을 보완하기 위해 새로운 학문탐구에 매진하였다. 이러한 경화사족의 경향으로 볼 때 이들 역시 정조의 개혁정책에 일정한 부분을 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규장각신의 이러한 임명은 초계문신과 대조되는 것으로, 초계문신의 경우 상당수의 남인과 북인이 진출하였다. 이를 통해서 볼 때 다.